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여기로 주시죠 >
51화. 여기로 주시죠
환자가 수수께끼를 내는 것 같은 우스운 상황.
의사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이지만, 한의사라면 이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나이가 어린 한의사일수록.
‘오랜만이네.’
그 모습을 본 허준이 이곳에 처음 개원했을 때가 잠시 떠올랐다.
선배들에게 이야기만 들어왔던 이 상황을 처음 겪었을 때 얼마나 당황했던지.
하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의 허준은 달랐다.
환자가 수수께끼를 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찰의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망문문절 중에서 문진 하나만 빠진 상황.
허준의 눈이 최은정을 향했다.
안색과 눈빛 그리고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관찰했다.
‘눈빛이 총명하지 못하다.’
이는 장기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어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환자에게서 약간의 알콜향이 났다.
어쩌면 향수 냄새일지도.
마지막으로 허준이 최은정의 진맥을 잡았다.
눈을 감고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니,
‘맥은 부드럽다 하지만, 미약하면서도 진폭이 적다.’
혈기가 허하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반대쪽 손을 잡았다.
역시나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심장을 주관하는 맥이 굉장히 약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허하다.’
한의학적으로 심장은 정신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기.
여기에 더해서 그녀의 옆에 나타난 퀘스트.
허준이 여태 찾아온 환자들에게 퀘스트가 나타난 것을 생각해보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병환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번이 아니라 두 번, 그 두 번이 세 번이 되면 이는 더는 가설이라고 볼 수 없겠지.
화상을 입은 아영이가 그러했고, 동상의 박상준 환자가 그러했으니 지금 눈앞에 있는 최은정 씨도 그러할 것이다.
허준이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피곤하고 몸이 마른 것 같은 모습.
‘심장이 허한 병환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허준이 지금까지 떠오른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자,
동의보감에 적혀있는 증상이 하나 떠올랐다.
심허로 인한 경계와 정충.
요즘 말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공황장애다.
지긋이 눈을 뜬 허준이 최은정에게 말했다.
“심장의 기운이 굉장히 약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몸의 기운도 약한 편이고요. 아마 이 정도라면 평소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할 테고,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식욕도 떨어졌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갈수록 심해졌을 겁니다.”
허준이 최은정의 눈이 커지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을 경계와 정충이라고 하여, 쉽게 말하면 심장의 기운이 약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이 증상이 지속 되면 수승화강의 이치에서 벗어나 음양의 조화가 깨지니, 차가운 기운이 내려가지 못하고 뜨거운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서 병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을 들은 최은정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전부를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비슷하게 맞춘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이미 자신의 증상을 알고 있었고, 병원을 다니면서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먹다가 약물 의존성이 너무 높아지는 것 같아 혹시나 싶어서 한의원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던 와중에 이웃집에 계신 할머니가 자기가 다녀본 한의원 중에서는 가장 용하다고 해 혹시나 싶어 완본 것인데.
‘그게 진짜일 줄이야.’
상황이 바뀌자 최은정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무례했죠?”
“괜찮아요. 가끔 그러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최은정이 허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치료할 수 있을까요?”
“일단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그렇게 최은정은 허준의 물음에 순순히 이실직고 하기 시작했다.
진단은 역시 공황장애였으며, 현재는 약을 잠시 끊은 중이라고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하였고, 당연히 식욕도 약해져 음식을 거를 때가 많아 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월경조차도 완전히 불규칙적인 상황.
허준이 처방을 내렸다.
“침과 뜸 그리고 탕약까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침술과 뜸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몸이 축난 상황에서는 탕약만 한 것이 없다.
최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뜻이리라.
“그럼, 우선 침과 뜸부터 시작하죠. 그리고 탕약은 이틀 뒤에 오셔서 찾아가시면 됩니다.”
* * *
그날 저녁.
진료가 끝난 허준한의원.
탕약실에는 허준이 옹기 탕약이 앞에 붙어 탕약을 달이고 있었다.
지난번에 유도진 선생님에게 이미 사용법을 배운 터라 오늘이 허준의 첫 도전인 셈.
그런데,
「포인트를 20 획득하였습니다.」
탕약을 완성하니 포인트가 20이나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전에 사용하던 탕약기로 달일 때는 분명 10밖에 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원장님.”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유도진이 허준을 불렀다.
그의 옆에는 사람 좋게 생긴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고요한이라고 합니다. 선배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저도 유도진 선생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허준이 먼저 손을 내밀어 둘이 악수를 했다.
입원실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유도진 선생님이 친한 후배를 데려오고 싶다며 적극적인 의사를 표했다.
이에 허준도 흔쾌히 응했다.
아무래도 입원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일요일에도 진료를 봐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화상과 동상환자를 치료할 때에 토요일, 일요일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치료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허준과 유도진은 휴일의 조율과 그 휴일에 대신 나와 자리를 채워줄 한의사 선생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한약 냄새야 어차피 저희의 숙명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고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도진을 동경하던 한의사로 대학교 후배라고 했다.
유도진이 엄청난 한의사를 발견했다고 하니, 당장에라도 당직으로 근무하던 요양병원을 그만두면서 이렇게 나올 수 있었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배워가면 그것이 곧 미래의 자산이 될 테니까 말이다.
“유도진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기본적인 진료는 다 하실 줄 아신다면서요?”
“네. 그래서 개원을 하려던 찰나에, 이왕이면 좀 여유롭게 개원하고 싶어서 잠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허준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진이 그런 허준에게 말을 덧 붙였다.
“솜씨는 꽤 있는 친구입니다. 아마, 바로 진료에 들어가도 크게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모자란 부분은 제가 직접 지도도 할 생각입니다.”
“유도진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굳이 더 물을 필요도 없겠네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내일부터 나와서 분위기를 파악하면서 익숙해 지시면 진료에 들어 가시죠.”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고요한 선생님.”
이렇게 또 한명의 한의사가 허준한의원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럼 일단 한의원부터 둘러 볼까요?”
그렇게 원장실과 부원장실. 그리고 탕약실과 창고 약재함 등등을 한 바퀴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공사 중인 2층.
드르르르륵-
계단을 오르는데 아직까지 공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도 공사하나봐요?”
입원실 문을 열자,
마스크를 낀 남자 하나가 천장에 조심스럽게 나사를 박고 있었다.
그가 2층으로 올라온 허준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선생님?”
“아직까지 남아서 뭐하시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다 퇴근 한 것 같던데.”
“아~ 이 끝부분 몰딩이랑 마감처리가 좀 덜된 것 같아서요.”
대답하는 남자는 김태현.
서울역에서 허준이 돌아간 입을 고쳐준 장본인이었다.
그는 이제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쉼터 직원이 소개해준 인테리어팀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기에 이번 실내 공사를 김태현이 속해있는 인테리어 업체에 맡긴 것이었다.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니에요? 좀 쉬엄쉬엄 하시지. 그러다가 또 입돌아갈 지도 몰라요. 태현 씨.”
“선생님도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혹시 환자들이 오며가며 이 끝부분에 다칠지도 모르니까요.”
“뭐, 저야 감사하긴 합니다만.”
“감사는요 무슨, 돈 받고 제가 해야 할 일 하는 거죠.”
김태현이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비볐다.
“저녁은 안드셨죠?”
“네. 아직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다같이 저녁이나 먹을까요?”
허준의 물음에 유도진을 비롯한 고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의 마지막이 김태현으로 향하자,
“그럼, 금방 정리만 하고 나갈게요.”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뿌듯한 허준이었다.
* * *
다음날. 토요일 아침.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허준이 코를 훌쩍이며 한의원으로 출근했다.
한의원에는 두 한의사 선생님과 김 선생님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딸랑거리는 문소리에 김 선생이 가장 먼저 인사했다.
“오셨어요.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들은 벌써 하셨나 보네요?”
“네.”
김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진 선생님뿐 아니라 고요한 선생님도 이렇게 일찍 출근해 있을 줄이야.
아니지. 제일 이상한 건 역시나 김 선생님이네.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타 마실게요.”
그렇게
곧이어 윤 선생님이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고요한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고요한 선생님. 윤다희라고 해요.”
그렇게 시작된 진료.
고요한 선생님은 오늘 유도진 선생님의 방에서 함께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환경에 조금 익숙해질때까지는 아는 사람과 함께 하는 편이 훨씬 좋겠지.
토요일의 진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순탄하게 끝났다.
진료시간이 짧은 데다가, 날이 갑자기 추워서인지 나이가 좀 있으신 단골 환자분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상으로 이곳을 찾아온 환자들은 더 빠르게 진료를 볼 수 있었지만.
그때, 한의원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자.
데스크 업무를 맡고 있던 윤 선생이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무슨 일이신지...?”
“원장님 계신가요?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원장님이요?”
“네.”
왠지모르게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에 윤 선생이 경계했다.
다짜고짜 원장님을 찾다니,
그때, 치료실을 정리하고 나온 김 선생이 그를 알아봤다.
“어?”
“선생님도 계셨군요.”
남자가 들어와 김 선생에게 반갑다는 듯이 다가갔다.
김 선생이 그런 중년인에게 물었다.
“어머님은 좀 괜찮으세요?”
“네. 선생님 덕분입니다.”
중년인의 정체는 며칠 전 허준이 병원으로 보낸 박덕순 할머니의 아들, 최충현이었다.
그가 꼭 한번 원장님을 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며 한의원을 찾아 온 것이었다.
“원장님 뵈러 오셨죠?”
“네.”
그렇게 원장실.
“원장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이요?”
가운을 벗고 혜민서 활동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던 허준이 고개를 돌려 최충현을 바라봤다.
대체 누구지?
최충현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허준의 손을 두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허준의 눈이 김 선생에게로 향하자,
그녀가 입모양으로 박덕순이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허준.
“아닙니다. 운이 좋았죠.”
“제가 따로 어떻게 감사를 표할 길은 없고, 이거라도 받아 주십시오.”
최충현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허준에게 들이밀었다.
허준이 그것을 보고 두 손을 흔들어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이러면 불법이거든요.”
“그래도, 받아 주십시오. 선생님.”
“죄송한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머니에 자꾸 봉투를 넣으려는 최충현과 그것을 막은 허준.
그 실랑이 끝에,
“정 그러면 여기로 주시죠.”
허준이 책상위에 있는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박 원장이 만들어둔 모금함이었다.
“여기는 불법이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