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불이 붙기 시작했다 >
49화.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박상준을 보내고 진료 시작 전.
원장실 의자에 앉아 허준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토록 궁금하던 진맥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는 확인을 해 볼 차례.
진맥할 때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잡념을 다잡은 뒤에 하는 것이었으니, 차분하게 눈을 뜬 허준이 오른손으로 왼손의 맥을 잡았다.
눈을 감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들을 느끼자,
‘응?’
나 너무 건강한데?
맥박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그렇다고 가라앉거나 떠 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교과서에 나올법한 건강한 맥박의 표본이었다.
술과 담배를 안 하고 매일 몸에 좋은 탕약을 한 봉씩 챙겨 먹었으니, 가끔 무리한 일정에 피곤함을 느낄지는 몰라도 몸은 굉장히 건강한 상태였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생각했던 효과와는 너무 다른 느낌에 허준이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진료를 시작했다.
본래 박상준 씨가 고정적으로 매일 아침 첫 진료였었지만, 완치로 떠나갔으니.
이제는 1주일에 3~4번씩 진료 시작에 맞춰서 오시는 단골 박덕순 할머니가 1등이 되시겠네.
아니나 다를까.
원장실 문이 열리며 박덕순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어째 오늘은 그 청년이 안 보이네?”
“아, 그분은 이제 완치되었어요.”
“정말? 잘됐네. 다행이야.”
“네. 오늘은 어떠세요? 어디 따로 편찮으신 데는 없으시죠?”
“그게 말이야, 이상하게 어젯밤부터 소화가 조금 안 되는 것 같아. 아무래도 체했나 봐.”
“속이 더부룩하고 그러세요?”
“맞아. 조금 갑갑해.”
자주 오시던 환자분이었기에 허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 한 번도 체해서 오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체질적으로도 위장이 튼튼하신 편인데.
“오늘 아침에 특별히 뭐 드신 거는 없으신가요?”
“아침이야 그냥 일찍 잠에서 깨서 밥 반 그릇 물 말아서 먹고 왔지.”
“그래요? 그럼, 어제저녁에는요? 혹시, 소화가 잘 안 되는 기름진 음식이나 과식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냥 평소대로 먹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진맥부터 한번 잡아볼게요.”
허준이 박덕순 할머니의 맥을 잡았다.
눈을 감고 머리를 비워 손끝에 감각을 집중했다.
뭐야 이거.
맥이 이상하다.
스스로 맥을 잡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여러 가지 감각들이 손끝을 통해 느껴진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적이지가 않아.’
본래라면 규칙적으로 뛰어야 할 맥의 사이사이가 듬성듬성 비어있는 것 같다.
이전 같으면 느끼지 못했을 만큼의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진맥의 능력을 통해 허준은 손끝으로 그 미세함조차 감지해낼 수 있었다.
허준이 감았던 눈을 뜨고는,
“혹시, 여기까지 오시는 길에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지는 않으셨어요? 예를 들어 몸이 무겁다던가, 아니면 발에 힘이 안 들어간다든가 하는 거요.”
“여기까지 오는 길? 나야 뭐 매일 똑같지. 어? 그런데 선생 말을 듣고 보니, 오늘따라 발걸음이 좀 가벼웠던 것 같기도 하고.”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는 말.
좋지 않은 신호다.
“어제저녁부터 손발이 저린 적은 없으세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지금도 살짝 저린 거 같은데. 이것도 체해서 그런 거 아니야?”
허준의 처음 세운 가설에 퍼즐이 맞춰져 간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은 더부룩한 느낌은 위가 아니라 심장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어진 증상들과 결정적으로 손끝에서 느낀 맥박.
‘이건 위험하다.’
허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잠시만요.”
박덕순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그대로 원장실을 벗어나 김 선생을 찾았다.
“김 선생님.”
“네. 원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박덕순 할머니 지금 바로 병원으로 데려다주시겠어요?”
“병원이요?”
“네.”
허준이 짧고 단호하게 말하자, 김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급한 일이라는 뜻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제가 모시고, 바로 다녀올게요.”
“부탁드립니다.”
* * *
아침 진료시간에 나간 김 선생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원장님.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김 선생님. 어떻게 됐나요?”
“의사 선생님께서 큰일날 뻔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뇌경색 오실 뻔했다던데요? 다행스럽게도 거의 시작과 동시에 발견해서 후유증은 없을 것 같다고 하고, 약만으로도 충분히 치료될 거래요.”
“다행이네요. 보호자한테도 연락 드렸죠?”
“네. 제가 병원에 도착해서 직접 통화했어요. 지금은 병원에 계시고요.”
김 선생의 대답을 들은 허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첫째로는 환자로 오시던 박덕순 할머니의 건강이 다행이었고, 둘째로는 한의원에서 큰일이 날 뻔한 것을 미리 방지했기 때문이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김 선생님.”
“아니에요. 박덕순 할머니가 괜찮으셔서 다행이죠.”
“그보다 점심 드셔야죠?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그렇게 허준한의원의 점심시간.
허준을 비롯한 네 명의 식구가 점심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유도진도 아침에 있었던 일을 들은 터라, 걸으면서 허준에게 물었다.
박덕순 환자의 경우에는 본래 정우한의원에 다니시다가 넘어오신 분이라서, 유도진도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원장님. 박덕순 환자는 괜찮으시답니까?”
“네. 다행스럽게도요.”
“다행이네요.”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를 보러 온 환자가 한의원에서 쓰러지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마침, 김 선생도 궁금했는지 허준에게 물었다.
“원장님.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뭐를요?”
“박덕순 할머니요.”
“아~ 그거요? 사실 저도 잘은 몰랐어요. 그냥 박덕순 환자분이 진료받으러 자주 오시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다르시더라고요.”
“달랐다고요?”
“네. 여태까지 다니시면서 처음으로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하시던 분이시라 의문이 들었죠. 거기서부터 시작됐어요.”
허준의 대답에 김 선생과 윤 선생이 아~ 하고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맥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허준이 뒤에 이어진 대답을 삼켰다.
이것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에는 꽤 복잡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증상들을 하나씩 물어봤더니, 대답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알 수 있었죠.”
“대단하세요. 원장님.”
“그러게요. 어떻게 그렇게 꼼꼼히 진찰하셨지.”
두 선생 옆을 걷던 유도진이 허준을 슬그머니 바라봤다.
물론, 허준이 말한 대로 꾸준한 단골 환자였기에 평소와 다른 증상에 묻고 답하고 하며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상황임이 분명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나고 나서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이는 필시 진료 순서상 가장 먼저 시작되는 진맥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 터.
‘침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우한의원 시절에도 김정우 선생님이 진료를 보시는 중에 구급차를 몇 번 부른 적이 있었다.
그들 모두의 경우는 아니었으나, 몇몇 환자들은 덕분에 지병이 악화하여 큰 병이 되기 전에 방지할 수 있지 않았던가.
이미 탈이 나서 아픈 것을 치료하면 용하다고 소문이 나지만,
탈이 나기도 전에 방지하는 것.
그것은 그야말로 신통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일행은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시죠.”
허준이 해맑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 * *
종로에 있는 닭한마리 골목.
보글보글 끓고 있는 닭한마리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박상준과 그가 존경하는 선배이자 큰형과 같은 최영준이었다.
둘의 인연은 당연히 산에서 시작되었으며, 최영준은 현재 산악 잡지의 기자로 근무 중이었다.
한국에서 등산은 취미에 해당하는 스포츠인지라, 산악인의 삶은 결코 풍요롭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아르바이트나 겸업은 모두 기본적으로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닭 한 마리 골목에서 산악인들이 자주 모이게 되는지도 몰랐다.
값싸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상준아. 너 정말 완치된 거냐?”
“네.”
최영준의 물음에 박상준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고는 자신감 넘치게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와...”
“장난 아니죠?”
“진짜 다 나았네?”
“그럼요. 감각도 다 돌아왔어요. 오늘 북한산에 살짝 갔다 왔는데, 완전 똑같아요.”
최영준이 눈앞에 있는 발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도 산악인이었던지라, 처음에 박상준이 보내온 사진을 보고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차마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도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출국 전과 같잖아?’
박상준도 그런 최영준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당장 치료를 하면서 본인도 믿기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상준아 거기 어디야? 네 발 낫게 해준 곳.”
“아, 허준한의원이라는 한의원이에요.”
“거기는 오늘 인터뷰 기사 쓸 때 꼭 넣어야겠다. 그럼 운명이 바뀔 사람들이 꽤 많을 거 아니야?”
“아마도요.”
박상준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차례 발 자랑이 끝나고 최영준은 박상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여기서 끝내겠다고?”
“네.”
최영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상준의 산에 대한 열정과 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너 동상도 완치됐잖아. 내가 돌아다니면서 강의도 좀 잡아 주고 기업 후원도 알아보면 이제 등산하기 훨씬 환경이 좋아질 텐데? 아깝지 않아?”
“아깝죠. 그래서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네. 그런데, 아시잖아요? 이번에 다녀오고 어떻게 됐는지.”
“그거야, 이번에는 가서 잘 관리하면 되지. 요즘에 너 같은 산쟁이가 어딨다고.”
“죄송해요. 치료하면서 어머니랑 약속했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등산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이제 위험한 곳은 조금 피해서 다니려고요”
“그럼, 네 꿈은 어쩌게? 거기가 네 꿈이 있는 곳 아니었어?”
“그랬죠...”
박상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런데,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새로운 꿈? 어디, 이번엔 어떤 산인데?”
“대학교에 가려고요.”
“대학교?”
“네. 한의대요.”
최영준이 박상준을 바라봤다.
산악인 박상준을 처음 산에서 만났을 때의 고집스러운 눈빛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진심이라는 뜻이다.
하긴, 요즘 세상에서 산악인이라고 해봐야 결국 그 끝이 어떻던가.
당장에 이 닭한마리집 사장님이 자신을 산악인의 길로 이끈 대선배님이 아니시던가.
자신도 이제는 잡지사의 기자를 하고 있고.
“진심이구나?”
“네. 이번에 직접 겪고 나니까, 이제는 제가 직접 동상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더라고요.”
“공부 많이 해야 할 텐데, 자신 있어?”
“저 아시잖아요? 근성 하나는 끝내주는 거.”
대답을 들은 최영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다. 더는 말하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온라인에 올라가는 청년 산악인 박상준의 인터뷰가 올라갔다.
에베레스트의 초오유를 등반한 산악인 청년 박상준.
심한 동상으로 꿈을 잃을 뻔한 그가 한의학의 도움으로 완치되었다. 본 기자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그야말로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날 만난 박상준은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밝히며 ···.
그리고,
허준한의원의 전화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