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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3장 (17/21)

<3막-3장>

밀니로의 개전 후 두 해가 지나 비로소 종전이었다. 그란토니아가 잉거스트 전쟁에 참전한 지도 어느덧 한 해 반이 흘렀다. 잉거스트 공국령은 4분의 3과 그 나머지로 나뉘어 대륙 위에 다시 그려졌다. 밀니로는 그란토니아의 지원을 받으며 백 년 전 옛 밀니로의 땅을 4분의 3이나 다시 수복했고, 펠로베르는 잉거스트의 4분의 1을 손에 쥔 것으로 만족했다. 베르됭에서의 종전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며 양 진영이 두 해 동안 그렇게 이룬 모든 것은 당분간 지속될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이로써 잉거스트의 이름은 영원히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비올레타는 언젠가 로드리고의 박람회에서 보았던 죽은 공주의 침대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동국의 신기한 동물들과 신식 머스킷 소총들이 놓인 별천지 사이로 덩그러니 놓여 있던 펠로베르 제국풍 침대. 그 침대는 주인의 불행한 역사로 어느 젊은 캐롤링 귀족에게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그것이 전쟁이 남긴 그녀의 생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2년의 시간은 그런 비틀린 생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만들어 냈다. 다리를 잃은 군인과, 미망인과, 아들을 잃은 어미와,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들. 신문 위에 집계된 수만 명의 전사자를 아는 것에는 1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바로 눈앞에 보이는 수십 개의 무덤이 사실은 수만 개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분쟁 지역에 잠깐이나마 있었고 심지어협상을 직접 체결하기까지 했지만 사실 전쟁을 직면하지는 못했다. 정말로 제가 그 비율을 따져 가며 전쟁의 실상을 체감했는지도 불분명했다. 비올레타가 겪은 것이라곤 전쟁의 잔해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들뿐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었다. 제 눈앞에 보이는 일부가 수많은 조각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 전부가 얼마나 거대한 끔찍함의 산물이며, 그 속에서 사람 하나 정도는 얼마나 가치 없이 바스러지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면 본디 그녀는 분명 그 하나보다 더 높은 값을 쳐 주기엔 힘든 계집이었다. 애초에 어떤 작은 역사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갑자기 파도가 일면 휩쓸리듯 제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 갈 수많은 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비올레타는 그런 제가 협상을 끝내고 종전 협정서에 사인한 것이 조금 우스웠다. 마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멀리서 내다보듯 비올레타는 그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올레타.’

어느덧 제 것처럼 당연한 그 이름을 그녀는 혀끝으로 조용히 굴렸다. 그 이름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신이 파도에 휩쓸려 다니던 모래 알갱이 하나를 들고 바다를 다스릴 권능을 새겨 넣은 것마냥, 그렇게 위대했다. 비올레타는 이미 무뎌진 기분 위로 그것을 새로이 절감했다. 그 이름을 가진 자신과, 그 이름에 설계된 인생을 살아갈 자신에 관하여.

기대 이상의 직접적인 공적과 그 성공적인 결과에 고무되었던 날은 이미 예전에 지났다. 비올레타는 그란토니아의 국경까지 닿을 날을 지겹게 꼽고 있었다. 밀니로를 가로질러 그란토니아의 국경까지 돌아오는 데에는 사절단이 베르됭으로 느지막이 가던 때와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돌아오며 속도를 내기에 클레이런스 후의 부상이 여전히 중태인 탓이었다. 물론 국경을 통과한 후로도 이어질 여정은 끔찍하게 길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나마 고대하고 있는 것은, 창밖의 밀니로 풍경이 질리도록 살풍경했기 때문이다. 그란토니아에서는 봄이 만개했노라 떠드는 시기임에도, 이곳에서 보이는 거라곤 희끗희끗하게 핀 꽃들과 전쟁 물자로 나무들이 다 베여 나간 산등성이뿐이었다.

힘든 여정과 본국보다 추운 베르됭 날씨에 몸이 많이 상한 디아나는 마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긴 마차 여행에 몸이 조금 약해진 비올레타 역시 책 한 장 제대로 보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 멀미가 갈수록 심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루함이 길어질수록 생각은 길게 제자리를 돌았다. 이러다간 수도에 돌아가기도 전에 몸이며 머리며 다 진이 빠질 판이었다.

사절단 일행이 밀니로 국경을 통과한 것은, 그렇게 베르됭을 출발한 지 꼬박 열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밀니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엔트위프에는 이미 사절단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황제의 특사 일행이 있었다. 그들은 본래 중부 드레스덴에서 사절단을 맞이할 계획이었으나, 클레이런스 후의 부상으로 사절단의 귀국길이 원활치 못하다는 소식에 황제가 수행원을 두 배 더 충원해 국경까지 보낸 이들이었다.

황제가 친히 신경 썼다는 특사는 궁금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도 했다. 비올레타는 엔트위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멈춘 마차에서 창밖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맞은편 선두에 보이는 익숙한, 그러나 예상치는 못한 마차를 발견한 비올레타가 혀를 찼다. 로드리고의 문장이 화려하게 세공된 하얀색 사륜 쌍두마차였다. 엔트위프의 허름한 시골 풍경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기까지 하는 그 마차는, 비올레타가 고개를 내민 것과 거의 동시에 멈춰 섰다.

비올레타는 마부석에서 여유롭게 뛰어내리는 남자의 인영을 보고는 혀를 쯧, 하고 한 번 더 찼다. 마차를 직접 몰아 온 것이 조금 황당했다. 제 사냥터에서나 유유자적하던 짓을 하는 것이다. 멀리서 마주친 눈이 얄밉게 휘어지는 것을 본 비올레타가 고개를 마차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비올레타는 떨떠름한 얼굴로 바깥을 응시했다. 칼이 우아하게 마차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전하.”

“칼.”

그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하듯 마차 안으로 좀 더 깊게 내미는 손을 비올레타가 잡고 내렸다.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사한 백금발을 물끄러미 올려보던 비올레타가 시선을 내려 눈을 마주쳤다. 남자의 청회색 눈이 비올레타를 찬찬히 살폈다.

“오랜만인데.”

“그렇죠.”

“좀 못나졌군.”

“수도에 드러누워 입에 기름칠하던 누구와는 달리 좀 고생해서요.”

비올레타가 심드렁하니 대꾸하자 칼이 뻔뻔한 얼굴로 웃지도 않고 양팔을 벌렸다.

“뭐 하는 거예요?”

“사촌끼리 계절 하나 건너뛰고 만났으니, 포옹 정도는 해야지.”

“그런 건 수도에 널린 당신 애인들과나 해요. 그리고 아직 봄이에요. 가면서 이야기나 해요.”

비올레타가 칼의 팔 한쪽을 잡아채듯 잡고는 마차로 에스코트나 하라는 듯 모로 고갯짓을 했다. 칼이 픽 웃으며 그녀에게서 팔을 빼고,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 제 마차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부석 앞에 멈춰 섰다. 비올레타는 그 뻔한 전개에 의아한 기색도 없이 곧바로 손을 놓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칼이 더 빨랐다. 칼은 비올레타를 들어 올려 순식간에 마부석 위에 앉혀 놓고, 그 옆에 가볍게 올라탔다. 비올레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부는 어디에 갖다 팔았어요?”

“여관에 멀쩡히 있어.”

칼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능숙하게 마차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어디 아파?”

“멀쩡해요.”

“꼴이 말이 아닌데.”

“그러는 로드리고는 신수가 훤하네요.”

“비꼬는 게 아니리라 믿고, 일단 고맙다고 해 두지.”

“교외는 오랜만에 나왔어요? 왜 여기까지 와서 야유 나온 기분을 내.”

“누구 덕에 영지도 못 내려가고 수도에 계속 묶여 있으니 답답해서.”

5황녀와 정치적 동맹이라 대대적으로 낙인찍힌 이후 그는 이전과 정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꼴로 수도에 오던 이가, 이제는 반대로 대부분의 날을 수도에서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도에서 잘만 살아온 작위 승계 전의 그를 생각하면 딱히 그 생활에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그 게으르고 나태한 인생 계획을 비틀어 버리긴 했지만. 비올레타가 그 말에 찔린 척 시늉만 하고 이내 매끄럽게 웃었다.

“어차피 수도에서 애인들이랑 재밌게 살고 있잖아요.”

“로드리고에도 적당히 놀 계집은 충분히 넘쳐. 네가 없어서 그렇지.”

또 그 목소리다. 그 홀리는 목소리. 이쯤 되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받는 의례적인 행사 같아 비올레타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돌렸다.

“수행원이 배로 불어났다고 들었어요. 지나치게 인원이 많으면 돌아가는 시간이 더 지체되지 않겠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폐하께서 두 배를 더 갖다 붙였지.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모젤이란 곳이 있어. 거기서 클레이런스 령까지 그리 멀지 않아. 지금에서 절반 조금 안 되게 떼어 내 후작을 수행하게 하고…….”

“클레이런스 령? 수도에 후와 함께 귀환하는 게 아녜요?”

“수도가 너 때문에 지금 들끓어. 조금이라도 식기 전에 주인공이 재빨리 얼굴 비치는 게 예의지. 후작도 수도까지 먼 길 가느니, 영지에서 빨리 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테고. 아닌가?”

“하지만 그가 내 목숨을 구한데다 이번 회담은 거의 다 그의 공로나 다름없어요. 난 대신 마무리를 했을 뿐이고. 혼자 공치사 받긴 싫어요.”

“그게 폐하의 뜻이니 뻔뻔하게 받아. 어차피 네 대단한 스승님은 그런 자잘한 공적 하나 없어도 역사에 이름이 몇 번은 나오실 테니 걱정 말고. 폐하께선 네가 최대한 빨리 수도에 도착하길 원해.”

비올레타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없이 몸을 뒤로 기댔다.

“어차피 황녀 전하의 공로는 충분히 내세울 만해. 그 시끄러운 무용담의 진위는 저녁에 마저 듣기로 하고, 멀쩡한 건 확실하나?”

“나 말이에요?”

“그래, 너.”

“속은 멀쩡해요. 사십일을 꼬박 마차 위에서 있어 봐요. 로드리고 당신도 나무껍질처럼 될걸.”

“수도에서 멀리 있을 때 의사에게 보여. 어차피수도에 가면 아픈 티는커녕 의사랑 마주 앉지도 못할 테니까.”

확실히 중요한 시기니, 건강에 어떤 이상도 보여선 안 됐다. 어쩌면 이번을 계기로 계승권이 수면 위로 떠오를지도 몰랐다. 비올레타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에 칼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살도 좀 찌워야겠고.”

“잘 먹고 있어요.”

“실망했나?”

앞뒤 없이 문득 물어 오는 소리는 이해도 안 될뿐더러 갑자기 장난스러웠다. 비올레타가 경계하듯 물었다.

“뭘요?”

“내가 에델가르드 공이 아니라서.”

“…….”

비올레타가 순간 대꾸를 못 한 채 헛웃음만 터트리자 칼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이동하기를 나흘째, 수도로 귀환 중인 사절단 행렬은 트라니밀로 지역에 들어섰다. 트라니밀로는 국경과 수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곳이므로, 이제 수도까지는 사나흘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베르됭으로 갈 때 수도에서 국경까지 보름도 넘는 시간을 소요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때는 억지로 시간을 질질 끌어 가며 느긋하게 이동했고, 지금은 말 그대로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이동 중이었다. 힘겨운 일정을 생각하면 그리 보람 있는 여정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 속도만을 두고 본다면 말이다.

이렇게 서두르는데도 시간이 걸리는 데는 이 행렬의 규모가 대대적인 탓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한 변경과는 달리, 비올레타의 마차는 수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큰 환대를 받았다. 심지어 그녀가 베르됭으로 가며 지나간 작은 소도시들 중 일부는 다시 돌아오는 길에 있기도 했다. 그런 곳을 지날 때마다 비올레타는 똑같은 길 위로, 그때는 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광경을 목격하곤 했다.

트라니밀로는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인파가 모인 곳이었다. 밖에서 제 이름을 연신 환호하는 소리가 마차 벽을 타고 시끄럽게 울렸다. 이전의 그 단순한 소란스러움과, 지금의 엄청난 간극을 깨닫자 그녀는 조금 아연할 지경이었다.

장담하건대, 제가 베르됭으로 갈 때는 저들 중 아무도 제 이름을 몰랐으리라. 온갖 말이 다 나도는 수도와는 달리, 수도에서 조금만 거리가 떨어져도 평민들은 황실의 이야기를 접할 일이 잘 없었다. 황실에 관하여 그들이 그나마 알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이야기는. 아마도 몇 년 전 죽은 황태자 정도일 것이다. 미하일은 생전에도 인기가 많았고, 죽어서는 그 불행한 죽음으로 인해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아까운 사람이 아깝게 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살아 있었던 시절을 곱씹고, 그가 계속 살아 있다면 더 좋았을지 모를 현실을 짓씹는 것.

비올레타가 그런 그의 하나뿐인 친누이라는 것을, 이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노라고 칼은 알려 주었다. 수도가 아닌 곳에서도. 그리고 수도와 먼 곳에서도. 비올레타는 창을 열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동안 지나온 곳에서는 잠깐 내려 얼굴을 직접 비추기도 하고 밖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군중이 몰린 곳에서는 여의치않았다. 저녁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트라니밀로의 시가지도 아닌 외곽을 돌아가는 길이었음에도 군중은 열광적이었다. 결국 빽빽이 몰려든 인파로 인해 트라니밀로를 통과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어제까지 무명이던 배우가 오늘 갑자기 프리마돈나가 된 것처럼 비올레타 앞의 세상이 뒤집혔다. 비올레타는 조용해진 마차 속에서 로드리고의 급사給仕가 트라니밀로에서 구해다 준 수도의 신문들을 뒤적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표지의 헤드라인은 모두 비올레타의 이름뿐이었고, 간혹 베르됭에서의 그녀를 묘사한 듯한 그림들이 보이기도 했다.

대체로 그림들은 드레스를 예쁘장하게 차려입은, 그러나 얼굴은 불분명한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거나 혹은 군인들에게 겹겹이 포위당한 채 대치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랑부이에나 세비니는 상황에 따라 마치 포박된 죄인이나 시꺼먼 도적 떼 같이 아무렇게나 그려졌는데, 그들 본인을 전혀 떠올릴 수 없는 묘사였다. 그들은 오히려 근사하고 우아하게 생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런 삽화는 어떤 사실 전달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리 대수로운 왜곡은 되지 못했다.

한참 신문들을 뒤적이던 비올레타의 손이 멈춘 것은 한 면의 절반을 가득 메운 그림에서였다. 비올레타는 신문 뭉텅이에서 그 그림을 살살 빼냈다. 일전에 브란젤 화가가 그렸던 비올레타의 첫 초상화를 모사模寫한 것으로, 그녀가 보기에도 익숙한 그림이었다. 다만 인상이 본래의 그림과 조금 달랐다. 그녀의 얼굴과는 더욱 달랐다.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흑백 잉크가 신문 상단 전체를 화려하게 뒤덮은 것을, 비올레타가 손끝으로 살살 쓸었다. 신문은 질이 좋지 않아 표면이 거칠었다.

델 포르데, 동전 한 닢짜리 신문.

델 포르데는 노동자들도 커피 하우스에 앉아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종이였다. 비올레타는 그림 아래로 마치 그녀가 전장을 평정하기라도 한 양 과장된 말들이 나열된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과 지난 해 겨울만 해도 1황자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던 종이 뭉치는 이제 비올레타의 이름만이 가득했다. 라키엘이 드디어 그 지독한 델 포르데를 손에 넣은 모양이었다. 비올레타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다른 신문들의 그 조그마한 그림에도 명확히 그려 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합의였다. 비단 황족이 아닌 고위 귀족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묘사는 지양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미 유명한 특징을 두드러지게 그려 내 풍자하는 경우는 제하더라도.

아마도 이 초상은 델 포르데에서 라키엘에게 요구한 값일 터였다.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황녀의 초상을, 자신들이 세상에 내어놓게 할 것. 다들 비슷한 이야기만 수십 일을 이어 가는 상황에, 그보다 더 자신들의 입지를 과시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라키엘은 그 값을 흔쾌히 치렀으리라. 1황자에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신문의 첫 페이지를 그녀의 초상이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그녀가 보기에도 꽤 짓궂은 조롱이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고.

“그거, 반응 좋았지.”

비올레타의 마차에 올라타던 칼이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신문을 보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후가 수도에 있을 때 나왔나요?”

“네 이름 때문에 시끄러운지 이틀쯤 됐을 때였나. 마치 그 주인공이 궁금하진 않은가 묻듯이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네 얼굴이 박혀 나왔더군. 천생 글 파는 장사꾼들이지.”

“이건 지나친데.”

“뭐가?”

“그림 말이에요. 지나치게 예쁘게 나왔어요. 조금 찔릴 정도로.”

“그래도 실물이 좀 더 낫지.”

수작 부리듯 얄궂게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내뱉는 말에 비올레타가 설핏 웃었다. 천성적으로 여자를 끈다는 게 어떤 것인지, 비올레타는 그가 이럴 때마다 느끼곤 했다. 칼이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피곤해요?”

“덕분에.”

“당신답지 않게 고생하네요.”

“심부름꾼 신세니 별수 있나.”

“미안해요.”

“그렇게 남 걱정할 때가 못 되지 않나? 난 수도에 도착하기만 하면 해방이고, 전하께선 잠깐 쉬어 보지도 못하고 시작인데. 네 이름자 적힌 그런 종이들은 지금도 수도에 수천 장씩 뿌려지고 있고.”

비올레타는 눈을 내려 제 초상화 아래 기사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칼이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호전적인 1황자가 무책임하게 벌여 놓은 전쟁을 5황녀가 종결시켰다.’ 참 명확하고 삐뚤어진 정리지. 안 그래?”

“1황자에겐 불행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네요.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추밀원의 과반이 찬성한 원정, 그리고 1황자가 꽤 많은 공을 기여한 전쟁에 마침표 하나를 내가 찍은 것에 불과한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거나,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아. 굳이 그런 이들을 붙잡고 억지로 다 떠먹이느니, 하나라도 확실히 머릿속에 박아 넣는 게 좋지. 이왕이면 제게 유리한 것으로.”

“이 경우에는, 그 하나가 내 이름이고요.”

“불편해?”

비올레타는 잠시 말없이 칼을 보다 이내 웃었다.

“어차피 다 알면서 서 있는 판이에요. 그럴 리가 없죠.”

“그렇다면 다행이고. 기뻐해. 네 예쁘장한 초상, 그리고 네 대단한 며칠짜리 일화가 황자의 일 년보다 비싸게 팔린 것을.”

세상은 이상하게 돌아가곤 했다. 왜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느냐는 말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무언가를 해내고 손에 쥐고 있어도, 말 몇 마디면 그대로 뒤틀려 헐값이 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냈는지를 줄줄이 기억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인지를 편리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비올레타는 그 편리한 기억의 승자였다. 말 몇 마디에 어떤 것은 헐값이 되듯, 그녀는 아주 비싸졌다.

비올레타는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 제 옆에 다시 놓았다. 칼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말했다.

“보고 있으면 헷갈려.”

“뭐가요?”

“가끔 이상하게 건실해 보이는 얼굴이 있어서. 귀하의 그 얄궂은 장래 부군과 어울리는 것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왕이면 어울린다고 해요. 안 어울린다고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비올레타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칼이 뒤로 더 깊게 몸을 기대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자를 좋아하긴 하는 모양인데.”

“싫어할 이유가 없죠. 그리고 그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녜요.”

마치 치부를 뒤집힌 듯 뾰족한 대답에 칼이 낮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기 없이 물었다.

“행복할 것 같아?”

많은 것이 생략된 물음이었다. 비올레타는 저 말이 자신에게 꽤 과분한 질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그가 물은 행복을 재어 보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아주 오래된 일처럼 비올레타는 해묵은 기억을 헤집었다. 어두운 마차 속에 라키엘이 제 곁에 앉아 있고, 그러다 시야가 흔들려서 그의 무릎에 머리를 묻으면 차가운 손이 술에 취해 뜨거운 이마를 쓸었다. 서로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비올레타가 기억하는 말은 몇 마디 없었다. 그저 그 기억이 좋아 몇 번이고 밤이 되면 떠올렸다.

머릿속에는 퍽 단순한 결론이 남았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천천히 웃었다.

“그래. 그러면 됐다.”

제가 먼저 물어볼 땐 언제고, 칼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 것만으로 충분히 성가셨다는 듯 피곤한 얼굴 그대로 눈을 감았다. 비올레타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다시 제 옆에 놓인 신문들을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선 활자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비올레타는 제 초상이 그려진 델 포르데를 반대로 엎어놓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하루가 끝나 가고 있다. 수도까지는 아직 나흘이 남아 있었다.

드레스덴을 지나 수도 남문을 향하는 행렬은 드레스덴에서부터 행렬을 따라온 이들로 배는 길어져 있었다. 비올레타는 창밖으로 길가에 새로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웃어 주었다. 아마 수도에 들어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창도 열어 둘 수 없을 것이다.

수도에 가까워지며 겨우 마차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디아나가 설레는 얼굴로 비올레타의 드레스를 계속 점검했다. 긴 여정에 입을 의복이 부족해도, 비올레타가 단 한 번도 입지 못하게 디아나가 마지막 날까지 직접 관리한 드레스였다. 드레스는 지난겨울보다 여름에 더 가까운 날짜가 된 그란토니아의 날씨에 맞춘 듯이 어울렸다. 시원하게 파인 목선과, 서늘한 빛을 띤 베이지색의 얇은 공단이 몸매를 아름답게 드러냈다. 비올레타는 디아나에게 유난이라고 핀잔하면서도 그 기나긴 시간동안 완벽한 상태로 보존한 것에 경의를 표했다.

어느덧 점점 길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비올레타는 창을 닫고, 마부 쪽으로 난 창을 슬쩍 밀어 앞을 바라보았다. 남문을 중심으로 수평선으로 길게 늘어진 수도의 풍경이 생경했다. 점점 가까이 따라붙는 인파에 느릿하게 움직이던 마차가 좀 더 느려졌다.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웅성대는 소음은 느린 이동 중에도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소음은 어떤 소리로 구체화되어 들렸다. 비올레타는 그 한데 뒤섞인 외침 속에 제 이름이 때때로 명확히 들려오는 것에 기묘한 전율을 느꼈다.

이윽고 마차가 수도 남문을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환영 인파의 거대한 환호가 시작되었다. 빌키어스가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돌아오던 날, 황궁 밖을 뒤흔들던 아득한 소음을 비올레타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이, 마치 그때와 같았다. 비올레타는 창문을 조금 열어 빽빽이 모인 군중들을 확인했다. 창이 열린 작은 틈 사이로 사람들의 열렬한 외침이 비집고 들어왔다.

“비올레타 전하!”

“에누마 엘라시께서 황녀를 굽어 살피시기를!”

“황녀 전하!”

환호 속에는 간간히 비올레타에게 폐하라고 잘못 부르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비올레타가 그 소리에 긴장해 있던 것도 잊고 웃었다. 그들 앞으로 비올레타가 지나가는 시간은 아주 짧았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닿게 하기 위해 짧고 비슷하며 거창한 말들을 소리쳤다. 창문을 다시 닫아도 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마차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환호 소리에 디아나가 행복하게 웃으며 비올레타의 뺨에 키스했다.

수도 남문을 통과하고도 황궁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하여 비올레타가 마차에서 내린 것은, 어느덧 해가 황궁 너머로 넘어간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황궁 안에 들어선 마차가 멈춰선 채로 조금 기다리자 이내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도 비올레타는 긴장한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올레타에게 내밀어 온 손을 따라 천천히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비올레타가 황망해 하며 그 손을 곧바로 잡자 루드비히가 웃으며 그녀를 부드럽게 마차 아래로 내려 주었다. 그리고 제 바로 곁에 서 있던 파사칼리아에게로 손을 넘겨주었다. 비올레타가 파사칼리아의 팔을 잡은 것과 동시에 파사칼리아의 팔이 그녀의 목을 안았다. 팔에서 미끄러진 손이 허공을 헤매다 이내 파사칼리아의 등을 껴안았다.

“비올레타.”

“……돌아왔어요, 어마마마.”

파사칼리아의 떨리는 손이 비올레타의 뒷목을 제게로 깊게 한번 당겼다가 이내 등을 쓸어내렸다.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를 천천히 떼어 내고 얼굴을 살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많이 힘들었니. 응? 나는,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게 말하고 있는 파사칼리아의 얼굴이 창백해 비올레타는 안타까움에 그녀의 손을 잡고 내려 꼭 잡았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하나도.”

“얼마나 무서웠을까. 거기서 얼마나…….”

“파사.”

루드비히의 낮은 목소리가 파사칼리아를 제지하듯 부드럽게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에게 잡힌 손을 한번 꽉 마주 쥐었다가 놓으며 웃었다.

“수고 많았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비올레타의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더 덧붙인 말도 없는 짧은 한마디였으나 비올레타는 제가 비로소 그에게 완전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올레타가 깊게 허리를 숙이자 루드비히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곧바로 일으켰다. 그리고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뒤, 파사칼리아를 이끌어 앞서 걸어 나갔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제게 가장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 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길고, 선이 날카로워진 남자가 서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지는 노을에 불그스름한 빛을 띠었다. 그가 천천히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왔다. 60일의 시간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비올레타는 눈을 다시 떴다. 그녀는 비로소 라키엘과 마주했다.

드디어 돌아왔다. 여기로. 다시 당신의 앞으로.

비올레타는 궁으로 돌아오며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궁에 돌아온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루드비히와 마주 먹은 식사는 그나마 남아 있던 정신력을 모조리 소진시켰다. 황제의 정찬실도 아닌 파사칼리아의 궁에 딸린 작은 다이닝룸에서의 석찬은 얼핏 부모와 딸의 식사처럼 조촐했으나, 그 의미가 너무 커 오히려 불편했다.

빌키어스가 잉거스트에서 돌아온 날, 카디링거 후의 장례식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녁에는 황실 만찬에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비올레타도 본래는 그랬어야 할 터였다. 고작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가 함께한 작고 조촐한 식사가 아니라. 그것은 마치 황제가, 제 가족을 그 작은 방 속에 한정해 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 외의 제 아내들, 제 자식들은 모두 제하고 오로지 파사칼리아와 비올레타만을 제 가족으로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는 이제 완벽한 부부로 보였다. 이전의 그 많은 일이 마치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양 그들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애써 접붙여 놓은 듯 어그러진 분위기는 비올레타가 없는 새 사라졌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운 온기만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죽은 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고서야, 결코 돌이킬 수 있는 사이가 아님에도.

비올레타는 그 모든 게, 적어도 파사칼리아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고통을 수반한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올레타’의 이름에 걸린 것도. 이제 곧 중간 고지가 보이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오랜만에 부모를 만난 딸이 제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듯 열심히 떠드는 것뿐이었다.

1황자가 개선장군처럼 온 수도의 환대를 받으며 돌아왔을 때도 며칠간 그를 찾지도 않았던 루드비히는, 비올레타가 돌아오자 직접 마중했다. 정확히는 파사칼리아가 딸을 마중하기 위해 직접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녀를 에스코트하겠노라 나섰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바깥에서 특별하게 회자될지는 뻔했다. 황제가 친히 마중하고, 황후의 개인 다이닝룸까지 직접 걸음해 함께 식사한 딸. 그리고 그 딸이 젠트리에서 노동자까지 모든 계급의 환영을 받으며 수도에 입성했을 때에는.

죽은 선대 에델가르드 공작과 평생 냉랭하게 지낸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그의 아들인 라키엘에게 그 특별한 석찬을 함께하길 권하는 말까지 던졌다. 물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물어다 나를 이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한 말이었다. 라키엘은 이미 정해진 일정을 이유로 거절했고, 그 거절이 그리 어렵지 않게 나온 것에서 그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이제는 완전히 황제가 자신들의 뒤에 섰노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비올레타는 문득 라키엘에서 생각을 멈춘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라키엘이 자신을 에스코트 하는 그 짧지만 충분한 시간 속에, 의례적인 말을 제하고 제게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단순히 화가 났다고 하기에는 뭔가 시원찮았다. 물론 황제를 수행하고 있는 그가 그녀에게 유별난 애정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긴 했다. 그리고 그건 비올레타도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화낼만한 건수가 있긴 하지만, 이제 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나? 어둠 속에서 부루퉁한 얼굴로 걷던 비올레타가 제 궁에 들어서며 다시 웃었다. 눈에 익은 하녀들이 반가운 얼굴로 제각기 인사하는 것을 보자 반갑기도 했지만, 반사적인 버릇인 탓이 더 컸다. 그들이 궁 바깥을 드나들며 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곤 제가 웃고 있거나 친절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말 정도인 단순한 것들이었으나 쌓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올레타의 일정이 예정보다 길어진 탓에 밀로일라와 루이즈는 비올레타의 궁을 떠나 각자 메이어와 몬드리올가 저택으로 돌아가 있었다. 디아나는 초저녁에 들여보냈으니 침대에서 곧바로 기절했으리라. 비올레타는 평소에 가까이 두던 하녀 하나만을 대동한 채 방까지 걷다, 그나마도 문이 보이 자 물렀다. 평소와는 달리 온 복도가 환해 딱히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며 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명의 시중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고 벗는 게 당연해졌던 일상도 고작 60일을 간소하게 살자 다시 되돌아왔다. 일거수일투족 죄 시중 받아 가며 우아하게 옷 한 벌 갈아입는 것보다, 제가 아무렇게나 벗고 입는 것이 지금 상태로선 비교할 수조차 없이 편할 것이었다. 지금 제가 입은 옷도 가장 간소한 옷들 중 하나였다. 시중을 받기엔 지나치게 피곤했다. 비올레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서며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가 천천히 머리에 있던 제 손을 내렸다.

주인 없이 환히 밝혀진 방 안에서 라키엘이 콘솔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비올레타는 조금 굳은 채로 문가에 서 있다, 미미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제 뒤로 문을 닫았다. 라키엘이 비올레타가 방 중앙 즈음까지 걸어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제 쪽으로 비스듬히 등을 지고 돌아서는 것을 보고 느릿하게 다가왔다. 라키엘의 손이 비올레타의 몸을 조금 더 돌려세웠다. 그녀는 완전히 그를 등지고 섰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뒤에서 드레스 속에 숨겨진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등 중앙을 가로지르며 일렬로 촘촘히 잠겨 있던 단추가 하나씩 툭툭 풀리는 소리와 함께, 얇은 옷만 남은 등허리로 조금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라키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비올레타는 가만히 하얀 목을 드러내고 서서 그의 시중을 받다가, 불현듯 말했다.

“미안해요.”

겉 드레스를 벗겨 주기 위해 어깨 부근을 끌어내리던 손이 멈췄다. 비올레타는 지금 그의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비올레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제 어깨 끄트머리에 걸치듯 멈춰 있는 손을 천천히 잡았다. 라키엘이 손을 잡힌 채로 잠자코 서 있다가 이내 제 손등을 덮은 손을 거꾸로 잡아채 그녀를 돌려세웠다.

반쯤 돌려세워진 채로 눈이 마주쳤다. 라키엘의 까만 눈이 조금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밤하늘처럼 검어졌다. 비올레타는 시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라키엘의 얼굴이 비스듬히 내려왔다. 그리고 입술이 닿을 듯 닿지 않은 채로 가까이에 멈췄다. 마치 그것이 시늉으로 끝날 줄 알았던 것처럼, 둘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들여 보았다. 라키엘이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라키엘의 표정 없는 얼굴에 미묘한 낯이 떠올랐다.

“좀 곤란해.”

“뭐가요?”

“네가 약속을 어겼으니 화를 내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공적까지 업고 온 것을 치사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그 뒤로 쏟아질 잔소리가 문득 두려워진 비올레타가 다시 키스하려는 듯 은근슬쩍 라키엘의 크라바트를 잡아당겼다. 라키엘이 정색하며 가만히 섰다.

“어디 은근슬쩍 몸으로 때워? 안 좋은 버릇까지 생겼군.”

“어차피 당신이 가르쳤잖아요.”

라키엘이 어이없는 얼굴로 픽 웃으며 비올레타를 내려 보았다. 비올레타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설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지켰지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요. 찬사는 수도까지 오는 내내 지겹도록 들었어요. 반성은 펠로베르에 급습 당하던 순간부터 계속했어요. 이것 봐요. 나 혼자 미리 다 끝냈잖아요.”

“그래. 잘났군.”

“그러니까 다른 말을 해 줘요.”

“뭐가 듣고 싶은데.”

은근히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비올레타가 장난스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보고 싶었다고요.”

“보고 싶었어.”

반쯤 놀리듯 말하고 그 잘난 얼굴이 당황하는 것까지 지켜볼 작정이었던 비올레타가, 웃음기 하나 없이 돌아온 말에 조금 멍하니 섰다. 비올레타는 순식간에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멀거니 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부끄러워서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키엘의 시선이 집요하게 쫓아왔다. 그리고 마치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래. 난 네가 보고 싶었나 보다.”

“아, 진짜, 그런 말을 그렇게…….”

“듣고 싶어 했잖아.”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음험했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라키엘이 벗어나지 못하게 손을 꽉 잡고는 그제야 웃었다.

“그러게 누가 누굴 놀려먹으려고 해?”

“어차피 자기도 장난이면서!”

“그런 거 안 해.”

라키엘이 가볍게 손을 올려 비올레타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겉 드레스를 마저 끌어내렸다. 얇은 슬립과 코르셋, 가벼운 페티코트만 남은 차림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워 비올레타는 차라리 라키엘을 껴안았다. 라키엘이 그녀를 안아 올리며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킥킥 웃었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웃음소리에 명치가 꽉 죄어들며 간질거렸다. 비올레타는 애써 부루퉁한 얼굴로 다른 말을 열심히 생각했다.

“왜 안 왔어요?”

그다지 섭섭하지도 않은 일을 섭섭한 척 꺼내 놓는 것은 제가 지금 이 기분에 취해서일 것이다. 그가 그냥 남자고, 제가 그냥 여자인 이 순간. 라키엘이 비올레타를 책상에 올려두며 그녀답지 않은 물음에 눈썹을 미미하게 들어 올리다, 이내 입매를 끌어올렸다.

“어딜.”

알면서도 놀리듯 모른 체 묻는 꼴이 얄궂다고 생각하면서도 비올레타는 말을 이었다.

“로드리고는 엔트위프까지 왔잖아요. 적어도 당신은 드레스덴에서 날 맞이했어야지.”

“바빴어. 그렇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은, 그런 할 일 없이 한가한 자가 해야지.”

라키엘이 무덤덤하게 대꾸하며 그녀의 목에 다시 입술을 묻었다. 비올레타가 천천히 목을 젖혔다. 라키엘의 입술이 길게 드러난 목을 거슬러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살짝 이를 세워 깨물었다. 차가운 손이 슬립 안쪽을 파고들었다. 비올레타가 가늘게 목을 울렸다. 그 소리에 손길이 좀 더 거칠어졌다.

“……다시는, 그렇게 못 나갈 줄 알아.”

마치 이전의 여유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라키엘은 잇새로 짓씹듯 서늘하게 뇌까렸다. 비올레타는 말없이 그의 목을 껴안고 제게로 깊게 끌어당겼다. 입술이 다시 맞부딪쳤다.

검과 장미가 고풍스럽게 조각된 검붉은 나무문이 라키엘의 앞에서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렸다.

“의장, 에델가르드 공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길 기다리던 라키엘이 뢴트미안의 방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 방 안에 라키엘의 발소리만 날카롭게 울렸다. 이윽고 뢴트미안의 상석에 라키엘이 앉자 간결한 개회사가 이어진다.

“제국력 808년, 봄의 92일, 추밀원 정기 소집 제 4911회…….”

라키엘은 느긋하게 개회사를 들으며 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의장이 앉는 상석은 황실의 대표자와 비스듬히 마주하게 되어 있었다. 빌키어스가 라키엘과 눈을 마주치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설핏 입매를 끌어 올렸다. 라키엘은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리며 뒤에서 내밀어진 종이들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마치 지금부터 읽을 작정인 양 제 눈앞에 들고 있다가 뢴트미안 위로 무성의하게 내려놓았다.

“성공리에 종전 협상을 끝내며, 펠로베르에게서 구 잉거스트 공국령 중북부 누벨 지역의 영유권을 제국이 추가로 얻어 낸 것은 의원들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5황녀 전하께서, 세상에, 그 어린 나이에 정말이지 놀라운 성과지요.”

메이어 백작이 만족스레 웃으며 카디링거 후작을 힐끗 보았다. 후작이 마주 웃으며 가볍게 동의했다.

“그것이 놀라운 공적이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카디링거 후의 말대로, 이 자리에도 없는 5황녀에 대해 여기서 더 치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의원들께서도 마찬가지이실 테지만, 제게 그 주제는 이제 꽤 지겹기도 하고요.”

라키엘이 후작을 보며 매끄럽게 입매를 늘이고는 이내 서늘해진 얼굴로 종이를 몇 장 넘겼다.

“지금 우리가 논할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밀니로에서 누벨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자신들에게 재이전해 주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누벨에 대한 영유권은 애초에 펠로베르와 제국간의 독자적 협상에서 비롯된 것이지, 밀니로와는 하등 관련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들이 벌써 우리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닙니까? 건방이 지나칩니다.”

“베르니우스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습니다! 감히, 염치도 없이…….”

한마디씩 얹어지며 과열되어 가는 분위기를 라키엘은 잡을 생각도 없는 듯 그저 가만히 두고 보았다. 빌키어스가 문진을 들어 뢴트미안을 가볍게 쳤다. 오래된 나무 위로 대리석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방 안을 울렸다. 일시에 모든 말이 끊어졌다. 말을 더 이어 가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베론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고 빌키어스를 돌아보았으나, 빌키어스는 그것을 웃는 낯으로 넘겼다.

“그 뒤를 더 말씀하세요, 에델가르드 공.”

빌키어스는 마치 제 손 아래 있는 신하들을 다스리듯 분위기를 잡아 라키엘에게 그대로 넘겨주었다. 방관자처럼 관조하고 있던 라키엘이 빌키어스의 눈을 잠시 빤히 들여다보다 비스듬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리 정신 나간 소리는 아닙니다. 밀니로는 그란토니아의 원조에 대한 대가를 이미 수차례 치렀고, 우리가 원조국이랍시고 저들 뒤에 서서 장사치마냥 자그마한 잇속이나 따로 챙기는 꼴을, 세상에 보이고 싶지 않아 할 뿐입니다. 밀니로 대사의 그 장황한 말을 정리하면 이렇겠군요. 아, 물론 이보다는 훨씬 더 공손했다고 생각하십시오.”

“펠로베르에 맞선 것은 우리가 아닌 온전히 자신들이라,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시큰둥한 얼굴로 잠자코 앉아 있던 칼이 뒤로 몸을 기대며 라키엘에게 물었다.

“잉거스트전戰이 우리에게 있어 일종의 투기投機였다면, 그들에게는 백 년을 곱씹은 치욕을 설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꽤 절절한 싸움이었죠. 그들이 그렇게 우리를 뒤로 밀어내고 대외적인 행세를 하겠다고 해도, 기꺼이 지지해 줄 필요는 있을 겁니다.”

라키엘이 짐짓 친절한 태도로 대꾸했다. 의원들의 표정이 제각기 묘하게 흐려졌다. 카디링거 후작이 고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필요는 합리에서 나옵니다. 공께서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요.”

“물론입니다. 요청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가로, 밀니로의 약속에 좀 더 매력적인 항목들이 추가로 새로이 붙었습니다.”

“이를테면?”

“영유권을 포기하는 대신 누벨의 실질적인 가치인 광산 운영권을 사십 년간, 그들의 식민지 중 가장 큰 몰비아의 절반을 개발할 권리를, 그리고 그란토니아의 칙허 회사 중 하나가 쾨르미타와의 교역권을 독점으로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 그 제안의 골자骨子입니다.”

“몰비아 개발권에, 쾨르미타라니, 그건 정말로 나쁘지 않군요. 누벨은 어차피 제국의 영토로 관할하기에는 난해한 위치와, 사소한 크기가 문제였으니.”

몬드리올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키엘의 말에 차분하게 찬동했다. 황녀가 협상 막바지에 펠로베르에게서 누벨 땅을 굳이 뜯어낸 것이 영영 들고 있기 위함이 아니란 것은 뢴트미안에 앉은 모두가 당연하게 아는 사실이었다. 누벨은 펠로베르와 밀니로의 새로운 국경선 중앙에 점한 곳이었고, 더군다나 그 국경이란 것이 방금 전까지 분쟁으로 들끓던 곳이다. 그란토니아에게는 그리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없지만,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아쉬운 땅이다. 그리고 밀니로는 노련하게도 그것을 모른 체하며, 그란토니아에게도 그것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비싼 대가를 치르겠다고 나섰다.

“이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애초에 누벨을 지목한 것부터 협상을 해내기까지 황녀 전하께서 이렇게 될 것까지 모두 짐작하시고…….”

“어쩌다 이야기의 앞뒤가 잘 들어맞은 것 아니겠습니까.”

메이어 백작이 흡족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치사하려는 것을 베론 후작이 싸늘하게 잘랐다. 칼이 그를 힐끗 보고는 나른하게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의 시작조차 없는 황자도 계시는데, 황녀는 어쩌다 운 좋게 들어맞을 앞뒤라도 있으니 그것이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칼이 화사한 낯으로 베론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빈정거렸다. 작위 승계 후 몇 년간을 추밀원에 있는 둥 마는 둥 제대로 자리를 지키는 일도 없던 로드리고의 젊은 주인이 직접 킬리안을 겨냥해 비꼬는 것에 놀란 몇몇이 그를 바라보았다. 라키엘은 베론이 그 꼬리를 피곤하게 물기 전에 딱딱하게 말했다.

“밀니로는 지금 지극히 조심스럽습니다. 새로운 국경선에는 어느 정도 시간도 필요하죠. 다만 펠로베르 황제에게 시간이 전혀 남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곧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할 터, 깨진 조각 붙여 놓은 것처럼 마냥 불안한 밀니로와의 국경에, 제삼국의 군사까지 주둔하고 있는 것을 펠로베르가 달가워할 리 없을 테고. 맞습니까?”

“맞습니다, 전하.”

빌키어스의 물음에 라키엘이 짐짓 정중한 어조로 대꾸했다. 냉랭한 시선이 서로를 갉아먹을 듯 깊게 파고들다 이내 동시에 사라졌다. 라키엘은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밀니로는 펠로베르가 위협을 느끼고 역으로 자신들을 위협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순조롭게 넘기기 위해 우리가 누벨에 값을 매기기도 전에 비싼 값을 적어 보내 왔고요.”

“더 비싼 값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가능은 하겠으나, 이보다 과도한 요구는 우리의 원조를 잊게 할 겁니다. 무엇보다 황제께서 밀니로와의 관계는 이대로 공고한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한 밀니로의 제안을 더없이 흡족해 하십니다. 그런고로 이 사안으로 추밀원이 불필요하게 긴 시간을 끌지 않기를 당부하셨습니다.”

황제의 뜻이 바로 제게서 이곳으로 전해지고 있노라고 그렇게 뻔뻔한 얼굴로 내뱉는 젊은 공작을 카디링거 후작이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황제의 혓바닥이었던 선대 카디링거 후작과, 황제가 얼굴도 맞대지 않았던 선대 에델가르드 공작. 마치 그 선대가 정반대로 뒤집히기라도 한 양 우스운 상황이었다.

라키엘은 제 말이 이어질수록 서늘하게 가라앉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뒤집고 선 땅은, 혹은 카디링거가 뒤집히며 잃은 것은 결코 진짜가 아니었고 또한 그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얄팍하게도 이 짧은 순간에는 꽤 유용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해 그가 지금 어떤 새로운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또한 황제께서는 펠로베르의 황위 계승 문제에 온갖 잡음이 들려오는 것을 지켜보시며 깊이 염려하고 계십니다.”

라키엘의 말에 일순 뢴트미안이 차갑게 식었다. 방 가장자리의 펜대 움직이는 소리만 방 안을 조용히 울렸다. 라키엘은 오만하게 내리깐 눈을 여유롭게 들었다. 빌키어스와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라키엘이 천천히 웃었다.

“그리하여, 더 늦기 전에 계승 서열을 확고히 해 두길 원하십니다.”

“더 확고히 할 것이 있습니까?”

카디링거 후작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라키엘은 에둘러 말하지도 않고 순순히 대꾸했다.

“여태 황녀의 계승권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확언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태 확언한 바가 없었던 것은, 그것이 연극 속 허구나 마찬가지라 확언할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건국제가 세운 제국법을 허구라 칭하실 줄은 몰랐군요.”

“실질적으로 사문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황실에는 여제들의 선례가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 선례에 불과합니다. 공께서는 전설이라도 끌어올 작정입니까?”

“전설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후의 조카이신 3황녀 전하가 계시는데.”

“에델가르드 공.”

라키엘을 부르는 후작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으나, 그 옆에 앉아 있던 다이크 백작은 이미 기막힌 얼굴이었다. 비단 그만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알레노브 백작이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딸과, 황비의 아들. 그 치졸한 우열을 가리는 데 고작 끌고 오는 명분이란 것이 황제의 자녀 중 계승서열 최하위인 다른 황녀라는 것은, 빈약한 핑계라기 보단 차라리 성의 없는 인사치레나 조롱에 가까웠다.

“일로벨라 전하의 계승권은 폐하의 자녀 중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유명무실한 것을 어찌 언급하십니까.”

“가장 아래에 있어도 그녀는 분명 계승 서열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 알겠습니까? 제국에 전염병이라도 돌아 혹여 수도에 계신 계승권자들께 변고라도 생기면, 3황녀께서는 외국에서 홀로 무사하실 텐데요.”

“농이 지나치시군요. 황자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에델가르드 공께서는 좀 더 신중을 기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후께서도 말씀에 좀 더 신중을 기하십시오. 3황녀 일로벨라의 계승권은 그녀의 외숙부인 후께서도 감히 가치 없노라 단언할 수 없는, 본래 그 자체로 의미 있던 것입니다. 후의 조카님은 황제의 따님이 아니십니까.”

검은 눈 위로 느릿하게 서느런 날이 섰다. 라키엘이 시선을 조금 돌려 빌키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말소리만 우아한 진흙탕 속에서도 여전히 저는 아무런 원죄도 없는 사람인 양 말갛게 차가운 벽안이 라키엘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흔들림 없는 고고함이 고깝지는 않았다. 그는 너무 고귀하게 태어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순간이 와도 진창에 발을 담글 자격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5황녀는 가장 완전한 혈통과, 전 황태자가 죽고 없는 지금 유일무이한 정통성을 이어받았습니다.”

라키엘은 빌키어스에게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천천히 명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장 완전한 혈통. 그렇게 내뱉는 혀끝으로 기묘한 희열이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이미 세상 어디에도 없는 허구였다.

“역사상 여제들, 그리고 그 여제의 아들들이 이은 황실의 혈통을 죄 거슬러 올라가 부정하실 것이 아니라면…….”

“…….”

“5황녀의 최우선적 계승권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의미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정적 속에 펜 끝이 종이 위를 서걱서걱 스치는 소리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침묵은 얼마 후, 수도를 뒤집었다.

추밀원에서, 최초로 황녀의 계승권이 공언되었다.

봄의 끝, 가까이 다가온 그란토니아의 여름 축제와 맞물려 수도는 각종 종전 기념행사로 분주했다. 사람들은 은이 그리 많이 들어가지도 않고 실상 쓰이지도 않을 종전 기념 주화를 하나씩 사서 손에 쥐고 다녔다. 국가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수많은 일에도 종전 기념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붙었다. 기실 그란토니아에 있어 그리 결정적인 전쟁도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기까지 했다. 말을 탄 황녀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실렸던 그 날의 델 포르데는 없어서 못 구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계층 단위를 막론하고 아직 이야기에 홀려 있었다. 황제의 아들이 전쟁의 선봉에 서고, 황제의 딸이 총을 들고 전선에 서 있는 것은 군인이 전쟁을 하는 것처럼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전혀 익숙하지 않고, 가장 귀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곳에 임하는 이야기에 귀를 틔우고 눈을 떴다.

비올레타의 이야기가 신문을 지배한 이후 빌키어스는 수없이 많은 재평가를 거쳐야 했으나 결과 적으로는 인정받았다. 킬리안은 가끔 잘난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지겨워질 때쯤 오욕 속에 회자되었다. 그는 하녀를 강간하려다 죽였다고 알려졌다. 하녀는 강간당하지도 죽지도 않았으나, 벨노사 지방 출신의 어느 목수의 딸이라며 그 나이까지 구구절절 소개되곤 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꽤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제 갓 열 살이 된 6황자 이안은 몸이 약해 얼마 살지 못할 거란 소문만이 돌았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비껴 있던 어린 이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황제의 자식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비올레타의 계승권이 추밀원에서 공언된 이후 벌어진 일이었다.

비올레타는 극장 입구에서 받은 기념주화를 손안에서 굴리다 무대에서 큰 소리가 들리자 시선을 발코니 바깥으로 들었다. 앞에서 포탄이 터지는 효과음이 연이어 들렸다. 무대가 연기로 자욱했다. 군인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무대 위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오케스트라의 긴박한 연주 위로 프리마돈나가 비명처럼 빠르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대 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놀랐니?”

대각선상에 앉아 있던 파사칼리아가 비올레타를 힐끗 돌아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비올레타가 웃으며 고개를 잘게 흔들고 다시 무대를 내려 보았다. 극작가 피에텔로의 「이실리아 브로기오니」를 한 젊은 음악가가 오페라로 새로이 각색했다는 종전 기념 공연은, 그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비올레타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실리아 브로기오니는 200년 전 에른스트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브란젤의 여왕이었다. 그리고 200년 뒤 다른 나라에서 제 생애를 다룬 공연이 무대에 오를 만큼 훌륭한 치세를 펼쳤던 성군이기도 했다.

야심찬 젊은 음악가는 그날 델 포르데에 실린 황녀의 초상화를 보고 결정적인 영감을 얻었노라 공언公言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도, 극중에는 때때로 비올레타를 빗댄 표현이 나오곤 했다. 무대 위의 프리마돈나를 보면서 비올레타를 떠올리지 않을 이는 적어도 이 극장 안에 없을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무대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두다, 마침 제 뒤로 커튼이 열리며 잠시 나가 있던 루드비히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돌아보았다. 루드비히는 그녀들을 배려하듯 조용한 걸음으로 본래 제 자리인 비올레타의 앞에 앉았다. 황립 오페라 극장의 가장 높은 발코니는 대부분 황족과 최고위 귀족을 위한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앙 발코니는 언제나 황제 부처만이 앉을 수 있도록 준비된 자리였다. 발코니는 다른 칸보다 넓으나 고작 네 개의 자리만 설치되어 있었다. 황제 부처를 위한 가장 좋은 두 자리와 그들이 대동하길 원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 자리에 사람이 앉는 일은 대체로 드물었다.

황제 부처조차 나란히 앉아 있는 일이 잘 없었던 그 발코니에 비올레타까지 앉아 있는 것은 오페라의 내용과 더불어 큰 관심을 샀다. 어차피 그러라고 그녀를 제 바로 뒤에 앉혔을 테지만, 비올레타는 못내 자리가 조금 불편했다. 무대를 얼마간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돌아보지도 않고 조용히 말했다.

“짐도 없는데, 황후 곁에 편히 앉아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 자리에 앉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에 비올레타가 잠시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감히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 겸양을 떨려 하느냐?”

“폐하께서 용인하셨으니 다음에 또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시거든 꼭 주제넘게 앉아 보겠습니다.”

비올레타가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치자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곁에서 파사칼리아가 나직하게 따라 웃었다.

극장 중앙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 빛을 배경으로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가 마주 보는 모습이 그림자처럼 어둡게 드러났다. 비올레타는 마른 숨을 삼켰다. 그것은 다행히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파사칼리아가 무대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루드비히는 조금 더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타는 파사칼리아의 마른 어깨선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다시 제 손에 쥐고 있던 기념주화를 흘끗 내려 보았다. 비올레타의 손이 주화를 한 번 꽉 쥐었다.

어느덧 브란젤에 밀려난 채 퇴각하고 있는 에른스트 군사들이 무대 위를 가로질렀다. 비올레타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루드비히의 어깨너머로 무대를 응시했다. 퇴각하는 군사들을 여왕, 프리마돈나가 막아서며 의기양양하게 노래를 불렀다. 오케스트라가 점점 고조되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다른 소리들에 쫓기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높은 음역으로 달려갔다.

그때 루드비히의 팔이 비올레타의 시야를 가로질렀다.

“……파사?”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이상해 비올레타는 반사적으로 파사칼리아를 보았다. 루드비히가 어깨를 잡자 파사칼리아가 힘없이 휘청거렸다. 루드비히가 힘주어 그녀를 바로 잡았다. 비올레타가 급히 몸을 일으켜 파사칼리아에게로 갔다.

“괜찮아. 괜찮으니, 걱정 말고…….”

비올레타가 파사칼리아의 앞에 몸을 굽히기도 전에 제 곁을 스치는 드레스 자락을 본 파사칼리아가 손을 들었다. 비올레타가 아예 앞에 주저앉아 파사칼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오페라 내내 빛을 등지고 언뜻 보던 얼굴과는 달리, 샹들리에 빛을 오롯이 받아낸 파사칼리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비올레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바닥이 차가웠다.

“세상에! 어마마마, 얼굴이…….”

“잠깐, 잠깐 어지러워 그래. 바닥이 차가우니 어서 일어나렴.”

파사칼리아가 흐릿한 초점을 겨우 바로 잡으며 비올레타를 일으키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루드비히가 말없이 비올레타의 뒤에서 그녀의 팔 위쪽을 잡아 가볍게 일으켰다. 비올레타가 그대로 일으켜진 채 아연한 얼굴로 루드비히와 파사칼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루드비히가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파사칼리아에게 말했다.

“돌아가야겠어.”

“이제 3막이에요.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괜찮아요.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고…….”

“궁으로 돌아가.”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의 말허리를 자르며 딱딱하게 못 박았다. 파사칼리아가 표정 없이 고개를 들어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직 4막이 남았고, 황후께서 커튼콜까지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적어도 지금 돌아갈 수는 없어요.”

파사칼리아의 말은 괜한 고집이 아니었다. 발코니 깊숙이 앉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황제와 황후를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파사칼리아가 중도에 영영 극장을 떠나는 것이 어떤 소문으로 빠질지는 뻔했다. 몸이 조금 안 좋다는 말은 그다음 날에 불치병으로도 쉽게 둔갑할 수 있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최소한의 국가 행사를 제하고는 황제와 황후가 거의 십여 년 만에 함께 자리했다는 것과, 비올레타의 계승권이 대대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시기를 생각한다면 소문의 꼬투리만 잡아도 얼마든지 평소보다 더 자극적으로 부풀려질 수 있었다. 그리고 모후가 위중하다는 소문은 지금 에델가르드 공저에 모여들고 있는 황녀의 후원자들에게 치명적인 소식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루드비히의 말이 맞기도 했다. 황제들은 1막이 시작하기 무섭게 일어나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으므로, 3막 중반에 들어선 지금으로선 공연을 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사칼리아는 그저 더 신경 쓰고, 염려하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곤란한 표정으로 루드비히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올레타로서는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파사칼리아의 낯빛이 점점 눈에 띄게 파리해지는 것이 보여 초조했다.

“……같이 나가지.”

결국 루드비히가 져 주겠다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몸이 미편한 것은 그대가 아닌 짐으로 하고. 그럼 괜찮겠나?”

비올레타가 놀란 얼굴로 루드비히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세상에서 회자되는 제 건강에 얼마나 철저한 완벽을 기하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파사칼리아는 대꾸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루드비히가 그 손을 잡고 부드럽게 파사칼리아의 몸을 일으켰다.

“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좋겠구나. 저 유망한 젊은 음악가가 널 열렬히 사모한다고 하니.”

비올레타는 루드비히의 말에 애써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파사칼리아가 더 걱정 말라는 듯 비올레타의 팔을 힘없이 도닥이고 발코니를 빠져나갔다.

비올레타는 루드비히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뒤돌아 극장을 내려 보았다.

거대한 극장 아래로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그리고 무대 위의 여왕. 음악 소리가 높은 천장을 타고 아득하게 울리며 다시 떨어졌다. 비올레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다시 돌려 루드비히의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파사칼리아의 자리에 앉았다.

1황비, 베티스는 부채를 팔랑이며 내리깐 눈으로 무대를 응시했다. 브란젤풍의 화려한 선홍색 다마스크 비단이 깔린 기다란 소파 위로 프리마돈나가 우아하게 앉았다. 늙은 재상이 달려와 여왕 이실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왕자 엘트메데스가 반역을 일으켰노라 소리쳤다. 여왕은 놀란 기색도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빠른 노랫소리가 왕자의 목을 쳐 제게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조용히 프리마돈나의 아리아를 듣고 있던 베티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낮게 웃었다.

“폐하께서 지금 궁으로 돌아가신다는군요.”

발코니로 숨어들 듯 들어왔던 급사가 나가자, 베티스의 옆에 앉아 있던 카트린느가 부채를 탁 접으며 말했다. 베티스는 카트린느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커튼콜 전까지는 지켜보시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편찮으신 듯하여 걱정인데, 이리 공식 석상에서 말씀하실 정도로 그러신 것은 처음이라…….”

“잠시, 잠시만.”

베티스가 손을 들어 카트린느의 말을 막았다. 카트린느가 날이 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베티스가 무대를 물끄러미 내려 보며 빙그레 웃었다.

“곧 엘트메데스가 죽을 거랍니다.”

카트린느가 답답한 얼굴로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려다 이내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이 쓰레기 같은 오페라를 뭐가 그리 좋다고 배알도 없이 열심히 보십니까?”

“초연으로 끝나지 않을 오페라의 초연만큼 귀한 것도 없으니까. 황비도 가치를 넓게 두세요.”

“초연이라, 팔자도 좋으시군.”

베티스는 카트린느가 비아냥대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무대를 평온하게 응시했다.

여왕이 홀로 섰다. 반역을 일으킨 왕자 엘트메데스의 군사들이 여왕의 반대편에서 서서히 다가왔다. 그러자 여왕의 뒤로 여왕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합창이 시작되었다. 여왕이 극적인 몸짓으로 휙 뒤돌아 제 군사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군사들이 한데 뒤섞였다.

베티스가 앞으로 기울여진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카트린느의 말까지 막아가며 무대에 열중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관심도 묻어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엘트메데스가 곧 죽겠군요.”

앞서 말한 적 없는 양 카트린느를 보며 느릿하게 되풀이하는 말이 싱거워 카트린느가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앉아계실 텝니까?”

“좀 더 봐도 좋고, 폐하께서 자리를 떠나셨으니 그러지 않아도 좋겠고.”

답지 않게 계속 밍밍한 소리만 하는 것이 카트린느는 벌써 지겨웠다. 카트린느가 신경질적으로 뒤에 서 있던 시녀에게 손짓하며 자리를 나서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베티스가 무대를 힐끗 보았다.

무대 중앙에서 여왕이 왕자를 가리켰다. 하얀 칼날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어리석은 엘트메데스.”

카트린느가 문득 걷힌 커튼 밖으로 발을 내딛다 멈춰 섰다.

“우리의 가여운 아들들이 생각나는 밤이군요.”

“…….”

“킬리안은 언제 저렇게 죽게 될까, 황비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발코니 아래쪽 무대에서 칼이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아마도 그것이 엘트메데스의 칼이고, 그가 죽은 것이리라. 프리마돈나의 환희에 찬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카트린느가 미묘하게 굳은 입매를 천천히 움직였다. 제 얼굴을 베티스가 볼 리 없는데도, 마치 제 표정이 들킬까 초조한 것처럼 그녀는 입매를 급히 끌어 올렸다.

“난 빌키어스의 저런 죽음을 수없이 상상했답니다.”

“1황비께는 아쉬운 일이겠으나, 내 아들에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 미편하신 것이 걱정이라…….”

베티스가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어왔다.

“열여섯, 열일곱이었나?”

“…….”

“황비께서 처음으로 폐하를 보았을 때가. 난 아직도 그 베론 영애가 생각나요. 그 고양이처럼 예쁘고, 귀엽고, 탐욕스럽게 순진하던 계집아이. 내 시녀들은 한창 혓바닥에 독이 올라 폐하 곁을 빙빙 맴도는 영애를 깎아내리고 험담하기 바빴지만, 난 알아봤죠.”

베티스의 손이 카트린느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돌렸다. 카트린느가 그 손을 털어내듯 잡고 끌어내렸다. 베티스는 무안한 기색도 없이 빙그레 웃으며 카트린느의 얼굴을 응시했다. 카트린느는 초조해 보였다. 베티스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조금 진해졌다.

“그 어린 얼굴에 불쌍할 정도로 미련한 진심밖에 없었지. 안 그런가요?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아주 신기하게도 말이야.”

여상하게 말하며 제 눈을 가만히 응시해 오는 시선에 카트린느가 바싹 마른침을 삼켰다. 스무 해가 넘는 시간동안 온갖 구구절절한 원한이 다 쌓인 관계임에도, 카트린느는 이렇게 있노라면 마치 열일곱 적 영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베티스가 어려웠다. 그녀는 저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까마득한 위에서 아래로, 어린애를 다루듯 그 가볍고 성의 없는 눈길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제 속을 모조리 다 들여다보는 듯한 그 눈빛.

열일곱, 처음으로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그 곁의 여자. 그녀가 루드비히를 처음 봤을 때 루드비히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베티스였다. 파사칼리아의 존재를 몰랐던 그녀의 눈에 비친 베티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보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질투가 끌어올라 제 속에서 그녀를 바닥까지 깎아내리기도 했으며, 어느 날은 백치라도 된 양 그녀를 까마득한 우상처럼 생각했다. 언젠간 저도 저렇게 되리라 간절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파사칼리아가 제가 아무리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다면, 베티스는 저와 태생부터 달리 태어난 종자였다. 그리 잘난 척 살더니 결국 빈껍데기 안고 살았구나, 그렇게 비웃어도 베티스는 여전히 저 홀로 고고했다. 카트린느가 루드비히의 곁에 붙어 말 잘 듣는 예쁘장한 측실처럼 몸을 비빌 동안 베티스는 파사칼리아가 버린 궁정을 장악했다.

“그때는 내심 그게 귀엽기도 했더랬지. 다만 지금은 조금 안쓰럽네요.”

베티스는 냉랭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이제는 나도 늙었고, 황비도 마흔이 됐죠. 그란토니아에서 계집의 지고지순함이란 그저 남자에게 그리 중요치도 않은 액세서리 같은 것일진대, 나는 같은 계집으로서 황비의 그런 면만은 높게 사요. 모두가 변하는 가운데, 당신 홀로 변하지 않는 것.”

“……우리 사이에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군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폐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비.”

카트린느가 말없이 눈매를 좁혔다. 베티스가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웃었다.

“미편하신 것은 황후십니다. 황비께서도 잘 알고 계셨겠으나.”

베티스의 말에 카트린느가 순간 멈칫 숨을 멈췄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베티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카트린느를 응시하다 이내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황비. 우리의 주군께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할 수 있는 분이시나 그 안에서도 징그럽도록 변하지 않는 구석을 갖고 계시지요. 그렇지 않던가요? 지금처럼 기꺼이 손가락 하나쯤은 자를 수 있는 분이고요.”

잠시 흐트러졌던 카트린느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그 어느 곳에도 터트릴 수 없는 분노였다. 베티스는 뱀이 제 앞에 놓인 개구리 주위를 느긋하게 배회하듯,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영영 접붙일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5황녀의 계승권이 우리의 아들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아직 기억하나요? 폐하께서는 노력하고 계세요.”

“힘겹게 쌓아올리신 것들을, 이렇게 하나씩 무너뜨려 가며 말입니까?”

“혹시 모를 일이지요.”

“…….”

“파사칼리아의 늙은 손만 다시 잡으실 수 있다면, 실컷 이용해먹은 그것들에게서는 이제 아무런 가치를 느끼실 수 없게 되었는지도요.”

베티스가 카트린느의 머릿속에 글자 하나하나를 새겨 넣듯 낮게 속삭였다. 베티스가 지칭한 ‘그것들’에는 카트린느는 물론이고, 그녀 스스로도 포함되었다. 베티스에게는 그리 절망적인 일도 아니었으나, 카트린느의 세상은 무너질 만한 이야기였다. 카트린느는 그 일말의 가치로 황제에게 매달려있었고, 오래전부터 그랬듯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안도하고 덧없는 희망을 품었다.

그 멍청한 꼴은 이제 더 보기에 조금 지겨웠다. 본인도 지치고 질리고 질색할 인생이니 아예 끝이 나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그 일말의 가치도, 덧없는 희망도 모두 소용이 없어지면 그녀는 이제 설 곳이 없어진다. 어차피 오래전에 정신이 나간 계집이니,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의 손을 다시 잡는 것을 제가 목도하기 전에 망가뜨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제 목숨이라도 걸리라.

그녀에게는 제 멍청한 오라비와 이제 앞도 안 보이게 된 미래를 생각하는 일보다는 당장 제 심장을 쥐어뜯을지도 모를 일에 열중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보아하니 이미 제 딴에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조금씩. 베티스는 입매를 길게 늘였다.

베티스는 카트린느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비극적인 낭만에 심취해 평생을 소모하며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귀엽다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파사칼리아와 제 앞에 독을 몇 번이고 밀어 넣는 것을 보면서도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베티스가 그녀에게 한 번 뒤집어씌웠던 것은 가소로울 정도로 카트린느는 황제의 용인하에 수많은 일을 했었다. 빌키어스의 급사 두어 명은 피를 토하며 죽었고, 미하일은 열 살도 안 되어 쓰러져 수일을 앓았었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이 계승권 따위와 같은 거창한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닌, 고작 그 얄궂고 질척한 낭만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사랑의 결말을 볼 차례였다. 더 늦기 전에.

“그러니 이제 영영 버려질 준비를, 조금씩 하는 게 좋아요.”

“…….”

“이젠 킬리안을 살리셔야지요.”

베티스는 아주 조금의 진심을 담아 카트린느에게 충고했다. 그녀는 그나마 조심하던 것도 잊고, 제 아들도 돌아보지 못하며, 영영 버려질 준비 같은 것도 하지 못하리라. 베티스는 불이 난 집 속으로 미친 계집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계집은 문을 열 수 있지만, 결국 열지 못할 것이다.

여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웅장한 합창 소리와 함께 막이 내리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베티스가 소란 속에 카트린느의 사납고 불안한 시선을 가만히 응시하다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코니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프리마돈나가 열렬한 커튼콜 속에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베티스가 프리마돈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라키엘이 시녀가 물병을 들고 오는 것을 힐끗 보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병을 직접 받아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크리스탈 잔에 물을 따르고, 파사칼리아에게 갔다.

“고맙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파사칼리아가 라키엘에게서 잔을 받아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라키엘이 대꾸 대신 설핏 웃었다. 파사칼리아는 천천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잔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던 라키엘이 파사칼리아가 잔에서 입을 떼기 무섭게 잔을 뺏었다.

“라키엘.”

라키엘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도 없이 덤덤하게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가 눈치 좋게 다른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내며 문가에 가서 섰다.

문이 닫히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라키엘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확실히 이상하시군요.”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시니 하는 말입니다.”

냉담하게 대꾸한 라키엘이 몸을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콘솔 위에 크리스탈잔을 조용히 놓은 그가 파사칼리아를 등진 채 섰다. 파사칼리아가 한숨을 삼키며 라키엘의 등을 바라보다 타이르듯 말을 꺼냈다.

“라키엘, 나는 정말로…….”

“점점 안 좋아지고 계십니다.”

라키엘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잘랐다.

“오늘 오전에도 한창 구토에 시달리셨다고 들은 참입니다. 더 이상은 기다려드리기 힘듭니다. 저녁에 공저 주치의를 보내겠습니다.”

“예삿일이야. 내가 늘 위병胃病을 달고 사는 것 알잖니.”

사실 그녀가 보이는 위병 증상이야 평생을 달고 살아온 지병이니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 외에도 수없이 자질구레한 지병들을 늘 달고 살았고, 쉽게 어지러워 했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숨도 제대로 편히 못 쉬었다. 확실히 파사칼리아의 말대로 예삿일이라면 예삿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 비올레타를 위해 파사칼리아가 조금의 티도 낼 수 없는 만큼이나, 비올레타 때문에 파사칼리아가 죽었으면 하고 바랄 이도 많았다. 라키엘은 직감 같은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아예 제쳐 두지는 않는 편이었다. 직감보다는 뻔한 예상에 가깝기도 했다. 파사칼리아가 지금 이 시기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보내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노릴 것이고, 그것은 라키엘이 입장을 정반대로 바꿔 두어도 그랬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파사칼리아는 이제와 특별한 이상 증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전부터 몸이 쇠약했다. 라키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모님.”

“……괜찮아. 내가 괜찮아야 하는 시기다. 라키엘,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멀쩡히 살아 있는 일뿐이다. 그 자리만은 내가 지키게 하렴.”

“괜찮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질구레한 소문은 조카가 다 알아서 합니다. 고모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니 티올리를 만나세요.”

“위병이 심해진 것뿐이란다. 약은 이미 먹고 있고.”

“심지어 소문이 어떻게 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티올리에게 보이세요. 조카가 유난 떠는 것에 한 번 맞추기만 하세요.”

라키엘의 말에 파사칼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일단 바꾼 약의 차도를 좀 더 지켜보고.”

“차도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라키엘이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듯 다시 파사칼리아를 돌아보았다.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손짓했다.

“라키엘, 이리 와 보렴.”

라키엘은 잠시 말없이 파사칼리아를 바라보다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파사칼리아는 라키엘이 가까워지자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가까스로 힘주어 잡은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라키엘이 눈가를 조금 일그러뜨리며 파사칼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라키엘.”

“말씀하세요.”

“네 어머니가 죽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 어머니를 봤을 때…….”

파사칼리아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라키엘이 한숨을 쉬며 손을 놓으려는 것을, 파사칼리아가 다시 힘주어 잡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멀쩡해 보여서, 도저히 전언으로 듣던 위중한 사람 같아 보이지가 않아서, 아버지가 유난을 떠신 거라고 생각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고, 눈에도 총기가 가득했고. 너희 어머니는 목소리가 조금 낮았어. 여자치고는. 아무튼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돌아갈 시간을 재기까지 했단다.”

“…….”

“추수제가 얼마 남지 않아 할 일이 많았지. 시끄러운 일도 많았고. 여러 가지 일로 지쳐 있던 나는 그때가 그리 특별한 시간이 아닐 거라 생각했어. 너희 아버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수도에 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공저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끝나면 느긋하게 햇볕에 앉아 이야기 나눌까 했지. 너희 어머니는 참 수다스러웠어. 네가 말이 많은 건 아마 네 어머니를 닮아서일지도 모르겠구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끝이 없었지. 참 재밌는 사람이었어.”

라키엘은 가만히 서서 파사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목소리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어차피 언제고 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뿐이라 더는 시간이 모자라서, 그래서 내가 일어서니 그제야 너희 어머니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단다. 아주 짧은 말이었지. 단 두 마디였어. 라키엘을 잘 부탁한다고. 아들처럼,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아 달라고. 나는 그 말에 웃었단다. 죽음과는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마치 곧 죽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진지하게 대꾸할 가치도 없게 느껴졌지. 거기에 그러겠노라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아서.”

“고모님.”

“사실은 라키엘, 언제고 할 수 있는 이야기 같은 건 아무것도 없어. 죽는 게 당연하거나, 당연하지 않은 때 같은 것도 없지. 네가 늘 내 죽음을 경계해 왔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게 언제든, 그게 바로 내 생이라는 거란다. 그것만은 늘 네 머리에 새겨 두렴.”

“……에누마 엘라시가 끝나면 일 레베의 여름별궁에 가 계세요.”

라키엘은 차분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파사칼리아의 손을 제 손에서 떼어 냈다.

“피서처럼, 최소한의, 신뢰할 만한 측근만 데리고, 이동에 상한 곳은 없는지, 그렇게 관행에 따른 절차적 진료처럼 의사에게 편히 보이세요. 조용한 곳에서 요양도 하시고, 당분간은 보기 싫은 얼굴도 멀리하시고요.”

파사칼리아는 조용히 라키엘을 바라보다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구나. 폐하께 여쭈어 보마.”

“그리고…….”

“라키엘, 안아 보자.”

라키엘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섰다. 파사칼리아가 개의치 않고 계속 웃으며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키엘이 낮게 한숨을 뱉으며 몸을 숙이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라키엘을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손이 너른 등을 막막하게 쓸었다.

“잘생긴 내 조카.”

“잘 알고 있습니다.”

늘 그랬듯 뻔뻔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파사칼리아가 라키엘의 어깨에 대고 작게 웃었다.

“네 키가 딱 이만 했을 때. 그때 이렇게 안아 줬어야 했는데.”

“…….”

“미안하다. 네 어머니가 내게 남긴 말은 단 두 마디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구나.”

라키엘은 허공을 노려보고 있던 눈을 내리깔고, 허탈한 숨을 뱉었다. 라키엘의 커다란 손이 파사칼리아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렇게 귓가로 계속 흘러들어 오는 말을 묵묵히 들으며 라키엘이 파사칼리아의 관자놀이에 입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울고 있는 얼굴이 마치 미하일이 죽었던 그날처럼 선연했다. 라키엘은 그것을 지켜보는 대신 제 손수건을 파사칼리아의 손에 쥐여 주고 뒤돌았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본 적도 없는 척 그렇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줘야 하는 최소한의 영역이 존재했다. 바로 지금처럼.

이제 파사칼리아를 돌보라는 듯 라키엘이 아그네스에게 눈짓했다. 아그네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파사칼리아에게로 걸어왔고, 라키엘은 문과 가까워졌다.

그때 라키엘의 앞에서 문이 열렸다. 라키엘이 제 앞에 선 루드비히를 보고 당황한 기색도 없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루드비히가 더 이상의 예는 필요 없다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마치 제 측근인 브나리오 백에게나 할 법한 편안한 태도였다. 라키엘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파사칼리아 쪽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마침 눈이 마주친 아그네스에게 눈으로 인사한 라키엘이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사칼리아를 한 번 더 보고, 이내 방을 나섰다.

파사칼리아는 조용히 문이 닫히자 몸을 일으켰다. 제 조카가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루드비히를 본 척 예를 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드비히는 그것이 그리 거슬리지도 않는 양 라키엘이 나가고 닫힌 문에서 시선을 다시 떼어 내 파사칼리아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선이 파사칼리아의 얼굴 위를 훑었다. 루드비히는 별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울었나?”

“여자들은 늙으면 괜히 눈물부터 짜내기도 한다지 않나요. 저도 늙기는 한 건지, 요사이 부쩍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여.”

“이를테면?”

루드비히가 낮게 되물으며 파사칼리아를 침대에 다시 부드럽게 앉혔다. 파사칼리아가 비식 입매를 끌어올리며 웃다가 이내 흐렸다.

“후회조차 되지 않는, 그저 잿더미처럼 남은 것들입니다.”

루드비히가 파사칼리아의 말에 표정 없이 픽 웃었다.

“그 안에 짐도 있나?”

“아마도, 그러실지도 모르겠군요.”

파사칼리아는 별달리 숨기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루드비히의 말을 인정했다.

“어쩌면 아직 제가 폐하를 태운 적조차 없을지도 모르겠고요.”

뻔히 저를 끌어당기려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루드비히는 파사칼리아의 말을 종종 곱씹곤 했다. 루드비히가 입안으로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파사칼리아가 느릿하게 눈매를 휘었다. 마치 이 방에 처음 들어서던 그때, 그 젊은 남녀처럼 주위가 홀린 듯 바뀌었다. 곧 낭떠러지가 나타날 줄도 모르고 그저 눈앞의 희미한 행복에 취해 걷고 있던 어리석은 나날들.

“당신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말할게요. 나는…….”

“…….”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당신은 날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우리는…….”

“…….”

“우리는, 정말 만나서는 안 됐어요. 그 시절의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말했듯.”

여태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구구절절한 원망이라고는 단 한 톨도 실리지 않은 담백한 어조였다. 파사칼리아가 루드비히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말을, 하나둘씩 어긋나기 시작했던 그때, 그 스무 해도 훨씬 전에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적어도 당신과 내가, 우리가 어릴 때 인정할 수 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아무런 소용도 없는 해묵은 미련이라 비웃으실지라도.”

“인정이라.”

루드비히가 낮게 되뇌었다.

“……그대는 인정이 되지 않았던가?”

“내가 해 온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을 스스로 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했어요.”

파사칼리아가 말갛게 웃었다. 루드비히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콘솔로 걸어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방이 어두웠다.

“오늘은 다양한 패를 보여 주는군.”

“당신이 내 패에 만족한다면 좋겠어요.”

“그리하여 짐이 그대의 조카에게 유리하게 계산하고, 그대의 딸에게 더 좋은 셈을 내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시시콜콜한 현실을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폐하가 내 아이들에게 그래 주시는 건 기뻐요.”

“파사.”

파사칼리아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어둠 속에서 설핏 웃었다.

“스무 살 무렵에, 이 방은 매일 어두웠어요. 파사, 당신이 여기서, 내 앞에서 그렇게 한 번만 더 불러 준다면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아주 가끔은 말이에요. 당신은 그때 목소리가 더 좋았어요. 지금보다 젊을 때는 조금 더 맑았잖아.”

루드비히가 잠자코 파사칼리아의 말을 들으며 불을 찾았다. 파사칼리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불러 줄래요?”

“……파사.”

“그때는 그렇게나 생각만으로 애가 닳아 없어지던 목소린데, 지금은 듣는 것만으로 끔찍해요. 우스운 일이죠.”

“…….”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이렇게나 끔찍한 건지도 몰라요, 루드비히.”

나직한 목소리가 루드비히의 이름을 스무 해 만에 불렀다. 루드비히는 이를 조금 악물었다. 그가 초에 불을 밝히고 몸을 돌렸다. 어둑한 방 안이 조금 환해졌다. 그는 파사칼리아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난 당신이 징그러워 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했어요.”

“파사.”

“당신이 아주 천천히 날 버리는 동안, 나는 아주 천천히 당신을 미워했죠. 그건 꽤 흉측한 꼴이었을 거예요.”

“…….”

“사실 나는, 당신이 나를 부르는 걸 견딜 수가 없어요.”

태연하게 이어지던 목소리의 끝이 조금 무너졌다. 파사칼리아가 기묘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예의 그 눈이 저를 응시하고 있다. 소싯적처럼 조금 애달프고, 서글프고, 믿을 수 없게도 서투르기까지 해 오히려 끔찍한. 그는 조금 충격을 받은 것도 같고,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침묵이 흘렀다.

저 미치광이가 제게 허락한 선이 어디까지고, 어디까지 확인하고 싶은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에 대한 제 증오조차 그가 아는 것이 싫었다. 그것은 제 바닥이었다. 그에게 버려지고 그를 버리면서 제가 스스로를 망가뜨린 바닥. 그러나 그가 제 바닥을 오롯이 알기를 원하는 것을 모른 척하며, 백치마냥 그 앞에 제 치부를 들춰내는 것은 단 한마디 때문이다.

“당신의 딸, 내 딸에게, 그 아이가 바라는 것만 안겨 준다면 나는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야말로 내 목숨이니까.”

“…….”

“비올레타는 미하일과는 다른 아이예요.”

읊조리듯 처연하게 말하던 파사칼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낮고 은근한 목소리가 우아한 높낮이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가, 당신이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이죠. 그 아이는 속이 상할 정도로 오롯이 당신만을 닮았어요, 루드비히.”

“…….”

“그렇지 않나요?”

“그래.”

파사칼리아는 루드비히의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고요한 정적이 울렸다. 파사칼리아가 느릿하게 그의 손목을 잡아 올려 커프스 버튼에 입을 맞추었다. 줄리에티의 작은 저택에서 밀회를 즐기던 오래전처럼, 그리고 그 후로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듯 자연스러웠다. 루드비히가 제가 잡힌 손이 아닌, 제 손을 잡은 파사칼리아의 손가락을 타고 내려가 소매에 가려진 손목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꼬박 25년 전의 그 자상自傷을 찾듯. 파사칼리아가 찬 눈으로 웃었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문득 말을 돌렸다.

“에누마 엘라시가 끝나면 오랜만에 일 레베의 여름별궁에 가 있을까 해요. 피서도 할 겸.”

“피서라.”

“나이가 드니 여름을 보내는 게 점점 더 힘이 들어요.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 그것도 괜찮겠군. 에델가르드 공에게도 이미 여러 번 들은 터. 궁내부에 별도로 예산을 책정하라 이르지.”

파사칼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잡으며 보답이라도 하듯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루드비히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파사칼리아는 그로부터 여드레 후 일 리베로 떠났다. 수도에서 그란토니아의 중북부에 위치한 일 리베까지는 약 반나절이 걸렸다. 황후가 그날 저녁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급사가 아흐레째 접어든 새벽, 황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흐레째 정오 무렵, 황후가 침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급보가 황제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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