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막-1장(3권) (15/21)

3권

<3막-1장>

비올레타는 까끌까끌한 목구멍 사이로 마른침을 삼켰다. 식탁 아래에서 맞잡은 양손이 수 초 단위로 위아래가 뒤바뀌며 움직였다.

“너무 그러지 마.”

그녀를 흘깃 곁눈질한 라키엘이 말했다. 마냥 여유롭고 태연한 그녀의 얼굴에서 그가 어떻게 그 희미한 불안을 찾아냈는지는 몰라도, 비올레타는 그에게 제 속을 들킨 것에 차라리 편안함을 느꼈다. 라키엘이 식탁 아래에서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비올레타의 왼손을 낚아챈 손이 그녀의 무릎 위로 단단하게 위치를 고정시킨다. 그 어쩔 수 없는 안정감에 비올레타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별일 아니야. 그리 적당히 긴장한 티 내주는 거야 자연스럽고 귀여운 딸 같아 좋지만 속까지 그러면 곤란해.”

그러다 잡아먹힐라. 겁에 질린 아이를 놀리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비올레타에게 속삭였다. 기껏 그럴듯하게 격려하는 시늉을 내더니 마무리는 시답잖은 놀림이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을 보지 않은 채로 그에게 잡힌 제 손을 털어 내며 빙긋 웃었다.

“공이야말로 흉내를 넘어서 속까지 내 걱정에 끓으시면 곤란해요.”

언제 긴장했느냐는 양 깍듯한 호칭에 새침한 대꾸까지, 마치 어쭙잖게 수작 부리는 영윤을 내려다보는 영애처럼 천연덕스럽게 도도한 말투였다. 그 내용은 명백히 역으로 그를 놀리는 것이었고. 역시나 지지 않고 돌아오는 말에 라키엘이 낮게 소리 내 웃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오십니다.”

묵직하게 문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키엘이 식탁 위로 비올레타에게 손을 뻗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가 정찬실 안으로 들어섰다. 라키엘의 손이 비올레타의 손을 한번 꽉 잡았다 놓았다.

“폐하.”

비올레타를 곧장 응시한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에 이어 예를 취했다. 루드비히의 입매가 묘하게 휘었다.

“에델가르드 공.”

“부르심에 황송합니다, 폐하.”

“진작 이런 자리를 가졌어야 했지. 공도 엄연히 짐의 조카가 아닌가.”

루드비히가 라키엘을 일컬어 제 ‘조카’라 직접 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숙인 채 입가를 조금 일그러트렸다가 이내 매끄럽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라키엘을 곁눈질하던 비올레타가 루드비히의 뒤에 선 파사칼리아와 눈을 마주치고 조금 어색하게 웃다가 루드비히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를 에스코트해 라키엘의 맞은편에 앉히고, 자신은 비올레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퍽 다정하기까지 한 부부의 분위기에 비올레타가 저도 의식하지 않는 척 태연하게 웃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가 없었다. 적어도 이 식탁에 앉은 사람 중에서는.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 그리고 비올레타와 라키엘. 황제와, 황후와, 그들의 딸과, 황후의 조카. 넷은 원론적으로는 정찬을 함께하는 것이 퍽 이상할 것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식사는 수도에서 발행되는 일곱 개의 신문 중 네 개의 신문에서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사건이라고 명명할 일인 것은 분명했다. 황제와 에델가르드는 선대 에델가르드 공 시절부터 냉전 상태였고,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대수롭지 않은 사이가 있다면, 황제가 블라디모로를 열었을 정도로 아낀다는 소문이 떠도는 황제와 황제의 딸 정도일 것이다. 이미 황제의 사냥 행차에 5황녀가 몇 번 대동되었다는 사실은 그 소문을 정설처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황제의 앞에서 5황녀가 스프나 떠먹는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에델가르드 공이, 황후가 그 황녀와 더불어 평화로운 가정사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황제와 현 공작은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사사로이 정찬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몇 달 전부터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의 사이가 급작스럽게 비정상적인 호전을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과 맞물려 사람들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황제가 에델가르드와 다시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신문을 찍어 내는 자들은 흥분하고, 그 신문을 보는 자들은 정치 흐름이 다시 변화한다고 믿고, 정계에 가까운 자들은 그 믿음을 비웃었다. 현 황제와 에델가르드가 어떤 사이인데 화합이 가능한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루드비히의 얼굴을 직접 맞대고 앉은 비올레타는 알 수 있었다. 분명 루드비히는 변했다. 파사칼리아를 자리에 앉히던 손,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는 눈길, 말투. 마치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듯,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적당한 태도.

그리고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듯 그것을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파사칼리아는 그들을 평범한 부부로 보이게 했다. 파사칼리아의 차분하고 우아한 얼굴은 비올레타가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전혀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이전에 단 한 번도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었지만, 비올레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이 변했다고 확신했다.

비올레타가 그들에게 그렇게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무색하게도 라키엘은 그들을 늘 보아 온 광경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았다.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극히 정중하고 곧은 시선이 황제에게 닿아 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해도 겉으로는 저렇게 완벽하게 웃을 수 있다. 비올레타는 제가 태연한 얼굴로 완전히 변한 체 그와 동류인 척 굴어도, 제 속에 여전히 평범한 시골 귀족 계집이 들어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신년까지 스무날도 남지 않았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곧 신년 연회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전연 몰랐군.”

“근래 시끄러운 일이 많았으니 폐하께서 정신이 없으셨을 겁니다. 어제도 밀니로의 사자가 왔다고 들었어요.”

파사칼리아가 우아하게 입매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1황자의 뛰어난 전공戰功으로 그 지역도 퍽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모양이죠. 아직은요.”

웃으며 지나가듯 덧붙이는 말이 의미심장한 것은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가볍게 픽 웃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확실히 아직은. 사소한 분쟁이 있어. 밀니로야 사활이 걸려 있고, 펠로베르는 요사이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순순히 물러나기는 힘든 명분이 있지.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우리에겐 피곤한 일이야. 불필요한 인력과 시간을 지나치게 오래 쏟아 붓고 있는데 명확한 결론 근처만 빙빙 돌고 있지. 끝날 듯, 끝나지 않을 듯하면서. 이제 와서 발을 빼 모든 원조를 허사로 돌릴 순 없고.”

루드비히의 말이 멎자 라키엘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전하의 출정 당시 밀니로를 지지했던 저로서는 폐하께 면목이 없습니다.”

“공이 그럴 것 없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고, 아니, 여전히 옳지. 전황戰況이 지지부진하다고 해서 그 반대의 대답이 옳게 변할 순 없는 법이다. 펠로 베르는 그란토니아에 있어 영원히 오답일 것이고. 그리고…….”

“…….”

“언제나 문제는 발안이지, 발안에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묘한 어조였다. 라키엘의 입매가 굳은 것과 거의 동시에 비올레타는 순간 고기를 잘게 썰던 손을 멈칫 멈추었다. 루드비히의 말은 특정 상황과 관련 없이 원론적인 것 같으면서도 해석에 따라서는 밀니로 원정을 주장한 1황자를 겨냥했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언제나, 문제는……. 비올레타는 천천히 루드비히의 말을 곱씹었다.

황제는 이제 정말로 제 손을 들어 줄 생각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1황자를 견제하고 후계 균형을 맞출 임시방편일까. 혹시나 그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긴 시간을 부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혹은 그보다도 더 짧은, 순간의 변덕이라면.

비올레타로서는 여전히 그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기대하지 않고 휩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비올레타는 복잡하게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내며 느릿하게 고기를 씹어 넘겼다. 목구멍 아래가 불편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자연스럽게 포크와 칼을 놓으며 싱긋 웃었다.

루드비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라키엘이, 파사칼리아가 제 대신 말을 받자 조용히 시종을 불러 물을 받아 비올레타에게 내밀었다. 이쪽을 한 번 쳐다보는 법도 없었던 주제에 어떻게 알고 챙기는 건지 모를 일이다. 비올레타는 잔을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

그때, 루드비히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비올레타에게 물었다.

“황녀가 받고 있는 수업들은 어떤가.”

“언제나 좋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소녀를 위해 찾아주신 최고의 스승들이니만큼. 그들은 정말이지 현명해서, 배우면 배울수록 계속 새로운 것을 꺼냅니다. 그것은 언제나 좋은 자극이 되고요.”

“그들은 분명 모두 최고지. 요즘 무엇을 공부하고 있지?”

“얄타 뫼르겐 교수와는 플루타르코스를, 울리비 교수와는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메네빌레 교수와는 동대륙사를 공부하고 있고요. 클레이런스 후에게는 아직 책만 몇 개 받아 놓았습니다.”

“그것들까지? 스승들이 하나같이 다 네게 욕심이 많은 모양이다. 어렵진 않으냐?”

“제 머리가 뛰어난 편은 아니니, 분명 책만 제 앞에 놓여 있었다면 한 바닥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 최고의 선생이라 대체로 책 하나를 떼는 동안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입니다.”

“겸손하구나. 뫼르겐이 짐에게 말하길, 네가 매우 뛰어난 학생이라던데.”

“얼굴 맞대고 앉아 있는 것이 해를 넘어가면서 제게 꽤 정이 드신 모양입니다. 인색한 분이 폐하 앞에서 그런 과찬도 해 주시고요.”

비올레타가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루드비히가 낮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나 파사칼리아는 그것을 그저 장난으로 넘어가게 할 생각이 없는 듯 얄타 뫼르겐의 말을 거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얄타 뫼르겐이 말하길 비올레타의 필로비어스 번역이 수준급이었다고 극찬하더군요. 펠로베르어를 일 년도 안 되어 완성한 것도 모자라, 이렌시아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고요.”

“네가, 필로비어스를 번역했다고?”

“어마마마께서 거창하게 말씀해 주셨지만, 부족함이 많아 누구에게 선물하지도 못하고 방에 그대로 두었답니다.”

“한번 보고 싶군. 완독하는 것조차 어려운 책인데다 단순히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니니 상당히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했을 텐데. 얄타 뫼르겐이 극찬했을 정도면 짐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필사본보다 낫겠지. 내일 오찬 전에 짐에게 가져와 봐.”

먹지도 않은 내일 점심이 속에 그득 얹힌 것만 같았다. 비올레타는 부끄러운 척 웃으며 알겠노라 대답했다. 비록 제가 추켜세워지는 걸 좋아는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사양하고 싶었다. 목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황제 쪽에서 먼저 내민 손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는 고작 불편함만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여 주기 위한 의식으로 치부되기 쉬운 정찬보다는, 전혀 정치적 이익과 관련 없을 것만 같은 학문적 주제야말로 황제의 관심을 세상에 반증하기 좋으리라.

필수적인 것을 벗어난 부수적인 것들, 즉 황제가 그녀를 대동했던 사냥 행차와 같이.

그 뒤로도 비올레타의 다양한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피아노에 얼마나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바이올린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에 관하여 낯부끄러운 극찬이 이어졌다. 비올레타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파사칼리아가 소리 내 웃었다. 그들은 평화로웠다. 비정상적으로 평화로웠다. 평범한 아버지가 평범한 딸에게 관심을 갖듯, 평범한 어머니가 그 딸을 자랑스러워하듯, 어느덧 비올레타는 그 일련의 대화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다음에 이어진 질문이 더 갑작스럽게 느껴졌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너희는 언제 혼인할 생각이지?”

비올레타가 잠시 멍하니 있는 동안, 라키엘이 당황한 기색도 없이 웃으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저로서는 내일 당장에라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스무날만 지나면 해가 바뀌고, 그럼 황녀도 이제 스물이다. 공도 스물다섯이 되지. 그런데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제겐 더 이상의 시간이 필요 없지만, 그렇다고 제 시간을 황녀 전하께 강요할 순 없을 겁니다.”

“강요할 순 없다, 라…….”

마치, 너는 원하지 않고 있느냐는 듯 루드비히의 시선이 비올레타를 훑었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어야 할지, 혹시 그것이 너무 적극적인 의지로 보여 라키엘의 논지를 방해하진 않을지 고민했다. 라키엘은 고개를 돌려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난감한 와중에, 가식적으로 꾸며 낸 것치고는 너무나 완벽한 그 눈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깨 위로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저는 전하께 좀 더 시간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좀 더 자유로운 시간을 누려 보길 원하고, 더 많은 일을 구속 없이 해 보시길 원합니다. 전하께는 이제 고작 이 년이 지났을 뿐이니까요.”

비올레타의 속이 어떻든 라키엘의 대답은 진중하고 그럴듯했다. 얼굴만 보자면 결혼에 대해 며칠을 밤낮으로 고민한 남자가 따로 없었다. 라키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루드비히가 비스듬히 입가를 틀어 올리며 물었다.

“공이 시간을 주면 짐의 딸이 그대로 얌전히 있다가, 시간이 지나 공이 원하는 때가 되면 공의 품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하는 건가?”

라키엘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잠시 말을 고르듯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그가 멀쩡한 얼굴과는 달리 이 방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조금 당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무례일 것입니다. 감히 그리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선택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그리고 황녀 전하 스스로가 하시는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 선택을 받길 고대하는 처지에 불과합니다.”

말은 번지르르하다.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턱을 괴고 그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파사칼리아의 얼굴도 비올레타와 비슷했다. 라키엘은 제가 시시하게 말꼬리 잡히기 무섭게 제 편이 죄다 관전자로 돌아선 상황에 실소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가 당황한 것은 실상 몇 초도 되지 않았으므로 달리 말이 막힐 이유는 없었다. 라키엘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 시간을 드리고 싶다는 것은 애초에 그 선택이 여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 최고의 선택을 위해 다른 여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군.”

“물론입니다.”

“며칠 전에 칼에게 물으니, 자기는 당장 데려갈수 있다던데.”

“…….”

“그 아이가 짐이 생각했던 것보다 꽤 절절한 듯하여.”

황제의 입에서 절절하다는 말까지 나오자 라키엘이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자 후리는 데 한 번 쓰고, 여자들에게 방패막이로 두 번 써먹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황제에게까지 대놓고 공공연히 말을 꺼내기 시작해 결혼을 피한다. 비올레타는 다음 사냥에서 애꿎은 사슴을 쏠 것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한량을 쏴 집 나간 정신을 찾아주는 것도 꽤 좋은 일이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라키엘은 그 와중에 침착하게 구구절절 대꾸했다.

“로드리고 후에 대해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룁니다만 그 진정성을 믿기 힘듭니다. 황녀 전하와 혼담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여성과의 크고 작은 염문으로 전하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며, 그가 전하를 잊을 수 없다고 떠들고 다니는 동안에도 수많은 여성과…….”

“그래. 확실히 공이 적격이지.”

그저 가볍게 꺼낸 말인 듯 루드비히는 웃으며 쉽게 말을 거두었다. 그 후로 정찬은 신년 연회나 날짜 이야기 따위로 돌아가 끝을 맺었다. 그런 그들의 평온이 깨진 것은, 그렇게 정찬이 끝나고 그들이 각자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정찬실을 나설 무렵이었다.

“공은 나 좀 보지.”

낮게 귓가를 긁는 음성이었다. 라키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핑계야 그럴듯했다만…….”

“…….”

“결국 5황녀가 황궁을 떠나 중앙과 멀어질 것이 꺼려지는 것이지. 공은?”

“그렇습니다.”

라키엘은 순순히 인정하며 입가에 그나마 미미하게 걸려 있던 미소를 지웠다.

“아직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다고 한들 황녀가 공을 남편으로 두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공이 계획한 그 아이의 모든 여정에 있어서 말이야. 결혼 후에는 그 아이를 네 곁에 묶어 휘두르기도 좋을 테고.”

“…….”

“운이 좋다면 공께서 그 아이 뒤에서 황제 놀음도 할 수 있겠지.”

루드비히는 싸늘한 음성으로 비꼬았다. 라키엘은 제 입속에 들이밀어진 칼 같은 말에도 동요 없이 차분하게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경험도, 세월도 부족한 제가 폐하의 통찰력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선 저에 대해 한 가지 오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오판?”

“혹은 폐하의 따님에 관해서요. 저는 그녀를 조종할 수 없고, 그녀는 제게 조종당하지 않습니다. 제 속이 아무리 시꺼멓고, 폐하께서 그 속을 들여다보셨다고 한들 제 능력 밖의 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능력 밖의 일이라…….”

“저는 5황녀가 계승권자로서 가장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그 아이의 혈통이 얼마나 완벽한지?”

혈통, 라키엘은 그 말을 묘한 얼굴로 곱씹었다.

라키엘의 눈 위로 순간 질척한 증오와, 기묘한 승리감이 선득하게 얽혔다. 라키엘이 겸허하게 머리를 숙였다.

“폐하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그것만으로 누구나 고귀합니다. 저는 그 당연한 고귀함을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태생적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녀가 폐하의 후계로서 얼마나 그 자격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아뢰고 싶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은 제 주제넘은 말 몇 마디가 아니라, 5황녀가 폐하께 증명해 낼 사안일 겁니다.”

“공에겐 그 자격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황녀 전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공과의 결혼으로 황녀의 입지가 더욱공고해지지 않겠는가.”

루드비히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으나, 라키엘은 저 물음에 순순히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에델가르드’가 황위 계승권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제 입에서 내뱉는 것이 저 황제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돌아오는지도. 라키엘은 공손하게 꾸며 낸 표정을 지웠다.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서늘한 총기가 떠올랐다. 이 말만큼은, 간사한 꾸밈처럼 보여선 안 되었다.

“저는 지극히 그녀를 원합니다, 폐하.”

“헌데?”

“그러나 제가 한낱 계집으로서 그녀를 원하고, 가지고 싶기 이전에, 저는 그녀가 주군으로서 바로 서기를 바랍니다.”

“공을 가졌다고 세상에 천명하는 것만큼 그 아이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저는 제가 그녀를 에델가르드의 침실에 들여놓기 전에 그녀의 가치를 세상이 먼저 깨닫길 원합니다.”

루드비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키엘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5황녀는 대단한 여자고, 저는 그녀의 능력과 가능성이 제 욕심이나 혹은 저와의 결혼으로 인해 ‘에델가르드 공의 여자’로 ‘폄하’ 받는 것이 싫습니다.”

라키엘이 5황녀가 에델가르드를 업고 득세할 것을 반대로 그녀에 대한 폄하라 일컫는 것을, 루드비히는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델가르드의 주인이 제 입으로 에델가르드의 이름이 방해가 된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거대한 세력이 아니라, 한낱 여자의 평가에 오히려 누가 될 것이라고. 대놓고 비올레타를 밀어 넣고 차기 계승권을 운운하면서도 제 스스로는 어딘가 한발 물러서 있는 태도였다. 루드비히의 눈이 마치 그 속을 헤집듯 라키엘의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했다. 라키엘은 천천히 루드비히의 시선을 마주했다.

달라야 했다. 저 시선이 비올레타를 볼 때, 미하일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 했다.

“황녀가 그리 대단한가?”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키엘은 느릿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들의 사이로 숨 막히는 적막이 들어섰다.

“저희의 결혼은 적어도, 그녀가 에델가르드를 ‘가졌다’고 회자될 수 있을 때.”

“…….”

“그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최대한 빨리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미하일에 비해 어떠한가?”

루드비히가 문득 무심하게 물었다. 라키엘은 순간 딱딱하게 굳은 채로 루드비히를 바라보다 이내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이를 한 번 세게 악물었다가 곧 입매를 부드럽게 풀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키엘의 대답이 흥미로운 듯 루드비히가 픽 웃었다.

“참고하지.”

루드비히가 몸을 일으키자 라키엘이 얕게 고개를 숙였다. 루드비히는 라키엘을 그대로 지나쳐 위스키가 놓인 콘솔로 향했다. 이윽고 쪼르르하고 액체가 잔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라키엘은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제가 그를 등진 꼴이 되기 전에 먼저 몸을 돌렸다. 두 잔 모두 채워 양손에 든 루드비히가 라키엘에게로 걸어와 잔을 내밀었다.

“들지.”

“감사합니다.”

라키엘이 그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들이켜는 것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루드비히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무 장관이 공석이지.”

“…….”

“그대의 조부가 사퇴하고, 국정 전반을 다스리던 재상을 폐지한 이후 내무 장관은 그 책임이 막역한 자리였다. 선대 카디링거 후는 그대의 조부가 남긴 빈자리를 채울, 유일한 존재였고.”

“그렇습니다.”

“평생을 헌신한 선대 후를 생각한다면 그의 우수한 아들에게 일임하는 것도 도리라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카디링거가 내무를 지나치게 오래 독점해 왔다 하여 반발하는 이도 적지 않다 들었다. 공의 의견은 어떠한가?”

“현 카디링거 후가 수많은 경험을 가진, 자격 있는 뛰어난 관료라는 것에 이의를 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대를 이은 세습이 관료들에게 불만을 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 역량을 충분히 따져 기용하심에도, 그 고충이 곡해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 그렇다더군. 그래서 대안을 찾기 시작했지.”

라키엘은 말없이 새까만 눈으로 루드비히를 보았다. 루드비히가 그 시선을 마주한 채 우아하게 잔을 들어 목을 축이듯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브나리오 백에게 물었더니 공을 말하더군.”

“…….”

“공이 소공작 시절부터 에델가르드 령에서 이뤄낸 성과가 퍽 훌륭하다 들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정계의 중심에 서서 배워 보는 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공은 추밀원에서 평생 피곤한 놈들 다루고 살 팔자니 말이다.”

라키엘은 그 다디단 제안에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는 대신 여유롭게 잔을 들어 위스키로 목을 태웠다.

언제나 문제는 발안이지, 발안에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황제는 그 한마디로 1황자를 버리고, 대안이라는 말로 카디링거 후를 버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비올레타를 쥐었다. 그것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든, 혹은 얼마나 긴 시간이든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에델가르드를 누르기 위해 카디링거를 이용했고, 카디링거를 견제하기 위해 베론을 이용했다면, 에델가르드가 이용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라키엘은 황제와 카디링거 후의 줄다리기에, 베론의 몰락 속에 충분히 유용한 도구로 쓰일 만한 것이었다.

또한, 그럴 용의도 있었다. 애초부터 믿음 따윈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치도 않다. 황제와 카디링거의 오랜 유대가 덧없음은 이미 저 말 한마디로 충분히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다 똑같은 선상에 있다면, 그보다 반 발자국만 앞에 서 있으면 되는 것이다. 라키엘은 황제에게 기꺼이 이용당할 용의가 있는 것만큼, 제가 이용당하는 것을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제 바로 앞에 기회가 떨어졌다. 라키엘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진하게 웃었다.

“겸허함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영광된 뜻에 따르겠나이다.”

얄팍한 얼음이 덮인 겨울 호수 위로 라키엘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조금만 망설이면, 혹은 조금만 힘을 줘 걸으면 산산이 깨어져 아득한 아래로 끌려 내려가고 말, 위태로운 평온함 위에서.

“여기 『렐브릴인과 야만인의 전쟁에 대하여』, 그리고 『합리적 침략』, 『멜로모네스 전쟁사』까지. 다 읽었어요, 클레이런스 후.”

대동한 하녀가 들고 있던 책을 낚아채듯 가져온 비올레타가 클레이런스 후작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부러 소리를 내며 의기양양하게 놓았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작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잔뜩 콧대를 세우고 있던 비올레타가 순간 움찔했다.

“이번에도 질문하실 것이 없나요?”

“제가 왜 질문해야 합니까?”

“그야, 제가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도 할 겸…….”

“어련히 알아서 잘 읽으셨겠죠. 설마 전하께서 읽지도 않은 책을 들고 와 늙은이 앞에서 그리 의기양양해 하시겠습니까.”

그는 비올레타를 지나쳐 서고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비올레타의 얼굴이 불안감에 흐려졌다. 그리고 1분여가 지났을 무렵, 후작은 비올레타가 가져온 책의 정확히 두 배를 가지고 나왔다.

“아무래도 제가 전하를 과소평가한 것 같아서요. 저번에 내어 드린 책들도 그렇고, 이번엔 더 빨리 읽고 오신 걸 보아하니 내용이 그리 어렵진 않았던 듯합니다.”

“아뇨. 정말 어려웠는데요.”

“아닐 겁니다.”

“……제가 어려웠다니까요?”

“얼마 전 얄타 뫼르겐 교수의 요청으로 그를 만났는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전하를 칭찬하더군요.”

“…….”

“전하께서 메네빌레 교수와 이미 예르키외까지 공부했다고 하면서 제게 가르침을 받을 소양은 넘치도록 충분하시다고. 그러니 이번에도 전혀 어려움 없이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제가 그동안 전하께 드린 책을 모두 합쳐도 전하께서 공부하신 예르키외의 책들이 더 어렵습니다.”

얄타 뫼르겐, 망할 영감탱이가 사람 면전에선 그렇게 구박만 해 대면서 왜 쓸데없는 데 값싼 칭송을 뿌리고 다녀서……. 비올레타는 잠시 이를 꽉 깨물었다가 웃으며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 의자를 빼 앉았다. 그녀가 앉기 무섭게 클레이런스 후작은 그녀의 앞에 책들을 놓았다. 이렇게 책만 내준 것이 다섯 번째였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된 여정이었으나 아직 그가 저를 완전히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 비올레타는 예쁘게 보이기 위해 여태 얌전히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왔다. 그러나 이제 그런 척하기도 지칠 때가 온 것이다.

미약한 흥미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내용을, 누군가의 감시나 압박 없이 오직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계속 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에델가르드 공저에서의 강제 학습이 차라리 그리울 정도였다. 이렇게 책을 내주면서 후작은 어떤 기한도 정하지 않았고, 보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양 굴기까지 했다. 그저다 보면 오시라는 말뿐이었던 것이다. 저 혼자 몸이 달아, 빨리 다음 수업을 위해 스스로에게 계속 못 할 짓을 하는 것이 속이 쓰렸다.

그녀는 이제 질린 듯 제목을 보지도 않고 제 맞은편에 앉는 후작에게 물었다.

“이번에, 이 책들만 읽어 온다면 다음에는 후의 저서에 대해 배울 수 있나요?”

“경험에서 배운다는 말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말 그대로입니다.”

“어, 그러니까, 경험으로 배울 수 있다면 좋겠죠. 그 어떤 책보다 본능적으로 체득할 수 있고, 잊어버리기도 힘들 거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분명 자기가 경험하고, 그 경험에 의해 배운다는 것은 그 어떤 지식보다 강렬하게 남고, 쉽게 잊히지도 않죠.”

뜬금없는 화두가 이어지자 비올레타가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다 포기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그러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을 겁니다. 혹은, 경험하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기 위해 굳이 경험이란 값을 치를 필요도 없겠죠.”

“…….”

“한정된 인생을 살면서 경험으로 배운다는 것은 가끔 어리석습니다. 남의 경험을 이용해 깨닫는 것은, 그보다 좀 더 현명하고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것이 바로 군사軍史를 군사 교육의 기초로 내세울 합리적 근거입니다.”

“……조용히 그 입 닫고 읽으라면 계속 읽으란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뜻하신 바 따로 있고, 제가 도무지 귀찮아서 저를 방치하신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

비올레타는 기운 빠진 표정을 수습하지도 않고 무기력하게 책의 표제들을 훑어보았다. 비올레타에게 보이지 않게 슬쩍 입가를 끌어 올린 후작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 책들은 무조건 옳지 않습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고, 때로는 이 두꺼운 책들보다 경험이 월등히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

“…….”

“전쟁을 경험으로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불행할 뿐입니다.”

평생 수많은 전장을 호령한 노장의 말은 그저 잔잔했으나 속을 턱 틀어막을 정도로 무겁기도 했다. 비올레타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형한 총기가 서린 눈이 조금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그가 제게 방심하기 시작한 것을 눈치챈 비올레타가 빙긋 웃었다.

“후께서 질문을 않으셔도, 저는 후에게 질문할수 있는 거죠?”

밝은 목소리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후작이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레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신년 연회에서 저랑 같이 춤 한 번만 춰 주실래요?”

“…….”

“네?”

“제가 왜요.”

“존경하는 스승님과 단란하게 춤추는 모습을 보여 주고…….”

“전하께서 ‘클레이런스 후’를 과시하고 싶으신 건 아닙니까?”

비올레타는 억울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스승님, 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무슨 에델가르드 공인가요?”

“확실히 둘 다 속이 시꺼멓긴 합니다.”

“그건 정말이지 불쾌한 분류네요. 그리고 다 늙으신 후를 어디다 무엇으로 과시합니까? 잘생긴 아드님이시면 모를까. 그렇게 안 봤는데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전혀 다른 말로 잡아떼는 모습에 후작은 기막힌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터무니없는 얘기나 계속하실 거면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죠.”

“아뇨, 잠깐! 알았어요. 관련 있는 질문으로 돌아가죠.”

“말씀하세요.”

“이건 대체 왜 읽어야 하는 건가요?”

비올레타가 집어든 것은 클레이런스 후작이 새로 가져다 놓은 책들 중 하나였다. 『만티네라 전투』라는 제목의 책은 말 그대로 그 전투만을 다룬 것으로, 거의 1,000년 전의 역사이기도 했다. 기껏 그 많은 책들을 읽어놓고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 바람에 눈앞에 보이는 걸로 곧장 짜낸 질문은 시비조였다. 비올레타 스스로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 책의 배경은 현실과는 너무 다른 상황과 조건에, 너무 다른 방식을 사용하던 시절이니까…….”

비올레타가 부드러운 수습을 위해 구구절절 덧붙였지만 후작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의외로 그 질문을 꽤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옛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현실과 상관이 없다 선부터 그으시면 안 됩니다. 만티네라의 영웅 헤르엘시노스는 기존의 전술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인물입니다. 황녀 전하께서 저번에 제게 어쭙잖게 아는 척하시며 이용했던 그 유명한 전술가들의 이론도, 사실은 모두 그의 전술을 기초로 하고 있죠.”

어쭙잖게 아는 척한다는 말에 비올레타는 별다른 변론을 할 수 없었다. 역시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비올레타가 어색하게 되뇌기 무섭게 후작은 그녀에게서 책을 뺏어 가 책장을 휙휙 넘겼다. 그리고 비올레타에게 다시 내밀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나온 방식은 현재에도 널리 쓰이는 사선대형의 모태가 되는 겁니다. 사선대형은 이것을 정밀하게 다듬은 것에 불과하죠. 여길 보시면, 헤르엘시노스가 그때까지의 관행을 뒤집어 중앙과 우익을…….”

비올레타는 급작스레 길어진 말에 눈만 깜빡이다, 그제야 그가 저를 가르치기 시작했음을 깨닫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균형이 맞지 않게 아무렇게나 펴진 책이 무관심 속에 몇 장 더 넘어갔다. 비올레타는 그의 설명을 찾기 위해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문득 잘못 펴진 책장의 마지막 문단에 시선을 멈추었다.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려던 손끝으로 그 문장 위를 천천히 쓸었다.

불안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없으므로, 일단 어떤 일이 결정되면 인간은 그 어떤 사악한 일도 감내해 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겪어야 할 불행이다.

마른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귓속을 날카롭게 찔러 왔다. 비올레타는 이따금 한 장씩 넘어가는 종이와,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 혹은 그보다 조금 위로 시선을 옮겨 손등 따위를 응시했다. 황제의 손은 군인처럼 뼈마디가 굵고 단단했다. 그 외에는 앞에 있는 남자에게 달리 시선을 더 둘 데가 없었다.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책이 이제 반절 정도 펼쳐진 것을 확인하고, 비올레타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눈을 움직여 다시 집무실 안을 살폈다. 루드비히가 그녀의 번역을 보고 싶어 한 이후로 벌써 세 번째 와 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비올레타는 이곳이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나무가 덧대어진 벽과 세밀한 조각들, 붉은 윤기가 흐르는 오래된 가구들, 그리고 나란히 걸려 있는 여섯 개의 초상화. 처음의 막연한 상상에 비하면 결코 크지 않은 방이었다. 그러나 몇백 년의 시간이 오롯이 남아 있는 황제의 집무실은 그 몇 개의 초상화만으로 충분히 위압감을 선사했다. 비올레타로서는 몇 번을 봐도 그 초상화 속 남자들이 모두 황제였으리라는 것 빼고는 누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그림들 사이로 흐르는 아득한 시간만큼은 비올레타가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그 초상화들에서 시선을 내려 다시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속은 지칠 생각도 않고 불규칙한 속도로 계속 뛰었다. 비올레타는 루드비히 앞에 홀로 있노라면, 마치 사자가 제 앞에서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는데도 멍청하고 무력하게 서 있는 듯한 기분이 가끔씩 들곤 했다. 사자의 그 눈을 마주치는 것이 너무 두려운데도, 이유도 모른 채 그 눈을 계속 들여다보며 언제 제가 잡아먹힐지 모르는 상황에 저를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서 도망치라는 듯 속이 시끄럽기도 하고,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이 머리 한편이 마비된 것 같기도 하다. 비올레타는 루드비히를 만나고 비로소 사람이 사람에게 압도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옥죄인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한참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천천히 멎어들었다. 루드비히는 책을 단정히 덮어 놓으며 웃었다.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비올레타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매를 부드럽게 풀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건네는 책을 공손히 받았다.

“이번의 그 책은 황녀가 일전에 번역해 짐에게 보였던 필로비어스의 『통치론』과는 거의 정반대되는 개념이 뼈대가 되지. 보통은 자신이 존경하는 것을 번역하거나 필사하는데, 둘 중 어느 하나를 존경한다기에는 황녀의 선택이 꽤 의아해.”

“역사 선생인 메네빌레 교수가 자주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군주가 의견이 대립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편협한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항상 반대되는 것을 눈에 익혀야 한다고요.”

“군주라…….”

루드비히가 묘한 표정으로 그 단어를 낮게 되뇌었다. 비올레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전에 보여 드린 필로비어스나, 지금 폐하께 보인 군주론 중 아직 어느 것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스승의 말을 존경해 대립하는 두 가지를 선택했습니다.”

루드비히는 비올레타의 대답이 꽤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럼 그 반대되는 것을 모두 공부해 본 결과는 어떤가. 황녀는 둘 중 어떤 것을 높이 사지?”

“……사실 소녀는 아직 그들 중 우위를 논할 정도로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겨우 글자나 깨닫는 수준이고요.”

“그렇다면 질문을 달리하지. 어떤 것이 마음에 더 닿더냐?”

비올레타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고작 둘 중 무슨 책이 마음에 드는지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을 묻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도마 위에 오른 책 중 하나는 정당성 없는 정부가 강도나 다름없다 말하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통치자의 도덕성이 국가의 이익보다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올레타가 단순히 보기엔 루드비히의 스무 해를 이어 온 행보는 후자의 비틀어진 변형에 가까웠다. 황제에게 잘 보이는 것이 지상 목표인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와 같다고 말하는 것만큼 좋은 대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어린 계집 눈에 보이는 것의 산물임을 알기에 비올레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비올레타가 잘 보이고 싶어 저런 대답을 하고 있노라고 생각해 주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그 모자람이 귀여워 보이기라도 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감히 황제의 정치관을 제멋대로 단정 지은 걸로도 모자라, 얄궂게 머리 굴리는 데 써먹은 것이기도 했다. 몇 초를 몇 분처럼 쪼개 초조하게 고민하던 비올레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황제가 문득 말했다.

“……파사칼리아를 많이 닮았구나.”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이 일순간 뚝 끊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온화한 목소리였다. 비올레타는 그의 눈에서 묘하게 비켜 있던 시선을 틀어 그를 응시했다. 자신과 같은 채도의 눈동자 위로 켜켜이 쌓인 감정이 떠올라 있다. 비올레타는 루드비히의 그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파사칼리아의 목걸이를 걸고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그 눈. 꿈속을 헤매는 듯, 혹은 지옥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던.

오래된 꿈을 거꾸로 되짚듯 비올레타의 얼굴 위를 배회하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졌다.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변하고, 선득한 공기 속에서 그가 웃었다. 비올레타는 그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제가 잔뜩 굳어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는…….”

비올레타가 말을 더 어렵게 잇기 전에, 그녀의 곤란함을 덜어 주려는 듯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짐에게 잘 보일 대답으로 군주론을 읊었다면 꽤 귀여웠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나쁘진 않지.”

“…….”

“즉위 후 신문에서 짐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많이 인용된 것은 필로비어스였다. 대부분의 기사에는 짐이 군주의 미덕인 그의 통치론을 역행하고 있노라고 비꼬기 일쑤였고, 짐은 그 기사를 찍어 낸 신문사를 불태우기 일쑤였지.”

비올레타는 침착한 음성이 회고하는 것을 멍하니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이 정의에서 비롯된다는 필로비어스의 통치론은 황제가 아들에게 바라는 군주로서의 소양이고, 짐은 그것을 배워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정당성이 전제된 채 살아 본 적도, 군주로서 기대 받은 적도 없었지. 그렇다고 해서 오늘 네가 들고 온 그 실리주의적 책을 좇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믿는 것은 항상 저 스스로로 족하지. 권력도, 정당성도, 결국은 마지막에 남는 자에게서 나오는 법이고, 군주는 그것이 항상 자신이라고 믿으면 그만이다.”

“…….”

“고고한 이념과 체제는 똑똑한 바보들이 경쟁하게 두어라. 무엇이든 네 손안에서 잘 통치되는 게 최고니까.”

명료한 말과 함께 비올레타에게 부드럽게 시선을 부딪치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비올레타는 기계적으로 그 말의 내용을 곱씹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조금 내리깔았다. 흔들리는 눈이 그에게 보일까 두려웠다. 착각일 것이다.

저 얼굴 위로, 제 아버지가 보인 것은.

그리 다정하지 않은 표정으로, 제 인생에서 깨달은 몇 가지들을 딸에게 담담하게 전해 주는 ‘아버지’의 얼굴을 비올레타는 알고 있었다. 그 진짜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사랑스러워했고, 그 말이 ‘감사할 줄 알라’는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교훈이었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비올레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여전히 저로서는 하나도 읽어 낼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레타는 그가 이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의 그의 온도를 누가 묻는다면, 비올레타는 조금 따뜻한 것도 같다고 대답할 것이었다. 온화한 시선,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도.

루드비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보고 덩달아 몸을 일으키려는 비올레타의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그의 손 위에 무언가가 계속 들려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늙은 시종장이 그들에게로 공손히 다가와 손에 들린 감색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 크진 않았으나 단순히 패물을 넣어 두기엔 꽤 깊어 보이는 상자였다. 루드비히는 친히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깊은 상자 속에서 꺼낸 것은 가늘고 간소한 금색의 관 위로 붉은 물방울이 거꾸로 길게 늘어진 형상의 루비 티아라였다. 크고 작은 붉은 보석이 알알이 박힌 주위로는 작지만 정교하게 커팅된 다이아몬드 조각들이 빈틈없이 세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올레타의 눈길을 끈 것은 그 귀한 소재보다는 바로 그 티아라가 100년전 여인의 초상에나 나올 법한 오래된 형식이라는 점이었다.

보석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저 오래된 티아라가 신기한 듯 비올레타는 그 티아라를 감상하다, 이내 그것이 제 머리에 씌워지는 것에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짐의 어미가 결혼할 때, 외조부가 가문에 내려오던 것을 선물한 것이다. 그녀가 평생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지.”

에르가넷 브나리오. 황태자 시해 혐의로 단두대에 선, 선황제의 네 번째 황비이자 황제의 모친.

비올레타는 찬찬히 그의 눈을 살폈다. 그는 어릴 적 제 어미의 죽음을 목도했다고 했다. 얼마나 끔찍할 기억일지는 그녀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폐하께 그렇게 귀한 것을 제게 어찌…….”

“잘 어울리는구나. 짐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니, 네게 주마.”

그리고 제 머리 위에 얹어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일지도.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가 즉위 이후 특별히 제 모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과―만약 있었다면 라키엘이 말해 주었을 터다.―, 단 한 톨의 절절함도 느껴지지 않는 지금의 눈에서 곧바로 제 생각에 위화감을 느꼈다. 세월이 아픔을 무디게 만든 것인지, 혹은 본래부터 그는 제 어미가……. 비올레타는 쓸 데도 소득도 없이 뻗어 나가는 제 생각을 잘랐다.

사실, 어떤 것이든 비올레타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과 상관없는 그 속 어느 구석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것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리란 것만큼은 확실했고, 비올레타는 그것으로 족하면 될 것이다. 비올레타가 황홀한 듯 손을 제 머리 위로 뻗어 티아라를 매만지며 웃었다.

“폐하께서 할머니의 유품을 제게 주셨다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되는지 아실까요. 제게는 정말이지 그 어떤 보석과도 비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그리 가치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네 커다란 보석함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도 들지 않을 하찮은 것이니까. 그리고 짐에게도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진 않지. 다만…….”

루드비히는 느긋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가 말을 끝내면 제가 받은 모든 선물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답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할 작정이었던 비올레타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비올레타의 얼굴을 거슬러 올라가 에르가넷의 티아라 위에 멈추었다. 애틋하고, 모멸하고, 차갑고, 질척한 것이 한 데 뒤섞인 기묘한 시선이 붉은 보석 위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순간이었고, 이내 루드비히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모두가 짐이 그것에 많은 의미를 가지고, 높은 가치를 느끼길 기대해. 혹은 그러리라 믿거나, 그러리라 단정 짓지.”

“……폐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까?”

“너 역시 그러하듯이.”

“당연하게도, 폐하의 모친께서 폐하께 남기신 것이니까요.”

“짐이 그 사소한 기대를 배반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어미가 네 어미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

“혹은 세상의 모든 자식이 너처럼 예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

루드비히는 낮게 웃었다.

“이것도 알려 줘야겠구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이 네가 어떻게 생각하리라 믿을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

“그런 의미에서 네 머리에 얹어 준 조모의 유품은 그들에게 꽤 중요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짐은 신년 연회에서도 이 모습을 보고 싶거든.”

루드비히의 손이 비올레타의 머리 위 티아라를 가볍게 바로잡았다. 비올레타가 그 손 아래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애써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나 적당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결국 정말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게 어찌 이렇게까지 해 주십니까?”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를 배려하기 시작함으로써 비올레타가 얻어 낸 반사적인 이익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비올레타는 그 이전부터 그가 저를 묘하게 안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에게 황제의 대외적 관심을 계속 부여하는 게 전자 덕분이라면, 지금 제 머리 위에 있는 에르가넷의 유품은 후자의 연장선에 가까우리라.

“짐은 네 시작을 위해 블라디모로를 열고, 네가 몬드리올과 로드리고, 클레이런스를 가지도록, 가만히 모든 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짐은 여기까지가 네 십삼 년에 대한 적당한 보상이라 생각한다.”

“……그 모든 것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네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오로지 너 때문이다.”

다시 내려온 시선이 비올레타의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짐에게 예쁨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었지.”

“그렇습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딸이기 때문이란 이유는 꽤 멍청하고 유치해. 넌 고작 그것이 다일 리 없는 아이고.”

“…….”

“그럼에도 너는, 아마도 짐이 처음으로 가져 본 자식일 것이다.”

비올레타는 다소 망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너처럼 짐을 보고, 너처럼 짐에게 말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지.”

“…….”

“그러니 너는, 그 멍청한 한마디로 이 티아라를 샀다고 생각해도 좋다.”

“올해 신년 연회의 와인은 로드리고의 루밀스산 중에서도 후작께서 특별히 가문 내 보관하시는 아주 귀한 극소량의…….”

시종장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주목할 동안, 카트린느는 신경질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바짝 날이 선 시선이 초조하게 제 주위의 군중을 배회했다.

“고모님.”

“……이카르트.”

카트린느의 측면에서 나타난 이카르트가 제 고모에게 와인글라스를 내밀었다. 카트린느는 조금 멍하니 이카르트의 손가락과 그 와인글라스 위 세밀한 황실의 조각, 그리고 그 안에서 얕게 찰랑거리는 검붉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잔 속에서 이는 작은 파도와 함께 주변의 소음이 일그러졌다.

“괜찮으십니까?”

문득 카트린느의 얼굴이 이상한 것을 느낀 이카르트가 낮게 물었다. 카트린느는 입매만 끌어 올려 짧게 웃고는 그의 손에서 와인글라스를 낚아채듯 잡았다.

“네 손은 다 나았니?”

“예전에요.”

“다행이구나.”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를 불러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괜찮다. 이카르트, 킬리안을 불러 주겠느냐?”

“그게, 사실 이미 사라져서요.”

카트린느는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이카르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 킬리안이 원하는 대로 조용히 있게 두세요.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얼마나 더.”

카트린느가 날카롭게 이카르트의 말을 잘랐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해야 하겠느냐? 그 자식에게.”

카트린느가 앞을 응시한 채로 악문 잇새로 비아냥거렸다.

“시간? 우리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게 있는 줄 알아? 그 아이는 지금 우리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정녕 폐하가 우리를 안배하셨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라도 하다더냐?”

“……아마도 그게 아닌 것은 킬리안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고모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요.”

“근데 뭐가 문제기에 그리 유난을 떨어. 세상에 저 혼자 불행한 것마냥! 불행에 취할 여유가 있다는 건 애초에 불행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진짜 불행한 사람은 불행을 곱씹을 새도 없어.”

“고모님.”

“너도 날 비난하고 싶으냐?”

카트린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카르트를 올려다보는 눈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카트린느가 낮게 속삭였다.

“꼭 내 아비처럼 날 보는구나. 그 잘나신, 칼바도어 드 베론처럼…….”

“…….”

“입버릇처럼 네 조부가 하던 말이 있지. 이카르트가 가문을 승계할 때까지 네년과, 네 오라비가 할 일은 죽은 듯이 살며 가문의 명맥을 잇는 것뿐이라고.”

카트린느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카르트, 황실에서 죽은 듯이 산다는 건, 그냥 죽어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단다. 그리고 그렇게 죽기 위해서 황실에 들어오는 계집은 없어.”

이카르트가 말없이 고요한 눈으로 카트린느를 응시했다.

“네 아비는 몰라도 난 네가 얼마나 베론다운 아이인지 알아. 돌아가신 네 조부에게 넌 그저 귀여운 손자가 아니라 진정한 후계자라는 것도, 네 아비는 계속 모른 척 평생 도망이나 다니지만 이 멍청한 고모도 그 정도는 알지. 베론의 영광은 나의 영예이기도 하단다. 네 조부의 바람과는 다르게 난 살아서 널 도울 것이다.”

“…….”

“이카르트, 이것은 다 널 위한 것이기도 해.”

카트린느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이카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킬리안과 어떻게든 말해 보렴. 신년 연회에 황자 하나 보이지 않는 것쯤이야 어차피 대단한 일도 아니지.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그리 합리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이래선 곤란해. 그 아이가 내 말이나 네 아버지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너도 잘 알겠지. 하지만 네 말만은 잘 듣잖니. 그러니…….”

“굉장히 황송한 말씀입니다만, 킬리안에게는 정말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 말도 듣지는 않고요.”

“이카르트.”

“그리고 고모님은, 시간이 없다면 세상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서라도 그 녀석에게 시간을 만들어 주셔야 할 겁니다.”

이카르트는 단호한 어조로 대화를 정리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카트린느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이카르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와인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인 카트린느가 다시 홀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처음 궁에 돌아왔을 때와 달리 제법 예쁘장한 태가 나는 계집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파사칼리아가 저랬을까.

카트린느는 가늘어진 눈으로 비올레타를 훑으며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황녀는 딱 제 어미가 가장 아름다웠을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제 부모가 서로를 사랑했을 무렵의.

그 무렵에서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성년과 겨우 가까워졌던 카트린느로서는 전혀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질투로 미쳐 버릴 것 같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전혀 모르지만 그 흔적은 완연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카트린느의 탐욕스러운 눈길이 비올레타의 구두를 시작으로 드레스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구불구불 길고 탐스럽게 늘어트린 적갈색 머리칼과 침엽수처럼 짙은 암녹색 눈동자. 루드비히와 똑같고, 카트린느는 그토록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 저 머리칼만이라도 킬리안이 가질 수 있었다면, 저 눈동자라도 자신의 아들이 가질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카트린느의 시선이 비올레타를 얼굴에서 머리카락으로,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씌워진 티아라로 옮겨 갔다.

카트린느는 표정 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5황녀의 머리 위에서 붉게 빛나는 오래된 티아라는 카트린느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을 낳으면, 황자를 낳으면 꼭 갖고 싶은 것이 있노라고 루드비히에게 그녀가 수십 번 말했던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녀는 킬리안을 낳았을 때 저기 서 있는 황녀보다도 어렸고, 제 젊음과 아름다움에 자만했으며, 그 자만이 그저 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 필요했다. 아들은 저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황후에겐 황태자가 있었고, 1황비에겐 황제의 장자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기만 한 제가 가져 보려고 악을 쓴 것은 이미 그녀들이 가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필요했다. 황후의 관도, 1황비의 권세도 모두 의미 없다고 비웃을 수 있는 무언가가.

그게 바로 저것이었다. 저 대단할 것도 없이 그저 오래된 물건이 카트린느에게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황제의 모친이 비극적인 삶 끝에 남기고 간 몇 가지 물건 중 하나. 황제가 어떤 계집에게도 준 적 없는, 그 어머니의 물건들. 저것만 있으면 파사칼리아의 사랑을 뺏고, 베티스의 총애를 뺏고, 그녀들의 고고함 위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 잘난 계집들 앞에서 너희는 결국 빈껍데기뿐이라고 비웃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그 순간이 가까워 보였다. 몇 발만 더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정작 저를 안는 루드비히가 빈껍데기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로부터 스무 해를 훌쩍 지나, 자신은 지금 여기에 서 있었다. 파사칼리아의 딸은 그 티아라를 쓰고 황제의 곁에 서 있고, 자신은 고작 여기에 있다. 저는 사실 이미 버려졌다. 2년 전, 그 북의 탑에서 황제가 죄를 제 머리 위로 씌워 준 순간.

“저 빌어먹을 계집.”

카트린느는 곁에서 자그맣게 들리는 제 오라비의 목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왔어?”

마치 어릴 때처럼 말갛게 웃는 얼굴에 베론 후가 잠시 흐린 눈으로 제 누이를 보다 이내 혀를 찼다.

“웃음이 잘도 나오는구나. 저 꼴을 보고도.”

“딱히 웃지 못할 광경도 아니지.”

“몸이 불편해 보인다고 들었는데.”

“이카르트에게는 그리 보인 모양이지.”

“이카르트?”

“이카르트가 오라버닐 부른 게 아닌가?”

베론 후는 비식 웃었다.

“엘레인이 말해 주더군. 이카르트가 그녀에게 시킨 모양이지.”

카트린느가 실수했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그놈이 내게 말을 걸 놈인가. 아비를 무시하지 못해 안달 난 놈이지.”

“……아직도 이카르트와 그런 줄 몰랐어. 미안해.”

“그 귀한 입으로 사과하지 마. 늘 그랬으니 신경 쓰일 일도 아냐. 어차피 저 혼자 잘난 놈이고.”

“오라버니의 잘난 아들이야.”

“내 잘난 아버지의 잘난 손자지.”

베론 후가 빈정거리며 카트린느에게서 와인글라스를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가늘어진 눈매가 다시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와인글라스가 그의 입술과 멀어지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저 계집으로부터 시작됐어.”

“…….”

“저 계집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모든 게 뒤엉켰지. 안 그래?”

“글쎄.”

“저 계집이 고작 이 년 만에 가진 게 안 보여? 지금 저 계집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메이어와 로드리고의 자본, 클레이런스와 몬드리올의 군권, 그리고 여기까지만 해도 추밀원에서 제가 행사할 수 있는 표가 네 표야. 에델가르드의 당연한 표까지 생각한다면 다섯 개나 되지.”

“그래 봤자 계집이야. 장식장의 꽃이지.”

“추밀원을 벗어나면? 벗어나면 아예 셀 수도 없어. 저기 서 있는 황녀의 시녀 중 네이튼가의 딸이 있다는 건 알겠지. 황제의 칙허장을 받은 아홉 개의 회사 중 두 번째로 큰 칙허 회사야. 볼루아 부인이 저 계집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는 들어 봤나?

그리고 그 볼루아 부인의 살롱에 드나드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 인간들인지는 들어 봤어? 볼루아 부인이 모은 그 지식인들은 고스란히 저 계집에게 갈 테고, 미하일을 따르던 트레비안, 루도비카, 일롯, 그 대귀족들은…….”

카트린느는 피곤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황녀는 결국 그렇게 제 목숨 하나 지킬 뿐이야. 그렇게 요란하게 제 존재라도 알려야 다음 대에 살아남을 테니까.”

“고작 황녀의 목숨값이 그렇게까지 비싸리라고 생각하나? 에델가르드가 계집 하나 못 지킬까.”

“…….”

“그 모든 것이, 저 계집의 황위를 위해 준비하는 값이라고 한다면 비로소 납득이 될 만한 얘기가 되지.”

“저 계집이 여제라도 되려고 한다는 소리야?”

“믿기지 않게도. 킬리안이 빌키어스의 시간을 잡고, 빌키어스가 킬리안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동안, 저 계집이 얼마나 폐하와 가까워졌는지를 봐.”

카트린느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이 비올레타의 머리 위 티아라를 한 번 바라봤다가 그 곁에 있는 루드비히에게로 움직였다. 차마 얼굴로 올라가진 못했다. 홀에 들어선 후 일부러 한 번도 바라보지 않은 얼굴이었다. 제 쪽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을 그 얼굴에 새삼스레 절망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수도로 돌아온 뒤 단 한 번도 황제를 만나지 못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열리지 않는 황제의 침실 앞에서 기다릴 수는 있어도, 그의 외면은 눈앞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더 움직여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제 눈에 들어온 남자는…….

“빌어먹을, 정말이지 저 계집은 대체 어떻게 폐하께 수를 써서는…….”

카트린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트린느는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윽고 루드비히가 비올레타의 뒤로 나타난 파사칼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눈이 다정하게 접힌 눈매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 역시 카트린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카트린느는 제가 전혀 모르는 그들의 그 시절, 그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그 시절이 어떤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의 손을 맞잡았다. 피가 식었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카트린느는 뻣뻣하게 손을 뻗어 제 오라비가 들고 있는 와인글라스를 가져왔다. 입가로 들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멈춘 채 희미하게 떨리는 손안에서, 검붉은 파도가 잘게 일었다. 마치 잔 속에 담긴 것이 제가 토해 낸 피처럼 아찔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카트린느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녀가 열일곱,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마치 악어가 피를 사랑하듯 당연하고 고상하지 못했으며 탐욕스러웠고 맹목적이었다. 제 사랑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언제나 절박했다. 그 사랑이 결코 닿지 않음에도 그녀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들, 제 오라비, 제 조카, 제 가문……. 발끝부터 야금야금 살점을 갉아먹기 시작한 그 불안들이 점점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이윽고 불안은 좀 더 빨라졌고, 목을 죄고, 숨통을 막다가, 제 사랑이 웃는 순간…….

불안이 괴물처럼 머리까지 집어삼켰다.

“모든 게 저 계집으로부터 시작됐어. 저 계집이 나타난 이후로…….”

베론 후는 황제에게서 멀어져 어딘가로 걸어가는 비올레타를 응시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카트린느의 시선은 루드비히에게서 파사칼리아에게로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는 느릿하게 와인 글라스를 들었다.

아니, 모든 것은 저 여자에게서 시작되었다.

문이 열리며 드러난 방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클레이런스 후작이, 비올레타의 뒤를 응시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불편한 손님께서 이번에는 불청객까지 데려오셨군요.”

비올레타가 입술을 조금 삐죽이며 걸어 들어왔다.

“클레이런스 후, 서운하게 제자에게 손님이라뇨. 너무하시네요.”

“네가 손님이라는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고, 네가 불편하다는 부분이 중요한 거다. 저 말에서 중점을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어?”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최종적으로 중점은 공께 두었습니다. 제가 공을 일컬어 말하기를 불청객이라 했죠. 대체 왜 왔습니까?”

후작은 냉랭하게 라키엘의 말을 잘랐다. 라키엘이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스승님이 수업은 요즘 어찌하시나 궁금해 잠시 보려고 들른 겁니다. 아무래도 세월도 꽤 흘러 예전 같지 않으실 것 같기도 하고…….”

라키엘의 말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클레이런스 후는 몸을 돌려 비올레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라키엘이 그 뒤를 따르며 비식 웃었다.

“스승님께서 전하를 맡아 주신 데 대한 감사 인사도 못 했고요.”

“공에게 감사 받을 이유 없습니다. 어쩌다 재수 없게 발목 붙잡힌 거니까. 이를테면 공의 어릴 적과 같이.”

“꽤 유난스럽죠. 후께서 이해하세요. 이 남자는 저를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쯤으로 생각하거든요. 자기는 무슨 어미 닭이나 되는 줄 알고요.”

비올레타는 화사하게 웃으며 아닌 척 빈정거렸다. 에델가르드의 인장이 독수리인 것을 빗댄 것이었으나 라키엘은 별달리 기분 상한 기색도 없이 비올레타의 팔을 부드럽게 잡고 자리에 앉혀 주었다. 그 아래로 묘하게 압박 어린 시선이 느껴지긴 했으나 표면적으로는 부드럽다고 할 만했다. 필시 여기 들어오기 전이든 언제든 별 시시껄렁한 다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클레이런스 후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제 귀한 시간을 쪼개 못마땅한 젊은 여자와 더 못마땅한 젊은 남자의 유사 사랑싸움 따위를 지켜볼 여유는 그에게 없었으므로, 그는 자리에 앉지 않은 채로 어느새 착석을 마친 그들을 내려 보았다.

“클레이런스 후? 앉으셔요.”

“뭐하십니까? 앉지 않으시고요.”

메아리처럼 성가신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리자 클레이런스 후는 피곤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을 덮었다.

“오늘 수업은 글렀다고 보는 게 여러모로 좋겠군요. 제가 쓸데없는 노력을 하기 전에요.”

“역시 이 작자 때문인가요? 내보내시죠. 공부는 한시도 쉴 수 없는 고결한 것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왜 그리 활짝 웃고 계십니까?”

후작은 수업을 사수해야 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급속히 환해진 비올레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성가셔 죽겠다는 듯 볼 땐 언제고, 나가기만 해 보라는 눈으로 간절하게 라키엘을 보는 그 속이 뻔했다. 비올레타가 멋쩍은 듯 괜히 입매를 내렸다. 후작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걱정 마십시오. 오늘은 제가 더 귀찮으니까.”

후작은 문가에 서 있던 하인에게 손을 들며 그들에게 물었다.

“마침 영지에서 며칠 전 올라온 아펠바인apfelwein, 사과주이 있습니다. 불청객에겐 이 정도면 과분한 대접일 것이고, 전하께선 아펠자프트apfelsaft, 사과 주스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뇨. 저도 아펠바인으로.”

라키엘이 질책하듯 찌푸린 눈으로 비올레타를 응시했으나 비올레타는 빙긋 웃으며 모른 척했다. 후작은 둘이 그러든 말든 무관심한 표정으로 하인에게 눈짓했다. 이윽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글라스가 그들의 앞에 놓이고, 그 속으로 투명한 호박색 액체가 떨어졌다. 비올레타에 이어 라키엘의 잔까지 직접 채워 준 뒤, 후작은 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제 잔에도 아펠바인을 따르며 대화를 이었다.

“이틀 전 펠로베르가 부르농빌을 점령했다더군요.”

밀니로와 펠로베르가 무력으로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는 옛 잉거스트의 땅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비올레타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끄덕였다. 애초에 뺏고 뺏기길 반복하며 군사경계선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곳이었으니 그녀가 놀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라키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입가에서 잔을 내려놓으며 비올레타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부르농빌은 옛 잉거스트 공국령이 아니라, 밀니로 본토지.”

비올레타의 얼굴에 그제야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차피 잉거스트를 탈환하는 전쟁 아니었나요? 어째서 펠로베르는 밀니로 본토까지 침공을…….”

“펠로베르가 본래 접전지로 예견되어 있던 잉거스트 변경의 틸레 지역을 아래로 길게 우회했어. 부르농빌은 밀니로 남부의 군사적 거점지역이거든. 밀니로 남부와 접경해 있는 브레다는 물론 그란토니아와도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맙소사……. 펠로베르에서 그란토니아로 오는 길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런 셈입니다.”

라키엘이 잔을 드는 것을 흘끗 본 클레이런스 후가 대신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올레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럼 그들은 그렇게 우리를 직접 압박해, 밀니로에 대한 원조를 거두게 할 생각인 건가요?”

“펠로베르에서는 우리에게 그보다 조금 더 큰 결정을 원합니다.”

“더 큰 결정이라면요?”

“종전終戰 협상입니다. 펠로베르 황제가 친서로서 폐하께 공식적으로 제안해 온 사안이죠.”

후작은 비올레타에게 덤덤하게 대답해 주고는, 흥미로운 듯 웃고 있는 라키엘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네가 듣고 싶은 게 이거였겠지. 국무장관 임관 앞두고, 그 바쁘신 시간 쪼개 시시한 수업까지 쫄래쫄래 따라올 정도로.”

“폐하와 클레이런스 후의 독대라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입니다. 제자는 어제 그 소식을 듣고 어찌나 궁금한지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라키엘이 부러 과장해 하는 말에 후작이 코웃음을 치며 하이에나 같은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혼자 곰곰이 이해해 보려 애쓰던 비올레타가 문득 물었다.

“종전 권한은 엄밀히 말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우리에게 제안하는 거죠?”

“엄밀히 말해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있기 때문입니다. 밀니로가 지금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그란토니아 없이도 가능했으리라 보십니까?”

“물론 불가능했겠죠. 그럼 그쪽에서 부르농빌을 빌미로 종전을 요구했으니, 그들은 부르농빌을 밀니로에게 다시 넘기고, 우리는 위협이 사라진 대신 밀니로의 손에서 총을 빼앗고 철수하면 된다는 건가요?”

“요약하면 그렇겠군요.”

“그들에게 그리 합리적인 조건은 아닌 듯한데.”

“당연하게도 그들이 요구하는 종전은 지금의 군사경계선이 국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단한 것도 아니고요. 드네프르를 추가하길 원하더군요.”

“드네프르라…….”

라키엘이 낮게 되뇌었다. 비올레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드네프르가 어떤 곳인지 해묵은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 애썼으나 그리 크지 않은 공국령 속 지명이 익숙할 리 없었다. 후작이 그것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드네프르는 그리 중요한 곳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부르농빌보다 탐을 낼 만한 땅도 결코 아닙니다만, 펠로베르에겐 지금 더 필요한 지역입니다. 밀니로가 언제 도로 탈환하려 덤벼들지 모르는, 남부에 홀로 덩그러니 있는 불안한 거점보다는요. 그들은 옛 잉거스트의 국경을 넓히는 게 더 합리적이리라판단했을 겁니다.”

“십 년 뒤에 뺏기느니, 지금 협박용으로 쓰고 유효한 결과를 남기겠다는 거겠지.”

라키엘이 비올레타가 들고 있는 잔을 부드럽게 뺏어 내리며 간단한 말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의 술이 어느새 잔의 바닥까지 줄어든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럴 용도였을 테고.”

“……우리는 둘 중 나은 선택이 있다고 해도, 밀니로에서 흔쾌히 납득할 만한 얘기는 아니네요. 어느 쪽이든 영토를 상실하는 것이고.”

비올레타가 의문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후작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댔다.

“이미 부르농빌을 펠로베르가 점령해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드네프르와 교환하는 것이 상실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재어 보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닙니다. 폐하께선 밀니로에게 우리가 충분히 그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시간을 더 이상 쓰고 싶어 하시진 않고요.”

“협상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비협조적으로 굴라?”

라키엘의 말에 클레이런스 후가 얕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라키엘은 가볍게 웃고 있던 인상을 지워냈다.

“……황제가 스승님께 그 모든 것을 어째서 말한 겁니까?”

“그야, 내가 종전 회담의 대표가 됐으니까.”

후작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아펠바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후는 군사軍事에 관하여 제국 내 가장 상징성 있는 인물이며, 그란토니아는 그 상징성으로 밀니로에 대한 예우를 대강 때우리라, 황제가 그리 말씀하십니까?”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가장 믿을 만하다 했지. 펠로베르 놈들은 뒤통수치는 게 특기니까. 그리고…….”

후작이 말꼬리를 흐리자 라키엘이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치켜 올렸다. 후작은 라키엘에게서 비올레타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제가 이 모든 말을 구구절절 전하 앞에서 하고 있는 것은, 전하께서 대표 사절단으로서 저를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올레타가 잔을 입가에 댄 채로 멈추었다.

“……요컨대 나는 클레이런스 후 곁에서 예쁘게 웃으면서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해도 종전 협상의 공적을 얻는 거잖아요. 그 역사적인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작께서 실패하실리 없으니 결과까지 확실하죠. 맙소사, 정말 황제께서 작정하신 거예요. 날 거저 끌어 올리려고.”

“…….”

“이건 진짜 좋은 기회에요, 라키엘. 그렇죠?”

비올레타의 들뜬 목소리에도 라키엘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비올레타가 문득 입을 다물자 마차 안은 그대로 정적에 휩싸였다. 비올레타는 제 말에 별 반응도 없이 턱을 괸 채로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라키엘의 옆모습을 불퉁하게 바라보았다. 사실은 아까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도 벌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원인은 사소했다. 그저 이 마차가 지금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을 때, 그 안에서 서로 말꼬리 몇 개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저택에서 걸어 내려오면서부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더니, 마차에 타고 나서는 속이 아예 뒤집어졌다. 길거리에 내려 토할 신분은 못 되었으므로 비올레타는 최대한 평정심을 지키고 잊어버리며 제 스스로를 속이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지금만 해도 마차에 탄 지 겨우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마치 몇 시간은 마차 속에 갇혀 있었던 것마냥 시간이 길게 늘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정작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이 모양이니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당신, 설마 아직도 나랑 싸우고 싶은 건 아니겠죠?”

“…….”

“설마, 그렇다면 당신 진짜로…….”

“안 가.”

“뭘요?”

“넌 거기 안 갈 거야.”

앞뒤 다 잘라먹은 말에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라키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클레이런스 후 앞에서 줄곧 웃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회담이 열릴 베르됭은 아직도 전지戰地고. 사전에 정전 협의조차 없었어. 네가 갈 수 있는 곳 아냐.”

“곧 종전 협상이 열려요. 어차피 의미 없는 걸요.”

“협상이 앉자마자 그렇게 합시다, 하고 끝나는 줄 알아? 최종적으로 협상에 동의하는 순간까지, 네가 앉아 있을 그 테이블은 전쟁의 일부야.”

“그 테이블이 대외적으로 합의된 비무장 지역이기도 하죠.”

“그 좁게 합의된 지역의 사방이 무장 지대이기도 해.”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후작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난 졸졸 따라가서 그 옆에서 얌전히 입 닫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될 거라고.”

“애초에 네 입이 무슨 말을 지껄일지 불안해서 못 보내겠다는 게 아니잖아.”

“내가 제일 무서운 건 나예요. 그 대단한 자리에서 불안한 것도 내 입이고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건 완전히 거저먹기나 다름없어요. 당신은 날 얼마나 믿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을 쏟아 내는 와중에도 속이 메슥거렸다. 비올레타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멈추자 라키엘이 조금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살피듯 눈을 가늘게 떴다. 비올레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좋은 기횐지 당신이 모를 리 없어요. 대체, 왜…….”

“그래. 좋은 기회지.”

“그런데 대체 왜 그래요?”

“네가 죽어도 좋을 만한 기회는 아니니까.”

비올레타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다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제가 ‘회담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말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흘려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키엘의 말은 위험하니 보낼 수 없다는 간단한 내용뿐이었다. 비올레타는 제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날카로운 인상을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은 유난이었으나―물론 지금 그 얼굴이 유난과는 한참 먼 표정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비올레타는 그런 그를 알고 있었다.

정떨어질 정도로 자로 잰 듯 정확한 이성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오래된 불안. 위험부담이 클수록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커진다고 도박꾼처럼 말한 주제에 제게는 이러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따지고 보면 그와 자신이 손을 잡은 이후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이 거대한 도박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비올레타는 웃지 못했다. 그가 잃은 것들, 그리고 이따금 환각처럼 일렁거리는, 제 눈앞으로 쏟아지던 붉은 카펫……. 사실은 전혀 그가 우습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독을 삼키고 깨어난 후, 처음으로 본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어떤 목소리로 제게 말했었는지.

그는 제 평생에 몇 번 없을 실수를 알면서도 저지르려 한다. 고작 그녀를 따라다니는 아주 작은 불확실 때문에. 그러나 비올레타는 그 다정한 실수에 마냥 행복에 겨워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네가 기회를 놓쳐도 상관없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충분했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도 잘 알 거예요. 그거 비약이라는 거.”

“사방이 펠로베르의 군사로 둘러싸여 있어도 비약일까.”

“그들은 감히 황제의 딸을 위협할 수 없어요.”

라키엘은 말없이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올레타가 얼굴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난 정말로 고귀한 몸이 아니라고. 당신 목표는 내가 살아 있기만 하면 이룰 수 있어요. 그리고 그곳은 결코 내가 죽을 곳이 아니에요. 고작 내게 일어날지 아닐지 모를 그 작은 위협 때문에 그렇게 커다란 기회를 놓치는 실수는 당신에게 필요 없어요. 날 생각하지 말아요.”

“…….”

“날, 귀하게 대해 주지 말아요.”

살을 섞고, 몸을 부비고, 서로의 귓가에 웃음소리를 흘리던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시간은 다시 1년 반 전으로 돌아간다. 여자는 제 앞에 허상처럼 앉아 있었다. 라키엘은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난 당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네가 얼마나 네 운에 자신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라키엘은 차가운 얼굴로 입을 뗐다.

“늑대를 마주치고도 살고, 독을 삼키고도 살아나니 이젠 네가 언제까지고 죽지 않을 것처럼 마냥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멍청한 착각 안 해요. 이번엔 정말로 당신이 과민 반응한 거야.”

“그래. 나도 이렇게 별것 아닌 이유로 그 좋은 기회 마다하라 널 말리고 있는 내가 이해가 안 돼. 머리에 총 맞았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래도 싫어.”

“…….”

“어쩌면, 만에 하나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작은 확률 속에, 네가 있다는 게.”

“…….”

“내 손이 닿지 않는다는 게.”

“…….”

“이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알아.”

어느 순간부터 말없이 그의 말만 듣고 있던 비올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라키엘은 잠시 의아한 듯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녀의 어깨가 잘게 들썩이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는 설마저도 모르는 새 제가 여자를 저렇게 감동시킬 만큼 멍청하고 느물거리는 말을 했었는지를 돌이켜 보며 반성했다. 그리고 그가 자괴감을 느끼게 됐을 무렵, 비올레타가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라키엘이 무심결에 그 손을 잡자, 비올레타가 마치 구명줄을 잡은 것처럼 손을 꽉 잡아당겼다. 라키엘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것 같아.”

“뭐?”

“토할 것 같아요. 나…….”

라키엘은 그 말을 알아들은 것과 동시에 잡고 있던 비올레타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녀의 얼굴과 제 손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올레타가 맥없이 옆으로 픽 밀려났다. 그녀는 삐뚤어진 자세를 바로잡지도 않은 채로 천천히 의자 위로 쓰러지듯 몸을 엎드렸다. 라키엘이 창을 밀어 마차를 세우라 지시했다.

이윽고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라키엘이 창을 닫으며 불친절하게 물었다.

“뭐야?”

“속이, 술…….”

“그러니까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당신이 언제 그랬어요?”

“눈으로, 계속.”

“뭐라는 거야…….”

목울대 아래를 약하게 부여잡으며 비올레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일으킬 수만 있었다면 발로 정강이를 한 대 차 주고 싶었다. 비올레타는 짜증스레 말을 이으려다, 문득 아까 그와 계속 눈이 마주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선이며, 틈만 나면 제게서 잔을 은근슬쩍 뺏던 것이며 자기 딴엔 말린 거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반항심이 불타올라 모른 척 자신은 계속 홀짝홀짝 마셨고. 비올레타는 말을 돌렸다.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구역질이 나는 건 말이 안 됐다.

“아, 고작 아펠바인 두 잔에 대체 왜 이렇게, 디아나가 분명 너무 약해서 술 같지도 않다고 했는데…….”

“사과로 만들잖아.”

“그게 왜요?”

“오래 못 두고 빨리 상하거든. 그래서 후작께선두고두고 드시겠답시고 그걸 브랜디처럼 다시…….”

“……그럼 이미 아펠바인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독하지. 그러게 왜 마셔?”

“당신이 말만 해 줬어도!”

“내 말은 듣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비올레타가 얄궂게 웃고 있는 라키엘을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긴 할만치 했다는 태도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돌려 의자를 짚은 손바닥 위로 얼굴을 내렸다. 마차가 달리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살 것 같았다. 비올레타는 숨을 얕게 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선잠에 까무룩 빠질 무렵이었다. 커다란 손이 비올레타의 머리를 감싸며 조심스레 들었다. 비올레타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언제 이쪽으로 왔는지 모를 라키엘이 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뭐 해요?”

라키엘은 무심한 얼굴로 대꾸도 않고 그녀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렸다. 비올레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토하지 마.”

좀처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고에 가까운 어조였다. 제 무릎에 토하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양 그러는 것이 기가 막혔다. 애초에 제 무릎 위에 남의 머리 올려둔 게 누군데.

비올레타는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두워진 마차 속에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어둠 속 남자의 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사실 난 네가 베르됭 한가운데에 서 있든, 어떤 위험 속에 있든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

제 무릎에 아픈 여자를 누여 놓고 기껏 한다는 말이 이렇게 매정하다. 비올레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정말 내가 들어 본 말 중에 최고로 다정한 말이네요.”

비올레타가 작게 빈정거리자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서늘한 손이 기분 좋았으나 비올레타는 티 내지 않고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시겠죠. 어련하시겠어.”

“어차피 우린 외줄 위에 있으니까. 시작부터 끝까지.”

“…….”

“네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확실함의 연속 속에 이어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비올레타는 라키엘이 앉아 있었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마를 쓸던 라키엘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시야를 덮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넌 수도에 있어. 내가 믿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내 손이 닿을 곳에.”

“…….”

“만약 네가 내 손이 닿지 못할 곳으로 가야 한다면,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해.”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손에 가려진 어두운 시야 속에서 그가 어떤 표정일지 상상했다. 제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기 전, 그 석고상처럼 서늘한 얼굴일까, 아니면…….

“라키엘.”

“그리고 베르됭은 그런 곳이 못 되지.”

비올레타는 제 시야를 가린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그의 손을 떼어 낼 것처럼 움직이던 손이 곧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둔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당신의 불안도 이해해요. 당신은 아마 불안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지만. 내가 미덥지 못하리란 것도 알아요.”

라키엘은 가만히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 손 아래로 드러난 입매가 이윽고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당신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알겠어요.”

그녀는 라키엘을 놀리듯 말을 이었다. 라키엘은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다시 돌렸다. 그가 손을 떼어 내자 그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도 아래로 떨어졌다. 암녹색 눈동자 위로 장난기가 가득 어려 있다. 라키엘은 입매의 끝만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아마도, 그녀는 조금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잘 알아요.”

정말이지 조금도. 라키엘은 비올레타가 힘주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맞물려 있는 것 같다가도, 닿은 손끝마다 조금씩 비틀려 있다. 비올레타가 안다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라키엘은 그녀를 이해했다. 그녀는 제 스스로의 가치를 철저하게 계산했을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가 그러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정작 이제 그는 그녀를 저울 위에 올릴 자신이 없는데도.

“난 그 가치에 맞게 행동하려는 거예요.”

“…….”

“쏜튼 경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내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걸 해 줬는지. 당신, 심지어 내 어머니를 만난 적도 있죠. 몇 번이나…….”

라키엘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아주 작은 목소리가 라키엘의 귓가를 울렸다. 라키엘은 그녀의 손이 제 손끝을 잡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친이 죽은 일 외에는 절대로 스스로 입에 올린 적 없었던 화제였다. 라키엘 역시 그랬기에 그들 사이에 한 번도 오간 적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라키엘은 그제야 그녀가 꽤 취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질테르까지 직접 찾아갔다면서요. 어머니가 날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고 들었어요. 당신 덕분에요. 내 딸은 황녀 전하를 구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용기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사실 난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겁쟁이였는데도 말이에요. 그래도, 어쩌면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닐지도 몰라요. 그녀를, 그 아이를, 구하진 못했지만…….”

라키엘이 손끝만 살짝 붙잡은 그녀의 손 안에서 제 손끝을 빼내, 그 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다시 살아났으니까.”

“그래.”

“고마워요. 내 어머니가 평온 속에 죽을 수 있게 해 줘서. 내 동생들도, 유모도 다 잘 지내겠죠. 이제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돼요. 상관없이, 앞으로도 그렇게 아무런 상관없이 살게요.”

“…….”

“당신이 날 위해 최선을 다하면, 나도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비올레타의 웃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 말갛게 빛이 났다.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제 속을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에 속이 시리기도 하고, 그녀에게 들키지 않은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얄궂고 모순적인 속내였다.

그에게는 황제의 곁에 서서 웃고 있는 만찬장의 여자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여자가 조금 더 중요했다. 그녀를 전지에 내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로, 그는 전자를 후자보다 반 박자 늦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저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어 멀리 밀쳐 둔 것을, 이 여자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멍청하게 굴 필요는 없다. 제가 이렇게나 멍청하다는 것을 알릴 필요도 없다. 라키엘은 본래 누군가가 제 마음이나 생각을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제 등 뒤로 달려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아도 그는 비올레타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제 가치를 깎아내리고, 틀에 끼워 맞추고, 그 틀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주제 파악을 잘했다. 그는 시시때때로 필요에 따라 그 틀을 깎고, 다시 맞추면 그만일 일이었다.

라키엘은 언젠가 제 조부 레이노어가 술에 취해 하던 말을 떠올렸다. 사랑은 정말 병신 같은 거란다. 하게 된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면 좋고, 하지 않으면 최고일 일이지.

“이건 우리에게 전환점이 될 기회예요.”

라키엘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확신으로 가득 찬 어린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만약 그것을 끝내지 못했을 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으리라 믿었으니까.

“내가 대외적 이력이 얼마나 없는지를 생각해요. 시기가, 정말이지 미치도록 좋아요. 당신은 이제 곧 내무부의 수장이 될 테고, 내가 회담 테이블에 앉아 있다 돌아오면 나도 당신에게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거예요.”

비올레타는 겨우 말을 끝내고 또 구토기가 울컥 올라오는지 라키엘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라키엘이 한숨처럼 말했다.

“이제 그만 말해.”

“우리가 완전히 바뀔 수 있어요.”

“언제까지고 마차를 세워둘 순 없어. 달리기 전에 진정해야지.”

“내 몸 하난 지킬 수 있어요. 나 알잖아.”

“차라리 자.”

“진짜 설치지 않을 거예요. 얌전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거예요.”

“알았어. 네 맘대로 해.”

“나 총 맞을 일 없어…….”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자.”

“나 진짜 안 설칠 거예요.”

“빨리 입 다물고 자.”

라키엘의 손바닥이 비올레타의 눈가를 다시 덮었다. 비올레타가 취한 기운에 무어라 더 웅얼거렸다.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일련의 목표가 정해졌으니, 그에게 남은 일은 간단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을 손에 쥐기 전에, 그녀를 가장 완벽한 고지에 세워 놓을 것.

“그란토 프레세, 벨라크플라트, 에이비소, 밀라나티. 또 뭐가 있나?”

“델 포르데 말씀이십니까?”

“아, 델 포르데.”

수도에서 발간되는 신문사의 이름들을 하나씩 여유롭게 읊으며 라키엘이 시가의 끝을 잘라 냈다. 그리고 카일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카일에게 눈짓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힐끗 본 카일이 깃펜을 잉크에 찍었다. 이윽고 펜촉이 종이 위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라키엘은 시가 끝을 촛불 위에 살짝 갖다 댄 채로 천천히 돌리다, 몸을 깊게 숙여 불꽃에 닿아 있는 시가를 입에 물고 느릿하게 공기를 빨아들였다. 시가의 끝에 불이 고르게 피어남과 동시에 펜대 움직이는 소리가 멎었다. 라키엘은 시가를 문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연기가 궤적을 그리며 피어났다.

“먼저, 그란토 프레세부터 터트려. 이틀 후가 좋겠군.”

“각하, 처음으로 그란토 프레세는……. 그들은 그리 인상적인 기사를 써 주지 않을 겁니다. 그 사주가 요즘 들어 가뜩이나 1황자와 4황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요. 말이 안 통하진 않을 테지만, 처음이라는 부담감까지 가해지면 더욱 그럴 겁니다. 후발로 적당할 텐데요.”

“그 능구렁이야 예전부터 언제나 발 뺄 구멍만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그들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 정도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적당해.”

“어중간한 정도로는 한 번에 눈길을 끌 수 없지 않습니까?”

“그야 한 번에 눈길을 끌 필요가 없으니까. 굳이 우리가 저를 지금부터 깎아내리기 시작했다고 홍보할 건 없어.”

라키엘은 내리깐 눈으로 시가의 끝이 잔잔하게 타오르는 것을 응시했다. 연기를 타고 쌉쌀하면서도 단 계피 향이 코끝을 스며들었다.

“출정 471일째, 전사자 수, 부상병, 전염병, 비관적인 내용이되 최대한 객관적인 지표만 들이대. 눈길 끄는 헤드라인은 필요 없어. 표지일 필요도 없어. 일부러 1황자에 대한 비판이나 사설을 지껄일 필요도 없고. 적당히 시선을 끌 만한 굵직한 위치면 충분해. 중립적 신문에서 최초로 전황에 관해 부정적 화두를 던진다는 데 의미가 있으니까.”

카일이 라키엘의 말을 되새기듯 입안으로 단어를 외며 부지런히 펜대를 움직였다.

“이 정도면 조심스러운 그 치에게도 매력적인 소재지. 카디링거의 눈 밖에 날 정도로 그리 치명적인 것도 아니면서, 덕분에 카디링거가 당분간은 설설 기어 줄 테니까. 어쩌면 그 잘난, 유력한 차기 황위 계승자와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보일 테고. 이런저런 것 그럴듯하게 설명하면 귀가 얇은 영감이라 금방 넘어와.”

“그러다 그들이 정말로 그것을 계기로 손을 잡게 되면 어찌하실 겁니까?”

“내가 더 비싸게 사면 돼.”

지나치게 간단한 대답에 카일이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흘 뒤엔 마침 밀라나티의 주간지가 발행되지. 두 번째는 그곳으로 해.”

“밀라나티는 베론 후에게 이미 완전히 먹힌 곳이지 않습니까. 대화가 가능하지도 않을 텐데요.”

“누가 대화를 하겠다고 했나? 대강 돈 좀 쥐여주면 펜대 열심히 움직이는 똑똑한 멍청이 하나 잡아. 밑바탕은 이미 그란토 프레세가 그려 두었고, 소규모 신문사를 통해 똑같은 기사도 몇 개 나간 후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것들을 조금 부풀리고 감정적으로 베끼기만 하면 돼.”

“예컨대?”

“전쟁이 시작된 지 이렇게나 오래되었고, 그란토니아인이 이렇게나 많이 죽었고, 사실상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은 우리에게 불필요했으며 어떠한 명분도 없었노라고. 그렇게 명분도 없는 전쟁에 참전하기를 주창한 1황자가 과연 황제의 후계로 어떤 문제도 없을지, 사소한 의문을 던지는 거지.”

“그러나 각하, 제국이 밀니로를 지원한 명분은 대외적으로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렇기에 각하께서도 그 사안을 지지하셨던 것 아니셨습니까?”

“그래, 공사는 구분하니까.”

“그런데 어찌…….”

“하지만 베론이 휘두르는 주간지가 어떤 비합리적인 논리를 지껄이든, 우리가 책임질 사항은 아니야.”

라키엘이 비식 웃으며 시가를 물었다. 카일이 그제야 무언가를 깨닫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들이 그럴듯한 한도 내에서 비약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1황자를 거꾸로 재어 보겠지. 완벽한 전쟁 영웅에서, 전공에 눈이 멀어 제국인을 희생시킨 황자로. 지나친 비약이라도 그러고 보니, 어쩌면 조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으면 충분해.”

“그리고 그 글로 4황자를 자연스럽게 지지하고요.”

“대충 그 새끼가 병신같이 제 궁에 틀어박혀 있는 걸, 호전적인 1황자와는 달리 온화하고 평화적인 성향이라고 포장하면서 대비시키면 되겠군.”

카일이 씩 미소 지었다.

“베론 후가 본다면 좋아하겠군요.”

“밀라나티의 기존 입장과 한 치 틀어짐도 없는 내용이야. 의심받을 일도 없고,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걸 줄거리 다 짜서 돈이랑 같이 쥐여 주는데 어떤 놈이 마다하나?”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아, 당시 출정을 지지한 추밀원 의원들의 목록도 첨부해.”

“각하, 각하께서 포함되십니다.”

“상관없어. 면피용이니까. 비난이 의원들을 비롯해 내게도 오게 해. 어차피 사소할 테니까. 그에 반해 베론 후는 애초에 출정을 반대해 왔노라고 띄워 주는 것도 좋겠군. 그가 한 적 없는 주장도 근사하게 몇 개 지어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우린 초 끝에 불만 살짝 대 줄 뿐이야. 그 다음은 그들이 알아서 열심히 녹아내릴 테고.”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적당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성명서 몇 장을 뿌려. 정치적인 색 없이 저명한 자들 두어 명이 필요해.”

“그럴만한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물어뜯을 정치적 동물 서넛.”

“그것 역시 적당히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제 보좌관이 종이를 바꿔 빽빽이 써내려 가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라키엘이 몸을 돌려 창가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가 움직이는 흔적을 남기듯, 시가 연기가 그의 뒤쪽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익숙한 시야에 비친 불빛 한 점 없이 새까만 어둠을 라키엘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델 포르데.”

문득 짤막하게 내뱉는 말에 카일이 의아한 듯 종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 동전 한 닢짜리 신문 말씀이십니까?”

“그래.”

“노동자들도 즐겨 사는 싸구려 신문이라 파급력은 좋으나, 우리 측이 건드리기 좋은 상대는 아닙니다. 카디링거와 뒤로 닿아 있지 않습니까. 저번에도 황녀 전하께서 로드리고 후를 통해 겨우 잡아챘고요.”

“아예 불가능하지 않다는 건 그때 확인했지 않나? 그들은 전혀 완고하지 않아. 전혀 충성스럽지도 않고.”

“그건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실 구구절절한 이 모든 것보다 위대한 한 장이 있어. 이 시시한 이야기의 절정과 어울릴 만한.”

“…….”

“그리고 그것에는 몇 가지가 필요하지.”

카일이 깃펜을 놓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일요일 델 포르데의 첫 장, 어느 미망인의 허술하고 초라한 초상화, 연고도 없는 옛 잉거스트의 땅에서 전사한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녀에게 남겨진 여섯 명 이상의 아이들, 치료받을 수 없는 아픈 아이. 폐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여자. 비참한 금고.”

“…….”

“가장이 전사하기 전 얼마나 평범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과 별다를 것 없는 처지였는지를 구구절절 써내려 가다가, 그녀의 남편은, 그래, 마리굴라 전투쯤에서 전사했다고 치지. 어디든 상관없어. 그저 그런 스토리야 차고 넘칠 테니까. 불쌍하고 가여운, 전쟁의 잔해 같은 사람들을 골라내.”

카일은 홀린 듯 다시 깃펜을 잡으며 물었다.

“그리고 1황자에 대해 첨언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1황자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쏟아 내던 델 포르데를 읽어 온 사람들은 1황자에 대해 신뢰하고 있지. 1황자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반감부터 사. 그들은 아는 게 별로 없어. 어려운 데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영웅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역효과를 낼 이유가 없지. 생각은 가랑비에 옷 젖듯 그들의 머릿속에 스며들어야 해.”

“직접적인 건 모두 제하란 말씀이십니까?”

“절대로 1황자를 겨냥하지 말고, 비난하지도 말고, 그저 그 잘난 영웅이 비추는 밝은 곳의 이면만 들추면 돼. 본래는 불행하지 않았으나 전쟁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 그리고 이대로 전쟁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더 생겨날지 모르는 불행.”

라키엘이 연기를 뱉어 내며 낮게 웃었다.

“그걸 알려 준 다음에는 불행의 끝이 결코 가깝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도 좋겠군.”

“그리고 사람들이 지금의 전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되겠지.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누구였나.”

“…….”

“도대체, 이 모든 끔찍함의 원흉이 누구였나.”

라키엘은 반쯤 줄어든 시가를 유리에 가볍게 비벼 끄며 내리깐 눈을 들었다.

“모두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사절단이 출발할 거야. 이 더러운 상황을 조금은 더 낫게 할 수 있는.”

“…….”

“그리고 그 속에, 우리의 계승권자가 있어.”

서느렇게 가라앉은 시선이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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