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외전1 (악몽의 시작) -- >
마치 1년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불과 3일이 지났다.
전염병은 생각보다 빠르게 확산되었고 광주시민 절반 이상을 쓰러트렸다.
이제 계엄령도 뉴스 속보도 필요없었다.
딱히 방법도 없는 생존을 위해 모두가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무책임한 정부는 광주로 통하는 모든길을 차단하고 통신마저 끊어버렸다.
더 이상 전국적인 혼란을 방지한다는 취지였지만, 그것은 정부가 국민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 광주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생존을 위해 차를 타고 도로로 나가려던 사람 들이 제일 먼저 개죽음을 당했다.
망할 놈의 군대가 공중에 전투기까지 띄어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이다.
결국 광주 시민 들은 전염병의 덧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버렸다.
다행히 그런 혼란 속에서 이승철과 예선이는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 했고 결국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참의 고민 끝에 광주 문화예술관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차를 타면 또 다시 폭격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내려앉고 있었고, 어느새 차디찬 밤공기가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작된 죽음의 기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도시가 죽은것 같아요."
그 속에서 이승철과 예선이는 하염없이 어디론가 걸었다.
하지만 도시는 죽은듯이 조용했다.
도로 위의 차들은 어지럽게 흩어진 체 세워져있었고, 인도 위에는 여기 저기 쓰러진 시체들로 악취까지 진동했다.
불과 5시간만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디선가 공기를 찢어버릴 듯한 비명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악몽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목 안말라요? 뭣 좀 마실래요?"
이승철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오후 내내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했다.
"그래요....."
이승철과 예선이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 안은 아수라장이었지만 냉장고 안에는 음료수가 남아있었다.
이승철은 스포츠 음료를 꺼내 예선이에게 넘기고 자신도 캔뚜껑을 땄다.
"그때.... 그 군인들 괜찮을까요?"
"....."
예선이는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리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승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들은 시민 들에게 붙잡혀 무참히 밟혀야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들의 운명이 말해주겠죠."
"....."
이승철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생존을 걱정할만큼 여유가 없었다.
이승철과 예선이는 음료수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승철은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섬뜩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 무서워요?"
"예? 뭐가요?"
"도시가 쑥대밭이 됐잖아요. 사람 들도 죽어있고... 난 솔직히 두려워요. 한순간에 지구가 종말된 것 같아서요."
이승철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예선이는 마치 이런 일을 예전부터 예감이라도 한듯, 쓸쓸하게 시체 들을 둘러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처음 해부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 선배 들이 담력을 키운다고 카데바(해부용 시체)와 저를 해부실에 놔두고 문을 잠궈버렸거든요. 해부할 때까지 문을 안 열어 주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으면서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게 전통이라고 하더군요."
"끔찍한 전통이네요."
"후후. 저도 그때 참 끔찍하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나가서 선배고 뭐고 다 죽여버리고 싶었죠. 사람이 극심한 공포에 빠지게 되면 남는 건 원망과 증오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바스락.
이승철과 예선이는 극도로 긴장한 얼굴로 건물 사이에 얼른 숨었다.
다행히 도둑 고양이 한마리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이승철은 가방에서 손전등을 꺼내 전방을 비췄다.
전기마저 끊긴 마당이라 모든것을 건전지에 의존해야 했다.
"처음에 창가에 앉아 울기만 했어요. 극심한 공포때문에 페닉상태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죠. 불은 환하게 켜져있었고 밖에는 사람 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무서웠어요. 살려달라고 소리치지도 못했죠."
"왜요? 나같으면 창문 열고 바로 소리쳤을텐데..."
이승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예선이가 피식 웃었다.
"한편으로 그냥 오기가 생기더군요. 뭐 의사를 동경하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무언가 시작하려는 출발선부터 쓰러지면 제 자신이 용납이 되질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저는 메스를 들었고 카데바를 덮고있던 수의를 내렸어요."
점점 이야기가 흥미로웠는지 이승철은 예선이와 전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40대 여성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10살 때 돌아가신 우리 엄마를 보는듯 했거든요."
"....."
"그 여자분 살아계셨다면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을거에요. 정말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편해지더라구요. 그냥 기분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전 그분의 편안한 인상 때문에 메스를 내릴 수가 있었어요. 그 순간 두려움은 싹 사라져 버렸지요."
"그럼 해부는 잘 했나요?"
"예. 나중에 선배 들도 꽤 놀라더군요. 사실 다른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고 소리지르고 난리가 아니였대요. 그런데 제가 조용히 있으니까 오히려 밖에서 꼼짝도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괜히 제가 잘못되면 안되니까요. 아무튼 그때부터 왠만한 건 무섭지 않았어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무서워한다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지 모르게 되거든요."
이승철은 처음에 그게 무슨말인가 싶다가 갑자기 머릿속이 번뜩였다.
"어쩐지 예선씨는 저랑 비슷한 구석이 있네요."
"예? 정말요?"
예선이가 깜짝놀라면서 묻자 이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실 부사관 출신인데 제대한지 1년 밖에 되질 않았어요. 제대하고나서 취업하려고 여기저기 이력서도 써보고 면접도 봤죠. 하지만 취업하기 더럽게 어렵더군요. 하긴 좋은 대학 나와서 날고 긴다는 명문대생 들도 어려운게 취업이니까 저라고 뭐 별수 있겠어요."
"그럼 제대한게 후회스러웠겠네요?"
"예. 후회 막심이었죠. 정말 다시 군대에 가고 싶었어요."
이승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쑥대밭이 된 지상과 달리 맑게 개인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어둠을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선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눈으로 보이는 것만 ㅤㅉㅗㅈ으려고 하니까 네 바로 앞에 펼쳐진 길이 보이질 않는다.' 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전 이것저것 해보기로 결심했죠.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막노동도 해보고.... 무작정 부딪혀 보기로요. 그렇게 하면 언젠가 제 길이 열리겠죠."
예선이는 공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 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남 들을 따라가서는 자신의 길이 보이질 않는다. 라는 뜻 아닐까요?"
"....똑똑하네요."
이승철이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자 예선이가 조용히 손가락으로 V를 그렸다.
"아무튼 우린 비슷한 점이 많네요. 나이도 동갑이구요."
"그런가요?"
"예.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구해요."
"아.... 그, 그럴까요?"
보기와 다르게 이승철이 상당히 수줍어하자 예선이가 피식 웃었다.
"군인 들은 다 그렇게 쑥맥인가?"
"예?"
"아니야. 아무튼 어차피 동갑이니까 말 놓을게."
"아, 예... 아, 아니... 그래...."
"크크큭."
예선이가 낄낄거리자 이승철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만약 이 어둠이 아니었더라면 이승철은 앞만 쳐다보고 갔을 것이다.
-부우웅!
그런데 바로 그때 적막을 뚫고 거친 엔진음이 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다.
이승철과 예선이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숨자."
그 둘은 말이 필요없었다.
당장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골목 사이에 숨어 온 신경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