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1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외전2 (그녀의 기억) -- >
사람은 환경에 민감하다.
자신이 바꿀수 없는 환경이라면 알게 모르게 그 환경에 맞게 변화한다.
그래서 사람이 제일 복잡한것 같지만 제일 단순하면서도 어리석다.
그렇게 시간은 5년이 훌쩍 흘렀고, 설화 역시 강산이 수십번 변한만큼 겉모습이나 성격도 무척 바뀌어 있었다.
통통 튀면서 항상 활짝 웃던 소녀가 날카로우리만큼 강한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을 가진 냉혈인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헉헉....."
설화는 엄청난 땀을 흘려가면서 런닝기구 위를 달리고 있었다.
"많이 좋아졌군. 체력도. 유연성도 지구상 그 누구도 널 따라잡지 못할 거야. KG."
그게 벌써 1시간째.
남자는 간이 의자에 거꾸로 앉아 설화를 감시하는듯 했다.
하지마 그는 손에 들고 있던 A4 용지를 들여다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 자료 속에는 설화에 대한 온갖 분석이 적혀있었다.
"3년 만에 미국 CIA 블랙리스트 1위로 오른건 정말 기적에 가깝다고나 할까...."
남자의 말은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CIA 블래리스트 1위라는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는 소리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중국이 최대 경계하는 경쟁국에서 가장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일개 첩보요원이라면 그 실력만큼은 매우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용건."
설화는 런닝머신에서 내려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짧게 물었다.
"참 여전하구만."
남자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요즘 북한이 미국에 은근히 붙는거 알고 있지? 그 사이를 은밀히 조절하는 자가 있어. 이름은 이철원. 707 특수부대 출신으로 국정원 최고의 첩보원이야. 한국에서도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인재라더군."
"무슨 관계지?"
설화는 미국이 북한과 접촉하는 이유를 물었고, 남자는 그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바로 입을 열었다.
"보편적으로 이 사건을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 승계를 우리와 줄다리기를 하는것 같은데..... 보위 사령부에서는 다르게 보고 있나봐."
"어떻게?"
"미국의 장기적인 극비 플랜 보고서에서 앞으로 몇십년 후에 자신 들을 대적할 경쟁국으로 우리를 지목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럼 미국이 북한을 설득하고 있다는 건가?"
설화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확실히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이었다.
미국이 북한과 접촉하는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의 장기적인 계획에 중국이 최대 경계국으로 지정했다는 자체였다.
"그래. 우리의 손발을 자르려는 심산이겠지."
"....."
설화는 생수 한병을 한번에 삼키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럼 이철원 목을 따면 되는 건가?"
마치 주머니 속에서 물건 꺼내듯이 설화가 덤덤하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전에 이 자에게 미국이 북한과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알아내야 할 거야. 미국과 북한의 연결 고리이니까."
"그러지."
설화는 등을 돌려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 그리고."
남자가 손을 들자 설화가 멈칫했다.
"뭐, 새삼스럽게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약 네 존재가 들통날 경우 우리는 가차없이 널 버릴 거야."
"......"
설화는 아무런 말없이 문 밖을 나섰다.
그러자 괴기스러울만큼 어둡고 적막한 복도가 끝없이 펼쳐졌다.
"하루 훈련 스케줄치고 너무 힘들군..."
설화는 한숨을 내쉬며 목 관절을 풀었다.
그러나 그녀의 감각은 살기에 매우 익숙한터라, 온갖 무기를 들고 자신을 노려보는 암살자 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것도 그녀의 능력중 하나였다.
"와라."
설화의 말에 여기 저기서 칼을 빼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설화에게는 그 어떤 무기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런 어둠속에서 매우 불리했다.
방금 땀을 바가지로 흘린터라 그녀의 채취를 맡고 공격이 들어올 수 있었다.
"건방진년. 죽어랏!"
누군가 바로 앞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둘렀지만 설화는 그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았다.
"흥. 뻔한 공격을 하는군."
- 퍽!
"윽...."
설화는 등 뒤로 날카롭게 들어오는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발로 차버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곧바로 머리를 노리고 오는 공격을 또 피했다.
상대의 숨소리, 인기척, 살기 등.
설화는 몸의 모든 감각을 이용해 상대를 하나둘씩 제압해 나갔다.
- 짝짝짝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그 정도면 이철원 따위는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야."
설화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 남자의 곁에 섰다.
"이 놈들은 시시하니 네가 나를 상대하는게 어때?"
"훗... 아직 때는 아니야."
"흥."
설화는 콧웃음을 치며 그의 곁을 지나치려고 했다.
"설화."
남자가 설화의 팔을 붙잡았다.
"너와 나는 같은 존재다. 너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우리는 어차피 한 배를 타야할 운명이다."
그러나 설화는 남자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내 부모의 목을 베어버린 놈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수는 없지. 이 임무가 끝나고 나면 목을 빼고 기다려야 할 거다."
설화가 어둠 속에서 사라져버리자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쓴웃음을 내뱉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구나.... 아직도 인간의 탈을 벗지 못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