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6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상원 의원인 제임스는 의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2대 USN 사무총장이었고, 그의 사촌은 현재 연합군 항고모함인 엔터프라이즈호 함대장이었다.
즉,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가 2년후 임기를 모두 채우고나면, 정원이 10명 뿐인 원로회에 입회할 수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제임스 의원이 하원부터 시작해서 원로회까지 정치 생명을 늘려간다면 USN 사무총장보다 더욱 공고한 정치적 입지를 굳힐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정의와 준법 정신이 투철한 비슬리씨와는 당연히 물과 기름의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자네 참 뻔뻔하군.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했으면서 다시 여기에 온 이유가 뭔가?"
제임스 의원이 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거들먹거리자 비슬리씨가 불쾌한 속내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의원님이 임기제를 연임제로 바꿔서 상원까지 하셨으니 저도 그 덕을 볼까 해서요."
"그거 지금 나를 비꼬는 건가?"
제임스 의원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비꼬는 것 같이 들렸습니까? 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요."
"자네 지금 여기 온 이유가 뭔가 빈정이 상해 시비를 걸려고 온 것 같군. 안 그런가?"
제임스의 언성이 점점 높아가자 비슬리씨는 바로 그거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시비 좀 걸려고 왔습니다. 알바니아에 핵폭탄이 떨어져서 1사단이 전멸된 사실은 도무지 참고 넘어갈 수가 없더군요."
비슬리씨의 그 말은 런던 의사당 로비에 모여있던 사람 들을 일순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 들의 시선은 모두 제임스 의원과 비슬리씨에게 쏠려있었다.
아니라다를까 제임스 의원이 시뻘게진 얼굴로 비슬씨에게 바짝 붙어섰다.
"죽으려고 환장했군. 당장 내 사무실로 따라와."
제임스 의원이 휙 지나치자 비슬리씨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따랐다.
하지만 비슬리씨의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뿐, 이렇게 자신이 무모하리만큼 당당했는지 계속 혼란스러웠다.
그 들은 불편한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원 의원 사무실로 향했다.
제임스 의원의 사무실은 3층 복도 맨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네는 여기 서서 그 누구도 이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
"알겠습니다."
제임스의원이 먼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비서에게 신신당부까지 했다.
비슬리씨가 그 모습을 보기에는 결국 알바니아 사건이 사실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쿵!
비슬리씨가 들어가자마자 제임스 의원이 거칠게 문을 걸어 잠궜다.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 행동이 자네 신변에 얼마나 위험한건지 알기나 하나?"
제임스 의원은 쇼파에 거만하게 앉아 시가를 태웠다.
금연자인 비스릴씨는 폐에서 치고 나오는 불쾌한 기침을 억지로 참아내며 맞은편에 앉았다.
"기가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제임스씨."
이제 비슬리씨의 입은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임스 의원의 표정이 또 다시 굳어졌다.
"비꼬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핵폭탄 사용이 강제로 통과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바리아에 핵이 떨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화 중장이 이끄는 1사단 특전사 들이 전멸을 하고 말았죠."
"자네 약 먹었나? 아니면 하원직을 그만두고 망상가가 된건가? 알바니아로 진격한 1사단은 감염자 들에 의해 전멸 당했네. 자기 부하 들을 그런 사지로 내몰고 전선 밖에 있었던 설화 중장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럼 감염자 들이 그만큼 더 강해지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굳이 설화 중장의 탓만 아니죠."
"난 자네가 설화 중장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제임스 의원은 피식거리며 거 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그를 비웃는건 비슬리씨였다.
"저와 설화 중장의 친분이 정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비슬리씨는 냉랭한 표정으로 제임스 의원을 쏘아 보았다.
끌어오르는 분노를 점점 풀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잘 들어. 낙하산. 난 너같이 정치 생명을 더럽게 이어가는 버러지같은 새끼 들을 보면 정말 밟아 죽여버리고 싶어. 내가 왜 하원을 스스로 그만뒀는지 알아? 너 같은 놈이 되고 싶지 않아서야."
"의외로군. 자네 입에서 그런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오다니. 그럼 나도 한마디만 할까?"
제임스 의원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너같이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들이 정의를 입에 담으며 판치는게 오히려 더 역겨운 짓이야. 입으로는 정의를 떠들면서 결국 힘이 약해지면 꼬랑지를 내리고 도망가기 바쁜게 너희 족속 들이지. 알바니아에 핵이 떨어졌다고 그랬나? 맞아. 핵은 떨어졌지. 하지만 네가 그 사실을 떠들어봤자 기껏 하원에 끝난 놈의 말을 누가 믿어줄까?"
"언젠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야."
비슬리씨가 입술을 깨물자 제임스 의원이 비웃었다.
"기껏 하원을 그만둔 놈의 말을 누가 들어줄까? 상원이나 원로회가 하는 말이라면 모를까..... 사람 들은 권력이 강한 사람 들의 말을 더 믿는 편이지."
"......"
비슬리씨는 입술을 꿈틀거렸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 의원 말대로 결국 자신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것이다.
구겨진 비슬리씨 표정이 통쾌했는지 제임스 의원은 쇼파에 편하게 기댔다.
"정치란 말이야. 권력에 의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말이지. 권력이 커질수록 자네같은 개미 들은 짓밟아 버리는건 시간 문제야."
"결국 핵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비슬리씨가 침통한 표정을 짓자 제임스 의원은 구역질나는 미소를 지었다.
"꼭 그렇게 좌절할 필요는 없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말이 있지. 그 자유라는것을 지킬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고. 그래야 나같은 유능한 상원이 원로회도 해 먹고, USN 사무총장도 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위기의 발칸반도에 핵폭탄을 날렸으니 생존자 들이 더 안전하게 사는게 아니겠는가?"
"알바니아의 100여명의 생존자 들과 200명의 1사단 특전사 들의 목숨은 결국 너같은 놈들의 말 한마디에 억울하게 희생된 셈이군. 그렇게 날치기식으로 핵폭탄 사용을 통과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
"생존자 들을 위한 어려운 결정이었네."
"당연히 그러셨겠지. 하지만 그게 과연 생존자 들을 위한 결정이었을까? 연합군 원수는 모든걸 극단적으로 해야지 직성이 풀린다고 들었어. 그런 자를 꼬드겨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는 너의 꼼수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연합군 함대장이 사촌이라고 했으니 더욱 기고만장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의 아버지 에르네스 사무총장께서는 매우 강직한 분이셨어. 만약 살아계셨다면 당신을 매우 부끄러워 하셨을 거야."
비슬리씨는 눈 한번 깜빡안하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쨍그랑!
결국 제임스 의원이 잿덜이를 집어 들어 벽에 던져버렸다.
"당장 내 사무실에서 꺼져! 그리고 다시 한번 의사당에 기웃거린다면 그때는 불법 침입죄로 콩밥을 먹게 해주겠어!"
"그럼 건투를 빌겠네. 당신이 생존자 들을 희생시키면서 욕심을 채워 나가는 동안 나는 진실을 위해 싸울테니까.
"당장 꺼져!"
제임스 의원이 고함을 들으면서 비슬리씨는 사무실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게이트에는 여전히 도일이 험악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비슬리씨는 그의 곁을 지나치려다가 멈춰섰다.
"자네도 권력의 힘을 믿고 있는건가?"
"......"
도일이 눈썹을 치켜뜨자 비슬리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질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다만 눈을 감는 순간, 분명히 후회할거야. 왜냐하면..."
비슬리씨는 도일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테니까."
"....무슨...."
"그럼 수고하게. 난 이제 이곳에 평생 발 붙일 일이 없을테니까."
비슬리씨는 런던 의사당을 벗어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더니 품 속을 뒤져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녹음기였는데, 디스플레이에 빨간색 점과 REC라는 글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 녹음이 정상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휴.... 다행이다. 끝까지 녹음 되었구나."
비슬리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녹음기를 다시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쁜 손놀림으로 기어와 핸들을 조작하여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비슬리씨가 한가지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런던 의사당 3층 창가에 기대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녹음기를 가지고 있었군."
제임스 의원이 비웃었다.
그가 정치 직감이 또 한번 빛을 발휘했다.
"어떻게 할까요?"
검은 양복을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뒤에서 쓰윽 나타나자, 제임스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기는.... 교통사고가 꼭 불시에 일어나라는 법이 있나?"
"알겠습니다."
남자가 나가자 제임스 의원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하하하! 언젠가 진실이 밝혀진다고? 너같이 허술한 인간이 하는 말치고 참으로 거창하군. 으하하하! 내가 여기까지 헛으로 올라온것으로 보였나? 버러지같은 놈 들. 어디 입으로 실컷 정의와 진실을 외쳐보라지. 어차피 내 구둣발로 다 짓겨버릴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