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좀 아플 거야
39화. 좀 아플 거야
“참, 김 원장님. 한의원 인수 하셨다면서요? 축하가 늦었네요.”
“뭘, 그런걸 가지고.”
김태식 원장이 기분좋게 웃으며 답했다.
옆에 앉아있던 박용준 원장이 말을 이었다.
“최 대표님이, 갑자기 오시더니 김 원장님에게 혹시 인수할 생각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가맹비 내고 인수하라는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하시더니 괜찮은 가격을 말씀하셔서 저랑 김 원장님이 같이 인수했죠.”
“그럼, 공동 원장인 거네요?”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김 원장님이 비율이 조금 높죠.”
“크-흠.”
김 원장이 부끄럽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이허준 선생도 잘 알잖아. 새로운 곳에 개원해서 자리 잡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제가 그건 또 아주, 잘 알죠.”
“요즘 매출도 예전보다 올라오겠다. 그래서 냉큼 인수했지.”
“잘하셨어요. 다른 데로 가셨으면 토요일마다 오시기 힘드셨을 거 아니에요.”
허준의 대답에 김 원장이 기가 찬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허준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는구먼?”
“농담이라뇨. 진심인데요.”
“그보다, 허준한의원에는 정우한의원에 있던 유도진 선생이 가셨다면서?”
“네. 덕분에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아요. 만약에 안 오셨으면 오늘 이렇게까지 오지는 못했을 걸요?”
“이왕이면 우리 한의원으로 오시지 쩝.”
김 원장이 입맛을 다시는데,
허준의 일행 앞으로 군용차 한 대가 나타나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군인이 스윽- 바라보더니 허준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이허준 선생님 맞으시죠? 어서 오십시오. 좀 전에 통화한 박대현 대위라고 합니다.”
가슴에는 박대현이란 이름 석 자가 붙어있었고,
모자에는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3개가 붙은 계급장이 반짝였다.
‘박진석 선생님이 알아봐 주신다는 곳이 마을이 아니라 군대였어?’
당연히, 이 작은 마을에 있는 회관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준이 살짝 놀라며 박대현 대위의 손을 맞잡았다.
“이허준입니다.”
“부득이하게 이곳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박진석 선생님, 그러니까 저희 큰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 씨라 적힌 성과 특유의 눈빛에 혹시 아들이 아닐까 했지만, 친척이었다.
그런 박대현의 눈이 허준을 따라온 혜민서 팀에게 인사했다.
“모두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부대로 들어가서 하시죠. 제 차를 따라서 이동하시면 됩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어서요.”
“따라가겠습니다.”
“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박대현 대위의 차가 앞장서고, 허준네 일행이 탄 차량 2대가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앞차에는 허준과 김태식 그리고 박용준이 타 있었고, 뒤에는 지난번에 함께한 두 선생님이 계셨다.
박용준이 이 신기한 상황에 물었다.
“허준 선생님. 저희 오늘 군부대로 가는 거였어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허준도 떨떠름하다는 듯이 답했다.
대부분이 공중보건의로 복무를 했기에, 군대란 곳이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료봉사로서도 낯선 곳이었으니.
‘이래서 박진석 선생님이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던 건가.’
그렇게 앞 차량을 따라 달리다 보니, 웬 초소가 하나 나타났는데,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이라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TV에서만 보던 기다란 철책이 눈에 들어왔다.
“오...”
김태식 원장이 그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감탄했다.
“나 실제로는 처음 봤어.”
“저도요.”
허준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
우렁찬 경례 소리와 함께, 검문소의 문이 열렸고.
박대현 대위의 차가 먼지를 날리면서 비포장 된 도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창밖 오른쪽에는 기다란 철책이 쭈-욱 이어져 있었다.
‘살면서 이런 곳을 다 와보다니.’
그렇게 20여 분간을 따라가니 작은 군부대 하나가 나타났다.
박대현 대위의 차를 알아본 병사들이 멀리서부터 일찌감치 문을 열어뒀고,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1000
허준의 눈에는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났다.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포인트가 무려 1000점짜리인.
* * *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남자끼리 모이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축구 이야기, 군대 이야기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그만큼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뜻이다.
장르로는 입대 후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부터 복무하면서 보고들은 온갖 소문까지.
여기에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들어가기 시작하면, 근무 중에 본 조그만 멧돼지는 소형차만 하게 부풀려지고, 행군 중에 만난 새끼 뱀은 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아나콘다가 되기도 하니.
누가 들으면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저렇게 히죽거리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퍽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이것이 젊은 날의 청춘을 바친 대가이리라.
그리고 이 대가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아, 군대에서 나 허리 아작났잖아. 그때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진 안 됐다.”
“난 무릎, 진짜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나도 약 먹은 지 좀 됐는데 아직도 무좀이 사라지질 않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들.
이는 김우진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 보니, 어느새 김우진이란 이름은 김 일병이 되어 있었고.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북한군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최전방까지 오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군대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야, 김우진, 빨리빨리 안 할래?”
“죄송합니다.”
“군대에서는 죄송하다고 하는 거 아니랬지?”
“바로 하겠습니다.”
삽을 지팡이 삼아 그늘에 앉아 쉬고 있던 상병이 김우진에게 말하자,
김우진을 비롯한 병사들이 땀을 줄줄 흘리며 빠르게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땅 얼기 전에 파놔야 편하니까. 빨리 빨리하고 복귀하자.”
“네!”
쌀쌀해진 날씨임에도 삽질을 조금만 하다보면 어느새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전투화 안은 탱탱 불은 발과 예전에 다친 발목은 시큰거리기를 반복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르면 고통도 잊고 어느새 상쾌함만이 남으니, 젊음의 축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온 병사들은 일과를 마치고 나면 그제야 허리나 등, 목 또는 손목 같은 여러 부위에 은은한 통증을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따로 떨어져 있는 막사의 특성상, 외진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기에는 눈치가 보였으니, 결국은 파견 나온 의무병에게 부탁해서 파스나 붙이고 생활하기 일쑤였다.
본래라면,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이 정도쯤은 파스를 바르고 조금만 쉬어도 금세 회복될 테지만, 군대란 곳이 어디 그러던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작업과 훈련, 그리고 근무까지.
그나마 휴가 때라도 병원에 다니면서 푹 쉬기라도 하면 한결 좋아지지만, 그것도 잠시뿐.
결국에는 전역할 때 즈음에는 다들 어디 한군데씩은 안 좋아서 나오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 날, 부대로 한의사 선생님들이 진료를 오신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왕이면 의사 선생님이 오시면 좋을 텐데, 왜 하필 한의사 선생님이 오시는 걸까.
김우진의 머릿속에 휴가 때, 다녀온 유명한 한의원이 떠올랐다.
칼같은 인상에 단답형의 대답. 그리고 전혀 친절하지도 않은 젊은 한의사.
침은 아팠고, 빨리 나으려면 한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던 모습.
첫 만남이 그러했으니, 결코 한의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는 김우진이었다.
그래도 진료받는다는 핑계로 근무시간은 줄여야지.
* * *
“이런 곳까지 와볼 줄 몰랐습니다.”
“확실히 인적이 드문 곳이기는 하죠.”
“진료는 어디서 보면 될까요?”
“한 생활관을 비워뒀으니 거기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둘러보니 생활관마다 침대가 있던데, 차라리 저희가 돌면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래 주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손 하사가 병력통제를 도와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그렇게 시작된 진료.
일반적으로 군인이라고 하면 튼튼하고 건강한 이미지였기에, 허준은 금방 끝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막상 진료를 보기 시작하니, 경중이 다를 뿐 대부분이 환자가 아닌가.
“이렇게 하면 아프죠?”
“네...”
허준의 앞에 앉아있는 최동윤 상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고통이 심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저만 아픈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제가 아프다고 외진을 나가면 제가 할 일을 누군가 대신해야 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대답을 들은 허준이 대견하다는 듯이 최동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침 맞아 봤어요?”
“안 맞아 봤습니다.”
“주사는 잘 맞는 편이죠?”
“네.”
젊고 건강한 신체.
굳이 따로 영향을 주는 경혈에 침을 놓을 필요도 없다.
‘아시혈만으로 충분하겠어.’
아시혈이란 환자가 아, 거기 같은 의성어를 따온 혈 자리로, 근골격계 질환의 치료에 주로 쓰이는 혈 자리다.
허준이 침을 들고 손에 감각을 집중해 팔꿈치를 살짝 살짝 누르면서 아시혈을 진단했다.
“아-”
최동윤 상병의 입에서 작은 신음과 함께, 허준이 눈을 빛내며 침을 꺼내 들고는 그 자리에 놓았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침에서 손을 뗀 허준.
그렇게 몇 군데 더 놓으며,
“20분 뒤에 올게요.”
그렇게 허준을 비롯한 혜민서 사람들이 진료를 마쳐가고,
* 진행도 : 88%
허준은 진행도를 확인했다.
시간은 어언 6시가 조금 넘은 상황.
‘이거 시간대비로는 엄청나잖아?’
다음 침상으로 향한 허준의 눈앞에 관물대에 적혀 있는 김우진이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아, 김우진 일병은 지금 근무시간인데 교대해주러 갔습니다. 곧 올 겁니다.”
손 하사가 옆에서 대신 답했다.
허준이 창가를 바라보니, 차를 타고 들어온 입구에서부터 걸어서 올라오고 있는 병사가 보였다.
“저 친구인가 보군요.”
“네. 맞습니다.”
그런 허준의 눈에 언덕을 올라오던 김우진이 휘청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누가 봐도 발목이 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허준이 창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김우진 일병!”
“일병 김우진!”
김우진이 발목의 통증을 참으며 어디선가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관등성명으로 답했다.
발목이 꺾여 아프니 목소리엔 오기가 서려있었다.
“거기 가만히 있어!”
손 하사가 무슨 일인가 싶어 허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김우진 일병을 데리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에이 저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그냥 기다리시면 올라올 겁니다.”
“아니요.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허준이 직접나서자, 손 하사가 마지못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손하사와 허준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올라온 김우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의 왼쪽에 있는 손 하사님은 당직사관이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니, 분명히 오늘 오기로 한 한의사 선생님이 분명했다.
대체 이 선생님은 왜 여기까지 내려와 자신을 부축하는 거지.
“우진아, 장구류랑 총 넘기고, 이리로 와서 선생님께 보여드려.”
“일병 김우진. 알겠습니다.”
김우진이 총기를 넣고 장구류를 벗어서 손 하사에게 넘긴 뒤, 허준의 앞에 앉았다.
“발목을 자주 접질리죠?”
“네? 그걸 어떻게...”
김우진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허준이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우리 한의원에 김우진 일병 같은 분들이 많이 오거든요. 발목 말고 다른데 아픈 곳은 없나요?”
“없습니다!”
“씩씩하고 좋네. 그럼, 양말 벗고, 발은 이렇게. 좀 아플 거야.”
허준이 침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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