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한의사-214화 (211/230)

214화. 우리가 만들어야죠

며칠 뒤,

진료를 끝내고, 김태현의 연락을 받은 허준.

“선생님. 김태현입니다. 부탁하신 대로 공사 전부 마무리됐습니다.”

“그래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태현 씨.”

“에이~ 이 정도가지고 뭘요. 언제든지 필요하면 불러만 주세요. 선생님께서 서울역에서 구해주신 사람이 몇 명인데, 다들 당장 달려올 겁니다."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에,

허준이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김태현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힘이 나네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부탁하신 대로 시공을마치기는 했는데... 저희 팀 이번에 공사 끝나고 빠지면 한동안은 밀린 일 때문에 바빠질 거라서요. 지금이라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더 말씀해 주시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딱, 그정도면 충분하니까요."

"정말이신거죠?"

"네. 대신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조만간 같이 밥이나 한 끼 하도록 하죠.”

통화를 끝낸 허준이 진료실 책상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사직서였다.

‘이상한 느낌이네.’

비록, 형식적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도 사직서를 내본 적이 없었던 허준이었기에 생소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봉투를 챙겨 곧바로 병원장실로 향한 허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당당해지네?’

우스갯소리로 누구나 가슴에 사직서 한 장씩은 품고 다닌다고 하더니,

이런 기분인가 보다.

그렇게 병원장실에 도착한 허준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퇴근하려고 외투를 입고 있던 최인호와 눈이 마주쳤다.

최인호가 허준을 반기며 물었다.

“어? 자네가 웬일인가? 이 시간에는 보통 탕전실로 가더니.”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당당한 발걸음.

힘이 넘치는 목소리.

‘이건...’

최인호가 뭔가 미묘하게 변한 허준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며칠 전,

현장에서 나눈 허준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참, 특혜논란이 일 수 있어서, 혜민서에서 운영하기로 했다고?”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그 쪽 사정도 있으니까요.”

“그럼, 아무래도 자네가 사직서를 쓰는 게 깔끔하겠군.”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자네,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병원장인 내 입장도 생각을 좀 해주지. 자네가 그만둔다고 하면, 한동안 매출이 떨어질 게 뻔히 보이는데.”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웃으면서 농담하는 최인호에게 허준이 웃으며 답했다.

자신이 할 줄 아는 대부분은 이미, 다른 혜민서 선생님들도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기의 흐름을 느낀다든가 하는 것은 확인할 수 없겠지만.

최근 넘어간 환자들의 예후만으로도 충분했다.

침구술은 밥 선생이, 추나와 고타법은 최허준 선생이.

탕약과 진맥은 유도진 선생님에다가 전천후로 다 커버가 가능한 다른 선생님들까지.

이는 당연히, 병원장인 최인호도 알고 있는바였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혜민서 선생 중에서 몇 명이 빠지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다들 허준 원장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니까.

특히, 유도진 선생은 김정우 선생님 때문에 더욱 그러한 눈치고.

“그래서 누구를 데리고 갈 생각인가?”

최인호가 묻고,

대답을 기다렸다.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혼자? 자네... 정말, 괜찮겠나?”

“물론이죠. 제가 하루에 보는 환자들 수가 몇 명인데요. 센터에는 처음부터 환자가 몰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준의 대답을 들은 최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이야기네.

지금도 하루에 혼자서 소화하는 환자 수가 몇명이나 되던가.

그거에 비하면 오히려 쉬운 일일 터.

어느새 눈앞에 걸어온 허준이 씨익 웃더니,

턱- 하고, 사직서를 건넸다.

“연락이 왔나 보군?"

“네. 좀 전에 받았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이것을 받아야겠지.”

최인호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특혜논란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한방병원에서 함께 하면서 여러 일을 헤쳐나오지 않았던가.

그동안 힘은 들었지만,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왠지 아쉽군.’

최인호가 사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 언제 갈 생각인가?”

“이번 주까지 진료를 보고 갈 생각입니다.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는 환자가 몇 있어서요.”

“알겠네. 그렇게 처리해주도록 하지.”

*   *   *

언젠가부터 혜민한방병원 홈페이지나 소개 글에는 새로 추가된 내용이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희귀/난치병/말기 암 진료를 시작한다는 내용.

덕분에,

김정우와 같이 말기 암에 접어든 몇몇 사람들이 입원실 또는 통원치료를 받는 중이었고,

나아가 희귀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대부분 저런 환자들은 여기저기서 웬만한 치료도 경험해본바,

돌고 돌다가 온 환자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허준의 진료실에 앉아있는 환자도 같았다.

‘베체트병.’

터키의 의사인 훌루시 베체트라는 의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병.

만성염증성 질환으로, 증상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입안에 생기는 궤양과 피부 또는 생식기에 생기는 궤양.

그리고 눈에 생기는 염증이다.

물론, 병이 진행되면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생기는 염증으로 인한 실명과 뇌졸중의 형태로 나타나는 신경 베체트, 동맥파열을 일으킬 수 있는 혈관 베체트 등이 있다.

하지만, 생활에 있어서 가장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입안에 생기는 궤양이었다.

침을 삼킬 때나, 밥을 먹을 때에도 통증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불편함의 극치겠지.’

문제는 이 병의 원인을 아직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환경적이나 유전적인 요인으로 볼 뿐.

허준이 앞에 앉아있는 황성국 환자를 바라봤다.

꽤 젊은 나이, 그래서인지 다행스럽게도 눈과 생식기에는 특별한 증상이 없다고 한다.

“아주~ 미치겠어요. 선생님. 밥을 먹을 수가 없다니까요?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입안이 자주 헐었었기에 그 느낌이 직접 와닿았기 때문이리라.

“우선 손을 이리로 줘보시죠.”

이어진 진맥.

역시나 위와 비장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입안의 병은 대부분 비와 위장의 문제.

위가 안 좋은 사람의 경우에 입 냄새가 나거나 입안에 염증이 생기는 경우가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꽤 오랜 기간 병을 앓아온 탓인지,

간 또한 영향을 받은 모습.

‘우선은 처방을 내려야겠군.’

예전 같았으면 퀘스트가 떠 있었겠네.

그 생각과 동시에, 허준이 처방을 마쳤다.

왕뜸으로 면역력을 올려줌과 동시에, 위장에 따듯한 기운을 불어 넣어줘야겠군.

그리고 탕약은 청열해독작용보다는 보약의 효과가 있는 처방을 먼저 사용하는 것이 좋겠어.

이렇듯, 혜민한방병원에 여러 환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   *   *

현재 혜민서의 규모는 상당해졌다.

국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커졌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김예진의 말에는 힘이 실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지금 이 자리를 빌려 그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동안 여러 번 연락을 주셨는데, 제가 워낙 일이 많다 보니까요.”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가 조사해보니, 다른 단체들과는 다르게 사무실 직원 숫자가 굉장히 적더라고요.”

“그야, 그 정도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여기저기에서 좋은 곳에 쓰라고 하면서 주시는 후원인데, 한 푼이라도 아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인터뷰하러 나온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참, 이번에 혜민서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혜민서에서 희귀/난치병 센터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희귀, 난치병 센터요?”

“네. 제가 일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까, 생각 외로 외면받는 환자분들이 있으시더라고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센터를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시면 이리로 연락 주십시오.”

“그것도 무료로 운영되는 시설입니까?”

“누구에게나 무료는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겠습니다.”

···

김예진의 인터뷰는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케이한방병원 병원장 김준일.

“허... 소문은 진즉에 들었는데, 정말로 시작할 줄이야.”

이미, 협회에 연줄이 있는 만큼.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은 그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 계획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던가.

“대단하군. 희귀/난치병 센터라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허준이란 한의사가 사업적인 감각은 없는 것 같아서요.”

“자넨. 아직 뭘, 모르는군.”

“모르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허준, 그 친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그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고 있어."

그러고는 중얼 거렸다.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저 친구와 함께하고 싶어 지는 구만. 이 실장.”

“네.”

“혜민서에 후원금을 전달해 주게."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대학 병원 의사들.

“의사도 아니고, 한의사가 저런 희귀/난치병 센터를 운영하겠다니. 웃기지 않아요?”

“뭐, 알아서 잘하겠죠. 어차피, 그래 봐야 어쩔 수 없다는 것만 알 테지요.”

“그런데, 저 혜민서란 단체에 있는 이허준 원장이란 사람은 꽤 유명한 것 같던데요?”

“유명하다니요?”

“외과 선생들은 대부분 알더라고요. 저쪽에서 건너온 환자들 보면 기적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그래서 수술하기가 아주 쉽다던데요?”

“에이... 설마요.”

*   *   *

혜민한방병원에서 커다란 버스가 산길로 향했다.

허준을 비롯해 김예진 그리고 몇몇 환자들과 함께.

“이거, 마치 우리가 치료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가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밖에 좀 봐봐. 아주 푸른 것이 싱그러워~ 이렇게 나오는 것이 얼마 만인지.”

“맞아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인 것 같아.”

김정우가 허준을 불렀다.

“자네. 위치를 아주 잘 고른 것 같구먼.”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괜찮으시지요?”

“암~ 그렇고말고."

김정우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혜민서의 희귀난치병 센터.

간판조차 없는 그곳에는 한옥과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

“오~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데? 선생님. 여기가 바로, 우리가 생활할 곳인가요?”

“네. 맞습니다. 앞으로 여기가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지낼 곳입니다.”

“허, 어릴 적 생각이 다 나는구먼?”

“자네도? 나도 그래. 정말, 감회가 새롭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어릴 적 추억까지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러면서 추억에 잠겨 과거 이야기를 신나게 주고받는 환자들.

그들의 모습이 어디가 다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허준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타고 온 버스가 돌아 떠나가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부터가 진짜지.'

“자, 여러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이쪽은 화장실, 그리고 이쪽은 주방입니다.”

“오~ 주방에 아궁이도 있네?”

“그러게. 여기가 주방이라는 것을 보아하니, 여기서 밥을 해 먹을 생각인가 본데?”

“맞습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오시면 방에 두 분씩 자리를 마련해 드렸고요.”

그때, 설명을 들으며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던 한 환자가 허준을 불렀다.

“원장님. 그런데, 밥은 누가 해주는 건가요? 우리끼리만 온 것 같은데...”

그 물음에,

허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우리가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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