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젊은 선생님인 줄은 몰랐네요 >
77화. 젊은 선생님인 줄은 몰랐네요
“그게 어딘데?”
모두가 박소정의 입을 주시한다.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유명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보다 가까운 사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금전적인 여유도 있는 모임이었으니,
달라진 박소정의 모습은 그녀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언니들, 내가 알려준 곳 있잖아.”
최미라가 끼어들었다.
정우한의원도 자신이 처음 사람들에게 소개해준 곳이었으니, 지금 박소정이 보약을 맞춘 한의원도 연관이 있는 곳이니만큼, 아는체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아, 거기? 시장 골목에 있던 곳? 그런데, 거기 없어졌다면서. 네가 그러지 않았나?”
“맞아. 미라가 그랬던 거 같은데.”
“맞는데, 알아보니까 거기 계시던 유도진 선생님이 바로 옆에 있는 한의원으로 가셨거든. 거기서 맞춘 거래. 그치? 소정아.”
“맞아요. 언니들.”
“오... 그래?”
“우리도 한 번 가볼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소정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맞춘 것은 분명 그 한의원이 맞았지만, 선생님이 달랐기 때문이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전에 보약을 맞춰서 먹었을 때보다 요즘이 오히려 조금 더 몸에 힘이 나는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이 겨울에는 내복을 입지 않으면 밖을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는데, 보약을 먹고 난 뒤부터 내복을 입지 않게 된 박소정이었다.
그래.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좋은 것은 나눠야지.
“저기...”
“응? 왜? 무슨 할 말 있어?”
“내가 그 한의원에서 유도진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에게 맞췄거든?”
“그래? 그게 누군데?”
“이허준 선생님이라고...”
* * *
“여기에다가 이것 좀 적어주시겠어요?”
“네.”
중년의 남자가 적어낸 종이를 본 윤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근 들어 늘어난 환자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시기 되면 그래.”
“그래요?”
“그럼, 정우한의원 있을 때도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데.”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이 시기에 평소에는 거의 없던 증상으로 찾아오는 이들.
흔히 말해 술병 환자들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회사에서는 회식도 많이 줄어들고 참여도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연말연시의 시무식과 종례식은 남아있었을뿐더러,
어느새 중년이 된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는지라, 평소에는 제대로 얼굴조차 보기 힘든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송년회나 신년회를 즐기고 나면 이렇듯 병이 나기 마련.
때문에, 얼마 전부터는 아예 허준한의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탕약에서 숙취 해소에 좋은 갈화해정탕을 달여놨을 정도였다.
“박성현 님, 원장실로 들어가실게요.”
그렇게 원장실로 들어선 중년의 남자.
허준이 그를 반겼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최근에 워낙 같은 증상의 환자들이 찾아와 이제는 익숙해진 질환.
허준이 남자의 눈빛과 피부 입술 등을 살폈다.
“진맥 잡아볼게요.”
술병으로 찾아온 환자들의 맥은 거의 비슷하다.
술의 알코올을 해독하는 간과 직접 일차적인 데미지를 받는 위장. 이 두 곳의 맥에서 허증과 담증의 소견이 나타난다.
한의학에서는 술병을 주상이라고 하며, 술은 열성과 독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봤다.
때문에, 적당한 음주는 몸의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이렇듯 과도하게 마시다 보면 열독이 쌓여 병이 난다는 것.
결국, 술병은 이 열독 배출이 관건이었는데, 젊고 건강할수록 하루 이틀만 푹 쉬어도 알아서 금방 회복되었지만, 이렇듯 중년이 넘어가 몸의 활력이 떨어지면 몇 날 며칠을 고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술병에는 역시 이게 제격이겠지.’
술로 인해 손상된 비위와 간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중완혈을 침으로 자극을 주고, 단약 두어개 면 되겠군.
판단을 내린 허준이 남자를 향해 말했다.
“간단하게, 침하고 단약 두 개 정도 처방해 드릴게요. 하나는 치료 끝낸 뒤에 바로 드시고, 다른 하나는 식후에 드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치료실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치료실.
박성현이 윗옷을 벗은 채, 베드 위에 누워있었다.
허준이 침을 꺼내 들고는 배꼽 위로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4치, 약 12cm 정도 되는 자리.
그곳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박성현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불쾌감 때문이었다.
“불편하시죠?”
“네. 뭔가 좀 묵직한 것 같아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 자리가 바로 위장 위에 있는 중완혈이 있는 자리였다.
중완혈은 위 질환 대부분에 효과가 좋은 만병통치 혈 자리라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옛날 한의사들이 일단 중완혈에 침을 놓고 시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을까.
허준이 그대로 침을 놓았다.
그러자 누워있던 남자의 입에서 끄윽- 하는 작은 트림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효과가 좋아.’
그러고는 이어서 바지를 올려 족삼리혈과 체질에 맞춰서 도움이 되는 혈 자리에 두어 개를 더 꽂은 뒤에 커튼을 치며 김 선생에게 말했다.
“김 선생님.”
“네, 원장님.”
“4번 베드는 전기치료 대신에 핫팩으로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뜨끈한 핫팩까지 마치고 나면, 한의원에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컨디션이 되어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단약을 먹고 하루이틀 푹 쉬면서 지내면 평소와 같아질 터.
허준이 원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은 어떤 환자이려나.
* * *
허준한의원에 두 명의 여인이 찾아왔다.
다른 모습을 보아하니 자매는 아닌 것 같았지만, 꽤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디가 아픈거나 안좋은 사람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으니,
‘보약 맞추러 오셨구나.’
남 선생이 단번에 그녀들의 목적을 알아맞혔다.
정우한의원에서 근무할 때, 종종 겪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이허준 선생님한테 보약 좀 맞추러 왔는데요.”
“원장님이요? 이쪽에 적어주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대기실에 앉은 두 여인.
대기실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기 정말 보약 잘하는 곳 맞아?’
‘맞겠지...?’
한의원을 둘러보고는 속삭였다.
본래 허준한의원의 인테리어가 요즘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내공이 깊어 보이는 고전적인 느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범한 사무실과 비슷한 분위기에 가까웠으니.
꽤나 한의원에 다녀본 그녀들로서는 굉장히 낯설 수밖에.
그렇게 10분이 지나도록 기다리는데도 불리지 않는 이름.
이쯤 되니 슬슬 지겨워지던 찰나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다 소리.
“여기 정말 잘하는 곳 맞아요?”
“그럼요. 어머니. 저희 선생님들이 어떤 분들이신데요.”
윤 선생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어머니, 그만큼 사람이 많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요. 우리 선생님들이 잘 보시니까 이렇게 많은 거죠.”
“그런가...”
그때, 데스크에서 할머니의 이름이 불렸고, 윤 선생이 할머니를 모시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또 10여분 뒤,
박영선 님, 원장실로 들어가실게요.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의 이름이 불렸고 원장실 문을 열었다.
허준이 그런 박영선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실게요.”
박영선이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하고는 의자를 향해 걸어가며 원장실을 두리번거렸다. 원장실도 밖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벽으로는 몇몇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 중 하나에는 영화배우도 있었는데,
“어? 저 사진 최우중 씨 아니에요?”
그것을 알아본 박영선이 물었다.
“네. 맞아요.”
최우중이 이곳에 걸린 액자들을 보고는 허준과 어깨동무를 한 채 찍은 사진이었다.
자신도 여기에 걸리고 싶다면서 사인 대신이라며 찍은 것이었다.
“여기 최우중 씨도 다니는 한의원인가 보죠?”
누구나 궁금해할 이야기겠지만,
의사는 환자의 정보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법.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웠으니,
박영선이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이 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너무 없었죠? 호호.”
“아닙니다. 그... 보약 맞추러 오신 거 맞으시죠?”
“네.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시작된 진료.
박영선 씨는 체형이 여자치고 꽤 큰 편이었다.
허리가 굵고 하체가 상체에 비해 두꺼운 전형적인 태음인의 체형.
태음인은 보통 간대폐소라고 하여 간이 크고 폐가 작은 체질이다.
덕분에, 기관지와 폐가 약한 편에 속하여 탈이 잘나고 반대로 간이 튼튼해 간과 관련된 병이 덜 생기는 편이다.
이어서 허준이 몇 가지 물음을 통해서 가족력과 현재의 지병 또는 근래 들어서 생긴 증상이나 질환과 병원에 다녔던 일 등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진맥 잡아볼게요.”
허준이 박영선의 맥을 잡고 눈을 감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다만,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태음인 중에서도 좀 더 완전한 태음인 체질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쉽게 말해 같은 노란색이어도 완전히 노란색과 누런색, 황색, 밝은 노란색 등등이 있는 것처럼 체질도 이와 비슷하다는 의미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바로 노란색 중에서도 아주 진한 그런 노란색, 즉 태음인 중에서도 태음인 성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 정도로 건강하면 녹용대보탕 보다는 오히려 태음조위탕이 좋겠어.’
보통 태음인에게 제일 좋은 약재라 하면 단연코 녹용을 꼽을 수 있었기에 보약이라면 기본적으로 녹용대보탕을 떠올렸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건강이란 것은 어디 하나 튐 없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것.
생각을 마친 허준이 처방을 내렸다.
“태음조위탕이라고 하는 보약이 있는데, 그게 좋겠네요. 거기에 가감을 해 드릴테니, 내일모레 찾으러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이어서 박영선과 함께 온 김미자를 비롯해 하루 동안 6명의 보약을 맞춘 허준.
보약 시즌이 시작됨을 알려왔다.
* * *
토요일 오후. HS정형외과.
김형서가 가운을 챙기며 후배에게 물었다.
“오늘이지?”
“네. 2시까지 시장 골목 앞에 있는 태용한의원으로 모이면 된답니다.”
“준비는?”
“다 해놨죠. 아마 한의원에서 준비한 것들과는 비교가 될 겁니다.”
김형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의학의 약이 어떤 것들이던가.
수많은 학자와 의사들이 검증을 거쳐서 만들어진 세계가 인정하는 의약품이 아니던가.
굳이 현대의학과 한의학을 체급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메이저와 마이너라고 할 수 있었으니.
‘한의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메이저와 마이너의 차이는 어쩔 수 없지.’
김형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동네에서 한의원들이 연합하여 의료봉사로 인기와 함께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고 하니, 이참에 차린 밥상에 수저 하나 더 얹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볼 때 기본적으로 쓰는 X레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후배와 함께 태용한의원 앞으로 도착한 김형서.
“안녕하세요. HS정형외과의 김형서 라고 합니다.”
“어? 오늘 신청하신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동네 분이셨구나, 반갑습니다. 선생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태용한의원 박 원장이 반갑게 김형서를 맞이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허준 일행이 도착했고,
“선배님. 저 사람입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한의사 선생님이.”
후배의 말을 들은 김형서가 허준에게 다가가 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형서라고 합니다.”
“이허준입니다.”
“선생님 이름은 종종 들었는데, 이렇게 젊은 선생님인 줄은 몰랐네요.”
허준이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답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