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
138화.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허준한의원의 입원실이 분주해졌다.
최연장자이자, 유일한 1인실 입원 환자였던 김정남 씨가 추석을 앞두고 퇴원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뭐? 정남 어르신이 퇴원하신다고?”
“그렇다니까? 이번에 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봤는데, 괜찮다고 했대. 그래서 이제 통원치료로 전환하신다던데?”
“다행이다. 처음에 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의원에서 암을 고친 거지?”
“내가 들어보니까, 암이란 게 상태에 따라서 기수를 나누나 보더라고. 초기, 중기, 말기 이렇게. 어르신은 다행스럽게 막 발견된 상태인 초기였다나 봐. 그래서 주기적으로 검사하러 다니는 건데, 이번에 갔더니 진행이 하나도 안 된 상태라고 결과가 나온 거지.”
암은 보통 초기에는 대부분 딱히 증상이 없기에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조금 더 진행되어 증상이 나타나고 환자 본인이 통증을 느끼게 될 때 즈음에는 이미 초기가 지난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초기는 대부분 건강검진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젊고 건강한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라는 것이다.
보통 건강검진은 1년 또는 2년 단위로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함정인 셈.
암은 세포 덩어리.
즉, 세포와 마찬가지로 분열할수록 진행이 되어가며, 이 말은 건강하고 젊은 사람일수록 진행속도도 빨라진다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연세가 많고 운 좋게 초기에 발견한 김정남 환자의 경우에는 이 상태로 유지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 어쨌든 퇴원하시고 일상으로 돌아가실 만큼 치료가 되었다니. 잘됐네.”
“따지고 보면 허준 선생님이 참 대단하긴 해. 그 양반이 못 고치는 병이 뭔지 모르겠어. 우리 입원실 도영철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만 해도 진짜 온갖 썰이 다 나오잖아.”
그때, 다른 방에 있던 환자가 웃으며 답했다.
“아니, 이 친구야. 우리 손가락, 발가락 시커멓게 변해서 죽어가던 거 도로 살려내는 거는 안 신기하고?”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그보다 영감님은 지금 어디 가셨어? 인사라도 해야할 텐데.”
“아~ 1층으로 진료 보러 가셨을 거예요.”
허준의 진료실.
김정남과 허준 그리고 김정남의 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게 전부 선생님 덕분입니다. 병원에서도 그러더라고요. 대체 어떻게 관리하신 거냐고.”
“아닙니다. 김정남 씨가 열심히 따라와 주신 덕분이죠.”
그 말에, 김정남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이고, 선생님이 또 이렇게 겸손까지 하시네. 그때 그대로 수술을 받았다면, 아마 올 추석은 온 가족이 함께 병원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르는걸요. 이게 전부 한의원 선생님들께서 봐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죠.”
처음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달라진 태도.
고집 세고 날카롭던 예전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 허준의 시야 옆으로는,
「퀘스트 ‘인생의 마지막을 위하여’를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10000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굳이, 이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허준의 눈에는 이미 김정남 씨는 건강하다고 느낄 만큼 육안으로든, 진맥으로든 충분한 상태.
‘아마 지금처럼 관리만 하면 오래오래 사시겠지.’
때문에,
“보호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퇴원은 오늘 바로 하시면 되시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혹시 모르니까, 주 1회 정도 내원해서 진료를 받으시면 될 것 같아요.”
“물론이지. 우리 원장님이 오지 말라고 해도, 내가 여기 입원해 있는 동안에 사귄 친구들과 수다 떨기 위해서라도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럼, 다행이고요.”
허준이 웃으며 답했다.
동시에,
“아빠. 여기서 친구도 생기셨어요?”
“당연하지. 여기 시장 골목 할매들이 얼마나 재미난 양반들이 많은데?”
“대박... 그렇게 가라고 했던 노인정에도 잘 안 나가시더니.”
진료실 안에서 부녀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퍽 다정해 보인다.
처음에는 티격태격 날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참, 처음에 입원하실 때 이야기했던 대로, 진료를 보면서 사용했던 자료들을 치료 사례로 사용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백번이고 천 번이고 사용해주세요. 저 같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진료 때 뵙겠습니다.”
그 인사와 함께 진료실을 나서는 부녀.
문을 열고서 한 발을 내딛기 전에, 허준을 돌아보더니.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한 번 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진료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허준.
‘역시, 이 맛에 진료 보는 거지.’
온몸에 힘이 넘쳐 흐르는 느낌과 함께,
허준이 데스크에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초진 환자네. 증상은 발목염좌라.
이 기운을 이어서 바로 시작해 볼까.
* * *
태용한의원의 진료가 끝나고.
이두철이 퇴근 준비를 했다.
‘며칠 동안 탕전실에서만 살다시피 했더니, 온몸에 약 냄새가 빠지질 않네.’
속으로 불평하며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가운을 벗은 김 원장이 불렀다.
“이 선생. 퇴근하려고?”
“네. 오늘 업무도 끝났고 해서...”
‘오늘따라 일찍 퇴근하시네?’
보통 두 분이 남아서 남은 탕약을 달이고 퇴근하시던데,
오늘따라 자신보다 먼저 퇴근 준비를 끝낸 모습이 낯설었다.
김태식이 앞에 서 있는 이두철 선생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그래? 바쁘지 않으면, 우리 함께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저녁이요? 좋죠.”
하긴, 며칠 동안 같이 근무했으니 슬슬 회식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두철이 흔쾌히 동의했다.
“박 원장. 빨리 준비해서 나와~”
“네~ 준비 다 했어요.”
방안에서 들려오는 박 원장의 목소리.
곧이어 문일 열리며 가방을 메고 박 원장이 나왔다.
“가시죠~”
그렇게 불 꺼진 태용한의원.
김 원장이 앞장서서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오래 계셨으니 단골집이 있으신가 보네.’
반쪽의 시장에 아직 남은 식당과 중국집 그리고 술집.
그 언저리에서 저기쯤이 아닐까 싶은 곳마다 그대로 지나쳐버리더니,
대체 어디까지 가시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옆에 있는 박 원장을 불렀다.
“박 원장님. 어디 가는 거예요? 저 앞에는 완전히 어두운데.”
“아~ 좀만 더 가시면 있어요. 이 시장에서 제일 밝게 빛나는 곳.”
그렇게 도착한,
[허준한의원]이라 적힌 간판.
“뭐해? 어서 들어오지 않고.”
“원장님. 여기 한의원인데요?”
“그런데?”
“회식하는 거 아니었어요?”
“회식?.. 회식이 뭐 별건가? 여기서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그러면 그게 회식이지.”
이 난감한 대답에 이두철이 박 원장을 바라보자,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될 거에요.”
라고 답하며 그대로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얼떨결에 따라 들어오게 된 허준한의원.
한눈에 봐도 돈 별로 안 들인 한의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앞선 두 원장과 악수를 하며 인사하는 외국인.
‘이게 대체 뭐야?’
허준이 태용한의원 식구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원장님들.”
“자네 때문에 요즘에 아주 죽겠어.”
“하하, 죄송합니다. 추석 때 까지만 고생해주세요.”
“참, 그건 그렇고 이쪽은 우리 한의원 이두철 선생.”
허준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두철이었지만, 허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이두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년에 우리와 함께하실 선생님이라고, 최 원장님께서 직접 전화하셨더라고요.”
최인호 원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두철이 현실을 직시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에 보이는 선생님들 모두 함께 할 거라는 것.
그 말인즉슨, 괜히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장님들끼리 이렇게 종종 모이시나 봐요?”
이두철의 물음에 허준이 김태식 원장과 박용준 원장을 바라봤다.
당연히 설명 정도는 하고 온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일은 했으나 이두철 선생이 성실하게 탕전실에서만 살았기에 이 상황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는 데에서 벌어진 일.
“아, 그게 아니라-”
허준이 설명하려던 찰나,
“선생님.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잠시만요.”
박용준이 머리를 긁으며 이두철 선생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은 이두철.
“그러니까, 여기 선생님들이 그 최인호 원장님께서 말한 봉사활동에 같이 참여하시는 분들이라는 거죠?”
“네. 맞아요. 그리고 종종 이렇게 만나서 같이 치료 사례를 공유하면서 공부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정말, 좋은 단체네요.”
이두철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높은 급여를 위해서 면접을 봤고, 그 면접에서 내년에 일하기 전까지 조건으로 봉사활동 단체에 참가해달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자발적이라기보다는 목표를 위한 수단.
이두철에게 지금의 이 일은 그저 일의 연장 선상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저녁부터 먹도록 할까요?”
그렇게 이어진 저녁 식사.
도시락을 먹으며 선생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김예진이 오늘 있었던 일을 박용준에게 말하자,
“대박. 그래서 그 할아버지 퇴원하신 거예요?”
“네. 오늘 하셨어요.”
“와... 김 원장님. 지금, 이야기 들으셨죠?”
“나 아직 귀 안 먹었거든. 그보다 허준 자네... 참, 못 말리겠구먼.”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허준의 대답에,
“그게 더 재수 없어. 차라리 잘난 체라도 좀 하면 안 되겠나?”
“그, 그럴까요?”
조용히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이두철.
그러니까 대충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내가 만드는 탕약의 처방전이 대부분 이곳에서 나온 거다?
그리고 뭐, 암에 걸린 환자가 괜찮아져서 퇴원했다부터 어떤 환자는 어떻게 됐다 등등.
‘아무리 그래도 이거 허풍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때,
밥 선생이 이두철에게 말을 걸었다.
“이두철 선생님. 로버트 킴이라고 합니다. 밥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밥 선생님. 이두철입니다.”
“처음 오셔서 낯서시겠지만,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이두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밥 선생님은 여러 번 참여하셨나 보네요?”
“물론이죠. 저는 이것 때문에 여기서 근무를 시작한걸요.”
“그래요?”
의외라는 듯한 이두철.
대체 어떤 사람이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에 업무의 연장을 하고 싶어 할까?
“네. 이게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마, 직접 경험해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뭔가 좀 이상한데?’
그렇게 간단하게 저녁이 끝나고 평소처럼 시작한 혜민서의 활동.
허준이 이두철 선생을 보며 말했다.
“이두철 선생님. 이쪽으로 올라와 보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허준의 제안에 이두철이 카이로베드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추나 실습을 서로 하려나 보네.
허준이 이두철의 체형과 균형을 파악한 뒤,
“혹시, 추나 해보셨나요?”
“네. 간단하게 몇 번 배웠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바로 숨 편하게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그렇게 스읍, 하- 하며 숨을 내뱉는데,
숨이 채 나가기도 전에 몸 안에서 뽀드득 소리가 올라온다.
동시에,
‘뭐, 뭐야 이게? 너무 시원하잖아?’
이건 단순히 시원하다고 표현할 만한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황홀하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어서 들리는 허준의 목소리.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 봐요? 목과 어깨 부분에 근육들이 많이 뭉친 것 같은데.”
“아, 네. 맞습니다.”
“이왕 올라온 김에, 간단하게 침도 한 방 맞으시죠.”
허준이 가운 주머니에서 침을 꺼냈다.
이어서 그 침이 망설임 없이 이두철의 어깨로 들어갔다.
폐업하기까지의 여정을 겪으며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단단하게 뭉친 어깨 근육.
그런데, 침이 들어간 자리에서 서서히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뭐지?’
허준이 엎드려 있는 이두철에게 말했다.
“잠시만 맘 편히 쉬고 계세요.”
그러고 돌아서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원장과 박 원장이 투덜거렸다.
“와~ 우리는 안 해주고, 저 친구만 해준다고?”
“원장님들은 서로 해주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좀 다르지.”
이어서 추나와 관련된 대화와 함께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허준이 침을 뽑았다.
“어떠세요?”
이두철이 허준을 바라봤다.
지난 몇 달간의 스트레스로 매일 무겁게 느껴졌던 어깨가 지금은 날아갈 듯 가벼워진 것이 아닌가.
‘이건 마치.. 그래. 개원 준비를 할 때의 그 느낌이다. 활력이 넘쳤을 때의 느낌.’
동시에, 도시락을 먹으며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그게 전부 뻥이 아니라,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여전히 멍한 표정의 이두철.
그리고 그 표정을 본 밥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직 놀라긴 일러요. 이제부터 시작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