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문파, 풍각단-- >
라일라와 길고 뜨거운 밤을 질펀하게 보낸 태현은 라일라의 입에서 복종의 맹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만족하고 마지막 남은 풍각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풍각단의 입구는 산권파와는 다르게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는 붉은빛이 감도는 기와로 만든 지붕이 얹혀져있었으며, 기둥으로 세워져있는 나무도 매끈매끈 윤기가 나는것이 고급스러워보였다.
오히려 현재 제랄 영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화도맹보다도 화려한 듯한 풍각단의 입구였다.
"여긴 뭐가 이렇게 화려하지...?"
"거기 자네! 뭘 그리 멀뚱하게 서있나? 곧 아가씨께서 오시니까
얼른 비키게!"
다리 부분에 각갑(脚鉀)을 두른 중년의 남성이 입구 앞에 멀뚱하게 서있는 태현이 거슬렸는지 태현에게 비키라고 외치면서 휘휘 손짓했다.
"아가씨?"
"? 자네 외부인인가? 풍각단의 아가씨를 몰라?"
"예에.. 전 지금 수기대 쪽에서 오는 길이라서요. 풍각다느이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렇군. 일단 거기서 비키게. 곧 아가씨가 오시니까 그 뒤에 이야기 하자고."
그 중년 남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슬쩍 피한 태현은
그 아가씨가 오기 전까지의 시간동안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누구인가요?"
"아아. 아연(娥燕) 아가씨라네. 현 문주이신 호패(虎覇)님이 그 재능을 높게 사서 데려온 날에 자신의 양녀라고 생각하라고 풍각단 내부에 선언하셨다네. 그래서 우리 풍각단 단원들은 그 후로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다네."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그 아연이라는 아가씨의 재능이 그렇게 대단하답니까?"
"당연하지. 그 호패님이 보는 순간 자신의 뒤를 이을 자는 이 아이밖에 없다!
라고 단언할 정도였으니까."
"흐음.."
이런저런 잡담을 잠시 나누고 있자 저 멀리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아연 아가씨 납시오-------------!!"
"앗. 아가씨가 오시는군. 자자, 당신도 아가씨가 지나가는 동안 머리를 숙이게."
들것에 앉은 채 도도한 표정의 녹색 단발머리의 약간 소녀 티를 벗지 못한듯한 어린 느낌이 나는 소녀. 아연이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도도함 속에 숨겨져있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슬쩍 스쳐 지나갔고, 그 눈빛은 태현을 알고 잇는 듯한 눈빛이었다.
"잠깐."
마치 은쟁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가는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고 가마를 짊어지고 이동하던 앞 뒤로 두 일꾼들이 발걸음이 뚝 멈췄다.
"당신. 혹시 무랑?"
"알아봐주셔서 영광입니다. 아연 아가씨."
"푸훗. 옆에 임풍(林風) 아저씨께 제 이야기를 들으셨나보군요? 절 알아보시다니."
"하하. 제가 제랄 영지 내에서도 실력과 미모를 모두 갖춘 팔방미인.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는 명성이 자자한 아연 아가씨를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쿠쿡. 빈말이라도 듣기는 좋네요. 그나저나 무랑씨가 이토록 아첨에 능하신 분인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아연이 가마 위에서 손짓하자 가마를 들고 있던 두 일꾼이 가마를 조심스레 내려놓았고 극진하게 모보살핌을 받고 있는 아가씨라고 보기엔 어려울정도로 호쾌하게 가마로부터 내려왔다."
반가워요. 무랑. 본녀는 풍각단의 소문주 아연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것을 보아하니 화영과의 결투를 관람하셨나보군요.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지만 무랑이라고 합니다."
아연이 먼저 자신의 곱고 아름다운 손을 먼저 내밀며 자신을 밝히자 태현도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그나저나 풍각단에는 어쩐 일이시죠?"
"아아.. 곧 영주 결정전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풍각단은 어쩌고 있는가 궁금해서 인사차 찾아뵈었습니다."
"분명 무랑씨는 산권파의 소속이셨죠? 예린 언니는 잘 계시는가요? 산권파의 소식은 도통 들려오질 않아서.."
말은 좋게 했지만 결국 풍각단의 전력을 염탐하러 왔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약간 표정이 꿈틀한 아연이었지만 과연 소문주로써 오래 생활해서 그런건지 거의 내색을 드러내지 않은채 평정을 가장했다.
살짝 도발도 겸해서 내뱉었던 말이었지만 의외로 아연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자 태현은 곧바로 멋쩍은 듯 헛웃음을 지으며 태연스럽게 아연에게 대답했다.
"예린 문주님은 영주 결정전을 위해 피나는 수련을 하고 계십니다. 아연 아가씨에게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후후. 자지내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그나저나.. 문주가 되셨군요?"
"예. 예형 전 문주님을 이기고 당당히 문주 자리를 획득하셨습니다."
"예? 예형님을 이기셨다구요?"
자신이 알고 있는 효예린의 실력으로는 예형을 이길 수 없었을 터인데. 예형을 이겼다는 말에 깜짝 놀란 아연은 약간 초조함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그렇.. 군요. 아. 이런데서 서서 이야기 하는것보다는 들어가서 차라도 나누면서 이야기하시죠."
"그래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아연이 빙긋 미소지으면서 들어갈 것을 권하자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태현은 넙죽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선 아연의 가마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손님용으로 만들어진 듯한 고풍스러운 누각에 들어간 아연과 태현은 아연 전용의 시녀인 듯한 여인이 다가와 쪼르륵 따라주는 차를 받아마시면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아직까지 생긋생긋 웃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듯이 태현이 뻔뻔하게 되받아치자 아연은 끝까지 뻔뻔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태현이 머리가 아픈듯이 아름다운 이마를 찌푸리며 감쌌다.
"당신. 산권파 소속이 아니잖아요?"
차를 홀짝홀짝 마시던 태현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그제서야 아연은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다는 느낌에 살며시 미소지었고,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모금 홀짝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건진 모르겠지만. 전 효예린 문주님을 따르는 산권파의 단원일 뿐입니다만."
"당신의 화도맹에 들어가는 것을 본 단원이 있습니다."
"...."
정곡을 찔린 태현이 침묵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아연은 태현에게 한 번 더 찔러넣었다.
"그리고, 아까 임풍 아저씨와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서 보고받았습니다. 수기대 쪽에서 오셨다구요?"
"...."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무심코 내뱉었지.. 그 임풍이라는 남자도 보통은 아니라는거군.'
"그러므로 당신은 산권파 뿐만 아니라, 화도맹과 수기대. 이 세 문파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라고 파악해도 될런지요?"
아연이 직설적으로 묻자 태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는것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아연 또한 천재라고 칭송받던 소녀. 지금까지는 그 천재성이 무(武)쪽으로만 드러냈지만 아연은 머리도 굉장히 총명한
소녀였다.
그렇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태현을 상대로도 이렇게까지 밀리지 않고 기싸움을 벌일수 있었던 것이다.
"제법.. 눈치가 빠르시군요?"
"눈치...? 아니요. 말씀은 제대로 하셔야지요. 정보입니다. 누군가의 눈과 귀. 그리고 그러한 목격담. 떠도는 낭설. 그런것들은 모두 정보가 될 수 있지요."
"그리고 풍각단은 그런 정보를 중요시 여겨 그러한 정보를 취합하는 별개의 부대를 육성해내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
"그리고 아까 그 남자, 임풍이라는 자도 그 부대의 일원이구요."
이번에는 태현이 정곡을 찔러 들어오자 아연이 무심코 입을 닫았지만, 자신이 이렇게까지 떠벌린 이상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연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과연. 아주 바보는 아니신가보군요. 처음에는 무신경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의 정보를 풀풀 흘리는 당신을 바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자신을 바보라고 칭하는 아연의 말에 약간 발끈했던 태현이었지만 아연이 몸을 일으켜 세우곤 난간으로 천천히 걸어가 입을 떼었다.
"이제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정보의 시대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무엇을 선호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무술을 갈고 닦았는지."
아연은 들고있던 찻잔을 마저 들이킨 후 난간에 찻잔을 탁 소리와 함께 내려놓고선, 다시 뒤로 돌아 태현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걸터앉고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미 저는 효예린 언니가 예형 문주님을 꺾고 새로이 문주가 되었다는 사실도, 화도맹에서는 이미 이화 언니에게 평화적으로 문주를 위임했다는 것도. 수기대는 애초부터 본질은 루시에 교단. 그리고 그 교주인 혜연 언니였기 때문에 굳이 문주 자리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바람 한줄기가 불어와 아연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간다.
자신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릿결을 다시 귀 뒤로 쓸어넘긴 후 아연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저는 그 셋의 실력을 모두 실시간에 가깝게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번에야말로 풍각단에서, ...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바로 저, 아연이 제랄 영지의 영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었구요.
"아연은 다시 난간에서 일어나 태현쪽으로 걸어와 손을 들어 태현을 손가락질했다."
당신. 당신만 없었떠라면 말이죠."
"호오. 나를 그렇게 높게 쳐주고 있었다니 의오인걸."
"갑작스럽게 나타난 당신이라는 이물질 덕분에 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흥이 깨졌으니까, 책임 지시죠?"
"예. 알겠습니다. 아연 아가씨."
"....?"
갑작스럽게 사람이 바뀐 듯한 대답을 하자 당황한 아연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태현을 쳐다보자 태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황급하게 무마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만족하겠습니까?"
"간단해요."
아연이 씨익 미소지으면서 손가락을 튕기자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모를 한 남자가 태현의 뒤에서부터 몸을 단단히 결박하고선 목덜미에 흉기를 들이밀고 있었다.
"... 상당히 과격하시군요."
"그 책임은, 당신의 목숨으로 받겠습니다."
아연의 말이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이 울려퍼졌다.
============================ 작품 후기 ============================라일라와의 떡신은 그냥.. 오늘 현자타임인지 패스요새 유행하던
"너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를 넣어보았습니다만 알아보셨을 분이 몇분이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모두가 연참을 선택해주셨군요.
그렇다면 연참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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