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6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해가 벌써 중천에 걸쳤다.
스탠은 쇼파에 몸을 웅크리고 자면서도 추워서 덜덜 떨기까지 했다.
어제 하루종일 CSI 스리즈를 보다가 잠든 탓이었다.
-쿵쿵쿵!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자 스탠의 두꺼운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번뜩였다.
"아, 오늘 시민 회의!"
아니라 다를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스탠! 스탠! 일어났니?"
"예! 비슬리 아저씨. 이제 옷만 갈아 입으면 되요!"
스탠은 엉겹걸에 거짓말을 하면서도 화장실로 뛰어가 얼굴부터 씻었다.
헝클어진 머리는 모자로 대충 때울 생각이었다.
일단 급한것은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휴대폰... 지갑... 열쇠. 됐다!"
스탠이 날아가듯 현관문을 열자 통통하면서도 인자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다.
그가 바로 하원 의원인 비슬리 프랭클린이었다.
설화가 절대적으로 스탠을 믿고 맡기는 사람이었다.
"어째 좀 피곤해 보이는구나?"
"아, 예. 어제 뭐 좀 하느라....."
"그랬구나. 일단 차에 타거라."
비슬리씨와 스탠은 차에 올라탔다.
"사실 네 엄마가 일주일 전에 나에게 메일을 보내셨다. 네 진로에 상당히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더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뭐할건지 결정은 했니?"
"아직은요...."
"그래?"
비슬리씨는 눈썹을 까닥이면서 스탠포드 거리로 진입했다.
런던의 중심가는 생존자 들의 수도라서 그런지 사람과 차들로 북적였다.
"스탠. 비록 세상이 이 지경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일자리가 넘쳐난단다. 네가 생각이 있다면 의회 사무관 자리도 알아보마. 넌 컴퓨터를 잘 다루니까 잘 할것 같구나."
비슬리씨가 슬쩍 스탠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스탠은 조용히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생각이 없니?"
"아직은요...."
비슬리씨 차는 런던 아쿠아리움을 지나쳐 웨스트민스턴 다리를 건넜다.
템즈강은 언제나 그랬듯 시커먼 강물이 넘실거렸다.
이제 이 다리만 건너면 웅장한 빅벤과 런던 의사당이 바로 코 앞이다.
"다왔구나."
"예."
비슬리씨와 스탠은 차에서 내려 의사당 광장으로 걸어갔다.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오늘은 꽤 중요한 회의가 있단다. 첫날부터 부담주고 싶지 않지만 아마 너도 고민이 좀 될거야."
"의회에서 무슨 회의를 하나요?"
스탠이 묻자 비슬리씨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핵 문제야."
"그거 걱정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핵을 사용해서는 안되는데...."
비슬리씨와 스탠은 똑같이 한숨을 내쉬며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꼭 호그와트같네.'
스탠은 처음 와본 의사당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고풍적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입구로 통하는 길목에 X-Ray 검문소와 제복을 입은 경비원 들이 서있었다.
"비슬리 의원님 오셨습니까?"
비슬리 의원이 출입증을 내밀자 경비원 중 한명이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내가 예전에 이야기했던 설화 중장님 아들일세."
"아, 그렇군요."
경비원 들이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스탠은 애써 그 눈길을 무시했다.
"그래도 시민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스탠. 시민증 가지고 왔지."
"예."
스탠이 시민증을 건내자 경비원 들이 잠시 검색하더니 다시 돌려줬다.
"올해 투표권을 갖는군요. 축하한다, 스탠."
"감사합니다."
경비원이 시민증을 돌려주자 스탠이 다시 지갑에 넣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으음, 수고하게."
비슬리씨와 스탠은 검문소를 통과하고 의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자아, 여기 앉거라. 오늘은 투표까지 안할듯 싶구나. 일단 어떤 분위기인지만 보거라."
"네."
비슬리씨는 끝 자리에 스탠을 앉히고 하원 의원 들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시민 회의는 하원 의원과 같이 진행하고, 여기서 정해진 안건을 상원 회의에서 원로회가
최종 결정한다.
"프랑크 의장님이 입장하십니다!"
누군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자 모두가 정면을 쳐다보았다.
의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단상에 올라서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단상에 올라선 사람은 그가 낀 무테안경처럼 매우 깐깐해보였다.
"오늘 회의 주제는 아시다시피 핵 사용에 대한 문제입니다."
프랑크 의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쓰윽 둘러보았다.
'뭐야? 원래 분위기가 이런 건가?'
스탠이 의아하게 생각하는건 무리가 아니었다.
하원 의원 들은 물론 회의실에 모인 시민 들도 웅성웅성거렸다.
분명 예전같은 분위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핵 사용은 우리 생존자 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만큼 이번에는 시민 회의없이 상원 의회와 원로회, 그리고 연합군이 특별법을 재정해서 이 안건을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느닷없는 폭탄 발언에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프랑크 의장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조용히 하시오! 지금 그리스 북부지역부터 전선이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나 합니까?!"
프랑크 의장의 고함 소리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의장님?"
비슬리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묻자 의장이 안경을 고쳐썼다.
"말 그대로입니다. 원래 육군 본부는 터키까지 전선을 확장하려고 계획했고 실제로도 4사단 총 1천의 병력을 투입했소. 그러나 4사단은 전선에 투입한지 불과 하루만에 연락이 두절됐고 지금 설화 중장이 이끄는 1사단이 수색대로 편성되었소."
"뭐?"
의장의 입에서 설화 이야기가 나오자 스탠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1사단 역시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더군요. 알바니아와 그리스 국경 지대에서 좀비 들에게 밀리고 밀려 수도 티라나까지 몰린 모양입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퇴각 명령을 내렸소. 또한 USN(United survivor nation : 생존자 연합)과 연합군 측은 원로회의 자문까지 얻어 핵 사용을 모두 허가한 상태입니다."
"그럼 하원과 시민 대표의 의견은 하나도 상관 없다는 소리입니까?!"
비슬리씨가 격분해서 소리치자 프랑크 의장은 콧웃음쳤다.
"아, 그러고 보니까 비슬리 의원께서는 1사단장님과 친분이 있으시지요?"
프랑크 의원이 괜한 친분을 들먹이자 비슬리씨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핵 사용은 하원과 시민대표에서 이미 반대했던 문제 아닙니까?"
"그럼 점점 북상하는 좀비 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소리요?!"
"연합군 공군 폭격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핵무기를 쓸 필요가 있습니까?"
누군가가 조용히 따져 묻자 프랑크 의장이 콧웃음쳤다.
"이스탄불에 있는 감염자 수만 벌써 1천만이요. 이걸 공중폭격으로 몽땅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
말문이 막힌 비슬리씨가 입만 벌린체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프랑크 의장의 말은 결코 억지가 아니었다.
공중폭격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전술이었다.
"이건 선택이 아닌 필수요. 핵이야말로 지금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이오!"
"하지만 핵은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생존자 들까지 방사능에 오염될 수 있어요. 연합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소. 불가하다고... 아무튼 하원과 시민 대표가 이번만큼은 양보해줬으면 하는게 상원 의원 들과 원로회의 생각이오."
"......"
프랑크 의장은 다시 한번 안경을 고쳐쓰고 쓰윽 둘러보았다.
다들 심드렁한 표정 들이었지만 뭐라고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핵 사용 안건이 통과되는대로 다시 알려주겠소."
프랑크 의장은 그 말만 하고 빠른 걸음으로 단상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하원 의원 들과 시민 대표 들은 서로 한숨을 내쉬며 의회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꾸나, 스탠."
"예......"
비슬리씨가 큰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나가자, 스탠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