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미묘하게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진맥 Lv. 4’가 ‘진맥 Lv. MAX’가 되었습니다.」
···
이어서 메시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메시지들을 볼 여유가 없다.
꽝-!
머릿속에서 번개가 지나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눈앞에 점들이 나타난다.
하나, 둘···.
마구 찍힌 점들이 이어져 선을 이루고, 그것이 곧 길을 만든다.
그 길이 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경맥이다.’
팔 안쪽 앞쪽에서 폐로 이어진 수태음폐경, 안쪽 중간에서 심포로 이어진 수궐음심포경.
그리고 뒤쪽에서 심으로 이어진 수소음심경.
십이경맥의 수삼음경이었다.
이어서 수양명대장경, 수소양삼초경, 수태양소장경의 수삼양경, 다리에서 올라오는 족삼음경과 족삼양경까지.
나아가 십이경맥에서 갈라진 십이경별로 이어진다.
십이경별 다음으로는 십이경맥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장부 대신에 힘줄과 관절과 연결된 십이경근.
마지막으로 기항지부와 연계된 임맥, 독맥 등의 8가지 경맥인 기경팔맥들.
그것들이 합쳐지다가 마침내 터지면서 사방이 어두워졌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불빛들.
그것을 본 허준이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불빛은 물결을 이루면서 빛나고,
그 위로 물이라도 흐르는 듯이 결이 생겨난다.
그 결을 따라가니.
마치,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
‘인간의 몸은 소우주라 하더니.’
과연 그러했다.
어두운 곳곳에서는 새롭게 무언가 흐르기도 하고, 색감이 있는 기운이 기류를 이뤄 뭉쳐 다니기도 한다.
의식을 집중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몸이 가볍게 떠오르며 그것들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조화.’
그렇게 균형 잡힌 모습을 보고있자니,
코끝으로 한약재들의 냄새가 흘러들어온다.
이어서,
삐빅- 삐빅-
어디선가 울려대는 소음.
허준이 눈을 뜨자,
새하얀 빛과 함께 탕전실의 전자 옹기탕약기들이 탕약을 완성했다며 알람을 울려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을 줄이야.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런 허준의 시야 한쪽에,
[진맥 Lv. MAX]
- 기운의 흐름을 깨닫게 된다.
나타난 메시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좀 전에 직접 몸으로 체감하고 왔으니까 말이다.
‘우선 이 시끄러운 녀석들부터 조용히 시켜야겠네.’
허준이 울려대는 탕약기들을 향해 걸어갔다.
* * *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샤워를 끝낸 허준.
어제 있었던 경험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네.
집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책과 그림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났기 때문이리라.
‘오늘 진료가 벌써 기대되는군.’
그렇게 출근길에 오른 허준.
새로 이사 온 오피스텔에서 한방병원까지 지하철 네 정거장 거리인 아주 가까운 곳이다.
당연히 서울 중심지에 있는 곳이기에 가격은 비쌌지만.
‘직원 복지 차원에서 제공해주는 곳이니.’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조건이었다.
출퇴근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게 회사원들의 격언 아니던가.
물론, 허준이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준한의원에서 벌어 둔 돈과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보상금이 있었으니까.
‘김정우 선생님이 보상금을 워낙 넉넉히 챙겨 주셨으니.’
하지만, 돈도 써본놈이 잘 쓴다는 말이 있지 있듯이.
여전히 돈쓰는 게 어려운 허준이었다.
어찌 됐든 그런 생각과 함께 출근길에 오른 허준.
몇몇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그것뿐이었다.
예전에 TV에 몇 번 나왔을 때는,
이렇게 지나가다 보면 인사는 물론, 사진을 찍자고 하거나 사인을 해달라는 등의 요청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정도면 해도 양반이다.
몇몇 사람은 자기가 지금 증상이 어떤데 뭘 해야 낫냐고 물어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땐, 정말로 난감했지.’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그래서 한동안은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요즘에는 그 역할을 박 원장이 톡톡히 해주는 중이었다.
확실히 방송이 체질에 맞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한방병원.
허준이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 원장님.”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로비에서부터 여기저기 인사가 시작된다.
그녀들도 허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 대부분은 입원해 있는 윤다희에게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워낙 친화성이 좋은 데다가, 직원들에게 서비스와 관련한 교육을 하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로비부터 각 진료실과 입원실 데스크까지 전부 허준한의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퍼져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
여기에 더해서 최근 한방병원의 실세라고 불리는 총무팀의 김예진 팀장을 비롯해 허준한의원과 태용한의원에서 근무하던 선생님들의 증언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원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김 선생님.”
“이제는 김 팀장이거든요?”
“아, 죄송해요. 워낙 입에 김 선생이라고 붙어서.”
“괜찮아요. 원장님이라면 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김예진이 피식 웃으며 답했고,
허준도 가볍게 웃었다.
“그럼, 오늘도 수고해주세요. 원장님.”
“네. 이따 뵙죠.”
업무 공간은 달라졌지만,
느낌은 허준한의원 때의 그것 그대로인 두 사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허준이 진료실로 들어와 진료 준비를 했다.
외투를 벗어 걸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다.
여기에 새하얀 가운을 걸치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 준비 끝.
‘좋아. 시작해볼까?’
오늘의 첫 회진 환자는 입원실에 있는 박민호 환자였다.
간암 치료를 위해서 이식 수술을 받은 뒤에, 케어를 위해서 한방병원에 입원한 환자.
“아이고, 어서 오세요. 선생님.”
“박민호 씨. 좋은 아침입니다. 컨디션은 좀 괜찮으세요? 얼굴은 많이 좋아지셨네요.”
말 그대로다.
이미 입원을 꽤 해온 데다가, 꾸준히 진료를 받아 허증으로 인해 발생한 증상들이 대부분 호전되어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아쉬운 점은.
수술로 인해서 완전하지 못하게 흐르는 경맥의 흐름이다.
“네. 정말, 감사드려요. 여기 입원한 뒤로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네요. 일단, 진맥 한번 잡아 볼까요?”
그렇게 올라온 두 손을 잡은 허준.
맥을 잡고 느껴지는 것에 집중하자,
손끝에서 느껴지는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합쳐지면서 그림이 완성되어 간다.
‘역시, 아직 이식된 부분의 흐름이 온전치 않네.’
살짝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퇴원하고 통원치료를 받아도 되겠어.
아니나 다를까.
허준이 손을 떼자마자,
“선생님. 어떤가요? 퇴원해도 되겠죠?”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컨디션이었기에 박민호가 되물었다.
설날만큼은 그래도 평소에 자주 못 보는 자식들과 며느리, 손주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원래 사람이 그렇지 않던가.
아플 때는 생각도 안 나던 것이 살만해지니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법.
허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퇴원하시죠. 통원치료로 전환해도 될 것 같아요.”
“정말요?”
대답을 들은 박민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자,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포인트를 5000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며 보상이 주어졌다.
또다. 지난번에도 완전한 완치가 아닌데 충분히 치료되었다고 생각하니, 퀘스트가 완수되지 않았던가.
‘기준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뭐, 나야 포인트를 얻으면 더 좋긴 하지만.
일단은 회진부터 마무리 지어야겠군.
“그럼, 퇴원절차는 데스크에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허준이 복도로 나오자,
박민호가 입원해 있던 입원실에서 박수 소리와 환호가 울려 퍼졌다.
* * *
4층. 허준의 진료실.
여느 때처럼 몰려든 환자들을 허준이 함께 진료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환자가 들어오고,
허준이 차트와 함께 문진을 시작한다.
“어깨가 아파서 오셨다고요?”
“네. 제가 잠을 잘못 잤는지...”
“제가 잠시 볼게요.”
손을 이용한 간단한 촉진에 이어서,
“진맥 좀 잡아 보겠습니다,”
진맥까지 마친 허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해진 모습이었다.
차트에 정확하게 위치를 그려 넣으면서 처방까지 함께 내렸으니까 말이다.
“치료실로 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치료실로 향하면,
허준이 직접 나와 침을 놓거나.
때로는 밥 선생이 대신 놓기도 했다.
증상이 가벼울 때 한해서 말이다.
주치의를 밥 선생으로 바꾸는 것이다.
면역이나 소화기 등은 유도진이나 고요한 선생에게.
척추 관절 부분은 김태식 원장님이나 박용준 원장에게 등등.
뭐, 굳이 과를 나누기는 했으나,
모두가 올라운더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경험을 쌓은 상태였으니,
‘일이 한결 수월하네.’
물론, 이것은 허준의 느낌이었고.
반면에 다른 선생들은.
“대체 뭐지? 허준 원장님 요즘에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내가 요즘 느끼는 건데, 예전보다 나에게로 넘어오는 환자가 20%는 늘어난 것 같아.”
“그것도 그런데, 저는 넘어올 때 차트보면 가끔 놀란다니까요?”
고요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어떤 느낌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차트가 넘어오면 차트를 확인하고 처방대로 치료에 들어간다.
침, 뜸, 탕약부터 시작해서 한방병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까지.
같은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들의 처방도 매번 다르다.
뭐,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 처방대로 치료를 받고 난 뒤에 환자들의 반응이었다.
“와...”
감탄과,
“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의문.
이런 모습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기에 충분한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예전에도 종종 이런 경험이 있었지 아마?”
김태식이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기억 안 나? 우리 혜민서 처음에 시작했을 때 말이야, 허준 원장이 알려준 치료법으로 진료 보면 가끔 환자들이 놀랐잖아? 지금이 딱, 그 느낌이란 말이지.”
“맞네요. 그럼, 그 말은...?”
무심하게 듣고 있던 유도진이 묵묵한 말투로 답했다.
“과제로군요.”
“아... 과제는 좀 싫은데...”
박용준의 중얼거림과 함께,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바빠진 한방병원 사람들.
물론, 그중에서 가장 바빠진 것은 다름 아닌 유도진이었다.
워낙 약을 잘 짓기로 유명한 데다가, 한방병원에 온 뒤로 TV에 출연하면서 더욱 그 이름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매일같이 진료를 마치면 탕전실로 출근하는 게 일상이 돼버린 유도진.
그리고 그런 유도진의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이는 이두철.
“오늘도 겨우 마쳤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두철 선생님.”
“아닙니다. 원장님께서 고생하셨죠.”
여전히 그 딱딱한 말투가 익숙해지지 않은 이두철이었지만,
예전만큼 낯설지는 않게 되었다.
이렇듯 열심히 만든 보약들은 이중으로 포장을 한 뒤에 택배회사를 통해서 여기저기로 배달되었고.
그중 몇 개는 유도진이 직접 챙겼다.
바로, VIP들에게는 보내는 보약들이었다.
‘그동안 몸의 상태가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
굳이 택배로 보내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북한산 언저리에 있는 거대한 저택.
“자네 요즘 바쁜가 보네. 얼굴이 상했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설 연휴이다 보니.”
“그래. 자네한테 도움받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그럼, 어디 맛 좀 봐볼까?”
백발의 노인의 말에,
옆에 있던 아줌마가 유도진이 가져온 보약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향긋한 향을 피워 올리는 보약을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든 노인이 향을 음미했다.
“음, 역시 좋군.”
이어서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눈을 떠 유도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한 모금을 마시더니,
“좋은데, 지난번보다 살짝 아쉬운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야. 지난번에 가져왔던 것과 미묘하게 조금 다른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