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베이스캠프의 한의사
허억- 허억-
거친 호흡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이다.
몸은 평소처럼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확고한 목적은 지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
더군다나 지금에 와서 느껴지는 감각은 단 하나.
‘난 살아있어.’
마치, 온몸의 세포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살아있다고.
그래서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앞뒤에 있는 일행도 함께.
그렇게 도착한 장소.
목적지였다.
“여기는 공격대. 등정에 성공했다고 알린다. 다시 한번 전달한다. 등정에 성공했다고 알린다.”
아래쪽에 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정상에 오른 4명의 산악인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무겁게 느껴졌던 몸이,
지금 이 순간에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봉우리들.
그것을 내려다보며 누군가 중얼거린다.
“정말, 끝내주게 아름답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도 많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왜 사람들이 이곳에 자꾸 도전하는지 알 것 같아.”
“그렇지?”
“네.”
기분이 째졌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봉우리들.
허락된 특별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다는 이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감.
그 짜릿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깃발을 꽂고,
사진 촬영까지 마친다.
이쯤 되니, 짜릿한 경험 대신에 이곳의 풍경이 들어온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자연의 순수함.
‘왜 선배들이 순수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네.’
그때,
치지직-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기상이 악화되고 있으니, 베이스캠프로 빠르게 귀환하기 바란다. 반복한다. 현재 기상이 매우 악화되고 있으니, 베이스캠프로 빠르게 귀환하기 바란다.”
무전기를 들은 리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 해야겠군.”
“그래도 할 일은 다 끝냈잖아요? 기분 좋게 내려가죠.”
“좋아. 내려가서 파티를 벌이자고.”
“예썰!”
잠시간의 휴식과 함께,
팀은 곧이어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다음에 또 보자고~ 이쁜이.”
산악인 같은 인사와 함께,
하산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온도가 내려간 것은 덤.
다행스럽게도 등반팀 전원이 무사히 미리 설치해 둔 전진 캠프로 귀환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후방에 있는 베이스 캠프까지 가기에는 무리겠어. 이곳에서 잠시 눈보라가 지나갈 때까지 쉬도록 하지. 팀원들 체크해봐.”
“네.”
그렇게 체크를 마친 팀원 중 하나가 대장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다름이 아니라, 빌이 동상에 걸린 것 같습니다.”
“동상?”
문제가 발생 되었다.
더군다나 빌은 공격대원들 중 최연소이자, 처음으로 등정에 도전하는 신인.
이런 오지를 공격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다.
왜냐면 움직이고 있을 때는 그 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망할...”
“일단, 핫팩으로 응급처치는 하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 눈보라가 가실 때까지 일단은 버티는 수밖에. 빌을 불러주겠나?”
대장의 부름을 받은 빌.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작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빌.”
“네. 대장님.”
“좀 어때?”
“괜찮은 것 같습니다.”
존이 육안으로 빌의 발을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손으로 만지고 눌러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미 늦었군.’
운이 좋다면 응급처치용 핫팩이 도움이 될 테지만.
어쩌면...
“일단, 응급조치는 끝냈지만, 만에 하나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좋겠어.”
“괜찮습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으니까요.”
* * *
히말라야 베이스캠프.
산장처럼 생긴 이곳에는 꽤 많은 사람이 오간다.
관광부터, 진짜 등반을 하기 위한 원정대까지.
그리고 그중에서 특이한 사람이 있었으니.
“선생님. 여기 커피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선생님이 이곳에 계셔서 저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요?”
최고의 물가를 자랑하는 이곳에서 공짜로 커피를 얻어 마시는 사람.
동양인인 그의 이름은 박상준이었다.
박상준은 커피를 건네받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햐... 역시 커피 맛이 죽여주네.”
그 혼잣말에,
누군가 와서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정말 신비한 경험이었어요. 하필 잘못 먹고 배탈이 났는데, 그 뾰족한 바늘 몇 방에 싹 날 줄이야.”
“원래, 사람 몸이란 신비한 거죠.”
박상준이 웃으며 답했다.
동시에,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썩 느낌이 좋지 않은걸.”
과거 산악인의 길을 걸었던 그였기에,
저 하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엊그제 공격대가 올라갔다고 했었지?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
라는 바람과 함께 그날 저녁을 먹을 때에 도착한 두 남자.
걸어들어오는 모습만으로도 박상준이 그 환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저렇게 걸어 다니는 이유는 하나였으니까.
‘동상이네.’
물론, 여기가 평범한 환경이었다면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장비로 보면 저들은 전문 산악인.
산악인이란 수없이 많이 걸었기에, 발목을 접질린다던가 삘 확률은 매우 낮았다.
이미 걷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발의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일 터.
“하루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저녁하고 잠자리를 원합니다.”
그렇게 베이스캠프에 입성한 두 남자.
헨리와 빌.
헨리가 빌에게 물었다.
“느낌은 어때?”
“아직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조금만 참아. 오늘 푹 자고, 내일 내려가는 대로 바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임마,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그때,
밥을 먹던 박상준이 두 남자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네. 누구신지..?”
“아, 저는 이 베이스캠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우리에게 무슨 용무라도?”
“다름이 아니라, 이분 발걸음을 보니 제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혹시, 의사입니까?”
헨리의 물음에,
박상준이 살짝 망설이다 답했다.
“그런.. 셈이죠?”
이 미적지근한 대답에 이어서 주인장이 밥을 내어오며 답했다.
“우리 박 선생님께 도움받은 친구들이 많아요. 당장, 오늘 나간 손님도 고맙다면서 인사하던데요?”
그래서였을까.
두 남자가 박상준을 바라봤다.
박상준이 그 시선을 받아넘기며,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얼핏 보니, 동상에 걸린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동상이라면 빠르게 치료할수록 효과가 좋거든요.”
이쯤 되니, 혼란스러운 두 사람.
그때, 망설이는 헨리 대신에 빌이 자발적으로 신발을 벗어 발을 내밀었다.
“빌?”
“괜찮아요. 혹시, 또 모르잖아요?”
박상준이 빌의 발을 살폈다.
확실히 동상은 맞는데, 맡았던 환자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네.
“생각보다 가볍네요? 며칠 치료하면 금방 좋아지겠어요.”
“며칠이요?”
“네. 물론, 여기서 내려가 병원으로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병원까지 가는데 2일에서 3일. 아마 그 정도면 이미 괴사가 시작될 테지만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당장 치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죠. 제가 이래 봬도 동상 전문이었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치료.
박상준이 배낭에서 침을 꺼냈다.
헨리와 빌이 그것을 보고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뭔가요?”
“아~ 이건 침이라고, 제가 배운 의술의 기본이 되는 치료 도구입니다.”
이어서 빌의 발가락을 향해 침을 든 박상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 긴장 푸세요. 혹시, 어떤 느낌이 느껴지면 말해주시고요.”
그렇게 찔러 들어간 침.
첫 번째 침이었지만, 빌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끄아악!”
“빌!? 괜찮아? 선생님.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좋은 징조입니다. 겉에는 얼었지만, 안쪽에는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생각보다 더 빨리 치유되겠는데요? 자~ 갑니다~”
침 치료를 끝내고,
이어진 것은 당연히 쑥뜸이었다.
그렇게 시술을 끝내고 나온 박상준.
헨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오며 물었다.
“선생님.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그럼요. 아마, 생각보다 더 금방 좋아질 수 있을 겁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걱정하지 마세요. 2주 전에 등정하다 실패하고 내려간 팀에 있는 사람도 고쳤으니까요.”
* * *
며칠 뒤,
박상준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설원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벌써, 두 명짼가?’
이곳에 와서 두 명의 동상환자를 치료한 박상준.
문득, 이곳에 오기까지의 일이 떠올라 미소가 피어오른다.
처음으로 발에 감각이 돌아오던 그 날.
잊을 수 없는 느낌.
병원에서 기적이라고 하던 의사 선생님의 말.
그리고 그 이야기에 누구보다 기뻐하던 허준 선생님의 얼굴까지.
그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정복하던 꿈 대신에,
새롭게 피어난 꿈.
늦은 나이였지만, 누구보다 근성은 자신이 있었기에 한의대에 지원했고,
결국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동상 치료법을 배우기 위해서 지원한 혜민한방병원.
“자네가 박상준이로군?”
“안녕하세요.”
“윤 실장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그래, 동상 치료를 배우고 싶다고?”
“예.”
“듣자 하니, 여기서 동상 치료를 익혀서 네팔로 떠날 생각이라던데.”
“그건...”
배우고 떠난다는 말까지 병원장님에게 말했을 줄이야.
박상준이 살짝 당황했다.
“하나만 묻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그 물음에,
박상준이 눈을 빛냈다.
“제 꿈을 지켜준 것처럼, 저도 다른 사람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대답을 들은 최인호가 피식 웃었다.
‘이허준 그 친구가 뿌린 씨앗이로구만?’
“일단은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병원의 입장도 있어서 말이야. 대놓고 배우고 나간다는 말을 하다니, 너무 한 것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괘씸해서 안 되겠어. 자네는 동상 병동에서 1년 내내 인턴을 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군. 가서 반성의 의미로 조용히 지내도록 하게.”
그때,
박상준의 뒤로 헨리와 빌 그리고 등정에 성공했던 팀원들이 함께 다가왔다.
“선생님. 여기 계셨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이제 내려가는 거죠?”
“네.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사고 없이 내려갈 수 있겠네요.”
“별말씀을요. 그보다 빌, 발은 좀 어때요?”
“멀쩡합니다. 하하..”
“당연하겠죠. 아침에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데.”
빌이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발가락이 검게 변해가기는커녕, 지금은 기적처럼 산에 오르기 전과 같이 생생하게 돌아와 있었으니까.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이런 곳에서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됐고, 내려가세요. 치료는 끝났으니까. 참, 혹시 모르니 병원에서 검사 한 번 더 받아보시고. 제대로 된 축하파티도 즐기시고.”
“내려가서 꼭 사례를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박상준이 웃으며 말했고,
빌과 헨리를 비롯한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떠나간 산악인들.
박상준이 그들의 뒷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새하얀 설원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저 봉우리들이 선생님들 모습처럼 보이네.
허준 선생님부터 같이 사진을 찍은 허준한의원 식구들, 나아가 혜민한방병원에서 동상치료를 자세히 알려주던 유도진 선생님까지.
‘덕분에 제가 이곳에 있네요.’
“커피 맛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