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치팅데이로 치면 돼 >
71화. 치팅데이로 치면 돼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힘찬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어제저녁부터 아침까지 이어진 강행군이 결실을 맺고 이제야 잠시간의 휴식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아으~ 죽겠다.”
얼굴의 분장을 지운 최우중이 기지개를 켰다.
앞으로 이렇게 몇 날 며칠을 더 촬영해야 할 텐데, 벌써 지친 기분이 든다.
“고생 많았다.”
그때, 사촌 형인 최승빈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냐. 뭐, 나만 고생한 것도 아닌데.”
“아침 먹어야지.”
“됐어. 그냥 잠깐 차에서 잘래.”
“너 어차피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며.”
“그래도 눈 감고 있어야지 뭐.”
“이왕 그럴 거면 한의원에라도 가보는 게 어때?”
“한의원?”
최우중의 물음에 최승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잠깐 쉬기에는 딱 좋더라고. 적어도 차보다는 훨씬 편할걸?”
“일리 있네.”
어차피 제대로 잠을 못 잘 거면 편안하게 누워 쉴 수 있는 한의원이 더 좋다고 생각한 최우중이었다.
그렇게 알려준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니 눈앞에 나타난 시장 골목.
‘시장 골목은 오랜만이네.’
A급 배우가 되기 이전에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살던 때가 떠오른 최우중이 감상에 젖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눈앞에 보이는 허준한의원이란 간판.
‘그다지 편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최우중은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문을 열었다.
은은한 한약재 냄새와 함께, 최우중을 본 윤 선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요?”
“아, 네. 아직 진료 시작시간 아닌데요.”
최우중이 한쪽에 적혀있는 진료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샘 촬영이 끝나고 아침 식사 겸 휴식 시간이었으니, 현재 시각은 8시 47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최우중씨 맞으시죠?”
“아, 네.”
“저... 사진 한 장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렇게 간단하게 셀카를 한 장 찍어주자,
윤 선생의 얼굴에 한 층 생동감이 돌기 시작한다.
‘대박.. 이런 행운이! 오전에 데스크 하기를 잘했어!’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재빨리 현실로 돌아온 윤다희가 종이를 내밀었다.
“이것 좀 적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최우중이 간단한 정보를 적어 냈고,
토요일 첫 진료환자가 되었다.
허준한의원의 진료는 9시부터지만, 빠르게 진료를 받고 싶은 환자들이 종종 8시 50분 전후로 와 대기를 했다.
그런 환자들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 최우중을 보고 속삭였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디.”
“그러게요. 분명히 낯이 익은데...”
그러다가 조금 젊은 환자가 오자마자 슬그머니 속삭인다.
“저. 최우중 배우님 맞으시죠?”
“아, 네.”
“팬입니다.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것을 시작으로 수군덕대는 대기실.
평소처럼 한의원에 진료 보러 왔는데, TV나 영화에서 보던 사람이 앉아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배우 양반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야?”
“한의원에 왜 왔겠어? 진료 보러 왔겠지.”
“그런가?”
그 시각 원장실.
진료 준비를 마친 허준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활기찬 걸보니, 윤 선생이 오전 데스크인가 보네.’
윤 선생과 김 선생 중에 누가 데스크에 있냐에 따라서 대기실 분위기가 확실히 차이를 보였다.
그렇게 모니터로 올라온 첫 진료환자의 차트를 확인한 허준.
이름이... 최우중? 어디서 많이 보던 이름인데.
데스크로 진료 시작 메시지를 보내자,
원장실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들어왔다.
‘어?’
허준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
이 환자가 그 영화배우 최우중이었어?
과연 배우는 배우인가보다.
연기파 배우라고 하지만, 원장실로 들어오는 모습은 이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뜨거운 배우>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2000
그런 그의 옆에 퀘스트가 나타났다.
퀘스트를 보고 정신을 차린 허준.
‘지금은 내 진료시간이지.’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 주시겠어요.”
최우중이 의자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겨 보였지만, 얼굴빛이 건강한 것과는 거리가 살짝 있었다.
마침, 차트에도 만성피로 때문에 왔다고 했으니,
“영화배우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럼, 진료 시작할게요.”
“네. 크흠.”
“증상에 피곤이라고 적어 두셨던데,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말 그대로예요. 요 앞에서 영화 촬영하는데 밤새워서 촬영했거든요.”
“역시 영화배우도 보통 일이 아니네요.”
“다 그렇죠. 뭐.”
최우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진맥 한 번 잡아볼게요.”
그렇게 허준이 최우중의 손을 잡았는데,
따듯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열?’
이어서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맥박과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기들의 그림들.
손목에서 시작되는 촌, 관, 척 중에서 척의 맥에서 벌렁 임이 느껴져 온다.
이건 신장의 맥인데, 부맥이 느껴진다니.
물 위에 동동 뜨는 느낌이라 해서 붙여진 맥의 이름. 그 힘에 따라서 풍증과 허증을 나타내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것은 허증이었다.
‘신장이 허하다.’
“반대쪽 손도 줘보시겠어요?”
이어서 다른 손.
처음 느낀 따듯함은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손도 따듯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쪽의 맥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장기들의 맥에 비해서 현저하게 느껴지는 신장의 맥.
허증이 확실했다.
허준이 눈을 떠서 최우중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제는 배우가 아닌 완전히 환자로서.
그러자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배우였기에 피부관리로 인해서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맥을 잡은 손목 뿐 아니라, 드러난 피부들이 건조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크흠-
진맥이 이뤄지는 동안 답답한 탓인지 연신 크흠크흠 거리는 헛기침 소리.
허준이 최우중에게 물었다.
“혹시,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나요?”
“아, 그걸 어떻게... 네.”
“입안이 자꾸 마르고 기침이 나오죠?”
“맞아요.”
최우중이 놀랍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제야 허준이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장이 허하고 피부가 건조하며 잠을 제대로 못 이룬다.
그리고 손에서 허열이 나는 증상.
전형적인 음허증이었다.
몸의 진액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반인도 아니고 몸이 곧 재산과 같은 배우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이 음허증이 시작된 원인은 하나였다.
‘무리한 사랑.’
허준의 머릿속에 최근 열애설이 터진 것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퀘스트의 이름이 뜨거운 배우였던 건가.
허준이 처방을 내렸다.
배우인 만큼, 운동과 균형잡힌 식사 그리고 영양분은 알아서 관리할 터.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조금 도와줄 처방뿐.
탕약으로는 숙지황, 산수유, 산약, 목단피, 택사, 복령이 들어간 육미지황탕이 제격이겠어.
그리고 침으로 족태음비경의 삼음교 혈과 음릉천 혈을 보하면 되겠군.
진단을 마친 허준이 최우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침하고 탕약을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요.”
“탕약이요?”
“네. 최우중 님의 증상은 음허증으로, 한의학에서 정의하는 진액이 모자라서 생기는 증상들입니다.”
그냥 편하게 쉴 겸 해서 온 최우중이었기에 허준의 처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언가 말하려다가,
“아마 원인은 여자친구분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것 같네요.”
이어진 대답을 듣고는 헛기침을 했다.
숨겨진 의미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럼, 치료는 어떻게 해야?”
“침 맞으시고, 약 챙겨 드시면서 적당히 관리하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 * *
그렇게 최우중 환자를 시작으로 토요일의 진료를 마감하고 혜민서 활동을 위해 태용한의원으로 향한 식구들.
“선생님들 오셨어요?”
태용한의원의 박 원장이 허준한의원 사람들을 반겼다.
이미 한의원 안에는 몇몇 한의사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가 조금 늦었죠?”
“아니에요. 선생님. 어차피 오늘 출발 시각이 1시 30분부터 인걸요.”
“오늘 몇 명이나 모인 거예요?”
“무려 16명입니다. 기존 멤버들을 합치면 21명이 되죠.”
대답을 들은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뿐히 두 자릿수를 넘어설 줄이야.
그때, 고요한 선생이 박원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장소는 어디로 가나요?”
“고 선생님. 기대하셔도 좋아요. 오늘은 말했다시피 아주 쉬운 곳이거든요.”
당당하게 말하는 박 원장.
이어서 선생님들에게 말했다.
“모두 출발하시죠~”
그렇게 향한 곳은 대로변.
그곳에는 커다란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군용 버스잖아?’
“어때요? 혜민서의 대대적인 활동의 첫걸음으로 안성맞춤이지 않아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들이야 워낙 젊은 데다가, 증상도 가벼운 근골격계 환자나 단순 감기 또는 소화불량 정도가 대부분이었으니 진료가 간단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도 저희가 인원수에 맞춰서 도시락 준비했습니다. 그럼 가보죠.”
그렇게 올라탄 버스.
버스 안에는 운전병과 선탑자인 중사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오늘 선생님들의 수송을 맡은 사단 수송담당관 김우열이라고 합니다.”
“이허준입니다.”
“선생님 소문은 전방에 있던 동기에게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준이 김우열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운전병의 말과 함께 버스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김 원장이 허준을 불렀다.
“허준 선생.”
“네?”
“오늘 아침에 최우중 봤다면서?”
시장이 반이 사라졌는데도, 소문의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진 것 같다.
“네.”
“이야~ 허준 선생 장난이 아니네. 이제는 영화배우도 진료하다니.”
“촬영장에서 가까워서 들린 걸 겁니다. 아마 태용한의원이 가까이 있었으면 그리로 갔을 거예요.”
“허, 자네 말도 잘하는구먼?”
기분 좋게 웃는 김 원장.
그런 김 원장 뒤로 박 원장은 오늘 찾아온 선생 중에 지인이 있는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한강을 지나고 나서 이어진 점심시간.
차 안에서 먹는 도시락이라니, 감회가 남달랐다.
도시락과 후식으로 가져온 커피까지 모두 마시고 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버스가 끼익하고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이어서 들린 운전병의 말.
허준이 창가에서 도착한 곳을 바라봤다.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3000
* 남은시간 : 8시간 54분
3000포인트나 준다고?
이거 웬만한 퀘스트보다 많이 받잖아.
허준이 버스 앞에서 있는 김우열을 불렀다.
“김우열 담당관님.”
“네?”
“여기는 인원이 얼마나 되나요?”
“제가 알기로는 300명 가까이 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김우열의 대답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한의사들이 웅성거렸다.
군대로 의료봉사를 온 것도 신기한데, 그 인원이 300명이라니.
반면, 기존의 혜민서 멤버들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넘쳐났다.
이전에 부대로 의료봉사를 하러 갔을 때도 5명이 100명 가까이 진료를 보지 않았던가.
대답을 들은 허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찾아가는 진료의 포인트 산정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리가 먼 곳과 진료 대상의 수에 비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져도 포인트가 너무 많아.’
그때, 허준의 눈에 저 멀리 홀로 군장을 멘 채 연병장을 돌고 있는 병사가 들어왔다.
* * *
그 시각.
탕약 복용 이틀째인 남승연.
‘이거 뭔가 이상한데?’
한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운동 스케줄을 미루고 처방을 따르는 중이었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였다.
입맛이 너무 돌았기 때문이었다.
참아야 해. 그동안 어떻게 참아 왔는데.
다짐과 함께 TV를 켠 남승연의 손이 빠르게 채널을 넘겼다.
어떻게 트는 곳마다 먹는 거야.
그러다 결국 합의를 본 것은 식단을 위해 만들어둔 도시락.
닭가슴살과 고구마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락을 하나 더 먹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렇게 아침 겸 점심을 겨우겨우 넘겼는데,
저녁이 되자 다시 넘쳐 흐르는 식욕.
‘그래, 하루쯤은 괜찮아. 치팅데이로 치면 돼.’
빠른 합리화와 함께 순식간에 배달 앱으로 주문된 떡볶이 세트.
정신을 차린 순간에는 이미 반이 넘게 사라진 상태이었고, 덕분에 그녀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