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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3장 (11/21)

<2막-3장>

궁내부 제3부서의 서기관 도미니크 블란치는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불안한 얼굴로 커튼을 걷었다.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외곽 골목은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으스스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자신이 탄 마차 소리만이 길게 이어진다. 목 뒤가 스산한 것을 애써 무시하며, 도미니크는 커튼을 닫았다. 이제 곧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도미니크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도미니크의 마차 소리와 반 박자 어긋나는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도미니크가 커튼 끝자락을 세게 부여잡았다. 그 소리는 이윽고 도미니크의 마차와 빠르게 가까워졌다.

“거기 누구요!”

마차 밖에서 마부의 겁에 질린 외침이 들려온다. 올 것이 왔다. 도미니크 블란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내 마차가 멈춰 선다. 끼익, 나무로 된 문의 이음새가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린다.

“도미니크 블란치 경.”

어둠 속에서 남자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미니크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문밖을 응시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에델가르드 공께서 경을 찾으십니다.”

도미니크 블란치는 제 목을 둘러싼 세 개의 칼 속에서 무력하게 걸었다. 수십 년을 살아온 제집의 익숙한 복도임에도, 그 끝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쪽입니다.”

목에 칼을 들이댄 자 치고는 퍽 공손한 투였다. 도미니크는 기사의 말에 눈을 들고 복도의 끝에서 서재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옥문이 자신을 향해 아귀를 벌리고 있는 듯해 소름이 끼쳤다. 제 발로 걸어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도미니크는 고개를 내려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도미니크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 뒤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얼마간 피가 마르는 정적이 흘렀다.

“블란치 경.”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젊은 남자의 음성이 끔찍하게 이어지던 정적을 깨트렸다. 도미니크가 천천히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흰 얼굴이 싸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에델가르드 공작 각하.”

“생각했던 것보다도 안색이 좋으시군요.”

겨우 예를 취한 도미니크가 라키엘의 높낮이 없는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물론, 최근에 좋은 일이 있으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

“늦게나마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서기관 블란치 경.”

“각하…….”

“경은 궁내부의 훌륭한 인재입니다. 이번의 승진은 경의 능력에 합당한 일이니 그리 겸손하실 것 없습니다.”

라키엘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도미니크가 겨우 입을 달싹였다.

“저는 각하께서 어찌, 어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라키엘이 도미니크에게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혔다. 도미니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망하게 말을 이었다.

“이러시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첫째, 경의 승진이 정식 승진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 궁내부의 수장이신 베론 후께서 경의 승진이 발의되고 승인되는 과정에 적극 관여하셨다는 것이며, 그 결과.”

“제게,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경께서 영예로운 서기관 배지badge를 이렇듯 달게 되셨다는 거죠.”

라키엘이 도미니크에게로 손을 뻗자 도미니크의 목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칼들이 도미니크에게서 멀어졌다. 숨통이 트일 새도 없이 이내 라키엘의 서늘한 손끝이 도미니크의 목깃에 달린 서기관 배지를 한 번 쓸었다. 도미니크의 목울대가 바르르 떨렸다.

“꽤 흥미로운 일입니다.”

“…….”

“경은 그로써 공식적으로 베론 후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거기까지는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라키엘이 입매만 매끄럽게 끌어 올려 웃었다. 낮게 깔린 싸늘한 시선이 도미니크의 목울대를 섬뜩하게 훑었다.

“경이 베론 후의 사람이 되는 데 있어, 과연 경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던가……. 하는 것이죠.”

“…….”

“경께서 경의 여덟 살짜리 딸의 손에 독을 쥐여 주는 대가로, 경은 무엇을 약속 받으셨습니까?”

도미니크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떨리는 손이 바닥을 겨우 짚고 몸을 구부정하게 엎드렸다.

“저 역시 오해가, 오해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하, 저는 정말 결백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것은 필시 음모입니다! 음모임이 틀림없습니다!”

“경의 딸은 황녀를 독살하려 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무표정하게 도미니크의 엎드린 등을 내려다보던 라키엘이 발을 들어 도미니크의 어깨를 세게 걷어찼다. 도미니크가 뒤로 나동그라지기 무섭게 라키엘이 곁에 서 있던 루데릭의 허리에서 칼을 뽑아 도미니크의 어깨를 찔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미니크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라키엘이 무심한 눈으로 칼을 쥔 채 몸을 조금 숙여 도미니크와 눈을 마주쳤다. 칼 위로 실리는 라키엘의 무게에 칼날이 약간 비틀리며 피부 속을 깊숙이 헤집었다. 도미니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벌어진 입으로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딸을 살인자로 만들어 그대가 약속받은 부귀영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말해 봐라.”

라키엘은 사람에게 칼을 쑤셔 넣고도 흥분한 기색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동요 없이 평온한 젊은 공작의 얼굴이 외려 소름 끼쳤다. 도미니크의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저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팔이 이대로 잘려야 곧이곧대로 대답하겠군.”

“부디, 부디 이 결백만은 믿어 주십시오. 이벨린은 제 하나뿐인 딸입니다. 어떤 아비가 제 딸에게 살인이나 다름없는 일을 시키겠습니까!”

“인간은 하나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너 역시 그럴 것이고.”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발, 이 결백만은…….”

“황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내게 진상을 말해. 황족관리국이 개입해 개죽음당하기 전에,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

도미니크는 말이 없었다. 라키엘이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만한 눈으로 도미니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 가족의 처분 역시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될 것이다.”

“…….”

“지금이라도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

“……저는 정녕 아는 것이 없어, 대답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도미니크의 말에 라키엘이 말없이 도미니크의 어깨에서 칼을 뽑아냈다. 도미니크가 입술을 세게 깨물며 겨우 신음을 참아냈다. 칼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도미니크의 얼굴 위로 핏방울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 칼은 그대로 도미니크의 허벅지에 박혔다.

도미니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다음은 네 목이다.”

“…….”

“그래도 할 말이 없나?”

바닥에 늘어져 있던 도미니크가 체념한 듯 눈을 힘없이 깜빡였다.

“베론 후의 보복이 지금 네 다리를 쑤신 이 칼보다 두려운가.”

“저를, 그냥 이대로 죽이시고……. 그 혐의를 제게 오롯이 씌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다지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군. 그렇게 처지 파악이 안 되나? 네게 혐의를 씌우는 게 아니라, 표면적으로 혐의가 있는 것이 오로지 너뿐이다. 그러니 네 배후를 정확히 진술하라는 말이다. 내 앞에서, 그리고 황제에게.”

“……저는 함정에 빠진 겁니다. 그뿐입니다…….”

라키엘이 짧게 혀를 찼다.

“기회는 끝났다.”

“…….”

“아비가 할 말이 없다니, 직접 들어야겠군.”

직접이라는 말에 도미니크가 눈을 크게 홉떴다. 허벅지에 칼이 꽂힌 채로 도미니크는 몸을 벌떡 일으켜 라키엘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라키엘이 성가신 듯 다리를 비틀어 그 손을 떨쳐냈으나 도미니크의 손아귀가 라키엘의 다리를 다시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제 딸은, 이벨린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계집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맙소사, 각하, 제 딸, 제 딸만은……!”

라키엘이 고개를 모로 까딱이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가 민첩하게 문가로 움직였다. 서재의 문이 급하게 열리며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아이를 안고 문밖에서 대기하던 기사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가 처참한 꼴이 된 도미니크를 발견하고, 비명처럼 제 아비를 불렀다.

“아빠!”

“이벨린, 쉿, 아빠는 괜찮다.”

도미니크의 달래는 말에도 이벨린이 기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자 기사가 곤란한 눈으로 라키엘을 응시했다. 라키엘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기사가 이벨린을 놓아 주었다. 이벨린이 라키엘에게로 달려들었다.

“나쁜 놈! 악당! 우리 아빠 괴롭히지 마!”

라키엘의 다리를 그 작은 손이 치기도 전에 이벨린은 다시 기사에게 붙잡혔다. 라키엘이 가늘어진 눈으로 이벨린을 내려다보다, 이벨린에게로 걸어가 천천히 몸을 숙이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른의 냉랭한 시선이 바로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자, 이벨린이 겁에 질린 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순진한 모습에 라키엘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살의가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평온해진 얼굴로 라키엘이 건조하게 말했다.

“내가 물으면, 넌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야 한다.”

“각하, 이벨린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부디 저 어린것에게 자비를!”

“네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네 아비는 죽을 것이다.”

“우리 아빠는 죽지 않아요!”

이벨린이 겁에 질린 와중에도 라키엘의 말에 반발했다. 라키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도미니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라키엘의 손이 도미니크의 다리에 박혀 있던 칼을 가볍게 비틀며 뽑아냈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다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짧게 솟구쳤다.

“아빠, 아빠!”

지옥 같은 광경에 이벨린이 공포에 차 울부짖었다. 여자아이의 울음소리에도 라키엘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피를 털어 내듯 칼을 허공에 한 번 긋고는, 도미니크의 곁에 아무렇게나 칼을 던졌다. 고풍스러운 카펫 위로 칼이 소리 없이 떨어지며 주위를 붉게 적셨다.

라키엘이 다시 이벨린에게로 다가갔다. 이벨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이미 그녀의 뒤는 기사에게 막힌 상태였다. 라키엘이 천천히 이벨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맞췄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다음엔 네 아비가 죽을 거야.”

“아, 아…….”

“하지만 네가 아는 대로 모두 말한다면, 네 아비는 살 것이고.”

이벨린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떨리는 아이의 입술이 겨우 소리를 내 애원했다.

“사, 살려 주세요……. 아빠를, 살려 주세요……. 아빠를 죽이지 마세요. 제발…….”

“내게 애원할 필요 없다.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대답하면, 네 아비는 당연히 살 것이다.”

“그럴게요! 그럴게요!”

“황녀 전하와 마주쳤었지.”

“네. 네……. 황녀 전하가 예뻐서, 들고 있던 사탕을, 사탕을 줬어요. 생일, 생일이니까.”

이벨린은 숨 가쁘게 흐느끼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대답했다. 이벨린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제가 비올레타에게 준 사탕이 어떤 사탕이었는지도, 비올레타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도.

라키엘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날 누가 네게 사탕을 줬지.”

“그건, 그건…….”

이벨린이 조금 망설이듯 말을 흐렸다. 라키엘이 무덤덤하게 재차 물었다.

“역시 네 아비인가?”

“아니에요!”

“아는 대로 모두 대답하라고 했다.”

이벨린이 울 듯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빨간 머리 아줌마가, 맛있는 사탕을 줬어요……. 그리고 하나를 더 줬어요. 나중에 황녀 전하에게 가서, 꼭 드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건 너랑 황녀 전하만 몰래 주는 거니까, 우리만의 비밀이라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아줌마에게 사탕을 받았다고 말하면 아줌마한테 사탕을 받지 못한 친구들도 알게 될 거고, 슬퍼서 나한테 화를 낼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너한테만 몰래 준 거니까 들키면 아줌마가 곤란하대요. 그래서, 집에 와서 아빠한테만 얘기했어요.”

라키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미니크가 절망스럽게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이가 두서없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사탕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그러다 로즈랑 숨바꼭질을 했는데, 숨다가 황녀 전하를 만났어요. 뛰어가다 부딪쳐서 혼날 줄 알았는데, 황녀 전하가 내 머리도 빗겨 주고, 잘해 줬어요. 아빠도 찾아준다고 하셨어요. 아줌마가 사탕을 가지고 있었던 게 생각나서, 선물로 줬어요. 그 사탕은 정말로 맛있었거든요. 황녀 전하가 제가 준 사탕을 먹고 있는데, 그러다 갑자기 로즈가 나타나서 잡힐까 봐 도망갔는데…….”

“알겠다.”

이제 됐다는 듯 라키엘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이벨린을 잡고 있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가 이벨린을 안아 올리자 이벨린이 불안한 눈으로 엎드려 있는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네 아비는 죽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이벨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이벨린을 안은 기사가 방에서 나가자, 라키엘이 몸을 돌려 도미니크에게로 다가갔다.

“빨간 머리가 누구지?”

“……이벨린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아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 아이가 말한 것뿐입니다.”

“적어도 너는 그 계집이 누군지 아는 거 같군.”

“저도, 그때는 몰랐던 사실입니다만…….”

도미니크가 제 어깨를 움켜쥐며 나직하게 신음 섞인 한숨을 흘렸다.

“……에누마 엘라시께 맹세컨대, 저 역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이벨린이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제게 말해 주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심상치가 않아, 이벨린의 말을 토대로 그녀가 누구인지 몰래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꼼짝없이 덫에 갇혀 버린 것을 알게 됐지요.”

“그게 누구였나?”

“……엘제어 남작부인이었습니다.”

라키엘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3황비 전하의 시녀입니다.”

라키엘이 기가 막힌 듯 실소했다. 도미니크 블란치는 어린 딸 앞에서 칼부림을 보여 주고도 뻔한 거짓말을 할 자가 아니었다. 문밖에는 아직도 제 딸이 있다. 자신의 목숨에 체념한 지도 오래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불리하기 그지없는 지목을 순순히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3황비의 시녀가, 블란치가의 딸에게 황녀를 독살하도록 교사敎唆했다, 라…….”

“…….”

“결론적으로 3황비 진영에서 완벽하게 계획된 독살이다?”

3황비의 시녀, 베론 휘하의 궁내부 서기관과 그의 딸……. 사실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들어맞는 아귀였다. 도미니크 블란치가 자신과 딸이 이용당하는 줄도 몰랐다는 아주 작은 사실만 제외한다면. 라키엘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도미니크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래서 곧바로 말씀드리지 못했던 겁니다. 어차피 덫에 걸려 죽을 거라면, 차라리 저 혼자 떠안고 죽는 것이 나으니까요. 3황비 전하의 시녀까지 밝혀지면, 저와 제 딸이 몰랐던 것과는 무관하게 정말 완벽하게 계획된 상황으로 보일 겁니다. 3황비 전하나, 베론 후에 의한.”

“무슨 차이건대?”

“적어도 의혹을 받은 상태로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제 가문에 그보다는 나은 결과가 있겠지요. 황족 시해 혐의로도 모자라, 베론 후의 보복까지 가문에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널 이용했을까.”

“모르겠습니다.”

“베론 후가, 너조차 속이고 네 딸을 이용했을까?”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를 어찌 믿나.”

문득 라키엘의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도미니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도, 네 딸도 몰랐다?”

“…….”

“그것 하나만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도미니크 블란치를 믿지 않으면 완벽한 사실관계가 믿는 순간 모조리 뒤엉킨다. 도미니크 블란치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고, 베론 후와 함께 공모했고, 시녀와 함께 따랐다면 이 상황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말이 된다. 그리고 3황비와 베론 후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3황비는 이미 1황자나 전 황태자의 독살을 몇 번이나 사주한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도미니크 블란치는 모른 채로 이용당했다고 주장한다. 3황비의 시녀까지 밝혀지고, 죽기로 결정된 상황에서도, 결과가 달라질 것 하나 없는 그 지극히 사소한 결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의 말이 진실인가?

베론 후, 그치가 아무리 모자라다고 한들, 제가 제 사람이라 공표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이를 고작 그런 식으로 이용할 리가 없다. 그런 식이라면 굳이 도미니크 블란치가 아니어도 되는 것이다. 성년 연회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반드시 도미니크 블란치의 아이를 몰래 이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아예 관련 없는 가문의 아이를 이용해야지. 그 정도 머리도 없을 리가 없다. 스스로 의심받고 싶은 게 아닌 이상 그럴 리가 없다.

명백하게 드러난 배후가 비틀린다. 만약 정말로 도미니크 블란치가 모른 채 이용당했다면, 3황비의 시녀는 진짜 3황비의 시녀가 아니거나, 3황비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 매수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라키엘이 서늘한 눈을 들어 도미니크를 응시했다.

“네 무관함을 믿기 힘들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딸의 결백은 믿겠다.”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었다. 도미니크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내게 얘기한 그대로 진술해라. 3황비의 시녀가 드러나도록.”

“그럴 수는 없습니다.”

“베론 후가 보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막아 줄 수 있다. 설령 네가 그리 모두 껴안고 죽는다고 해도, 네 딸의 안위는 어찌 확신할 것인가? 네가 죽고 블란치가 문을 닫아도 베론 후가 그럴 만한 의리가 있는 사람인가?”

도미니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키엘이 비스듬하게 입매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너도 알겠지. 나는 이제, 그대의 그 사소한 결백을 전제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네 말이 거짓으로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

“…….”

“너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 속에서 죽게 될 거다. 내 손에. 물론 그 최악의 상황에는 저 문밖에 있는 계집이 포함되겠지.”

“…….”

“부디 네가 지금까지, 내게 아무런 거짓이 없었기를 기도해라.”

라키엘의 검은 눈동자가 칼날처럼 차갑고 끈적한 살의로 일렁였다. 도미니크가 꽉 막힌 목구멍으로 뜨거운 숨을 삼켰다. 이내 라키엘이 뒤돌아 나갔다. 라키엘이 만들어 낸 옅은 바람이 도미니크의 상처를 싸늘하게 들쑤셨다. 마치 천장에 목을 매단 것처럼,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도미니크의 목을 조른다. 도미니크는 절망하며 눈을 감았다.

“3황비 전하, 베론 경께서…….”

시녀의 고상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제아무리 가까운 친족이라 해도 용납받기 힘든 무례였으나, 카트린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평온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왔니.”

“고모님.”

이카르트 역시 그렇게 급하게 들어온 것과는 달리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녀들이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이내 하나둘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앉아라.”

문이 닫히자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온기가 사라졌다. 이카르트가 천천히 카트린느의 앞으로 다가왔다. 공손한 태도로 예를 취하려는 것을 카트린느가 건성으로 손을 휘저어 막았다. 이카르트가 인사를 생략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앞에 앉았다.

“네가 웬일로?”

“정말 고모님이십니까?”

“앞뒤 없이 대뜸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5황녀를 음독시킨 배후가, 정말 고모님이시냐고 물었습니다.”

“마치 내게 따지는 것 같구나, 이카르트.”

“따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 당당하실 이유 역시 없고요.”

“그렇다고 한들, 어찌 내게 이리 따지느냐? 그게 무슨 중한 문제라고.”

카트린느가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혀를 쯧 찼다. 이카르트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굳이 그리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 그렇게 해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네게 정신 차리라고 몇 번을 말해야 너는 이 고모 말을 알아듣겠니. 다른 사내에게 이미 일생이 저당 잡힌 계집을 탐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고모님,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건 그것과는 하등 상관없는 얘깁니다.”

“상관없다?”

카트린느가 비꼬듯 되묻고는 픽 웃으며 앞에 놓여 있던 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건성으로 물었다.

“네가 그 계집을 마음에 두지 않았어도, 내게 이리 따지겠느냐?”

가늘게 뜬 눈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세심하게 둘러보던 카트린느가 이내 머리 모양을 몇 번 어루만지고 다시 거울을 놓았다. 이카르트는 그 일련의 모습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트린느가 고개를 들어 이카르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답이 없구나.”

“…….”

“너, 이 고모와는 애초에 상종도 하기 싫어하지 않니. 넌 그 계집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그 계집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피를 토하고 고꾸라져 죽었어도 무심하게 지나갔을 아이다.”

마치 제 속내를 그대로 들킨 기분에 이카르트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럴 리가요.”

“네 성정을 내가 모를까. 정의를 논하는 건 이제 좀 그만두어라. 오라버니가 널 지겨워하는 건 알고 있니? 네가 우리보다 올곧게 태어났다고 해서 베론의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니란다.”

“아버지와 고모님이 그 모양이시라고 해서 베론의 피를 그렇게 더러운 식으로 거들먹거리지 마십시오.”

“네 할아버지가 널 끼고 키우면서 피곤한 것만 가르쳤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이카르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픽 웃으며 본래 화제로 말을 돌렸다.

“엘제어 남작부인이 아침에 소환당했을 텐데요.”

“그래. 갔지.”

카트린느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인 양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카르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잇새로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 제대로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5황녀 독살 계획의 전말을요.”

“글쎄.”

카트린느가 빙글빙글 웃으며 모른 체 물었다.

“어떨 것 같으냐?”

“제발 그렇게―.”

“내가 한 적도 없는 독살 계획의 전말이, 너는 어떨 것 같으냔 말이다.”

“…….”

“내가 아니다.”

“하지만 블란치가의 아이가 지목한 것은, 엘제어 남작부인입니다.”

“엘제어가 감히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짓을 할 년이 못 돼. 엘제어를 지목한 건 그들이 지금처럼 헛소문으로 본질을 호도하기 위함이다. 설령, 말도안 되게도 진짜라고 한들 그게 꼭 내 지시이리란 법이 있느냐? 그 계집이 독을 처먹고 고꾸라진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만, 그게 나한테 기분 좋은 일이라고 해서 꼭 내가 했으리란 법은 없잖니.”

정황이 확실해져 가는 지금 시점에서 듣기엔 해괴한 논리였지만, 카트린느는 퍽 진심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카르트는 여전히 의심을 놓지 못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카트린느를 노려보았다. 카트린느가 실소했다.

“네가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고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만, 사내놈도 아닌 계집을 굳이 죽여 무엇하겠니. 정 죽이려거든 빌키어스 놈부터 죽여야지. 혹시 비올레타 그 계집이 빌키어스 놈과 붙어먹었다면 모를까.”

“…….”

“이건 필시 베티스 그년이 한 짓이다.”

카트린느가 이를 빠득 갈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1황비 전하가 진짜 배후란 말씀이십니까?”

“5황녀야 제 잘난 딸내미를 비참한 꼴로 퇴장하게 만든 원수 같은 계집일 테니, 억하심정 가질 만도 하잖니. 그러는 김에 제가 늘 질투하던 나도 처리하고.”

1황비는 결코 그런 시시한 이유로 이런 사달을 벌일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카트린느의 말은 단순한 억측에 가까웠다. 애초에 카트린느를 질투할 여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카르트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원인은 그리 시시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최소한 들어맞는 것 같았으니까. 애초에 제 고모는 비올레타에게 독을 먹였더라면 자신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을 위인이었다.

이카르트가 먹먹한 한숨을 삼켰다. 벌써 비올레타가 쓰러진 지도 사흘이 지났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카르트를 지그시 바라보던 카트린느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어차피 그 계집은 파사칼리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

“블라디모로. 로드리고……. 파사칼리아가 아니면 황제께서 그 아이를 티끌만큼이라도 신경 쓰실 성싶으냐.”

그렇게 말하는 카트린느의 얼굴이 조금 기묘했다. 파사칼리아를 발음하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질투가 짙게 스며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어도 내가 그 아이를 죽이고 싶을 만큼 거슬릴 때는 파사칼리아부터 죽일 것이니, 파사칼리아가 그리 죽기 전까지는 내가 그 계집 해코지할 걱정 말라는 소리다.”

“……살벌한 소리 하십니다.”

“이제 그만 그 아이에게서 손 떼라. 베론가의 장자가 음악 선생이라니, 말이 되느냐? 어차피 시작부터 폐하께서 억지로 네게 떠맡긴 일이지. 우릴 놀리시려고 말이다.”

“그러나 폐하께서 친히 맡기신 일입니다.”

“이쯤 했으면 성의 표시는 충분했다. 멀쩡하게 달고 있던 사무관 배지까지 떼 놓고, 언제까지 한량처럼 황녀와 피아노나 치러 다니며 얼빠지게 살 셈이야?”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한량이라기엔 나오는 돈이 사무관 시절보다도 더 풍족합니다.”

“이젠 웃기지도 않는구나. 네가 그 푼돈이 없으면 굶어 죽기라도 하느냐?”

카트린느의 신경질적인 음성에도 이카르트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카트린느가 방향을 바꿔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네 아버지가 많이 부족한 사람인 건 너도 잘 알잖니.”

“부디 저더러 그 더러운 뒤치다꺼리를 하라고 하진 마십시오.”

“네 아버지가 널 많이 실망시킨 것 안다. 하지만 이제 너도 조금씩 도와야 할 때다. 킬리안을 봐서라도.”

“고모님.”

“응?”

“4황자는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카르트의 담담한 목소리에 카트린느의 표정이 매섭게 굳었다.

“미하일은 이미 죽고 없고, 이제 빌키어스 하나 더 죽으면 그만이다. 무엇이 두려워 내 황자가 황제가 될 수 없느냐?”

내 황자……. 이카르트는 입안으로 카트린느의 그 말을 씁쓸하게 곱씹었다. 카트린느의 요염한 눈동자에 지독한 소유욕이 떠올랐다. 이카르트는 그녀 때문에라도 킬리안이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더불어 제 아비까지.

“킬리안은 그럴 재목이 못 됩니다.”

“킬리안이 황제가 되면 그 곁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은 나도, 네 아비도 아닌 너다. 베론을 물려받을 네가, 어찌 이렇게 킬리안을 믿어 주지 않아?”

“차라리 킬리안이 안전하게 목숨이나 보전할 방안을 지금부터 찾아주는 게 도리에 맞을 겁니다. 제발 킬리안을 생각하세요.”

“전하!”

이카르트의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던 카트린느가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음성에 입을 다물고 돌아보았다.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진 시녀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소리 내 말했다.

“엘제어 남작부인이, 자백했다 합니다.”

“뭘 자백했다는 거냐?”

“모든 것이, 3황비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이라 자백했다 합니다.”

마르네라 엘제어는 아이에게 독이 든 사탕을 쥐여 주는 순간, 제가 곧 죽게 되리라 직감했다. 남자는 제게 많은 것을 약속했으나, 마르네라 엘제어가 바란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제 조부와 아비가 남긴거액의 채무가 소멸되는 것과, 가족이 저와는 상관없이 살아남을 것. 전자는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고, 후자는 전자를 직접 목격했기에 믿었다. 남자는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었다.

남자는 또한 계획에 어떤 안전한 장치가 있고, 그 덕분에 마르네라 엘제어도 살 수 있을 거라 말했다. 마르네라 엘제어는 그것만은 믿지 않았다.

엘제어 남작부인. 그녀는 열아홉에 황궁에 종신직 시녀로 들어와, 꼬박 열다섯 해를 스무 날도 밖에 나가 보지 못한 채 살았다.

뚝, 뚝…….

천장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제 생이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르네라는 제 서른네 해의 끝에 이젠 지하 감옥에 홀로 앉아 있었다.

마르네라 엘제어는 반나절쯤 없는 결백을 주장하다, 몇 시간 전에는 남자와 약속된 자백을 못 이긴 척 뱉어냈다. 모든 것은 3황비의 지시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수사관들은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 말을 받아 적었다.

정황은 확실하게 만들어졌고, 3황비는 이제 빠져나갈 수 없다. 그 고양이 같은 인상을 떠올리며 마르네라는 창백한 얼굴로 낮게 웃었다. 마르네라는 6년을 함께하면서도 단 한 번도 3황비를 좋아한 적이 없다. 그녀는 항상 교만했고, 탐욕스러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누명을 쓴 것은 조금 유감이었다.

삭막한 어둠이 마르네라의 붉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짙은 암흑 속에 가려 천장도 벽도 보이지 않았다. 방은 제 상상 속에서 크기도, 작기도 했다. 마르네라는 막연한 시야 속에서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 입이 진실을 떠들기 전에.

비올레타의 성년 연회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지난밤에는 3황비의 시녀가 지하 감옥에서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형의 집행을 두려워한 나머지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3황비의 시녀가 죽은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그녀를 지목했던 블란치가의 아이가 죽었다. 아비가 목을 졸라 죽였다. 그리고 궁내부 제3부서 서기관 도미니크 블란치는 죽은 딸의 곁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라키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부녀의 시신이 널브러진 방 안을 바라보았다. 도미니크 블란치는 목에 비스듬히 칼이 박힌 채로 이벨린 블란치의 시신을 향해 엎어져 있었다. 이벨린 블란치의 새하얀 원피스는 제 아비의 피가 튀어 얼룩덜룩했지만, 아비의 손에 죽은 아이의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평온했다. 못내 불편한 표정으로 라키엘의 뒤에서 시신들을 바라보던 카일이 차마 더 보고 있기 힘든 듯 결국 고개를 돌렸다.

라키엘이 뒤돌아 방을 나섰다. 카일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한 뒤, 그 뒤로 따라 붙었다.

“아마도, 자결을―.”

“강요받았겠지.”

“베론 후가 비밀리에 다녀갔답니다.”

“언제.”

“새벽 두 시경에요.”

“멍청한 새끼.”

라키엘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저자 하나 죽는다고 의혹이 같이 죽는 것도 아니고.”

“성미가 급한 건 나이를 먹어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블란치 경이 죽기 전 베론 후가 다녀갔다는 게 수면 위로 떠오르면 그들에게 불리한 정황만 더 완벽해질 텐데요.”

“그것보다 도미니크 블란치가 살아 있는 게 더 곤란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핑계야 대려면 수없이 많고.”

“궁내부의 밀정密偵에 의하면, 엘제어 남작부인이 어제 아침 소환된 것과 동시에 블란치 경이 배신자로 공공연히 간주당했다고 합니다.”

“배신이라.”

베론 후가 무고하다는 전제하에 그들에게 있어 마르네라 엘제어와 도미니크 블란치는 훌륭한 배신자다. 거짓으로 배후가 3황비라 자백한 마르네라엘제어는 3황비를 배신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도미니크 블란치는 완벽한 퍼즐의 한 조각으로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그런 사소한 결백은 베론 후의 눈에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베론 후는 마르네라 엘제어뿐 아니라, 도미니크 블란치부터 믿지 않았다. 그리고 도미니크 블란치 역시, 베론 후를 믿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불신하는 자들이 협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야기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베론 후는 처음부터 도미니크 블란치를 죽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확실한 상황 속에서 도미니크 블란치가 황립 재판소에 앉아 공식적으로 3황비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기 전에, 그저 영원히 그 입을 닫도록.

“정말 오해가 있는 건지, 그저 베론 후가 잡아떼는 건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도미니크 블란치를 자결하게 한 걸로 봐서는 이젠 정말 베론 후라고 봐도……. 각하!”

라키엘은 곁에서 중얼거리는 카일을 뒤로 하고 빠르게 걸었다.

도미니크 블란치가 확실히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은 제 결백과, 자신의 딸을 이용한 것이 3황비의 시녀라는 것뿐이다. 마르네라 엘제어가 3황비가 제 배후라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진술한 상황에서 도미니크 블란치의 그런 진술은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이 3황비라고 못 박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베론 후는 인내심이 없는 자였다. 가장 최악의 상황이라도 기회가 있을 때 배제시켜 두고 싶었을 것이다.

도미니크 블란치가 지금 시점에서 죽는 것은, 도미니크 블란치 본인에게도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도미니크 블란치는 차라리 모든 의혹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을 때 죽기를 원했지만 라키엘 때문에 자신의 최선을 놓쳤다. 라키엘의 뜻대로 결국 이벨린 블란치가 황제의 기사들에게 ‘3황비의 시녀가 자신에게 사탕을 주었다’고 말한 이후로, 그는 아주 조급했으리라.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더 최악의 상황이 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죽어서…….

라키엘은 도미니크 블란치와 그의 딸을 희미하게 떠올렸다. 그리고 제가 도미니크 블란치의 결백을 믿고 있었음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벨린 블란치의 죽음은 안타까웠으나, 라키엘을 믿지 못하는 도미니크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암담한 미래보다 달콤한 것이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잘게 저어 미련을 털어냈다. 이젠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멍청한 짓 덕분에 확신이 생기는군.”

“예?”

라키엘을 겨우 따라잡자마자 뚝 떨어지는 말에 카일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베론 후는 이 독살 시도와 무관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

라키엘은 무성의하게 대꾸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무관하든 말든, 사실 곤란한 지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베론 후의 꼴은 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모른 척 숨어 있을 구렁이들이 괘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라키엘은 빠득 이를 갈며 이제는 쓸모없어진 생각들을 모두 지워 냈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라키엘이 천천히 고개를 젖혀 벽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 위로 지독한 피로가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전부 필요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냥, 네가 눈을 뜨기만 한다면.

나흘, 그동안 파사칼리아는 비올레타의 주치의를 세 번이나 갈아치웠다. 그 결과 비올레타를 살피고 있는 이는 이제 제국인이 아닌 머나먼 에른스트에서 온 의사였다. 동부에서 제법 명망이 높다던 남자는 몸을 사리던 다른 의사들과 달리 비올레타를 보고도 퍽 담담했지만, 파사칼리아는 그를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비올레타를 처음으로 진료했던 수석 황궁의는 사혈瀉血하겠답시고 비올레타의 사지에서 피를 세 통이나 뽑아냈으므로. 그러나 그 지극히 고전적인 방법은 불행하게도 비올레타에게 특별한 효과가 없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 비올레타의 혈색은 음독 당시보다도 더 좋지 못했다.

“……어떤가요, 닥터 헨루더?”

파사칼리아의 어조는 불안했지만 상황 때문인지 몹시 공손했다. 게다가 그란토니아에서는 생소한 ‘닥터’라는 에른스트식 호칭까지 마치 존칭처럼 사용했다. 그러나 황후의 공대에도 평범하게 몸 둘 바 몰라 할 정신도 없는 듯, 닥터 헨루더라 불린 남자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비올레타를 계속 살폈다. 헨루더의 손이 비올레타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이불을 걷어 힘없이 늘어진 팔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푸른빛을 띤 창백한 피부 위로 점점이 피어난 열꽃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련의 행동들이 이어졌다.

이윽고 헨루더가 천천히 비올레타의 머리를 모로 돌려 드러난 목에 손바닥을 덮었다. 미약한 듯하지만 분명 일정한 속도로 느리지 않게 맥박이 뛰고 있었다. 헨루더의 무표정한 얼굴이 불안한 듯, 파사칼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 나흘째예요. 가망이……, 있나요?”

다른 의사들에게도 몇 번이고 물었던 질문인데도 파사칼리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물론 있습니다, 황후 폐하.”

“…….”

“애초에 죽이려고 먹인 독도 아니었던 것 같군요.”

생각지도 못하게 돌아온 명쾌한 대답이다. 파사칼리아가 공용어로 물었던 것이 무색하게 헨루더의 그란토니아어語는 의외로 그럭저럭 유창했다. 그 유창함의 정도가 일국의 황후에게 예를 차린 말투를 쓸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파사칼리아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헨루더의 말에 놀란 파사칼리아가 눈을 크게 홉떴다. 헨루더가 피로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내려 보며 혀를 쯧 찼다.

“사혈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 중독이 되면, 사혈부터 하지 않나요?”

“그것도 이젠 옛날 얘기로 변해 가고 있지요. 하지만 영 틀린 방법은 아닙니다. 처음 황녀 전하를 보셨을 황궁의께서는 분명 중독을 대처하는 방법을 아십니다. 사혈은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분명 효과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건……, 엄밀히 말해 황녀 전하께서는 애초에 음독飮毒하신 적도 없다는 거지요.”

헨루더의 상쾌할 정도로 명료한 말에 파사칼리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헨루더는 파사칼리아의 표정 따윈 아랑곳 않고 곧바로 뒤에 멀찍이 서 있던 조수에게 손짓했다. 헨루더의 조수가 파사칼리아를 곁눈질하며 가방을 들고 머뭇머뭇 다가왔다. 파사칼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분주한 헨루더의 행동을 지켜보다 천천히 되물었다.

“음독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독이 아니라는 겁니다.”

“의사들 모두 칼랑코에 중독이라고 했는데.”

“칼랑코에가 아니라, 피나투라에 중독된 겁니다.”

“……그건 약초 아닌가요?”

피나투라는 보통 어린아이들이 감기에 걸렸을 때 기침을 멎게 하는, 아주 흔한 약초였다. 한마디로 비올레타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것이다. 파사칼리아는 미심쩍은 듯 얼굴을 찡그리며 헨루더가 조수에게 메모를 건네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 잘 아시는군요. 지금 황녀 전하의 증상은 분명 칼랑코에의 음독 증상과 흡사합니다. 보통 칼랑코에는 음독한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음독한 뒤 몇 분 이내 의식을 잃습니다. 그리고 급격한 고열에 시달리다 보통은 여드레를 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장기가 서서히 타들어 가지만, 본인은 의식이 없어 그걸 느끼지조차 못하죠.”

몇 차례나 들어온 그 말이 차마 듣기 끔찍한 듯 파사칼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았다. 헨루더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단순한 증상이고, 고통이 적으면서도 사망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는, 꽤 평온한 독입니다.”

“…….”

“ill humulus no distbulla hox.”헨루더가 고대 제네트어語 한 구절을 짧게 읊조렸다. 파사칼리아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되뇌었다.

“……조용한 죽음이 당신을 포옹하리라?”

“벤트 호루스가 칼랑코에에 붙인 별명 같은 말입니다. 칼랑코에를 음독한 사람들이 평온하게, 천천히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요.”

“조용한 죽음이라니…….”

파사칼리아가 기가 막힌 듯 비올레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황녀 전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요. 조용한 고통이라면 모를까. 궁극적으로 피나투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괴롭힐 순 있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비올레타는 무사한 건가요?”

“피나투라는 평범한 약이지만, 한 줌을 가득 쥐어 끓이는 순간 칼랑코에 꽃잎 한 장과 같아지죠. 그 끝이 죽음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의사들은 피나투라 과용過用의 위험성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의사가 중독 환자가 제 앞에 놓여 있을 때 이를 간과합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칼랑코에의 중독 사례는 너무나 많고,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 없애고 싶어 하지, 사람이 죽지도 않을 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진 않을 테니까요.”

파사칼리아가 힘없이 풀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곁의 의자를 잡고 풀썩 앉았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피나투라는 사람을 죽일 수 있기도 합니다.”

순식간에 뒤바뀐 듯한 말에 파사칼리아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경고했다.

“닥터 헨루더, 그대는 말을 신중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 방금 전의 말은 오해가 있을 수 있겠군요. 피나투라가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피나투라가 칼랑코에로 의사에게 오인 받는 순간, 의사는 자기도 모르게 피나투라에 중독된 환자를 서서히 죽여 가게 됩니다.”

“…….”

“정확히 말해, 피나투라가 아닌 의사가요.”

“세상에.”

“이미 들어 아시겠으나 칼랑코에는 직접적인 해독제가 없습니다. 사혈의 시기와 장기의 재생을 도울 몇 가지 약들이 적절히 섞이면 생을 좀 더 연명하게 해 주죠. 운이 좋아 꽤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뿐입니다. 장기는 이미 제법 손상되었을 테고,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닥터 헨루더, 당신의 말은.”

파사칼리아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침헨루더의 조수가 황궁 약제사와 함께 돌아왔다. 헨루더가 다시 수첩을 꺼내 짧게 메모하고 종이를 찢으며 말했다.

“피나투라 중독은 적절한 영양과 열을 내릴 지극히 기초적인 약 한두 가지면 저절로 낫게 됩니다. 하지만 칼랑코에로 오인한 의사는 우선 사혈을 합니다. 다른 독이라면 피가 한 방울 새어 나오는 순간 피의 점도나 색만 봐도 독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능하지만, 칼랑코에는 불행하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죠. 사혈을 하고, 불필요한 약을 들이붓습니다.”

“…….”

“아무런 차도가 없으면, 치사량을 넘어섰으리란 생각에 또다시 사혈을 합니다. 차도는커녕 상태가 악화되겠죠. 그럼 또다시 사혈을 하게 됩니다.”

“……맙소사. 설마 과다 출혈로 죽게 된다는 건 아니겠죠.”

“불행히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요. 사혈뿐 아니라 불필요한 약들에게도 꽤 큰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겁을 좀 주려고 먹인 것이 결과적으로는 독살이 되기도 하고, 독살을 목표로 애초부터 영리하게 피나투라를 선택하기도 하지요. 좀 특이한 취향이긴 하지만.”

“그럼, 독이 아니었대도……. 애초에 독살하려 했다는 건가요?”

파사칼리아의 물음에 헨루더가 비올레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황녀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고통의 흔적 없이 평온했다.

“어떤 의도로 이런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녀 전하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건 분명합니다.”

“……어째서 단언하나요?”

“사혈을 한 차례 받으시고도 겨우 나흘째에 빈맥頻脈 증상이 사라진 정도라면, 사탕에 든 피나투라가 그리 지나치게 많은 양은 아니었던 거지요. 더불어, 다행히도 황궁의께서도 신중하게 사혈을 하셨던 것 같고요.”

파사칼리아는 헨루더의 모든 말이 혼란스러웠다. 배후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이미 좁혀졌다. 단순히 겁 좀 먹어 보라고 한 짓이라기엔 너무나 요란한 자리였다. 그 철없는 3황비라면 이런 해프닝을 즐기는 것도 이해되겠으나 라키엘이 줄여 온 정답지에 그녀는 없었다. 파사칼리아는 공식적으로 쉽게 풀려 가는 상황보다 라키엘을 믿었다.

베티스, 그 조심스럽고 과감한 여자가 겨우, 이렇게? 파사칼리아는 꺼림칙한 기분에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다가 마침 약을 먹이려는 듯 조심스레 비올레타를 일으키는 헨루더를 저지했다. 벌써 약이 준비된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할게요, 닥터 헨루더.”

“의식 없이 늘어진 몸은 꽤 무겁습니다.”

“괜찮아요.”

파사칼리아의 단호한 대답에 헨루더는 곧바로 만류를 포기하고 조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의 곁에 앉으며 천천히 비올레타의 몸을 일으켜 그녀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파사칼리아의 손이 힘없이 떨어진 비올레타의 팔을 잡았다. 희미하게 피어난 열꽃에, 창백한 팔 위는 온통 분홍빛으로 얼룩덜룩했다. 파사칼리아는 문득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그리고 준비됐다는 듯 무표정하게 얼굴을 갈무리하며 헨루더를 응시했다. 헨루더가 조심스레 비올레타의 입을 벌리고 입안으로 약을 흘러내렸다.

약이 다 들어갔다.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의 턱을 살짝 밀어 그녀의 입을 닫았다. 파사칼리아의 손이 비올레타의 턱에서 떨어지다, 목울대를 감쌌다. 이 희미한 맥박이 지난 나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몸을 숙여 비올레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기도하듯 간절하게 감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헨루더가 조수와 약제사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물러나 거리를 두고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파사칼리아는 그 뒤로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비올레타는 어둠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파사칼리아와 헨루더의 말들을 떠올렸다. 나흘, 칼랑코에, 피나투라……. 독이 아니다. 애초에 음독한 적이 없다. 아마도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다. 아직은, 아무것도.

비올레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작은, 하얀 사탕을 건네던 어린아이의 손이 악귀처럼 진득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 아이는 죽었다. 아마도, 아무것도 몰랐을 그 아이. 그리고 그 아비, 독을 아이에 손에 쥐여 준 3황비의 시녀. 제 목구멍을 넘어간 적도 없는 독은, 벌써 사람을 셋이나 죽였다. 고작 나흘이었다. 고작 나흘이 흐르는 동안…….

뜨거운 숨이 목구멍을 태우듯 고통스럽게 터져 나왔다. 그 아이를 일으켜 주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모른 척했더라면, 아이에게 제 동생을 덧씌우지 않았더라면. 비올레타는 제 부질없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올레타가 힘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눈 위를 덮었다.

마치 불길한 징조처럼 뇌리에 들러붙던 카트린느의 비웃음과, 이카르트의 무표정한 얼굴과, 빌키어스의, 그 한마디. 비올레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빌키어스의 기묘한 눈빛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비올레타는 문득 빌키어스의 어미를 떠올렸다. 차가운 유리처럼 온기 한 점 없던 시선과, 그 차분한 얼굴 아래 미세하게 일렁거리던 살의.

그들이,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구나. 파사칼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들이……. 비올레타는 제 손이 만든 암흑 속에서 눈을 떴다. 직감적으로 어떤 결론에 생각이 닿았다.

‘그들’이 아니었다. 그였다.

“……디아나.”

겨우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메마른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비올레타의 곁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디아나가 나흘 만에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전하?”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제가 어찌할까요.”

방의 주인이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비올레타는 싸늘하게 물었다.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비올레타를 발견한 빌키어스는 잠시 멈춰 섰으나, 이내 놀란 기색 없이 자연스레 비올레타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무사한 것을 보니 기쁘다.”

“…….”

“몸은 이제 좀 괜찮으냐?”

평범한 오라비가 제 누이를 걱정하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비올레타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직도 얼굴이 좋지 않구나. 목소리도 그렇고.”

“선문답에 취미 없습니다.”

“생각했던 반응은 아니구나.”

“뭘 기대하셨기에.”

“다시 보게 된다면, 내 목이라도 조르리라 생각했는데.”

“오라버니.”

비올레타의 무미건조한 음성에 빌키어스의 입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가 모른 척하길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빌키어스의 담담한 대답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저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싫습니다.”

“매정하게도 말하는군.”

“자신을 위한 모친의 계획에 훼방까지 놓으신 데에는, 바라는 바가 있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저를 살리시고, 제 목숨 값을 어찌 재어 두셨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목숨 값이라…….”

빌키어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고민하는 척 턱을 괴었다가, 그래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무사한 것이 내가 무언가를 받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고작 제 알량한 감사라도 받고 싶으셨던 건가요? 제가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 그렇게 넙죽 엎드릴 줄 아셨나요?”

비올레타가 날카롭게 날 선 목소리로 캐물었다. 빌키어스가 피식 웃었다.

“대체 무슨 확신으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비올레타는 차마 인정하기 힘든 듯 이를 악다물었다가, 짧게 내뱉었다.

“당신이, 날 살렸잖아요.”

“비올레타.”

“당신이, 날 살렸어요. 그 알량한 아량으로.”

“비올레타.”

빌키어스가 비올레타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차 비올레타를 불렀다. 비올레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바꿨죠. 당신이.”

“…….”

“당신의 배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걸 알아요. 그리고 고작 피나투라가 조금 든 사탕으로 절 놀려먹는 데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리도 없는 사람들이죠.”

“…….”

“칼랑코에가 든 사탕을, 피나투라가 든 것으로 바꾼 게 당신이죠.”

“그래.”

비올레타의 단정적인 물음에 빌키어스는 퍽 담담하게 인정했다. 비올레타가 실소하며 빈정거렸다.

“모친께선 날 죽이고, 3황비까지 실각시킬 심산이셨을 텐데.”

“그럴법하게도, 꽤 묶기 좋은 조합이거든.”

“절반의 성사라, 모친께서 상심이 퍽 크시겠군요.”

“네가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제 죽음에 의미를 둘 만한 관계는 아닐 텐데요.”

“독살을 막으며 바란 건, 네가 사는 것 하나였다. 그리고 넌 무사하고.”

“…….”

“그걸로 됐어.”

죽은 비올레타를 생각하면 궤변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그녀가 죽을 때 바로 옆에 있었던 자신에겐 더더욱. 그러나 어쩐지 비웃어지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아 눈을 감았다.

머리에 남은 잔열이 가시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목구멍이 콱 틀어 막히는 기분이다. 비올레타는 겨우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빌키어스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고요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말을 골라내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문득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이, 왜 나를 살리고 싶어 해요.”

헤집어 보면 수많은 의미가 있을 말이었다. 비올레타를 보며 늘 미하일을 결부시킨 빌키어스에게는 더더욱 그럴 만한 말이었다. 비올레타는 제가 무심결에 묻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빌키어스는 비올레타의 물음에 잠시간 말없이 침묵했다. 질문이 곤란해서 대답을 미룬다기에는 꽤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이내 제가 그렇게 물은 것을 후회했다.

“두 번.”

“…….”

“두 번이나 실수하긴 싫었으니까.”

빌키어스는 씁쓸하게 뇌까렸다. 어느새 여유가 사라진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지독한 회한이 떠올랐다. 그제야 빌키어스의 흐트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느슨하게 풀린 크라바트와, 끝까지 단정하게 꽉 매운 단추 대신 드러난 목, 그리고 피곤에 젖은 얼굴. 비올레타는 빌키어스의 이면을 본 것이 불안했다. 바라는 거라곤 네가 사는 것뿐이었다는 말도 무거웠다. 미하일의 죽음이 그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게 싫었다.

이 모든 것은 그를 마치 자신과 똑같은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가 제 생각처럼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단단하게 쌓아올린 악의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모두, 제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애꿎게 고생시켜 미안하다.”

“…….”

“이 수밖에는 없었다는 말도 변명이지. 미안하다. 정말로.”

“싫어요.”

비올레타의 말에 빌키어스가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비올레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만은 날 살리려 했다고, 그렇게, 내가 생각하게 되는 게 싫어요.”

비올레타의 목소리에는 짙은 경멸이 스며 있었다. 빌키어스가 피식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난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줄 정도의 인간이 아니니까.”

“그래서.”

“…….”

“이 생각을 없앨 거예요. 당신이 날 살렸으니까, 난 그 대가를 지불해서, 영으로.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상태로.”

“비올레타.”

“칼랑코에든 피나투라든, 난 성년식에서 쓰러졌어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모두 내가 죽을 거라 생각했고요.”

“…….”

“난 블란치가의 아이에게 독이 든 사탕을 쥐여 준 진짜 배후를 알아요.”

비올레타가 차분한 음성으로 하나하나 읊어 가는 것을 빌키어스는 고요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사실을 잊어버릴 거예요.”

“…….”

“황족관리국에서 진상을 읊어 주면, 그저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만 끄덕일 거고. 3황비가 날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경악할 테고, 난 그녀를 증오하게 되겠죠. 당신의 어미가 아니라.”

실상 비올레타가 이제 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 1황비라 주장한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어린 황녀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 3황비가 거꾸러지는 김에, 제 눈에 아니꼬운 1황비까지 같이 모함하고자 한 것으로 치부될 것이 분명했다. 이미 모든 공식적인 정황은 3황비에 명백하게 맞춰 져 있었고, 1황비로 연결될 만한 고리는 시작 전부터 끊겨 있었으므로. 그것을 비올레타가 잠자코 모른 척해 주겠다는 말은 대외적으로는 그다지 대단한 제안이 못되었다. 빌키어스에게 굳이 대가 운운하지 않아도 비올레타 쪽에게는 이미 최선의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비올레타도, 빌키어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빌키어스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3황비가 실각하게 되는 건 나쁘지 않아요. 진짜 배후를 운운해 괜히 확실한 3황비의 정황까지 흐리고 싶지도 않고요.”

잡지도 못할 진짜 배후인 1황비를 잡으려다 3황비까지 놓치느니, 1황비를 그대로 두고 3황비라도 확실히 거꾸러뜨리겠다는 말이었다. 빌키어스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고 대놓고 말해 놓고, 퍽 뻔뻔하게 대가라며 내미는 것을, 빌키어스는 흥미로운 듯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여동생이 아니에요.”

“……확실히, 그런 것 같군.”

빌키어스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완벽하게 짜인 틀처럼 돌아와 있었다. 비올레타가 비뚜름하게 웃고 있던 입매를 싸늘하게 끌어내렸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모습 보여 주지 말아요. 난 3황녀가 아니에요. 날 그렇게 대하지도 말아요.”

“…….”

“난 이제부터 당신 목덜미만 노려볼 거니까.”

비올레타는 디아나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제 앞에서 스르르 열리는 문에 조금 놀랐다가, 문이 열리며 드러난 익숙한 모습에 피식 작게 웃었다. 디아나가 눈치 좋게 그녀의 곁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동안, 비올레타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살판났군.”

라키엘의 손에 문이 닫히기 무섭게, 그의 짤막한 한마디가 제법 냉랭하게 떨어졌다. 언뜻 듣기엔 그저 평소처럼 빈정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으나 비올레타의 상태를 감안한 듯 평소보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상황 덕에 조금 더 날이 서 있는 투였다. 어떻게 들으면 묘하게 안심한 것도 같았다. 비올레타는 라키엘과 고작 몇 초 눈을 마주하는 동안, 그가 지금 자신을 책망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이죽대는 말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 역시.

라키엘을 잠시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별다른 대꾸 없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라키엘을 지나치며 로브의 리본을 풀었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뒤로 다가서며 비올레타가 풀어내리는 로브를 자연스레 받아 들고는 의자에 걸쳐 놓았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라키엘에게로 몸을 돌렸다. 등燈 하나가 내뿜는 어스름한 빛을 오롯이 받아 혈색 없이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라키엘은 그녀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응시하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시선을 조금 들자 눈이 그대로 묶여 버리듯 마주친다. 비올레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라키엘은 그렇게 한참을 더 비올레타의 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국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한 비올레타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이상하지.”

“뭐가 말이에요?”

“그렇게 걷고, 그렇게 웃고, 그렇게 뺀질거리며 말도 하는데. 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

“난 지금, 고작 네가 눈 뜨고 날 보고 있는 게 이렇게 신기할 수가 없어.”

라키엘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잇고는,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의 나흘, 그의 불안, 그의 낭떠러지. 비올레타는 자정이 넘어선 시각에도 마치 자로 잰 듯한 점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차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잠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네가, 눈을 뜨고 날 보는 것이…….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말에 제 기분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은 그가 만든 대체품이었고, 이젠 더 이상의 대체품이 존재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 사실이 남자를 곤란하게 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남자에게 무거운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당연하게도, 그 사실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계절이 지나며 쌓인 유대와는 별개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랬었다.

라키엘이 자신을 보자마자 네가 살아서 앞으로의 모든 일을 계속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해도 비올레타는 기쁘게 끄덕거릴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남았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그 말은, 마치, 그냥 네가 살아서, 마치 그저 네가 살아서 족하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올레타는 제가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리라 어설프고 한심하게 기대할 것이 싫었다.

제 나잇대 평범한 계집애들이 다 그렇듯, 그러나 자신이어선 안 되는 그 모든 것들.

비올레타는 라키엘이 제 쪽으로 뻗어 오는 손에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았다. 잡다하게 이어지던 생각들이 뚝 끊어졌다. 비올레타의 얼굴로 다가오는 듯했던 라키엘의 손이 그전에 멈춰 섰다. 라키엘의 차가운 손끝이 천천히 목울대 옆 맥이 뛰는 곳과 턱의 끝자락에 살짝 닿는다. 가볍게 피부 위에 닿은 손끝 아래로 맥박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엄지손가락이 아랫입술을 살짝 스쳐 내려가 입술 아래를 쓸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 위로 내려앉은 라키엘의 시선이 복잡하게 뒤엉킨다. 라키엘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비올레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겹쳤다 뗐다. 그리고 그대로 멀어지는가 싶더니, 숨이 그대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라키엘은 멈춰 섰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

“…….”

“이 모든 걸, 그들에게 되돌려 주기까지.”

높낮이 없이 차분한 어조에 아이러니하게도 희미한 살의가 스며들었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성마른 시선 위로 오래된 증오가 일렁였다.

“일이 꼬였지만 아예 풀 수 없는 것도 아니야. 그 구렁이의 꼬리만 잡는다면―.”

“라키엘.”

문득 부르는 소리에 라키엘이 말을 멈추고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진짜’는 포기해요.”

“무슨 말이야.”

“라키엘.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최선이 뭔지.”

라키엘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1황비의 꼬리는 영영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비올레타는 제가 빌키어스에게 ‘잊어 주겠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키엘의 말은 조금 이상했다. 확증 하나 없는 상황이다. 결론이 없는 여론이 잠깐이라고 말했던 것은 라키엘이었다. 선대 공작과 미하일의 죽음을 나중에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수’로 남겨 뒀던 것도, 라키엘이었다. 순간의 억울함에 멍청하게 제 살을 깎아 먹을 순 없다고 했다. 비올레타는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 그가 아주 잠시만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선대 공작과 전 황태자가 죽었을 때도, 그에게 분명 이런 순간이 있었을 터였다. 비올레타가 담담하게 말했다.

“……1황비는 그대로 둬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라키엘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네가 쓰러진 나흘이 어땠었는지 알기나 해?”

“라키엘.”

“지금 네 몰골이 어떤지 알기는 해?”

라키엘이 사납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고모님이, 그 나흘을 어떻게 살았는지.”

“…….”

“내가, 어떻게…….”

라키엘이 신경질적으로 제 말을 끊으며 비올레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타가 한숨처럼 말했다.

“최선을 생각해요.”

“네 입에 물렸던 게 칼랑코에였고, 지금쯤 네 내장이 다 타들어 갔다면? 넌 음독한 게 아니라고? 그들은 널 농락한 거야. 고작 피나투라 한 줌으로. 네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처럼.”

“……아니에요.”

“1황자와 다신 그렇게 만나지 마.”

라키엘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비올레타를 보지도 않은 채 그녀의 말을 일갈했다. 비올레타는 제가 진작 추궁당했어야 할 말이 이제야 나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라키엘은 그나마도 비올레타에게 캐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나흘이 어떻게 남자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그를 잡았다.

“내가, 그 블란치가의 아이에게 사탕을 받기 전에 1황자가 해 준 말이 있어요.”

라키엘이 말없이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블란치가의 아이를 조심할 만한, 말을…….”

“그게 널 살리진 않았어.”

“맞아요. 하지만, 진짜로 날 살리려고 한 건 그 사람이에요. ‘그들’이 날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가 날 살리려고 피나투라를 바꿔 넣은 거예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은 날, 죽일 생각이었어요.”

“…….”

“원래 이벨린 블란치의 손에 쥐어져 있던 건, 혹은 쥐여 있기로 한 건 칼랑코에였을 거예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이름을 발음한 비올레타가 침음성을 삼켰다. 라키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침대로 이끌었다.

“앉아.”

침대에 억지로 주저앉듯 앉혀진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천천히 올려 보았다.

“라키엘.”

“쉬는 게 좋겠다. 자고 있는 것 잠깐 보려고 온 거였으니,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되지.”

“라키엘.”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재차 불렀다. 억지로 화를 삼킨 남자의 차분한 얼굴이, 미세한 균열이 일 듯 일그러졌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새끼가 널 살린 거라고? 그 새끼가 널 살려 줬다고? 그러니까 덮어 두자고?”

“그게 아니잖―.”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널 죽이려 한 게 그 외숙과 어미야.”

라키엘이 잇새로 나직하게 씹어뱉듯 말했다.

“그런데 이젠 그 새끼가 널 살렸으니, 고맙다 넙죽 절이라도 하라고?”

“그런 소리가 아닌 걸 알잖아요.”

“내 아버지.”

“…….”

“내 아버지를 죽이고, 미하일을 죽이고, 그 백치 같은 계집, 내 고모의 딸, 그 불쌍한 계집까지.”

“…….”

“그런데 이젠, 그들이, 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가, 살릴 수 있다고.”

라키엘이 날카롭게 실소했다.

“넌 날 어디까지 미치게 만들고 싶은 거야.”

비올레타는 간헐적으로 힘겹게 터져 나오는 날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그리고 잠시간 말을 고르다, 이내 침착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라키엘, 난 살아 있어요.”

“…….”

“우리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어요. 이걸, 기억해요.”

비올레타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잠시 들여다보던 라키엘이 이내 무표정하게 시선을 들었다. 그는 거짓말처럼 작은 틈 하나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완벽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늘 그랬듯이. 비올레타는 덩달아 시선을 조금 더 들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라키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고작 내가 쓰러져서 며칠 앓아누운 걸로 그들을 자극하고, 소득 없는 일을 하는 건, 혹 소득이 있더라도 막연한 시간이 필요한 건……. 당신이 할 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나는 누군가의 의도로 중독 당했지만, 내가 멀쩡하게 깨어난 이상 그 의도나 의도의 출처는 관계없어요. 겨우 그 정도의 일이잖아요. 당신답게 사건을 저울에 올려두고, 뭐가 제일 값이 많이 나갈지를 봐요.”

‘사건.’ 마치 이 나흘간 쓰러져 있었던 게 자신이 아니라는 양 거리감이 느껴지는 투였다. 라키엘은 문득 그것을 느끼고 시선을 다시 내렸다. 파리한 비올레타의 얼굴 위로, 처음 보는 여자 같은 이질감이 씌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온 여자는, 이미 제가 알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 보일 거예요. 아니, 당신은 이미 재어 놨겠죠.”

“……하.”

“잠잠히 입 다물고 3황비가 고꾸라지는 꼴을 보는 게, 내가 죽을 뻔한 일에 가장 비싼 값을 받는 일이란 걸.”

“잘도 네 목숨에 값을 매기는군.”

라키엘이 싸늘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어쩐지 비올레타에게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은 투였다.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제 얼굴에 곧바로 꽂혀 오는 분노에, 비올레타는 말간 눈으로 라키엘을 응시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내 인생에 값을 매긴 건 당신이었어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곧은 말투에는 어떤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탄한 어조가 라키엘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라키엘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억누르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죽을 뻔한 건 너야.”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꽉 다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비올레타’겠죠.”

비올레타는 조금 무심해 보일 정도로 평온하게 말했다.

“난 당신에게 내 인생을 팔면서, 내 죽음도 함께 판 거예요.”

자신이 언제라도 죽을 수 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것은 그리 상쾌한 일이 아니었다. 인생만이 뒤바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제 죽음조차 자신의 몸뚱이 안에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비올레타’인 자신의 죽음을 원한다. 그 지독한 살의殺意 어디에도 진짜 자신을 아는 이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과는 별개로. 정신병자처럼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듯 공포가 엄습하다가도, 제 일이 아닌 것 마냥 현실감 한 줌 없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곤 했다.

그래서 비올레타는 이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로 했다. 진짜가 죽고 비어 버린 황녀의 생生을 채우기 위해, 라키엘은 에비가일 딜로아의 인생을 샀다. 에비가일 딜로아는 그 빈 공간을 채우는 대체품으로 제 인생을 팔았다.

그리고 제 생이 팔린 그 순간, 에비가일 딜로아는 죽은 것이다.

숨, 호흡, 목소리,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팔았다. 그러니 설사 일이 잘못되어 죽었다고 한들 그게 진짜 제 죽음인가? 어차피 자신은 죽은 황녀에게 주어진 여분의 생명에 불과했다. 그 여분의 생명을 이어 가기 위해 자신은 존재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제 죽음을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가 미친 것처럼 느껴져도, 어쩌면 그게 최선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이미, 진짜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하지만 ‘비올레타’는 무사하고.”

“…….”

“고통을 받은 건 진짜가 아녜요.”

라키엘이 꽉 막힌 목구멍 사이로 시린 숨을 들이켰다. 비올레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가짜를 위해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움직일 가치가 있는 건 내가 정말로 당신의 고귀한 사촌일 때나 가능한 일이겠죠.”

라키엘이 기묘하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어 비올레타의 머리칼을 가늘게 그러쥐었다. 부드럽게 적갈색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던 손이, 이내 꽉 쥐어졌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나머지 조금 떨리는 그 손을, 비올레타가 손등 위로 가볍게 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비올레타의 손은 금방이라도 라키엘의 손 위에서 미끄러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난 진짜처럼 고귀한 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발, 괜찮다고 하지 마.”

라키엘은 제 입에서 생전 처음 ‘제발’이란 말이, 겨우 이 순간에 나오는 것을 스스로 비웃을 여유조차 없었다. 속이 시리도록 죄여 왔다. 라키엘은 이미 모든 여유를 잃었다. 여자가 쓰러지던 순간, 그리고,여자가 더 이상 제 생에 어떤 의미도 없다고 말하던 순간.

“알았으니까. 네 말대로 할 테니까.”

“…….”

“네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되도 상관없는 것처럼, 그렇게…….”

라키엘이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한 채로 비어 있던 손을 들어 양 관자놀이를 세게 짚었다. 제 모든 여유가 바닥나고 나서야 라키엘은 제가 저 계집 하나에게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게 싫다 저항할 여력조차 없어 라키엘은 비로소 제 유치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속내를 인정해야 했다. 네가 필요했다. 너도 날 필요로 했으면 좋겠다. 네가 웃었으면 좋겠다. 네가 내게 웃어 줬으면 좋겠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살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 라키엘의 얼굴 위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손 아래로, 일그러진 표정이 어스름하게 드러났다.

네가 갖고 싶다.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날 사랑했으면 좋겠다.

수도 북문 바깥에 위치한 이름 없는 탑은 고위 귀족이나 황족 신분의 죄인들을 격리시키는 감옥이었다. 특별한 이름이 없어 통칭 북의 탑이라 불리는 이곳은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죄인들의 신분을 감안한 듯 제법 깨끗한 시설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감옥에 비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며칠 전까지 황궁에서도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아 있던 황제의 여자에게는 해당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트린느는 신경질적으로 쥐고 있던 잔을 쓰러트렸다. 자신이 벌써 이 방에 갇힌 지도 나흘이다. 그 길다면 제법 긴 시간 동안, 전령 하나 다녀가지 않았다.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덴 북의 탑에서 일주일이면 족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꽤 여유롭게 간수가 가져다주는 와인이나 들이켜며 잠들었던 카트린느는 이제 자신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생각한 것과는 모든 것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카트린느는 단출한 침대 위에 앉아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방 안을 몇 번이고 배회하다, 겨우 손바닥만 한 낡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언제 자신을 다시 부르는 황제의 전령이 올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라도, 이대로 북의 탑에 내버려 둬도 될 만한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카트린느의 떨리는 손이 단단하게 묶인 머리를 정돈하며 쓰다듬었다.

“3황비 전하.”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카트린느가 보석을 몇 개 쥐여 준 간수 중 하나였다. 카트린느가 홱 고개를 돌렸다. 간수가 조급한 듯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혹시, 폐하께서 전령을 보내신 것이냐?”

“폐하께서……!”

간수가 바짝 목이 타는 듯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북문을 통과하고 계십니다!”

“……뭐?”

카트린느는 놀라 되물었다가, 들뜬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비공식적인 행차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재회가 목전目前에 있었다. 카트린느는 문 앞에서 서성이다, 거울을 다시 보고, 다시 문 앞을 서성이길 반복했다. 그러다 제가 죄를 짓고 안달 난 것처럼 보일 것이 두려워, 겨우 침대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그가 들어섰다. 카트린느가 떨리는 시선으로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폐하.”

꿈에서나 그리던 남자였다. 카트린느의 꿈은 열일곱 소녀 적에도, 열아홉이 된 아들을 둔 지금도 오직 그였다. 꼬박 제 인생의 스무 해를 바친 남자였다.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끔찍한 사랑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 함정에 빠진 자신을, 직접 구하러 왔다. 그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뻔히 보이는 이 덫을, 그가 몰라 줄 리 없었다. 카트린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루드비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신 나간 계집 같으니.”

카트린느가 멈칫, 걸음을 멈춰 섰다. 제 귀를 의심하다 카트린느는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들었다.

“그대는 어찌 그리 멍청하고 간악한 짓만 골라하는가.”

“폐하.”

이제는 안심하라 이르며 안아 줄 줄 알았던 황제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트린느는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사랑하던 암녹색 눈동자가 짙은 경멸로 파르라니 빛나고 있는 것을, 단 한 점의 온기조차 없는 것을.

“짐은 이미 네게 기회를 많이 주었다.”

“…….”

“그대가 전 황태자와 1황자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음해를 눈감아 준 것이 누구인가?”

“……폐하십니다.”

“언제까지고 짐이, 주제도 모르는 계집을 눈감아 주리라 생각했나?”

루드비히가 또각또각 걸어왔다. 그 지옥 같은 걸음 소리와 함께 온몸의 맥박 소리가 일제히 커지는 것을 느끼며, 카트린느는 차오르는 눈물을 악으로 삼켰다. 그는 우는 계집을 싫어했다.

“제가 아님을, 아시잖아요.”

“저번에도 그리 말했지.”

“세상 모든 이가 저를 믿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저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제 결백을, 제가, 저는…….”

“황제의 믿음을 쉽게 논하지 말라.”

“분명, 분명 1황비가 제게 앙심을 품은 겁니다.”

“애초에 그럴 만한 상황을 만든 건 그대 아닌가?”

카트린느는 문득 루드비히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반문은, 마치 1황비가 자신에게 덫을 씌웠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카트린느는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꽉 잡아 쥐었다.

“제가 아닙니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제 오라비가 모두 증명할 수…….”

“이번에야말로 그대의 사형을 바라는 자들이 많다.”

서늘하게 떨어진 말에 카트린느는 바닥 위로 고꾸라지듯 털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바닥을 짚은 손이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나머지 덜덜 떨렸다. 루드비히가 몇 걸음 더 걸어왔다. 바닥에 처박힌 시야로 루드비히의 구두가 들어왔다.

“죽이진 않겠다.”

“…….”

“아니, 이곳에 그리 오래 두지도 않을 것이다. 4황자가 죄인의 아들이 되어선 곤란하니, 곧 돌아오게 만들어 주지. 네 아들과 오라비를 봐서.”

“…….”

“모든 것은 그대로일 것이다. 네 고귀한 지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그대로. 그러나 그 말에 전제된 자신은 이미 죄인이었다. 카트린느는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모멸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니 죽은 듯이 살아라.”

“…….”

“그대를 살려 둔 것이, 짐을 후회하게 만들지 않도록. 죽어 마땅할 계집을 살렸으니, 살아도 죽은 듯이 살아라.”

차라리 그 모든 완벽한 정황 때문에 그가 저를 믿지 못했더라면, 루드비히가 정말로 자신이 5황녀 독살 시도의 배후라고 굳게 믿고 있다면, 그래서 제게 죽으라고 한다면, 카트린느는 그것이 차라리 이보다 훨씬 나으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정말 그녀의 죄라 생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너를 구하리라 말하는 것이라면 카트린느는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도 행복하다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알고 있었다. 그 배후가 카트린느가 아닌 것을. 카트린느는 이제 확신했다. 낡디낡은 잿빛의 카펫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카트린느는 눈물을 흘리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저 버려지고 있었다.

“폐하.”

카트린느는 더 이상 제 결백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이 확실한 상황, 그리고 황제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이상, 자신은 이미 죄인이었다. 카트린느가 북의 탑에 갇힌 것은 그녀가 황제의 저울 위에서 진범인 베티스보다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태자가 죽게 둔 것도, 1황자가 수없이 암살 시도에 당하도록 내버려 둔 것도 황제였다. 그는 결코 제 자식들의 목숨을 아끼는 아비가 아니었다. 철저한 대가를 셈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고작 황녀가 죽지도 않은, 해프닝 같은 독살 시도에 황제가 이리 움직이고, 누군가를 몰아가는 것은…….

“제 아들이었어도. 그 독을 먹은 것이 제 아들이었어도…….”

“…….”

“그 누군가를, 이리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바라고 그리 묻나.”

“그 계집아이가!”

단말마처럼 소리친 카트린느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의 표정은 기묘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 계집아이가, 파사칼리아의 딸이기 때문입니까?”

주변의 공기가 살얼음에 금이 가듯 서늘해졌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부정해 주길 바란 말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카트린느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당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여자입니다.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입니다!”

“…….”

“그녀는 당신을 그리 끔찍해 하는데!”

“그 입 닥쳐라.”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루드비히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카트린느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도 그 마음이, 아직도 계십니까.”

“더 이상―.”

“그 계집아이를 보면, 열아홉의 파사칼리아라도 생각나십니까. 그래서―.”

“네 잘난 지위라도 계속 껴안고 살고 싶거든, 더 이상 지껄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네 오라비가 베론에서 너를 위해 갖다 바친 그 모든 것, 그리고 네 아들이 가진 계승권을 위해서라도.”

“…….”

“기억하라. 죽은 듯이 살라.”

파사칼리아의 얼굴이 잔상처럼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얼굴이 카트린느로 하여금 무언가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여름의 97일째 되던 날, 밀니로에서 원군援軍을 요청하는 왕의 사자가 도착했다. 98일째, 추밀원에서는 하루 종일 회의가 열렸다. 열 시간의 회의 끝에 만장일치로 밀니로에 육만 명의 군사를 지원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99일째, 계절이 저물었다.

가을의 1일째,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을의 두 번째 날, 1황자 빌키어스가 육만의 지원군을 이끌고 잉거스트로 출정했다.

Intermezzo_Hamartia

    1)        2)

1)오페라의 막간극. 극과 극 사이 막간.

2) 비극적 결함. 행운의 여신의 총애를 받아 남들보다 뛰어난 비극의 주인공이 지닌 선천적인 결함 또는 단점을 말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그가 고결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결함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하마르티아는 ‘과오’, ‘약점’, ‘비극적 결함’이라고 번역된다.

1

이드리안제帝의 여섯 번째 아들, 9황자 루드비히의 모친 에르가넷은 어리석은 여자였다. 방종했고, 탐욕스러웠으며, 야심만만하여 바라는 바가 있으면 무슨 짓이고 했으나, 결국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여자였다. 에르가넷은 제 아들을 위해, 혹은 황제의 어미가 되기 위해 황태자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사경을 헤매다 열흘 만에 깨어났고, 그녀는 처참한 꼴로 발각되었다.

루드비히는 제 어미의 목이 떨어지던 그 최후의 순간을 기억했다. 고작 아홉 살이었던 루드비히는 형과 함께 황명에 따라 제 어미가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목도했다. 아버지 이드리안제는 에르가넷의 목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어린 루드비히가 그 참혹한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머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봐라. 평생 황위에 손끝조차 닿을 리 없는, 네 허울뿐인 고귀한 신분을 망각하면 어찌 되는지를.’

루드비히는 그렇게 열 살도 되기 전에 제 분수를 알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것.

그의 어미는 죄인으로 죽었고, 황제의 아들이면서 죄인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에르가넷이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 한 것은 형 카스트로였지만, 외조부 브나리오 백에 의해 카스트로가 망명하듯 잉거스트로 떠난 후로 어미가 저지른 죄의 모든 대가는 루드비히를 따라다녔다. 열두 살의 루드비히는 그렇게 제 사방을 둘러싼 멸시와 모욕 속에 지켜 줄 이 하나 없이 홀로 남았다.

열두 살의 황자가 뺨을 맞아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숙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었고,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된 다음에는 네발로도 길 수 있었다. 죄인의 아들, 가장 끝의 황자. 본디 희미했던 계승권마저 박탈당하다시피 한 아홉 번째 황자는 지독한 그늘 속에서 자라났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의 이면처럼,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그리고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살아남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깊어지는 수렁 같은 곳이었다.

반면 그와는 마치 극명한 명암明暗처럼 이드리안제가 친히 성웅聖雄 건국제 카드리어의 이름을 내려 준,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카드리어가 있었다. 이드리안제의 장자인 황태자 카드리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런 루드비히의 가장 반대편에 있기로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빛을 그러모아 만든 사람처럼, 항상 제일 고귀하고 빛나는 곳에 존재했다. 같은 아비 아래 태어났어도 루드비히는 고개를 들고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만큼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그리고 그녀는, 그 카드리어가 가지지 못한 단 하나였다.

파사칼리아 드 에델가르드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피곤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올해로 열여덟, 성년을 이제 고작 한 달 앞둔 에델가르드공녀는 본래 어쩌다 졸린 기운에 작게 하품 한 번만 해도 호사가들의 입에 수십 번을 오르내리는 여자였다. 선황이 가장 아끼던 황녀와 재상 에델가르드 공의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뿐인 딸이라는 최고의 신분에, 모친을 그대로 닮아 우아한 귀티가 흐르는 미모는 늘 세간의 이목을 저절로 자석처럼 끌어들였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시선들이어야 할 텐데, 파사칼리아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편안하게 굽어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오늘의 시선들은 평소와는 궤를 좀 달리하는 것이었다. 파사칼리아는 문득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들고, 어느새 제 앞에 불쑥 다가온 남자를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 이 남자 때문에.

파사칼리아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 멈춰 선 반듯한 인상의 남자가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었다. 파사칼리아가 가볍게 무릎을 까딱 굽혔다 펴며 예를 취했다.

“파사.”

“부디 파사칼리아라고 부르세요, 황태자 전하.”

카드리어는 파사칼리아의 딱딱한 말을 무시한 채 파사칼리아의 손을 잡아 다정하게 이끌었다. 파사칼리아는 주위의 눈을 의식한 듯 떨쳐내지 못하고 마지못해 그의 에스코트를 따랐다.

“늦게 와서 미안해, 파사.”

“저는 전하를 기다린 적이 없답니다. 그러니 제게 사과하시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그대 혼자 덩그러니 두기 싫었거든.”

정해진 적도 없었던 일방적인 동행의 사과에 파사칼리아가 기가 찬 나머지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늘도 그대가 제일 아름답네. 탄일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귓가에서 울리는 낮고 나른한 억양에 파사칼리아는 흠칫 몸을 떨며 카드리어에게서 몸을 조금 떨어트렸다. 일견 순진한 소녀처럼 보일 법한 회피라, 카드리어는 오히려 그것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단정하고 반듯한 이목구비와는 달리 이제 갓 스물셋이 된 황태자는 이렇게 웃을 때면 조금 퇴폐적인 느낌이 났다. 파사칼리아는 그 번듯함 아래 감춰진 이런 위험한 느낌이 싫었다.

“누님이 질투하시겠는데. 탄일이라 어마마마를 졸라 브란젤 왕실에서 드레스까지 공수해 왔는데 말이야.”

“1황녀 전하는 오늘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그렇게 말해도, 그대도 알잖아. 그대가 제일 예쁜걸.”

카드리어가 파사칼리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담백하게 떨어졌다. 파사칼리아는 제가 밀어낼 틈도 없었던 그 짧은 기습에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카드리어가 씩 웃었다.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어. 내가 그대 성년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거 알지.”

“제 성년은 황태자 전하와 전혀 상관없으니, 제발 기다리지 말아요.”

“어서 청혼하고, 데려오고 싶어 죽겠어.”

“누구 맘대로요. 아버지조차 설득 못 했으면서.”

파사칼리아가 무심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파사칼리아의 시선이 제게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카드리어의 얼굴 위로 짙은 독점욕이 드러났다. 그는 잠시 파사칼리아의 반쯤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다 지금의 제 표정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델가르드 공이 그대라면 끔찍한 거 알잖아. 그 괴팍한 양반이 딸 일이라면 절절매니. 그래도 걱정 마. 이제 곧이니까.”

“설령 아버지가 곧이라도 저는 아니에요. 몇 번이나…….”

“그래. 몇 번이나 거절당했지.”

“그러니까―.”

“그리고 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고.”

“더 이상 곤란하게 마세요. 제가 아니라도, 전하께 어울리는 좋은 여자는 많아요.”

“내가 원하는 여자는 그대뿐이야.”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대답에 파사칼리아는 얕게 한숨을 내뱉었다. 베티스 드 카디링거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본디 카드리어의 약혼녀로 내정되어 있었던 베티스다. 아직 성년도 맞지 않은 주제에 게르테뉴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카드리어를 꿰차다시피 한 파사칼리아가 아니꼽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파사칼리아의 본의와는 전혀상관없는 형세였지만.

“그리고 온 그란토니아를 통틀어 황후가 될 만한 여자도 그대뿐이지.”

황후라는 단어만 들어도 신물이 울컥 올라오는데 제가 그럴 만한 여자라고 당연한 듯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파사칼리아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드리어가 픽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실컷 거절해. 몇 번이고 다시 청혼할 거니까.”

“실컷 청혼하세요. 몇 번이고 다시 거절할 테니까.”

파사칼리아의 퉁명한 대꾸에 카드리어가 이번에는 좀 더 크게 웃었다. 그러나 파사칼리아는 고개를 돌리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거절이란 말은 청혼을 받지 않은 지금에야 쉽지만, 성년이 되고 정식으로 황실의 청혼을 받으면 파사칼리아는 카드리어를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황족, 그것도 적통 황자의 청혼이다. 파사칼리아와 에델가르드는 애초에 그것을 거절할 자격이 없었다. 물론 물밑으로야 황태자에게 대놓고 싫다고 거절할 그녀의 아비고, 오라비인 황제에게 별의별 핑계도 다 댈 수 있는 게 그녀의 어미였지만, 재상과 황녀도 황위를 물려받을 조카가 제 딸을 달라고 하는 것을 끝까지 막을 수는 없다. 에델가르드 공작 부처夫妻 역시 파사칼리아가 황궁이 아닌 곳에서 안온한 인생을 보내길 원했지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제 제 앞에는 고작 한 달이 남아 있었다. 파사칼리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파사칼리아?”

“아…….”

파사칼리아가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카드리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응?”

“저 사람은 누구예요?”

카드리어가 파사칼리아의 시선을 따라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카드리어의 가늘어진 눈매가 파사칼리아가 지목한 대상을 흘깃 훑었다.

“아……. 저것?”

무미건조한 음성이 마치 전혀 가치 없는 것을 읊어내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 아들이야.”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기묘한 대답이었다. 파사칼리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남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샹들리에의 빛이 문득 남자의 눈가를 스쳐 파사칼리아는 그의 눈이 짙은 녹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못 박힌 것처럼 순간 시선이 단단히 얽혔다. 카드리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피식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에르가넷 드 브나리오의 둘째 아들이지.”

에르가넷 드 브나리오.

황태자를 독살하려 했다가, 참수당한 네 번째 황비.

파사칼리아는 조금 놀라 눈을 깜빡이며,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는 제 어미가 죽은 뒤로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황자였다. 연회 분위기에 무관심했던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그 남자의 주변으로 조금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남자가 처음으로 연회에 등장한 것이리라. 남자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동물원의 원숭이 취급이나 당하고 있는 것을 견뎌 내고 있었다.

“이름은…… 뭐였더라.”

“…….”

“하긴, 네가 평생 알 필요가 없는 놈이지.”

카드리어의 나른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악의도, 비웃음도,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은 담백한 목소리였다.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카드리어가 저 남자를, 저 불행한 처지의 황자를 비웃었다면, 파사칼리아는 자신이 저 남자에게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루드비히…….

불현듯 어릴 적 들었던 이름을 떠올린 파사칼리아가 입안으로 남자의 이름을 발음했다.

남자는 파사칼리아의 눈에 그렇게 들어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남자에게 잔혹했던 상황 속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폐하의 명이셨습니다.”

“연회의 주인은 나지.”

황제의 의사조차 상관없다는 듯 콘스탄체가 거만하게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견 주위를 스치는 이들에게는 다정하게 들릴 법한 목소리였으나, 그 위로 넘실대는 악의를, 그 말이 축객령이나 다름없음을 모를 루드비히가 아니었다. 카드리어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내 같듯, 콘스탄체는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만 같은 여자였다. 올해로 스물여섯이 된 1황녀 콘스탄체는 황제가 아끼는 장녀였고, 황후가 낳은 하나뿐인 딸이었으며, 황태자의 유일한 동복 누이였다.

열아홉의 루드비히는 해가 지날수록 콘스탄체의 악의를 기묘하게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이해했다. 제 동생을 죽이려 했던, 그리고 정말로 죽을 지경으로 몰고 갔던 계집의 아들이다. 카드리어가 루드비히의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데 반해 콘스탄체는 루드비히가 아무리 숨죽은 듯 살아도 그의 존재를 끄집어내 늘 경계하고, 미워했다. 정작 에르가넷에 의해 죽을 뻔했던 당사자 카드리어는 루드비히를 단 한 번도 괴롭힌 적 없었지만, 루드비히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황태자보다 콘스탄체가 늘 더 쉬웠다.

미움이 더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 어미에게조차 제대로 사랑받은 기억이 얼마 없는 루드비히는 애초에 그 반대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루드비히가 잠자코 고개를 공손하게 숙였다. 그마저도 못마땅한 듯 제 이복동생을 바라보는 콘스탄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짓밟고 무릎 꿇려도 비굴한 모양새가 되지 않는 것에는 그녀도 이젠 진력이 난 상태였다. 다이크 백의 후계자와 몇 년 전 결혼한 콘스탄체는 머지않아 추밀원의 일원인 명문 다이크 백의 안주인이 될 여자였다. 유치하게 배다른 동생의 자존심을 짓밟을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고, 스스로가 그것을 잘 아는 만큼 루드비히를 가혹하게 괴롭히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황자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황자들의 폭력에 순종하던 어린 루드비히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그대로 장성한 지금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콘스탄체는 루드비히가 정상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에는 늘 저 얌전한 아홉 번째 황자가 언젠가 돌변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다른 황자들이 루드비히를 괴롭힌 것이 단순하고 잔인한 놀이였다면, 콘스탄체의 미움은 본능적인 경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정이 많은 모후母后는 에르가넷이 그렇게 죽자, 루드비히는커녕 에르가넷이 카드리어를 죽여서라도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카스트로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카스트로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그의 망명을 돕기까지 했다. 더불어 카드리어는 부황이 닦아 놓은 공고한 제 계승권 덕분인지, 배다른 형제들의 존재에 관해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들이 가진 그 부차적인 계승권에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서라도 콘스탄체는 루드비히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어린 황자는, 멍청한 형과는 달리 제 숨소리를 철저하게 죽일 줄 알았다. 그게 정상인가? 제 어미가 죽고, 제 형이 외국으로 숨고, 너무나 아껴 늘 끼고 다녔던 어린 여동생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러나 그는 마치 제 인생이 그리 망가질 줄 알았다는 듯, 제게 닥쳐오는 모든 불행에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로 순종했다. 평생을 위풍당당하게 살아온 콘스탄체는 살아도 죽은 듯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지금도 제 앞에서,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열아홉의 황자가.

콘스탄체가 냉랭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 고개만 숙이면 무어가 달라지니?”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아뢸 수 있을 만큼의,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

콘스탄체가 기가 막힌 듯 짧게 코웃음 쳤다. 서서히 이쪽으로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다. 콘스탄체는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하필 제 탄일에 9황자가 처음으로 연회에 등장하게 된 것이 못내 언짢다. 그것이 부황父皇의 뜻이었대도. 그러나 황제가 명한 대로 그저 따르고 있는 루드비히에게 축객령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콘스탄체는 축객령 대신 말없이 쌀쌀맞게 뒤돌아 제 시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콘스탄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제 얼굴 위로 가득 꽂힌 시선들을 마주했다. 몇 개는 루드비히의 눈길에 멈칫하며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은 마치 박람회에서 신기한 동물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루드비히의 얼굴 위를 그대로 떠돌았다. 결코 황자를 본다고 말할 법한 시선은 아니었으나, 루드비히는 담담하게 그 시선들을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도 황제가 저를 짓누르는 수많은 것들 중 겨우 하나일 뿐이다. 사실 루드비히에게 가혹한 것은 저를 미워하는 이복누이도, 발로 자신을 걷어차는 이복형제들도 아니었다.

오로지 제 아비, 단 하나였다. 루드비히가 아무리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며 존재를 지워도 황제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굴었다. 짓밟으면 그대로 밟혔고, 넘어뜨리면 그대로 넘어지는데도, 죽일 듯 결코 죽이지 않는 손이 제 목을 조르려 쫓아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더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을 견뎠다. 제가 당해온 어떤 것도 제 어미의 목이 눈앞에서 바닥을 구르던 장면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꼴을 보고도 살아남고 싶었던 자신이 겨우 발에 채이고 무릎을 꿇고 개처럼 네 발로 걷는다고 해서 죽을 마음이 들리는 없었다.

그래서 루드비히는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늘상 겪어 온 것을 마주하듯.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일각一刻이 마치 몇 시간처럼 기이하게 늘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든 루드비히는 항상 어떤 것도 눈여겨보지 않고, 어떤 것도 귀담아듣지 않아야 했다. 무의미한 시야로 화려한 의복들이 잔상처럼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고상한 대화 소리가 아무렇게나 한데 섞여 잡음처럼 귓가를 울린다.

그러다 문득 그 혼잡한 시야 속에서 루드비히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잡아챘다. 흑단처럼 고아한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한쪽 어깨 위로 길게 늘어트린 여자였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여자의 옆모습에 루드비히의 시선이 경직된 채 멈추었다. 루드비히는 제 시선이 이토록 명확하게 멈춘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그것을 깨닫고도,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내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윽고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루드비히는 숨을 멈췄다. 여자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이다 루드비히와 마주쳤다. 그것은 찰나였다. 여자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몇 번 그 눈을 깜빡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꽉 막힌 목구멍 사이로 멈춰 있던 숨이 얕게 터지듯 허탈하게 새어 나왔다. 루드비히는 제가 드디어 미쳤나 싶어 입안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때.

마치 거짓말처럼 여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루드비히는 그때 처음으로 시간이 그렇게 멈출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혹은, 어떤 여자가 제 시간을 그렇게 멈출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이 잠시 멈췄었다고 깨달음과 동시에 루드비히는 믿기지 않게도 제가 전혀 몰랐던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여자의 곁에, 누가 서 있는지를.

루드비히는 그 여자의 곁에 서서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카드리어의 눈을 마주한 순간, 여자를 제 시야에서 지웠다. 그때 그는 여자가 누구인지조차 몰랐지만 카드리어의 평온한 시선에 언뜻 스치는 독점욕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분명 황태자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루드비히가 여자를 바라보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제 눈에 잠시라도 담아선 안 될 여자였다.

그래서 지웠다. 시야에서, 머릿속에서.

지웠노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도,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흐릿하게 제 뇌리에 달라붙는 여자의 형상形狀이 당혹스러웠다. 어깨 위로 우아하게 늘어트린 흑단 같은 머릿결, 바다에 밤이 내려앉은 듯 어둡게 빛나던 남색의 공단 드레스,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제 눈을 들여다보던 그 시선.

그 눈과 마주했을 때, 루드비히는 흡사 처음으로 사람의 눈과 마주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마치, 누군가 처음으로 제 눈을 들여다본것 같았다. 경멸도, 무시도, 악의도, 미움 한 터럭도 없이 그저 맑게 빛나고 있던 여자의 눈. 그러나 여자의 곁에 있는 카드리어가 보이자, 아무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던 귓가로 깨끗한 몇 마디가 스며들었다. 잡음처럼 온갖 목소리가 혼잡하게 뒤섞인 가운데, 명료한 몇 가지 단어가 들려왔다. 에델가르드 공과 헬레니아 황녀의 딸이, 황태자의 청혼, 성년, 황태자비…….

그리고 파사칼리아 드 에델가르드.

카드리어의 황후가 될 여자.

루드비히는 귓가로 스며든 그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되뇌었다. 이토록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제 방안에서 덩그러니 혼자 누워서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이름이란 게 우스웠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눈꺼풀 위를 덮었다.

머리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루드비히는 누가 제 인생을 망가뜨리든, 혹은 제 인생이 어떻게 망가져 가든 적어도 자신의 머릿속에서만큼은 제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기대하지 않고, 포기하고, 단념하고, 수용하고, 그리하여 제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항상 그게 맞았고, 제가 살아남기에 옳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게 맞는 것이다. 손에 닿을 리가 없는 여자를 감히 바라보는 건 주제넘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 분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루드비히는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그녀의 곁에는 카드리어가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생각나고, 지워도 다시 떠오르는 건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루드비히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카드리어의 곁에서 완벽했다. 세상의 빛을 모두 그러모아 만든 것 같은 남자와, 그 곁에서 가장 빛날 여자.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루드비히는, 그 빛이 얼마나 눈부신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 빛의 조각 하나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도.

미친 사람처럼 온갖 난잡한 단상斷想이 두서없이 떠오르고, 이내 오래된 생각들과 엉킨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그러나 그 길게 늘어진 실타래의 끝에서 루드비히는 제 생애 처음으로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알량하고 유치한 마음에는 어떤 그럴듯한 이유도 붙일 수 없었다. 루드비히는 그렇게 처음으로, 제 이성과 정답이 정해져 있는 일을 배반했다.

루드비히는 그 여자가 갖고 싶었다. 제가 그녀를 바라서는 안 될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참수당한 죄인의 아들, 좌천된 브나리오 백의 비참한 외손……. 대외적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꼴사나운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열아홉이 된 황자는 어린 계집들이 보기에 제법 근사한 청년이었다. 부황父皇 이드리안을 닮은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준수한 용모,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단련된 체격은 콧대 높은 수도의 대귀족 영애들마저도 한 번쯤 눈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준수한 외모에 묘하게 드리운 그늘은 이젠 세간에 제법 유명해진 황자의 불행한 성장 배경과 절묘하게 맞물려 왠지 모를 모성애까지 자극했다. 황자의 일평생을 좌우하게 된 그 불행한 과거가 계집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으게 된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여기까지 쉴 틈 없이 읊어낸 줄리에티가 파사칼리아에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미쳤지?”

제가 몰랐던 남자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을 때만 해도 마냥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파사칼리아는, 줄리에티의 물음에 대답 대신 얕게 한숨을 뱉었다. 줄리에티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고작 삼십 일 뒤 있을 네 성년식이 되면, 황태자가 온 제국이 떠들썩하게 청혼할 거야. 그런데 9황자? 지금 제정신이야?”

“제정신이 아닐 건 뭐야.”

“9황자한테 몸 한번 던져 보고 싶어 하는 계집들이랑 네가 같아?”

“줄리에, 넌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아니, 차라리 그 계집들처럼 결혼 전에 9황자랑 한 번 뒹굴어보고 싶은 거면 내가 기꺼이 도와. 그래, 뭐, 먹음직스럽긴 하잖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닌 게 문제야!”

줄리에티가 답답한 듯 결국 짜증스레 소리쳤다.

“다른 계집들은 그저 한 번 같이 뒹굴어나 보고 싶어 하는 남자를 제국에서 제일 귀한 계집애가 진지하게 눈독 들이고 있는 게 말이 돼? 9황자? 차기 황제를 죽일 뻔했던 여자가 남긴 아들이야. 황제 폐하께서 강제로 혼사를 진행시키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나서서 제 딸을 주지 않을 남자라고. 하물며 에델가르드 공의 직계, 파사칼리아 드 에델가르드. 요즘 네 이름에 드 에델가르드가 들어 있다는 생각은 하고 살아? 멀쩡하던 애가 대체 왜…….”

“줄리에, 말했잖아. 아직 그리 진지하게 얘기할 만한 이야기 아니야. 그냥, 난 그 남자를 모르고, 궁금했으니까.”

“정말로 그 정도면 파사 네가 내 앞에서 말이나 꺼냈겠어? 이 시점에서. 네가 열일곱만 됐어도 이해해. 시간은 많이 남았고, 연애는 내가 늘 말했듯 많이 해 보면 해 볼수록……. 아니, 다 필요 없지. 황태자 전하만큼 완벽한 남자가 어디 있니? 왜 만족을 못 해? 너에게 누구보다 잘 어울릴 사람이야.”

“알잖아. 내가 원하지 않는걸. 심지어는 아버지, 어머니까지도.”

“그런다고 피해질 문제야? 황태자가 너를 원해.”

“피하고 싶어.”

“…….”

“나도.”

“…….”

“나도, 시간이 지나면, 참으면 참아질 줄 알았던 적이 있었어. 그래, 아무리 재어 봐도 이상적인 결합이지. 그가 나를 갖는 것도, 내가 그의 옆자리를 갖는 것도. 그러니까 이렇게 닥치게 되면 단념이 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줄리에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줄리에, 안 돼. 그게 잘 안 돼. 황태자의 청혼은, 그 남자만 받아들이는 게 아냐.”

“…….”

“그 후로 이어질, 내가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내 평생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죽을 때까지 황성 안에 갇혀서, 그 위태로운 자리에 앉아 내가 원하는 어떤 작은 미래도 가지지 못한 채로. 차라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욕심이라도 있으시면 좋았을 걸. 그럼 진작 포기했어. 에델가르드를 위해서라도 내 발로라도 걸어 들어가.”

그러나 파사칼리아의 모친, 황녀 헬레니아는 자라는 동안 제 모후가 말라 죽어 가는 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파사칼리아가 어릴 적부터 질리도록 들어온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너는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그런데 이렇게 유학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파사칼리아의 발밑으로 그물이 펼쳐진 것이다. 파사칼리아는 질린 얼굴로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심지어 내 부모조차 원하지 않아. 그럼 대체 내가 뭘 위해―.”

“파사칼리아.”

“―내 인생을 망가트려야 해?”

줄리에티가 답답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파사칼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고 순진한 계집이 아냐. 그 남자 껍데기만 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계집처럼 순수하게 끌리기만 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네 말은…….”

“벗어나야겠어.”

파사칼리아는 제가 그 남자 자체에게 끌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남자가 매인 모든 것을 눈여겨보았다. 남자는 적당했다. 황위와 가장 먼 황자, 그리고 평생 권력의 파편 하나 쥘 수 없는 남자. 그러나 그는 황자였다. 그 말은 즉 법제상 황태자의 청혼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신분이라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카드리어는 직계 파사칼리아가 제게 가져다줄 에델가르드를 원할 뿐, 궁극적으로 자신을 여자로서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에델가르드가 카드리어에게 공고한 충성을 맹세하고, 그 남자를 적절한 선에서 보호한다면 남자에게도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가 바라 온 미래 역시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파사칼리아는 콘스탄체의 탄일 연회에서 봤던 남자의 옆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처음엔 남자의 모습만으로도 머릿속을 꽉 채우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꼴사나운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갔다. 파사칼리아는 그 꼴사나운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조금 멍하니 떠올리다 제 이기적인 속내를 알아차렸다.

이용.

그래, 그 남자를 이용하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파사칼리아가 스스로 생각하기엔 그랬다. 어쩌면 알량한 정당화일지도 모르는 얘기였다. 파사칼리아는 고작 첫눈에 불어난 제 마음을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뭐가 되었든 제가 움직여도 스스로 수긍할 만한,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사실 파사칼리아는 그 필요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줄리에티가 머리를 짚고 있던 손으로 이마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줄리에티의 눈매가 파사칼리아의 속내를 가늠하듯 설핏 가늘어졌다가 이내 포기한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린다.

“……도와줄게.”

의외의 말에 파사칼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줄리에티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나. 그다음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온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파사칼리아는 창밖으로 저녁 안개가 희미하게 내려앉은 골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커튼을 닫았다. 목울대 아래로 빨라진 맥박이 느껴진다. 줄리에티의 새까만 야유夜遊용 마차는 이내 어느 고택古宅 앞에 멈춰 섰다. 파사칼리아는 긴장에 차갑게 식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남자는 대체무슨 생각으로 줄리에티의 말을 수락했던 걸까. 혹시 자신을 이용해 무언가를 노리고…….

파사칼리아는 순간 자조적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용하려고 하는 게 누군데.

파사칼리아가 문고리를 지그시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문을 열고 그를 만나게 되면 혹시라도 모를 괜한 구설수가 그 불쌍한 황자를 더 진창으로 처박게 될지도 몰랐다. 제 이기심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일 작정까지 한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파사칼리아는 겨우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으나, 문을 열지는 못했다.

이제라도 돌아갈까. 파사칼리아는 이내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잘못된 일은 되돌릴 수 있을 때 되돌리는 게 좋았다.

그때였다.

끼익, 문의 이음새가 낮게 긁히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파사칼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황자가 서 있었다. 그 암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황자가 우아하게 마차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에델가르드 공녀.”

낮지만 생각보다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파사칼리아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루드비히의 손 위로 내밀었다. 그의 단단한 손이 자연스럽게 파사칼리아의 손을 받치고, 마차 밖으로 이끌었다. 파사칼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땅 위에 내려서서 루드비히와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흐린 석양빛이 남자의 적갈색 머리칼 위로 아스라이 쏟아졌다.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파사칼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급히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나는, 그저…….”

“들어가요.”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파사칼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볼 때는 감정 한 톨 없을 것처럼 차가워 보였던 남자의 인상에 옅은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대로 눈이 다시 마주치자 심장이 쿵쿵 뛴다. 루드비히의 손이 파사칼리아의 팔을 잡고, 거기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고 이끌었다. 그의 손이 스치며 흔적이라도 남긴 양 팔 안쪽이 조금 화끈거렸다. 처음 마주한 사이에 무례하다고 말할 법한 접촉이었음에도 그 손길이 지나치게 정중해 파사칼리아는 무례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줄리에티가 연인과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 마련한 이 작은 저택은 수십 년 전 몰락한 어느 소귀족의 수도 거처였다. 사실 이곳은 저택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감이 적잖아 있었다. 본래 주인의 성정이 꽤 소박했으리라.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건물로 들어가는 문이었고, 문을 들어서자 짧은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를 조금 걷자 복도의 끝과 마주쳤다. 파사칼리아는 생각보다도 더 단출한 구조에, 그리고 금방 끝나 버린 여정에 조금 당황했다.

루드비히는 파사칼리아를 잡지 않은 손으로 자연스럽게 마지막 방의 문을 열었다. 멈칫할 틈도 없이 파사칼리아는 방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 소리에 숨이 뚝 떨어졌다. 방 안은 어두웠다. 몇 걸음 앞에 서 있던 루드비히가 돌아섰다. 어둠 속에 비스듬히 진 그늘 아래로 황자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어스름하게 드러났다. 고작 닫힌 방 안에 같이 서 있을 뿐인데, 세상에 단둘이 격리된 듯, 속이 막연하게 울렁거렸다. 루드비히는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사이가 가까워진다. 파사칼리아는 그 눈을 똑바로 올려보지도 못한 채로 루드비히의 콧잔등 즈음을 바라보았다.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밟기 직전 멈춰 섰다. 그리고 제 얼굴을 조금 낮춰 파사칼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파사칼리아가 흠칫 놀라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루드비히의 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받쳐 막았다. 전처럼 목적을 달성하면 담백하게 떨어질 줄 알았던 손길은 그녀가 계속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대로였다. 그러나 파사칼리아가 뿌리치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기도 했다. 파사칼리아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루드비히가 더 빨랐다.

“……미친놈처럼, 계속 당신만 생각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아까 전 파사칼리아를 부드럽게 잡아 주던 황자와는 다르게 조금 성마르고 거칠었다. 생경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조금 떨리는 시선으로 루드비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항상 평온할 것 같았던 남자의 얼굴에서 믿을 수 없게도 긴장한 기색이 묻어났다. 성급하고, 서투른, 기묘한 열기. 파사칼리아는 이미 제 머릿속에서 이용이나 결혼 따위의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멍하니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내 파사칼리아의 눈가에 루드비히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아주 가는 틈을 남기고 떨어졌다. 피부 위에서 서로의 숨만 옅게 흩어지는 고요한 정적이 이어진다. 파사칼리아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때, 입술이 닿았다.

화인火印을 찍듯 맞닿은 입술이 꾹 눌러져 있다, 떨어진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마주한 시선, 루드비히의 손, 파사칼리아의 허리, 닿은 것은 그 작은 것뿐인데도 손끝까지 시렸다. 루드비히가 허리를 받치던 손을 안쪽으로 뻗어 깊게 감싸 안으며 파사칼리아를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루드비히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이며 입을 맞춰왔다.

파사칼리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파사칼리아의 허리를 잡지 않은 빈손이 천천히 등을 쓸며 올라가 목 뒤를 덮었다. 제법 여유롭게 움직이던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목을 잡아 자신에게로 깊이 당기는 루드비히의 손길은 성급했다. 파사칼리아가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루드비히의 옷깃을 잡았다. 제 옷깃을 겨우 붙잡는 하얀 손에 루드비히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열이 확 올랐다. 파사칼리아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가고, 거의 동시에 혀가 입술 사이를 갈랐다.

호흡이 한데 뒤섞였다. 어느새 문까지 몸이 밀렸다. 파사칼리아의 몸이 문에 그대로 부딪치기 직전, 가까스로 루드비히가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뻗어 손으로 문을 짚었다. 그 팔 위로 파사칼리아의 무게가 겹치며 루드비히의 팔이 세게 문에 부딪혔지만, 루드비히는 아픈 기색도 없이 더 깊게 키스했다. 몸이 더 가까워진다. 루드비히의 큰 키에 파사칼리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본능적으로 파사칼리아의 목 뒤를 감싼 손이 그녀의 뒤통수로 올라가 보호하듯 감싼다. 목제 문의 조각에 파사칼리아의 머리 대신 루드비히의 손등이 아프게 짓눌렸다. 이내 파사칼리아의 숨이 가빠졌다. 그것을 느낀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입술 사이로 숨길이 트이자, 파사칼리아가 나른한 한숨처럼 숨을 뱉어냈다. 그 내밀한 숨소리에 루드비히가 묘한 눈으로 파사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어 남자에게서 흠칫 눈을 돌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기댈 것을 찾듯 허공을 짚던 손이 제 뒤의 문을 짚었다. 그리고 문득, 파사칼리아는 제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파사칼리아가 조금 굳은 얼굴로 남자의 팔을 잡았다. 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었다. 루드비히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순간 의아한 눈으로 제 팔을 끌어내리는 파사칼리아를 내려 보았다.

파사칼리아는 남자의 손을 잡아 손등이 보이도록 뒤집었다. 살갗이 찢어져 빨갛게 변해 있다. 파사칼리아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루드비히는 곧장 손을 뺐지만 파사칼리아가 다시 잡았다. 어쩐지, 속이 이상했다.

“……안 아프셔요?”

“괜찮아. 아니, 난 괜찮아요.”

무언가 홀린 듯 휩쓸렸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오자, 황자는 다른 사람처럼 다시 정중해졌다. 파사칼리아는 그 와중에 그게 조금 우스워 픽 웃었다.

“아깐 편하게 잘 말씀하셨지 않나요?”

“아, 그건…….”

“미친놈처럼, 나만 생각했다고요.”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를 놀리듯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 말을 설마 육성으로 되돌려 들을 줄은 몰랐는지 루드비히가 당혹스러운 듯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 경악했던 파사칼리아는, 루드비히의 반응에 이내 그런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인심 쓰듯 주제를 돌렸다.

“편하게 말하셔도 되요.”

“……래.”

“네?”

“그래.”

“…….”

“미친놈처럼, 당신만 생각했다는 거. 정말로.”

“…….”

“정말로, 당신만 생각했어. 당신만 생각났어.”

루드비히가 손을 천천히 내렸다. 루드비히의 얼굴이 어스름하게 드러난다. 당황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멀쩡한 얼굴이 거짓말처럼 파사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파사칼리아가 당황했다.

“미치겠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서 미칠 것 같아. 내가 감히 당신을 마주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 바랄 수조차 없는 걸 아니까, 온갖 구질구질한 생각이 다 떠돌아. 그런데…….”

“…….”

“당신이 날 찾은 거야.”

루드비히의 목소리에서 억눌린 환희가 새어 나왔다. 파사칼리아는 제 목구멍으로 불쾌한 가시가 가득 돋아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남자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파사칼리아의 진심도 믿었다. 어떤 마음으로 그녀가 저를 쟀는지도 모르고. 파사칼리아는 남자의 엉망이 된 손을 다시 바라보았다. 숨이 탁 막혔다.

“벗어나야겠어.”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남의 말이 떠오른 것처럼 문득 귓전을 맴돌았다.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게 당신이야.”

“…….”

“갖고 싶어서, 안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게 당신이야.”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옆으로 물러서 그를 피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그녀를 바로 잡아 제 앞으로 데려왔다.

“이제 와서 피하지 마.”

“전하.”

“당신이 왔잖아.”

파사칼리아는 제 팔을 붙잡은 루드비히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파사칼리아는 이 방에 들어서고 단 한 번도 그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루드비히에 대한 죄책감은 덜어 줄지언정, 어찌 보면 제 논리를 완전히 벗어난 멍청한 일이었다. 파사칼리아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지도, 좋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제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렇게 딱부정할 수 있을 정도의 호감이었고, 제 이성을 결코 이길 수 없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러니 갖은 핑계도 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파사칼리아는 덤덤하게 인정했다. 어쩌면 이 손을 자신은 평생 잊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루드비히의 손을 본 순간 파사칼리아를 덮친 것은 죄책감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제야 황자에게 반했던 것이다. 수려한 이목구비, 훤칠한 외모, 매력적인 인상,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고작 그의 손에. 비현실적인 감정이었으나 더 이상은 현실적인 자기변명이 불가능했다. 더 이상은 부정하고,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가 좋았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로 정해져 있었던 사람들처럼.

2

줄리에티 비숍을 사모하던 한 청년, 벨르본가의 영윤 크리스티안은 줄리에티의 밀회 장소를 어마어마한 뒷돈을 들여 겨우 알아내고 염탐하던 중이었다. 근 보름 동안, 마차가 갑자기 자주 드나들고 있다던 관리인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마차에서 내린 것은 어딘가 낯선 생김새의 남자였다. 사실 낯설다고 하기에는 어디선가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벨르본이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라면 남자가 결코 대단한 놈이 못 된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크리스티안은 새삼스레 줄리에티의 폭넓은 남성 편력에 혀를 쯧 차고는, 줄리에티의 새로운 연인이 일단 하잘것없는 남자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가진 거라곤 보잘것없는 집안과 오직 저 잘나빠진 얼굴뿐이리라. 대귀족 비숍 가의 영애인 줄리에티와는 결코 진지하게 이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곧바로 줄리에티의 작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 빈 길을 바라보는 모습이 줄리에티의 마차라도 기다리는 듯했다.

병신 같은 새끼, 언제 버려질 줄도 모르고 지극정성이네.

크리스티안은 남자의 모습이 꼴사나운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크리스티안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조와도 같았다. 그러나 남자의 정성이 무색하지 않게 이윽고 줄리에티의 야유용 마차가 도착했다. 크리스티안이 줄리에티와 보냈던 단 두 번의 밤, 제가 손수 줄리에티를 태워 보냈던 마차였다. 크리스티안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는 것을 응시했다.

이제 곧,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여자의 모습에 크리스티안이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도 늘 환히 빛나던 줄리에티의 화려한 금발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파사.”

남자의 낮은 음성이 다정하게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티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파사칼리아, 파사칼리아 드 에델가르드. 에델가르드 공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공녀의 밀회를 맞닥뜨리게 된 크리스티안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 남자는 누군가.

남자가 다정하게 파사칼리아를 끌어안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가볍게 몇 번 키스했다. 크리스티안은 그 모습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며 희미한 기억을 헤집었다. 기억이 날 듯도 한데. 남자가 파사칼리아를 세게 한 번 더 끌어안고는 저택으로 들어선다. 문득 골목 너머 저 멀리 불빛이 아스라이 비치며 남자의 적갈색 머리칼을 비추었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콘스탄체 황녀의 탄일 연회……. 크리스티안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이제야 생각났다. 왜 자신이 저 남자의 얼굴을 대번에 기억해 내지 못했는지도.

“맙소사…….”

그래, 저 남자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소문이 돈 것은 파사칼리아의 성년이 열흘 남짓 남았을 무렵이었다. 줄리에티를 사모하던 한 귀족청년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청년이 제 친구들과 앉아 있던 작은 커피 하우스에서 살롱까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스캔들과 덩달아 줄리에티의 밀회 장소가 알려진 게 걱정되어 줄리에티에게 갔던 파사칼리아는, 줄리에티와 아그네스에게 지금 그게 문제냐는 타박만 잔뜩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파사칼리아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제 인생 최초의 염문을 받아들였다. 언젠간 겪었어야 할 일이었다. 루드비히가 보고 싶어졌지만 당분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파사칼리아는 줄리에티에게 가기 전, 낮에 쓰다만 편지를 떠올렸다. 이제 겨우 해가 졌을 뿐이다. 밤이 깊어야 몰래 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빨리 쓰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파사칼리아가 메이드를 물리며 방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 자신을 맞이했다.

“파사.”

“……황태자 전하, 여긴 제 침실과 이어지는 방입니다.”

파사칼리아가 그대로 문가에 멈춰 선 채로 짐짓 정중하게 말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카드리어는 픽 웃었다. 늘 그랬듯이,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파사칼리아의 생각보다 훨씬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파사칼리아는 동요하지 않고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공저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실 수 있는 접견실이 아홉 개나 있습니다.”

“비공식적이라, 어쩔 수 없이.”

카드리어는 평소처럼 뻔뻔하게 대꾸하지 않고 합당한 이유를 댔다. 파사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드리어가 천천히 파사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파사칼리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내 반걸음 만에 멈추었다. 파사칼리아와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남겨둔 채 멈춰선 카드리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리 몸 사리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

“9황자 앞에서도 그리 정숙한 몸가짐이었으리라 믿지.”

파사칼리아가 짧게 실소하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었다면요.”

“파사.”

파사. 루드비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파사칼리아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난 고리타분한 남자가 아니야. 나도 웰라운에서 삼 년을 보냈어. 멀쩡한 영애들이 아카데미에서 어디까지 정신을 놓을 수 있는지도 알지.”

“…….”

“고작 여자의 순결에 결벽을 떨어 댈 거면, 이제 갓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여자를 마음에 두지도 않아.”

귀족들이 유행처럼 여식들을 유학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안 좋은 인식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혹여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구식으로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유학을 가서 만에 하나 행실이 아무리 방탕해졌다 해도 그게 국내에서 자유연애를 즐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황후와 황태자비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에, 혹시나, 하는 의문점조차 없어야 했다.

파사칼리아는 문득 베티스 드 카디링거를 떠올렸다. 제가 게르테뉴로 떠나기 전, 암묵적으로 황제가 황태자의 짝으로 지정했던 여자. 카디링거 후는 그 후로 제 딸에게 들어오는 모든 청혼을 막고, 딸을 철저히 관리했다. 한 점의 오점도 없도록. 그녀가 가지지 않은 오점에는 물론 유학도 포함되었다. 파사칼리아는 어릴 적 자주 마주치던 두 살 위의 베티스가 꽤 똑똑한 여자였다는 걸 기억했다. 황태자비로 내정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대귀족가의 여식답게 최고의 아카데미로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등지고, 카드리어는 파사칼리아 앞에 서 있었다. 파사칼리아는 제가 바라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의 원한까지 안게 된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난 깨끗하지 않아. 그런 내가 그대에게 깨끗함을 바라는 것도 어불성설이지. 정작 깨끗하지도 못한 사내들이 계집에게 순결을 요구하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도 없거든.”

“……하.”

“그러니, 괜찮아.”

“괜찮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전하께 이런 말을 듣고 있을 이유는…….”

“하지만 파사.”

“…….”

“하룻밤 유희는 이쯤 해 둬.”

파사칼리아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카드리어를 지나쳐 걸었다. 카드리어는 차분한 눈으로 파사칼리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중요한 시기야. 고작 그 하룻밤 때문에 모든 걸 망치지 마.”

“고작…….”

파사칼리아가 날카롭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뒤돌았다.

“그걸 전하께서 어찌 단정하십니까.”

“장담컨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야. 그댄 아직 어려.”

“전 열흘 뒤면 성년을 맞아요.”

“그러니 중요한 시기라는 거지. 찰나에 평생을 흐리지 마.”

“남의 평생을 전하 뜻대로 재단 마세요.”

“넌 내년에 그 녀석이 기억나지도 않을 거야.”

“평생 기억할 사람이에요.”

파사칼리아의 대꾸에 순간 카드리어의 완벽한 평정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파사칼리아가 눈치챌 새도 없이 멀쩡하게 돌아온 얼굴로 카드리어가 담담하게 말했다.

“파사, 그대가 날 미치도록 걷어 내고 싶어 하는것 알아. 그러기 위해 9황자를 이용한 것도.”

파사칼리아가 자기최면을 걸듯 스스로에게 댔던 핑계가 그대로 돌아온다. 잊고 있었던 스스로의 허물이 가슴 중간에 턱 막혔다. 파사칼리아는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파사칼리아를 내려 보던 카드리어가 여유롭게 웃었다.

“하지만 9황자는 이용할 만한 재목이 못 돼.”

“…….”

“그러니 그 아이의 처지를 더 더러운 진창에 처박지 마.”

“좋아해요.”

카드리어가 순간 멍해진 얼굴로 말을 멈췄다.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를, 좋아해요.”

망설임 없이 곧게 떨어진 말이었다. 카드리어는 무표정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재밌는 장난을 치는군.”

“날 놔 줘요.”

“파사.”

“제발, 날 놔 줘요.”

“파사칼리아.”

“날 진짜로 원하지도 않으면서.”

파사칼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 카드리어가 파사칼리아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파사칼리아가 피할 새도 없이 낚아채듯 그녀의 팔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조금 거칠어진 숨이 파사칼리아의 뺨 위에서 흩어졌다.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카드리어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일그러진 표정도, 여유라곤 온데간데없는 얼굴도 파사칼리아는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카드리어가 머리를 비스듬히 숙였다.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에 파사칼리아가 팔을 빼내려 버둥거렸다. 카드리어가 파사칼리아의 팔을 더 세게 쥐어 당기며,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너야말로 단정하지 마, 파사칼리아.”

“…….”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카드리어가 싸늘한 얼굴로 파사칼리아를 던지듯 놓았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파사칼리아는 멍하니 밀려났다.

“귀엽게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해. 그 어쭙잖은 편지도 태워.”

“…….”

“내 것답게.”

차분하게 말을 끝맺은 카드리어가 파사칼리아를 스쳐 문을 열었다. 또각또각, 단정한 발소리가 몇 번 이어지고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파사칼리아는 벽에 기댄 채로 천천히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카드리어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제 손안에 쥔 편지를 내려 보았다. 벌써 몇 번째 편지였다.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조금은 날카로운, 우아한 글씨가 정갈하게 나열된 종이는 이내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형편없이 구겨졌다.

카드리어는 잠시 신경질적으로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낮게 타오르는 촛불 위로 편지를 가져갔다. 감정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고요한 시선이 불에 조용히 사그라지는 편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화나 있었다. 그의 곁에서 꼬박 10년을 지내온 보좌관 오르시니는 늘 순항하는 배처럼 고요한 황태자의 얼굴 아래에도 수만 가지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이 그가 절제한 최대한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제 주군의 인내가 서서히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카드리어가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렸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오르시니에게 물었다.

“경의 눈에도 내 꼴이 비참한가?”

“전하.”

“꽤 우습겠지.”

카드리어는 가볍게 소리 내어 실소했다. 오르시니가 감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이리 눈뜨고 코 베인 꼴이라니, 우스울 만해.”

“…….”

“그것도 브나리오의 루드비히라…….”

루이. 카드리어는 제 이복동생의 낯선 애칭으로 시작하는 편지들의 서두를 떠올렸다. 그 정갈한 손으로, 그 아름다운 입술로, 그 보잘것없는 이름을 부르겠지. 루이, 그 치기 어린 애정을 가득 담아서.

카드리어의 단정한 입매가 날카롭게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종이가 사라진 허공 위로 환각처럼 그녀의 글씨가 떠올랐다.

루이, 나의 루드비히.

……지금 우리의 상황이 좋지 못한 걸 알아요.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우리가 어쩌면 꽤 오랫동안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도.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오래 만나지 못하더라도, 세간에서 쉽게 떠드는 우리의 이야기보다 내 마음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무겁다는 건, 당신이 항상 알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도, 그 무게도 그러리라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믿어야 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를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루드비히,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요. 이렇게 당신의 목소리만 평생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난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의 편지가 오지 않아요. 당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자꾸만 불안해져요. 혹시나……. 아니, 부디 날 조금이라도 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런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아.

루이, 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아닌 남자와는. 알잖아요. 세상에서 날 제일 잘 아는, 당신이 알 거예요. 사실 우리에겐 어쩌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루드비히. 난 당신이 아니면 싫어요. 곧, 성년이 다가오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늘어지는 활자들에 욕지기가 울컥 치밀어 올라 카드리어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 오갈 데 없는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이미 불에 사그라지고 없는 편지를 꽉 틀어쥐었다. 싸늘한 침묵이 이어졌다. 카드리어가 이내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만하면 그녀에게 기회는 충분히 준 것 같군. 오르시니, 그렇지 않나?”

“전하.”

“에르가넷의 아들.”

“…….”

“그 새낄 죽여.”

“황자 전하.”

시종장의 부름에 루드비히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내에 따라 협실을 나서자 곧바로 보이는 거대한 문은 루드비히가 태어나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제 키가 지금의 겨우 절반쯤으로 보였을 시절, 어린 루드비히는 어미의 손을 잡고 이 거대한 황제의 접견실에서 처음으로 제 아비에게 인사했었다. 그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드리안제가 루드비히에게 따스하게 말해 주었던 날이었다. 그다음 대화는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후 에르가넷이 처형당하던 날이었고, 그날이 지난 뒤로는 부황이 제 눈을 들여다보는 일조차 없었다.

루드비히는 기묘하게 울렁이는 기분으로 접견실에 들어섰다. 이내 그 거대한 문이 조금의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닫혔다. 중앙을 향해 걸어가던 루드비히는 이드리안제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로 바닥의 웅장한 지도 위에 멈춰 섰다.

“폐하.”

황제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숨통이 꽉 죄여 왔다. 루드비히가 짐짓 태연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으나, 황제는 아랑곳 않고 루드비히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대리석 위로 부딪치는 찬 발소리에 목 뒤로 문득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들라.”

루드비히가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의 얼굴을 건조한 시선으로 살피던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제로 루드비히의 안색은 그의 건장한 체격과는 별개로 꽤 창백했다. 핏기 없는 입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황제의 눈길이 낯설어 루드비히는 살짝 시선을 낮추며 공손하게 아뢰었다.

“송구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

“…….”

“네가 매일 무엇을 먹고 있는지.”

루드비히는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들었다.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하고 돌아오는 사실은, 늘 그래 왔듯 대개 자신에게 친절한 진실이 아니었다. 무릎을 짚은 손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황제 역시 알고 있었다.

제가 매일 먹는 음식이, 자신을 서서히 죽여 가기 위한 것임을. 루드비히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 폐하.”

“알고 있다?”

황제가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그 이후로 단 한 끼도 거르지 않았다 들었다.”

“제 입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폐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황자가 짐 보란 듯 시위하는 것은 아니었나?”

“외람되게도, 폐하. 제가 감히 그럴 주제가 될 수 없는 건, 폐하께서 가장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또한?”

“황태자 전하의 뜻이 곧 폐하의 바라시는 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폐하의 충실한 종으로서 폐하의 바라시는 바를 저도 바라고, 그에 순종할 뿐입니다.”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저 말은 즉 황태자가 저를 죽이려 하는 것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천천히 루드비히의 위로 몸을 숙여 낮게 속삭였다.

“그래서 순순히 죽어 주기라도 할 것이냐? 카드리어가 바란다면.”

“감히 거부하진 않겠습니다.”

황제가 기가 막힌 듯 짧게 웃었다.

“그리 죽을 주제에 감히 네 분수도 모르고 헬레니아의 딸을 넘보았느냐? 황후가 될, 에델가르드의 딸을?”

“…….”

“네 그 잘난 처지조차 잊을 정도로 계집에게 그리 한창 정신 팔린 네가, 전연 죽을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카드리어는 잠시 이성을 놓았고, 넌 독이나 야금야금 먹으며 시간을 벌고자 한 것뿐이지. 카드리어에게서 네가 피할 수 없는, 더 큰 위협을 받기 전에. 그렇지 않느냐?”

루드비히는 말이 없었다. 황제는 무표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는 지금 잠시 멍청하게 굴고 있다.”

“…….”

“그리고 짐은, 그 멍청한 계획이 성공하게 둘 생각이 없노라.”

그렇다면 자신을 카드리어에게서 살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루드비히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루드비히는 조금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장 마주한 시선은 그 희미한 희망을 순식간에 깨트렸다.

“카드리어는 완벽한 황제가 될 것이다. 건국제 카드리어와 같이 그 어떠한 오점도 없이.”

“…….”

“제 동기同氣를 살해했다는 이력은 꽤 지긋지긋한 꼬리표지. 헌데 고작 계집 문제, 고작 계승권과 관련도 없는 황자.”

무릎을 짚은 손이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나머지 덜덜 떨렸다. 루드비히는 입안을 겨우 짓씹어 제 평정을 유지했다.

“황태자의 평생을 따라다닐 오점치고는, 네가 지나치게,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너는, 그 고귀한 손에 죽을 가치조차 없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제 무릎께를 응시하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리하여 너는, 므노비스 회전會戰에 출정出征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군인으로서, 그란토니아를 위해 명예롭게 죽어라.”

“…….”

“그조차 창녀의 아들에겐 과분하겠지만.”

루드비히는 저더러 알아서 죽으라는 말보다 창녀라는 말에 놀라 떨리는 시선을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낮게 웃었다.

“짐을 그리 널 버린 아비 보듯 바라보지 마라. 짐은 아직도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니까. 네 여동생, 그 계집 역시도. 그러나 적어도 네 그 빌어먹을 태생이 부정한 것만은 알지.”

“폐하, 제 어미는 그럴 리가…….”

“네 어미가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은 네 형인데, 어찌 네가 모든 죗값을 감당해 왔는지 아느냐?”

“…….”

“카스트로는 짐의 아들이고, 너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루드비히의 머릿속 세계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네 어미의 그 모든 것을 덮은 것이 짐이다. 네가 짐의 아들로, 그 계집이 짐의 딸로 남도록 모든 것을 인내했다. 헌데 감히, 네가.”

“…….”

“이제는 카드리어의 것을 넘보는가.”

무릎을 짚고 있던 손이 힘을 잃고 미끄러지며, 루드비히의 몸이 차가운 대리석 위로 고꾸라지듯 무너졌다. 그 모습을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분수를 모르는 것은 네 어미를 꼭 닮았구나.”

“…….”

“이것이 짐의 마지막 자비다. 짐의 아들로서 명예롭게 죽으라.”

“9황자는 곧 장교로 차출되어 므노비스 회전에 출정할 것이다.”

“…….”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아버지.”

“그곳에서 죽으라고 보내는 것이다.”

파사칼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를 겨우 짚어 허물어지는 몸을 지탱했다. 서서히 테이블 위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델가르드 공이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는 황제 폐하의 아들이에요. 폐하께서 그 아들에게, 그러실 수가…….”

“또한 죄인의 아들이기도 하지.”

“그는 죄인이 아니에요!”

“이 모든 게 너와 나 사이에서 논하기엔 지나치게 의미 없는 화제구나, 파사.”

“…….”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그 생을 너마저 뒤흔들지 마라. 겨우 한때의 마음으로 이러지 마.”

“아버지, 아버지가 그를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라면…….”

“자꾸만 너답지 않게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구나. 황자의 므노비스 출정은 폐하의 뜻이다. 겨우 네 말 몇 마디에 아비의 마음이 동해 거꾸러트릴 수 있는 계제階梯가 못 된다. 이제라도 단념해.”

“아버지, 저는…….”

“……고작 고르고 고른 놈이, 그 황자라고.”

에델가르드 공이 잇새로 짓씹듯 뇌까리는 말에서 희미한 노여움이 드러났다. 이렇게 그녀에게 쏟아지는 모든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황자가 아닌 길거리의 거렁뱅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파사칼리아는 지독하게도 싫었다. 루드비히는 제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남자였고, 그리고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고결한 남자였다. 파사칼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그를 알지 못하세요. 제발 그의 불행한 처지로 그 사람마저 재단하지 마세요. 황자 전하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에요. 아버지, 그걸 아셔야 해요.”

“그놈 속내가 어떤지 궁금해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 아버지는 알아 주셔야 해요.”

“파사.”

“제가, 제가 사랑하는 남자잖아요.”

“파사칼리아!”

“아버지, 제발…….”

파사칼리아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공작이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 파사칼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짐짓 엄하게 짓고 있던 표정을 지워 냈다. 그리고 온화한 목소리로 파사칼리아를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파사칼리아, 우리는, 네 어머니와 나는 너에게 최대한의 평탄한 생을 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한시라도 눈 밖에 있으면 불안한 너를, 게르테뉴까지 보내 몇 해를 떨어트려 놓고 네 어머니의 근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어. 네가 게르테뉴까지 간 것이 고작 네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란 걸 너도 알 것이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러나 폐하께서 그 모든 걸 괜찮다고 하신다.”

“…….”

“폐하께서도 결국 황태자 전하의 손을 들어 주신 게지.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황태자는 네 낭군으로 퍽 나쁜 상대가 아니야. 이제라도 네가 지금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황태자 전하께선 제게 최선이 될 수 없으세요.”

“파사.”

“아버지, 지금의 제게 최선은, 오직 그 사람뿐이에요.”

“…….”

“절 아시잖아요. 지금 제 마음도.”

공작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네 그 최선의 미래가 뭐냐? 그놈이 네게 청혼하는 것?”

“그게 제가 지금 바라는 모든 거예요.”

파사칼리아의 담담한 대꾸에 공작이 짧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황자의 출정을 막는다 치지. 황자가 네게 청혼하고, 네가 그 청혼을 받아들이고, 혼인이 성사돼! 그다음은? 황태자가 너흴 어찌할 것 같으냐.”

“……그의 계승권은 황태자 전하의 발끝조차 위협할 수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에델가르드는 절대자를 배반한 적이 없죠.”

“파사, 네 아비는 에델가르드의 수장이다.”

“…….”

“그리고 네 어미는 아직도 계승권을 인정받고 계신 황녀 전하시고, 폐하의 유일한 동복 누이지. 너는 그런 아비와 어미의 하나뿐인 딸이다.”

“…….”

“황자와 네가 혼인하는 순간, 황자는 더 이상 지금의 황자로 남을 수 없다. 황자가 너를, 네가 황자를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네가, 황자가,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가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황자가 에델가르드를, 에델가르드가 드디어 황자를 가졌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리고 그것이 황태자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네가 더 잘 아리라 믿는다.”

“…….”

“그리고 그것이, 지금 황자가 전장으로 몰리게 된 이유라는 것 역시도.”

파사칼리아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은 복잡한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파사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파사칼리아에게로 걸어와 그녀의 머리를 어색하게 쓸어 넘겨주었다.

파사칼리아는 제 아비가 하나뿐인 딸을 이렇게 엄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다정한 손길이, 지금 아비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과 위로라는 것 역시도. 공작은 유독 제 딸에게만 오래 노여워하지 못했다.

파사칼리아는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다. 모두 맞는 말이었고,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았다. 처음부터 제가 모든 것을 엉클어트린 관계였다. 시작조차 해서는 안 됐었는데, 마치 제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계산해 놓은 양 제 멍청한 짓에 핑계를 대고 스스로를 속여 그를 끌어들였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두었다.

그렇게 잠깐의 행복과 충만함이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었다고 믿었으나, 돌아보면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결코 그의 죽음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파사칼리아는 이 방에 들어서며 가졌었던 희망의 절반을 버렸다.

“이 아비는 네가 바라는 건 모두 해 주고 싶다. 하지만, 때로는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것도…….”

“살려 주실 수 있나요?”

“……뭐?”

“그를, 살려 주실 수 있나요? 이 모든 순리대로, 제가 그를 버린다면 말이에요.”

“파사.”

“아니, 살려 주세요.”

“…….”

“그를 살려 주세요, 아버지.”

카드리어는 에델가르드 공이 건네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무심한 눈길이 종이 위를 잠시 배회하다 이내 다시 올라와 공작을 바라보았다. 카드리어의 시선에 공작은 조용히 읍했다.

잠시간 공작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드리어가 픽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수신인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에델가르드 공.”

“엄밀히 말해, 제 뜻에는 전하께서 그리 받으시는 것이 맞습니다. 전하.”

“어찌 제게 보여 주십니까.”

“제 여식의 결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9황자에 대한 전하의 자비를 이끌어 내리라 믿습니다.”

카드리어의 단정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무표정하게 다물려 있던 입가가 흥미로운 듯 호를 그리며 올라간다. 카드리어는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에델가르드 공, 공께서 지금 제게 9황자에 구명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아십니까?”

장난스럽게 들릴 정도로 무게 한 점 없이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으나, 그의 물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기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과연 황제에 의해 후계로 철저하게 만들어진 남자였다. 공작은 젊은 황태자의 위압감을 꽤 흡족하게 바라보며, 평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하의 손에 들린 제 여식의 편지가, 제 답입니다. 그로써 에델가르드와 9황자의 사이에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 어떠한 접점도 없으리란 것을 알아주시길 바라면서요.”

“접점이라.”

카드리어는 무표정하게 편지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카드리어의 손에 몇 번이나 들렸던 그녀의 편지와 같이 내용은 이전의 것과 전혀 달랐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글씨였다.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그녀의 편지는, 그다음 말을 한참이나 잇지 못한 것처럼 손날에 눌려 그 주위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리고 공백. 그다음으로 조금 비틀린 글씨가 짤막하게 이어졌다. 당신의 마음을 저버리는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짧은 한마디. 카드리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짧게 실소했다.

“눈물겹군.”

짐짓 비꼬는 어조와는 다르게 차분한 손길이 편지를 다시 정갈하게 접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얼마간 접혀진 종이의 모서리 따위를 응시하던 카드리어가 몸을 일으켜 공작에게로 다가왔다.

“에델가르드 공.”

“전하.”

“공께서는 지금 무언가를, 간과하셨습니다.”

“…….”

“그리 생각해 보진 않으셨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제가 단지 9황자와 에델가르드의 결합을 경계했다면, 그리고 그럴 만한 족속이었다면.”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드리어가 고개를 기울여 낮게 속삭였다.

“9황자는 이미 예전에 죽고 없었으리란 것을요.”

“…….”

“고모부, 고모부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조카는 세간의 말들처럼 그리 너그러운 편이 못 됩니다. 그를 정적으로 간주했다면 진작 그 목부터 잘라냈을 겁니다.”

카드리어가 고개를 들며 빙그레 웃고는 부드럽게 공작의 어깨를 짚었다.

“에델가르드 공은 헬레니아 고모님의 부군夫君이십니다. 제게 있어 에델가르드는, 어머니의 클레이런스와 다르지 않지요. 지극히 당연하게도, 저는 단 한순간도 공께서 이끄시는 에델가르드를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더불어 우리의 굳건한 유대 역시도.”

“……더없이 기쁜 말이군요.”

“저는 또한 그 아홉 번째 황자의 희미한 계승권에는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께서 구태의연한 우리의 유대를 논하지 않으셔도, 그 ‘접점’에는 이미 관심이 없습니다.”

“과연 폐하의 후계다우신 처사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9황자는 살수 없습니다.”

조금의 살의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목소리가 평온하게 제 이복동생의 죽음을 말했다. 공작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카드리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공의 딸에게 미쳐 있기 때문입니다.”

“…….”

“맹세컨대, 9황자가 공의 딸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이 9황자를 죽이라 해도 저는 그를 죽이려 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파사칼리아가 아닌, 공의 다른 딸이었다면요.”

카드리어는 낮게 웃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파사칼리아가 9황자가 아닌 그 누구를 사랑했든, 그 누군가는.”

“…….”

“심지어 9황자가 아닌, 저와 배가 같은 모후의 귀한 아들들이라 하더라도 저는 지금의 9황자와 똑같이 대했을 겁니다.”

“…….”

“그 남자가 제가 아니라면.”

공작은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카드리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공께서 저를 한심하다, 어리석다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전하, 불필요한 숙청은 피하시는 것이, 언제나 전하께 이롭습니다.”

“질투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황태자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제 치부를 드러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지독하게 뒤엉킨 고리였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순식간에 단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고작 몇 개의 마음. 에델가르드 공은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속이 가장 무서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으며 카드리어를 불렀다.

“전하.”

“그래서 공께서는 어떤 정치적 카드로도, 그 한심한 불안을 없애주실 수는 없으십니다.”

“9황자는-.”

“-공께서 이렇듯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싫은 것은.”

“…….”

“에델가르드가 9황자를 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가 아니라, 공이 파사칼리아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

“파사칼리아의 마음일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카드리어의 입매에 걸려 있던 유려한 미소가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카드리어는 공작에게서 몸을 돌리며, 건조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므노비스 출정은 황자에게 명예가 될, 폐하의 뜻입니다.”

“…….”

“이 편지는 직접,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파사.”

클라우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제 누이의 뒷모습을 심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작게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인영은, 금방이라도 방 안의 어둠에 삼켜질 듯 위태로웠다.

“이젠 오라비도 돌아보지 않을 참이야?”

애써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건 클라우스가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거야. 너도 이리 철없게 굴 나이는 지났어, 파사.”

“…….”

“대체 어머니가 며칠째 너 때문에, 얼마나…….”

“…….”

“파사.”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클라우스가 파사칼리아의 어깨를 잡아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렸다. 파사칼리아의 몸이 힘없이 클라우스의 손길에 허물어지듯 돌려졌다.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듯 달싹이던 클라우스의 입술이 멈칫 다물렸다.

파사칼리아는 울고 있었다. 시뻘게진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져 파사칼리아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울고 있으면서도 마치 제가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멍한 시선과 마주하자 클라우스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클라우스의 손이 파사칼리아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파사, 도대체…….”

“오라버니.”

며칠 만에 겨우 듣게 된 누이의 목소리였다. 클라우스가 깊은 한숨을 삼키며 파사칼리아의 정수리에 입 맞추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그래, 파사. 말해 봐.”

“그가, 나를…….”

“응.”

“미워하면 어떡하지…….”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그마저도 조금 거칠게 갈라졌다. 클라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파사칼리아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며 얕게 흐느꼈다.

클라우스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 황자를 말하는 거야?”

“그냥, 그가 날 미워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럴 줄 알았어.”

“…….”

“그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살아만 있으면, 죽지만 않으면, 그럴 수만, 있으면, 난 아무것도 상관없을 줄…….”

“그런데.”

“날 증오할 거야.”

“파사.”

“그는, 날 증오할 거야.”

클라우스는 말없이 몸을 숙여 파사칼리아를 꽉 껴안았다. 파사칼리아가 클라우스의 어깨너머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도 없는데.”

생전 처음 듣는, 절망으로 넘실대는 누이의 목소리였다. 클라우스는 문득 목 뒤를 싸늘하게 스치는 불길함에 덜컥 겁이 나 고개를 들었다. 에델가르드 공은, 자신들의 아버지는 모든 것이 끝났고,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했지만…….

어쩌면, 제 누이에게 이보다 더 깊은 나락이 있다면.

“파사, 시간이.”

“…….”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리란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

파사칼리아는 클라우스의 눈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언젠가는 너와, 그를 구해 줄 거야.”

클라우스는 마치 잠든 것처럼 미동 없이 고요한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는 싫을 것이다. 파사칼리아가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클라우스가 몸을 돌렸다.

돌아선 클라우스의 시선이 닿은 것은 파사칼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가 아닌, 책상 위로 어지러이 놓여 있는 편지들이었다. 클라우스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편지들을 한참 응시했다.

클라우스가 그 편지를 집어 든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넌 버려진 거야.”

콘스탄체는 그렇게 말하고 차게 웃었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손을 뻗어 제 앞에 던져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에르가넷의 아들과, 에델가르드의 파사칼리아라……. 재밌었어. 꽤 파격적으로.”

콘스탄체가 다리를 꼬며 비아냥거렸다. 루드비히는 별다른 대꾸 없이 콘스탄체를 흘깃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내리며 편지 위에 쓰인 단 한 줄의 통보를 응시했다.

미안하다. 용서하지 말라. 루드비히의 손끝이 파사칼리아의 글씨 위를 느릿하게 쓸었다. 루드비히의 눈가가 콘스탄체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루드비히는 눈을 내리감았다.

“네 손을 타기엔 지나치게 고귀한 계집이지. 파사칼리아 그 계집은 황족보다 더 황족 같은 년이니까.”

콘스탄체는 마치 루드비히의 신경을 건드리려는 듯 부러 파사칼리아를 저속하게 비꼬았다. 그녀는 본래 파사칼리아에 대한 악의라곤 한 점도 없는 여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루드비히에 대해 감히 카드리어의 비가 될 여자를 주제넘게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파사칼리아는 제 동생이 일방적으로 눈독을 들였다고 해서 단번에 순응해야 할 정도의 위치도 아니었고, 그저 남들 하듯 저 하고 싶은 대로 연애 한 번 했을 뿐이다.

오히려 콘스탄체는 파사칼리아를 이해했다. 다만 상대를 선택한 결과가 어리석었을 뿐이다. 차라리 언제라도 조용히 버릴 수 있는, 아주 보잘것없는 남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혹은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대단한 남자였다면.

그러나 루드비히는 황제의 아들이고, 또한 죄인의 아들이었다. 콘스탄체는 제 비아냥에도 늘 그렇듯 동요 없이 앉아 있는 루드비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를 쯧 찼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넘볼 걸 넘봐야…….”

“감사합니다.”

“뭐?”

뜬금없이 떨어진 인사에 콘스탄체가 조금 아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편지를 친히 제 손에 전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콘스탄체는 잠깐 멍하니 루드비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감사함 이외에는 묻어나지 않는 얼굴이다. 콘스탄체가 미심쩍은 듯 콧등을 찡그렸다. 루드비히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절 버리는 이 작은 편지 한 조각조차 제게 전해질 수 없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카드리어는 이 작은 편지조차 루드비히에게 닿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조차 파사칼리아의 흔적이라 생각해 그랬다면 차라리 그 질투심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카드리어는 굳이 본인의 눈으로 보라고 괴롭히듯 들이미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다. 콘스탄체는 제 동생을 잘 알았고, 그만큼 이해하지 못했다.

카드리어는 그저 더 캐묻는 콘스탄체가 귀찮은 듯 편지를 던져주고, 그 짧은 것 다 읽거든 알아서 태워 버리라고 말했다. 사람의 성정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에 의해 통치자로 길러진 카드리어는 본디 사람을 치밀하게, 혹은 사소하게 괴롭히는 취미가 없었다. 그것이 제게 생전 처음 모멸감을 안겨 준 제 이복동생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놈이라 할지라도.

그리하여 루드비히는 저 편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콘스탄체의 아주 사소한 악의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콘스탄체는 짧게 실소했다.

“새롭게 비꼬는 법을 배운 모양이구나.”

“그리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저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루드비히는 담담하게 대꾸하고 편지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이것이 제가 받을 수 있는 그녀의 마지막 손길이니까요.”

루드비히는 잦은 손길에 벌써 모서리가 조금 헤져 버린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이 한마디를 쓰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미안하게도 루드비히는 제가 이렇게 버려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에게도 명예로운 일이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그나마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미안. 용서.

그 모든 단어는 루드비히에게 생소한 말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거나, 용서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죄인의 아들이었고, 그리하여 그 역시도 죄인이었으며,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 물론 루드비히에게도 원망할 만한 사람은 몇 있었다. 제게 죄의 굴레를 씌운 어미가 그러했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 제 형이 그러했고, 자신을 외면하고 제 형만을 구명한 외조부가 그러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미안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드비히의 용서 또한 쓸모없는 것이었다. 파사칼리아가 없었던, 이전의 제 모든 생에서는 그랬었다.

루드비히는 쓰게 웃으며 파사칼리아의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자신을 버리는 순간조차 세상 그 누구보다 다정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녀의 가장 잔인한 말조차 자신에게는 달콤한 것이었다. 그는 종이가 접힌 선을 손끝으로 쓸다가 이내 종이를 소중하게 접었다.

과분한 여자.

알고 있었다. 애초에 과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평생토록 해 온 것이 그것이었다. 제 위치, 제 주제, 제 분수를 아는 것. 그러나 루드비히는 처음으로 그것을 망각했다. 알면서도 망각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실상은 그 과분함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드비히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황자라고. 그 대단한 여자 곁에 서기 위해서, 루드비히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제가 황자니까, 제게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황제에 의해 바닥까지 거꾸러진 주제에, 제가 그녀 곁에 설 수 있는 이유를 황제에게서 찾았었다. 돌아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황제의 아들이니까, 어쩌면 고귀한 당신 곁에 설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그는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벌게진 눈이 허공을 노려보다, 이내 찬찬히 가라앉았다. 루드비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협실을 나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응접실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던 한 노신사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루드비히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웃었다.

“루드비히.”

“브나리오 백.”

루드비히가 딱딱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손자의 이름을 부른 것이 무색하게 금세 벌어지는 거리에 브나리오 백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 할아비도, 황자 전하라 불러 드리리까?”

루드비히는 말없이 묘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브나리오 백을 바라보았다. 브나리오 백이 초조한 얼굴로 침을 삼키고, 루드비히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므노비스 회전에 출정하신다 들었습니다.”

“…….”

“……이 할아비가 원망스럽습니까?”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루드비히가 이내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브나리오 백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9황자,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했던 이 할아비가, 이 못난 할아비가 원망스러울 것 압니다.”

“…….”

“그러나, 이번의 출정은 황자에겐 오히려 잘된 것입니다. 이 할아비에게 서운하셔도, 원체 총명하시니 황자도 잘 알고 있겠지요. 황태자가 있는 수도보다는 차라리 전쟁터가 안전하리란 것을요. 황자는 훌륭한 군인입니다.”

“……조부님.”

“이 브나리오는 황자께서 잘 해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잠시만 버티시고, 버텨 내시고……. 이번 회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된다면, 황제께서도 전공戰功이 있는 황자를 더 이상 함부로 대하실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저를 황자라 부르십니까.”

브나리오 백은 순간 루드비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루드비히?”

“제가 어찌 황자입니까.”

낮게 뇌까리듯 되물은 루드비히가 기묘한 얼굴로 웃었다. 브나리오 백이 굳은 채로 서 있자, 이번에는 루드비히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브나리오 백에게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 손주를 외면하셨습니까.”

“……루드비히.”

“그래서, 이 나를…….”

“…….”

“당신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셨죠.”

브나리오 백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잘게 떨리며 얼굴을 가렸다.

“루드비히, 그것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내가, 고작 열두 살이었던 내가.”

“…….”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들 앞에서 그 귀한 발들에 차이고, 침을 맞고, 맞고도 잘못했다 무릎 꿇고, 무릎 꿇고도 다시 그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처박히고 있던, 나를.”

“…….”

“당신은 분명 그때 나를 봤어요. 그렇죠.”

브나리오 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이.”

“…….”

“조부님의 그 눈이, 바닥에 처박힌 나를 한 번 보고.”

“…….”

“내 손등을 짓밟고 있는 5황자의 얼굴을 한 번 보고.”

“…….”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었죠. 바로 지금처럼.”

루드비히가 브나리오 백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 브나리오 백의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지독한 회한과 수치심으로 뒤엉킨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

“……루드비히.”

“모든 것은, 카스트로 때문인데도. 당신의 손이 구원한 것은 오로지 카스트로 하나였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카스트로와 다른 게 뭘까.”

“……루드비히, 그것은 내 과오다.”

“도대체 카스트로와 나는 무엇이 다르기에 내 조부께서는, 날 그렇게나 아끼신다던 내 조부께서 저렇게 날 돌아보지도 않고 가실까. 이유가 뭘까.”

“제발 너마저 네 어미를 의심치는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더군요.”

“제발, 루드비히.”

“……내가, 창녀의 자식이니까.”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뜨겁기도, 차갑기도 했다. 루드비히의 손에 잡혀 있던 브나리오 백의 손이 힘없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브나리오 백이 날카롭게 실소했다.

“……폐하께서, 끝내 그리 말씀하셨는가.”

“내가 얼마나 더 최악의 존재였어야 했는지, 조부께 한번 묻고 싶었습니다.”

“루드비히,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죄인으로 죽은 지 십 년이나 된 당신의 딸입니다. 딸을 감싸주고 싶은 그 심정은 이해하나, 더 더럽혀질 명예가 그녀에게 있기는 합니까.”

“정말로, 그것만은 아니다. 믿어다오. 네 어미는 많이 부족한 아이였다. 주제도 몰랐고, 욕심은 컸지. 그러나 적어도 네 출생에 부끄러울 일만은 하지 않았다. 황자로서의 긍지를 스스로 내던지는 짓은 마라. 네가 얼마나 귀한 혈통을 이었는지를 의심해서는…….”

“황자로서의 긍지라.”

루드비히가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무표정하게 일자로 굳어 있던 입매가 느릿하게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재밌는 이야길 하시는군요. 이 손자가 개처럼 네발로 기는 모습까지 보셨더라면, 그런 말씀은 죽을 때까지 하지 못하셨을 텐데.”

“……루드비히.”

늙은 백작의 목소리는 겨우 목구멍을 삐져나온 듯 힘없이 갈라졌다. 그러나 다시 마주친 시선이 형형했다. 루드비히는 말없이 제 조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황제의 아들이다.”

“혹은, 황제가 아닌 누군가의 아들일 수도 있겠죠.”

“……루드비히, 제발 너마저 네 어미를 모욕하지 말거라.”

루드비히의 날 선 눈매가 브나리오 백의 진의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브나리오 백이 힘없이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받쳤다.

“폐하의 총애를 받았던 네 어미는, 그 총애만큼이나 끊임없이 모함을 받았었다. 카스트로에 이어 너를 임신했을 때부터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추문들이 르네비어를 낳았을 무렵에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

“…….”

“황제가 네 어미를 믿지 못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게다. 그리고 네 어미는 점점 좁아지는 입지에 점점 여유를 잃어 갈 때였지. 황태자를 노리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일 것이다.”

“그 ‘추문’이 사실인지 모함인지를, 조부께서 어찌 아십니까.”

한 톨의 신뢰도 스며 있지 않은 목소리에 브나리오 백은 쓰게 웃었다.

“그래, 어쩌면 진실은 죽은 에르가넷만이 알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에르가넷을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

“네 어미가 다른 놈의 씨나 품기엔, 황제를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루드비히는 제 앞에 쏟아진 편지들을 바라보며 순간 숨을 멈췄다. 클라우스가 그런 루드비히의 얼굴을 조심스레 바라보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편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루드비히에게 건넸다.

루드비히가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저는 지금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전하.”

루드비히는 클라우스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제 손에 쥐어진 편지를 폈다. 클라우스가 나직하게 한숨을 뱉었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하얀 종이들은 하나의 편지로 완결된 것도, 그저 메모처럼 구겨진 종이에 아무렇게나 적힌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제 눈앞의 남자에게 누이가 그렇게나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란 것이었다. 그 절절한 이야기들에는, 그녀의 그 모든 말들이 저 남자에게는 하나도 닿지 않으리라는 절망이 때때로 묻어났다.

그리고 여동생을 아끼던 클라우스는 끝내 파사칼리아의 그 절망을 인내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것을 알면서도 클라우스는 결국 제 누이의 편지들을 하나씩 손에 쥐었다. 차마 결심이 서지 않아 제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고도 클라우스는 다시 이 편지들을 쥐었다. 물론 지금의 이 새벽이 오기까지는, 몇 번의 새벽이 더 필요했지만.

클라우스는 루드비히의 얼굴을 얼마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이 방에 들어서며 보았던 젊은 황자의 단단하고, 잘 벼린 날처럼 날카로운 첫인상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다시는 볼 수 없는 제연인의 연서에 형편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청년이 초라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클라우스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지금쯤 약에 취하듯 잠들어 있을 누이를 떠올렸다. 어쩐지 비슷한 얼굴이다. 속이 문득 갑갑해졌다. 클라우스는 조금 먹먹한 숨을 무겁게 삼키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건 저 혼자 주제넘은 판단에 따라 행동한 일입니다.”

제멋대로 편지들을 전달해 준 클라우스의 행동은 황자가 달리 해석한다면, 자칫 기대를 심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파사칼리아에 대한 것이든, 혹은 에델가르드에 대한 것이든 간에.

“제 이런 치기 어린 행동과는 별개로 앞으로도 황자 전하에 대한 에델가르드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지금의 상황 역시도 마찬가지고, 저 또한 다시는 전하께 이런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클라우스는 부러 더 쌀쌀맞을 정도로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클라우스의 말에도 미동 없이 한참 동안 편지만 들여다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무엇을 위해 이리하십니까.”

시선은 여전히 편지의 어느 부분에 못 박힌 듯 머무른 채로 루드비히는 그렇게 물었다. 클라우스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황자의 목소리였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거칠었다. 클라우스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클라우스의 눈길이 루드비히 앞에 쌓여 있는 편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조금 더 올라가 루드비히의 손에 들린 편지로, 이윽고 루드비히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리란 건 알지만, 적어도.”

“…….”

“당신의 증오 속에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공포 정도는, 제 누이에게서 내려 주고 싶습니다.”

편지를 내려다보는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클라우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제 누이는 평생 싫은 일 한 번 하지 않고, 가져 보지 못한 것이 없는 아입니다. 그런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전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희생했습니다. 그러니 겁이 났을 겁니다. 전하를 위해 전하를 버릴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던 모양입니다. 전하를 위해 전하의 미움까지 안고 있기에는, 아직 그 아이가 어립니다.”

“…….”

“제 누이의 본의가 없었다는 것은 구구절절 설명 늘어놓지 않아도 이미 그 편지를 펴 보신 순간 바로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루드비히는 말없이 천천히 손끝으로 파사칼리아의 글씨를 쓰다듬었다. 클라우스는 더 이상의 말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클라우스는 자신을 보지 않는 루드비히를 얼마간 더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예를 취하고 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클라우스가 여섯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전해 주십시오.”

클라우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루드비히는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그제야 루드비히와 눈이 마주친 클라우스는, 그의 흰자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동안 울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반쯤 망가진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있자니 입안이 썼다.

“제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전해 주십시오.”

“…….”

“그리고 성년, 축하한다고. 많이 미안하다고. 아주 많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한다고도. 아마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루드비히는 나직하게 웃었다. 클라우스는 덩달아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루드비히는 시선을 내려 다시 편지를 응시했다.

황제의 아들로 죽겠느냐, 창녀의 아들로 살겠느냐.

루드비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조금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누이가 날 사랑한대요, 여전히. 파사가, 나를…….”

“…….”

“에델가르드 경.”

황제의 목소리와 브나리오 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뒤엉킨다. 너는, 틀림없는 황제의 아들이다. 그렇게 칼날로 머릿속을 헤집는 것처럼 끊어지지 않던 잡음이,

“말씀하십시오.”

“나는, 그것만으로…….”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문득 뚝 끊어졌다.

“……이제야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치 오랫동안 목을 졸렸다 풀려난 듯, 어떤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루드비히는 기묘한 행복이 서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클라우스는 덩그러니 서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 후, 보름이 지났다.

루드비히는 황제의 칙명을 받고 므노비스의 최전선으로 출정했다. 온종일 황자의 출정 소식으로 온 수도가 시끄러웠다.

므노비스 회전은 제국이 바라는 일정한 궤도를 벗어난 상태였고, 펠로베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므노비스 전체에 공습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9황자의 출정은 으레 어느 전쟁에서나 그렇듯 황제의 자식들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어 영웅 칭호나 채 가던, 그저 그런 의례 행사로 보기엔 지나친 감이 적잖아 있었다.

실상 황제는 므노비스 회전이 길어지며 조금씩 민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아들을 최전방에 밀어 넣는 것보다 좋은 제스처는 없으리라. 황제가 제 아들을 직접 사지에 밀어 넣는 것보다 더한 성의가 있을 수는 없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가장 귀한 황족이 므노비스의 최전선에 있다.

수도의 커피하우스들을 가득 메운 젠트리와 노동자들이 뜨겁게 열광했다. 황제에게서 고개를 돌렸던 제국인들은 다시 황제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황자가 수도의 남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전쟁 채권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러나 그 눈물겨운 황제의 성의에는 작은 의혹도 따라붙었다. 그 아들이 죄인 에르가넷 드 브나리오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또한 출정하는 황자의 수행원들이 한없이 단출했다는 점에서 몇몇 귀족들의 의혹은 확신이 되었다. 이윽고 확신은 점점 커져 나갔다.

황제가 제 아들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그날 밤, 파사칼리아가 욕조에서 손목을 그었다.

파사칼리아의 하녀가 파사칼리아를 발견한 것은 자정을 조금 넘긴 무렵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문가에 우뚝 서 있던 하녀는, 욕조 쪽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2시간 전 따뜻한 욕조를 준비해 달라고 했던 파사칼리아는 그 욕조 속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붉은 수면 위로 본래는 연하늘색이었던 네글리제가 붉게 물든 채 떠다녔다. 마치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미동 없는 가슴과 수면 위에 무력하게 떠오른 하얀 팔에 하녀는 선득한 숨을 삼켰다. 하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 파사칼리아의 코끝에 댔다.

“제발, 제발, 아가씨…….”

하녀의 절박한 중얼거림에 응답하듯, 미약한 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숨을 크게 몰아쉰 하녀가 그 길로 공작부인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파사칼리아의 모친 헬레니아는 창백한 얼굴로 파사칼리아의 곁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자살을 기도한 제 딸보다도 더 파리한 안색이었다. 헬레니아의 눈길이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다, 붕대로 감긴 손목으로 움직였다. 의원이 치료하고 처치한 것이 채 10분도 되지 않았는데도 두텁게 감긴 붕대 위로 붉은 피가 드러났다.

헬레니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이마를 겨우 짚고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은 제 몸을 지탱했다.

“황녀 전하, 이 욕조는…….”

“그대로 둬.”

헬레니아는 하녀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대충 손짓해 그녀를 나가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녀가 방에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헬레니아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방으로 들어서던 에델가르드 공이 핏물로 가득한 욕조 앞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헬레니아의 입매가 뒤틀리듯 일그러졌다. 에델가르드 공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헬레니아와, 그 뒤로 보이는 파사칼리아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헬레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남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이게 다, 무슨…….”

“당신 때문이야.”

“헬레니아.”

“내 이름 부르지 마!”

공작이 헬레니아의 어깨를 잡으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파사가 자고 있어. 진정해.”

헬레니아가 잔뜩 날이 선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 당신 눈엔 저게 자는 걸로 보여?”

“…….”

“내가 미친년처럼 여기서 발광을 해도 우리 딸은 이틀은 족히 못 깰 거야. 왜? 죽으려고 제 손목까지 그었으니까!”

공작이 낮게 침음을 삼켰다. 헬레니아의 벌게진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헬레니아의 어조가 깊고 절박해졌다.

“내 딸이, 내 딸이 바랐던 건 단 하나였잖아.”

“헬레니아.”

“그 하찮은 놈 하나 살려 주면 된다고 했잖아. 그거 하나면 됐다고 했잖아! 당신이 할 수 있는 그 수 많은 일 중에!”

“……9황자는, 9황자가 그렇게 된 건, 폐하의 뜻이야. 내가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아.”

“당신이 원하면 이루지 못한 적 있어?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든…….”

“겨우 그런 문제가 아냐.”

“아니. 당신은 원하는 걸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적 없어. 당신은 결국 그렇게 나까지 가졌잖아. 안 그래?”

헬레니아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이죽거렸다. 에델가르드 공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지듯 힘없이 떨어졌다.

“당신은, 9황자를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어.”

“헬레니아.”

“그럼에도 9황자가 저 사지로 끌려간 건, 당신에게는 애초부터 파사와의 약속을 지킬 마음 따윈 없었기 때문이지.”

“……파사를 위해서는 할 만큼 했어.”

“더 할 수 있었지만, 더 감당하기는 귀찮았겠지. 알아.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당신, 지금 나를 마치…….”

“…….”

“당신 부황처럼 말하는군.”

공작이 부드러운 표정을 가면 벗듯 지우고 가늘어진 눈으로 비식 웃었다.

“그 사내는 선황께서 죽이신 게 아니라 제 스스로 죽은 거야, 헬레니아.”

“…….”

“당신에게 감히 닿을 수 없는 제 주제 덕분에.”

헬레니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묘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야말로 9황자에게 그 사람을 덧씌운 건 아니고?”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황녀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혹적이었으나 그녀의 날카로운 성정처럼 형형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비수처럼 날아든 그녀의 말에 공작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당신, 죽이고 싶었잖아. 그 사람.”

“…….”

“당신이 훨씬 잘났는데, 당신이 훨씬 고귀한데, 나는 당신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 사람만…….”

“그만해.”

“카드리어가 꼭 당신 같아?”

“젠장, 그 입 다물어!”

“당신이야말로 정신 차려!”

헬레니아가 떨리는 손을 들어 침대를 가리켰다. 공작의 시선이 헬레니아의 손끝을 따라 파사칼리아에게로 옮겨갔다.

“파사칼리아는 내가 아냐. 젊은 날의 당신이, 아무리 해도 가질 수가 없었던 그 황녀가 아냐.”

“…….”

“파사는 당신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우리 딸이야.”

“날 정신 나간 놈 취급하지 마.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파사가 죽어 가, 레이노어.”

헬레니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공작의 가슴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몇 년 만에 불리는 제 이름에 공작이 멈칫 몸을 굳혔다.

“당신이 9황자를 살려.”

“출정은 돌이킬 수 없어.”

“그 망할 므노비스로 가는 걸 되돌리라는 게 아냐. 어차피 출정은 포장이지. 그놈이 펠로베르놈들한테 죽을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오라버니에게 있을 것 같아?”

“폐하의 방식이라면, 9황자는 므노비스로 가는 길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걸 막아.”

“그럴 순 없어.”

“아니, 당신은 그럴 수 있어.”

“그럼 싫다는 대답이면 족한가?”

“아니, 당신은 9황자를 살려야 할 거야.”

헬레니아가 레이노어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파사칼리아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어.”

레이노어가 멍하니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이번엔 내가 그놈을 죽이고 싶어졌는데.”

“참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헬레니아가 담담하게 대꾸했으나, 레이노어는 헬레니아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겨우 발걸음을 옮겨 파사칼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맙소사, 파사…….”

레이노어가 가까이서 바라본 파사칼리아의 얼굴은 목이 졸려 죽은 시체처럼 파리했다. 머리끝까지 뜨겁게 차올랐던 분노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가라앉았다.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레이노어가 시선을 조금 내려 파사칼리아의 손목을 응시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감싼 붕대 위를 어루만졌다. 그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내 레이노어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레이노어가 파사칼리아의 곁에서 표정 없이 몸을 일으켰다.

“9황자는 살 거야.”

헬레니아가 반색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이어 나온 레이노어의 말에 멈칫 멈춰 섰다.

“그리고 황제가 되겠지.”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에델가르드가 9황자를 진짜로 살린다는 건 그런 거야. 출정에서 제외시키고, 므노비스의 암살자들이나 막아 주는 게 그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내가 그를 한 번 살려 주면, 카드리어는 그를 평생 죽이려 할 거야. 그가 정말로 죽을 때까지. 내가 그를 살리려 했으니까.”

“…….”

“딸아이 신파극에 휘말려서 어설픈 동정 한 번 던지는 게 9황자의 평생을 따라다닐 테니까. 그래서 내버려 뒀지. 차라리 지금 곧바로 죽는 게 행복할 인생 같아서.”

레이노어가 파사칼리아에게서 몸을 돌렸다. 공작의 서늘한 눈매가 헬레니아를 훑었다.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됐군. 이제 만족해?”

“…….”

“난 당신 말대로, 내 딸을 너무나 사랑해서 내 딸이 사생아나 가진 창녀로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게 둘 순 없어. 내 딸의 자식이 사생아인 것도 참을 수 없어. 그리고 그 신세를 면하려면 9황자는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내 딸과 그럴듯하게 결혼해야 할 거고, 그렇게 내 딸과 결혼한 놈이 하루살이마냥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라 내 딸이 평생을 전전긍긍 불안 속에 사는 것 역시 볼 수 없으니.”

“…….”

“내가 그 위협을 없애야겠지.”

“그래서, 9황자를 황제로 만들겠다?”

“카드리어든, 그 누구든, 9황자가 아닌 황제는…….”

“…….”

“누구라도 9황자를 죽이려 할 거야.”

레이노어는 카드리어가 9황자를 말하며 내비치던 깊은 살의를 기억했다. 그것은 9황자가 죽지 않으면 결코 해갈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파사칼리아의 곁에 서 있는 9황자라면 더더욱. 그나마 지금은 저 혼자 조용히 속으로 삭일 수 있는 정도이니 황제가 나서서 모양 좋게 포장해 줄 수 있는 것이지, 파사칼리아의 임신이 알려진다면 그 최소한의 여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파사칼리아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파사칼리아의 목숨까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레이노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이미 파사칼리아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황제가 에델가르드 측에 아무런 압력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오로지 황태자가 파사칼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황태자가 에델가르드를 가지고, 에델가르드가 황태자의 편에 서리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황제의 그 모든 기대에 어긋나게도 파사칼리아는 이미 9황자의 아이를 가졌다. 제 자식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칼을 들이대는 황제가 고작 조카딸에게 아량을 베풀 리가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황태자가 완벽히 파사칼리아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거나, 혹은 그 사랑이 완벽한 증오가 된다면, 아마도 황제는 파사칼리아를…….

레이노어가 씹어뱉듯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먼저 죽여야지.”

레이노어에게 나직하게 대꾸한 헬레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지금 황제를 간택한 거야. 그것도 아직 계승권을 가진 현황現皇의 누이 앞에서.”

“반역을 도모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아드님을 올려 드린다는 것뿐인데.”

“그래,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

“……괜찮은가?”

“난 애초에 상관없어. 알잖아.”

헬레니아는 레이노어의 뜻에 동의한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연인의 강요된 죽음 이후로 제 아비와 지금의 황제인 오라비를 증오했다. 그것은 실상 그들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증오 덕분에 레이노어는 헬레니아를 가질 수 있었으니 지금의 합의는 조금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노어는 늘 그래 왔듯 모른 체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니아 역시 그런 그를 모른 체해 주었다. 레이노어가 헬레니아를 홀로 사랑하는 만큼 헬레니아는 그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평생을 함께해 온 방식이었다.

헬레니아가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며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 딸은 황후가 될 거야.”

“그래.”

“결국…….”

헬레니아의 말끝이 씁쓸하게 흐려졌다. 헬레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레이노어가 말했다.

“파사는 당신 어머니처럼 되지 않을 거야.”

“알아. 9황자도, 파사도, 내 부모와는 달라.”

“…….”

“그리고 우리와도 다르겠지.”

펠로베르의 기세가 제법 흉흉했다. 적당히 받아넘기며 시간 좀 채우다 협상하려던 그란토니아의 입장에서는 꽤 성가신 일이었다. 므노비스는 그란토니아가 전력을 쏟기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땅이었고, 멍청하게 뺏기기엔 상대가 펠로베르라 곤란했다. 루드비히가 므노비스에 도착한 것은, 초반의 열기가 조금 식은 탓에 각지에서 소규모 전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즈음이었다. 많은 보병들이 멀쩡하게 걸어 돌아오는 모습은 일견 평화로워 보였으나, 그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평화에 더 불안해 하는 이도 분명 있었다.

루드비히가 도착한 것은 그 일시적인 평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루드비히는 도착한 지 닷새 만에 소규모 전투를 벌써 네 번이나 치렀다. 황자의 불필요하고도 어리석은 간섭을 지레 염려한 지휘관의 지시로, 루드비히는 막사에 앉아 있는 시간 없이 바쁘게 바깥으로 돌았다. 루드비히가 그렇게 쓰이는 곳은 주로 겉으로 보기에 쓸모없고 소모적인 전투였다. 상부에 보고 시에는 황자의 안전을 충분히 고려한 별 볼 일 없는 전지戰地이되, 실제로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꽤 위험한.

공을 세워도 공이 아니고, 죽으면 저 혼자 병신이 되는 것이다. 루드비히는 참모장이 자신을 바라볼 때면 으레 짓는 떫은 표정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웃음이 사라지자 남자의 얼굴 위에는 지독한 피로만이 남았다. 실상 그는 닷새째 한 시간도 잠들지 못했다. 밤이면 황제가 보낸 사신死神이 이따금 들이닥치곤 했으므로. 그렇다고 이제 와 죽기 싫어 발버둥 한번 쳐 보겠다 오기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바라는 대로 보잘것없이 죽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아들로 죽기로 그가 결심한 것은, 고작 제 막사 안에서 개죽음이나 당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루드비히는 어쩌면 사실은 그것조차 제 허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 허울뿐인 이름만큼은 가장 극적인 결말과 함께 사서의 한 줄로 남기를.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떠올렸을 때, 그 마지막 기억이 저 한 줄과 같기를.

루드비히가 손을 들어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어차피 다 병신 같은 짓이었다. 자신은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치 제가 곧 죽을지도 모르고 있는 힘껏 바르작거리며 죽어 가는, 이미 짓뭉개진 벌레처럼.

루드비히는 싸늘한 시선으로 막사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제보다도 더 조용한 기척이었다. 루드비히의 가늘어진 눈매가 조금 옆으로 움직여 밤바람에 펄럭이는 두꺼운 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그 기척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필요할 시간을 가늠하며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브르saber, 베는 것을 주로 하되 찌르는 공격도 하기 좋게 길고 뾰쪽한 모양을 한 검는 언제나 그의 지척에 있었다.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막사 속에서 드러난 칼날이 새하얀 빛을 흩뿌리며 소리 없이 허공을 그었다.

그렇게 입구 근처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바깥에서 느껴지던 예의 그 기척은 루드비히의 예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루드비히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남자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루드비히의 칼끝은 남자의 목을 긋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루드비히가 그대로 멈추었다.

바깥의 어스름한 빛을 받고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였다.

“……생각보다도 더 거창한 환영이군요.”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루드비히가 칼을 거두며 깍듯하게 사과했다. 루드비히의 사과에 클라우스가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밤손님으로 오해받기 좋은 시각에 무례하게 찾아뵈었으니 오히려 제가 죄송해야 할 겁니다.”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하곤 마치 제 방처럼 중앙으로 걸어가 불을 밝혔다.

막사 안이 서서히 밝아졌다. 자그마한 초 위로 타오르는 불빛은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몸에 진 음영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클라우스가 루드비히 쪽을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당분간 밤손님을 맞이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

“쓸모없는 전투에 차출되어 굴러다니실 일 역시 없으실 겁니다. 전하의 상관인 우익 지휘관 휘넬 백은 그리 유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눈치 하나는 빠른 편입니다. 조치해 두었습니다. 그가 전하께 더 이상의 불이익을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까지 루드비히가 신경 쓰기엔 클라우스가 이 막사 안에 서 있는 상황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클라우스의 등을 응시했다.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후방에서 자리보전만 충실히 하시고 계시면 됩니다.”

“에델가르드 경.”

“공작께서는 전하가 이곳에 오래 계시게 두지 않으실 생각이십니다. 그러니…….”

“경.”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클라우스를 불렀다. 클라우스가 말을 멈추고 뒤돌았다. 파사칼리아가 자상하고 다정한 성정이라던 그 오라비의 얼굴이라기엔 꽤 살벌한 얼굴이 드러났다. 루드비히가 침착하게 물었다.

“경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살아남으실 겁니다.”

“……내가, 지금 그 말들을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전하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운 말은 아니리라 생각했습니다.”

남자의 선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빈정거림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루드비히가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부황께선 내가 죽길 원해요.”

“공작께선 당신을 살려야 합니다. 원하고, 원하지 않을 수 있는 단계를 지나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루드비히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혹여나 제가 에델가르드에 헛된 기대를 품지는 않을까 싶어 몇 번이고 냉랭하게 착각 말라 말했던 클라우스였다. 클라우스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경, 도대체…….”

“파사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루드비히의 숨이 그대로 멈췄다.

“당신의 아이를 가진 채로.”

“……그녀는 무사합니까?”

“다행히도.”

“그, 아이는…….”

“불행히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루드비히는 손을 들어 파리하게 질린 제 얼굴을 몇 번 거칠게 쓸었다. 클라우스의 싸한 시선이 루드비히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대체, 대체 왜 그런 짓을…….”

“그가 죽기 전에 먼저 죽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클라우스의 음성이 피곤하게 가라앉았다. 클라우스에게는 황자의 충격을 추슬러 줄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연애 놀음에 시선을 맞춰 주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루드비히가 벌게진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리 말할 겁니다.”

클라우스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한숨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파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에델가르드 공께서 나를 살리시려는 겁니까?”

“그런 단순한 이유뿐이라면 저도 좋겠군요. 전하 한 몸 살려서 수도로 데려가 파사와 결혼시키면 그만이니까.”

“단순하지 않다면.”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황태자께서는 이 모든 걸 가만히 두고 보시진 않을 겁니다. 정확히는, 황제 폐하께서요.”

“…….”

“그리고 황위를 이을 다음 폐하 역시 황태자 전하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할 겁니다. 당신의 곁에 파사칼리아가 있고, 파사칼리아의 뒤에 우리가 있다면 말입니다.”

“…….”

“만약 아이가 없었더라면, 차라리 우리가 당신을 이곳에서 편안하게 죽게 해 줄 수도 있었겠죠.”

루드비히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사실 그 모든 걸 차지하더라도.”

“…….”

“이대로는 파사칼리아가 위험합니다. 지금 제겐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에델가르드의 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를 가지기도 했죠. 폐하께서 지금까지 파사칼리아를 그대로 두고 보신 것은, 오로지 황태자가 파사칼리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황태자의 뒤에 에델가르드가 서 주리라 기대하시기 때문이고.”

루드비히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클라우스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파사칼리아가 당신의 아이를 가진 것이 드러나게 된다면 황태자의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죠. 폐하는 결코 두고 보지 않으실 겁니다. 파사칼리아가 낳을, 에델가르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불필요한 황위 계승권자 역시. 그리고 전하께서 므노비스에서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든, 수도로 들어오든 그 위협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면 공작께선 어째서 굳이 저를 살리시려는 겁니까.”

“적어도 파사칼리아의 곁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당신이 있겠죠. 그 아이도 사생아가 아닐 테고.”

루드비히의 턱이 딱딱하게 다물렸다. 클라우스의 선한 눈매가 날카로운 이채를 띠며 가늘어졌다. 클라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비꼬듯 말했다.

“좀 더 행복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남아도 그녀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아이를 언제 잃을지 모르고, 날 언제 또 잃을지 모르죠.”

“…….”

“내가, 그녀를 망쳐 놨어요. 전부 다. 끝까지 인정하기 싫었지만.”

루드비히가 자조하며 웃었다. 루드비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클라우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작께선 그 불안을 전하가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

“전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요.”

루드비히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번쩍 정신을 차렸다. 경악 어린 시선이 클라우스의 얼굴을 향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태연했다.

“경,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는 아십니까?”

“그도 황제의 아들이다. 황제가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

루드비히가 천천히 뜨거운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전하의 의중을 여쭙듯 말씀드렸지만…….”

“…….”

“전하께서는 황제가 되셔야 할 겁니다.”

루드비히가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채 복잡한 얼굴로 제 곁의 의자를 잡아당겨 풀썩 앉았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다, 이내 클라우스를 응시했다.

“경, 나는…….”

“그리고 그것은 파사칼리아의 아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더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겁니다.”

파사칼리아의 아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더 빨리.

클라우스의 말에 뭔가 더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루드비히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루드비히는 뒤로 고개를 돌려 파사칼리아의 편지가 놓인 책상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막사에 얼마간 선득한 정적이 흘렀다. 클라우스의 발치께를 쳐다보고 있던 루드비히가 다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무렵이었다. 다시 고개를 든 황자의 얼굴에는 불과 몇 분 전 불안함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공작께서는 황태자 전하는 물론이고…….”

루드비히의 눈동자 위로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어스름한 빛을 받고 빛나는 절반의 얼굴과 어둠 속에 집어삼켜 진 절반의 얼굴이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황제 폐하의 치세가 끝나기까지 기다리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거군요.”

담담한 목소리 아래로 진득한 증오가 엉겨 붙었다. 클라우스에게는 보이지 않을 어둠 속 얼굴이 서느렇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제 아버지는 꽤 약은 사람입니다. 건재해 계신 황제를 억지로 끌어내릴 수 있는 위인도 못 되시죠. 하지만…….”

클라우스가 묘하게 말끝을 흐리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황제 폐하의 치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아니, 어쩌면 곧끝나겠죠.”

“백 년간 이보다 황권이 강고했던 적은 없습니다. 감히 누가 폐하를 위협하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아무도 폐하를 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만 스스로 끝나실 겁니다.”

“…….”

“그의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드비히는 숨을 들이켰다.

“폐하께서는 세상이 모르게, 홀로 죽어 가고 계십니다, 매독이라더군요. 9황자 전하의 처리를 서두르신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고 합니다. 비단 전하의 일뿐 아니라, 많은 일을 서두르고 계신다 하더군요.”

“…….”

“아버지는, 공작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러니 딱히 무모한 결정을 하신 것도 아니겠죠.”

클라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픽 소리 내 웃었다.

“아무리 딸이 소중하다 해도 딸 살리겠다고 이미 계신 황제까지 끌어내리실 수 있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지만 모든 시기와 상황이 들어맞고 있고.”

“그러니…….”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죠. 전하가, 우리가 가만히 당할 이유도.”

“…….”

“파사칼리아와, 그 아이가 죽을 이유도.”

이드리안제는 급작스레 죽었다. 황태자가 이렌시아의 대사를 맞이하러 국경으로 떠난 지 고작 나흘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수도의 북문까지 친히 황태자를 배웅할 정도로 건재했던 황제는 접견실의 그 거대한 지도 위에서 쓰러진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황제가 죽고, 황제가 매독을 앓았다는것이 밝혀지자 그의 정부들 중 신분이 낮은 여자 몇 명이 황제를 죽인 창녀로 몰려 곧바로 북의 탑에 가둬졌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이 알려진 새벽, 그리고 그의 정부들이 북의 탑으로 끌려간 이른 아침을 지나 겨우 오후에 가까워졌을 무렵 사태는 급변했다. 황제의 정부였던 비셸리에 백작부인이 궁내부 장관의 집무실의 나타나 제 남편을 밀고한 것이다. 남편은 항상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황제를 독살하고 말았노라고.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오에 접어들기 무섭게 비셸리에 백작은 지하 감옥으로 끌려 들어갔다. 몇 시간의 심문 끝에 비셸리에 백작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 독살 시도에 배후가 있었음을 추가로 진술했다. 단순한 치정 살인이 거대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반역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수사관들은 대체 그 반역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비셸리에 백작은 한참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황태자가 바로 그 반역자다.

저녁이 되었다. 황제가 죽은 지 반나절 만에 수도에 없는 황태자는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황제가 죽은 지 하루가 흘렀지만, 카드리어가 반역자가 되었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이는 다음 계승자가 황위를 승계함에 있어 으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 같은 일이었고, 카드리어는 어차피 곧 수도로 돌아올 것이었다. 카드리어에게 불리한 것이라고는 비셸리에 백작의 진술 몇 마디와 황태자의 필체로 쓰인 서신 몇 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황태자를 진짜 반역자처럼 보이도록 만들기엔 다소 부족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부인이 황제의 정부가 되면서 받은 수많은 혜택과는 별개로 비셸리에 백작은 그 관계를 수치스럽다고 자주 말하곤 했고, 술에 취하면 곧장 황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비셸리에 백작 스스로 황제를 죽일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황태자를 미워할 이유 역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클레이런스 가는 황제의 정부를 법적 부인으로 둔 남편들에게 수많은 돈을 주는 대신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저지른 김에 미운 놈 같이 죽자고 바짓가랑이나 붙잡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상황은 카드리어에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가 수도에 돌아와 의례적인 재판을 받고 나면 금세 풀려 버릴 의혹이었으므로.

황제가 죽은 지 이틀째, 카드리어는 황제의 부고와 함께 자신이 반역자로 몰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제국법에 따라 반역 혐의를 받은 황태자와 그의 수하들은 반란군으로 우선 간주되었고, 그들은 변방에 그대로 묶였다. 반역자로 간주된 자가 그 혐의를 벗는 방법은 오로지 수도에서 재판을 받는 것뿐이다. 그전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발이 묶인 채 자신들이 수도로 이송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도 의례적인 일에 불과했다. 원칙적으로 반역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수도로 이송해야 했고, 제위를 오래 비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불어 비상시국이니만큼 재판이 없어도 추밀원의 의결만 있다면 황태자는 멀쩡하게 제 발로 수도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금방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리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고, 카드리어는 닷새가 지나도록 수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변경에 발이 묶여 계시는데, 므노비스 주둔 병력의 절반을 회군시키다니요!”

“므노비스 회전은 의원들의 생각과 달리 그리 치열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병력일 뿐입니다.”

레이노어의 차분한 응수에 클레이런스 후의 곁에 있던 다이크 백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회군 명령이라니, 이것은 재상의 지나친 판단입니다. 그저 황태자 전하가 곧장 돌아오시게 하면 모두 해결될 일을…….”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메이어 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현재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는 일만도 채 되지 않습니다. 수도의 군사가 일만 이하일 시 어떤 반역자도 수도에 발을 들일 수 없음을, 법관까지 지내신 분이 어찌 모르십니까. 므노비스에서 회군하지 않으면, 황태자 전하도 수도에 돌아오실 수 없습니다.”

“지금 시시콜콜한 원칙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비단 황태자 전하의 귀환 문제며 혐의의 진위 문제를 제하더라도 지금은 제위가 비어 있고,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반란의 위협이 거셉니다. 지금에야말로 수도에 집중된 병력이 필요합니다.”

“젠장, 무슨 황태자가 진짜 반역자라도 된단 말입니까?”

“적어도 전하께서는 그렇게 간주되셨습니다.”

“메이어 백!”

“애초에 우리가 지금 의결만 내린다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여러 목소리가 한데 뒤섞이며 뢴트미안이 과열되기 시작하자 레이노어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거대한 원탁 사이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 속에 레이노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시가를 입에 물며 깊게 빨아들였다. 내뱉는 숨에 매캐한 연기가 남자의 얼굴을 가리다, 이내 흩어졌다. 이윽고 레이노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칙은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클레이런스 후가 날 선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가 한 번 더 낮게 되물었다.

“제위가 비어 있는 상황에서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황태자라도. 재상인 제게 권한이 주어진 한은요.”

손에 든 시가를 곁에 시립해 있던 보좌관에게 넘기며 레이노어가 설핏 웃었다. 클레이런스 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황태자 전하의 귀환을 원칙을 들어 막고, 원칙하에 황태자 전하를 귀환시키기 위해 전쟁 중인 군대의 절반을 수도로 회군시켰다, 라……. 어떤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절차입니다. 칠십 년 전 베나바르트 사건의 선례가 있습니다. 당시 제국은 펠로베르와 전쟁 중이였으나, 반역 혐의를 받고 있던 베나바르트 백의 재판을 위해 수도 사령부에서 징집 명령까지 내렸죠.”

“공께서는 지금, 황태자 전하를 그 칠십 년 전의 반역자와 같은 선상에 두고 있는 겁니까?”

“진위 여부는 재판에서 가려집니다. 지금으로서는 재판 전의 베나바르트 백과 황태자 전하의 차이를 모르겠군요.”

“…….”

“어찌 되었든, 황태자 전하의 그 결백을 밝히기 위해선 우선 수도의 일정 이상의 군사가 필요하고, 황태자 전하의 귀환은 그다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클레이런스 후가 기가 막힌 듯 날카롭게 실소했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론 후가 몬드리올 백에게 짧게 물었다.

“……회군하는 군대는 어디쯤 오고 있습니까?”

“아침에 벨롱가를 통과했다는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몬드리올 백의 말을 끝으로 서늘한 침묵이 뢴트미안 위를 떠돌았다. 불안한 시선들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직감적으로 그들은 재고 있을 것이다. 이 거짓말처럼 단단한 땅 위로 균열이 일기 시작했을 때, 어떤 곳에 발을 딛고 있어야 살아남을지를. 레이노어는 의자에 깊게 기대앉으며 마치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그들을 관조하듯 바라보았다.

몬드리올 백에게 도착한 군사 파발은 몇 시간은 느리게 도착한 것이었다. 레이노어가 무심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루드비히가 이끄는 회군 군대는 이미 서문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는 이미 포위되었다.

조금씩, 저 멀리서부터 땅이 기묘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어느새 가까워진 말발굽 소리에 사태를 직감한 의원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금속끼리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두꺼운 목문을 뚫고 방안까지 들어왔다. 몇몇 의원은 아예 방을 나서려는 듯 말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레이노어는 그것을 달리 제지하지 않은 채로 평온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바는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이 방을 나서는 것보다 기사들이 방에 들이닥친 것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의원들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기사들이 뢴트미안을 중심으로 포위하듯 의원들을 둘러쌌다.

그리고, 황자가 들어섰다.

이드리안제의 여섯 번째 아들, 9황자 루드비히.

에델가르드 공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작에게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루드비히를 한 번 흘끗 응시한 그가, 느릿하게 좌중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위기에 빠진 황실을 구할, 황제의 아들이 여기 오셨군요.”

레이노어가 루드비히 쪽으로 손을 내밀자, 루드비히가 레이노어에게로 다가왔다. 루드비히의 손을 잡은 레이노어가 과장된 우아함으로 그 손을 들어 올렸다. 레이노어의 싸늘한 시선이 다시 의원들의 얼굴을 스쳤다.

“9황자 전하는 므노비스에 참전한 유일한 황제의 아들이며, 최전선에서 제국을 수호한 유일한 황자십니다.”

“…….”

“저는 지금 이보다 더 황제가 될 자격이 있으신 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순식간에 지어졌다. 제각기 칼을 든 기사들을 등진 채 의원들은 기이하리만큼 간단하게 주어진 안건에 간단하게 거수로 표결했다. 황태자의 빈자리와, 클레이런스 후를 제외하고 모든 가문이 만장일치로 찬성한 의결이었다.

일견 무력이 개입해 반강제적으로 이뤄 낸 것 같아 보였으나, 사실 그들은 제 등 뒤에 칼이 없었더라도 눈앞에서 현실의 우위를 마주했다면 똑같이 찬동했을 것이다. 추밀원의 일원 중에는 황태자와 배다른 황자를 가진 가문들이 있었다. 황후와 황태자를 지나치게 배려한 황제 탓에 필요 이상으로 억압당하고, 황자를 가지고도 정치적으로 억눌려 있었던 가문들. 그들은 클레이런스와 황태자에 대한 반감을 순식간에 드러내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재빠르게 분열했다. 바로 등 뒤에 칼을 두고도 자신들의 황자를 내세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을 황후의 아들로 살아온 황제보다는 어미가 목 잘려 죽은 죄인인 황자가 제위에 오르는 편이 갈아엎기도 편할 테니까. 분명, 자신들의 황자는 저기 서 있는 9황자보다는 자격이 있었다.

루드비히는 복잡하게 뒤엉킨 그 계산을 하나하나 짚으며, 제국의 가장 고귀한 귀족들이 제 앞에 일제히 무릎 꿇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폐하.

제각기 목에 칼을 품은 그 말은 아득히 높은 천장을 울리며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싸늘한 희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봐라, 평생 황위에 손끝조차 닿을 리 없는, 네 허울뿐인 고귀한 신분을 망각하면 어찌 되는지를.’

환각처럼 어미의 머리가 다시 땅 위로 떨어져 구르고, 이드리안제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루드비히의 입매가 비틀리듯 호를 그리며 서느렇게 올라갔다.

가졌다. 자신이 가졌다.

그가, 그렇게나 카드리어에게 주고 싶어 하던 것을, 자신이 가졌다.

뺨을 맞고, 무릎을 꿇고, 발로 차이며 개처럼 네 발로 기던 황자가, 죄인의 아들이, 창녀의 아들이, 황제가 된 것이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기어 올라왔다. 이제는 자신이 황제였다.

루드비히는 그렇게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파사칼리아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파사칼리아는 제 앞에 덩그러니 놓인 목걸이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로 촘촘하게 이어진 체인과, 크게 커팅된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앞으로 우아하게 늘어져 황홀하게 반짝인다. 파사칼리아의 손끝이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위를 살짝 스쳤다. 이 목걸이는 루드비히가 제 어미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의 절반을 주고 사들인 것이었다.

루드비히는 파사칼리아의 손목을 쥐고 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사칼리아를 안고 웃었다. 메마른 귓가로 달콤한 말들이 잔뜩 쏟아졌다. 이내 목에 무거운 보석이 휘감기고, 그가 청혼했다. 네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행복뿐이리라는 다디단 말들. 힘들게 재회한 연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새벽의 한 토막뿐이었고, 파사칼리아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파사칼리아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아이에 관하여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루드비히의 달콤한 목소리를 떠올리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싸하게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뭔가를 놓친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형태조차 잡을 수 없었다. 파사칼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목걸이를 집어 들고, 콘솔로 다가가 서랍 속에 넣었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파사칼리아가 떨리는 시선을 들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파사칼리아의 손이 천천히 제 배를 쓰다듬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고, 자신도 분명 행복했는데…….

어딘가, 변해 있었다.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이 낯설게 일그러졌다.

추밀원에서 황위 계승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을 무렵, 카드리어는 제 보좌관의 칼에 찔려 변경에서 사망했다. 그는 주군을 배신한 변절자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반역자를 처치한 공로로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로써 황태자의 반역은 혐의가 아닌 사실이 되었다. 적어도 역사에서는.

황태자를 배신한 자가 작위를 받고, 황태자의 반역이 역사적 사실이 되면서 루드비히의 황위 계승은 조금 더 정당한 모양으로 변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루드비히는 파사칼리아와 결혼했고, 열흘이 지났을 무렵 블라디모로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계절이 한 번 바뀌기도 전에 본디 황태자가 가졌어야 할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다.

당장 제 얼굴로 날아오는 손을 막을 힘조차 없었던 남자는 그렇게 황제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이튿날, 남자는 흡사 홀린 것처럼 그 권력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이들을 떠올렸다. 혹은, 가장 짓밟고 싶은 이들을 떠올렸다. 황제가 된 남자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 루드비히는 황제의 의자 위에 고고하게 앉아, 자신을 버러지처럼 취급하던 황후의 자식들을 가축처럼 끌고 와서 모두 죽였다. 이드리안제가 쓰러졌던 황제의 웅장한 지도 위에서, 그가 사랑하던 아들딸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루드비히는 무심한 눈으로 거대한 접견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시신들을 내려 보았다. 그리고 손발이 묶인 채로 기절한 클레이런스 후를 한 번 바라보다, 다시 중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내가, 널 살렸었다.”

장녀인 1황녀 콘스탄체를 껴안고 시체처럼 굳어 있던 이드리안의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마치 죽은 자가 내는 소리처럼 높낮이 없이 허공에 떠다니는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걸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루드비히는 어려움 없이 매끄럽게 대꾸했다.

“내가, 네 어미가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네 형을 살린 것도 알고 있느냐.”

“그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를 죽이는 것 역시 반역이다. 네 어미가 반역 죄인으로 죽은 것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

“어찌 내 자식들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절절했다.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반역자의 동기는 또 다른 반역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반역자의 아들인 제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보면 아시겠지만.”

마치 날씨가 좋다고 말하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콘스탄체의 어깨를 잡고 있던 황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찌 이럴 수가 있었느냐, 그렇게 물으셨습니까?”

“…….”

“제가 후에, 지금의 황후 폐하 같은 꼴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폐하.”

급하게 달려온 듯 레이노어의 머리칼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접견실을 나오고 있던 루드비히가 잠시 걸음을 멈추며 인사했다.

“에델가르드 공.”

“성급하셨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빠르게,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씹어뱉듯 말한 레이노어가 루드비히의 걸음에 맞춰 곁에서 자연스럽게 걸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지금 죽이셨다는, 그들 말입니다.”

아아, 루드비히가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레이노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을 조금 더 두었어야 합니다.”

“난 그것이 적절한 처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여론이 절반도 우리에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어찌 그러셨습니까.”

“그들은 선황의 적통 자녀들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아무 여지도 두지 말아야지요. 내가 아닌 다른 대안이 없도록.”

부드럽게 말하는 투와는 달리 삭막한 시선이 레이노어를 응시했다.

“죽기 전에 먼저 죽이라, 그것은 공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물론 틀리신 말씀은 아닙니다. 언젠간 그들을 제거해야 함도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손발이 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나 역시 평생을 그러했습니다.”

“…….”

“그리고, 지금은 황제가 됐죠.”

레이노어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적어도, 1황녀는 살려 두셨어야 합니다. 4황자나 6황자의 죽음은 세상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황녀는 이미 결혼도 했고,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여자입니다. 어찌…….”

“그란토니아는 계집도 계승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1황녀가 보통 계집이 아님은 공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4황자와 6황자가 죽고 나면, 그녀가 클레이런스에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었겠죠.”

“폐하가 알고 제가 알아도 세상은 그녀가 여자라는 것만 기억할 겁니다. 아직 기반이 불안하니 적당한 공포는 필요하고, 그 본보기도 필요하죠. 하지만 과했습니다. 불필요한 숙청일 뿐이죠.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나……. 폐하께선 선대 황후가 얼마나 제국인들에게 사랑받았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죽인 그들이 그런 그녀의 자식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죠.”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레이노어가 피곤한 듯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분명 계승권자였고, 반역자 카드리어의 누이와 형제들이니 우리에게 내세울 명분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만회할 방법은, 황후에게만큼은 가혹하게 구시지 않는 것뿐입니다. 유폐보다는 지방의 별궁을 그녀에게 하사하여 감시하시고…….”

“이미 죽었습니다.”

레이노어가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굳은 얼굴로 뻣뻣하게 멈춰 섰다. 루드비히가 그로부터 두 걸음 앞에서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공.”

“맙소사…….”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쯤 죽었을 겁니다.”

“…….”

“제가 나가고,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고 하더군요.”

루드비히의 담담한 말에 레이노어가 경직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이내 표정을 지웠다.

“저는 폐하께 그런 칼을 쥐어 드린 적이 없습니다.”

“…….”

“그렇기에 폐하께서는 그런 칼을 가지신 적이 없습니다.”

레이노어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몹시 싸늘했다. 루드비히가 차분하게 되물었다.

“내가, 공작께서 시키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단지 불필요한 희생에 대한 충언입니다. 비약이 심하시군요.”

“그러니까, 공작께서 정해 주신 선을 넘지 말라…….”

“폐하, 저는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공께서는 그러실 수 있습니다. 공께서 보잘것없는 에르가넷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으니, 그 황제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도 마땅히 공의 권역에 있는 거겠죠.”

“폐하!”

“에델가르드 공.”

루드비히가 낮게 그를 부르며 한 걸음 다가섰다. 짐짓 평온한 얼굴과는 다르게 암녹색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일렁거렸다.

“공은 여전히 나를, 그대가 딸의 연애 놀음에 붙여 준 장난감처럼 취급하는군요. 그리고 그것이 나를 꽤 비참하게 합니다.”

“폐하.”

“그러나 공은 상황을 다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

“그대의 딸이 나를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대의 딸을 가진 겁니다.”

레이노어는 그 말을 비웃지도 않고 그저 기묘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응시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꿔 말하면 그가 황제가 된 것이 파사칼리아의 남편이기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황제이기에 파사칼리아가 황후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지금의 루드비히를 이뤄 낸 과거와는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루드비히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려 사라지는 레이노어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었다.

정통성 있는 이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살얼음판에 서 있는 것처럼 아직도 발밑이 불안했다. 귓가에서는 여전히 네가 창녀의 아들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위와 가장 멀었던 황자, 죄인의 아들, 어쩌면 황제의 아들조차 아닐지 모르는 불분명한 출생.

그래, 자신은 결코 황제가 될 수 없는 자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레이노어가 황제로 만들었다. 그것을 경이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정작 정말로 제위에 앉자 경이로움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 자리를 위해 태어난 이도 아니었고, 이 자리를 위해 키워진 적도 없었다. 어쩌면 에델가르드에 의해 자신이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된 것처럼, 자신은 에델가르드가 원하면 금방이라도 교체될 수 있을 것이다. 소모품이나 다름없이.

잔뜩 날이 선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루드비히는 애써 생각을 지워 내며 으레 하던 버릇처럼 파사칼리아를 떠올리고, 그녀가 가진 자신의 아이를 생각했다. 파사칼리아를 닮아 사랑스러울 아이, 그리고 불안한 황실을 안정시켜 줄 에델가르드의 아이. 황태자가 되고, 자신을 이을 황제가 될.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생의 안정감을 루드비히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이렇게 파사칼리아와 아이를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느슨하게 가라앉고, 마음이 가라앉자 불현듯 파사칼리아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치 그의 생각이 전해진 듯, 루드비히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아내를 발견했다.

고귀하고 우아한 눈매가 루드비히가 들어서자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며 웃었다. 반사적으로 덩달아 웃음을 지으려던 그가 순간 홀린 듯 무언가를 깨닫고 입매를 뻣뻣하게 굳혔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손이 쓰다듬고 있는 배로 향했다. 얼마간 그녀의 배를 응시하던 그의 얼어붙은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자신의 황후는 완벽한 여자였다. 가장 고귀한 에델가르드의 딸이었고, 황녀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아이는 황후의 아들이고, ‘진짜’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에델가르드의 황태자가 될 것이다. 아이의 출생은 그 어미만큼이나 자랑스러우리만치 완벽했고, 루드비히는 그것이 제 결핍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불완전한 자신과는 달리, 모든 것이 완벽한 아이.

애써 끊어냈던 생각이 다시 이어졌다. 에델가르드가 원하면, 자신은 언제든 소모품처럼…….

“루이?”

저 배 속의 아이는, 에델가르드가 만들어 낼 또 다른 황제였다.

루드비히는 자신과 조금 멀리 서서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판단했다. 에델가르드가 루드비히를 황제로 만들었으나, 정작 에델가르드는 한 번도 루드비히를 원한 적이 없었다. 루드비히는 레이노어의 그 경멸 어린 시선을 떠올렸다.

루드비히를 원했던 것은 오로지 저 여자 하나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단지 그것만으로, 에델가르드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에델가르드의 핏줄을 이어받은, 그리고 진짜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파사칼리아 안의 아이가 저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루드비히는 다시는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는 것도.

파사칼리아는 꽤 오랫동안 루드비히를 만나지 못했다. 배는 조금씩 불러 오기 시작했고, 점차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파사칼리아는 루드비히를 찾았으나 루드비히는 파사칼리아를 찾지 않았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 때, 파사칼리아는 비로소 그에게 제가 외면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에게 시간이 없으리란 걸 알았다. 자신 하나 신경 쓰기에는, 그가 급작스레 떠맡은 것이 너무 많았다. 알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인생이 바뀐 남자였다. 파사칼리아는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죄책감부터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 죄책감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든, 모든 것을 억지로라도 그녀가 그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현실감. 그가 자신의 얼굴을 잠시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말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현실감. 손끝으로 피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한 절망감이 서서히 온몸을 잠식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살아 돌아온 이후로 어딘가 붕 떠 있던 세상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본래의 색채로 돌아왔다. 파사칼리아는 비로소 뿌옇게 멀어 있던 눈을 떴다.

황태자가 죽었다. 황후 소생의 최고위 황족들이 재판 절차 조자 없이 대낮에 끌려와 죽임을 당했고, 그 곁에서 이드리안의 황후는 곧바로 자살했으며, 조카와 여동생이 죽는 것을 모두 지켜본 클레이 런스 후는 저택으로 돌아와 음독자살했다. 그 후로도 황제의 이복형제들이 하나둘 죽어 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파사칼리아와 웃으며 말을 나누던 사촌들이었다. 루드비히에 의해 묶인 채로 자식들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황후는 심지어 제가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안았던 파사칼리아의 숙모였다.

파사칼리아는 그제야 제 사랑이 얼마나 많은 이가 죽어야 완성될 수 있는 끔찍한 종류의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끔찍한 길을 지나온 사랑이, 사실은 결코 완성된 적이 없었다는 것도.

죄악감에 짓눌린 정신이 점점 죽어 갔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얼굴로 그럴듯한 핑계라도 댄다면, 파사칼리아는 적당히 모른 척하며 그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를 이해한다면, 그를 사랑한 자신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될 거라고, 어쩔 수 없었노라고,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 준다면…….

당신이, 사람들의 말처럼 미치지 않았다는 걸 내게 보여 주기만 한다면.

파사칼리아는 루드비히가 찾아오지 않는 방 안에서 불러 오는 배와는 다르게 서서히 말라 갔다.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우울한 채로 보냈다. 그녀는 어느새 아이를 잊었다. 헬레니아나 클라우스가 이따금 찾아오면 가끔 웃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결국 헬레니아가 파사칼리아를 잡고 울었다. 그리고 파사칼리아는 우는 헬레니아에게 잘못했다고 빌며 울었다. 눈을 감으면 사촌들의 유령이 떠다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파사칼리아 스스로가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망가져 있기도 했다.

그 절망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던 어느 날, 파사칼리아는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다. 얕은 파도가 일듯이 배 속이 움직였다, 파사칼리아가 멍하니 시선을 내려 제 배를 바라보다 배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대답하듯 톡톡, 무언가 두드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망연한 얼굴로 손을 어쩔 줄 모른 채 허공에 어정쩡하게 올린 파사칼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키며 파사칼리아가 웃었다.

아이, 내 아이.

아이의 존재를 느끼자 이전과는 다른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그와 더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고와도 같은 현실감이.

집무실에서 파사칼리아를 맞닥뜨린 루드비히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파사칼리아를 들여보낸 시종장에게 별다른 질책을 하지는 않았다. 파사칼리아는 그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으나 보지 못한 척 미소 지었다. 그녀가 두 달 전 이 방에서 루드비히를 기다렸을 땐, 루드비히는 한참이나 멍하니 그녀를 말없이 바라봤었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 나가 버렸었지. 파사칼리아는 쓰디쓴 숨을 삼켰다, 흔들리는 눈으로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한숨처럼 짧게 물었다.

“몸은?”

늘 그랬듯 부드러운 물음에 불안하게 일렁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파사칼리아는 겨우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다행이군.”

“당신은요?”

“괜찮아.”

루드비히가 조금 곤란한 듯 마른세수를 하다 천천히 파사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파사칼리아는 꽉 막혀 있던 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어느새 자신이 사랑하던 얼굴로 돌아온 남자였다.

그래, 이 남자였다.

“그동안 찾지 못해 미안해. 보름 전에는 8황자가 베르나에서 반란을 일으켰어, 그래서.”

“알아요. 당신이 많이 바빴다는 거.”

루드비히가 더 이상 곤란한 말을 이어 가지 않도록 파사칼리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파사칼리아가 웃자, 루드비히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는 괜찮다던 대답과는 달리 실제로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고, 족히 며칠은 자지 못한 것 같았다. 파사칼리아가 걱정스러운 듯 루드비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루드비히는 좀 더 느슨해진 얼굴로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손을 맞잡았다.

“……아이가 태어날 즈음엔 하루 종일 당신 곁에만 붙어 있을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이가 태어나도.”

“정말 그래 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 골치 아픈 일은 다 치우는 중이야.”

맞잡은 손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며, 루드비히가 다정하게 말했다. 마치 책상 위의 물건을 치운다는 양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파사칼리아는 그가 그렇게 치우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직도 남은 그의 이복형제들과, 직계와 가장 가까운 황족들.

“우리 아이는, 가장 완벽한 상황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달콤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파사칼리아는 그와 똑같이 웃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남자가, 여전히 아이를 사랑한다면. 여전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태동을 느꼈었어요.”

파사칼리아의 말에 루드비히의 웃고 있던 입매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러나 파사칼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의 손을 끌어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어느새 볼록해진 배 위를 커다란 손이 덮었다. 그녀의 배를 내려다보는 루드비히의 시선이 희미하게 떨렸다.

“아이가 점점 더 자주 느껴져요. 이젠 가끔 발로 차기도 하고, 어머니는 이 아이가 틀림없는 아들일 거래요.”

루드비히는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파사칼리아가 해사하게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당신을 안정시켜 줄 거예요. 당신을 진정한 황제로 만들어 줄 후계자요.”

어딘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파사칼리아는 행복에 차 말했다. 그리고 조금 용기 내어 루드비히를 안았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 하나에 얼음이 녹아내리듯 파사칼리아의 계절이 바뀌었다.

“우린 행복할 거예요. 그렇죠?”

“……그래.”

루드비히의 짧은 대답에 파사칼리아가 문득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키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만 갈게요.”

“조금, 더 있어도 돼. 오랜만이니까…….”

“오래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힘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와야 해요, 루드비히.”

루드비히는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파사칼리아가 방에서 나서자, 루드비히는 방 중앙에 망연하게 서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목을 졸랐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본능적으로 아이가 사라지길 바랐던 순간의 그 자신이 경멸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루드비히는 그날 이후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옆에 있을 때의 자신은 치가 떨리게 싫은 사람이었다. 어딘가 변해 버린 저를, 스스로조차 바로 바라볼 수 없는 그 망가진 자신을 그녀가 알아차리는 게 두려웠다.

만약 그 죄악감의 정체를 그녀가 알아차린다면…….

루드비히는 초조한 얼굴로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녀가 낳은 아이도 사랑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제 눈앞에 태어난다면 이런 형체조차 없는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리라. 그럼에도 불안은 계속 밀려들었다. 어딘가 사고회로가 고장 난 것처럼 예전처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비워 놓기 위해 지금 바삐 움직이고 있는 자신은 진심이었고, 아이가 어떤 위협도 없는 가장 완벽한 상황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것도 여전히 진심이었다. 기실 이 모든 일은 그때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진심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고 그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이전의 사람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루드비히는 제가 어디까지 추락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파사칼리아의 행복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우린 행복할 거예요, 루드비히. 그렇죠?

루드비히는 그러리라 대답했지만, 사실은 좀 더현실적인 다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8황자는 본보기로 즉살하시되, 이번만큼은 그 아우인 10황자를 살려 두셔야 합니다. 그는 아직 성년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에다, 제 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땐 유학 중이었습니다.”

“그런 게 상관있습니까?”

루드비히의 무심한 대꾸에 레이노어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모두 죽였는데 그만 죽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불평등한 처사 같군요. 그리고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열여섯입니다.”

“여태까지 죽은 이들은 모두 성년을 넘어섰고, 수도에 있었으며, 실질적인 가담의 증거, 혹은 그렇게 간주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0황자는, 아직 성년을 넘지도 못한 데다 전혀 상관없는 제삼국에 체류 중이었고, 기실 실질적인, 가담이라 간주할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8황자의 반란이 성공했다면, 그는 황제의 아우가 됐을 겁니다. 그의 형이 일으킨 반란이 성공만 했으면 갖은 부귀영화를 다 누렸을 것인데, 실패에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을 베푸시는 모습도 보이셔야 합니다.”

“공, 세상에는 차라리 죽는 게 편안한 처지도 존재합니다.”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담담했다. 레이노어가 가늘어진 눈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10황자는, 폐하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더 지독할 수도 있죠.”

“…….”

“나를 평생 괴롭히던 건 살의 한 점 없는 유치한 장난이었지만, 그를 평생 괴롭히는 건 진짜 죽음의 공포일 테니까.”

“지금 그를 죽이시는 게, 그에게 베푸시는 최대한의 선의란 말씀이십니까?”

루드비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노어가 깃펜을 내려놓으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정말로,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대상이 불분명한 말에 루드비히가 레이노어를 바라보았다. 레이노어는 관자놀이를 꾹꾹 주무르던 손을 내리며 루드비히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저는, 폐하를 지금 이 자리에 올리기까지 수많은 일을 했습니다. 제 의지와, 제 신념에 반하는 많은 일을요.”

그동안 루드비히의 황위 계승과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굴었던 레이노어가 처음으로 내뱉은 직접적인 말이었다. 루드비히는 동요 없이 레이노어를 바라보았다.

“폐하를 선택한 것은 사사로운 동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사로운 동기는 제가 죽을 때까지 지고 갈 제 과오입니다. 내 딸이 당신이 죽는 걸 그냥 지켜볼 수 있었다면, 혹은 내 딸이 당신을 따라 죽는 걸, 내가 참을 수 있었다면…….”

“…….”

“그러나 그것이 과오인 줄 알면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끝에서 내 딸이 웃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폐하를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휘두르기에 적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만족을 아는 자고, 선황의 그토록 강력했던 황권 하에서도 내가 만족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말 그대로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평생 참아 내신 오욕을 생각한다면, 그 인내를 생각한다면.”

레이노어의 목소리가 루드비히를 설득하듯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폐하는 때를 기다리며 엎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인내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 군주가 되는 자들은 가지지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파사칼리아에겐 다정하고, 사려 깊은 연인이었고.”

“…….”

“그런데 왜, 폐하께서 가졌던 좋은 것들을 하나씩 버리려 하십니까.”

레이노어는 루드비히를 별달리 질책하지 않으면서 그의 현실을 하나씩 꼬집었다. 그의 말은 안타까운 듯도 했고, 차마 더 보기 한심한 듯도 했다. 파사칼리아와의 원만하지 않아 보이는 관계가 레이노어의 귀에 들어간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으나, 레이노어가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을 언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심으로 진언합니다. 지금의 폐하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말에 빗댄 표현이었으나 루드비히에게는 어떤 다른 여지를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루드비히의 입매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레이노어는 그것을 보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폐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위해 많은 것을 걸었습니다.”

“…….”

“그 노력에 대하여 더 이상 후회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이젠 네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눈이 서늘하게 루드비히를 내려 보았다. 군주보다 더 군주다운 눈이었다. 단 한 번도 비굴해 본 적 없을, 평생을 세상에서 제일 고고하게 살아온 자의 눈빛. 루드비히는 그런 부류들을 잘 알고 있었다. 부황이 그러했고, 황태자가 그러했듯이.

레이노어의 말은 경고나 다름없었다. 레이노어가 나간 후, 루드비히는 선택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뇌까렸다.

선택받았고, 언제든 다른 선택에 밀려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안다는 것은 그리 상쾌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 그저 하나로 존재한다는 그 무력함 역시.

카디링거의 베티스가 루드비히를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여자가 검은색 로브를 벗자, 화사한 금발이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도도한 인상의 화려한 미인이었다. 루드비히는 무표정한 얼굴로 심사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무관심한 시선에도 여자는 별달리 수줍은 기색도 없이 우아하게 걸어와 루드비히의 앞에 앉았다.

“그대의 아비는?”

“저 혼자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퍽 맹랑한 대답에 루드비히가 짧게 실소했다.

“충분하다?”

“어차피 폐하와 카디링거의 거래 명목은 제 인생이니까요.”

“짐은 그 제안을 받을 마음이 없다고 그대의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말했었다. 이젠 좀 지겹군.”

“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셨을 텐데요.”

“그럼 뭔가 달라지나?”

“달라지시지 않으셨나요?”

“모르겠군. 짐은 그대에게 동하지 않아.”

지극히 무례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이었다. 한 점의 열기도 없는 시선이 여자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마치 여자로서의 가치를, 그것도 아주 낮게 매기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곱게 자란 영애라면 불쾌함에 파르르 떨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법한데도 여자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몸 팔러 온 것도 아니니까요.”

여자의 우아한 말투와는 달리 꽤 거침없는 내용이었다. 루드비히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실소했다.

“그게 아니면? 짐이 그대의 몸뚱이에 비싼 값을 매기지 않으면 곤란한 건 그대 아닌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 목표는 궁극적으로 폐하께 여자로서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선.”

“……폐하께선?”

“어차피 제게 없는 값이라도 만들어 내셔야 할 테니까요.”

루드비히는 말없이 턱을 괴었다. 표정 없이 싸늘하던 얼굴에 미세하게 웃음기가 어렸다.

“제가 마음에 차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마음에 차지도 않는 그대를 짐더러 어찌하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마음에 든다 하세요. 그리고 제 아비가 지겹게 폐하께 말씀드렸듯 저를 황비로 맞이하세요. 그리고 제게서 아이를 얻으세요.”

“그래, 그게 값이었지. 제안의 본질은?”

“카디링거를 가지실 겁니다.”

“짐에겐 이미 에델가르드가 있다.”

“외람된 말씀이나, 에델가르드가 폐하를 가진 것은 아닌가요?”

루드비히의 입매에 서려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황후께서 폐하를 선택하셨고, 에델가르드가 폐하를 선택하셨죠.”

루드비히가 표정 없이 여자를 서늘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마치 적절한 시기를 잡은 듯 여자가 솜씨 좋게 제 분위기를 낮추었다.

“하지만 폐하, 폐하께선 지금 저를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으십니다. 그리고 만약 제게 그 ‘값’을 치러 주신다면…….”

“…….”

“폐하께서 저를 선택하시고, 폐하께서 카디링거를 선택하신 겁니다. 황제를 감히 선택한 오만한 에델가르드와는 다르게.”

루드비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베티스는 초조해 하지 않았다. 다만 말을 고르듯 잠시 쉬었다가 이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대로 꼭두각시처럼 에델가르드에 그대로 잡아먹히시겠습니까. 아니면…….”

“…….”

“카디링거를 갖고 진짜 황제가 되시겠나이까.”

“꼭, 이랬어야 했어요?”

“파사.”

“카디링거가 필요했겠죠. 알아요. 그 여자가, 그 여자라서 당신이 선택한 게 아닌 건 알아.”

파사칼리아는 자신이 묻고도 마치 루드비히의 대답을 듣기 두려운 듯 미리 쏟아 내는 것 같았다.

“구질구질하게 질투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한 여자만 품고 살 수 없으리란 건, 당신이 황제가 되는 순간부터, 이미 생각했고…….”

“파사.”

“그냥, 그냥, 그게 왜 지금이었냐고……. 왜, 지금이에요. 왜. 조금 더 후일 수도 있었잖아요.”

파사칼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겠어요. 내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당신의 집무실에 드나드는 내 아버지는!”

“……그대가 비참해질 이유는 없어. 그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요즘 나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알아요? 내 뒤통수에 대고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는지는 알아요?”

그녀가 테이블을 짚은 손이 덜덜 떨렸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탓이다. 루드비히는 한숨을 뱉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파사칼리아가 곧바로 뿌리쳤다.

“멍청하게 이용만 당하다 그대로 버려졌다고! 보는 눈이 무서워서 체면치레로라도 저렇게 대우하진 않을 텐데, 저렇게 금세 버릴 만큼 정말 전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

“이제 그만해.”

“나는 그래도 기다렸는데, 사실은 그게 맞았던 거야.”

“파사, 의미 없는 말들에 휘둘리지 마. 내 말만 듣기로 했잖아.”

“사랑은커녕, 내 수치심 따윈 상관없을 만큼, 이제 당신은 날 사람으로서의 존중조차 하지 않는 거야.”

“파사!”

“……내 안에 당신 아이가 있다는 걸, 기억은 해요?”

파사칼리아가 나직하게 물었다. 루드비히가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마간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파사칼리아가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계절이 한 번만 더 바뀌면, 당신의 아이가 태어나요. 알아요?”

“……알아.”

“기다려 주지 그랬어요. 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릴 봤을 때, 적어도 그때는, 우리밖에 없어야 하잖아. 그래야 하잖아요.”

“……미안해.”

루드비히의 사과에 파사칼리아가 멍하니 서 있다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정말로 다 잊은 거예요. 그렇죠?”

“지금 무슨 말을…….”

“나도, 아이도…….”

“당신은 지금 내 눈앞에 있어. 제발 이러지 마.”

“아니, 어쩌면 잊은 적도 없겠군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이 그들 사이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목이 졸린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겨우 눈을 깜빡였다.

“당신은 날 사랑한 적도 없을 테니까.”

“…….”

“적어도 당신을 황제로 만든 내 아버지에게 일말의 예의가 있다면 당신이 이럴 수는 없을 거야. 지금의 당신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예요. 당신은, 애초부터 날 이용하려고 했다는 거.”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루드비히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루드비히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파사칼리아에게로 다가섰다. 파사칼리아가 흠칫 몸을 웅크리며 뒤로 더 물러났지만 루드비히가 그녀를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그래. 그대의 그 집안이 나를 황제로 만들었지. 그리고 그대의 선택이 그대의 집안을 그렇게 만들었어.”

“…….”

“지나고 보니 대단한 건 그대의 아비가 아니라 그대더군.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계집이야. 그렇지 않나?”

파사칼리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조금 숙여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이용이라. 그래. 그대가 나를 이용하려 했던 거 기억나? 카드리어의 대안으로 날 선택했던 것 말이야.”

파사칼리아는 떨리는 시선을 겨우 들어 루드비히를 마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남자의 눈이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내가 보잘것없다는 게 그 이유가 될 수 있었는데, 이제 나는 황제야.”

“…….”

“혹시 그것이 그대의 사랑을 퇴색되게 하지는 않나?”

파사칼리아는 천천히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루드비히는 그녀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았다. 파사칼리아의 손이 허공에서 무릎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루드비히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다시 파사칼리아를 홀로 남겨둔 채.

그들이 처음 만나고 사랑했던 계절이 다시 가까워질 무렵, 파사칼리아는 9개월 만에 죽은 아이를 낳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베티스가 임신했다.

루드비히는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총 여덟 명의 이복형제들을 죽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친형인 카스트로를 데려와 추밀원의 의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제 손으로 직접 죽였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반대하지 않았으나, 그날 밤 그들의 외조부였던 브나리오 백은 목을 매달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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