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내일 보자고 >
45화. 내일 보자고
‘진맥?’
진맥이라니.
진맥의 잠금이 해제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저 막연하게 벽 같은 것을 느끼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면 아예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진맥이란, 말 그대로 맥을 진찰한다는 뜻.
즉, 손으로 사람의 맥을 잡아서 진찰한다는 것인데, 침술의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좋아진 것이 어쩌면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포인트가 더 있었다면, 지금 바로 진맥의 효과를 확인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즈음에,
딸랑-
“선생님?”
박상준이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선은 치료부터 해야할 시간이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원래 쉬는 날이실 텐데.”
“아, 괜찮아요. 어차피 토요일마다 봉사활동 끝나면 이 시간쯤 되거든요. 그렇게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게다가 공짜로 치료하겠다는 것도 아닌데요. 뭘.”
박상준도 며칠간 한의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허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중에는 침 하나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느니, 탕약을 먹고 전교 1등이 되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눈앞에 있는 선생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흔히 워라밸이라 불리는 일과 삶의 균형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누가 자신의 황금 같은 휴일을 반납하면서까지 의료봉사를 하려고 할까.
그거 조금 해봐야 크게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내 진료도 마찬가지겠지만.
허준이 박상준의 발에 감겨있는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고서 침을 꺼내 들었다.
오늘 대량의 포인트를 먹고 레벨이 올라간 침술.
‘효능이 대폭 증가한다고 했었지?’
과연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까.
원장실 형광등에 반사된 침이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첫 번째 침.
시커먼 엄지발가락에 침이 들어갔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상 환부는 여전히 낯설군.’
그래도 이미 몇 번을 놓았던 터라, 침이 뼈에 부딪히기 전에 허준의 손이 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그 옆자리도 마찬가지.
그렇게 엄지발가락에만 15여 개가 넘는 침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이젠 검지발가락 차례.
엄지발가락에 꽂힌 침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자침했다.
앞선 엄지에 비해서 크기가 작았으니, 침이 들어가는 깊이도 당연히 짧았다.
이어서 마지막 중지 발가락.
허준이 침을 꽂아 넣었는데,
“어?”
여태까지 치료 중에 한마디도 없던 박상준의 입에서 의문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허준이 박상준을 올려다봤다.
진행도 : 1%
그 옆으로 진행도가 보인다.
단, 1이라는 숫자였지만, 0이었던 진행도가 치료를 시작한 지 3일 만에 1로 올라온 것이었다.
박상준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며칠간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선생님. 방금 뭔가 찌릿 한 것 같아요.”
“지금, 느낌이 있었다는 거죠?”
“네.”
허준이 침을 하나 더 들고, 그대로 박상준의 중지 발가락에 자침했다.
제대로 된 확인을 위해서였다.
“허윽-”
무릎꿇고 앉아서 침을 놓던 허준의 귓가로 박상준의 신음이 들려왔다.
아까보다 더 자극이 심했나 보다.
좋은 신호였다.
죽어있던 신경이 드디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상준에게 말했다.
“박상준 씨.”
“네...?”
“됐어요. 회복되고 있다고요.”
그 말을 들은 박상준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단지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허준이 그런 박상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물론, 허준의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으니.
실제로 본격적인 치료가 이제 시작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환부가 어디였던가.
가뜩이나 발가락에 맞는 침은 가장 아픈 편에 속했는데, 매일 두 번씩 30개 이상의 침을 맞아야 했으니 그만큼 각오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었다.
물론,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박상준은,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밝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렇게 박상준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같이 저녁을 먹으로 간 유도진과 김태식 그리고 박용준.
“어떻게, 유도진 선생은 뭐 가리는 거 없나?”
“다 잘 먹습니다.”
“그래? 되게 까다로울 것 같았는데.”
“김 원장님. 그럼 그냥 저희 자주 가던 데로 갈까요? 거기 메뉴 많아서 마음대로 골라 먹기 좋잖아요.”
“오, 그렇네. 그리로 가지.”
그렇게 찾아간 곳은 간판도 없는 조그마한 술집이었다.
술집 주인 김명자 할머니가 두 원장과 유도진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어? 오늘은 둘이 아니네?”
“이모도 아시죠? 여기 유도진 선생.”
“그럼, 내가 여서 몇 년이나 있었는디, 김정우 선생 제자아니여? 그런데 유도진 선생 허준한의원으로 갔다면서 왜 허준 선생은 쏙 빼고 다녀?”
“아, 허준 선생은 환자가 있답니다.”
“환자?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 뭐로 줄까?”
“저희 이거 파전이랑, 그리고 김치찌개랑. 유도진 선생님은 뭐 드시겠어요?”
“제육볶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제육이랑 주세요.”
“금방 갔다 줄게.”
“자네, 술은 한 잔 하지?”
유도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었으나, 한 잔 정도면 감각에 크게 문제도 없고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물어볼 것도 있고.
김 원장과 박 원장이야 매일 얼굴을 보며 일한 지 꽤 된 터라 친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야 지난번에 최 대표가 쏜 고기만 한 번 같이 먹은 사이가 아니던가.
이런 자리에서 술 한잔 정도는 좋은 윤활유 역할을 할 것이다.
“네. 간단하게 막걸리나 한 잔씩 하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모 여기 막걸리 한 병만 주세요.”
그렇게 세 사람이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허준 선생님은 중요한 환자인가 봐요?”
“그게... 동상 환자를.”
“네? 동상이요?”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준이 며칠간 드나들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데스크에 계신 두 선생님에게 들었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외국에서 등산하다가 발에 동상이 걸려서 왔다더라고요. 병원에서는 이미 수술이 예약된 상태고요.”
두 원장도 아영이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동상은 화상과 비교하여 치료가 훨씬 어려울 텐데.
“혹시, 그러다가 괜히 혼자 바가지 쓰시는 거 아니에요?”
“저도 그럴 것 같아서 말은 해봤습니다만.”
그때, 김 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난 이상하게 허준 선생이 그러면 고칠 것 같단 말이지. 묘하게 걱정이 안 된 달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두 원장이 봉사활동을 시작한 데까지 흘러갔다.
“그런 이유로 의료봉사를 시작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 우리도 처음에는 진짜 황당했지.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허준 선생을 따라다니라는 거야.”
“저는 그때 정말 진지하게 그만둘까 고민했었다니까요.”
박용준이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여튼 그래서 시작했는데, 이게 또 막상 하다 보니까 몸에 익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 있잖아요. 운동하는 사람이 꾸준히 하다가 안 하면 괜히 근질근질한 느낌.”
“그래. 맞아. 딱 저느낌이지 지금은.”
“게다가 뭔가 하고나면 조금이나마 세상에 이바지한 느낌이랄까요?”
대답을 들은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의문.
과연 자신이 풀어낸 비밀의 해답이 맞을까.
그들은 의료봉사를 통해서 정말로 성장했을까.
“또 다른 건 없나요? 예를 들어 진료를 볼 때 도움이 됐다던가.”
유도진의 물음에 두 원장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아니, 자네 갑자기 뭐 그런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
“그러게요.”
“그냥 조금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당연히 도움이 되지.”
“저도요. 진료 볼 때 도움 엄청나게 됐죠. 특히, 오늘 같은 곳은 진짜 쉬운 곳이거든요. 원래 막 쉼터 같은 데 가면 욕도 먹고, 김 원장님은 지난번에 멱살도 한 번 잡혔었다니까요?”
“그래. 그런 거 겪다 보니까 이제는 환자분들이 딱 오시면 그냥 천사야 천사. 진상? 오우 오시기만 하면 그냥 내 마음이 너무 편해.”
둘의 대답에 유도진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오늘 직접 겪어보니 한의원에 오는 환자들은 정말 상대하기 쉬운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끔 생각하는 건데, 허준 선생님이 예전에는 아예 존재감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침도 잘 놓는다는 소문도 생기고.”
“그렇지.”
“그래서 보니까. 김 원장님도 기억하시죠? 예전에 서울역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
김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만 하겠는가, 직접 서울역에 찾아가서 두 눈으로 본적도 있는 걸.
“저희도 서울역에 한번 가봤는데, 거기는 진짜 환자가 많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실력이 쭉쭉 늘었지 않겠어요?”
그 대답에,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된 상태였다.
그때, 보글보글소리와 함께 김치찌개와 제육볶음 그리고 계란말이가 하나 나왔다.
“어? 이모 이건 안 시켰는데.”
“이건 서비스.”
박 원장이 신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참, 의료봉사하고 제일 좋은 건 이렇게 서비스도 많이 받아요.”
* * *
“내일 봬요.”
“내일도 진료 보시나요?”
“그럼요, 매일 매일 치료하는 게 효과가 가장 좋거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박상준의 진료를 마치고, 주문받은 탕약까지 끝낸 허준이 한의원을 나섰다.
내일은 일요일.
오랜만에 좀 쉬어야지.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박진석 선생님이셨다.
“박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 허준 선생 오랜만이야.”
“잘 지내시죠?”
“그럼, 나야 잘 지내지.”
이번에는 또 무슨일로 전화 하신거지.
“아, 대현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애들이 아주 쌩쌩해 졌다던데?”
“별말씀을요. 저도 그런 곳에 갈 줄은 몰랐어요.”
“의료봉사가 뭐 별건가, 아픈 사람 찾아서 치료하면 되는 거지.”
“그렇긴 하죠.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
“아~ 자네 혹시 내일 시간 되나?”
“네. 일단은...”
오전과 오후에는 박상준의 진료가 있었으니,
“오전 10시쯤부터 7시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래? 마침 시간도 딱 맞구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별건 아니고, 내일 침에 대해서 강의가 있는데, 숙련된 조교가 필요해서 말이야. 마침, 딱 자네가 떠오르더라고.”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박진석 선생님께서도 잘 놓으시잖아요. 경험도 풍부하시고.”
“에헤이~ 우리 사이에 왜 이러는가? 지난번에 서울역에서 자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부탁하나 들어 줬잖아. 그러니 이번엔 내 부탁도 한번 들어주게나.”
하긴, 군부대까지 간 것도 엄밀히 말하면 부탁이긴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그래, 오늘 푹 쉬고 내일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