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3 회: 라스트 데드(The Last Dead) - 시즌3 (ZER-0) -- >
"으아... 아악!!!"
"왜, 왜 그래?"
스탠이 갑자기 악을 지르자 예선이가 화들짝 놀랐다.
둘 다 자고 있다가 난대없이 벌어진 소동이었다.
"헉....헉...."
그런데 스탠의 상태가 심각했다.
얼굴이 새 햐얗게 질린체 뭔가 잔뜩 질린 표정이었다.
"악몽 꿨어?"
"예...."
예선이가 얼굴에 흐른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묻자 스탠이 겨우 대답했다.
"새벽 4시 밖에 되질 않았는데.... 더 자지 그래?"
"아니에요.... 다 깼어요."
"무슨 꿈인데 그래?"
"....."
예선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스탠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나올게요."
"괜찮겠어? 너 무리하지 않아야 해."
"알아요. 하지만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 그래... 그럼 빨리 돌아와."
아직은 서로가 어색할 수 밖에 없는 사이라 예선이도 억지로 붙잡지는 못했다.
스탠은 어두운 복도를 한참 걸어서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암흑에 빠진 뉴욕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차가운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밤 하늘을 끝없이 수놓은 별들이 그런 대도시의 찬란함을 대신했다.
'젠장. 무슨 꿈인지....'
불길한 꿈이었다.
설화가 갑자기 꿈 속에서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뭐라고 말을 하는것 같았는데 스탠을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꿈이라고 해도 너무 생생한 탓에 스탠은 꿈 장면 하나 하나가 모두 마음에 걸렸다.
"몸은 괜찮아요?"
".....!"
스탠이 휙 몸을 돌리자, 휠체어를 탄 다우 회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하긴.... 시크릿-X 바이러스가 몸에 융합되는 과정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거에요. 바이러스에 100% 자아를 빼앗기면 말 그대로 감염자가 되는 거니까요."
"예....."
스탠과 다우 회장은 한참 동안 침묵에 빠지다가, 결국 스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도 잠이 안옵니까?"
"예. 요즘 신경쓰이는 일이 너무 많아서요."
"그러시군요...."
스탠은 대화를 꾸준히 이어가는데 소질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보니 스탠은 형제가 없죠?"
다행히 다우 회장이 그 능력에 있어서는 한 수 위였다.
"예. 저 혼자에요."
"그렇군요.... 저는 형이 있었어요."
"아...."
"참 자상한 형이었어요. 사람 들은 제네럴 컴퍼니를 모두 형이 물려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능력도 뛰어나고 사람 들을 이끄는 리더쉽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탁월했죠."
"......"
참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스탠은 왠지 흥미가 있어서 다우 회장을 응시했다.
"형은 할아버지의 의지를 이어갈 유일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왜...."
스탠의 질문은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다우 회장은 빙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저는 회사 경영은 관심도 없었어요. 어렸을때부터 워낙 마음대로였고, 스무살때는 전 세계를 여행하고 봉사하는게 제 삶의 전부였죠. 뭐... 그것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를 겪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아요. 저는 뜻깊게 살았다고 자부하니까요. 하지만 그 날 이후로 형과 나의 삶은 엇갈리기 시작했죠."
다우 회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제가 아프리카 여행 도중 허리를 다치고 미국으로 급하게 치료를 받았을 때였어요. 제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할아버지 전용 제트기로 저를 존스홉킨스 병원으로 옮긴 탓에 겨우 살 수 있었죠. 그때 형은 제네럴 컴퍼니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병실을 홀로 찾아왔더군요. 그 날 형의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때 당시 형을 안본지 3년이 지났는데, 그 세월 동안 훨씬 야위고 차가워졌더군요. 항상 형을 보면 편하고 웃음이 떠나질 않았는데 그 날만은 달랐어요. 오히려 형이 나를 걱정하면 어쩌나 고민하던 제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죠."
"어째서죠?"
스탠이 바로 묻자 다우 회장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때의 일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 멱살을 다짜고짜 붙잡더니 이를 갈더군요. '너같이 돈걱정 안하는 놈들이 무슨 낯으로 아프리카 난민 지역에 갔느냐.'고요."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스탠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우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저도 그 말과 갑작스러운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형은 그때 완전 딴 사람이 되어 있던거였어요. 제 추측이지만 형은 차기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더러운지 스스로 깨달으면서 사람에 대한 회의를 느낀것 같아요."
"그건 개인차가 아닌가요? 회장님께 그 탓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예. 그게 보통 사람 들의 생각이고, 또 그 생각의 틀 안에서는 절대로 형을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예?"
"형은 변했어요. 그뿐이에요. 세상이 변한게 아니라 형이 변한 거죠. 언제나 모든것에 완벽을 추구하던 형이 세상의 불공평으로 보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진거에요. 이해하겠어요? 본인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멸했다는 뜻이에요."
"......"
다우 회장은 말을 마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스탠은 입만 벌린체 다우 회장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형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 자리에 오래 있다보니까 겨우 깨달아지더라고요. 저는 자유로움 속에서 세상의 불공평을 보았죠. 가난, 기아, 전쟁, 빈부격차. 이 모든걸 두 눈으로 본 저는 그런 사람 들을 늘 안타까워 했었죠. 그래서 봉사를 했구요.... 그런데 형은 저와 달리 책으로 공부하면서 세상의 불공평을 보았어요. 그건 제가 본 것보다 더 심각하고 절망스러웠죠."
"눈으로 본 세상이 더 심각한것 아닌가요?"
"그래요. 사람 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이론으로 배우는 세상의 불공평은 답이 없어요. 차라리 저는 스스로 보고 느끼면서 행동으로 바로 옮길 수라도 있어요. 하지만 형은 세상의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모든게 소용없다고 생각한 케이스에요. 마치 수학 공식처럼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럼 회장님은 이 세상의 불공평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다우 회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세상 자체가 답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애초부터 문제라는것도 존재하지 않았구요. 이 세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거에요. 인류의 90%가 초토화 되었던 바이러스 감염 역시 인류의 역사 중 일부죠."
"그럼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해결하지 않는게 맞는건가요?"
"그건 아니죠. 다만 문제가 발생되면 무작정 답을 찾기 보다 과정을 겪고 모두가 오랜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진통을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애라고 생각해요."
"그럼 그렇게 형을 설득했어요?"
"아뇨. 그때 당시에 설득을 하기에는 제가 너무 늦게 깨달았고, 또 형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나버린 상태였죠. 형은 무리없이 돈을 쓰면서 봉사랍시고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는 동생을 매우 한심스럽게 생각한거에요. 그 자체가 낭비라면서 저를 비난했죠."
"슬픈 일이군요."
스탠이 고개를 젓자 다우 회장이 빙긋 웃었다.
"그 후로 형은 말도 없이 떠나버렸어요. 달랑 편지 하나 남겨놓구요."
"편지에 뭐라고 썼던가요?"
"시간이 지나면 세상이 변할 것이다. 난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게 끝인가요?"
스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다우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