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환자가 없다면 찾아가면 된다
5화. 환자가 없다면 찾아가면 된다
진료를 마친 그날 저녁.
서 선생님이 퇴근한 한의원에서 허준은 홀로 남아 탕약을 달이고 있었다.
횟집 청년이 쌍화탕을 사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횟집 사장님께서 찾아와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면서 쌍화탕 5박스를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진득하게 풍기는 쌍화의 향기 속에서 허준이 오늘 다녀간 환자들을 떠올렸다.
총 18명. 다른 한의원들이 이벤트를 했음에도 찾아온 환자의 숫자.
지난주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양호하다고 할만한 성적표였다.
하지만,
<침을 놓아라. 1>
* 진행도 : 18 / 100
* 보상 : [침술 Lv.2]
* 남은시간 : 5일
문제는 이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5일.
단순계산으로도 매일같이 16명씩 진료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오늘이 평균적으로 환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18명이라면, 100명에게 침을 놓기에는 힘들어 보이는 것이 허준의 판단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허준이 우두커니 앉아 탕약기를 바라보는데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정보> 세력주 포착! 상승의 시작! 내일 바로···
수신거부 080-XXXX-XXXX
에이씨, 어떻게 차단을 해도 해도 오냐.
환자나 이렇게 왔으면 좋겠네.
그런 생각과 함께 허준이 수신차단을 누르려는데,
카페에 새 글이 등록되었다는 알람 메시지가 올라왔다.
[카페에 새 글이 올라왔습니다.]
제목 : 경기도 복지회관 의료봉사 모집
···
‘어? 잠깐, 생각해보니 꼭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만 환자가 아니잖아? 내가 찾아가면 되지!’
허준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게시판으로 들어가 게시되어 있는 글들을 차례차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의료봉사 인원 모집.]
일시 : 8월 19일 토요일 오후 2시 – 7시
장소 : 서울역 노숙자 쉼터
서울역 노숙자분들을 위해, 한의사 협회에서는 각 단체와 협업하여 의료봉사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의료봉사에 참여할 한의사 선생님들께서는 댓글로 연락 가능한 번호를 남겨주시거나, 본문 아래에 적혀있는 번호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거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개원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두어 번은 꾸준히 의료봉사에 참여하던 허준이었다.
다만, 개원 이후에는 연애하랴, 출근하랴,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어졌었는데, 그때 설정해둔 알람이 이렇게 도움이 된 것이었다.
의료봉사에 간다면 언제나 수많은 환자가 의사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
여기라면 하루에 수십 명은 거뜬할 것이 분명했다.
허준은 눈을 빛내며 게시글 아래에다가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댓글과 연락처를 남겼다.
* * *
토요일 오후 1시 정각.
진료를 끝낸 허준이 가운을 벗고, 가방을 챙겼다.
칼 같은 퇴근을 위해 진료 마감전에 미리미리 청소기를 돌리던 서정숙은 원장실 문을 닫고 나오는 허준을 보며 웬일인가 싶어 물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원장이 주로 늦게 퇴근했기 때문이었다.
“원장님.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요.”
“아~ 데이트?”
서 선생님이 엉큼하게 웃으면서 흥밋거리라도 찾았는지 캐물어 왔다.
그 물음에 허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래요? 이상하네. 지금 딱 내 촉이 여자친구랑 데이트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럼 어디 가시는데요?”
“봉사 활동하러요.”
“봉사활동이요?”
“네. 그러니 마무리 좀 부탁드릴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허준이 빠르게 인사하면서 그대로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정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러 한의원에서 일해봤지만, 주말에 봉사활동을 간다는 한의사를 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리라.
‘성격은 참 좋은데..’
허준은 무언가 중얼거리는 서 선생님을 뒤로하고 한의원을 나섰다.
그렇게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허준은 창가에 서서 창문 밖의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는 분명 한강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침을 놓아라. 1>
* 진행도 : 61 / 100
* 보상 : [침술 Lv. 2]
* 남은시간 : 5시간 30분
‘39명.’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오늘 침을 놔야 할 환자의 숫자였다.
하필 수요일에 비가 오는 바람에 예상보다 더 진료를 보지 못한 상황.
덕분에 허준은 지금, 시간과의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5시간 30분.
대부분 의료봉사는 침과 보험처리가 되는 한방약으로 간단한 진료가 이뤄지는데, 이를 빠르게 잡아도 상담에 5분, 치료에 5분, 합쳐서 10분가량의 시간이 소요된다.
의료봉사가 예정된 시각은 2시부터 저녁 7시까지 총 5시간.
빠듯하게 1시간에 6명의 환자를 본다고 쳐도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란 것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
- 이번 역은 서울역, 지하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4호선, 경의선, 공항철도로 갈아타실 고객님들과···
지하철에서는 어느새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일단 가서 어떻게든 해봐야겠군.
허준은 지하철에서 내려 서울역 광장으로 올라와 이어진 대로변을 따라 쭈욱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곧 노숙자들의 쉼터라 불리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 의료봉사가 진행되는 곳이었다.
마주치는 몇몇 노숙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쉼터 앞에 도착한 허준의 앞에는, 새하얀 천막들 몇 개와 거기에 적힌 여러 단체의 이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봉사자들이 의료봉사를 진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기가 진료소구나.’
허준이 쉼터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허준 선배?”
갑작스럽게 불린 이름에 허준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오랜만에 보는 한의대 후배 김진수가 서 있었다.
“맞네? 와~ 진짜 오랜만이야.”
“어? 어. 그래.”
김진수는 허준보다 한 학번 아래의 후배로, 학교에서 꽤 유명한 녀석이었다.
흔히 그런 말이 있잖은가.
의사 집안에 의사 나고, 법조계 집안에 판, 검사 난다고.
김진수가 바로 딱 거기에 해당하는 녀석이었다. 2대째 한의사. 한의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흔히 한의수저라 불리는 놈.
그런 그가 유명해진 사건이 있었는데,
“돈 안 받고 하는 진료를 우리가 왜 해줘야 해? 우리가 이러려고 공부했냐고.”
한의대생 당시 의료봉사를 마치고 뒤풀이에서 했던 말 때문이었다.
다음 날, 술에 취해서 그랬다며 해명 아닌 해명으로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아버린 터였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에서는 졸업 이후에 강남에다가 꽤 큰 한의원을 차렸다던데.
김진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봉사활동을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을 텐데.
“이게 몇 년 만이야? 여기서 만나다니!”
“그러게.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선배, 개원했다는 소식까지는 내가 들었거든. 요즘 어때? 딱 보니까, 그렇게 잘되지는 않나 보네.”
김진수가 팔짱을 낀 채로 허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허준의 모습은 근 며칠간 쌍화탕 주문이 몇 개 들어와서 매일같이 야근한 상태.
게다가 평소 잘 꾸미는 편이 아닌 허준이었기에, 꼬질꼬질 이란 단어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뭐, 그냥.. 열심히 하고 있어. 그보다 넌 여기 웬일이야? 봉사활동 같은 거 싫어하지 않았나?”
“뭐야, 선배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였어?”
“뭘?”
“잘 봐. 저기 카메라 보이지? 지금 서울역 노숙자들을 상대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중이거든. 그 장면 중에 의료봉사하는 모습이 찍히면 어떻게 되겠어?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마케팅이지 마케팅.”
허준은 김진수의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옛말에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내가 알던 김진수 맞네.’
그보다 방송촬영이라니.
예상치도 못한 김진수의 대답에 허준은 잠시 기대감을 품었다.
어쩌면 김진수의 말처럼 운 좋게 TV에 나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뿐, 허준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모자란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허준의 눈이 팔자 좋은 소리를 해대는 김진수를 바라봤다.
모자라는 9명의 진료를 보기 위해 시간을 버는 방법. 그것이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진수야. 너 방송 타고 싶다고 했지?”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온 건데.”
“그럼 이렇게 하자. 상담이 필요한 환자를 니가 맡아. 단순 침 치료는 내가 맡을게.”
* * *
김진수는 허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 들였다.
가뜩이나 의료봉사를 하기 싫어하는 녀석이었기에, 그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하여, 허준과 김진수는 쉼터 직원에게 부탁하여 단순 통증과 간단한 침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허준의 간이진료소에 줄 세우고, 여러 상담이 필요한 환자들을 김진수에게 보냈다.
그 덕분에, 허준은 3시간이 조금 넘은 5시 17분. 총 24명의 환자를 볼 수 있었다.
‘힘들긴 힘드네.’
쉼 없이 침을 놓는 허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다음 분! 이리로 오세요.”
진료소 밖에 서 있는 봉사자의 안내에 한 노숙자가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꽤 오랜 시간 씻지 않았는지, 머리는 산발에 쓰고 있는 마스크를 뚫고 악취가 풍겨왔다.
허준을 돕던 자원봉사자의 얼굴이 마스크 위로 찡그려졌다.
그 때문인지 노숙자도 허준과 자원봉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허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상태를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등이 배겨서..”
“이쪽으로 오셔서 옷을 걷어 주시겠어요?”
노숙자가 옷을 걷어 등을 보였다.
눈앞에는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않아서 앙상해진 등이 나타났다.
등의 근육을 편안하게 해줄 혈자리에 침을 놓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편안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약을 처방한다.
이것이 의료봉사자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감,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런 간단한 진료에도 감사하다며 환자가 진료소를 나가면, 그다음 환자가 들어온다.
그렇게 한명 한명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6시 40분이 되어갔고,
허준의 퀘스트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침을 놓아라. 1>
* 진행도 : 97 / 100
* 보상 : [침술 Lv.2]
* 남은시간 : 27분
그것을 확인한 허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겨우겨우 시간 내에 완수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때,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도 또 다른 진료가 잡혀있으니 그때 오시길 바랍니다.”
천막 밖에서 노숙자들을 돌려보내려고 하는 쉼터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직 27분이나 남았는데? 3명의 환자를 더 봐야 하는데?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소 밖으로 나가자,
쉼터 직원들이 환자들을 되돌려 보내며, 봉사활동에 참여한 봉사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 의료봉사에 참여해 주신 한의사 선생님들, 그리고 봉사자 여러분들. 오늘 진료 봐주시느라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노숙자들도 익숙하다는 듯이, 불평불만 없이 그대로 떠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패야!’
다급한 나머지, 머릿속에서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소리쳤다.
“아직 떠나지 마십시오! 진료를 더 보고 싶으신 분은 이리로 오십시오!”
허준의 외침에, 쉼터 직원들을 비롯하여 봉사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떠나려던 노숙자들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잠시간의 정적.
그 정적을 깬 것은,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한의사의 말이었다.
“허허, 요즘 젊은 친구 중에도 저런 친구가 있다니, 이거 체면이 있지 나도 그럼 참여하겠네.”
“그럼 저도!”
“저도 남겠습니다!”
허준은 갑작스럽게 일이 커지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퀘스트에 실패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럼, 진료를 조금 더 보실 선생님들께서는 진료를 봐주시고, 가실 분들은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쉼터를 관리하는 센터장이 나와서 지금의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김진수가 두 주먹을 쥔 채, 허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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