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하루 나와 보실래요
13화. 하루 나와 보실래요
추석 연휴 첫날인 일요일.
강남의 고급 오피스텔.
빠득.
연휴를 맞이하여,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던 김진수가 이를 갈았다.
그의 손에는 TV 리모컨과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대체 왜 저기서 이허준이 나와?!”
벌게진 얼굴로 TV 리모컨을 집어던지며 소리치는 김진수.
분명, 좀 전에 방영된 다큐멘터리에는 자신이 나와야 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모습은 고작 10초가량 정도만 지나가는 배경으로 쓰인 것이 전부인 것이 아닌가.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의료봉사를 나갔는데, 그때에도 이허준은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척하면서 봉사가 끝났음에도 홀로 남아서 사람들을 진료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교수님 눈에 띄어서 한동안 이쁨받았었지.
후-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진정시킨 김진수가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인터뷰를 사용하겠다면서 연락처를 남긴 최은진 PD였다.
“여보세요, 김진수 원장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그럼요. PD님도 잘 보내는 중이신가요? 하하- 오늘 다큐멘터리 잘 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 인터뷰가 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인터뷰 촬영할 때,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TV에는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다고.”
“그럼 제 인터뷰는 도대체 왜 한 겁니까?”
“혹시 지금 화내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이해요? 간단해요. 아무리 다큐멘터리라지만 저희도 시청률이 중요하거든요. 이허준 원장님이 찍힌 장면들 보셨죠? 누가 봐도 시청률에 영향 줄 것 같잖아요. 실제로 반응도 좋고요.”
김진수가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최은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김진수 원장님은 어땠어요? 저희가 괜찮은 장면 좀 찾아보려 했는데, 그다음 주에는 아예 안 보이시더라고요? 게다가 인터뷰 찍은 날에도 칼같이 7시에 가셨고요. 의료봉사 때 나와서 못 보셨나요? 요즘 노숙자들도 스마트폰 하나씩은 다 들고 있는 거, 저희가 원장님 인터뷰 편집해서 내보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 그건..”
“이제 이해되셨죠? 그럼 남은 연휴 잘 보내세요.”
말문이 막힌 김진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 * *
그 시각. 허준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퀘스트 때문에 매일 늦게까지 쌍화탕도 달이고, 본래라면 쉬었어야 할 토요일마다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다가, 더해서 어제는 추석인 탓에 더 많은 환자를 봐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있던 허준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진동에, 손을 뻗었다.
진동의 발원지는 스마트폰이었다.
“여보세요?”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허준.
그런 허준의 귓가에는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들!”
“엄마?”
“밥은 먹었니? 그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면 나온다고 미리 말을 해주지 그랬어? 아침에 밥 먹고 심심해서 텔레비전을 켰는데 네 얼굴이 나와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니?”
허준이 부스스한 얼굴로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죄송해요. 진작 말씀드려야 했는데.”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지금 네 아버지가 자기 아들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진작 말했으면 아주 잔치라도 벌였을 기세야.”
“아빠도 참..”
“그래도 기분은 좋네. 내가 아들 하나는 잘 키운 것 같아서.”
스마트폰 너머로 엄마의 기뻐하는 모습이 허준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 어떤 아들이 그 모습을 싫어할까.
“참, 혜연이는 잘 지내지?”
정혜연.
그러니까 허준의 ‘전 여자친구’ 이름이었다.
“아.. 그게-”
허준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엄마가 말을 이었다.
“올해에도 또 못 내려오니?”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제가 추석 당일만 쉬잖아요. 화요일부터 다시 출근해야 해요.”
“그럼 내일 하루라도 내려와서 잠시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는 건 어때? 너희 아빠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던데.”
그 제안에 허준이 잠시 망설였지만,
<탕약을 달여라. 2>
* 진행도 : 0 / 50
* 보상 : [탕제술 Lv. 2]
* 남은시간 : 6일
눈앞에 퀘스트가 아른거렸다.
남은시간은 겨우 6일.
50회나 탕약을 달이기 위해서는 하루에 적어도 8번 이상은 달여야 했다.
하지만, 쌍화탕을 한 번 내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만 4시간가량.
당장 24시간 내내 6일간 달여도 6일간 50회를 채우기는 무리였다.
때문에, 허준은 토요일 저녁을 먹으면서 급하게 새로운 탕약기를 주문했다.
다행스럽게도 추석 다음 날인 화요일 오전에 바로 가져온다고 하긴 했으니, 탕약기를 설치할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요. 한의원에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엄마의 아쉬워하는 말에, 허준이 냉큼 대답했다.
“그래도 조만간 한 번 찾아뵐게요.”
“그래, 알았다. 그럼 우리 아들 밥 잘 챙겨 먹고, 몸조심하고. 건강이 최고인 거 알지?”
“네. 엄마도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허준의 눈이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응?’
카톡과 메시지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것도 몇 년 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던 몇몇 사람들에게까지 카톡이 와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 허준의 머릿속에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다큐멘터리!’
연휴 첫날 오전 9시, 바로 추석특집 다큐멘터리 방영 시간.
최은진 PD가 본방송으로 꼭 봐달라고 했었는데.
어쩐지 웬일로 연락이 이렇게 많은가 싶더니만,
이게 텔레비전의 위력인가?
흔히 무명가수나 연기자들이 TV에 나오고 나면 중학교 동창부터 전 여자친구에게까지 연락이 온다더니, 지금 자신의 상황이 딱 그랬다.
실제로 카톡에 그녀의 연락도 와있었으니까.
정혜연 : 오빠. 방송 나온 거 봤어.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만날 수 있을···
허준의 눈이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동안 그녀와 행복했던 추억들과 기억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그 끝에는 가슴을 콕콕 찔러대던 이별의 날까지 도달했다.
‘이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주책이람.’
여자를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남녀 사이도 결국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기엔 충분한 나이.
한번 신뢰가 깨진 이상 그것을 다시 붙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일인지 이미 알고 있는 허준이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리며 전화가 왔다.
최은진 PD였다.
“선생님? 통화 가능하세요? 답장이 없으셔서요. 방송은 잘 보셨어요?”
“아! 그게..”
전화를 받자마자 튀어나온 질문에, 허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죄송해요. 이제 일어났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희 팀원이 어제 쉼터에 잠깐 들렸었는데, 어제도 늦게까지 진료 보셨다면서요?”
“네. 아무래도 추석이다 보니까..”
“선생님이라면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번 연휴에는 어디 안 가시나요? 고향이라던가, 가족들 만나러요.”
“제가 추석 당일만 쉬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이따가 저녁 어때요? 인터뷰 때, 제가 다큐멘터리 끝나고 한 끼 대접하기로 한 약속 기억나시죠? 마침, 할 이야기도 있고요.”
* * *
그날 저녁.
허준은 최은진 PD와 약속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장소는 강남의 한 고깃집.
문 앞에 먼저 도착해 있던 최은진 PD가 허준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PD님.”
“어라? 오늘은 쉬는 날 아니었어요? 한약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약속 전에 한의원에 들러서 탕약을 내린 허준의 몸에서 은은한 쌍화탕 냄새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 한의원에 잠시 들렀다가 오느라고요. 그런데 이쪽은?”
허준은 최은진 PD의 옆에 서 있던 청순하게 단발의 여자를 바라봤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본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쪽은 김예진이라고, 제가 아끼는 동생이에요.”
“안녕하세요. 김예진이라고 해요.”
“이허준입니다.”
최은진 PD가 씨익 웃더니,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그렇게 자리에 앉은 일행이 주문한 고기가 불판 위에 올라갔다.
치이이익-
익숙하고 맛있는 소리가 귀를 자극해오는 와중에,
“술은 뭐 좋아하세요?”
“술이요?”
허준이 가장 최근에 술을 마셨던,
그러니까 퀘스트를 얻게 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요? 아쉽네. 그럼 저희끼리만 가볍게 한잔할게요.”
최은진 PD가 벨을 누르고는 ‘소주 하나요!’를 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앞에는 노릇하게 익은 고기와 소주를 잔에 따르는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허준이 눈치껏 빈 소주잔에 물을 부은 뒤에 잔을 부딪쳤다.
“캬아- 제가 이 맛에 다큐멘터리 제작한다니까요? 제작하는 동안에는 진짜 힘들지만, 딱 끝내고 난 뒤에 마시는 이 술맛이 진짜 기가 막히거든요.”
최은진 PD가 기분 좋다는 듯이 말하다가,
허준과 김예진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말을 이었다.
“아, 이런. 죄송해요. 순서가 틀렸네요. 아까 제가 원장님께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랬죠? 그게 바로 예진이에요.”
“네? 이거 혹시 그.. 소개팅 같은 건가요?”
허준의 되물음에, 최은진 PD와 김예진이 서로 얼굴을 한번 마주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나 보다.
“선생님, 진지한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유머 감각도 있으시네요? 그게 아니라, 예진이가 선생님네 한의원에서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한의원에서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허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최근에 한의원 매출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두 명의 직원을 쓰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물론, 다큐멘터리가 나간 이후에 지난 촬영 때처럼 환자가 몰려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벌써 김칫국을 마실 수는 없는 법.
“저 죄송한데, 최 PD님이 촬영하실 때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한의원 사정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에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다큐멘터리에 대한 주변 반응이 꽤 좋거든요.”
반응이 좋았다는 말에 허준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래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온갖 연락이 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반응이 좋아요?”
“그럼요. 시청률도 무려 2%를 넘겼다고요.”
“네..?”
최은진 PD의 말에 허준이 눈을 껌뻑였다.
2%라니?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어머? 선생님. 그 눈은 뭐에요? 지금 2%라고 무시하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고..”
“선생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요즘 같은 시대에 다큐멘터리로 2%면 진짜 높은 거예요.”
그때, 옆에서 조용히 웃고만 있던 김예진의 입이 열렸다.
“제가 얼마 전에 전역했거든요.”
그녀의 가녀린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대답에,
허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머리가 짧았던 건가?
“군인이셨었어요?”
“네. 얼마 전까지요. 전역하고 나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게 됐는데, 마침 다큐멘터리에 선생님이 나오시더라고요. 보는 순간에 한 번쯤은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살면서 실제로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바로 은진 언니에게 연락했죠.”
“저랑요? 왜요?”
“그냥, 저런 사람과 함께 일하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어서요. 그러니, 크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허준의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김예진이 손가락 하나를 들이밀며 말했다.
“하루도 괜찮아요. 아무 때나 편하게 불러 주세요. 바로 달려갈 테니.”
진정성 있는 그녀의 모습에,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이렇게까지 진지한데, 하루쯤이야.
“그럼, 연휴 끝나고 하루 나와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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