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한의사-65화 (66/230)

< 65화. 인사나 할 겸 >

65화. 인사나 할 겸

지하철에서 내려 한의원까지 걸어가는 허준의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머라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노래.

봄에는 벚꽃 연금이 있다면 크리스마스에는 이 노래지.

그러고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네.

그 덕에 카페와 식당 등등에도 조그마한 트리 장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한의원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에는 좀...’

그런 생각과 함께 출근.

선생님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 뒤, 원장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따듯하게 덥힌 쌍화탕이 들려 있었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오늘 동상 진료는 고요한 선생님이 한다고 하셨지?

그동안 보고 배운 게 많은 터라, 이제는 종종 먼저 나서서 진료를 자처하기까지 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자극을 받았나 보다.

허준이 자연스럽게 포인트를 확인했다.

오늘내일 정도면 드디어 만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터.

‘침과 진맥.’

뜸과 추나 그리고 탕제도 있지만,

아직은 한의원을 찾는 환자 중에서 침 환자가 제일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나 진맥.

진맥을 얻고나서부터 글로만 보던 한의학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 같은 허준이었으니.

그때, 오늘의 첫 진료 환자의 차트가 올라왔다.

김성호 환자였다.

‘응?’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다니.

출퇴근하는 직장인이었기에 입원도 거부하려던 사람이었는데 출근 시간에 내원하다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허준이 접수를 확인하고,

곧이어 문이 열리며 김성호 환자가 원장실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김성호 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한눈에 봐도 김성호의 얼굴색이 좋지 않다.

게다가 목소리도 힘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행도 : 24%

지난번 진료에서 70 가까이 올라갔었던 진행도가 1/3토막이 나 있었다.

무슨 큰 사고라도 난 걸까.

“이리로 앉으시죠. 아침 일찍부터 웬일이세요? 출근 시간이셨을 텐데.”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병가를 냈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나요?”

“그게... 자고 일어났더니, 어디서 구른 것처럼 온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요?”

허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답하며 김성호에게 말했다.

분명히 잘 치료돼가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안 좋아지다니.

“일단, 진맥부터 잡아 볼게요.”

조용히 손을 내미는 김성호.

허준이 맥을 잡으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맥이 변했다.’

이전에 잡았을 때와는 달라진 맥.

이건 마치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연약한 맥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장육부 중에서 간장과 심장이 허했던 맥에서 심장이 빠지고 위장과 비장의 허증이 더해졌다.

허준이 김성호를 바라봤다.

부어있는 얼굴. 그리고 눈아래 나타난 다크서클까지.

“김성호 님.”

“네...?”

“제가 알려드린 처방대로 잘하고 계신 거 맞죠?”

김성호가 허준의 눈치를 보더니 답했다.

“사실은...”

허준이 김성호의 변명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결국은 치료 중에 금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비단, 한의뿐 아니라 현대의학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

괜찮은데? 이 정도면 다 나은 것 같아.

멀쩡하네. 다 나았어.

등등의 가벼운 생각으로 치료과정에서 당부한 것들을 어기고 병을 키우는 것.

대부분은 젊을수록 그 빈도수가 높았고, 특히 직접 아프지 않은 질환이거나, 처음과 다르게 통증이 많이 완화되는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중에서 김성호 환자는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몸 곳곳에 있던 담을 치료하고 있던 상황.

그것이 음주로 인해 악화되어서 온몸에 급성 통증과 함께 지금처럼 부어오르게 된 것이었다.

‘대체 왜 그랬어요!’

라고 외치고 싶은 허준이었으나, 환자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법.

허준이 감정을 눌러 담으며 김성호를 바라봤다.

그 뜨거운 눈빛에,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

김성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허준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처방을 더했다.

본래의 처방은 담을 다스리기 위한 당귀수산과 간장, 심장을 보하는 침과 함께 약침과 추나로 근육과 신경을 풀어주는 처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모자랐다.

온몸을 다시금 활성화 시킬 수 있는 혈자리.

‘용천혈.’

전신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급성질환에 주로 쓰이는 혈 자리로, 각 장부에 물을 댄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다.

발바닥을 삼 등분 한 뒤, 위쪽의 사람 人 자로 접히는 부위에 있었으니,

한마디로 여기도 아프다는 뜻이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치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스스로 불러온 일인걸.

“김성호 님.”

“네.”

“기존 처방에 더해서, 침 처방을 추가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금방 괜찮아질까요?”

“그건 김성호 님께 달렸죠.”

“이번엔, 정말로 꼭 지키겠습니다. 선생님.”

직접 몸으로 겪은 김성호가 굳게 의지를 다졌다.

“네. 치료실에서 뵙죠.”

그렇게 치료실에서는 김성호의 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김정우의 집.

“자넨 또 무슨 일인가?”

“사람 하고는, 우리가 뭐 일있어야 만나는 사이였나?”

아침일찍부터 찾아온 박진석의 대답이었다.

“차나 한잔 마시려고 왔지. 게다가 곧 크리스마스잖나. 자네 아들이랑 손주들 전부 외국나가있어서 쓸쓸할까봐 왔지.”

“쓸쓸하기는?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스마트폰으로 종종 얼굴 보면서 전화한다네.”

김정우가 코웃음을 치면서 다도 세트를 내왔다.

박진석이 뜨거운 물을 다호에 부어 차를 우리며 물었다.

“근데, 자네 얼굴이 지난번보다 좋아 보이네?”

“그래?”

“그동안 나 몰래 좋은 거라도 먹었나?”

김정우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티가 나나 보다.

허준한의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닌 지 어언 3주째.

공진단과 녹용대보탕의 효과가 나타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최근들어서 피로감이 이전 보다 덜 느껴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몸에는 활력이 돌아와 잠시 손놓고 있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김정우가 박진석의 앞에 있던 다호(찻주전자)를 들어 올리자,

“잠깐, 내가 할게. 자네 그러다가 저번에도 하나 깨 먹지 않았나. 이거 비싼 거라면서. 마누라 살아있었으면 혼났을 거라는 소리를 또 듣고 싶지는 않아.”

박진석이 황급히 말아서며 말했다.

하지만, 김정우는 그 말을 무시한 채, 그대로 들어 올려 차를 잔에 따랐다.

그 모습을 본 박진석이 놀라 물었다.

“자네...?”

“맞아. 손 떨림이 잦아들고 있다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일인가?”

“크흠, 어떻게 된 일이기는.”

김정우의 대답에 박진석이 재차 물었다.

“장난 그만치고 빨리 답해 보게.”

“자네가 지난번에 허준한의원에 데려다줬을 때, 보약을 맞추기 위해서 허준 선생에게 진료를 받았네.”

“그래서?”

“그런데, 허준 선생이 내가 손을 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더군.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가 내린 진단과 똑같이 진단을 하지 뭔가. 그런데...”

김정우가 차를 한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치료 방법이 우리와 달랐어.”

“달랐다고? 어떻게?”

“장기들을 보하는 순서를 바꿔 역순으로 치료를 시작했네. 침으로 비허를, 뜸으로는 심허를, 그리고 간허에는 공진단과 몸을 보하기 위해서 약으로는 녹용대보탕을 처방하더군.”

박진석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처방을 떠올리자,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허준 선생의 머릿속에도 이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일 터.

“허... 그 친구. 볼 때마다 놀라게 하는구먼.”

“그렇지? 처음에 자네가 허준 선생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에는 그저 손재주 좋고 열정 많은 선생이라고 생각했네만, 이번에 진료를 받으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더군.”

“자네 입에서 그런 칭찬이 나올 줄이야. 내가 침쟁이로 살면서 많은 사람을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허준 선생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뭐 어찌 됐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네 말대로 그가 우리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거야.”

김정우의 말에 박진석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복귀라도 할 생각인가? 개원하기에는 타이밍이 애매하니, 차라리 우리 한의원에 와서 선생들 교육이나 좀 해주는 게 어떻겠나?”

“미안하지만, 약속한 게 있어서 말이야.”

“약속?”

“괜찮아지면 허준한의원에 가기로 했거든.”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그러고 보니 나도 허준 선생 얼굴 본 지 오래됐군. 언제 한 번 만나보러 가야겠는걸.”

*   *   *

시장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척목정형외과라 적힌 간판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정형외과 전문의 김형서 원장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년간의 세월을 투자해 얻은 많은 임상경험을 거쳐서 드디어 개원의가 되었으니, 얼마나 뿌듯할까.

비록, X-ray부터 MRI, CT 등 초고가의 장비들로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이곳의 자리 때문이었다.

‘주변에 한의원 두 개뿐.’

물론, 몇 블록 옆에는 대학병원이 하나 존재했지만, 인근의 정형외과는 이정도 규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곧 시작하는 재개발사업이 완성될 때에는, 입구 쪽과 가까웠기에 최적의 위치.

“선배님.”

“어, 왔어?”

김형서가 옆에 온 남자를 반겼다.

이 자리를 추천해준 후배 유재원이었다.

“공사 아주 깔끔하게 끝났네요?”

“다 돈이지 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네. 뭐 한 바퀴 둘러봤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별거 없더라고요.”

“그래도 소문은 좋던데?”

“그래 봐야 한의원이죠. 아, 듣자 하니 뭐 동상이랑 화상 환자들이 가끔 찾아온다더라고요. 그리고 침도 좀 잘 놓나 봐요.”

“침?”

“네. 뭐 발목 접질리고, 체하고, 무릎 아프고 이런 거는 침 한두 방이면 금방 낫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유재원의 대답에 김형서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유명한 한의원이 있다고 해서 살짝 고민하던 터에, 재개발로 사라진다고 해서 곧바로 시작한 개원이 아니던가.

그런데, 침을 잘 놓는다고?

살짝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침이라고 해봐야 어디까지나 약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

맞자마자 당장 효과가 느껴지는 현대의학의 산물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단순한 관절 염좌 쪽에서 치료범위가 살짝 겹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만하다고 생각한 김형서였다.

“또 다른 건?”

“최근에 피아니스트 드퀘르뱅 병 치료했다는데, 그거야 뭐 저희도 경험이 많아서.”

“그렇지.”

김형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형외과 짬밥이 몇 년인데, 그 흔한 드퀘르뱅 병 치료를 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 참. 이건 좀 신기한 건데, 여기 한의원 두 군데가 굉장히 친하다더라고요.”

“그래? 그건 좀 의외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네. 그게 좀 독특한 게, 한의사들끼리 매주 의료봉사도 하러 다니고 그런다던데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한테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봉사활동?”

“예. 그 봉사활동에는 의사나 한의사들 상관없이 연락만 하면 참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확실히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개원한 원장들끼리는 서로 동종업계의 사람이자, 결국은 경쟁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같은 길목에 있는 두 한의원에서 친목을 다지면서 봉사활동을 다닌다니.

일종의 마케팅 같은 건가?

뭐, 굳이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 병원의 주 홍보대사는 운동선수들이었으니까.

그냥 인사나 할 겸,

의료봉사나 한번 나가보면 될 것 같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