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8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외전2 (그녀의 기억) -- >
10년 후.
진기만은 그때 있었던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고 있다.
'어떻게든 그 사실을 사람 들에게 알렸어야 했는데.....'
진기만은 10년이라는 세월이 정말 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고민을 하는 사이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게다가 스캇이란 그 의문의 남자의 말은 사실이 되고야 말았다.
"아빠! 큰일났어! 사람 들이... 사람 들이...."
자유는 폭탄머리만큼이나 정신없는 표정으로 진기만의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진기만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묻자 자유는 숨을 돌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사람 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있어. 아무래도 여기도 바이러스가 퍼졌나봐!"
"......"
평소 같으면 어른한테 되먹지 않는 장난을 친다고 꿀밤을 때렸겠지만, 진기만은 아들의 말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다니...."
"아빠....."
진기만은 힘없이 주저 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자유는 그런 그를 얌전히 두질 않았다.
"아빠. 난 사람 들을 구하러 갈꺼야."
"뭐?! 네가 무슨 수로?"
진기만이 벌떡 일어서자 자유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자고?"
"그건 아니야! 우린......"
진기만이 말을 흐리자 자유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린 뭐?"
"우린 떠날 거야."
"뭐?! 도대체 어디로 가는데?"
"아빠가 원양어선하면서 봐둔 곳이 있어. 그 곳이라면 안전할거야."
"......."
자유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갔다.
"우리만 살자고 도망가겠다고?"
"도망가겠다는거 아니야. 그곳에 도착할때까지 생존자가 보이면 무조건 데려갈거야."
"......"
자유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진기만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혜은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
자유가 고개를 푹 숙이자 진기만은 천장을 응시했다.
혜은이라면 자유가 짝사랑하는 간호사였다.
그녀는 일요일마다 자원 봉사를 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바른 아가씨였다.
"혜은이도 데려갈까?"
진기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자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혜은이는 사람 들을 버리고 떠날 그럴 애가 아니야."
"휴........"
진기만은 한숨을 푹쉬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앞으로 12시간 후에 출발할거야. 그 놈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 들이 지금 쓰러지면 아마 13시간 후면 좀비로 변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 안에 어떻게든 혜은이 설득해볼게."
자유가 벌떡 일어서자 진기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12시간이야. 그 이후로는 절대 안돼. 무슨 말인지 알았지?"
"응!"
자유가 쏜살같이 빠져나가자 진기만은 농익은 장롱을 뒤져 지도 한장을 펼쳤다.
그의 눈은 동해를 걸쳐 태평양까지 가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내려갔다.
- 뉴칼레도니아
진기만은 손톱만한 그 섬에 두 눈이 꽂혀 있었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
진기만은 지도를 방바닥에 펼쳐놓고 장롱에 멍하니 기대었다.
이제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거라곤 스캇의 말을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자유는 거리 위로 쓰러지는 사람 들 사이를 헤쳐나가며 어디론가 뛰었다.
- 보건소
"혜은아!"
자유가 악을지르며 보건소 문을 부스다시피 열어제꼈다.
"혜은아. 이제 가자.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자유는 멍하니 등지고 서있는 혜은이의 팔을 꽉 붙잡고 이끌려고 했다.
하지만.....
"자유야....."
"......."
혜은이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자유는 온 몸이 굳어지는것 같았다.
"혜은아. 그 눈....."
"응..... 나는 항체가 없나봐....."
혜은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말을 제대로 이어가질 못했다.
"너,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된건데?"
자유가 겨우 입을 떼자 혜은이는 병상 한곳을 가리켰다.
"저 아이.... 몸에 열이 난다길래 그냥 한번 본건데....."
자유가 슬쩍 혜은이 등 뒤를 응시하자, 온 몸이 새하얗게 질린 10살 정도 되보이는 여자 아이가 보였다.
이미 그 아이는 눈동자가 안보였다.
"혜은아. 내 말 잘들어. 백신이 있을 거야. 서울에 가면....."
자유는 팔을 꽉 붙잡고 말했지만 혜은이는 그것을 뿌리쳤다.
"필요없어. 서울도 이미 무너졌대. 게다가 지금은 급속도로 평양까지 퍼지고 있고, 베이징, 모스크바, 뉴델리도 우리랑 마찬가지래....."
"........"
자유는 온 몸에 힘이 풀린것을 느꼈다.
주저앉지 않은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자유야. 너라도 빨리 떠나. 이젠 나는 가망이 없어!"
"아니야!"
자유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지만, 혜은이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 말 들어. 내가 너만 살라고 이러는게 아니야. 너 나 많이 좋아하지?"
"......."
"그렇다면 내 뜻을 이어줘. 살아서 고통받는 사람 들을 꼭 구해줘."
"......"
자유는 눈을 질끈감고 혜은이를 외면 했다.
그러나 그는 선택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 네 뜻을 이곳에서 이어갈게."
진기만은 연신 담배를 태웠다.
그의 배에 올라탄 사람은 겨우 5명.
바이러스를 이겨낼 항체를 몸에 지니고 있는 중요한 사람 들이었다.
"그래서 그 아가씨 뜻을 따르겠다?"
"응. 미안해. 아빠."
"......"
진기만이 대답없이 두 눈을 감자, 자유는 마지막이 될지 모를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빠. 소중한 사람이 곁에 없으면 사는게 사는게 아니라고 그랬지?"
"쳇! 어떤 거지같은 놈이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냐?"
"크크큭. 아빠. 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그런데 우리는 이미 축복받은 사람 들이잖아. 아빠처럼 나도 사명감을 가지고 싶어. 나, 그동안 제 멋대로 살아왔잖아. 이제는 뜻깊게 살고 싶다고."
"......"
진기만은 아들의 두 눈을 응시했다.
"28년간 그렇게 진지한 얼굴은 처음본다."
"아빠. 나도 이곳에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내가 사람 들을 최대한 구하는대로 아빠가 있는곳으로 갈게."
"어딘줄은 아냐?"
"어딘데?"
"뉴칼레도니아."
"엥? 뉴칼... 뭐?"
자유가 어벙한 표정을 짓자 진기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뉴칼레도니아. 아빠가 이거 줄게."
진기만이 지도를 내밀자 자유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네가 만약 배를 운항할 줄 몰랐다면 난 네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강제로 데려갔을 거야."
"크큭. 그때 배워두길 잘했다."
"웃지마, 시캬."
부자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 선상과 항구에 나눠 섰다.
"꼭 돌아와!"
"알았어! 꼭 돌아갈게."
진기만이 손을 흔들다가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난간을 붙잡고 몸을 내밀었다.
"자유야!"
"왜?"
"이승철을 꼭 찾아봐!"
"뭐?"
"이승철을 꼭 찾아보라고!"
"뭐라는 거지?"
그러나 배는 이미 바닷물을 타고 저 멀리 흘러갔다.
자유는 끝내 아버지 말을 알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한달 후에 아주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