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퀸
1권
prologue
어제, 아니, 어제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얼마나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가. 지금 제 꼴을 본 사람이 한 시간 전의 자신도 봤더라면, 그 둘이 동일 인물인지부터 의심했을 것이 분명했다. 딱 그만큼 지금 그녀의 꼴은 처참했다.
그녀는 제 가문이 쫄딱 망하고 난 후 단 한 번도 살아 있어 행복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삶의 만족도가 낮은 것과 생존본능은 별개인 모양이었다. 에비가일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속으로 자신이 아는, 그러나 믿지도 않았던 세상의 모든 신을 부르며 그 이름들이 닳도록 외쳤다. 제발 살려만 달라고.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거나, 더 바르게 살겠다는 맹세는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나마 그럴 여유가 있었을 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은 고작 저따위가 바르게 살지 않았다고 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에비가일은 정말 제 스스로도 놀랄 만큼 살고 싶었다. 황녀 아래에서 홀로 시중만 어언 석 달. 황녀에게도 무릎은커녕 고개 숙일 일조차 없었던 그녀가, 신분도 불분명한 남자 앞에서 비장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그 엄청난 생존본능의 일례라 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납작 엎드려 없는 잘못을 만들어 내서라도 싹싹 빌고 싶었다. 그러나 에비가일은 불행히도 지금 그에게 고개조차 숙일 수가 없었다.
사람을 찢어 죽일 것만 같던 살벌한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새 그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무심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를 보고 있기보다는 고개가 단순히 제 쪽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눈을 슬쩍 보아하니 그는 아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에비가일은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남자가 이렇듯 안정을 찾은 것은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그녀가 안정을 되찾는 것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비가일은 최대한 얌전히 내리깐 눈으로 남자의 손과, 그 손 안에 잡혀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는 것을 노려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돈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쓸모없이 고급스럽고 살벌한 날붙이였다. 그녀가 평생 자신과 상관없으리라 자신 있게 믿고 분류해 둔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위험해서든, 값어치 때문이든, 여러모로 말이다.
그것을 바로 앞에서 살짝 흔들기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일 텐데, 불행히도 남자의 칼은 허공이 아니라 에비가일의 목 아래를 드나드는 중이었다. 살갗 위로 툭툭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 또다시 닿는 그 일련의 행동이 끝도 없이 막막하게 이어졌다. 남자의 행동은 마치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거나 발을 까딱대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버릇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제가 책상이 아닌 사람이고, 자신을 건드리고 있는 게 손이나, 하다못해 발도 아닌 칼이라는 점에 있었다.
칼. 베면 피가 나고, 썰면 분리되는 칼 말이다.
서늘한 칼날이 약 2초의 간격을 두고 목 아래를 들락날락하며 목을 툭툭 쳐 댔다. 용케도 피부에는 그 싸늘한 감만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지만, 그 선득하니 가벼운 느낌은 오히려 공포감만 고조시켰다. 그녀는 실수로라도 제 목을, 아니, 제 목의 솜털 하나라도 더 갖다 댈까 두려워 목에 힘을 바짝 주었다. 죽는대도 몸과 머리가 사이좋게 두 동강이 나 죽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에비가일은 서글픈 얼굴로 남자의 뒤를 힐끗 보았다. 피로 붉게 얼룩진 침대 위로 이제는 정말로 죽었을 황녀가 보였다.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녀 역시 동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침대 주위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암살자들의 시체가 처참했다. 에비가일은 눈알을 최대한 왼쪽으로 굴려, 제 죽은 주인이라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목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 꼴일지는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살고 싶고, 시체는 더 보기 싫었으니까.
마치 저 혼자 다른 세계에 사는 듯, 이 난장 속에서도 고고히 명상 중이던 남자가 문득 내리깐 눈으로 에비가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다 못해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미친 계집처럼 저를 쳐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목에 힘 빼.”
“…….”
“내 말 무시하나?”
“…….”
“건방진 것, 말을 못 하나?”
“…….”
목울대가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이 빌어먹을 칼 때문에 머리가 몸통에 안녕을 고할 판에, 목에 힘을 빼고 말까지 하라는 건 그녀에게 있어 굉장히 무리한 요구였다. 애초에 이 칼만 아니었어도 남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녀를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바닥에 머리를 찧은 비굴한 신세였다.
“……너.”
에비가일은 저를 노려보는 눈이 점점 더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무서워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려 했으나 입 밖으로는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칼날이 턱 바로 아래에서 멈춰 있는 지금, 목울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의외로 그녀가 계속 대답하지 않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가늘게 뜬 눈으로 한동안 그녀를 가만히 훑어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적갈색이군.”
꿈속에서 만난 황자 전하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가슴이 행복에 겨워 뛰었겠으나,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은 남자가 말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의 생존 본능을 깊이 건드렸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남자를 겨우 바라보았다. 그러는 댁은 머리가 시꺼먼 게 아주 우중충……. 에비가일은 남자가 입을 다시 달싹이자 지레 찔려 속으로나마 빈정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눈동자까지…….”
“…….”
“하, 황제의 색이라.”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황제를 황제라고 달랑 발음하는 것을 에비가일은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잘 교육받은 귀족 여성이자, 더불어 철저히 훈련된 고위 시녀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비가일은 큰 눈으로 소리 없이 남자의 불충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역시 사람이 그냥 죽으란 법은 없어. 그렇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비스듬하게 입매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아, 잘생겼어…….
목숨이 위태로운 주제도 잊고 순간 홀린 듯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보던 에비가일이 다시 남자를 경계하듯 눈을 홉뜨며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미쳤나? 왜 처웃지?
그녀가 못 보던 새 뭘 잘못 주워 먹기라도 한 듯 수상하게 웃던 남자가 돌연 칼을 거두었다. 몇 초 간격으로 제 목숨을 위협하던 날붙이가 사라지자, 에비가일은 일단 본능적으로 안도했다. 불과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수많은 일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조용한 밤,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던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 시끄럽게 열리던 문과 방 안에 들이닥친 암살자들. 에비가일은 손끝이 저릴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그제야 손이 드레스 자락 위에서 덜덜 떨렸다.
에비가일이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짙은 적갈색 머리칼은 공교롭게도 제가 모시던 황녀와 꼭 닮은 것이었다. 살벌한 기세로 방 안에 들어섰던 남자들은 어울리지 않게도 그것에 조금 혼란스러워 했다. 자신들이 받아 둔 초상 정보와 일치하는 여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들은 그 어스름한 불빛 아래에서 눈동자 색마저 비슷했다. 암녹색, 그리고 그보다 색소가 옅은 투명한 녹색.
누가 황녀인지로 시작된 혼란은, 이내 둘 다 바로 죽일지, 혹은 둘 중 누굴 먼저 죽일지에 관한 아주 단순한 고민으로 바뀌었다. 에비가일로서는 자신이 황녀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도의였는데, 실상 그것이 황녀에게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에비가일의 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칼에 찔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꼼짝없이 찔리려던 순간, 거짓말처럼 제 눈앞의 남자가 나타났다. 어떤 후광마저 비추며.
에비가일이 제 눈앞의 남자를 인식했을 즈음, 남자의 기사들은 암살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것은 일종의 구원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남자가 제 목에도 칼을 들이대기 전까지는.
꽤 처절한 시간이었다. 에비가일은 쏟아지는 상념 속에 눈을 조심스레 깜빡였다. 남자는 더 이상 에비가일의 목울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날붙이의 빈자리라도 채우듯 알 수 없는 시선이 퍽 부담스러웠으나, 에비가일은 제 목숨을 위협하던 것이 당장 사라진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평화를 찾았다. 미친 여자처럼 안도의 한숨, 안도의 웃음, 안도의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안일함을 비웃듯, 남자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네가 저 황녀가 돼야겠다.”
그 청천벽력 같은 말을 그녀의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는 여전히 미친 여자처럼 울면서 웃으며 질질 끌려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