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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56화 (57/230)

< 56화. 다 어디로 갔어 >

56화. 다 어디로 갔어

그녀의 병은 이미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음에도 재발했다고 한다.

더해서 치료 후 몇 달간 푹 쉰 다음에도 재발이 된 굉장히 보기 드문 사례.

그렇다면 애초에 순서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손목과 엄지에서 시작된 병이 검지와 중지로 확장해 나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중지에서 시작된 무언가가 손목과 엄지에 악영향을 끼쳐 드퀘르뱅이라는 방아쇠를 다시 당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것이 허준의 생각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손가락부터 시작된 경락이 몸의 오장육부와 서로 엮이고 엮여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봤으니,

중지의 수궐음심포경.

즉, 심장으로 이어진 경락이 가장 먼저 의심이 간다.

‘진맥에서도 심장의 맥이 팔딱거림을 느낄 수 있었지.’

허준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가기 시작했다.

심장을 보하는 심정격의 혈 자리를 침으로 보사하고, 환부에는 염증에 뛰어난 약침을, 마지막으로 탕약으로 몸의 회복력을 끌어올린다.

치료계획을 세운 허준의 눈에 앞에 앉아있는 최서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저 자세로 앉아 계시네.

그녀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앉아있었다.

피아노를 오래 쳐서 그런 것일까.

“최서윤 님.”

“네?”

“혹시 평소에도 그런 자세로 앉아 계시나요?”

“그게 무슨...”

갑자기 앉아있는 자세를 묻자 당황하는 최서윤이었지만,

곧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가 원래 피아노를 칠 때도 자세가 이렇게 되거든요. 이제는 워낙 습관이 되어서요.”

대답을 들은 허준이 머릿속에서 맞춰가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아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본적이 있어.’

언젠가 봤던 자료가 떠올랐다. 흉추 4번의 좌우에 있는 궐음수라는 혈 자리.

심포경의 배수혈이자 족태양방광경에 속한 혈 자리로, 이곳 또한 심장의 치료에 쓰이는 혈 자리였다.

허준이 봤던 자료에는 양손의 중지에 염증이 자주 생기던 환자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때에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가 여기저기를 돌다가 나중에야 치료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약침과 삐뚤어진 자세를 교정하여 좋은 예후를 얻었다고 했었지.

어쩌면 이것도 만성이 되는 데에 이바지한 것일지도.

허준이 최서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치료계획은 완성되었다.

“혹시 약침에 대한 거부반응은 따로 없으셨나요?”

“네. 다 괜찮았어요.”

“그럼, 우선 엄지를 비롯한 손가락과 손목의 염증은 약침으로 다스려보도록 하죠.”

최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회복을 위해 심장과 간에 좋은 탕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아침저녁으로 챙겨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굳세게 대답하는 최서윤.

그녀의 의지가 허준에게까지 느껴져 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나요법까지 해보도록 하죠.”

“추나요? 그건 자세교정을 하는 치료 아닌가요?”

“비슷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추나의 기본은 뼈와 근육을 바로 잡아 신경과 경락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치료법이거든요.”

“그럼, 손가락과 손목에 하실 건가요?”

“아니요. 허리와 등에 할 겁니다.”

최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허준을 바라봤다.

허준이 설명을 붙였다.

“한의학에서는 만성질환에 대해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발해서 생긴다고 봅니다. 최서윤 님께서는 소염제, 항생제부터 약 그리고 침 등등 이미 다 해보셨다고 하셨죠? 수술만 제외하고요. 그런데도 아직 완치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재발하여 악화 중이라고 하셨고요.”

“네...”

“저는 그 원인이 최서윤 님의 세 번째 손가락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손가락이요?”

최서윤의 눈이 커졌다.

손목도 엄지손가락도 아닌 세 번째 손가락이라니,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허준이 책상 위에 있는 인체 모형을 볼펜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세 번째 손가락에 염증이 생기고 이게 손목에 악영향을 끼치고 이것이 재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여기 선이 보이시죠? 이것을 경락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세 번째 손가락부터 이어진 선이 심장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침과 약으로 심장에 도움이 되는 치료를 하는 거고, 여기서 보시면 이 줄 가운데 있는 이 자리도 또 심장과 연관이 아주 깊은 자리입니다.”

최서윤이 앞에 있는 모형 인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볼펜으로 가리킨 곳이 어깨와 등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서윤 님의 자세는 평소에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에, 나쁜 영향을 줬을 테니 치료하는 김에 그것도 같이 치료해 볼 생각입니다.”

그 친절한 설명을 들은 최서윤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경락이라던가, 혈 자리 등에 관한 이야기를 일반인인 최서윤이 전부 이해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허준의 말이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게 들리는 이유는,

여태 다녔던 병원들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알겠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   *   *

드르르륵-

“도 선생님. 그게 마지막이죠?”

도영철을 부른 것은 허준한의원 식구가 아닌 김태현이었다.

그가 마무리 작업을 하는 김에, 입원실에 들어오는 기구와 물품들이 들어오는 것을 돕고 있었다.

“네.”

도영철도 당연히 그런 김태현이 싫지는 않았는지라, 둘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마침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담배를 피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이 컸다.

“이것만 마무리해놓고 잠시 쉬죠?”

“좋죠~”

그렇게 허준한의원 건물의 옥상으로 향한 두 사람.

낡은 상가지만, 나름 흡연장이라고 만들어 놓은 조그만 정자에서 둘이 각자의 전자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태현 씨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세요? 입원실 공사하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게 열심히 하시던데.”

“그렇게 보였어요?”

“네.”

“다행이네요.”

김태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허준 선생님과 인연이 좀 있거든요.”

“그래요?”

“네. 그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죠.”

허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던 도영철이 김태현에게 물었다.

정확히는 김예진 선배가 왜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지만.

“무슨 인연인데요?”

“이게 또, 말하자면 긴데.”

김태현이 자신이 허준을 만난 날에 관해 이야기했다.

노숙하던 과거에서부터 처음 허준 선생님을 본 날의 이야기, 그리고 구안와사에 걸렸던 이야기와 함께 노숙을 그만두고 새 삶을 시작한 현재진행형까지 이어졌다.

그제야 도영철이 김태현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다큐멘터리에 나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겨서 못 알아봤네.

‘잠깐, 그럼 그게 다 진짜였단 말이야?’

도영철은 당연히 그냥 흔한 광고 같은 거로 생각했다.

간호사가 된 뒤로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다가 보면, 온갖 종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태현이 옥상에서 떨어져 내리는 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 중에서 허준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요?”

“그 정도예요?”

“네.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 있겠죠.”

그날 저녁.

진료가 끝난 허준한의원 데스크 앞에 한의원 식구들이 모였다.

드디어 입원실의 준비가 모두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태현 씨.”

“아닙니다. 선생님. 저야말로 감사하죠. 제가 선생님 한의원의 입원실을 만들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김태현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허준이 그런 김태현의 손에 봉투를 하나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너무 잘해주셔서 조금 담아 봤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냥 제가 신경 쓰여서 한 건데요 뭘.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앞으로 입원실에 온 환자들이 전부 저처럼 치료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가져가세요. 술 사드시지는 말고요.”

허준의 말에 김태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도 참, 저 정말로 술 끊었습니다. 대신에 담배를 피우지만요. 그럼, 이건 감사히 받아서...”

김태현이 봉투를 그대로 혜민서의 모금함에 밀어 넣었다.

“이곳으로 보내겠습니다. 분명, 과거의 저 같은 사람이 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선의를 입은 사람에게서 또다른 선의가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김예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고, 그것을 본 도영철이 놀랐다.

‘선배가 웃을 줄도 아네?’

윤 선생도 이 모습이 훈훈하다는 듯이 바라봤고,

특히, 같이 혜민서 활동을 하는 두 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참, 그리고 허준 선생님 덕분에 여기 건물주 할아버지께서 다른 곳 인테리어도 맡기고 싶다고 하셔서 당분간은 바쁠 것 같아요.”

“잘됐네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했다.

김정우 선생님이 그때 이러려고 물어보신 거였나.

그렇게 김태현이 떠나가자,

“그럼, 이제 드디어 내일부터는 입원환자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네.”

허준의 대답에 유도진과 고요한 선생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오히려 조금 신나 보이는 것은 김 선생과 윤 선생 그리고 도 선생이었다.

“원장님, 질문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럼 내일부터는 교통사고 환자도 받으실 겁니까?”

“글쎄요. 아직 생각은 없는데. 뭐, 아프다고 찾아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마 여기까지 찾아오는 분은 거의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에는 좋은 입원실이 널려 있으니, 굳이 이곳까지 찾아올 리 없겠지.

허준이 유도진과 고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유도진 선생님과 고요한 선생님은 동상 환자와 같이 일일 진료를 꾸준히 봐야 하는 환자들 위주로 입원실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네.”

“입원실은 사실 저희가 환자를 진료하는 데 있어서, 서로 편하기 위한 시스템이기도 하니까 그 부분 잘 생각해 주시고요.”

“네.”

“원장님. 그럼, 내일부터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김 선생님과 윤 선생님은 그대로고 입원실 야간 당직으로는 아시다시피, 여기 계신 도 선생님이 맡아주실 겁니다.”

허준의 말에 도영철이 앞으로 한발 나서며 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입원실과 함께 허준한의원은 365일 진료를 하는 한의원이 되었고,

원장 허준은 주6일 근무, 그리고 두 선생이 번갈아 가면서 휴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날.

“입원실이 생겼다고요?”

“네. 오늘부터 입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지방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던 환자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   *   *

머리를 맑게 해준다는 총명탕.

학교의 고3 형 누나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열풍을 끌던 이 총명탕의 최대수혜자는 따로 있었으니,

한 남자의 손이 허준한의원이라 적힌 상자로 향했다.

그대로 좌우를 살피더니 그 안에 있는 물컹한 봉지 하나를 재빨리 잡아 끌어올리고는 누가 볼세라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좋았어. 가보자.’

들어간 학생의 이름은 이민혁.

이제 갓 고1이 된 그는 졸업 후, 재수학원에서 생활하는 형에게 갈 총명탕을 몰래 빼먹는 중이었다.

물론, 공부를 위해서 빼먹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재능은 공부가 아닌 바로 이곳 히어로 오브 레전드에 있었으니까.

‘간다. 챌린저 승급 전.’

4시간가량 이어진 전투의 결과는 2승 2패.

앞으로 마지막 한판만이 남은 상황.

승패에 따라 갈리는 운명.

긴장과 초조, 그리고 쿵쾅대는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이런 때를 위해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이민혁이 주방으로 향해 한약이 담긴 상자로 손을 넣었다.

어, 뭐야.

다 어디로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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