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진료를 시작해보죠 >
106화. 진료를 시작해보죠
“네?”
뜬금없는 제안.
허준이 되묻자, 김정우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이곳에 만들 한방병원을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하네.”
갑자기 한방병원이라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시장 골목뿐 아니라, 많은 환자에게서 덕이 있는 한의사로 은퇴까지 하시지 않으셨던가.
그런 분이 기업형 한방병원에 관해 이야기하실 줄이야.
‘더군다나 빌딩도 가지고 있으시면서,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셨던 건가.’
한의원과 한방병원은 얼핏 보기에는 글자 한두 개 다른 것뿐이나, 실질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법적으로도 의원급 의료기관과 병원급 의료기관이라고 따로 명시가 될 만큼 말이다.
게다가 한의원은 개설신고만으로도 운영할 수 있으나, 한방병원의 경우에는 개설신고가 아닌 개설허가다.
그만큼 여러 가지 법적 규정이 있으며 갖춰야 할 시설과 인력 또한 많다는 뜻.
단순하게 최소기준인 30인 이상의 입원실을 갖추는 것만 해도 그 규모가 지금의 허준한의원과 비슷하거나 커지겠지.
‘당장 한의원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허준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김정우가 입을 열었다.
“섣불리 답을 못하는군.”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자네가 그렇게 나올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네.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자네의 몸값부터 제시하도록 하지.”
김정우가 손가락 3개를 펼쳤다.
단지 손가락뿐이지만, 그 세 개의 손가락이 3억이라는 거금을 뜻하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3억...’
현재까지 급성장한 허준한의원에서도 장담할 수 없는 금액.
그런데, 순수하게 연봉이 3억이라니.
허준도 사람인지라, 솔직히 탐이 났다.
저기에는 당연히 인센티브가 따로 제시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상이 공짜는 없는 법이었으니,
저 많은 연봉을 주는 이유를 모를 리 없는 허준이었다.
김정우 선생님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빌딩에 들어서는 한방병원의 경우에는 규모가 크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그런 규모의 한방병원을 지인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했으니,
‘결국은 매출이 최우선이 될 터.’
한방병원은 봉사 시설이 아니다.
매출을 올려 이익을 얻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속해있는 조직이라면 당연한 이치.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해오지 않은 여러 진료과목이 추가되기도 하고, 심지어 보험과 관련하여 매출을 올리는 일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의료의 질은 조금 더 올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환자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낫겠어.’
생각을 마친 허준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습니다.”
“왜? 금액이 모자라는가? 그렇다면 지인들과 상의해서 올려주도록 하지. 얼마를 원하나? 자네 돈 좋아하잖아.”
미친. 여기서 몸값을 더 올린다고?
3억이 마지노선이 아니라 출발선이었다는 말은 허준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욕심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 가슴 아팠던 이별의 순간, 그리고 가족들의 얼굴까지.
그 모든 것이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그러다가 자신이 여태까지 걸어왔던 길이 떠올랐다.
처음 서울역을 갔었던 날부터, 뒤이어 만나며 쌓은 여러 인연까지.
그들이 짓고 있던 환한 미소와 함께,
허준의 마음은 빠르게 평온을 찾았다.
잠시 치솟아 올랐던 욕심이 가라앉으며,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빛을 한 허준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뒷짐을 진 채,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김정우.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욕심에 넘어갔을 터인데, 눈빛이 맑아진 것을 보아하니 더욱 단단해졌겠구만.
김정우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태 잠자코 지켜보던 박진석의 입이 열렸다.
“정우 이 친구야, 그만 떠보고 본론으로 들어가세나. 허준 선생이 돈에 흔들릴 사람도 아니고.”
“미안하네. 허준 선생 반응이 재밌어서 말이야. 그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한방병원을 만들려고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한의학은 현대의학처럼 체계적이지 못하지 않은가.”
허준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의학과의 협력을 통해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네. 나아가 그런 사례들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양질의 한의사들을 양성해 한의학을 발전시키고 싶고 말이야.”
김정우가 씁쓸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서 자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네. 그동안 여러 방면으로 자네를 지켜봐 온 결과, 우리가 하려는 일과 어느 정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허준이 환자의 진료를 보면서 이끄는 혜민서란 단체.
그것이 바로 두 선생님이 하고자 하는 일과 같은 방향이었던 일이었다.
“어떤가? 자네는 지금처럼 그저 찾아오는 환자들을 쭈욱 진료해주기만 하면 되네. 아, 물론 몇 가지 귀찮은 일이 더해지기는 하겠지. 강의라던가, 교육, 연구나 여러 방면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 틀은 크게 바뀌지 않을 걸세. 그저 자네가 다른 선생들을 이끌어주기만 하면 되네.”
이어진 설명을 들은 허준.
그런 것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같은 길을 가는 거라면.’
든든한 우군과 함께하는 것이 좋겠지.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 자세한 것은 천천히 조율해가도록 하지.”
* * *
다음 날 아침.
허준의 출근길.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네.’
어제 워낙 갑작스러운 일에 휘말리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허준이었다.
그보다 정말 이곳이 재개발된다니.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 같네. 아마 내년 설 연휴쯤이면 삽을 뜰지도 모르겠군.”
“그렇군요.”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봤듯이, 한방병원의 공사도 대충 올 연말이면 마무리될테니까 말이야. 그러니, 정확한 시기는 그때 가서 정하면 될 걸세.”
처음 이곳의 2층에 있던 한의원을 인수해서 몇 년간 다녔던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은 휑하니 사라진 공사판과 남은 반쪽짜리 시장 골목.
‘하긴, 시장 골목 사람들도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팍 줄어서 고민이라고 하니, 재개발이 꼭 나쁜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출근.
오늘따라 씩씩하게 데스크 선생님들이 허준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인수인계 사항이요.”
김예진 선생이 내민 서류를 확인한 허준.
입원실에서 딱히 별문제는 없었나 보다.
원장실에 들어서자,
미리 와있던 밥 선생이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했다.
“굿모닝입니다. 원장님.”
“주말 잘 보냈어요? 토요일에 보니, 시원하게 한잔하러 간 것 같던데.”
“네. 오랜만에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그랬습니다. 그 친구들이 아주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밥이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신난다는 듯이 답했다.
“잘하셨어요.”
“참, 원장님. 고요한 선생이 입원실 같이 올라가자고 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밥 선생을 올려 보내고,
허준이 한쪽에 걸려있던 가운을 걸쳤다.
그러자 싱숭생숭했던 기분은 물론 잡념까지 순식간에 사라진다.
군인의 군복, 경찰의 경찰복과 같이 제복을 입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이어서 크게 심호흡과 스트레칭.
진료 준비 끝.
오늘의 첫 환자는 어린 화상 환자였다.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은 상태.
'그래도 고생 좀 하겠는걸.'
아무래도 습하고 더울 때는 화상의 회복속도가 다른 때보다 조금 늦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장마 시즌인데, 그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겠어.
그렇게 진료가 이어지는 와중에 한의원을 찾은 한 남자.
남자가 두리번거리면서 스마트폰에 있는 주소를 재차 확인했다.
“에이, 모양 빠지게 왜 좋은데 놔두고 쯧.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네. 오히려 눈에 안 띄긴 해서.”
연예기획사 대표.
김강현이었다.
김강현이 한 번 더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어딜 봐도 구리다.
어쨌든 후딱 일을 보고 가야겠군.
하고 문을 열었는데,
진료 시작 시간인 9시에서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기실에 환자들이 꽤 많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거?’
“어서 오세요.”
게다가 데스크에 있는 간호조무사 선생을 본 순간.
김강현의 눈이 번뜩였다.
‘인물 좋은데?’
과거 댄스그룹으로 이름을 잠깐 날렸으나, 어디까지나 병풍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돌아오는 영광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람을 볼 줄 아는 눈.
그런 김강현의 눈에 데스크의 김예진 선생은 이곳에 있기에 아까운 인재였다.
저렇게 수수하게 화장을 했는데도 감춰지지 않는 이목구비.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시크함.
‘그래. 이것은 마치 차가운 도시 여자의 결정체로군.’
“크흠.. 안녕하세요.”
“네. 처음 오셨죠?”
“그걸 어떻게...?”
“며칠 보다 보면 척하고 보이거든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아, 요즘에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요. 진료 좀 받아볼까 하고요.”
“음~”
김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요즘 들어 컨디션이 안 좋아 찾아온 환자들 대부분이 냉방병에 걸린 사람들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저쪽에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잠시만요. 사실 제가 우중이랑 형, 동생 하는 사이거든요. 우중이 소개로 온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대화하기 편할 터.
기다리던 환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고,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원래 속도가 이런가?’
보통 한의원보다는 성형외과와 연이 깊었으니, 이런 속도에 썩 익숙하지 않은 김강현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름이 불리고 들어간 방.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한의사를 본 김강현이 살짝 놀랐다.
여태 많은 사람을 봐왔다고 자신했건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배우나 모델 중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
특별히 잘생기지는 않았으나, ‘분위기가 있다.’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
김강현의 눈에 비친 허준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따듯한 분위기로 사람을 안심시켜주는 것 같은 기분.
허준이 차트에 떠 있는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김강현을 맞이했다.
최우중 씨 소개로 왔다는 메시지가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예계 쪽 사람인가 보네.’
한눈에 봐도 배우는 아닌 것 같으니.
다른 환자들에게 큰 영향은 없겠군.
“이쪽으로 앉으세요. 김강현 님.”
의자를 향해 걸어들어오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문제가 있나 보다.
허준이 무언가 물어보려던 찰나,
김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선생님. 사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김강현이 명함을 꺼내 건넸다.
스타 기획사 대표 김강현.
“아, 그렇군요.”
“업무 차원에서 한 가지 여쭙고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에 강수연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수연이를 진료하는 선생님을 불러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강현도 허준 선생이 원장이라는 사실 정도는 미리 듣고 왔기에 부탁한 것이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지요?”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허준이 살짝 고민했다.
환자의 개인적인 정보를 누설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회사 대표니, 협조로 볼 수도 있겠지.’
“제가 보고 있습니다.”
“네? 원장님이요?”
김강현이 살짝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보통 밤늦게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곳에서 일하는 한의사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중요한 것은 일이지 않겠는가.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우리 수연이랑 개인적으로 만나고 계시는 겁니까?”
허준이 잠시 멍하니 김강현을 바라봤다.
요즘 따라 이상한 일이 잦네.
이런 허무맹랑한 질문을 진료보면서 들을 줄이야.
“그러니까, 김강현 님 이야기는 제가 강수연 씨와 연애를 하고 있다거나 하는 그런 걸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저희가 미리 알아야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가뜩이나 요즘에 복귀작 이후로 러브콜이 여기저기서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뭔가 큰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허준이 말을 끊고 답했다.
그러고는 강수연의 진료를 위해서 편의를 봐준 것뿐이라는 점을 설명하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쪽 업계가 업계이다 보니 민감한 사항이라서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허준이 김강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