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96화.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시각.
허준한의원의 탕전실에서는 유도진과 고요한 선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료는?”
“깔끔하게 끝냈습니다.”
“수고했어.”
허준이 혜민서 행사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누는 동안.
고요한 선생은 입원실 환자 진료를, 유도진 선생은 VIP 환자들의 탕약을 달이는 중이었다.
“아마 환자 중에 몇 분은 당장 다음 주에 퇴원하셔도 될 것 같던데요?”
“그래? 잘됐네.”
“그보다 선배. 낮에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바로 옆에 계셨잖아요? 이야기 좀 해주세요.”
고요한이 낮에 있었던 일을 물었다.
허준을 뒤따라 가다가 놓치고는 나중에 도착하니, 이미 상황이 마무리된 뒤였기 때문이다.
쓰러진 할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어나 앉아 계셨고,
대신에 허준 원장이 무언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각자 신기하다거나 대단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중얼거리면서 흩어지고 있었는데, 꽤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의원을 찾아온 환자 중에서 종종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허준의 진료보러 가자는 말에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뭐, 허준 원장이 깨웠지.”
“어떻게요?”
“침으로.”
“침...”
고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 원장이 침으로 무언가를 치료한 모습이야 이쯤 되니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진료는 어떻게 본 걸까.
허준의 침술이 뛰어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정확한 진단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환자가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실신한 상태였으니, 궁금함이 샘솟는 것은 당연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주세요~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다 봤을 거 아니에요.”
유도진이 고요한의 물음에 담긴 요지를 단번에 파악하고는,
“기궐증이라고 하더군.”
“기궐증이라면...”
기궐증이란 단어를 듣고는 고요한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을 줄였다.
“맞아. 기허로 인해서 쓰러지신 거지.”
“얼핏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셨는데... 대체, 허준 원장님은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죠?”
“아마, 진맥을 통해서 먼저 기허증을 확인했을 거야. 그러더니 동네 사람들에게 묻더군. 지병이나 최근에 있었던 사고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말이야.”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 대답에 고요한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왜 진즉에 생각해보지 못했지. 환자에게 직접 묻지 못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서 문진을 한 셈이네요?”
“그렇지.”
“허, 정말 선배 말대로 원장님은 괴물이 맞네요.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지. 역시 알면 알수록 놀랍다니까요?”
유도진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잠깐 이어진 수다는,
“선배.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그래. 수고했다. 내일 봐.”
고요한의 인사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홀로 탕전실에 남은 유도진.
‘사실, 진짜 괴물 같은 것은 진단에 이어서 침을 사용해 실신한 환자를 깨어나게 한 것이다.’
유도진도 환자의 상태를 먼저 확인했기에, 몇 가지를 떠올렸다.
그중에서는 당연히 기궐증도 있었는데, 확신을 하지는 못하던 상태였다.
그런데 허준이 옆에서 기궐증이라고 말한 순간.
정답에 근접했었다는 생각에 잠시동안의 통쾌함에 이어서 당연히 치료법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이 난 치료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저 자연적으로 깨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그런데 허준 원장은 어떻게 했던가.
침을 이용해 환자를 깨어나게 하지 않았던가.
상념에 이어서 자연스럽게 예전에 김정우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진짜 침의 대가가 되면, 침을 사용해 일시적으로 기운을 북돋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게 되지. 허나, 상심하지 말게. 침은 어디까지나 즉효성과 휴대성이 뛰어나지만, 반대로 지속성은 탕약이니까 말이야.”
허준이 낮에 보여준 것이 바로 그 이야기에 나왔던 모습이지 않던가.
침을 이용한 보사로 실신한 사람을 깨어나게 했다는 것.
‘괴물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한의원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은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이전까지는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 유도진이었다.
그런 유도진이 멍하니 김이 올라오는 옹기탕약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허준이 망설임 없이 침을 빼든 장면과 그 앞을 막아선 자신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혹시나 잘못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막아섰던 것인데,
그 상황에서 허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김정우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신 이유겠지.’
VIP 환자라는 것은 결국,
우선시 되는 환자였으니까.
유도진이 VIP들에게 보낼 탕약을 달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많아지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 * *
월요일 아침.
평소처럼 허준한의원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이번에도 한 건 하셨다면서요?”
“역시 원장님이에요~”
김 선생과 체력이 좋아지면서 일찍 출근하기 시작한 윤 선생이 주말에 있었던 일을 듣고서 허준에게 따봉을 날렸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 그녀들이었다.
하긴, 그동안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니까.
“운이 좋았죠.”
허준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평소처럼 답했고,
두 선생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진 선생님은요?”
“아침 일찍 오셔서 탕전실에 올라가셨어요.”
“그래요? 요즘들어서 자주 올라가시네.”
뭐, 한의원 매출에 큰 도움이되니,
어찌됐건 좋은 일이었다.
“참, 공사는 끝났죠?”
“네. 깔끔하게 다 됐어요. 고요한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어제 출근해서 짐은 다 옮겨 뒀대요.”
“잘됐네요.”
최근에 슬슬 진료의 한계를 느끼면서 기존 부원장실이 있던 곳을 나눠 진료실 두 개를 만들기로 했다.
그곳에는 어차피 추나 치료를 위한 카이로베드가 필요 없었으니, 꼭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진료를 더 효율적으로 볼 수 있겠군.’
그렇게 진료 시작.
가장 바쁜 월요일이었으니,
허준이 진료를 보는 원장실도,
부원장실의 유도진과 그 옆에 새로 만들어진 진료실의 고요한 선생도 모두가 바삐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고요한 선생이 온 지도 꽤 되었을뿐더러, 그동안 진료를 통해 얻은 임상 경험과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으로 단골 환자들도 꽤 많이 생겼으니.
‘이제는 맘 놓고 진료를 맡길 수 있겠지.’
게다가 진료실이 3개가 된 만큼, 한의사 선생님을 더 고용해서 인원을 증원하는 것도 수월해진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엊그제 정산을 하면서 보니, 조만간 생각해 봐야겠어.’
지난번에 준 휴가를 아직 쓰지 않은 선생님들도 있는 데다가, 매출을 보니 환자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환자가 조금 더 늘어나면 분명히 한의원 식구들에게 영향을 미칠 터.
‘게다가 윤 선생님 일도 있으니.’
허준이 한의원 상황을 보고 생각을 마친 뒤,
다음 진료를 위해 메시지를 보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오전 진료로만 30명 가까이 환자의 진료를 본 허준.
초진환자와 재진 환자가 섞여서 30명을 본 것도 대단했지만,
허준을 찾아온 환자는 대부분 초진환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익숙한 질환의 환자들만 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빨리 진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진맥의 도움이 엄청나군.’
단순하게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각이 하나 더 추가된 것뿐인데도, 훨씬 수월하고 정확하게 진단을 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허준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
한편 대기실에서는 이번에 있었던 일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단골 환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허준 선생이 쓰러진 사람을 일으켰다고?”
“그렇다니까? 내가 아침에 들었는데, 글쎄 나이든 할아버지한테 침을 놓고 이렇게 빙글빙글 돌리더니 벌떡 하고 일어났데.”
“이젠, 뭐 놀랍지도 않구먼. 역시야 역시.”
그리고 대화에 끼지는 못하지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초진환자들의 귀에도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점심시간.
허준이 치료실에서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나오자, 한의원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하세요. 원장님.”
“여기요.”
응?
허준이 도시락을 건네는 윤 선생을 바라봤다.
‘뭐지. 뭔가 평소와 느낌이 다른데.’
진료 때문에 그런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 느낌은 점심 식사가 끝나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장님. 이거 아까 받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게 뭔데요?”
김예진 선생이 건넨 것을 받아 들은 허준.
봉투를 열자, 시사회 VIP 초대권이 들어있었다.
“최우중 배우 있었잖아요. 그 매니저가 주고 갔더라고요. 곧 개봉한다고요.”
“그래요?”
“네. 근데 그 시사회 티켓이 4장뿐이라...”
‘이래서 윤 선생이 그랬던 거로구나.’
그런 윤 선생의 옆으로 진행중인 퀘스트의 진행도가 나타나 있었다.
80%에 가까운 수치.
그러고 보니 최우중 씨 팬이라고 했었지.
분명 이것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허준이 망설임 없이 두 장을 꺼내 윤 선생에게 건네며 말했다.
“받으세요. 윤 선생님.”
“정말요?”
“네. 부담 안 느끼셔도 돼요.”
“감사해요~ 원장님!”
환하게 웃는 윤 선생.
진료를 받을 때보다 더욱 신나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또 가고 싶으신 분?”
허준이 식구들을 둘러보며 물었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나 보네.'
“혹시, 가시고 싶은 분 계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 *
며칠 뒤,
허준이 강의실을 찾았다.
“어? 허준 선생님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씩씩하게 인사하는 학생들.
허준이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암, 저렇게 학생 때는 씩씩한 게 최고지.
나중에는 못 그럴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강의실에 들어선 허준.
평소보다 더욱 시끄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뭐야?..’
그도 그럴 것이 이전보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사건의 시작은 최승원과 그 일행이었다.
토요일에 참여하고 엄청난 일들을 겪으며 그 이야기를 주말을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선후배 상관없이 퍼트리고 다니면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사람 세 명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건 없던 일이 아닌 데다가,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셋의 이야기가 너무나 디테일 했기에,
“그때, 족삼리랑 내관에 침을 팍- 하고 꽂고서 막 침이 춤을 췄더니. 글쎄 기절했던 할아버지가 깨어났다니까?”
“거짓말하지 마. 그런 게 어딨어?”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건 강의하러 오는 허준 선생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이름이 괜히 허준이겠어? 진짜 허준일지도 몰라.”
“야. 그 선생님 ‘이’씨잖아 ‘허’씨가 아니라.”
게다가 그중 한 명은 한의대에서도 에이스라 불리며 내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었으니,
“그거 다 진짜야.”
“정말?...”
“응. 내가 다 봤거든.”
이렇게 하나둘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청강을 하러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허준은 잠시 당황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퀘스트가 나타나 있었으니까.
<널리 퍼져 이롭게 하라. 2>
* 보상 : 포인트 1000
‘아무래도 새로운 학생들로 인해서 퀘스트가 갱신된 것인가 보네.’
게다가 여기에 있는 학생들이 나중에는 전부 한의사가 되어 환자들을 직접 진료할 터.
그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강의
그리고 허준이 없는 허준한의원.
그곳에,
“어서 오세요. 처음 이시죠?”
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한의원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