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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한의사-86화 (87/230)

< 86화. 잘 아실 듯해서 >

86화. 잘 아실 듯해서

“선배. 연휴 잘 보내셨어요?”

“어, 나야 잘 보냈지. 너는?”

“저도 뭐 그렇죠. 이번에 개원했다고 하니, 다들 덕담 한마디씩 해주시더라고요.”

연휴가 끝난 정형외과에서 김형서와 그의 후배 유재원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보다, 어떻게 이야기는 해보셨어요?”

“이야기? 아, 그거...”

김형서가 무슨 이야기인지 눈치채고는 후배의 이름을 불렀다.

“재원아.”

“네, 선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거 봐봐.”

그러고는 조카 김찬용의 검사자료가 담긴 USB를 건넸다.

유재원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한참을 살피더니,

“뭐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네요.”

“네가 봐도 그렇지?”

“네, 누군데요?”

그것이 김찬용의 검사자료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유재원이었기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하며 되물었다.

“그거 우리 찬용이 자료야.”

“네!?”

유재원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김형서를 쳐다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진짜요? 이거 수술 흔적도 없는데...”

“나도 알아. 그래서 내가 직접 가서 알아보려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통 이해가 되질 않아서 말이야.”

그렇게 허준한의원을 찾은 김형서.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이미 허준 원장에게 따로 연락해둔 상태였다.

당연히 시간은 진료가 마감된 이후였으니,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선 김형서를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탕전실이 올라가서였을까.

이제 허준한의원에서는 한약재 냄새가 아닌 쑥뜸의 향이 풍겨왔고,

한의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허준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세요. 김형서 원장님.”

“오랜만입니다. 이허준 원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원장님도 새해 복 받으십시오.”

“연휴는 잘 보내셨죠?”

“그럼요.”

허준과 김형서가 가볍게 악수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따듯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니면 쌍화탕도 괜찮으세요?”

“쌍화탕이요? 그거 파는 거 아닌가요?”

“아, 이건 저희 진료받은 환자분들에게 서비스로 나가는 탕약이에요.”

“서비스로 탕약을 준다고요?”

“네. 작년부터 해왔던 이벤트라서요. 그만두기도 뭐하고, 환자들도 좋아해서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하는 허준.

그리고 그것을 본 김형서가 살짝 놀란 눈으로 허준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돈을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을 서비스로 준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운영이야 원장의 재량으로 하는 것이었으니 이런 이벤트는 언제든 할 수 있겠지만.

대두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소위 잘나가는 한의원이 되면 초심을 잃기 마련일 터.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쌍화탕을 들고 마주 앉은 두 사람.

김형서가 쌍화탕을 한 모금 마시니, 뜨끈한 느낌이 뱃속에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그래. 보양식을 먹은 느낌이로군.’

그런 느낌을 즐기고 있을 때,

허준이 김형서에게 물었다.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합니다. 쌍화탕 맛이 좋아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해보도록 하죠.”

연휴가 끝나고 갑자기 이야기를 조금 했으면 좋겠다면서 연락해온 김형서 원장.

그것을 받은 허준은 내심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조만간 한 번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그런 허준의 귀에 살짝 놀랄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김찬용 환자라고 아시죠? 사실 찬용이가 제 조카입니다.”

김찬용 환자가 원장님의 조카였다니!

그제야 허준이 예전에 김찬용 환자의 검사자료 해석을 위해서 정형외과에 찾아갔을 때, 세심하게 하나하나 신경 써서 설명해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꼼꼼하게 설명해주셨던 건가?’

“그러셨군요. 몰랐습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제가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최근에 새로 검사를 하고, 그 자료를 확인했습니다. 이전과 달라졌더군요. 찬용이 본인도 이전보다 좋다고 말하고 있고요.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김형서가 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는 찬용이의 삼촌 입장이었고, 이제부터는 의사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솔직히 수술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허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치료는 상당히 도전적인 치료였기 때문이다.

본래의 한의학과 현대의 한의학이 만난 치료법.

때문에, 그 과정에서 현대의학의 도움도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마침, 잘됐네요. 안 그래도 선생님과는 언제 한번 그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허준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도침이었다.

“이건 도침이라고 하는 침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보시다시피 이 앞쪽에 아주 작은 칼날처럼 만들어진 침이죠.”

“설마?...”

“네.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저는 이 침을 이용해서 김찬용 선수의 허벅지 안쪽의 유착된 부분들을... 그러니까 표현하자면 박리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곳들을 조금씩 박리해 나갔습니다.”

박리. 말 그대로 벗겨냈다는 뜻이다.

허준의 대답을 들은 김형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을 박리하는 것이 생각했던 의학적 수술치료와 똑같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외과적 수술에서는 그곳을 향하기 위해서 절개를 통해 들어가야만 했는데, 눈앞에 있는 허준 원장은 침으로 그것을 해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눈으로 직접 보면서 수술하는 것도 아닌데.’

그때,

허준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 원장님 덕분입니다.”

“네?”

“원장님께서 저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다 설명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대답을 들은 김형서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허준이 직접 정형외과에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던 일.

평소에도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주었지만,

아무래도 친인척이다 보니 그날은 조금 더 열심히 설명한 그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대로 된 환부를 찾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김형서가 헛기침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마치 자신이 허준 원장과 한팀이 되어 수술한 끝에 환자를 치료한 느낌이었으리라.

허준이 이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는 HS정형외과와 우리한의원이 협력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협력관계요?”

“네. 그러면 협진을 통해서, 김찬용 환자와 같이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더 좋은 진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범위도 더욱 넓어질 테고요. 게다가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환자들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방법은 한의원에 없으니까요.”

잠시 망설이던 김형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협력관계가 되면 조카 김찬용의 치료도 협진으로 인한 성공사례가 될 테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협력관계를 맺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허준의 입발림에 분위기를 탄 것도 한몫했지만.

“좋습니다. 앞으로 잘 해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환자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허준과 김형서가 다시 한번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한의원을 나서는 김형서.

‘이거 뭔가 설득당한 기분인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느낌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래도 사람은 괜찮네.”

라고 중얼거리며 만족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김형서였다.

*   *   *

그 시각 입원실 환자들의 진료를 마치고 내려온 유도진.

살짝 열린 원장실 문틈으로 들린 허준과 김형서 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평소 한의학에 관한 논문을 자주 찾아보며 직접 쓰기도 하는 그였지만, 도침으로 저렇게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사례는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허벅지에도 침은 놓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호침이지 도침은 아니다.

도침이 잘못된 곳을 향하면 그대로 의료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도침을 사용하여 박리를 해낼 줄이야.’

그야말로 엄청난 손재주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니 손재주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엄청난 것은 영상과 설명을 듣고 정확하게 환부를 찾아냈다는 것.

이것이 재능이 아니라면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도 노력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 가능하다.

그가 알려준 대로 따라가다 보니 자신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때,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와 부원장실로 향한 유도진.

그런 유도진을 김형서를 보낸 허준이 찾아왔다.

“유도진 선생님. 오늘부로 대로변의 HS정형외과와 우리는 협력관계를 맺기로 했습니다.”

유도진도 한의학이 가진 한계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그럼 앞으로 우리도 X레이와 CT 그리고 MRI 등등의 자료 보는 법을 공부해야 하겠군요.”

“그래 주시면 좋죠. 그렇다고 무리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런데, 원장님. 제가 지나가다가 잠깐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치료는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박이치료를 하셨다고 하던데.”

“아, 그거요? 며칠 동안 꽤 힘들었죠.”

허준이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정형외과에 찾아가서 설명을 듣고, 머릿속에 해부도와 환자의 환부 그리고 도침이 들어갈 만한 자리를 찾은 뒤에.”

“뒤에?..”

“매일 같이 연습했습니다. 실수하면 큰일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유도진.

대충 저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담담한 대답과는 다르게 가슴에서는 무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을 뛰어 넘을 날이 올 겁니다.’

“참, 입원실 진료는 다 보셨죠?”

“네. 이번 주에 두 명 정도는 퇴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자기 일이라도 된 양, 해맑게 웃는 허준.

저런 모습들 때문에 더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유도진이었다.

“참, 원장님.”

“네? 또 하실 말씀이라도?”

“이제 곧 3월인데 슬슬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라니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두 가지 일이 허준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곧, 절기가 바뀝니다.”

“그 말은?”

절기가 바뀐다는 말에 허준이 무언가를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온도는 한 달쯤 더 지나야 절기를 따라가겠지만, 묘하게도 절기가 바뀌면 몇 가지 증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지랑이라던가, 눈과 비가 섞인다던가, 또는 입맛이 바뀐다든가 하는 등의 일들 말이다.

이 중에서 겨울에서 봄이 될 때 가장 많이 나타나는 질환.

즉, 비염이었다.

“비염 환자들이 슬슬 찾아올 겁니다. 그래서 정우한의원 때에도 늘 이맘때쯤이면 미리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유도진 선생님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라, 한 가지 준비해야 할 일이 더 있습니다.”

비염 뿐만 아니라 또 있다니.

감기인가? 일교차가 커지니 아무래도 감기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감기 환자들 말인가요?”

“아니요. 이번엔 환자가 아니라 한의원 운영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금신고 준비하셔야죠.”

잊고있었네.

5월 종합소득세를 위해서 보통 3월부터 슬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뒤통수를 맞은것 처럼 띵한 느낌이었다.

그동안에는 한의원에서 제대로 된 매출이 나오지 않았으니, 굳이 세무사를 찾아갈 일이 없었기에.

‘내가 직접 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작년부터 수직으로 상승한 매출과 규모가 커진 한의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허준이 한의원을 나서는 유도진을 바라봤다.

역시, 딱딱해 보여도 한의원과 환자를 위하는 따듯한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세무사라니.’

오랜만에 한의사 카페에 들어가서 검색이라도 해봐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찰나, 의외로 가까운 곳에 누구보다 확실한 정답을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연락한 사람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설 연휴 잘 보내셨죠?”

“자네도 복 받게. 그나저나 웬일인가? 이렇게 연락을 다 하고.”

“다름이 아니라, 혹시 잘 아는 세무사 없나 하고요. 최 대표님이라면 잘 아실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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