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부탁하러 왔네
35화. 부탁하러 왔네
“잘 배웠습니다. 대표님.”
허준이 고맙다고 인사하자, 살짝 뻘쭘해진 최인호가 헛기침을하며 답했다.
“이거 가지고 뭘, 아직 갈 길이 멀어. 이제 시작이지. 오늘은 첫날이니 이쯤하고, 이제 자네 한의원 구경이나 좀 시켜주게.”
“물론이죠. 따라오세요.”
허준이 최인호와 함께 치료실로 향했다.
최인호가 치료실을 한 바퀴 쓱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도 대기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리정돈된 모습이 마치 군대에서나 볼 법한 느낌이네.
“여기도 아주 깨끗하네. 이렇게 관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저희 선생님들이 일을 좀 잘하시거든요.”
“부럽군. 우리 선생님들도 와서 좀 보고 본받았으면 좋겠어.”
“이쪽으로 오시죠. 여기가 탕약실입니다.”
드디어 기대하던 탕약실.
4대의 탕약기와 포장기 한 대가 놓여있었다.
포장기에는 통 안에서 식어가고 있는 탕약이 들어 있었는데, 탕약실에서 풍기는 냄새로 짐작하여 그것이 쌍화탕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식히고 있는 저건 쌍화탕인가?”
“네. 저희 이벤트로 나가는 쌍화탕입니다.”
“마침, 몸도 좀 움직였는데 맛 좀 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잠시만요.”
허준이 종이컵을 가져와 식어가고 있던 쌍화탕을 조금 따라 건넸다.
최인호가 그것을 받아 냄새를 한번 맡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그래. 이맛이야.’
눈앞에 담겨있는 저 쌍화탕이 자신이 찾던 바로 그것임을 알 수 있었다.
최인호가 허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훌륭해. 자네 손재주뿐만 아니라, 탕약도 기가 막히는군. 이러니 시장 사람들이 좋아하지. 이건 대체 뭘 넣고 달인 건가? 혹시 비싼 약재라도 넣었나?”
“아, 그건 그냥 평범한 제조법으로 끓였습니다.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대로요.”
허준이 사실대로 답을 말했다.
실제로 재료는 어느 한의원에서나 쓰이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인호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그래?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한의원에서 달인 것과 미묘하게 차이가 난단 말이지...”
“그냥, 작약에 숙지황 감초 대추 당귀 천궁 계피 등등인데, 이 중에서 계피와 생강 그리고 숙지황을 조금 적게 넣었습니다.”
일반적인 쌍화탕의 재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계피와 생강, 숙지황을 조금 덜 넣은 것은 이벤트로 제공되는 것이기에 만인의 상황을 고려해서 생각한 제조법일 터.
약재가 같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물.
탕약을 잘 달인다고 소문난 한의원에서는 가장 중요시하는 재료이기도 했으니,
“그럼, 혹시 물은?”
“생수를 사용합니다.”
“그렇군...”
최인호가 무언가 못마땅하단 얼굴로 두리번거렸지만, 그렇다고 체면이 있는데 함부로 이곳을 뒤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좀 더 친해지면 기회는 언제든지 있을 테니,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허준을 따라 탕약실을 나섰다.
“잘 구경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퇴근하세. 종종 들려서 하나하나씩 알려줄 테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최인호가 떠나가고,
허준의 눈앞에는 진행도가 0에서 10으로 오른 퀘스트가 나타나 있었다.
* * *
허준이 최인호에게 추나를 배우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한의원은 평소대로 환자 수를 유지해 가고 있었고, 최 대표를 비롯한 경희한의원 멤버들과는 종종 같이 점심을 먹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점심을 먹은 뒤, 최 대표가 사준 커피를 들고 온 허준이 원장실에서 오후 진료를 시작하자마자 문이 열리며 얼굴 여기저기가 탱탱 부은 남자가 들어왔다.
귀가 접혀있던 김명훈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오세요. 지금, 괜찮으신 거 맞죠?”
허준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김명훈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의자에 앉자, 허준의 눈에 멍들고 부풀어 오른 눈, 긁혀서 벌겋게 자국이 난 볼 그리고 터져서 갈라진 입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반면, 그런 얼굴을 한 김명훈은 즐겁다는 듯이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허준이 김명훈의 경기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고,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아마, 이전에 말하던 후유증은 괜찮아졌나 보다.
“혹시...?”
“네. 맞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잘 치를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기신 건가요?”
허준의 이겼냐는 물음에 김명훈이 여기저기 부은 얼굴로 해괴한 미소를 지으며,
“졌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죠.”
“그런데... 행복해 보이시네요?”
허준이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묻자, 김명훈이 오른쪽 주먹을 쥐어 올리며 답했다.
“제대로 한 방 먹여줬거든요. 그 순간을 선생님이 보셨어야 했는데... 어찌나 통쾌하던지,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사고 후유증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매번 패배했던 김명훈이 이번에는 제대로 싸우고 돌아온 것이었다.
비록 링위에서는 패배했으나 파이터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셈이었다.
그것만으로 김명훈은 만족할 수 있었다.
통쾌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김명훈을 본 허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후련하신 거군요.”
“후련하죠. 이제 정말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은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죠.”
“뭘요, 제가 따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저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김명훈과 허준이 서로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토요일이 되었다.
환자들의 진료를 마친 허준이 이번 주 의료봉사 장소로 서울역을 택했다.
오랜만에 박 선생님 얼굴도 볼 겸, 의료봉사팀을 제대로 운영할만한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퀘스트를 통해서 얻는 포인트가 가장 높은 만큼, 능력의 레벨을 보다 빠르게 올리기 위해서는 의료봉사를 보다 확장하여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서울역이라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박 원장님.”
“그래도 뭐랄까, 아무래도 조금 거부감이 든달까요?”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떠올린 박 원장이 난처해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그동안 박 원장을 지켜본 허준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막상 가면 누구보다 열심히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오늘은 일찍 끝나는 거 확실하지?”
시간을 묻는 사람은 최 대표였다.
“그럼요. 대표님.”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거의 매일 저녁 찾아와 서로 몸을 맞대다 보니, 어느새 친숙해져 버린 두 사람이었다.
물론, 최 대표는 아직까지 허준이 달이는 탕약의 비법을 찾아 해매는 중이었지만.
“이 선생만 믿겠어. 우리 아들이 고3이라 마누라가 한참 민감하거든.”
“그러고 보니 이제 진짜로 며칠 안 남았네요.”
그렇게 도착한 서울역 노숙자쉼터.
허준과 두 원장 그리고 최 대표가 트렁크에 가득 담긴 탕약을 꺼내 들었다.
기부받은 후원금으로 만든 쌍화탕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서울역쉼터에는 여전히 환자도 많았고, 봉사를 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아직까지 TV에 나간 효과가 이어지고 있나 보다.
‘다행이네.’
“어? 이게 누군가. 우리 허준선생 아닌가.”
저 멀리 박진석 선생님이 허준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 연세에 어떻게 저렇게 힘이 넘치실까 싶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이네. 그보다 이쪽분들은?”
“아, 저와 같이 의료봉사활동을 다니는 선생님들입니다.”
“모두 반갑네.”
박 선생님이 악수로 모두를 반겼다.
그러고는 허준을 비롯해 사람들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물었다.
“혜민서?”
“아, 이건 저희 의료봉사팀이름-”
“자네랑 잘 어울리는 구먼. 아주 딱이야.”
아직까지도 익숙치 않은 이름에 허준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서울역은 예전보다 활기차네요?”
“당연하지. 자네가 쏘아 올린 공이 꽤 높게 날아갔거든.”
“다행이네요.”
“손에 든 그것들은 무언가?”
“이건 저희가 받은 후원금으로 쌍화탕을 조금 달여 왔습니다.”
“잘했어. 안 그래도 날씨도 쌀쌀해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시작된 봉사활동.
역시나 퀘스트는 발동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대충진료를 볼 수는 없는 법.
“이리로 오세요.”
허준이 망설임 없이 침을 꽂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원장과 박 원장은 처음에는 살짝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이내 평소대로의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고,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오직 최인호만이 그 모습에 놀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최인호에게 침을 맞던 노숙자가 말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네? 아, 네...”
“그리고 미안합니다. 선생님들 같은 분이 이곳까지 찾아오시게 해서.”
최인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작 침하나 놨을 뿐인데, 이런 이야기까지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날은 최인호에게 무언가 잊고 지내던 감정이 돌아온 것 같은 날이었다.
그렇게 봉사활동은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수고했네. 수고했어.”
“박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자넨, 여전히 잘하는구먼. 데려오신 선생님들도 다들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아주 훌륭해.”
박 선생님이 허준의 뒤에 서있는 최 대표와 두 원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단체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말해보게.”
“선생님께서 예전에 저한테 부탁하신 영등포쉼터같은 곳은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거기는 보니까 국가에서 운영하는 쉼터도 아니던데요.”
“왜, 어디 소개라도 필요한가?”
“저희 팀도 제대로 활동하려면 방법을 좀 알고 싶어서요.”
허준의 대답에 박진석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주체적으로 활동을 하고 싶다 이 말이구먼?”
“네. 맞습니다.”
“보자... 자네 환자 많은 거에 환장하는 스타일이었지? 그럼 내가 자네에게 딱 맞는 아주 좋은 곳을 알고 있지.”
“그게 어딥니까?”
“우선 내가 먼저 물어보고 자네에게 연락을 주겠네. 그때까지는 조금 기다리게나. 확정되는 대로 바로 알려줄 테니.”
“알겠습니다.”
* * *
허준이 추나를 익히고 주체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는 동안에 시장 골목은 어수선해져 가고 있었다.
길 건너편의 가게들이 하나둘 정리하고 사라지고 있었으며,
“그 이야기 들었어? 정우한의원 문 닫는다는 거”
“벌써?”
“엊그제 정우네에서 일하는 선생님들이 소곤거리는 것을 들었는데, 정우 선생님이 직접 그랬다더라고.”
“하긴, 정우 선생님도 쉴 때가 되었지. 반평생을 여기에서 보내셨으니. 나 시집올 때부터 여기에 계셨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 자식들 아플 때 가장 먼저 찾아가던 곳이었는데.”
사람들의 입에 정우한의원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료 마감 이후에 추나를 배우고 있던 허준과 최인호의 앞에 정우한의원의 김정우 원장이 찾아왔다.
“김정우 선생님?”
“오랜만이야. 이 원장, 그리고 최 원장도.”
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가장 놀란 것은 이허준이 아닌 최인호였다.
자신이 넘어서려했던 라이벌이자 목표.
“일단, 들어오시죠.”
“고맙네.”
“여기엔 어쩐 일로...”
“자네들도 이미 소문은 들었겠지?”
김정우 원장의 질문에 허준과 최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그만 쉬려고 하네. 이 동네에 남은 한의원이 둘뿐이잖나. 자네들한테 내가 떠나고 남은 환자들을 잘 좀 살펴달라고 부탁하러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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