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모습에 노인이 말을 이었다.
“아주 약간의 차이이네. 보약을 먹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는 자네도 잘 알 거야. 뱃속이 따듯해지면서 몸에 온기가 도는 그 기분을 말이야. 우리 같은 노인네들에게는 그게 더욱 크게 와닿을 테고.”
유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약을 배우면서 수없이 많은 약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종종 직접 약을 끓여서 복용하는 것은 한의사들의 특혜이기도 했고.
“그런데 지난번의 것이 아주 약간이지만 조금 더 따듯하게 느껴지더군. 그리 큰 차이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 작은 차이는 아마 자네의 컨디션 또는, 그날 사용한 약재의 품질의 미묘한 차이일 테니까 말이야.”
컨디션의 차이.
물론, 일반적인 한의사였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배워왔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약재의 차이.
유도진이 무언가 짚이는 것이 떠올랐다.
지난번의 보약은 허준이 직접 약재를 골라주지 않았던가.
‘정말로 그 차이란 말인가?’
살짝 심각해진 유도진의 얼굴에,
노인이 말을 이었다.
“이거 내가 괜한 말을 꺼냈나 보군.”
“아닙니다.”
“내가 자네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말씀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십시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린 유도진.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네.’
그래서 찾은 스승.
김정우 선생님의 집.
“선생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네. 그래. 그건 대보탕하고 공진단인가 보군?”
“네. 명절이기도 하고, 슬슬 떨어질 때가 된 것 같기도 해서요.”
“안 그래도 자네가 찾아올 것 같더니만.”
김정우가 유도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인상.
차갑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는 미묘하게 부드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 온 김에, 차라도 한잔할 텐가? 한방병원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저도 마침, 선생님께 궁금한 것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마주하고 앉은 스승과 제자.
당연히 시작은 김정우였다.
“한방병원은 어떤가? 병원장에게 듣기로는 분위기가 꽤 좋아졌다고 하던데.”
“네. 매우 바쁜 상태입니다. 물론, 아직은 입원실이 만실은 아니지만요.”
“그거야 어쩔 수 없겠지. 진료를 보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거라던가, 다른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던가?”
“지금도 차고 넘칩니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한의원 식구들이 이제는 어엿하게 전부 1인분을 해주고 있으니까요.”
김정우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진이 이정도로 말할 정도면 실제로는 훨씬 좋은 상황일 테니까 말이다.
“그보다, 선생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아주 좋아. 요샌 진료보는 거 대신에 박진석 그 친구랑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야기만 좀 하면 되니까 말이야.”
실제로 박진석과 김정우 두 선생은 이제 진료를 벗어나서 한방병원을 지키기 위해서 두 발로 뛰는 중이었다.
“그럼, 어디 자네가 궁금하다는 이야기 좀 들어볼까?”
“사실...”
유도진이 근래에 있었던 일을 김정우에게 이야기했다.
지난번 탕약과 이번 탕약의 차이점, 그리고 그 보약을 마신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피드백.
그것을 전부 들은 김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가는군. 어찌 보면 당연한 걸 수도 있네.”
“당연하다니요?”
“자네도 알지 않는가? 허준 그 친구의 침 솜씨를. 그것으로 짐작하건데, 그 친구가 손끝으로 느끼는 것은 그저 미묘한 감각뿐만이 아닐걸세. 단순히 그것만 느낀다고 한다면 여태까지 해온 치료들이 설명이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 말씀은...?”
“아마, 손으로 기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추측하네. 약재를 선별하는 데에서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거지. 그 때문에 자네가 말한 미묘한 차이가 생긴 게 아닐까?”
그 설명에,
머릿속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유도진.
'기감.'
왠지 알것 같았다.
최근에 침을 놓으면서 묘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여태까지 모든 일을 통계와 학문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며 우물에 갇혀있던 그가 한 걸음 내 딛는 순간이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환자를 봐왔고.
진단했으며, 처방하여 치료했다.
수없이 많은 약재를 만지며, 탕약을 만들었다.
몸 안에 각인된 이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깨달음과 합쳐진 것이었다.
김정우가 유도진의 빛나는 눈을 확인하고는 미소지었다.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천재는 천재인 건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도 출근해야 할 텐데. 이만 가보게.”
“네. 명절 잘 보내십시오.”
뒤돌아 나가는 유도진을 바라보며,
“역시, 허준 그 친구와 붙여 놓길 잘했어.”
중얼거린 뒤,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날세. 슬슬 두 번째 계획을 시작했으면 하네만.”
* * *
허준의 집.
엄마 이선영이 소파에 앉아서 뒹굴뒹굴하며 드라마를 보는 딸에게 말했다.
“진희야, 이번에 네 오빠가 선물이라고 항공권을 끊어서 보냈지 뭐니. 그래서 이거 참, 안 갈 수도 없고.”
“잘됐네. 엄마. 안 그래도 엄마 예전부터 TV보고 어디 가고 싶다 어디 가고 싶다 노래 불렀잖아.”
엄마, 이선영이 주먹을 꽉 쥐며 답했다.
“그러니, 무조건 가야지.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번 설에는 너 혼자 올라갔다 와야겠다. 엄마가 미리 연락 다 해놨거든? 그러니까 네가 가서 인사만 드려.”
“걱정하지 마세요~ 여행 잘 다녀오시고요~”
이진희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면서,
걱정 말라는 듯이 외쳤다.
당연히 부모님과 함께 친척 집을 도는 것보다 혼자 올라가서 잽싸게 후딱 끝내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연휴를 만끽할 생각에 가득 차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태원을 갈까? 아니지, 망원동? 아니야. 요샌 송리단길이 핫하다던데.’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한 이진희.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로 힘껏 숨을 들이마시었다.
그러고는,
“하아~ 역시, 이 맛이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진희.
명절 연휴로 수많은 인파가 움직이는 와중에, 몇몇 사람이 그런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일단, 오빠 집부터 가야겠군.’
이번 계획의 핵심은 당연히 오빠 허준의 집.
물론, 근사한 호텔을 잡아 호캉스를 즐기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한 그녀였다.
게다가 새로 이사까지 했는데,
마침, 서울 중심가 근처라고 하니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허준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선 이진희의 눈이 커졌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잖아?’
오피스텔이라고 해서 이전과 비슷한 크기일 줄 알았는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게다가 투룸도 아닌 스리룸 형식.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덤이다.
그런 이진희의 눈에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책과 논문들이 들어온다.
‘이게 다 뭐야?’
예전에 서울에 잠깐 올라왔을 때도 꽤 많이 굴러다녔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반위...?”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단어인데.
이어서 굴러다니는 프린트들도 한 번씩 살펴본다.
“이건 위염이네. 여기는 장염, 치질에 이 글자는 뭐더라..? 중풍?”
한자로만 된 책뿐만이 아니라,
온갖 그림부터 인체 해부도까지.
“누가 보면 다 고칠 줄 아는 줄 알겠어. 쯧쯧.”
그때,
문이 열리며 퇴근한 허준이 도착했다.
“와있었네?”
“당연하지. 지금이 몇 시인데.”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지났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좀 늦었나 보네.’
허준이 살짝 미안한 마음에 물었다.
“밥은 먹었어?”
“당연하지. 그런데, 오빠 좀 치우고 살아. 이거 인간적으로 너무 한 거 아니야?”
“야, 그것들 섞지 마. 나중에 다시 찾기 귀찮으니까.”
“대체, 치질이랑 위염이랑 무슨 관계인데? 오빠 한의사 아니야? 해부도도 굴러다니고.”
허준이 두 손을 들어 그대로 내려놓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둘래? 부탁이니까. 안 그러면 너 여기서 쫓아낸다?”
“어디로? 호텔로?”
“호텔은 무슨, 찜질방이지.”
“어휴~ 하여간, 있는 사람이 더한다더니. 맘대로 해. 이 몸께서 청소를 해주겠다는데 그걸 거부하다니 쯧쯧.”
그 모습에 허준이 피식 웃었다.
하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그보다, 오빠. 샤워 좀 먼저 해주면 안 될까?”
“샤워?”
“오빠 몸에서 한약 냄새나거든.”
“몸에 좋은 거야 임마.”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허준.
당연히 가족들의 근황을 물었다.
“그래. 부모님은 잘 계시지?”
“어. 여행 항공권 선물 받고 입이 귀에 걸리셨어. 특히, 엄마.”
“잘됐네.”
“그보다, 오빠 진짜 잘나가나 봐? 집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아~ 여기, 병원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야. 괜찮지?”
“정말로?”
“그럼. 너 내가 근무하는 한방병원 와보면 더 놀랄걸? 그보다 손이나 줘봐.”
“손은 왜?”
“왜기는.”
그렇게 동생의 맥을 잡은 허준.
‘이 녀석 이거..’
“야, 너 운동 좀 해라. 맨날 소파에 누워서 드라마 보니까 변비에 걸리지.”
“어?.... 뭐야.. 엄마한테 들었어?”
“됐고. 누워봐.”
“누우라고?”
허준이 침을 가져와 꺼내 들고는,
누워있는 동생의 배에 침을 꽂았다.
배꼽 7센티 정도 아래에 있는 관원혈.
그리고 배꼽을 기준으로 좌우 손가락 세 마디 정도에 있는 천추혈.
‘아까 이쪽의 흐름이 썩 안 좋았지.’
세 군데의 혈 자리에 침을 꽂아 자극을 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진희의 뱃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진희가 놀라 허준을 바라봤다.
얼굴의 색이 살짝 변한 동생.
허준이 침을 살짝 건드리며,
침을 타고 올라오는 장의 움직임을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그렇게 침을 빼며,
“화장실은 저쪽이야.”
말하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진 이진희였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이진희.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부끄러움보다는,
신기함이 앞선다.
며칠 동안 고생했는데, 침 한 방에 해결될 줄이야.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 오빠 생각보다 뛰어난 한의사일지도?’
* * *
설 연휴를 맞이한 한방병원은 평소와 같이 진료를 이어나갔다.
연중무휴 365일 진료와 입원실이 있는 한방병원의 일과는 이어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허준을 비롯한 식구들도 전부 돌아가면서 출근을 한 상황.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명절 연휴의 특성상 내원하는 환자들의 수가 반도 채 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평소보다 훨씬 느긋해진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허준이 엊그제 수술을 끝낸 박문식을 찾았다.
“박문식 씨. 좋은 아침이에요.”
“네.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김형서 원장님께 설명은 대충 들으셨겠죠?”
허준의 물음에 박문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고 깁스로 움직임을 제한했다가 엊그제 풀면서 검사를 마친 그였다.
검사결과는 아주 양호.
이제는 통원치료를 통해 재활과 한의학적 치료로 전환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팔의 움직임은,
“한번 움직여보시겠어요? 천천히요.”
허준의 말에 박문식이 팔을 들어 올렸다.
이전과 다른 각도로 움직이는 오른팔.
그렇게 올라가지 않던 오른팔이 박문식의 얼굴에 닿았다.
그것을 본 허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퇴원하셔도 되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밖에서 김성렬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렬이가요?”
“네. 엊그제 병원으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렇게 병원 로비에서 만난 두 남자.
박문식이 김성렬에게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나 휴가 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코치님 생각이야 뻔하죠. 나한테 이야기 듣고 얼마 안되서 갑자기 휴가 쓴다는 게 말이 돼?”
“그런가? 하여간 고맙다. 데리러 와줘서.”
“그보다, 팔은 어때요?”
박문식이 씨익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시각.
텅 빈 빙상장.
샤각 샤각 거리는 경쾌한 얼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양쑨이 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