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1_시크릿-X -- >
우린 나란히 연무대 정문 앞으로 다가섰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온갖 철판들로 막아져 있었고, 입구라곤 약간 허술해 보이는 쪽문이었다.
- 승철아. 조심해라. 이렇게 막아논 걸 보면 뭔가 있어.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다."
자유와 무전을 주고 받는 모습을 성식이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겁나냐? 그런걸 주렁주렁 차고 오게?"
"너야말로 아까부터 이거가지고 자꾸 태클거는데.....왜? 신경쓰이냐?"
"흥. 말이되는 소릴 해라."
성식이는 콧방귀를 끼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철판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보기 시작했다.
난 성식이와 반대로 쪽문쪽으로 다가가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흐음...용접이라....
쪽문은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용접된 철판으로 막아놨지만 왠지 허술해보였다.
"여길 잡으면 되겠네."
철판이 약간 휘어진 곳을 붙잡고 흔들어대자 순간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식이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신경을 끄고 자기 앞에 놓인 철판을 붙잡았다.
유치한 녀석.
- 왜 여기만 허술한 걸까?
"글쎄다. 누가 여기서 왔다 갔다 하나?
왠지 내 힘으로 뜯을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힘을 주고 흔들었다.
-덜커덩
놀랍게도 내 키만한 철판 덩어리는 쉽게 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철판 무게가 예상보다 훨씬 더 나간다는 것이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 철판을 다른곳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야....성식아..."
"왜?"
"같이 좀 들자."
"너 혼자해."
"어차피 너도 들어가야 하잖아."
"그럼 나 혼자 들어가지 뭐."
"야!"
난 솔직히 말만 저렇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자식이 진짜로 철판과 철문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와! 진짜....
자유 역시 말문이 막혔는지 '와.'하며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되니 나 혼자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온 몸에 힘을 뺄 각오를 하고 철판을 질질 끌고와서 겨우 담벽에 얹어놓았다.
"헉헉!
정말로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난 겨우 숨을 추스리고 연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
연무대 안은 온갖 드럼통과 수류탄 파편 들이 뒹굴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게다가 10분 전에 안으로 들어간 성식이조차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경계를 늦출수가 없어서 총을 겨누고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뒤를 봐줄게.
자유 역시 긴장했는디 조용한 목소리로 카메라를 회전시켰다.
나는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어 연무대 지리를 떠올렸다.
정문 좌우측으로는 훈련병 종교활동이 가능한 절과 교회가 있었고, 가로수가 심어진 길을 더욱 들어가면 부대 내 삼거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 삼거리로 진입하기 전에 좌측에 연대 생활관(막사) 건물이 있고 우측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그 좌측 연대에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일단 좌측을 주시하면서 천천히 그 길을 지나치려고 했다.
"..!!!"
순간 어디선가 음악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성당이야!
자유가 소리치자 나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그 음악 소리만 더욱 크게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건 찬송가, 아니 성가였다.
생각해보니 기독교에 찬송가가 있다면 천주교는 성가가 있었다.
나는 충실한 신자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내가 매우 어렸을 때 성가를 들으면 성당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는데, 그때마다 우리 어머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셨다.
그런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자 내 마음속의 두려움이 모두 사라진것만 같았다.
-승철아! 위험해.
"아니, 이 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 난 느낄수 있어.
우리 어머니를 만날 수 있어.
라는 말까지 목구멍에서 튀어나올려고 했지만 이미 하늘 나라에 있는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속 깊이 묻어둔 터라 그만 두었다.
대신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서서 성호를 그은후, 조심히 성당문을 열었다.
"....!!"
- 이, 이럴수가!
성당 안은 도무지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난 힘이 풀린 두 다리를 겨우 붙잡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 저 동편 하늘 환히 밝아오고 새들은 깨어 노래 부른다. 저 풀잎에 찬 이슬 고요한 아침 다 함께 모여 경배드린다......
단 한사람만이 오르간을 켜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듣는 사람....아니 감염자는 50명 남짓 되보였다.
그 들은 나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릴 뿐이었다.
- 어둔 밤 지나 찬란한 이 아침 나 삶의 그늘 벗어나리라. 저 하늘은 드맑고 참 아름다워 잠깨면 기뻐 주와 만나리.....
나는 오르간을 켜고 있는 사람 뒤에 서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는 비감염자였고 신부복을 입고 있었으며 흰머리카락이 힐끗힐끗한 노인이었다.
- 시달린 이 몸 고달파서 쉴 때 나 눈을 감고 주를 뵙는다. 저 땅위의 참 기쁨 새롭게 솟아 나 주와 함께 길이 살리라.....
성가 연주가 끝나자 신부는 일어서서 천천히 뒤를 돌았다.
난 순간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 도대체 어떻게....
자유의 말은 내 마음을 약간 대변해주었다.
"형제여.... 당신은...."
신부님도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곧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를 올리셨다.
나는 지그시 두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는 신부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는 매우 인자하게 생긴 70대 노인이었지만 한번 보면 도저히 잊혀지질 않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형제님?"
신부님이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내 목구멍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형제님 얼굴에서 모든 괴로움이 다 보이는 군요...여기 모여있는 우리 아들 들도 처음엔 그런 얼굴 들이었습니다."
신부가 고개를 돌려 감염자 들을 바라보자 나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다른 감염자 들과 다르게 두 눈에 힘이 풀려있었고 공격적인 성향도 보이질 않았다.
"저 들은 상부에서 군대를 보내 일방적으로 죽이려고 할 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그때 육군훈련소장을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했지만 이미 상부의
지시라고 하면서 스스로 총을 들어 병사 들을 죽이더군요. 그리고 본인 역시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
"어쨌든 남아 있는 감염자는 아직 이 부대 안에 있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기 직전에 겨우 23연대에 몰아넣을 수 있어서 피해를 최소화 했습니다. 물론 이미 밖으로
나온 자들은 같은 동포와 동료 들에게 죽음을 당했지만요. 형제님.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부님은 내 팔을 붙잡고 조용히 성당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내게 내밀었다.
"저는 항상 힘들 때면 이 코코아를 마십니다. 그럼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나는 말없이 그 잔을 들어 입가에 대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한 공기에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 성당에 오기 직전까지 온통 긴장을 하고 있었고 처절하게 싸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냥 흔한 코코아일 뿐인데 내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질 수가 없었다.
자유, 예선이, 설화누나, 지혁이, 승효, 세희를 이곳에 못데리고 온 것이 너무나도 후회될 정도였다.
"자아, 형제님. 이제 이야기해 보십시오. 제가 너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세상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습니다."
신부님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아까보다 마음이 더욱 편해지는 걸 느끼고 신부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랬군요.... 사람 들은 이곳을 가장 걱정했습니다만 제가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히려 이곳이 더 안전한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기... 신부님."
"예, 말씀하시지요."
"저들은 어떻게 바이러스에 감염되고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습니까?"
"아, 그건 말이지요......"
신부님은 약간 착잡한 표정으로 기억을 회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일단 그 때의 일을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저 들이 저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육군훈련소장님 덕분이었습니다."
"육군...훈련소장님이요?"
"예. 육군훈련소장님은 전역을 10개월 앞두고 계셨지만 누구보다 열과 성의를 다해 부대를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전입 오신지 5개월 만에 온 세상에 괴 바이러스
가 퍼져버렸지요. 소장님은 매우 신중한 분이셨지만 누구보다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셨습니다. 우선 부대의 입출입을 모두 막고 자기 연줄까지 이용해 항생제를
최대한 확보하셨지요. 그리고 자신보다 부하 들, 즉 아직 군대 적응이 안된 훈련병 들에게 항생제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항생제만으로 바이러스를 이기기 힘들었고
결국 대다수 병사 들이 다른 감염자처럼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예. 소장님은 부대원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했지만 감염자 들이 피감염자 들을 물었을 때 그 바이러스가 점염이 되는 걸 보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사살하셨지요.
저는 그때 소장님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어쨌든 부대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긴 했지만 상부에서는 이곳이 단일 부대중 가장 크다고 여겨
이곳을 폐쇄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루 전까지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무차별 폭격을 하겠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여론의 반발에 결국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반문하자 신부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조금 더 빨리 결정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소장님은 이제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감염자 들을 생포해 23연대 건물에 모두 가둬놓았습니다.
그리고 본인 역시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궈버렸지요. 그전에 소장님은 부하 들에게 이미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문이 닫히면 철판으로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권총으로 자결하셨습니다."
"......."
나도, 자유도 아무런 말없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소장님이 그렇게 되시기 전에 저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아직 희망이 보이는 감염자 들이 있으니 그 들을 끝까지 살려서 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은...."
어쩐지 뭔가 감이 잡히려고 했다.
아까 성식이가 연무대 입구에서 미국이 비밀리에 공유한 바이러스에 대한 자료가 있다고 했는데 왠지 신부님의 말과 맞아 떨어진듯한 기분이었다.
"예. 그들은 소장님께서 특별히 관리한 병사 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이러스에 제일 먼저 감염ㅤㄷㅚㅆ지만 소장님이 직접 만드신 어떤 약을 먹고 저렇게 ㅤㄷㅚㅆ지요.
사실 저는 그게 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소장님께서 제게 금고 비밀번호를 알려주시면서, '이 안에 이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있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정보를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넘겨 항생제를 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인 역시 이 항생제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아직 절반밖에 못 만들었다고 하시더군요. 그 절반의 약만 먹고 살아난 병사 들이 바로 저기에 앉아있는 우리 형제 들입니다."
"그렇군요..."
갑자기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미친듯이 어지럽기 시작했다.
성식이는 노아에서 온갖 정보를 제일먼저 듣기 때문에 이곳에 이 바이러스에 대한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우리에게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겼던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정보를 어떻게든 가지고 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신부님 그 자료가 어디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금고는 본부대 소장실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신부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직 감염자 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저조차 그곳에 접근할 수가 없어 이렇게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구요. 제가 총을 쏴서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겠지만 저는 보다시피 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딸 들을 저같이 미개한 자가 함부로 할 수 없지요."
"하지만 그 정보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겠지요... 다만...."
확실히 신부님의 신자와 사명의 사이에서 갈들을 심하게 하는 것 같았다.
"목적을 위해 죽이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나중에 더 큰 갈등에 부딪힐 때 그것을 쉽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은 어렵게 말을 이어갔지만 난 그 말 뜻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신부님!"
난 신부님 손을 꼭 붙잡고 내 진심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이 세상을 구하고자 영웅이 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은 충분히 고통받고 있고 누군가 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마음 속 깊은 곳에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오로지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저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분 역시 허락하시지 않으실까요?"
"....."
신부님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을 듣고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신부이긴 해도 나이를 많이 먹어서 사리분별을 잘 못하는 노인네일 뿐이지요. 좋습니다. 그럼 전 당신을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종이와 펜을 꺼내 숫자를 적으려는 찰나였다.
-타탕!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풀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신부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않고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럴수가..."
주위를 둘러보니 병사 중 몇명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는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고개를 들어 성당 입구를 쳐다보니 누군가가 서있었다.
"너는...."
나는 입술을 깨물며 총을 들고 서있는 놈을 노려보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신부님이 놀란 눈으로 물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총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그 놈은 김성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