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8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그렇게 해."
어찌된 영문인지 소피아가 순순히 허락하자 설화가 기가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 속을 알 수없는 제멋대로인 아가씨였다.
"그때 당시 내 나이는 15살이었다. 브라운 박사님께 구출되고 나서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던 시기였지. 무척 안정적이고 평온한 생활이었어. 하지만 난 그 속에 갇혀 지내는게 너무 답답해서 박사님 허락을 받고 영국 전역을 홀로 여행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런던 외곽에서 왠 남자 들에게 끌려가는 6살 꼬맹이를 보게 되었어. 처음에는 지나칠려고 했지만 다 큰 어른 들이 6살 꼬맹이를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이 너무 수상해서 그들에게 접근했지. 나는 그때 당시 브라운 박사님이 주신 백신으로 겨우 시크릿-X를 컨트롤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무엘은 그때 당시를 떠올리는게 아직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1.5리터 생수병을 한번에 들이켰다.
"그런데 그 작자 들이 승합차 안에서 꼬맹이에게 차마 몹쓸짓을 하고 있더군. 나는 더 이상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지. 사실 그때 당시 내 두 팔은 3톤을 들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승합차를 한번에 뒤집어 버렸다. 뭐 지금은 10톤도 거뜬히 들 수 있지만.... 아무튼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을 무차별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몇 놈은 뒤지고 몇 놈은 반 병신이 되더라고."
"......"
설화는 자신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억지로 외면했다.
그때 사무엘이 정말 죽일 각오로 덤벼들었다면 자기 자신도 어떻게 됐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난 그들을 죽이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 오히려 쓰레기 들을 청소하는것 같아 기분이 상쾌했지. 때마침 그 주변은 인적이 드문대다가 저수지 같은게 있어서, 그 꼬맹이만 빼고 차와 같이 모두 수장시켜버렸다. 아마 그 저수지가 마르지 않은 이상 절대로 찾지 못할 거야. 아무튼 난 그날로 꼬맹이를 데리고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엄마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사무엘은 슬쩍 소피아의 눈치를 살쳤다.
하지만 소피아는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브라운 박사님은 소피아를 데려온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지. 물론 사람을 죽인것에 대해서는 몇일 동안 꾸지람을 받았었지만.... 난 내 행동에 추호도 후회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결정을 내린 시기였으니까."
"저 역시 그때부터 제 인생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사무엘의 말을 소피아가 맞장구쳤다.
"저는 브라운 박사님께 아무거나 좋으니 제발 감염자 들보다 더 쓰레기같은 인간 들을 없앨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죠. 그런데 박사님은 쉽게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으셨어요."
"왜지?"
"그건 내가 설명할게. 이제 브라운 박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에 대해 나에게 부탁했던 말씀을 들려줄 때가 온것 같아."
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브라운 박사님은 보통 인간 들보다 특수한 능력이 있는 아카데미생 들이 뭔가를 파괴하거나 자신의 힘을 믿고 남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어. 하지만 제멋대로인 너희 들을 컨트롤 하는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지. 그래서 생각해내셨던게 연계(連繫)였어."
"그게 뭐지?"
"연계는 말 그대로 '관계'라는 뜻도 있지만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협동'이라는 단어이기도 한단다."
"젠장. 뭐가 그렇게 어려워?"
사무엘이 머리를 북북 긁으며 인상쓰자 소라가 피식 웃었다.
"돌 대가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뭐? 죽고 싶냐?"
사무엘이 욱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설화가 두 손을 감싸쥐며 관절을 풀었다.
"브라운 박사님이 쓸데없이 힘을 남발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쳇!"
사무엘이 투덜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자 초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는 서로 연계가 되는 관계야. 즉, 사무엘은 소피아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동시에 소라에게 지기 싫어하면서 그와 같이 머리를 쓰려고 하고 있지."
"전혀 아니올시다. 내가 저 비리비리한 놈을 보고 뭘 배운다는 말이에요?"
"아니, 넌 지금 알게 모르게 소라의 장점을 보고 배우려고 하고 있어. 소라에게 지기 싫어하니까 나름대로 주먹보다 말로 싸우고 있잖아."
"......"
사무엘이 언뜻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았다.
소라에게 항상 '주먹만 쓰는 무식한 놈'이라고 무시를 받으니까, 결국 주먹을 쓰지 못하고 어떻게든 말로 이겨 볼려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소라는 소피아를 보고 '섬세함'을 배우는 동시에, 사무엘을 보고 '끌어오르는 열정'을 느끼고 있겠지. 내 말 틀리니?"
"......."
소라 역시 반박할 수 없었다.
겉으로 사무엘을 무시하고 조롱하지만, 속으로는 그의 힘이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언제나 약하다고 놀림을 받고 어렵고 무서운 일이면 도망치기 급급했던 자신이 '사무엘처럼 엄창난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고 고민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소피아는 듬직한 '사무엘'에게 의지하면서, '소라'의 치밀함을 닮고 싶어하지. 소피아는 아무래도 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차라리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상대를 옥죄는 것을 진정한 무기로 생각하고 있어."
"........."
소피아는 눈썹을 한번 꿈틀거렸다.
그녀 역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너희 들은 쉽게 융화가 되질 못했어. 그래서 이렇게 따로 저택을 마련해 너희 들을 묶어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지. 하지만 설화 언니가 너희 들에게 가능성을 본 것 같아."
"난 저 아줌씨 따를 생각 없수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사무엘이 으르렁거리자 소피아가 차갑게 대꾸했다.
소라 역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또한 장군님은 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죠."
"과연 그럴까?"
초가 바로 대답하자 아이 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희는 이승철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이렇게 모두 모이게 되었어. 왜였지?"
"그야...."
소라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닮고 싶어서요. 나나 사무엘이나 소피아나 그와 같이 험난하게 세상을 살아왔지만 결국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소중한 사람 들을 지켜냈잖아요. 저희는 그런 모습을 본받고 싶어요."
"......"
설화와 초는 말없이 아이 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국 이 아이 들이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 너희는 더더욱 나를 따라야겠네."
"난 아줌씨 싫다니까!"
"맞아요!"
"시끄러워! 이것 들아!"
"....."
설화가 소리를 빽 지르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니네가 이승철하고 같이 이야기를 해봤냐? 붙어 다니기를 했냐? 나만큼 이승철을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내가 성격이 개판이기는 해도 나 역시 승철이를 존경했던 사람이니까 너희가 충분히 따를 자격이 돼! 알았어?!"
".....예."
왠지 억지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이 되는 말에 아이 들이 자기도 모르게 수긍을 하고 말았다.
"좋아. 이제 내일부터 너희는 내 부하가 된다. 초 소장! 이의없지?!"
"뭐 바톤은 언니에게 이미 넘어갔으니까......"
"......."
초마저 그렇게 나오자 아이 들은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난 너희 들에게서 '승철'이의 아우라를 느꼈다. 너희는 가능성이 있어!"
"진짜 아줌씨만 믿고 따르면 되는 거요?"
"두 말하면 잔소리다."
"진짜 장군님만 믿고 따르면 저희도 이승철님처럼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래. 그 잘나신 승철님처럼 될 수 있다."
"내가 죽이고 싶은 놈 들을 죽일 수 있어요?"
"그럼. 다 죽여도 상관 없... 엥?"
설화가 깜짝놀라 말을 멈췄다.
"소피아. 아직도 너....."
초가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묻자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빠 엄마를 그렇게 만든 인간들.... 그리고 그와 같은 족속 들......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거에요."
"......"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설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소피아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맹목적인 복수는 언젠가 화를 부르는 법. 하지만 너의 그 마음가짐을 강제로 고치게 하진 않겠다. 대신 네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해보마."
".....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사무엘도 당신을 따르겠다고 한 마당에.... 어쩔수 없죠."
소피아마저 마지못해 대답하자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군 들. 이제부터 나의 명령을 따르도록 한다. 단, 이 꼬라지로는 절대로 큰 일을 해낼 수가 없다."
"우리가 뭐 어때서 그래? 아줌씨!"
사무엘이 발끈했지만 설화는 그의 큰 머리를 손으로 지긋이 눌렀다.
"이렇게 예의없고 제멋대로인 너네 들이 연합군이나 USN을 상대할 수 있을것 같아? 본 교관의 숙달된 시범으로 너희를 엘리트로 만들 거야."
"아니, 그런데 이 아줌씨가!"
결국 설화와 사무엘, 소라, 소피아는 한 팀이 되었지만 왠지 그 들의 미래는 매우 험난해 보였다.
"소장님."
"으헉! 깜짝이야! 너 언제 왔어?"
브리튼이 쓰윽 나타나자 초는 간 떨어질 뻔했다.
그도 그럴것이 뭔가 마무리 될 시점에 느닷없이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리튼은 뭔가 초조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큰 일입니다. 방금 우리 아카데미에서 배출한 육군 장교가 메일을 보내왔는데....."
"그래서?"
브리튼이 잠시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초의 귀에 바짝 대었다.
"육군 블리츠 대장께서 자살 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또 다시 이어지는 브리튼의 말에 경직되고 말았다.
"그리고.... 연합군이 육군을 강제로 흡수시키는 와중에 설화 장군님과 블리츠 대장과 주고 받았던 메일을 보고, 지금 이곳으로 군대를 편성해 급파할 계획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