소설리스트

라이온 킹-55화 (55/82)

55화

<케미스트리>

기본적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에게 무조건 공간을 내주지 않는 전제로 수비 전술을 펼쳤다. 이미 앞선 경기들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지상 최고의 공격진을 어떻게 막아낼지, 그에 대한 자신들의 해답을 보였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베일이나 호날두 같이 뛰어난 측면 공격수를 의식하고 그들이 공을 잡으면 강하게 압박했다. 뒷공간을 내줄 위험 부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개인 능력을 아예 원천봉쇄하는 전술을 보였다.

안첼로티 감독은 그에 대응하는 공격 전술로 얼리 크로스를 자주 시도하게 했다. 벤제마가 골문 앞으로 움직일 때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의 공간을 노린 크로스로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수비수와 골키퍼의 간격이 벌어질 때를 노리는 전술, 과연 상대 전술에 대응하는 바레이션에 능한 안첼로티다운 지략이었다.

[경기 시작 9분 만에 디에고 코스타가 교체됩니다. 코스타 대신 투입되는 아드리안 로페즈.]

코스타는 오늘 경기에서도 결국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기 교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로서는 조금 혼란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길게 라울 가르시아가 슛팅 시도합니다. 골대 위로 넘어가는 공.]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공격 전략도 레알 마드리드와 비슷했다. 골문 앞으로 자주 크로스를 보내 라모스와 바란을 긴장케 했다. 다만 레알 마드리드처럼 수비진과 골키퍼 사이의 공간을 노리는 얼리 크로스가 아니었다. 그 크로스들은 골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레알 마드리드 전형에 빈틈을 만드는 일종의 단계와도 같았다.

[김우주가 공 잡고 다시 코케에게 내줍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2번째 출전하고 있거든요. 오늘 몸상태 괜찮아 보이네요.]

[박지성 선수는 선발 출전한 2경기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쳤지만 김우주 선수는 레알 마드리드 상대로 빅이어를 들어 올릴 수 있을지.]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들이 뒷공간을 내주지 않기 위해 내려앉게 해 미드필더와 수비수들 사이의 간격을 억지로 벌려놓으려는 것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전략이었다. 우주가 좋은 위치를 찾는 공격수이기에 펼칠 수 있는 전략으로, 코스타가 빠진 이후엔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으나 긴 패스를 시도하는 그 자체만으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아드리안의 투입 이후 크로스를 자주 시도하는 공격 방식 대신 최대한 연계 위주의 공격으로 경기를 풀어갔다. 우주는 공격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중책이었다.

[코케가 높이 차올리는 패스, 김우주가 공 떨어트려 놓았죠.]

[공 잘 지켜내고 있어요.]

[김우주, 찰 듯 하는 발재간을 부리며 공 뺏기지 않습니다.]

[오른쪽에 많이 열렸는데요!]

[반대편! 공간 많은 곳에서 후안프란! 받아내지 못합니다.]

강한 압박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레알 마드리드가 변변찮은 공격 기회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양상을 보였다. 강력한 수비력에 레알 마드리드가 고전하는 모양새였다.

[디 마리아! 앞이 많이 비어있어요!]

[오! 슬라이딩 태클!]

벤제마, 베일, 호날두, 이 3명의 공격진이 풀어나가지 못할 때 디 마리아가 공격을 이끌었다. 디 마리아는 중앙 미드필더이면서 좌측으로 크게 벌려주는 윙 플레이도 자주 시도했고, 역습 상황에선 빠른 드리블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위협이 되었다. 그의 역습을 막을 때 라울 가르시아가 고의적인 파울로 경고까지 받아야 했다.

[호날두!]

[네!]

[골키퍼 정면입니다!]

호날두는 프리킥에서도 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특유의 프리킥을 시도하려 해도 쿠르트와의 정면으로 가는 슛 정도만이 나왔다.

[오른쪽에서 후안프란의 크로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강한 수비를 펼치면서도 공격 상황에선 주저하지 않았다. 후안프란은 적극적인 공격 가담으로 기회를 만들었다.

[머리로 걷어내는 바란!]

[있어요오!!!]

바란이 머리로 클리어링 한 공을 박스 밖에서 기다리던 가비가 바로 중거리 슛으로 이어갔다. 가비의 발엔 공이 빗맞았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가비가 강하게 때리려던 공이 빗맞고 우주에게로 빠르게 튀어갔다. 우주는 발을 들어올려 라모스를 등지고 공을 받아냈다. 공이 가슴 높이로 떠올랐고, 우주는 몸을 뒤로 눕혔다.

[바이시클!!!]

[어어어!!!]

우주는 공이 튀어오르자마자 바이시클 킥을 시도했다. 급하지 않고 공의 흐름대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며 완벽한 바이시클 킥을 만들어 내며 라모스 어깨 위를 지나는 슛을 보냈다.

[쳐내는 이케르 카시야스 골키퍼!]

[이걸 막아내나요오! 아!]

[엄청난 슛이었습니다! 김우주!]

[나이가 들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는데...!]

사실 슛을 시도하면서도 들어갈까, 싶었던 공이었다. 공이 카시야스의 손에 막히며 골대 옆으로 벗어나자 동료 선수들이 더 아쉬워했다. 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선수들에게 지금 중요한 건 침착함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운 좋게 얻어낸 기회보다는 준비한 전략으로 상대를 무너뜨려야 했다.

[집중력이 중요한 두 팀의 경기입니다.]

코너킥 키커로 나선 가비가 골문 앞으로 공을 띄웠다. 선수들이 한데 엉켰다.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가 먼저 공을 머리에 갖다 대며 박스 밖으로 걷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박스 밖에서 기다리던 후안프란이 다시 박스 안으로 헤더 패스를 우겨넣었다.

[고딘 밀어넣는데요!!!]

[어어어!!!]

카시야스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달려나왔고, 고딘은 케디라와의 경합에서 우위를 점하며 백헤더 슛을 시도했다. 공이 카시야스 키를 넘긴 뒤에 바운드되며 골라인 안으로 들어갔다. 카시야스가 몸을 던지며 공을 쳐냈지만 이미 골라인을 넘은 뒤였다.

[들어갔어요오오오오!!!]

카시야스의 판단 미스였다. 자리만 지켰더라도 막아낼 수 있던 공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뼈아픈 실점을 허용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은 극도의 흥분감을 간직하고 남은 전반전 시간에 임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일단은 먼저 빅이어에 다가섭니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승리를 위해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시메오네 감독은 빅이어를 앞에 두고 패배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겪는 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우주는 2005년에 지옥 같은 경기를 경험했다. 이제 다시는 그러한 경기는 없다. 그런 작정으로 경기에 뛰었다.

전반전이 끝났을 땐 거친 숨을 내쉬며 드레싱룸으로 가야했다. 진정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침착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드레싱룸으로 가서 마주한 시메오네 감독의 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메오네 감독은 다행스럽게도 우주에게 별다른 추가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경기력에 대해서 만족함과 동시에 후반에도 움직임을 유지하라는 의미였다.

열정이 없는 팀은 패배하기 마련.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열정으로 가득찬 팀이었다. 이제껏 속한 팀들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서로를 믿고, 희생하고자 하는 정신이 강했다.

[후반전, 시작합니다!]

1골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수비진이었다. 수비수들은 매순간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을 상대했다. 쿠르트와도 날아오는 공을 정성스럽게 대했다. 이 경기에서만큼은 11년의 관록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쿠르트와가 더 압도적인 안정감으로 레알 마드리드 공격수들을 번번이 좌절시켰다.

[호날두의 프리킥! 쿠르트와의 손에 걸립니다!]

레알 마드리드 공격진이 아무리 골문을 두드려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수비진이 실점을 허용치 않았다. 대단한 수비력이었다. 이번 시즌을 통틀어 놓고 봐도 최고 수준의 집중력을 갖춘 수비진이었다.

[아, 케디라를 빼는 군요. 이스코와 마르셀로가 동시에 투입됩니다. 코엔트랑과 케디라를 교체하고 이스코와 마르셀로를 한 번에 투입하는 안첼로티 감독, 승부수를 띄웁니다.]

안첼로티 감독은 공격에 다양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선수들을 투입하며 동점골을 노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도 이 상황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코케, 급하지 않죠.]

[네. 공을 뺏기지 않는 걸 우선 목표로 하고 있어요.]

점유율은 압도적으로 레알 마드리드가 앞섰다. 그러나 그게 경기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굳이 점유율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에 그런 것이었다. 코케와 아드리안은 공격진에서 공을 잡으면 무리한 돌파 시도보다는 연계를 통해 공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이스코, 오른쪽으로 패스, 바로 크로스! 이스코!!!!!]

[잡았어요!!!]

이스코는 활발한 움직임으로 득점을 노렸다. 카르바할이 낮게 올려준 크로스를 발 바깥쪽으로 잡아내는 감각적 볼 터치로 득점 찬스를 맞이하기도 했다.

[고딘이 막아냅니다!!!]

예술적인 볼 터치가 나오자마자 기회를 일축시킨 선수는 득점을 기록한 고딘이었다. 그는 오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마르셀로, 치고 들어갑니다. 측면에서 먼쪽으로 크로스! 가운데서 헤딩! 고딘이 걷어냅니다아!]

경기 종료 시간이 다가올 무렵에 선수들은 몸을 내던졌다. 몸이 부서져도 득점이 우선이란 마음가짐이었다. 절박한 그들의 몸짓에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얼마나 우승에 목말랐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경기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이겨야 했다.

[가비, 측면에서 공 잡고 있습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은 경기 종료 5분만을 남겨두고 공격을 시도할 때면 4명만이 상대 진영에서 움직였다. 나머지는 다 수비에 전념했다.

[아드리안... 아!]

[측면 열렸어요!]

그 때 적은 숫자의 선수들만으로도 기회가 만들어졌다. 급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아드리안과 가비의 순간적인 연계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아드리안을 통과시켰다. 페널티 박스 측면에서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들을 모두 뒤로하고 공을 받아낸 아드리안은 골문 앞을 살폈다.

우주가 있었다. 우주는 자유롭게 놓인 상태였다. 아드리안은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우주에게 공을 밀어주었다.

[김우주우우우!!!]

카시야스 앞을 지나친 공은 우주의 앞으로 굴러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주는 모든 걸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이곳의 동료 선수들이 고마웠다.

이제 그 악몽과도 같았던 2005년의 일을 잊을 때가 왔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악몽은 두 번 다시 없다. 우주는 자신의 다짐을 표출하듯 공을 누구도 지키지 못하는 골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골망이 흔들렸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은 열광했다.

우주는 손에 세상을 거머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 총에 맞아도 모를 정도로 극도로 많은 아드레날린이 몸속에 분비되었다. 축구선수로, 은퇴 직전에 이렇게 극적인 영광을 맞이하는 선수가 얼마나 될까?

[고오오올!!!]

[골입니다아아아!!!]

[김우주에요오오!!!]

[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으으!!! 2대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은 거의 울면서 소리쳤다. 그들 모두 막상 영광이 다가오자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이 경기에 앞서고 있었다. 모든 법칙도 통하지 않는 이 단판 승부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승자가 되어가는 걸음을 내딛었다.

안첼로티 감독은 여전히 악몽에 시달려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역사상 처음으로 빅이어를 올리는 순간을 만끽할 차례였다.

[경기 종료됩니다아아!!!]

[아아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우승!!]

[우승할 자격이 있어요오!!!]

경기가 끝나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의 함성으로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여러 선수들이 뒤엉키며 눈물어린 기쁨에 빠져들었다. 시메오네 감독도 아이처럼 좋아하며 활짝 웃었다.

우주도 이렇게 멋진 순간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로선수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시즌은 더블이었다.우주는 동료 선수들의 존경을 등에 업고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그가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고 하면 모두 거리낌 없이 트로피를 건넸다. 축구선수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 지금이었다. 이제야 맞는 최고의 영광은, 미치도록 기뻤다.

메달과 트로피를 수여받고 드레싱룸으로 돌아갔을 때 완전히 난잡한 상황이 벌어졌다. 누가 누군지 분간도 못하게 샴페인이 터졌고, 샴페인 거품을 흠뻑 뒤집어 써야 했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밀치고 노래를 불렀다. 드레싱룸은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

이제야 몇 년 전 잃어버렸던 영광을 찾았다. 우주는 그 영광이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로 기쁜 것이란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꿈의 무대,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빅이어가 저기 한 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사진 좀 찍어줘요.”

트로피를 들고 구단 전속 사진기자에게 가서 사진을 요청했다. 사진을 잡으려 어색하게 메달과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뒤에서 다른 동료들이 다시 주위로 몰려왔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팀은 우주를 중심으로 모였다. 우주는 사진 촬영을 마치고 동료 선수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포옹을 나눴다. 이 시즌에 어느 시즌 못지않게 많은 득점을 할 수 있던 건, 이 선수들이 우주를 너무도 존중해줬기 때문이었다. 그 감사의 표시였다.

동료 선수들도 우주에게 감사를 표했다. 경기 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기뻤다. 이 우승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아직은 여기에 남아도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우주는 떠나려고 이미 마음을 먹었다. 다른 동료 선수들이 모르는 사이에 시끌벅적한 드레싱룸에서 나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젠 이 선수들만의 시간이었다. 우주는 여전히 그 모임에 낄 수 있었지만, 굳이 끼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역할이 끝났다.

복도에는 시메오네 감독이 있었다. 둘은 눈을 맞추자마자 한 마음으로 서로를 포옹했다.

“그간 수고했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당신 같은 좋은 감독을 만나서 정말 행운이었다고, 우주는 그렇게 말했다. 시메오네 감독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월드컵도 행운을 빌겠네.”

우주는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축구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주위의 모두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세계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누구나 부러워 할만한 그런 삶이었다.

다만 지금 눈물이 나오는 건 다 끝난 지금에서야 영광을 맞이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빨리 이런 영광과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느꼈던 감정들이 모두 스쳐지나갔다. 우주는 눈물을 쏟아냈다. 예전처럼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

한국에 돌아와서 우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명보 감독과 긴 이야기 끝에 대표팀 복귀를 결심했으며, 브라질 월드컵을 끝으로 축구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우주는 쉬는 동안 아무 생각도 않고 그저 은솔이와 노는 것에만 전념했다. 노을과 은솔은 브라질에 응원하러 올 준비까지 미리 해놓았다. 가족이 찾아와 준다는 것은 큰 힘이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 최초로 가족과의 만남이 허락되었다. 우주의 요청 덕분이었다.

“은솔찡, 아빠 이제 축구하러 가요옹.”

“웅.”

이제 대표팀 명단이 발표되었고, 우주는 오랜만에 파주로 가야했다. 아직도 현역인 채였다.

이 전날은 꼭 아이처럼 설렘을 간직한 채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우주는 자신의 정장 차림을 정리하고 여행 가방을 끌고 기자들 앞을 지나갔다.

“인터뷰 없어요.”

보통 기자들이 모이면 기자들에게 출사표를 던지기 마련인데, 우주는 인터뷰를 받지 않고 관계자의 경호를 받고 생활관까지 극진히 모셔졌다.

방 선택도 자유였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특혜를 줘서 당황스러울 지경이랄까. 아니, 생각해보니 특혜라기보다는, 엄연히 선수단 중 가장 연장자에 대한 예우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별 수 있나. 우주는 방 배정을 받고 방에 짐을 정리한 다음 방을 나섰다.

“엇.”

워낙 일찍 도착한 탓에 다음 스케쥴까지 할 게 없어서 휴게실로 가려니까 복도에서 신현성과 마주쳤다. 신현성이라 하면 전북 유스 출신의 수비수로, 도르트문트에서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94년생 선수였다. 이른바 영계라고 할까.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신현성이고요! 21살의 파릇파릇한 유망주입니다!”

보통 자신을 소개할 때 파릇파릇 하다거나 유망주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게 정상 아닌가. 요즘 애들은 원래 다 이런가? 우주는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기분 좋게 웃으며 신현성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현성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어깨에 메고 있는 백팩에서 주섬주섬 사인지를 꺼냈다.

얘도 설마 한노을 사인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그 의심이 미안할 정도로 해맑게 웃으면서 말한다.

“사인 해주세요!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어요!”

“으, 응.”

기세가 참 좋은 아이로구나. 우주는 현성이 은후와는 확실히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사인을 해주었다. 현성은 사인을 받고 기분 좋게 자신의 방으로 갔다.

허허, 참으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구나. 우주는 연륜이 느껴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의 TV로 스포츠 채널을 보자니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이런 EPL 공화국 같으니라고.

[강소중과 최현 사이에 충돌이 있던 것 같습니다. 동료 선수들이 패기 넘치는 두 선수를 막고 있습니다.]

[아, 지금 같은 한국 국적에 어린 선수들끼리 이러는 건 전혀 좋지 않아요.]

[강소중 선수가 최현 선수보다 1살 어린데요.]

[네. 나이 차이가 있지만 강소중 선수가 최현 선수보다 훨씬 먼저 프로에 데뷔했죠. 강소중은 데뷔 시즌에 맨체스터 시티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최현 선수보다는 더 선배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최현 선수는 인정하기 싫겠죠.]

[그래도 이런 싸움은 일어나면 안 돼죠.]

이번 시즌 막판에 한창 리그 선두권 다툼이 치열할 때 그 경기인가 보다. 화면에 보이는 두 선수는 지들끼리 뭐라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우주에겐 그게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음, 어떤 애들일지 기대된다. 우주는 장난감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어서 그 아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수정아,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정장은 진짜 나랑 안 맞아. 얼른 벗고 싶어.”

뭔 야리꾸리한 말이 들려와서 고개를 돌아보니 어, 지금 TV에서 보이는 놈이랑 똑같은 놈이 통화를 하면서 휴게실로 왔다. 정신머리 없이 통화에만 집중하는 자랑스러운 위인은 최현이었다. 현은 우주가 있는 것도 모르고 거침없이 휴게실에 들어왔다. 2002년만 해도 선배들한테 허락맡고 써야 하던 휴게실인데. 현은 TV에서는 라이어버드 엠블럼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지금은 라이어버드의 문양이 새겨진 정장을 입고 있었다. 리버풀 클럽에서 주는 정장인가 보다.

소파에 누워 있던 우주는 벌떡 일어나 최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 정장 간지. 우주는 처음으로 현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축구선수가 아니라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상판이었다.

현은 통화를 하면서 피곤한 기색이었다. 왁스로 정성스레 띄워놓았던 앞머리가 가닥가닥 이마로 내려와 있는데 머리를 정리하기는 커녕 오히려 헝크러뜨렸다.

“그렇다니까... 나 지금 휴게실... 괜찮아. 아무도 없...”

휴게실을 둘러보던 현이 우주와 눈을 마주치고 딱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주는 손을 들어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Hi.”

잉글랜드에 머무는 친구니까 인사는 영국식으로. 우주가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네자 현이 폰을 바닥으로 떨궜다. 바닥에 떨어진 폰은 트랜스포머 안 부럽게 3단 분리를 시전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물건 소중한지 모른다니까, 쯧쯧. 혀를 차면서 우주가 바닥에 떨어진 폰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 어, 어...”

그래도 나름 첫만남인데, 인사는 좀 받아주지. 우주가 말없이 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나 현은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숨은 가쁘게 쉬면서도.

“혹시 내 뒤에 주온이라도?”

우주가 묻자 현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재빨리 폰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복도로 달려 나갔다. 지금 내가 무시라도 당한 건가? 어이가 없어서 스팀이 확 올라오려는 찰나에 현이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손에는 사인지와 펜을 가지고.

“사, 사, 사...!”

“Sign?”

“네, 네!”

현이 건네는 사인지와 펜이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그게 왜 그런가 했더니 사인지와 펜을 건네는 현의 손이 떨리고 있던 것이었다.

우주는 현의 뒤로 보이는 TV에 잠깐 시선을 옮겼다. 맨체스터 시티 수비진을 유린하는 최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여기 있는 최현은 어디 한 구석이 부족한가 보다.

============================ 작품 후기 ============================

F5라고 하면 꼭 브록 레스너 피니쉬 기술 같아서 멋이 안산다능 ㅇㅅㅇF4라 해야 있어 보인다능 ㅇㅅㅇ후, 우주의 룸메이트는 누가 좋을까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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