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실력 좀 볼까 >
88화. 실력 좀 볼까
푸른 하늘 아래.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맴돌고 있는 축구장에 모인 사람들의 몸에서는 뿌연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두 색의 조끼로 나뉘어 시작된 평가전.
주전 자리를 놓고 펼치는 선수들 간의 경쟁이 치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감독과 옆의 코치진들.
감독이 인상까지 쓰면서 경기에 집중하는데,
그 표정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해 보였다.
전반을 넘어서 후반.
게다가 그 후반에서도 20여 분이 지나도록 기록된 점수가 없었으니, 요즘 말대로 표현하자면 노잼인 경기였으니까 말이다.
그때,
감독의 옆에 서 있던 김 코치가 헛기침하면서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응?”
“선수교체 해도 될까요?”
“선수? 거의 다 보지 않았나?”
감독이 김 코치 쪽 벤치를 바라봤다.
몇몇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미 교체가 되어 들어온 선수들과 김찬용만 있을 뿐이었다.
“누구, 찬용이?”
“네.”
“그래. 뭐 20 여분 정도는 괜찮겠지. 맘대로 해. 지금 레드 팀 임시 감독은 자네니까.”
그렇게 김찬용에게 다가간 김 코치.
“찬용아.”
“네. 코치님.”
“정말로 믿어도 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사결과도 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주 멀쩡합니다.”
“그래. 알았다. 교체 준비해. 만약에 뛰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경기장 밖으로 나오고.”
“걱정하지 마세요.”
가볍게 몸을 풀고 투입된 김찬용.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중얼거렸다.
“뭐야? 찬용이 나가는 거야?”
“그런가 본데요?”
“아니, 저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지 몰라.”
동시에,
빨간색 조끼를 입고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선수들이 중얼거렸다.
“찬용 선배 나오는데요?”
“찬용이? 야, 괜히 공 주지마. 달리다가 또 다칠라.”
“맞아. 옛날의 찬용이가 아니야. 그러니 무리해서 뭐 하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하다가 끝내자.”
“네.”
투입과 함께 자연스럽게 시작된 경기.
김찬용이 슬슬 움직이면서 눈으로 공과 같은 팀의 움직임을 쫓았다.
워밍업이 끝난 지금 그 움직임에 맞춰 달리다 보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최고의 상태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찬용의 움직임을 본 선수들도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언제 저기에?’
‘진짜 빠르잖아? 옛날의 찬용 선배를 보는 것 같아.’
‘저거 누구야? 앞에 뛰는 놈.’
순식간에 상대 팀 진영에 침투하는 선수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패스.
그 패스를 건네받은 김찬용이 공을 몰고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인 가속으로 한 명을 제치고,
페인팅 동작으로 또 한 명,
그리고 뒤에서 그를 향해 달려드는 수비수보다 빠른 드리블을 이어가면서 골키퍼와 1:1 대치상황에서 골문을 향해 슛.
철썩-
가볍게 한 골을 넣은 김찬용이 이제야 후련하다는 듯이 두 팔을 쫘악- 하고 벌리며 감각을 만끽했다.
동시에,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만이 남아있었다.
‘돌아왔다.’
김찬용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 *
“작년에 무슨 일 있으셨나 봐요?”
최 대표가 소개해준 세무사가 작년 하반기부터 늘어난 수입을 보고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아, 잠깐 방송을 타는 바람에 매출이 좀 늘었죠.”
“그런 거치고는 꾸준히 우상향 중이시던데, 어쨌든, 올 5월 신고에서는 이 정도는 내셔야 할 것 같아요.”
세무사가 계산해서 내민 금액을 본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세금이 많이 나온 만큼, 많이 벌었다는 방증이었으니.
나름 뿌듯함을 느낀 허준이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저희 쪽에서 기장처리 하시다가, 나중에는 법인으로 넘어가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법인이요?”
“네. 아무래도 법인으로 넘어가는 게 부담이 덜하니까요. 저희가 또 그쪽 컨설팅 전문이거든요. 진행한 경험도 많고, 최 대표님과도 그때 만나게 된 겁니다.”
법인이라니.
처음 개원할 때, 혹시나 대박이 나서 체인 점처럼 확장하게 되거나, 여러 방면으로 사업적인 면을 확장하려면 법인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꿈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지만,’
그런데 이번엔 그 법인이란 단어를 타인에게서 듣자, 감회가 새로웠다.
잘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긴,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오히려 환자보다 한의사 선생님이 부족할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내심 즐거운 마음으로 한의원에 돌아온 허준.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시 나왔던 터라, 남은 시간을 쪼개어 도시락을 먹고 진료 준비를 마친 뒤,
오후 진료 시작.
허준이 첫 번째 환자의 차트를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내자, 원장실 문이 열리며 젊은 여인이 들어왔다.
이름은 이민주. 병명은 비염.
‘첫 비염 환자.’
처음 마주한 질환인 만큼 당연히 나타난 퀘스트.
<봄이 싫어요>
* 진행도 : 0%
* 보상 : 포인트 1000
그녀가 허준을 보고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이민주가 의자에 앉고,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되었다.
“비염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제가 이때만 되면, 비염이 심해지거든요. 동네에서 가장 잘 봐주신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비염은 콧속을 덮고 있는 점막에 염증성 질환을 뜻한다.
원인에 따라서 급성과 만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코감기라 불리는 감염성 비염과 계절적인 요인이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알레르기성 비염은 급성에 속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환자가 바로 알레르기성 비염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콧물의 양이 늘어나지만, 맑은 색의 콧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
이런 알레르기성질환 치료에는 체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
“진맥 한번 잡아볼까요?”
당연히 폐의 맥이 건강치 못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차가운 성질의 체질인 그녀.
차가운 체질은 폐와 대장의 기운이 약한 편이었으니, 폐와 관련된 코부터 시작해 기관지와 피부성 질환이 잘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탕약은 소청룡탕이 좋겠군.’
마황과 백작약 오미자 등으로 이루어진 이 탕약은 마황에 함유된 에페드린 성분으로 기관지를 확장시키는 효능과 소염의 효능이 함께 있으니 제격일 터.
침은 엄지와 검지 사이의 합곡혈과 검지 옆의 상양혈 그리고 인당혈, 양형혈과 함께 폐경락에 도움이 되는 혈자리로 하면 되겠군.
처방을 마친 허준이 입을 열었다.
“일단, 침하고 탕약, 그리고 연고를 처방해 드릴게요. 그리고 평소에 이쪽 부위를 자주 눌러서 마사지 해주시면 금방 좋아질 겁니다.”
허준이 두 손으로 코끝에서 한 마디 위에 있는 양형혈을 가리켰다.
이민주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로 오시죠.”
그렇게 5번 치료실.
허준이 연고를 묻힌 면봉 두 개와 종이컵을 들고 들어섰다.
“그게 뭔가요?”
“아, 이게 한약재를 섞어서 만든 연고인데, 코에다 발라주면 코안에 있는 농들이 시원하게 흘러내리게 해줄 겁니다. 정말 시원할 거예요. 우리 한의원 선생님 한 분이 직접 테스트도 해보셨거든요.”
허준이 부원장실에서 진료를 보고 있는 유도진 선생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네. 자, 고개 들어주시고~”
이민주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면봉의 느낌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어서 달큰한 냄새와 함께 화한 느낌이 돌 때쯤,
“여기에 받치고 계시면 되세요.”
허준이 종이컵을 건네며 위치를 잡아주었다.
그렇게 20분 뒤,
어느새 종이컵을 가득 채운 콧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러웠지만, 이민주는 그것을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시원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야.
이어서 커튼을 젖히며 등장한 허준과 윤 선생.
윤 선생이 건넨 물티슈와 함께 정리를 마치고, 침 치료가 이어졌다.
허준이 침을 들어 처음 생각했던 자리에 하나씩 찔렀다.
그중에서 인당혈과 양형혈은 얼굴에 놓는 침이었으니,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여 폐와 관련된 눈썹과 눈썹 사이에 정확하게 찔러 넣었다.
그러면서 허준이 환자의 호흡과 몸의 움찔거림 등의 변화를 캐치했다.
아프지는 않지만 느낌이 있다는 뜻.
‘침감을 느끼는 것을 보니, 제대로 들어갔군.’
그렇게 다시 20분 뒤,
모든 치료를 끝내고 나온 이민주의 얼굴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갈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있었으니,
그 표정을 읽은 데스크의 두 선생이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저녁.
웬일로 칼퇴근하지 않은 김정우가 허준을 찾았다.
“선생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탕전실을 보다 보니 재미난 연고를 발견해서 말이야. 겸사겸사할 이야기도 있고.”
“아, 그 연고는 며칠 전에 유도진 선생과 같이 만든 배농 치료용 연고입니다.”
“배농 치료? 그래서 그런 약재들을 사용해 만들었구먼.”
김정우가 단번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김정우 선생님이셨다.
“확실히 그런 화한 느낌의 연고를 바른다면 코가 뻥 뚫리겠지. 달큰하고 친숙한 느낌으로 맵고 강한 향을 잡아 조화를 이룬 좋은 약이었네. 나중에 나도 알려주게나.”
“물론입니다. 그보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아, 별거는 아니고,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부탁이요? 말씀하시죠.”
허준한의원에 질 좋은 약재를 공급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원외 탕전실 운영을 맡아주신 것도, 게다가 김정우 선생님 때문에 찾아오는 환자들로 매출 증대까지.
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선생님이었으니,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뭐든지 들어주려던 허준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나에게 대학 강의 제안이 들어온 것이 있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아직 기력이 온전치 않아서 말이야.”
‘응?’
최근에 진료를 봤을 때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좋아지셨는데.
또 어디가 안좋으신 건가.
“그래서 자네가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유도진 선생이 있잖습니까?”
“그 친구 성격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말주변 없는 거. 나도 처음에는 유도진 선생을 생각했지. 그런데, 그 친구가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을 앞에 두고 무뚝뚝하게 강의하면 누가 들으려 하겠나?”
허준의 머릿속에 그 모습이 그려지며 바로 납득했다.
하긴..
“그런 면에서 자네처럼 말주변도 있고, TV에도 나오고 실제 치료 사례들도 있으니 학생들이 좋아할 걸세. 게다가 혹시 아나? 강의하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깨닫게 될지도.”
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는 허준.
그것을 본 김정우가 되물었다.
“왜? 강의 때문에 진료에 영향이 미칠 것 같아서 그런가?”
“예. 아무래도 환자들이 신경쓰여서요.”
“걱정하지 말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이요?”
“내가 있지 않은가. 자네가 강의를 나가면 그날에는 내가 진료를 봐주도록 하겠네.”
그렇게 첫 강의를 위해 대학교에 도착한 허준.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좋을 때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첫 강의부터 지각할 수는 없는 법.
“저기요. 여기 한의대 제2 강의실은 어디로 가야 하죠?”
“아, 그건 저쪽에서 3층으로 올라가셔서 보면 있어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물어서 제2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의대생 몇이 두루마리 휴지에 침을 꽂으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빨리 왔나.’
그래도 늦은 것보다는 낫겠지.
천천히 수업 준비나 해볼까.
그때,
“저 사람 누구야?”
“한의대생 맞아?”
“복학생 아닐까? 그 왜 있잖아. 유급당해서 군대 갔다던 사람.”
“그럼 알아보면 되지.”
한의대에도 간혹 개인 사정이나 여러 이유로 휴학과 복학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중에서 가장 짓궂어 보이는 학생이 허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한의대생이시죠? 강의까지 시간 좀 남았는데, 같이 게임 안 하실래요?”
“게임이요?”
“네. 이거 아시죠? 저희 주로 하는 내기. 요 앞에서 저녁에 술 사주기 어때요?”
두루마리 휴지를 가리키며 말하는 학생.
허준이 그것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를 리가 있나.
침을 놓는 감각을 기르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먼저 장수를 정한 뒤에 침을 찔러넣어서 가장 근접한 사람이 이기는 그런 내기였다.
‘어디 그럼 실력 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