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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52화 (53/230)

< 52화. 미소가 피어났다 >

52화. 미소가 피어났다

허준 한의원 부원장실.

유도진이 옆에 앉아서 자신이 말한 것을 열심히 받아적고 있는 고요한을 바라봤다.

‘저 열정은 변함이 없군.’

학부 시절에도 별명이 필기 왕이라 불리던 고요한이었다.

세세한 것까지 하나하나 적어둔 저 습관이 그가 꽤 실력 있는 한의사가 된 비결이기도 했다.

이어서 유도진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시계로 향했다.

토요일인 오늘은 혜민서 활동이 있는 날.

정확한 성격처럼 시간도 칼같이 지키는 유도진이었기에 필기 중인 고요한을 불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도 수고 많았어.”

“오늘 진료도 끝났는데 오랜만에 둘이서 밥이나 먹을까요?”

고요한의 제안에 유도진이 고개를 저으며 단칼에 거절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그 대답에 고요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유도진의 성격을 아는 탓이었다.

무뚝뚝한 성격의 완벽주의자.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한의학에 관한 탐구뿐.

때문에, 진료가 끝나면 언제나 한의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집으로 향하던 그였는데 약속이라니.

유도진이 그런 고요한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외투와 가방 그리고 한쪽에 놓여있는 탕약들을 챙겼다.

자신이 직접 달인 것들이었다.

그렇게 두 한의사가 부원장실을 나섰는데,

원장실 문 앞에 김 선생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때, 열려있는 문틈으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큰소리가 아닌 것을 보니 안 좋은 일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조금 더 다가가서 원장실을 보니 허준과 한 남자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김 선생에게 물었다.

“김 선생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박덕순 할머니 보호자께서 감사하다고 원장님을 찾아오셨어요.”

그 대답에 유도진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지는 않지만 음료수라던가 과일 또는 저렇게 봉투를 건네는 어르신들이 간혹 계셨으니까 말이다.

그때, 옆에 서 있던 고요한이 유도진에게 물었다.

“선배님. 대체 저게 무슨 일인지...?”

“흠, 말하자면 좀 긴데-”

유도진이 당시 벌어졌던 일을 최대한 압축해서 간략하게 고요한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고요한이 유도진을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에이~ 선배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저 놀리시려고.”

유도진이 그런 고요한을 바라봤다.

하긴, 자신도 허준과 같이 일하며 직접 겪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었겠지.

유도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튀어나온 것은 데스크에서 마감을 끝낸 윤 선생의 목소리였다.

“어? 그거 정말인데. 고 선생님이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요. 저희 원장님이···”

윤 선생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요한은 유도진을 연신 바라봤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진짜냐는 의미였다.

유도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여기 엄청난 한의사가 있다고.”

*   *   *

“윤 쌤 주말 잘 보내세요~”

“김 쌤도요. 참, 오늘이죠? 아는 동생 만나러 간다는 날.”

“네. 맞아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윤다희가 김예진에게 말한 것은 바로 새로운 직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며칠 전에 허준이 두 선생을 불러서 혹시 지인 중에 간호사가 있는지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윤다희야 당연히 영업 쪽에서 근무했던 터라 간호사라는 직업과 딱히 접점이 없었지만, 김예진은 달랐다.

과거 특전사 시절에 만났던 인연 중에는 전역 후에 소방서라던가 경찰특공대 또는 간호사와 같이 여기저기로 퍼진 인맥들이 꽤 많았다.

이 중에서 간호사는 직접 간호사로 근무하기보다는 구급대원이 되기 위해서 간호사 자격증을 딴 것이겠지만.

오늘 만나기로 한 것은 그중 한 명으로,

김예진이 가장 아끼는 후배 중 하나였다.

허준한의원의 문을 잠그고 나선 김예진.

그녀는 주차장으로 시동을 걸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강남의 한 카페.

‘2시까지 만나기로 했지.’

그녀의 손목에 있는 시계가 13시 57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기다리자, 180은 넘을 것 같은 건장한 사내가 거친 숨을 내쉬며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카페를 한번 둘러보고는, 앉아있는 김예진을 단번에 알아보고 후다닥 달려오더니 경례를 했다.

“단결.”

김예진이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철이. 좀 늦었네?”

“죄송합니다. 선배님.”

“장난이야. 장난.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단결은 무슨.”

“아, 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제가 사 오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사줄게.”

그렇게 둘은 음료를 주문하고는 마주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몸은 좀 괜찮아?”

“네. 재활 치료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도영철이 김예진에게 웃으며 답했다.

의병 전역. 훈련 중에 무리한 탓인지 그는 허리에 문제가 생기면서 입원을 했고,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전역을 한 몸이었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그런데, 선배님. 오늘 무슨 하실 말씀이 있다고...”

“아, 미안. 오랜만에 반가워서. 내가 말이 좀 길었지?”

군대에서 만난 인연인 만큼 길게 말하기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짧고 간단명료하게 대화하는 것이 익숙한 두 사람이었다.

“내가 요즘에 한의원에서 근무 중이거든.”

“선배님이요?”

도영철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김예진을 바라봤다.

군대에서야 사건으로 인해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한의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는 김예진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신념에 따라 움직이던 사람인데, 한의원에서 일하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간호사 자격증을 따면서 간호조무사에 관한 이야기도 꽤 들었던 터라,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도영철이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이네?”

“아닙니다.”

“뭐, 이해를 바라지는 않아. 말했듯이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이제는 내가 네 상관도 아니니까.”

여전히 낯선 김예진의 모습에 도영철이 자연스럽게 발뺌했다.

물론, 김예진은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하고 있는 한의원에서 이번에 입원실을 만들게 되었어. 그래서 간호사가 필요한데, 마침 네가 생각나더라고. 어때? 같이 일해 볼 생각 있어? 조건은 생각보다 좋을 거야.”

도영철이 잠시 고민하다가, 앞에 앉아있는 김예진이 어떤 사람인지를 떠올렸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지키는 사람. 그래서 후임들이 언제나 좋아하지 않았던가.

마침, 일하고 있는 병원의 계약 기간도 끝나가니 일정 조율만 된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달까지는 계약이 되어있어서 다음 달부터 출근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그래 봐야 다음 주인걸.”

그 시각.

혜민서 팀을 태운 두 대의 차량이 주차장에 멈춰 섰다.

“어우~ 공기 좋네.”

문이 열리고 내린 선생님들이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봤다.

고층 건물 대신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벌거벗겨진 나무들.

경기도권에 있는 양로원에서 보이는 정경이었다.

봉사 팀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박 원장이 양로원에서 직접 의료봉사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양로원을 정면으로 바라본 허준의 눈앞에는,

<푸른 하늘 양로원>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700

* 남은시간 : 8시간 27분

퀘스트가 나타나 있었다.

오늘은 차가 좀 막혀서 남은 시간이 꽤 줄어들어 있었지만,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

늘어난 혜민서 팀원들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3명. 그리고 4명, 5명···.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사람들이 오늘은 8명이나 되었다.

허준한의원에서만 3명, 태용한의원에서 2명 그리고 같이 참여 의사를 밝힌 옆 동네의 한의사 선생님들이셨다.

허준이 그들을 한번 스윽 둘러보고는 말했다.

“자, 들어가시죠.”

그렇게 일행이 가져온 탕약과 도구들을 챙겨 발걸음을 옮겼고,

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고요한의 어깨를 유도진이 두드렸다.

“가자고.”

아침에 진료가 끝나고 유도진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얼떨결에 따라오게 된 고요한이었다.

이게 전부 공부라나.

그렇게 양로원으로 들어서자,

양로원을 맡은 원장님이 나와 한 명씩 악수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트렁크에서 꺼내온 탕약과 감기에 좋은 가루약 등을 직원들에게 건넸다.

“이건 감기약이고, 이쪽은 탕약입니다. 이렇게 날씨가 쌀쌀해질 때 도움이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진료 시작하죠. 벌써 2시가 넘어서.”

“아, 네.”

*   *   *

여태까지 들렸던 곳과는 다르게 양로원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곳으로, 대부분 퇴행성 질환은 기본적으로 달고 사시고 계시는 중이었다.

허준의 침이 환자들의 관절과 경락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고통이 완화된 환자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진료를 이어가던 허준의 앞에는 침대에 누워계신 할아버지가 계셨다.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거동조차 불편하다고 하시는 분이었다.

허준이 진맥을 잡았다.

맥이 약하다.

어디가 나쁘다거나 병이 있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이는 자연적으로 약한 것이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미 타고 태어난 모든 기운이 소진되어 버린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법.

그렇기에, 허준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해맑게 웃어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건강하다고 말하는 선의의 거짓말뿐이었다.

“건강하시네요.”

“그렇지?”

“네. 아주 건강하세요.”

허준의 말에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본 고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옆에 서 있던 유도진은 그 모습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선배님. 저게 대체...?”

“이해가 안 되지?”

“네.”

“네가 보기에 환자의 상태는 어떤 것 같아?”

“그야, 연세도 있고 하시니 사실상 치료가 크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한의학적으로나 현대의학적으로도 딱히 크게 도움이 될만한 상황은 아닐 테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지금 침대에 누워계신 할아버지는 무려 90세가 넘으신 분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과거 파병으로 인한 병력도 있으시다고 들었으니, 굳이 진료를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맞아. 그런데 왜 우리 원장님은 저런 말을 했을까? 또, 환자는 그에 답하는 걸까?”

“글쎄요...”

“이건 내 생각인데.”

유도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죽음 앞에 선 환자를 동정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해.”

“동정하지 않는다고요?”

“그래. 우리 같은 의료업 종사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지.”

“그렇겠죠. 당장 지금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게다가 이런 곳에 있는 환자들은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거든. 그런데, 우리 원장은 그게 없어. 아마 거기서 위안을 얻는 게 아닐까 생각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존중. 동정받지 않은 삶 말이야.”

고요한이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눈으로 유도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저 앞에서 환자의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원장이라는 것도.

그렇게 의료봉사가 끝났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들.”

“선생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양로원 원장님과 직원들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박수와 함께 인사했고,

“아닙니다.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같이 인사를 하는 혜민서 사람들의 얼굴에도 따듯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 허준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저 멀리 2층 창가에서 마지막 환자였던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 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정말 멋진 미소네.’

그 미소를 본 허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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