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윤 선생님 때문에 오셨다고요 >
83화. 윤 선생님 때문에 오셨다고요
움직이기 시작하는 풍경을 보며 허준이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이상할 리가.’
어디 아프거나 사고를 당했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을 터.
보나 마나 동생이 사고를 친 것이겠지.
어머니가 어떤 분이시던가.
IMF 이후 어려워진 집안을 멱살 잡고 캐리해온 그런 엄청난 분이셨다.
그러니 확률적으로 어머니가 이상하기보다는 당연히 동생이 문제라고 생각한 허준은
굳이 이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가기보다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것을 선택했다.
한의학책이었다. 그것도 한문과 한글이 뒤섞인.
허준이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4시간 뒤,
부모님의 치킨집.
“아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반갑게 허준을 맞이했다.
허준이 이전과 다를바 없는 멀쩡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럼 그렇지’란 생각과 함께 엄마를 마주 안았다.
“별일 없으셨죠?”
“그럼~”
“별일? 별일이야 있었지.”
갑자기 주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였다.
“손목은 괜찮으세요?”
“아주 좋아. 멀쩡해.
”그런데 별일이라니요? 어디 다른데 아프신 거는 아니죠?
“그건 아니고, 이따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이거 엄마가 너 치킨 먹여야 한다고 남겨뒀거든. 5분만 기다려.”
이어서 치킨 튀겨지는 소리와 함께,
허준의 앞에 있는 엄마가 두 손에 가득한 짐을 보며 말했다.
“그보다 뭘 그렇게 들고 왔어? 무겁게.”
“아, 이거 가족들 하나씩 주려고 가져왔어요. 집에 가서 풀어보죠.”
그렇게 허준의 집.
집에 있던 동생 이진희가 허준을 보며 심드렁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보, 가족들 오랜만에 다 모였는데,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아들. 니 아빠 봐라. 저렇게 매일같이 술 마실 거리를 찾느라 바쁘다.”
그 말에 허준이 피식 웃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가족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래. 그 가져온 선물 구경이나 좀 해보자.”
“아, 이건 공진단인데.”
“공진단?”
동생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가장 먼저 반응했다.
가격이 꽤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부모님의 반응이 나오기 전에 허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싼 거예요. 제가 직접 만든 거고요.”
“아~ 그래?”
보나마나 비싸고 좋은거라고 하면 서로 먹으라고 양보할 것이 뻔했으니까 말이다.
그럴 바에야 오히려 싼 거라고 하는 편이 부담이 없을 터.
“네. 별로 비싼 거 아니니까, 맘 놓고 드세요. 제가 또 만들어 드릴게요. 물론, 그렇다고 욕심내서 하루에 몇 알씩 드시지는 마시고요.”
“그래? 그거 먹으면 숙취 해소에도 도움이 되려나?”
“물론이죠. 아주 좋을 거예요.”
너무나 당연한 말에 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흔히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보약을 먹으면 술이 물처럼 느껴진다고.
공진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까 별일이 있으시다는 건 뭐예요?”
“아~ 그거?”
“오빠. 여기 우리 집 있잖아. 재개발 들어간대.”
“진짜?”
“응. 이제 사업 초반이긴 한데, 대단지 아파트로 만든다고 하더라.”
정말 좋은 소식이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더니, 이제야 운이 트이려나 보다.
“정말 잘됐네요.”
“그럼. 그러니 준아 걱정하지 말아라. 막말로 한의원 망해도 네가 돌아올 곳은 있으니까 말이다.”
“이 양반이 벌써 취했나. 무슨 그런 악담을 해요? 그것도 설날이 코앞인데.”
동시에, 짜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익숙한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다.
“아니, 여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쯧, 하여간 철이 없어. 그보다 아들. 한의원은 요즘 어때? 괜찮아?”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있던 허준이 한의원을 떠올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굳이 설명이 필요 있을까.
“잘 돼요.”
“그래? 다행이다.”
좀 전까지 강인한 여전사의 분위기를 풍기던 엄마의 눈이 촉촉해졌다.
말은 안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셨나 보다.
‘그런데, 엄마가 저렇게 눈물을 보이신 적이 있던가.’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하네.
아무래도 제대로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작은 방.
본래 이진희의 방으로 설 연휴 동안에는 허준과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침대는 이진희의 차지였지만.
“야, 엄마가 요즘에 좀 이상하다고 그랬지?”
“그렇다니까? 아까 내가 말했을 때는 듣지도 않더니.”
“됐고, 어떤데? 예를 들어서 말해봐.”
“이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설명하기 어려운데, 어디가 아픈 것 같지는 않거든? 근데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운 느낌이야.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달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어차피 온 김에 가족들 진료도 볼 생각이었으니.
“알았다. 잘 자라.”
* * *
다음 날.
설 연휴였기에 치킨집도 며칠간 휴무에 들어갔다.
설날 전후보다는 그 이후의 주말과 연계된 연휴에 매상이 올랐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가족들 모두가 모인 아침 식탁.
보글보글 끓는 찌개가 후각을 자극한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 아들 엄마가 차려주는 밥은 오랜만이지?”
“네.”
그렇게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허준이 물었다.
“식사 끝나고 점심 먹기 전에 가족들 진료 한 번씩 보고 싶은데 어떠세요?”
“진료?”
“그런 거는 한의원에서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진료가 뭐 따로 있나요? 침도 있고, 뜸도 있고, 한의사도 있고.”
“오빠. 진료는 무슨 진료야? 어차피 출근하면 진료 볼 텐데 지겹지도 않아?”
“아니. 늘 새로워.”
그렇게 시작된 진료.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방에서 1:1로 진료를 보기로 정했다.
첫 번째는 동생.
겉으로 보기에도 특별한 증상은 없었고,
“동생아, 요즘도 화장실에서 사니?”
“지금은 멀쩡하거든?”
“또 다른 데는?”
“없어. 나 건강해.”
본인의 입으로도 문제없다고 한다.
진맥도 뭐 그냥 체질적인 요인 정도만 있을 뿐, 특별히 큰 문제는 없었다.
거북목만 제외하면.
허준이 목 주변에 뭉친 근육에 가져온 침을 몇 개 놨다.
이 정도면 충분할 터.
“20분 뒤에 불러.”
‘다음에는 체질에 맞게 약이나 맞춰 줘야겠군.’
이어서 아버지.
역시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곳은 이전에 아프던 손목이었다.
“손목은 정말로 괜찮으신 거죠?”
“그럼, 그때 네가 침놔주고 진희에게 뜸 뜨라고 알려줬다면서? 그거 요즘도 계속해서 그런지, 아주 팔팔해.”
다행이었다.
이후로 이어진 진맥에서는 역시 술 때문에 간의 허증이 느껴졌다.
간허를 보하는 데에 있어서 허준이 가져온 선물이 있었으니,
‘공진단이면 충분하겠지.’
“아빠. 술 좀 줄이세요.”
“오랜만에 집에 와서 너도 잔소리냐?”
“이건 아들이 아니라, 한의사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 진지한 모습에 허준의 아버지, 이도형이 헛기침을 했다.
무언의 대답이리라.
드디어 마지막 환자.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자,
<엄마의 청춘>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1000
퀘스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본 허준은 단번에 엄마의 변화에 대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왜 이것을 놓치고 있었지.’
그동안 너무 무심했나 보다.
허준이 정신없이 한의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엄마의 시간도 흐르고 있었음을.
45세에서 55세 사이에 나타나는 증상. 갱년기.
엄마 성격상 제대로 말은 하지 않고 있겠지만, 이때에는 근육통과 여러 가지 자잘 자잘한 통증이 수반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되면서, 심하면 우울증과 같은 증상도 나타날 수밖에.
물론, 가장 흔한 증상은 얼굴이 벌겋게 열이 오르는 안면홍조다.
허준이 눈앞에 앉은 엄마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아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이리로 오시겠어요?”
일단 진료에 집중하기로 한 허준.
“요즘에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아빠는 손목 다 나았다고 하던데, 제 실력 아시죠? 그러니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바로 말해주세요.”
“조금이라도?”
“네. 어깨나 목, 팔, 다리, 또는 잠이 안 온다던가, 입맛이 없다든가 하는 사소한 것들까지요.”
“그냥 뭐 일하다가 가끔 여기저기 쑤실 때는, 네 아빠가 주물러 주거든. 그러면 금방 괜찮아져.”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듯하다.
“손 좀 줘보시겠어요?”
이어진 진맥.
허준이 눈을 감고 손끝에 집중하자,
‘신장과 심장의 맥이 허하다.’
심장과 신장을 보하고, 수승화강과 표리통기에 도움이 되는 침을 놓으면 도움이 될 터.
아무래도 한의원으로 돌아가면 약부터 맞춰야겠어.
그렇게 침을 놓은 허준.
오늘따라 엄마가 작게 보인다.
엄마의 청춘을 먹고 자랐다는 말귀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다가 허준이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데,
‘그래. 이건 자연의 이치였지.’
갱년기 증상이란 것은 말 그대로 증상일 뿐, 질환이나 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애초에 완치란 개념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퀘스트도 완치라는 개념보다는 관리라는 개념일 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허준은 또 다른 처방을 내리기로 했다.
진료를 전부 마치고 난 뒤에 허준이 부모님께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호텔?”
“네. 치킨집 하시느라 제대로 쉬질 못하셨잖아요. 이럴 때 다녀오시라 끊어 뒀죠.”
“이거 비싼 거 아니야?”
“아니요. 찾아오는 환자분 중에 여행사 하시는 분이 계셔서 싸게 구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부산에 있는 최고급 호텔의 티켓.
식사와 스파까지 전부 합친 예약 티켓은 허준도 아직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상관없었다.
이럴 때 쓰라고 번 돈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것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야.”
“왜?”
“이거 받아.”
허준이 동생에게 용돈을 건넸다.
이 정도면 당분간 충성을 바치고도 남을만한 액수였다.
“이, 이게 뭐야?”
“이건 니 용돈 하고, 이건 부모님 맛있는 거 챙겨드리라고 주는 거야. 혼자 다 쓰지 말고.”
“당연하죠. 오라버니.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돈 잘 버시나 봐요?”
동생의 물음에 허준이 피식 웃었다.
“아마 말해도 안 믿을걸?”
“올~ 자신감. 어쩐지 목이 시원하더라니.”
“됐고,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
“엄마가 이상하다고 그랬지?”
허준의 물음에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갱년기가 오신 것 같아.”
“갱년기?”
“응. 그러니까 엄마랑 괜히 부딪히지 말고, 나도 자주자주 연락 드릴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 노력해 볼게.”
“그래. 그거면 됐다.”
* * *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대한 이 방에 허준의 부모 이도형과 이선영.
“와~ 이런 곳에 다 와보다니.”
“그러게요. 우리가 자식들을 참 잘둔 것 같아요.”
“당신, 괜찮아?”
이도형이 부인에게 물었다.
아무리 눈치 없고 어린아이같이 철이 덜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였지만, 부부로 산 세월이 있는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지 않겠는가.
때문에, 최근 들어서 꽤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그럼요. 괜찮다마다요.”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는데,
엊그제 진료를 하면서 허준이 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엄마. 괜찮아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언제든 힘들면 말하세요. 그게 가족이니까요. 전부 이해해 줄 거에요.”
너무나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랬기에 더 진심이 와닿은 말.
그리고 그 말을 할 만큼 자란 자식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근데, 그 녀석은 온 김에 더 있다가 가지 왜 이렇게 금방 간데?”
“환자 보러 가야 한다나 봐요.”
“환자?”
“네. 자기가 가야 한의원이 잘 돌아간다나?”
“하여간 누굴 닮아서 뻥이 그렇게 심한지 쯧쯧.”
그렇게 출근한 허준.
허준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환자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윤 선생님 때문에 오셨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