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한의사-158화 (158/230)

158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원장님.”

“원장은 무슨, 다른 사람도 없는데 편하게 부르게.”

“네. 선생님.”

부름을 받아 원장실에 달려온 박원효가 웃으며 인사했다.

스승 김준일.

지금 보이는 인자한 미소 뒤에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면모가 숨겨져 있다.

옛말에 구밀복검이라고 했던가.

아마 인간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이 사자성어야말로 선생님을 대표할 수 있겠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한 면모일 뿐.

그렇다고 그가 쌓아 올린 명성과 한의학계의 업적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진료 실력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커다란 한방병원을 운영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 오준형 원장을 대신해서 방송에 나가줬으면 해서 말이야.”

“제가 말입니까? 오 원장이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요.”

“자네도 소문 들었을 텐데?”

그 물음에 박원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방병원 내에서 가장 핫한 소문 중 하나였으니까.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자존심이 상하셨나 보군.’

“네. 영상도 확인했습니다.”

“그래.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확실히 실력이 없는 친구는 아니더군요. 손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환부를 찾아가는 과정이 꽤 많은 경험이 있는 친구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이를 보면 온전한 실력이라기보다는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어쩌면, 오 원장이 운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김준일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살짝 나쁠지언정,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라는 듯한 행동.

수많은 환자를 거치면서 온갖 일을 겪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여유이리라.

“안 그래도 그래서 이번에 주제를 디스크로 살짝 바꿔봤다네.”

“디스크라면...? 우리 병원에서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로군요?”

박원효가 자신 있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김준일에게 배운 침과 추나.

특히, 추나는 지금의 케이한방병원을 있게 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동의보감에서 기록만으로 남아 있던 추나를 다시 발굴해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김준일 선생님이었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더해서 규모가 커지면서 수십 년 동안 임상과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다듬어진 침술.

그것을 모두 이어받아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이 바로 박원효였으니.

“자네가 가서 우리의 이름을 되찾아 오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일요일.

출연 패널들의 대기실.

지난 번 일로 대기실은 꽤 시끄러운 분위기다.

허준이 뽑아낸 조회 수와 이슈 때문이리라.

“그런데, 정말 그분 괜찮으시데?”

“나중에 내가 따로 알아봤는데, 정말로 통증이 마술처럼 사라졌다는 거야.”

“젊은 한의사가 나오길래, 약이나 팔러 나온 돌팔이인 줄 알았는데, 돌팔이는 아닌 것 같네?”

“혹시, 또 모르지? 어쩌다 얻어걸린 것일지도.”

이렇게 수군거리는 와중에,

허준에게 다가와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

의사와 한의사의 대립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각자도생의 서바이벌과 같은 방송이었으니까 말이다.

‘하긴, 장르 불문하고 편집 당하면 그대로 끝이긴 하지.’

그래서 오늘도 새로운 사람들이 꽤 보였다.

그때, 지난번에 본 한의사 김윤아가 허준에게 먼저 다가와 아는 체했다.

“일찍 오셨네요? 지난 촬영 때는 정말 멋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건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게다가 볼펜으로 그런 일을 할 줄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죠. 볼펜은 손으로 압박하기에는 좀 깊이가 안 나올 것 같아서사용해 봤습니다.”

“하여튼 대단하시네요. 혜민서 선생님들은 다들 그 정도 하시나 봐요?”

그 물음에,

허준이 웃으며 답했다.

“더한 선생님들도 있죠.”

이렇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다가오자.

“어?...”

그 남자를 알아본 김윤아가 말을 더듬었다.

당연히 오준형 원장이 올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박원효 원장이 등장했기 대문이었다.

“박 원장님? 원장님이 여기에는 어쩐 일로?”

“우리 김윤아 후배님 오랜만이네?”

김윤아가 허준에게 속삭였다.

“인사드리세요. 우리 한의사패널에 박원효 원장님이에요. 오 원장님 대신에 오셨나 봐요.”

오 원장님 대신이라고?

그렇다면 케이한방병원 소속의 선생님인가 보군.

“안녕하세요. 이허준이라고 합니다.”

“박원효라고 하네. 자네 이름은 병원에서 하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지. 젊은 친구가 제법이던데?”

“감사합니다.”

박원효가 여유롭게 웃으며 허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그보다, 오늘 주제는 다들 잘 알고 있겠지?”

“네. 물론이죠.”

“물론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자네들이 조금 도와줬으면 하는데?”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허준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자네들만 믿겠어.”

그렇게 시작된 촬영.

무대에 올라가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어?’

허준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과거 연이 있었던 연기파 배우 최우중.

그가 연예인패널이라 적히 자리에 턱 하니 앉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준의 머릿속에 최인호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선물이란 게?’

*   *   *

최우중이 들어오는 패널 중에서 허준을 발견하고는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기도 하지만, 김강현의 부탁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엊그제 갑자기 자신을 부른 김강현.

“우중아 너 일요일 날 스케줄 비어있지?”

“또, 왜요? 다음 주에 촬영 들어갈 거 대본 읽어야죠.”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 프로그램 하나만 하자.”

“싫어요. 저 안 나가는 거 아시면서.”

최우중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그러자,

“그러지 말고, 너하고도 관계있는 일이라니까?”

“나랑 관계가 있다고요?”

되물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최우중.

가족 중에서 방송에 뭐 나갈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집안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꽤 있었으나,

타고난 외모만큼은 유전자를 몰빵 당했다 싶을 만큼 압도적인 그였으니까.

“허준 원장 알지?”

“어? 허준 선생님이요?”

“그래. 네가 좋아하는 바로 그분.”

격하게 거부하던 최우중이 곧바로 흥미를 보였다.

허준 선생님의 일이라니?

“형. 조금 자세하게 말해봐요.”

김강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의 제왕이란 프로그램 들어봤어?”

“네. 그거 가끔 TV 켜놓으면 나오는거 말하는 거죠?”

“그래. 거기에 허준 원장이 출연했거든.”

“정말요?”

“야, 너 허준 원장 팬이라면서 몰랐나 봐? 유튜브에 검색해 봐.”

최우중이 곧바로 스마트폰을 검색했고,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자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과거 진료를 보러 다니면서 쌓인 인연도 있었지만,

지난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혜민서란 단체와 허준의 행보에 반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익명으로 꽤 많은 후원금도 넣는 중이었고.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 별건 없고. 들어보니까, 여기가 조금 재밌게 돌아가더라고. 전쟁터 같달까?”

“전쟁터요?”

“그래. 거기서 재미없거나 이슈가 안될 것 같으면 바로 편집.”

김강현이 두 손가락으로 가위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 출연에 갑자기 주제가 이틀 전에 바뀌었다는 거야.”

그 말에 최우중이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이쪽에 오래 생활하다 보면 보고 듣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으니,

“누군가가 협찬을 좀 많이 했나 보네요.”

“뭐,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네가 가서 연예인패널에 앉아서 허준 선생을 응원하도록 해.”

“응원이요?”

“그래. 네가 응원하는 모습이 그냥 잘리지는 않을 거 아니야?”

“오~ 그거 괜찮은 방법인데요?”

그렇게 참여하게 된 최우중.

그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진행자는 흥분한 상태였다.

“자, 오늘은 패널중에 특별한 분이 계시는 군요. 바로, 배우. 최우중 씨입니다.”

와아-!

“안녕하세요. 최우중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처음인데,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런 프로그램에는 한 번도 참여한 적 없다고 들었는데, 어쩌다가 나오시게 되셨나요?”

“아무래도 이제 제가 나이가 나이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슬슬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재치있는 답변에 관중들을 비롯해 전문가 패널의 분위기가 한껏 상승했다.

특히, 이렇게 특별한 패널이 있을 때는 시청률이 평소보다 훨씬 높게 나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럼, 바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디스크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병이죠? 네. 요가강사로 활동 중이신 이은혜 강사님이 먼저 스타트를 끊으시네요.”

요가강사가 나와 시범을 보이는 좋은 스트레칭이 끝나고,

이어서 허리 디스크가 생기지 않게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는 영양사의 이야기가 나왔다.

‘보나 마나 저건 잘릴 확률이 높겠네.’

그리고 정형외과 차례.

당연히 자세와 근육 그리고 수술의 예후와 그로 인한 재활운동. 나아가서 예방 운동까지.

특히, 연예인패널과 진행자가 직접 몸소 체험하면서 시원하다는 반응에 사람들의 흥미를 더했다.

그리고 마지막.

“디스크 하면 또 빼놓을 수 없죠. 한의사 선생님들을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시범을 돕기 위해서 다른 선생님들도 함께 하신다고 하네요.”

박원효를 비롯해 허준과 김윤아가 함께 무대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케이한방병원의 박원효 원장입니다. 오늘은 우리 케이한방병원의 추나요법과 수십 년간 실제 치료사례로 만들어진 이 침술의 치료 방법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허준과 김윤아가 눈을 마주치고 나온 환자를 안내했다.

간이 베드 위에 누운 환자.

스크린에 기본적인 정보가 나왔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부축을 받아 겨우 걸어 나온 상황이 중요할 뿐.

“갑자기 너무 아파서 잘 걷지를 못하겠어요.”

“제가 한번 보도록 하죠.”

박원효가 엎드려 있는 환자를 손으로 진단하고는,

“이쪽이 통증이 있으시죠?”

“어, 네. 맞아요.”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어서 추나를 시작했고,

지원자의 몸에 붙은 마이크는 시원한 소리를 잡아냈다.

“어? 정말 한결 편해진 것 같은데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두 선생님이 환자 분을 천천히 일으켜 주시겠어요?”

허준과 김윤아가 환자를 일으켜 앉혔다.

그 상황에서 발등과 양팔 그리고 환부에 꽂힌 네 개의 침.

허준이 그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케이한방병원에서 사용한다는 침술인 신비침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직접 볼 수 있을 줄이야.’

왜 신비침이라 이름을 붙였냐면, 심한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디스크환자가 이 침을 맞은 뒤에 곧바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옆에서 부축 좀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박자를 맞춰서 천천히 환자와 함께 걸어 주세요. 자~ 하나, 둘~”

하나 둘 구호에 맞춰서 이인삼각 경기를 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 다리에 힘이 들어오는 것 같은데?”

“지금 좋아지고 있는 중입니다. 천천히, 조금만 더 해보도록 하죠.”

그렇게 이어진 신비침.

마침내 환자가 먼저 말했다.

“이제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한쪽씩 부축을 빼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습에 촬영장의 모두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저 한의사들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네.’

이만큼 임팩트 있는 장면을 연출해냈으니,

보나 마나 뻔한 결과인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와~ 박 원장님. 정말 대단합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신비침이로군요?”

“네. 맞습니다. 애초에, 허리 디스크라는 것이 발병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렇게 통증을 완화하고 신경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죠.”

최우중이 조용히 상황을 파악했다.

이거 이런 분위기라면 허준 원장님이 나설 자리조차 없겠는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황을 정리하는 진행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최우중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