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처음 봤거든요 >
112화. 처음 봤거든요
어느 날 저녁.
휴무일의 유도진이 김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유도진입니다.”
“응? 자네 오늘 휴일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면 푹 쉬지. 무슨 일로 전화를 걸었나?”
뒤이어 들리지 않는 말에,
김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오랜만에 같이 밥 한 끼 하도록 할까?”
그렇게 둘이 만난 곳은 고급스러운 한정식집.
평소 검소한 김정우 선생님이였기에 불러주신 주소가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한 유도진.
‘여기가 맞네.’
확인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약하셨나요?”
“아... 네. 아마 김정우 선생님 이름으로...”
“아!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선생님의 이름을 듣자마자 누군지 안다는 듯한 반응.
유도진이 그 뒤를 따라가니, 조그마한 방이 나왔고.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들리는 이야기.
“선생님. 웬일로 이렇게 찾아주셨습니까?”
“아~ 마침 왔네. 저 친구랑 간단하게 저녁이나 한 끼 하려고.”
“그러시군요.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괜히 부담스럽게 그러지 말고, 그냥 간단하게 해주게.”
“선생님에게 어찌 그러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인데.”
그러면서 물러나는 남자.
남자가 방을 나서며 한 번 더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렇게 단둘이 남은 방.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자네 왔나.”
“여기는 대체?”
“아, 신경 쓸 거 없네. 그냥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는 정도로 해두지. 그보다, 이거 정말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는구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음식들이 차례차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코스요리처럼 나오는 한정식은 아니나, 다 나오고 나니 완전히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이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신경 써줘서 고맙네.”
그렇게 식사와 함께 이어진 대화는 한의원의 일상부터 최근에 있었던 일들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자, 그럼 이제 말해보게. 여기라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들려온 질문에 유도진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선생님께서는 벌써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고 계시기라도 하신 듯하군.
“허준 원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예. 선생님께서 지인분들과 한방병원을 차리기로 하셨다고.”
“제대로 들었군. 맞네.”
김정우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친구에게 대표 원장 자리도 부탁했지.”
“네. 그래서 며칠 전에 허준 원장이 찾아와서는 제안을 하더군요.”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했나?”
“생각해본 뒤에 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아서 찾아온 게로군?”
김정우의 되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유도진.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데도 허준 원장에게 먼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제안까지.
그것은 곧 자신보다 허준 원장을 더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평소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격의 유도진이라도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정우가 마주 앉은 유도진을 보더니, 웃으며 답했다.
“자네. 예전 같았으면 신경도 안 썼을 일인데, 이제야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나 보구만?”
“아니, 꼭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네. 나도 예전에 그랬으니까 말이야.”
“선생님께서 말입니까?”
“물론이지. 나라고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았나? 나에게도 자네와 같은 시절이 있었거든.”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자 이번엔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의 미소와 함께 답이 이어졌다.
“자네는 궁금한 것이겠지? 왜, 자신이 아닌 허준 원장에게 그런 제안을 먼저 했을까 하고 말이야.”
“솔직히... 그렇습니다.”
유도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본래 그의 성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도록 하지. 자네가 보기에, 허준 그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그야...”
뜬금없는 질문에 유도진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에야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한 인연이었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일들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보고 이론적으로만 이해했던 그런 치료도 종종 해냈으니,
‘천재.’
아니 천재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했다.
당장 자신도 종종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야말로 시장 사람들의 말처럼 ‘용하다’라는 말.
그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그런 한의사가 아닐까.
“뭐, 정확하게 말하기에는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겠지. 워낙 해왔던 것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러니, 편의상 그냥 천재라고 하도록 합세. 자, 그럼.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허준같은 천재 한의사 한 명이 얼마나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이어진 질문에 다시 또 말문이 막힌 유도진.
그런 유도진을 보며 김정우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에는 그런 괴물이나 천재 같은 한의사도 필요하지. 하지만, 더 많은 환자를 위해서는 그렇게 앞서가는 자들을 뒤따라 가는 한의사들도 필요한 법이라네. 당장, 자네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그를 넘어서 보겠다는 욕심 말이야. 그러면서 그를 따라 하게 되고 그의 경험을 연구하게 되지. 그리고 그것들은 또 다른 한의사들에게 자극이 될 테고 말이야.”
그 대답에 유도진은 답답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시원하게 뚫린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무언가 알 것 같은 느낌.
“그렇다고 그 친구도 완벽하지는 않은 법. 허준 선생도 아마 자네에게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있을 걸세. 이정도면 원하는 대답이 되겠나?”
“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깨달음을 얻은 유도진과 그런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는 김정우.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다음 날 아침.
허준한의원 진료 시작 전.
“윤 쌤. 그게 진짜예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하루아침에 딸이 아들이 됐다니까요?”
“와...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종종 그럴 수 있대요. 초음파로 판별하는 거라서 정확도가 100%는 아니라 했거든요.”
김예진과 윤다희 그리고 최유니와 남복희 선생.
그중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남복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생각보다 흔한 일이야. 나도 우리 아들 가졌을 때, 처음에 딸인 줄 알았거든. 초음파로 확인해 주는데 이 녀석이 다리를 안 벌려서 보이지가 않더라고.”
“아~ 그렇구나.”
“어쨌든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윤 쌤.”
“감사해요. 모두.”
그때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하는 김예진.
“어? 그러고 보니, 그때 김숙자 씨가 아들이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윤다희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남복희가 손뼉을 치며,
“역시, 보살님이 용하긴 용하다니까? 다는 아닌데, 또 어떤 때는 이렇게 척척 맞추거든. 이러니 내가 그 집에다가 돈을 안 쓸 수가 있나.”
그때, 한의원 문이 열리며 출근한 허준.
응? 선생님들이 웬일로 다들 모여계시지.
“선생님들.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다들 활기차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서 가운을 걸치는데,
똑똑 소리와 함께 유도진 선생이 들어왔다.
“아, 유도진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원장님도. 그보다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요.”
“들어오시죠.”
유도진이 문을 닫고,
허준을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
“원장님께서 하신 제안에 대한 답변을 가져왔습니다.”
허준이 침을 삼켰다.
그만큼 유도진 선생은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특히 논문이라던가 이론에 관해서는 배울 게 많지.’
“원장님이 하셨던 제안, 받아들이죠.”
“정말요?”
“네. 며칠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허준이 두 주먹에 힘을 불끈 쥐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든든한 느낌.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그럼, 진료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허준한의원의 진료.
아침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환자들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는데,
대기실의 분위기가 조금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멀리서 찾아오거나 초진환자들은 그대로였으나, 동네 단골 환자로 오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재개발과 관련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동네에 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리라.
“그러니까, 우리도 저짝처럼 다 이렇게 허물고 할 거다 이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성님.”
“아이고 잘됐네. 잘됐어.”
“그러게 말이에요. 언젠가 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될 줄이야.”
“차라리 잘 됐지. 어차피 반쪽쩌리 시장 골목보다는 아예 없애고 깨끗하게 아파트 올리는 게 좋지.”
이런 대화들 사이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기쁜 얼굴을 하는 것은, 바로 며칠 전에 이사하려던 집의 계약을 포기하고 돌아온 아줌마였다.
“내가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릴 뻔했지 뭐야. 보살님 만나면 복비라도 줘야겠어~”
이렇듯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난감해진 것은 정작 한의원 식구들이었다.
허준과 유도진이야 이미 재개발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 사람들은 오늘 처음 들었으니까 말이다.
활발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윤다희가 단골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니,
“이게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되는 거래요. 애초에 옆 구역의 상황을 보고 시간이 걸릴 것 같았는데, 요새 부동산 시장이 좋아서 그런지 사업성이 굉장히 잘 나왔다더라고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윤 쌤.”
“듣기로는 내년 초쯤에 이쪽 다 허물 거라던데요?”
“그럼... 여기도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아마, 그렇겠죠?”
윤다희가 옆에 있던 최유니의 물음에 답했다.
당장, 자신이 허준한의원에서 처음 일했을 때 앞에 있던 정우한의원도 사라지지 않았던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혹시, 원장님이 다른 데에다가 다시 개원하신대요?”
“그건 원장님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다른 곳에 비해 일은 힘들었나, 높은 급여 그리고 많은 휴가에 출퇴근 거리까지 생각하면 이만한 곳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최유니의 질문.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쌤은 없었다.
그때, 데스크를 지나가던 밥 선생.
최유니가 밥 선생을 불러 세웠다.
“밥 선생님.”
“네?”
“혹시. 원장님께 뭐 들은 거 없어요?”
“어떤 거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퍼져가는 소문과 함께 허준한의원의 일과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김예진도 종일 이런 이야기와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꼈던 터라,
퇴근 전에 허준을 만나러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님. 김예진입니다.”
“들어오세요. 김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저, 그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군인 출신이기에 병력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김예진이었다.
때문에, 조금은 무리한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
“다름이 아니라, 오늘 단골 환자분들이 그러는데.”
“아, 재개발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선생님들이 다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원장님께서...”
김예진의 얼굴이 긴장으로 살짝 굳었다.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자신이 그 대답을 듣고 다른 선생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이는 이미 군대에서도 경험한 바가 있었으니,
‘그저 전달했을 뿐인데, 다들 나를 미워했었지.’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상부의 지시였으나, 그 지시를 받은 사람들의 폭발한 감정은 칼날이 되어 자신을 찔러 들어왔던 것.
그 때문에 군대에서 전역해 나오지 않았던가.
그때, 들려오는 허준의 목소리.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어요.”
“정말요?”
“네. 선생님들이 거절하지 않으시면 모두 함께 갈 생각입니다.”
긴장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놀란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는 김예진.
그때도 이런 답변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예진이 울컥하는 감정을 잠재우며 되물었다.
“그 말씀은... 새로 개원을 하시는 건가요?”
“뭐, 비슷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간호조무사 선생님들께는 제가 물어보도록 할게요.”
“정말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원장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선생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인사와 함께 나서는 김예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준이 씨익 웃었다.
‘선생님 같은 분을 놓칠 수는 없죠. 처음 봤거든요. 김 선생님처럼 일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