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자네가 맡아주면 좋겠어 >
105화. 자네가 맡아주면 좋겠어
날이 따듯해지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대학생들은 방학을 맞이한다.
이는 한의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허준의 강의도 방학 전 마지막 수업에 이르렀다.
준비해 온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학생들을 한 바퀴 둘러보는 허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본다.
물론, 그로 인해 새롭게 갱신된 퀘스트는 덤이었다.
“그동안 모두 강의 듣느라 수고했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받아 볼까요?”
허준의 말에 학생들의 손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솟아 올라간다.
그만큼 허준이 가르친 것들이 실전과 이론에 기초한, 혜민서 선생들의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학생들의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충분하게 시간을 가진 뒤 마무리된 강의.
「퀘스트 ‘널리 퍼져 이롭게 하라. 6’을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1000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포인트 : 19356
‘조만간 침술을 강화할 수 있겠어.’
허준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럼, 여러분 모두 방학 잘 보내길 바라요. 마지막으로 아시죠? 시간이 남는 다거나,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다거나 하면 언제든 의료봉사활동에 참여 신청을 누르는 거로 강의 마무리하겠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박수와 함께 허준이 강의실을 나서는데,
그 뒤를 최승원이 따랐다.
“허준 선생님.”
“최승원 학생. 시험 잘 봤어요? 슬슬 국시도 준비해야죠?”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요.”
최승원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허준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일 때가 가장 용감한 법.
‘저 때의 특권이기도 하지.’
“무슨 일인가요?”
“아, 아뇨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요. 그럼 토요일 날 뵙겠습니다.”
최승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하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때, 뒤에서 도준혁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준 선생님. 그동안 강의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강의 준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겸손하신 것은 여전하시네요. 참, 일전에 말씀드렸던 중의사들과의 미팅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래요? 언제인가요?”
도준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7월 말이 될 것 같아요. 장소와 정확한 날짜는 제가 한 번 더 연락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 * *
토요일.
허준한의원의 진료가 끝나고 혜민서 선생들이 약속 장소에 모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에 가는 곳은 진료해야 하는 환자들도 있지만, 다른 일도 함께하기로 했어요. 지난번에 보니까 생각보다 손대야 할 것이 많아 보이더라고요.”
박용준 원장이 설명에,
지난번 달 동네에 다녀왔던 식구들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경험해보니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그 대부분이 생활 환경에서 부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마침, 이번에는 후원도 많이 들어왔고, 인원수도 꽤 많이 신청해 줬거든요.”
이어진 설명에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이 끝나고, 이탈했던 한의대생들이 이번에 대거 신청했다는 이야기는 주중에 이미 들은 터였다.
“힘쓰는 건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밥이 자신 있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확실히 190이 넘어가는 엄청난 피지컬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 밥을 보면서 제일 낯선 얼굴을 한 것은 당연히 정형외과 원장 김형서였다.
몇 번 얼굴은 마주쳤으나, 그런데도 아직도 낯선 그였다.
어찌 됐건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한 지원자들.
그중에는 당연히 최승원 일행도 껴있었다.
최승원 일행이 다가와 선배인 박용준 원장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너희들 왔구나? 시험은 잘 봤니?”
“네. 괜찮게 봤어요.”
“잘 왔어. 안 그래도 이제 곧 시작하려던 참이었거든.”
“그런데, 저분은 누구세요?”
최승원이 바라본 쪽에는 허준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외국인이 서 있었다.
“아~ 밥 선생? 이번에 새로 허준한의원 식구로 오신 선생님이야.”
“새로 오셨다고요?”
최승원이 살짝 놀란 얼굴로 밥을 바라봤다.
“이번에 졸업한 선생님인데, 허준 선생님이 직접 뽑으셨다고 하더라.”
“뭐라고요?”
이번에도 최승원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졸업하자마자 허준한의원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허준 선생님에게 손재주를 직접 인정받은 사람인데,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허준 선생님이 직접 뽑으신 걸까.
‘내가 1년만 빨리 졸업했어도...’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승부욕 그리고 경쟁심도 함께.
어차피 고작 1년 차이라면 임상은 서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
즉, 실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일 터.
‘어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주마.’
그때, 허준이 최승원 일행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최승원 학생.”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이쪽 선생님은?”
“아~ 우리 한의원에 새로 오신 밥 선생님이셔”
밥이 최승원에게 손을 뻗으며 인사했다.
“밥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최승원이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최승원이라고 합니다. 허준 선생님이 계신 한의원에 들어가시다니, 오늘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시작된 봉사활동.
이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두 팀으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했다.
한쪽은 진료 팀, 다른 한쪽은 보수공사를 위한 팀으로.
이곳 대부분은 독거노인들이 사는 지역이었기에, 곧 시작되는 장마를 대비하기 위해서 지붕이나 천장 같은 곳의 보수공사를 해주기로 한 것이었다.
팀은 각자의 선택으로 인해서 나누어졌는데,
“저는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최승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진료팀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혜민서 선생님들 대부분이 계셨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이어서 새로운 선생님, 밥의 차례.
밥이 잠시 고민하더니,
“그럼, 저는 보수공사 쪽으로 갈게요. 분명히 제 키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모습에 최승원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마치, 자신을 피해서 도망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허준 선생님도 분명 외국인이라서 받아준 것일 거야.’
그런데 그때,
“저도 이쪽으로 갈게요.”
최승원의 귓가에 들른 허준의 목소리.
허준이 밥 선생을 따라서 보수공사 팀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최승원의 눈이 커졌다.
‘선생님...?’
허준 선생님이야말로 자신이 꿈꿔온 그런 한의사가 아니던가.
침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환자들은 그런 허준 선생님을 존경과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이상적인 한의사.
그런데 대체 왜 진료를 보는 게 아니라 저쪽으로 가신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 엄청난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최승원의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할까요?”
박용준 원장의 말과 함께 곧바로 시작된 행사.
진료팀은 각각 사람을 나눠서 독거노인들을 진료하러 나섰고, 보수팀은 연락받은 곳으로 자재들과 도구들을 들고 가서 망가진 지붕이나 천장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허준과 한 조가 된 밥.
굳이 이 둘이 한 조가 되어 움직이는 이유는 밥 선생의 키와 그나마 허준이 엇비슷했기 때문이리라.
“밥 선생님. 여기 좀 잡아주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위에 올라간 허준이 무언가 뚝딱뚝딱하면 금세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그 모습을 본 밥.
‘원장님, 정말 한의사가 맞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톱질부터 망치질까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한집, 두 집···.
심지어 수리 속도조차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쉬는 시간.
“잠깐 쉬었다 하죠.”
“네. 그런데, 원장님. 왜 이리 도구를 잘 다루세요?"
“원래 개원하면 한의사가 아니라 잡부가 된다는 말 몰라요?”
“아....?”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한 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원장님. 그런데 왜 진료 보러 안 가시고 보수공사로 오셨어요?”
“그야 밥 선생님도 보셨다시피 제가 손재주가 좀 좋잖아요? 게다가 저는 우리 혜민서 선생님들을 믿거든요.”
알 듯 말 듯한 대답과 동시에 허준이 밥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요?”
“얼마 안 쉬었는데요?”
“빨리빨리 끝내야죠. 오늘 다 끝내고 가려면.”
그렇게 몇 시간 뒤,
행사가 끝나고 다시 모인 일행들.
허준이 옆에 있던 밥에게 말했다.
“밥 선생.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원장님이 고생 많으셨죠.”
물론, 밥은 그런 허준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한의사가 체력이 이렇게 좋아?
반대편에서는 최승원이 자신과 한 조를 이뤘던 박용준 원장과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이쪽도 진료가 거의 끝났기 때문이었다.
“선배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니야. 우리 후배가 고생 많았지.”
“감사해요.”
“그런데, 너 뭔가 궁금한 얼굴이네? 말해봐. 알고 있는 거라면 다 말해줄 테니.”
박용준이 최승원의 얼굴에 있는 의문을 읽어내고는 물었다.
그러자 최승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요.”
“뭐가?”
“허준 선생님이요. 왜 진료를 안 보시고 보수공사를 하러 간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아~ 그러니까, 네가 보기에는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면서 왜 진료 대신에 보수공사를 하러 갔는지 모르겠다 이거지?”
“네. 바로 그거에요.”
직선적인 최승원의 질문에,
박용준이 피식 웃으면서 답을 이었다.
“정확한 건 허준 선생님에게 물어봐야겠지만, 내 추측에는 아마 선생님이 보시기에 환자들의 진료보다, 구멍 난 집이 먼저 마음에 걸렸던 게 아닐까? 한의사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냥 마음씨 따듯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 대답에 무언가 또 다른 것을 느낀 것 같은 최승원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이어진 교육 행사에서 최승원은 밥 선생의 실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혜민서 선생님들의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실력이 쑥쑥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최승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창피하다.’
그는 결코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상황에서 봉사라는 이름에 맞춰서 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동시에,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봐 온 최승원의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한 날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허준이 눈을 뜬 채,
평소처럼 스킬들을 확인했다.
어제 혜민서 활동이 끝나고 모은 포인트를 사용해서 올린 침술.
[침술 Lv. 8]
- 보사의 효능이 대폭 증가한다.
역시 예상대로 보사의 능력치가 상승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다음 레벨에는 포인트가 무려 5만이나 필요하다는 것.
‘아마 9레벨이 되면 또 다른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겠지.’
일단은 보사의 효능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허준이었다.
강화된 진맥으로 느낄 수 있는 기감으로 인해서 보사의 효능이 직접 체감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으니,
‘앞으로 냉방병 환자들이 더 빨리 좋아지겠어.’
그보다 어제 밥 선생과 최승원 둘이 빠르게 친해지더니 한잔하러 가는 거 같던데,
역시 젊음이란 좋네.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허준의 스마트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정우 선생님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제대로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었지.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김정우 선생님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김정우 선생님뿐만 아니라 박진석 선생님도 함께 계셨다.
‘두 분이 친하신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 재개발에 관한 이야기에도 연관이 있으신 건가?’
“오랜만이야. 허준 선생.”
“오랜만입니다. 박 선생님. 잘 지내셨지요?”
“나야 늘 잘 지내지. 듣자 하니, 자네 요즘에 아주 날아다닌다던데.”
“아닙니다. 그냥 한의원 선생님들이 함께 해주셔서 그렇죠.”
허준의 대답에 박진석이 껄껄 웃었다.
이어서 김정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출발해 볼까나?”
“네? 어디로요?”
“어디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세 남자가 도착한 곳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공사장이었다.
그것도 꽤 높은 빌딩의 건설현장.
허준이 왜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선생님을 바라봤다.
대체 여기에는 왜 온 걸까.
김정우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아.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면 되겠군. 우선, 자네가 궁금한 것부터 대답을 해주지. 재개발 관련된 이야기는 자네가 들었던 대로 사실이야.”
“아...”
그 대답에 허준이 잠시 탄성을 뱉었다.
이렇게 된다면 단순하게 허준한의원 식구로서의 김정우 선생님이 아니라, 건물주 김정우와 세입자 허준의 이야기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것이 허준에게 썩 나쁜 것은 아니다.
김정우 선생님의 성품상 악덕 건물주보다는 오히려 보상금을 충분히 챙겨 주실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새로 이전을 하게 되면, 지금껏 같이 가족처럼 일했던 식구들이 전부 함께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허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김정우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말이야.”
“제안이라면?”
“나와 여기 내 친우 박정우 그리고 몇몇 지인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다가 한방병원을 세우는 중이거든.”
김정우가 건설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로 허준을 바라보며,
“이곳을 자네가 맡아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