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나 >
104화.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나
허준한의원에 다니는 강수연.
이미 최우중으로 인해 유명인이 찾아온 전례가 있었던 터라, 허준의 제안에 따라서 진료 시간대를 조율한 그녀였다.
아무래도 대낮이나,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는 다른 환자들의 진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를 대표의 지시에 조용히 뒤따라온 매니저 김주영.
처음에 든 의문은 이거였다.
‘진료시간이 이상하다.’
지금 시간은 밤 9시.
진료시간은 분명 8시까지라 되어 있었는데, 9시부터 진료를 본다고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한의원에 강수연 같은 배우가 다닌다면, 오히려 홍보 효과를 유도하기 위해서 최대한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 진료를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진료시간이 아닌 시간대에 진료를 본다고? 거기다가 매니저인 자신에게 말도 없이 다니기도 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일 터.
간혹 뉴스에서도 그런 병원들이 나오지 않던가.
불법적인 약물을 투여해주는 그런 업체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한 가지의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어찌 됐건 둘 다 위험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슬럼프에 빠져서 지난 몇 달 동안의 휴식으로 인해 기자들이 따라붙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바로 뉴스 한 면을 장식할만한 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대중들 앞에 나서는 연예인의 숙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들어간 지 40여 분 정도가 지나자, 다시 자연스럽게 혼자 한의원을 나서는 강수연.
그녀가 모자를 한번 꾹- 눌러쓰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그대로 대로변으로 사라졌고,
다음 날.
김주영이 한의원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기실에 꽤 많은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녀노소. 게다가 종종 붕대도 감고 있는 사람들.
‘생각보다 환자가 많네?’
그 사이에서 데스크의 새로운 선생님 최유니가 김주영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김주영이 데스크를 한 바퀴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보통 한의원에서 비타민이라던가 수액 같은 일종의 영양제와 관련된 가격표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여기 한의원에는 수액이나 비타민 같은 영양제는 없나요?”
“네. 우리 한의원에는 없어요.”
“그래요?”
“예. 그런 거 맞으시려면 다른 한의원이나 병원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진료 한번 받아보고 싶은데요.”
“그러면 이것 좀 적어서 주시겠어요?”
그렇게 대충 적어낸 김주영.
대기실에서 가만히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들리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여기 그 보약 있잖아. 그거 먹으면 아주 직빵이라니까?”
“그래?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그럼~ 그러니까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기다리지.”
‘한약을 먹었는데 직방이라고?’
확실히 수상하네.
아무래도 한약에 뭐라도 섞어서 팔기라도 하는 건가.
“여기 침이 그렇게 좋다던데, 그 봉독 알레르기만 없으면 웬만한 거는 한방이면 낫는데.”
“약침도 효과 좋다더라고.”
이번엔 반대쪽에서 들리는 할머니들의 이야기.
봉침과 약침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람이 선입견을 품고 바라보면 한쪽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법.
김주영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불법적인 시술을 사용하는 한의사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주영의 이름이 불리고,
문을 열고 들어간 원장실.
‘뭐, 뭐야?’
눈앞에 엄청난 덩치를 가진 남자.
푸른 눈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갈색의 머리를 가진 외국인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자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아... 네.”
유창한 한국말과 함께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겠어요?”
허준이 김주영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그의 움직임과 표정 눈빛 그리고 피부 등등을 살폈다.
‘많이 지친 얼굴이네.’
김주영도 그런 허준을 살폈다.
선한 인상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묘하게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
게다가 눈은 또 어떠한가.
촬영장에 가다 보면 가끔 저런 눈을 가진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보통은 연세가 꽤 있으시고, 이미 여러 역을 맡아 모든 역에서 명품연기를 하시는 그런 분들이 가지고 있는 눈빛인데.
“피로해서 오셨다고 쓰여 있던데.”
“예. 제가 회사원인데, 한의원에서 보통 수액이나 비타민 영양제를 맞거든요. 그러면 한결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혹시, 여기는 그런 거 없을까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한의원에서도 종종 저런 서비스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효과는 좋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여러 영양소나 영양분을 단번에 채워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눈앞에 있는 김주영 환자처럼 피곤함에 쩐 사람들이라면 그 효과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체감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인간의 몸이 얼마나 오묘하던가.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약화하기 마련이었으니,
저런 주사나 영양제에 자주 의존하다 보면 본래 그 영양소를 생성하거나 대용하여 작용하는 기관들의 기능이 떨어지게 되면서 만성질환과 비슷한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죄송합니다. 여기는 의약품으로 사용하는 게 한약재로 만든 약밖에 없어서요.”
“그렇군요.”
김주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걱정했던 약물은 아닌가 보다.
확실히 들어올 때부터 여기저기 살폈는데, 약물에 관련된 그런 대화나 내용을 조금도 찾지 못했지.
그럼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사람의 성격이나 감정을 바꿀 수 있는 일.
‘연애.’
이곳에 있는 한의사 한 명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 감정의 교류를 이어간다는 것이 김주영의 생각이었다.
약물보다 다행이기는 한데, 이것 또한 연예계에서는 조심스러운 일이었으니,
대체 누굴까. 언뜻 보니 한의사 선생님이 몇 분은 계시던 거 같던데. 내가 직접 물어봐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허준이 김주영에게 말했다.
“보니까 만성피로가 있으신 것 같은데, 밤낮이 자주 바뀌는 일을 하고 계시는가 보네요.”
“아? 네. 맞아요.”
자연스럽게 날아온 물음에 얼떨결에 답한 김주영.
허준이 그런 김주영을 살피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밥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하는 것 같네요.”
“어...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 보기에는 자세도 살짝 굽으신 것 같은데. 어깨 쪽이 뻐근하지 않으신가요?”
“그걸 어떻게...?”
순식간에 뒤바뀐 흐름.
“일단, 손 좀 이렇게 올려 주시겠어요? 진맥 좀 잡아볼게요.”
어느새 자연스럽게 빠져든 김주영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위로 진맥을 잡은 허준이 눈을 감고 집중해 맥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가 허하다.’
기허증. 전형적인 만성피로의 주범이었다.
원인은 꽤 많다고 할 수 있는데, 당장 느껴지는 것은.
‘간의 기운이 허하다.’
환자의 체질은 태음인.
태음인의 특성상, 간의 기운이 그렇게 약한 체질은 아닌데 이렇게 허증이 느껴질 정도라면 그동안 꽤 오랜 시간 무리해왔다는 뜻일 터.
치료를 위해서라면 당장 잘 먹고 잘 쉬는 게 좋은 것은 당연했으나,
일반적인 회사원이라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제일 나은 방법은,
허준이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간허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백작약을 가감한 사물탕으로 약을 처방하고 침으로 담정격에 있는 협계혈과 족통곡혈을 보하고 검지의 상양혈과 약지 발가락 옆의 족규음혈을 사하는 방식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더해서 좀 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허준.
‘비타민이나 수액을 종종 맞는다고 했었지?’
당연히 그때의 감각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으니, 그와 비교하여 개운함이 느껴지지 못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터.
그렇다면 약침을 이용해 어깨와 목의 굳은 자리까지 풀어주는 게 좋겠어.
순식간에 정리를 끝낸 허준이 처방을 내렸다.
그렇게 치료실.
약침과 침을 다 맞고 난 뒤의 김주영.
분명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온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수액을 맞은 것보다 더 가벼운 거 같네?’
그러면서 치료실에서 한의사 선생님이 침을 놓고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건 TV에서만 봤는데... 진짜로 그냥 잘하는 곳이었잖아?
이렇게 좋은 곳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마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은 일이었다.
김주영이 스마트폰을 들어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어~ 그래. 확인해 봤어?”
“네. 지금 다녀온 길입니다.”
“그래. 어때?”
“일단 약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김주영이 대표의 되물음에 잠시 망설였다.
잊고 있었던 것이 이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찾아와 진료시간이 아닌 늦은 시간에 40분 가량의 만남.
이것을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 개인적인 만나는 것까지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한의사 선생님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 * *
날이 더워짐에 따라서 허준한의원에서 냉방병의 증상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허준한의원에서는 이런 냉방병 환자를 위해서 이미 준비가 되어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약하게 땀을 내어 냉방병에 효과가 좋은 탕약들이었다.
향소산과 곽향정기산 등등.
보통 땀과 열을 내는 데에는 한약재인 마황이 들어가는 마황탕이나 갈근탕 소청룡탕 같은 한약이 제일이었지만, 냉방병은 강한 추위에 오래 노출되어 생기는 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허준한의원의 실내온도도 한몫했다.
물론,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가게들에 비해서 덜 시원한 이 냉방을 욕했지만,
아무래도 냉방병 증상으로 찾아온 환자들을 위한 조치였기에 서로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해서 냉방병의 증상에 큰 도움이 되는 쑥뜸의 사용 빈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허준한의원에는 쌉싸름한 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준이 떨어진 쑥뜸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2층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슬슬 퇴근을 준비하던 김정우 선생님이 계셨는데,
“어? 허준 원장.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잠깐 창고에 쑥뜸 좀 가지러 올라왔습니다.”
허준이 꾸벅 인사하며 답했다.
김정우 선생님의 출퇴근 시간이야 당연히 다른 한의사 선생님들과 달랐으니까 말이다.
그 대답에 김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냉방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이,
“참, 그러고 보니 자네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면서? 중의사들을 초빙해 토론하는 자리 말이야.”
“네. 맞습니다.”
“준비는 잘 돼 가는가?”
“안 그래도 혜민서 선생님들과 함께 여러 주제로 토론도 진행하고 조사도 하는 중입니다.”
“그래. 자네들이 함께하면 걱정 없겠지. 중의사들과의 토론이라, 올해는 재미난 일이 벌어지겠구먼. 그래도 괜히 경쟁심이나 그런 마음가짐보다는 순수하게 의학적인 토론에 집중해 주게나. 토론의 목적은 경쟁이 아니니까 말이야.”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라면 그렇게 답할 줄 알았네. 그럼, 오늘도 수고 해주게나. 난 이만 퇴근해 볼 터이니.”
그렇게 가방을 멘 김정우가 탕전실을 나서려는데,
“저... 선생님.”
“응?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인가?”
“제가 이쪽 구역에 재개발이 진행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게 있나 싶어서요.”
“흠, 그 이야기가 벌써 자네에게도 들어갔나 보구만?”
잠시 생각에 잠긴 김정우.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라면 주말에 다시 하고 싶은데. 어때,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