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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11화 (12/230)

11화. 이제 시작이지

11화. 이제 시작이지

“얼씨구? 이게 다 뭔 일이여?”

매주 월요일 저녁, 진료가 끝나기 30분 전에 한의원을 찾는 김명자 할머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느 때처럼 계단을 올라가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대기실 소파에 낯익은 얼굴들 몇이 둘러앉아 쌍화탕을 홀짝이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시장의 다른 한의원에서는 흔한 풍경이었지만, 허준한의원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모습이었다.

“자기 창수네 알지? 창수네 엄마가 정우네 직원이랑 트러블나서 이리로 옮겼잖아? 그래서 오늘 아침에 들렸는데, 글쎄 카메라를 설치하면서 촬영에 협조해달라고 했다더라고.”

“그래서 대체 뭘 찍어간 거라는 데?”

“무슨 다큐멘터리라던데?”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면 그런 거 아니야? ‘그것이 보고 싶다’나, ‘추적 1시간’ 뭐 이런 것들?”

“에이~ 그건 시사프로그램이고, 다큐멘터리는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의 세계’ 이런 것들이지.”

“그럼 더 이상한데? 대체 여기에 왜 온 거래? 사람도 별로 없던 한의원인데.”

“그러게.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 혹시-”

수다를 떨고 있는 아줌마들 사이로 김명자 할머니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매서운 눈빛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옘병~ 이놈의 여편네들이 아주 그냥 뚫린 입이라고. 침 맞으러 와서 침 다 맞았으면 집에 기어들어 가서 밥이나 먹을 것이지. 뭐 하겠다고 모여서 주둥이를 조잘대고 있어?”

시장에서도 유명한 김명자 할머니의 성격에, 그녀들은 눈치를 보면서 컵을 들고는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쯧쯧.”

그 모습을 본 김명자 할머니가 혀를 차는데, 뒤에서 빠르게 슬리퍼를 끌면서 치료실에서 나온 서 선생님이 다가와 인사했다.

“김명자 할머니 오셨어요?”

점심시간 이후부터 쉴새 없이 몰려든 환자에,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김명자가 물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여? 저 여편네들이 여기에 다 오고.”

“아~ 그게 오늘 아침에 촬영이 있었는데, 오전에 진료를 보신 어머님들이 여기저기에다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몰려오셨나 봐요. 덕분에 이제야 한 숨 돌릴 수 있겠네요.”

“촬영?”

“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서정숙은 온종일 물어 온 같은 질문에, 앵무새처럼 반사적으로 김명자 할머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다 들은 김명자 할머니는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호~ 그러니까 여기 선생이 주말마다 봉사를 다닌 것 때문에 연이 닿아서 왔다는 거구만? 좋은 일이야 좋은 일.”

“오늘도 침 맞으러 오신 거죠?”

“당연허지.”

“치료 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치료실로 가 계세요 제가 원장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누워있는 김명자 할머니의 귀에 허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

“오늘 사람 많았다면서?”

“아, 그게..”

“서 선생에게 다 들었어. 그러게 내가 뭐라 했어? 착하게 살다 보믄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라 했지?”

허준은 오늘 점심시간 이후로 몰려든 환자들이 떠올랐다.

무려 1시부터 7시 언저리까지 6시간 동안 쉴 틈 없이 몰려든 환자들.

덕분에 평소에는 치료실에서 1번과 2번. 두 개의 의료용 베드만을 사용했었는데, 오늘은 개원한 이래 치료실에 있는 다섯 개의 의료용 베드를 모두 사용하는 쾌거를 이루어 낸 순간이었다.

말라 죽어가던 한의원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그러게요.”

허준이 환하게 웃었다.

“얼씨구 좋단다~ 그래도 잘했어. 잘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지 암. 혼자 살다가 아프기만 해도 서러운데, 길바닥에서 홀로 아프기까지 하면 얼마나 서럽겄어.”

“저도 조금 놀랐어요. 노숙자분들 중에 생각보다 젊은 사람도 있었고, 멀쩡한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다들 사정이 있는 게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선생처럼 진료도 봐주고, 말동무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리고 혹시 또 알어? 더 좋은 일이 벌어질는지.”

허준은 김명자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저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서 시작한 의료봉사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위해서 간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경계하고, 차가웠던 그들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직접 느껴버렸으니까.

“암튼 그건 그거고, 얼렁 침이나 놔줘. 추석 준비한답시고 주말 내내 진탕 마시고 간 놈들 때문에 아주 삭신이 쑤셔 죽겄으니깐.”

“네.”

허준이 미소지으며 침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침과 전기치료를 마치고,

“아이구~ 시원하다. 이제야 좀 살겄네.”

“오늘도 괜찮으셨어요?”

“당연하지. 어째, 날이 갈수록 손재주가 좋아 지는 것 같어. 아주 힘이 나는구먼.”

할머니의 칭찬에 허준의 기분이 좋아졌다.

퀘스트를 얻고서 첫 번째 보상이던 ‘침술’을 얻었을 때, 가장 먼저 그 차이를 알아챈 것도 눈앞에 있던 김명자 할머니가 아니시던가.

그런 그녀의 칭찬은 열심히 퀘스트를 깨고 ‘침술’의 레벨을 올린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기연을 얻고 나서부터 서서히 늘어난 환자들과 그에 따른 매출이 허준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진료를 마친 김명자 할머니가 떠나고서야,

전쟁터와 같던 월요일의 진료가 끝이 났다.

그리고 원장실로 돌아온 허준의 눈앞에는,

<침을 놓아라. 3>

* 진행도 : 158 / 300

* 보상 : [침술 Lv. 3]

* 남은시간 : 5일

5일 중, 단 하루 만에 퀘스트의 50%를 조금 넘게 달성한 퀘스트가 나타나 있었다.

토요일 의료봉사 때에는 100명이 넘는 환자를 봤었지만, 한의원에서 80명에 가까운 환자를 본 것은 개원한 이래 처음 있는 일.

그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허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원장실 문이 열리면서 서 선생님이 고개를 쏙하고 내밀더니 들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원장님. 청소는 내일 아침에 와서 하면 안 될까요?”

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걸걸하지 않고 축 처져 있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과 함께.

지난주까지만 해도 조금 늘어난 환자가 일 평균 15명 전후였으니, 점심시간 이후에 몰려든 80여 명의 환자를 혼자 감당하느라 녹초가 된 것이었다.

허준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바로 퇴근하세요. 서 선생님.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해요. 제가 내일 아침에 10분 더 일찍 나와서 청소해놓을게요.”

“아니에요. 오늘 오후에 환자들 몰려서 피곤하시잖아요. 제가 탕약 달이면서 청소하고 퇴근할게요.”

“더 있다가 가시려고요?”

“네. 오늘 환자가 많이 와서, 내일 이벤트로 나갈 쌍화탕이 모자라거든요.”

그 대답에 서 선생님이 조금 놀란 얼굴로 허준을 바라봤다.

자신이 피로한 만큼 허준도 피로하면 피로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쌍화탕까지 달이고 퇴근하겠다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근에 확실히 조금 달라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전에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일이 많았는데, 근래들어서는 사람이 뭔가 여유가 있어진 탓이었다.

‘요새 교회라도 다니시나?’

봉사활동과 교회라는 단어가 매칭되면서 새로운 오해를 낳았지만,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 있었으니,

허준은 의료봉사에서 이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이미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게다가 그때에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했으니, 오늘 허준이 느끼는 피로감이 생각보다 덜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잠시만요.”

허준이 탕약실에서 남아있는 쌍화탕 몇 봉을 챙겨서 서 선생님에게 건넸다.

“이거 가지고 가셔서 드세요. 피로 해소에 아주 좋거든요.”

쌍화탕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선 서 선생님.

그렇게 뒤돌아 나가려던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뒤돌았다.

“아, 그리고 원장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늘 환자 많아서 앉아서 쉴 틈도 없었던 거 아시죠? 어머님들 말 상대하랴, 접수받으랴, 치료실 정리하랴 계속 이러면 아무래도 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허준은 그녀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원하는 대답을 내놨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 선생님. 추이를 좀 지켜보다가 직원을 하나 더 뽑든지 할게요. 그리고 오늘 고생하신 것은 잊지 않고 추석에 챙겨드릴게요.”

“알겠어요. 원장님. 그럼 저 먼저 퇴근해요.”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 선생님이 재빠르게 원장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본 허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날에 서 선생님이 그냥 넘어갈리 없지.

웬일로 그냥 퇴근하나 했네.

*   *   *

“허준한의원 원장 이야기 들었어? 사람이 참 착해 보인다 했더니, 저번에 촬영 온 것도 서울역에 그 뭐냐 쉼터에서 노숙자들 상대로 봉사활동 해가지고 인터뷰 찍으러 온 거라던데?”

“맞지? 내 말 맞잖아. 내가 개원한 첫날부터 그랬잖아. 딱 보니까 인상이 순하고 눈빛이 선한 게, 사람 좋게 생겼다고 한 말. 다들 기억나?”

“얼씨구? 자기 벌써 건망증이 왔나봐? 자기가 그때 이번 원장은 얼마나 버틸지 커피 내기하자던 거는 기억 안 나나 보지? 아마 그때 1년이라고 그랬던가? 6개월이라 그랬던가.”

“아니, 시방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그거랑 이 관상이랑은 다르잖아.”

“에헤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허준네 원장이 사람은 참 좋아.”

허준한의원에서 촬영이 끝난 뒤, 시장 골목 곳곳에서 허준에 대한 소문이 번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다음 주가 벌써 추석이잖아. 어떻게 예약들은 미리 했어?”

“물론이지. 내가 어제 직접 가서 물어봤더니, 예전에 여기에 계시던 최 원장님 기억하지? 최 원장님이 이번에 아주 큰맘 먹고 준비했다고 하더라고.”

“나도 아들놈이 여자친구네 보낸다고 해서 몇 박스나 예약했지. 진짜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까? 그래도 가서 보니까 포장도 고급스럽고, 이벤트 때문에 가격부담도 없더라고.”

경희한의원에서는 추석을 맞이하여 새로운 이벤트를 시작했다.

바로 추석용 선물세트로 경옥고와 공진단을 특가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공진단 3만 원, 경옥고 10만 원.’

당장 인터넷에 한약을 직접 만드는 공장들이 올려놓은 최저가보다도 싼 가격.

즉, 경희한의원은 그런 한약 공장들보다 더 낮은 가격에 공진단과 경옥고를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국내 한의대 1위이니만큼, 인맥에 의한 것인지 또는 사업적인 계약에 의해서인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허준한의원에서는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이벤트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촬영으로 인해 길게 줄이 늘어섰던 허준한의원은 그다음 날부터 찾아오는 환자의 숫자가 눈에 띄게 급격히 줄어들더니, 결국 삼 일째 되는 날인 오늘은 오히려 예전보다 줄어든 환자 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런 급작스러운 반전의 분위기를 느낀 서 선생님이 퇴근한다는 인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기.. 원장님. 저희도 추석용 선물세트 이벤트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그 질문에, 허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 하다간 다리가 찢어지는 법.

물론, 촬영으로 갑작스럽게 몰려들기 시작한 환자가 생각보다 빠르게 빠진 것은 아쉬웠지만, 이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허준은 서 선생님에게 추이를 지켜보자면서 명절 보너스를 말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어쭙잖게 따라 한답시고 같이 발을 들이밀었다가는 본전도 제대로 건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급할 필요 없다. 어차피 나에겐 퀘스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허준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최은진 PD : 선생님. 다큐멘터리 편집이 다 되어서 미리 방영분 보내드립니다.

‘이제 시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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