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7장>
809년, 봄.
“드리안나!”
무대 속의 또 다른 무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규처럼 노랫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테너가 무대 끝에서 무너지듯 달려왔다.
무대 한쪽, 화장대 앞에 서 있던 여배우가 겨우 거울을 잡고 서 있다 이내 비틀거리며 아래로 쓰러졌다. 오래된 연인인 백작에게 버림받은 후 절망하던 여배우는 결국 새로운 공연에 오르기 전 독을 마셨다.
제 마지막 무대가 끝나면 지금처럼 곧장 죽어 버릴 수 있도록. 프리마돈나가 바닥을 짚고 엎드린 채 가느다란 목소리로 아리아를 시작했다.
여배우는 서서히 노래와 함께 죽어 갔으나, 비올레타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무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곁에 앉아 있던 라키엘 역시 별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이 공연은 신년이 되면 으레 첫 7일간 황립 극장에서 열리는 일곱 개의 오페라 중 두 번째 공연이었다. 이렌시아의 극장 미렐라를 배경으로, 드리안나라는 유명 여배우의 자살 사건을 다룬 오페라는 고전적인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 부류에 가까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라키엘의 경우에는 모든 유흥거리에 제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이었지만.
이윽고 여배우가 숨을 거두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연출가가 제 가여운 꽃이 졌노라고 독백하자 오케스트라의 비극적인 선율이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드디어 끝나는군.”
회중시계를 꺼내 흘낏 시간을 확인한 라키엘이 중얼거렸다. 비올레타가 무대를 멀거니 응시한 채로 말했다.
“무대 바뀌고 장례식도 있을 거예요. 아까 드리안나가 백작 붙잡고 자기가 죽으면 친구들이 관 위에 동백꽃을 꺾어 놓아 줬으면 좋겠다는 둥 장래희망 말하듯 다 말했잖아요.”
“배우고, 구구절절 듣고 있던 백작 없잖아.”
이렌시아 쪽은 보수적인 국교로 인해 직업 배우에게는 장례 의식이 허락되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턱을 괴고 있던 손 위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대며 라키엘에게로 눈을 돌렸다.
“저 남자한테도 말해 줬겠죠. 그리고 실제로는 못 해 줄 일이니 저렇게 해 줬을 테고. 사람이 이렇게 낭만을 몰라.”
“너도 딱히 잘 아는 표정은 아니었다. 보는 내내.”
라키엘의 지적에 비올레타가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
이윽고 비올레타의 말대로 죽은 여배우는 사라지고, 동백꽃으로 장식한 관이 사람들에게 실려 나왔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선율이 조용히 극장을 울렸다. 더 이상의 노래는 없었다. 비올레타가 문득 말했다.
“난 라일락이 좋아요.”
“난 다 싫은데.”
“알았어. 당신 관 뚜껑 위엔 아무것도 안 올릴게요.”
“마치 당연히 너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것처럼 말하는군.”
라키엘이 묘하게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비올레타가 모를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무는 골라 놓지. 네 취향이야말로 모를 일이니까.”
“그리고?”
“한 번 안아 주기만 해.”
“당신 시체를?”
“그건 내가 사양하고 싶고. 관.”
“이거 관 위에 꽃 대신 날 놓아 달란 소리죠?”
“그게 곧 네가 꽃 같다는 얘기는 아냐. 그런 비약은 말고.”
비올레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라키엘이 비올레타가 웃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라일락 좋아했었나? 말한 적 없잖아.”
“별로,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그런데?”
그녀는 웃고 있던 입매를 흐렸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핀스치의 정원이 잔상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봄이 되면 연한 자줏빛으로 곳곳이 물들던 딜로아 성의 작은 정원. 비올레타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비올레타의 싱거운 대꾸에 라키엘이 눈을 조금 가늘게 좁혔다. 비올레타가 설핏 웃었다.
“죽는다면 봄에 죽고 싶어요.”
“…….”
“봄 한가운데, 라일락이 피고 질 무렵에. 난 그때 날씨를 제일 좋아해요.”
라키엘은 비올레타를 말없이 바라보다 길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쌀쌀한 공기를 맞고 차가워진 손끝이 귓바퀴를 느릿하게 쓸며 떨어졌다. 끝이 가까워진 것을 알리듯 음악이 점점 느려졌다. 라키엘이 비올레타 쪽으로 몸을 숙여, 살짝 드러난 어깨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지금 네가 한 말, 평생 다 기억할 테니.”
“…….”
“그러니 다신 내 앞에서, 네 목소리로 그런 말 하지 마.”
그리 불안하게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라키엘은 당부했다. 그러나 마치 습관과도 같이 오래된 그 상실감은, 그리고 아주 희미한 불안은 오로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비올레타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이내 작게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날 볼 때마다 내가 못된 짓을 한 것처럼 느껴져요.”
“네가 그냥 못됐다는 생각은 안 해?”
“안 해 봤는데. 한 번도. 난 타고나길 착하게 태어났어요. 조금 이상해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당신 탓이에요.”
“내가 못돼 먹은 종자니 네가 못돼 먹은 계집이라 한들 피차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엄한 혈통 탓 말고. 스승님은 나 볼 때마다 당신이 선대 각하와 얼마나 격이 다른지 얘기하시는데. 당신이 못돼 먹은 건 오로지 당신 탓이에요.”
“몇 번을 말했지만 난 조부모를 빼닮았어. 이런 경우엔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돌연변이지.”
“돌아가신 아버지 두고 말하는 본새하곤…….”
“본인도 인정하실걸. 들으실 수 있다면 말이지.”
라키엘이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무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배우들의 합창이 끝나자 공연은 곧 막이 내렸다.
천장에서부터 무겁게 내려오는 커튼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황립 극장을 가득 메웠다. 비올레타가 박수를 치며 발코니 안에서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자 배우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 주인공의 이름을 외치기도 했으며 공작이 있던 발코니를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황녀를 찾기도 했다.
열렬한 커튼콜 속에 무거운 커튼이 다시 들리며, 프리마돈나가 드리안나의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라키엘이 무심하게 그것을 바라보다, 비올레타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입구로 인파가 몰리기 전에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극장을 수월하게 빠져나온 것과는 별개로, 극장 앞은 황녀의 행차가 있으면 늘 그랬듯 사람들로 붐볐다. 마차는 극장 바로 앞에 세워져 있어 멀리 걸어갈 것도 없었지만 얼마간은 웃으며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시민들에게 이렇게 얼굴을 비쳐 주는 것은 황족으로서 의례적인 행사였다. 에델가르드 공과 황녀의 대중적인 인기를 반증하듯, 극장을 둘러싼 시민들은 극장 안의 관객보다 더 열광적이었다.
얼마간 열렬한 호의에 환하게 미소 지으며 시민들을 바라보던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눈짓했다. 라키엘이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끌어당겨 마차로 걸었다.
문득 몰려든 사람 속에서 소란이 일었다. 마차까지 고작 몇 걸음을 남겨두고, 그들의 시선이 소란을 향해 돌아갔다.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의 뒤에서 거리를 두고 엄호하고 있던 기사들이 무심코 소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멀리 인파 속에서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와 거의 동시였다.
비올레타는 불현듯 거칠게 팔이 잡혀 던져지듯 뒤로 밀쳐졌다. 멀쩡히 서 있다 창졸간 차가운 돌바닥 위에 쓰러진 비올레타가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제가 서 있던 자리에는 라키엘이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시야가 멎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낮은 시야 속에서, 라키엘의 구두 너머로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몇 방울 느릿하게 떨어지던 것이 갑자기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괴한이 아무렇게나 뽑아낸 단도를 얼마간 쥐고 있지도 못하고 힘없이 놓았다. 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바닥 위로 부딪쳤다.
비올레타는 서둘러 저를 잡고 일으키려는 기사의 손길에도 몸을 채 일으키지도 못한 채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현실감 없이 들려왔다. 공작을 피습한 청년은 군중 속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이내 기사들에게 잡혔다.
칼에 찔린 복부를 제 손으로 태연히 틀어막고서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라키엘이 천천히 뒤돌았다. 짙게 젖어든 코트 위를 덮은 커다란 손이 눈에 박혔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피가 하얗게 질린 손등을 타고 몇 줄기로 나뉘어 길게 흘렀다. 라키엘은 마치 제가 그와는 상관없다는 양 멀쩡한 얼굴로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어라 말했으나 비올레타는 귀가 먹은 것처럼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라키엘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기사들이 그를 만류하며 비올레타를 겨우 일으켜 세우고 마차에 밀어 넣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라키엘이 웃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제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올레타는 집무실에 들어서고도 한참을 문가에 서 있었다. 엘데르디움은 훤히 열려 있었고, 라키엘은 엘데르디움의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침실이 낮처럼 밝았다. 그가 일부러 열어 둔 것이겠지만, 결코 그답지는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방어적인 공간을 열어 두고 잠에 든다는 것은.
비올레타는 엘데르디움을 여는 법을 알지 못했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제가 잠들어도 그녀가 제 침실로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게 고작 그 이유라는 것은 그의 부관조차 모를 것이다.
생살을 꿰맨 몸으로 혼자 방에 들어서서는, 침대까지 제 발로 걸어가 누웠을 남자. 비올레타는 차갑게 식은 손을 힘없이 들어 얼굴을 쓸었다. 그녀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라키엘의 얼굴은 그저 편히 잠든 사람처럼 평온했다. 비올레타는 문득 제가 그의 잠든 얼굴을 거의 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키엘은 그녀가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 깨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보다 늦게 잠들었고, 그녀보다 빨리 깨어났다.
피곤한 인간.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얼굴을 멀거니 내려다보며 속으로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부지런한 체질 탓에 잠버릇마저 인색한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꽤 오래돼 보이는 그 인간미 없는 습관이 본래 제 성정에서 기인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애초에 제대로 잠들지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오늘을 제한다면.
비올레타는 그를 가만히 보다 돌아서서 침대 끝에 앉았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의식도 없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비올레타는 낯선 눈으로 제 손끝을 바라보다,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부드러운 벨벳 사이로 손끝이 세게 파고들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나머지 덜덜 떨리는 손을 놓지도 못하고 비올레타는 흐느꼈다.
그가 저를 밀어내고 칼을 막은 것은 단순히 제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비올레타보다 그것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매끄러운 평온 아래 매분 매초 살을 에는 불안을 비올레타는 알고 있었다.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리만 곁에 남은 그 위태로움. 그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그 모든 게 매달려 있었다. 분명히, 그 모든 것이 매달린 팔이 저를 뒤로 밀었다. 비올레타는 입술을 짓씹었다. 마치 제가 칼에 찔린 것처럼 핏기가 사라진 입술이 창백하게 질렸다.
“……오늘이 내 생일이기라도 해? 두 번이나 울어 주게.”
“…….”
“고개 좀 돌려봐. 오랜만에 구경 좀 하게.”
라키엘의 태평한 말에 비올레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가 눈가를 손등으로 눌러 닦아냈다. 울음소리가 날까 봐 숨조차 멈추고 있는 비올레타를 가만히 바라보던 라키엘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비올레타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딱딱하게 말했다.
“괴한은 롬바르디안이었어요. 동료가 인파 속에 다섯이나 흩어져 있었고, 나를…….”
“알아.”
라키엘이 그 화제에는 그리 관심도 없는 듯 무심하게 대꾸해 그녀의 말을 자르고는 말을 이었다.
“울려면 나 보고 울어.”
“왜 그래야 하는데.”
비올레타가 조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냉랭하게 말했다. 라키엘이 베개 위로 고개를 비스듬히 누이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네가 우는 걸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
“예쁜 것도 같고. 물론 후자는 내 평생 유일한 착각이지.”
“변태 아니랄까 봐.”
“내 진의를 정확히 아는군. 네가 울면 더 나쁜 짓부터 하고 싶거든.”
“일어나자마자 헛소리부터 하네요. 아마도 약에 취했나 봐요.”
“지극히 멀쩡한 것 같은데.”
“……당신은 뭐가 이렇게 의기양양해요.”
비올레타가 잇새로 내뱉었다. 라키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죄라도 졌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요?”
“네가 배은망덕한 건 익히 잘 알고 있고, 공치사 따위야 필요도 없으며 기대도 아예 안 했지만 네가 굳이 그렇게 물어본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지. 결론은 너는 그럴 필요가 있다, 즉 이 경우에는 고마워하는 게 맞고.”
라키엘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비올레타가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억나요?”
“뭐가.”
“지난겨울에, 나 감기 걸렸을 때.”
비올레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간 얼굴 위로 불그스름한 불빛이 드리웠다. 불과 반나절 만에 파리해진 안색을 라키엘의 시선이 느릿하게 훑었다.
“칼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이군.”
“당신 몰골도 그래요. 그때 당신 내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는데. 기억나죠?”
“공평한 일이지. 내가 감기 걸렸을 땐 넌 집무실 문턱도 안 넘었어.”
“당신이 못 들어오게 했어요.”
“들어오려면 들어올 수 있었어.”
“당신은 내 방에 들어올 생각조차 안 했잖아.”
“합리적으로 생각해. 굳이 다 같이 아플 이유가 없어.”
“거봐요. 그깟 감기도 옮을까 봐 내가 곁에만 가도 질색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죽어도 내가 죽어야지.”
비올레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라키엘이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싸늘했다.
“당신 몸이 그렇게 소중하다면서.”
“…….”
“그런 주제에 왜 멍청한 짓을 해요.”
가느다랗게 날 선 음성이 이죽거리듯 물었다. 라키엘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죽어도 내가 죽어야지. 칼에 찔려도 내가 찔려야지.”
“그만해.”
“당신이야말로 합리적으로 굴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데!”
비명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라키엘이 몸을 일으켰다. 비올레타가 그에게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당신이,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죽으면 어떡하려고 했어요.”
“죽을 생각 없었다.”
“당신 궤변은 들을 생각도 없어. 생각만으로 사람이 살아요? 이 에델가르드에 남은 거라곤 당신 하나고, 당신 애 낳을 계집은 나 말고도 지천에 깔렸어요.”
“…….”
“내 효용은 당신이 제일 잘 알아요. 내가 죽으면 당신이 남고, 당신이 죽으면 에델가르드가 사라진다는 것. 내가 죽으면 당장의 계획이 거꾸러질지언정 기약할 다음이라는 게 남는데. 그런데,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어요. 왜 고작 가짜 같은 걸 위해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요.”
“…….”
“그래, 하긴 당신도 지금쯤은 후회하겠지.”
비올레타가 비꼬듯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실수했다고.”
“…….”
“안 그래요?”
“대체 얼마나 고맙기에 이래?”
비올레타가 한참을 비아냥거린 것이 무색하게도 라키엘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비올레타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라키엘이 더 빨랐다.
“그래. 후회해.”
라키엘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비올레타가 조금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후회라면 대로변에서 칼에 찔렸을 때부터 이 침대에 널브러지는 그 순간까지 했어. 실수? 그래. 실수지.”
“…….”
“넌 네가 얼마나 닳은 인간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네가 하는 모든 못돼 먹은 생각은 내가 먼저 해. 계산, 그래. 네 가치가 내게 비할 바가 되느냐고 물었지. 당연히 안 돼. 굳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게 합리적이지.”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지나치게 쌀쌀맞고 거만한 평가였다. 비올레타가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잘 알면서…….”
“다만 싫을 뿐이야.”
“…….”
“멍청한 발상이지. 그 발상에 따르면 순간적으로는 나보다 네가 더 중요했어. 이게 바로 내 평생 두 번째 착각이자, 마지막 착각이지.”
비올레타는 순식간에 뜨거워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고작 저딴 언행에 감동하고 만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라키엘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감격할 필요는 없는데.”
“착각하느라 바쁘시네요. 세 번째.”
“사실 자신 있었어.”
라키엘이 그녀의 얼굴을 가린 손목을 잡았다. 비올레타가 그의 손을 떼어 내려 움직이는 것을 라키엘이 그대로 잡아 끌어내렸다. 비올레타가 미간을 찡그렸다.
“네 몸뚱이는 못 믿어도, 내 몸은 믿으니까.”
“난 다 못 믿어요.”
“결과 봤잖아.”
“당신이 당신 몸으로 도박할 처지예요?”
“여기까지 확신했어. 예상했고.”
“애초에 당신의 그 예상부터가 말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감기 옮는 것조차 꺼린 건 며칠은 일하는 게 불편하고, 음식 삼키는 게 불편하고, 머리가 종종 아프기도 할 테고, 그 모든 사소한 게 뻔히 예상이 되기 때문이야. 다 알면서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그러니까…….”
“그런데 네가 그 칼에 찔린 후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어.”
“…….”
“그게 이유야.”
태연한 어조와는 달리 마치 비올레타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 것처럼 라키엘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비올레타는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도망치듯 눈을 내리깔았다. 라키엘이 제가 쥐고 있던 비올레타의 손목을 아프게 쥐었다. 비올레타가 오히려 고개를 더 내렸다. 라키엘이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 사랑하니까.”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에비가일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로 제 턱을 잡은 손에 고개가 들렸다. 눈물이 깨끗한 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라키엘이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래도 인정 안 하나?”
“…….”
“에비가일 딜로아.”
“……당신 칼 맞은 김에 얄궂게 증거로 이용하는 거 다 티 나요.”
“뭐가 나빠. 내 손에 카드가 하나 더 생겼고, 너는 마음이 약해졌는데.”
“당신 진짜 싫어요…….”
“울면서 그렇게 싫다고 말하니 좀 동하는데.”
“진짜 싫어…….”
“정말 좋다는 말로 알아듣지.”
에비가일이 울던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라키엘이 웃음기를 싹 지워내며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턱을 잡고 있던 손끝이 천천히 목으로 내려가 그녀의 뒷목을 감쌌다.
“인정해, 안 해?”
“나 지금 협박받는 기분이 들어요.”
“그거 착각 아니야.”
“인정 안 하면?”
“여기서 못 나가.”
“인정하면.”
“여기서 못 나가.”
“무슨 차이예요? 게다가 성한 몸도 아니면서.”
“내 몸이 성치 않은 거랑 네가 여기에 있는 게 무슨 상관이야.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데?”
라키엘이 결백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에비가일이 대꾸 없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라키엘의 엄지가 그녀의 턱 끝을 살살 쓸었다. 에비가일의 이런 표정이 항복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참고로 대답이 없는 건 그렇다, 쪽이야.”
라키엘이 오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발피움을 더 피우시는 것은 이제 위험합니다.”
황제의 시의 가르티에가 한숨처럼, 그러나 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창가에 서 있던 루드비히가 가르티에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전보다 확연히 마른 얼굴선이나 파리한 안색과는 다르게 황제의 외양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가르티에는 조심스레 황제의 시선을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약에 취해 있었다고는 믿기 힘든 선명한 암녹색 눈동자가 가르티에를 응시했다.
그것은 황제의 단정한 모습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혼탁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 선명한 시선은 오히려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정신병자에게 잠시 찾아든 온화함처럼. 가르티에는 감히 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내렸다. 루드비히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듯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가르티에가 얕게 고인 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발피움처럼 지나치게 위험한 물건을,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과 같이 건재하신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가장 이대로는 착란 증세가 점차, 심각한 형태로…….”
“가르티에.”
“예, 폐하.”
“말해 봐라.”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점점 더 미쳐 가는 것이 발피움 때문인가. 아니면.”
“…….”
“그대가 계속 의심해 온 광증狂症인가.”
루드비히가 느릿하게 말했다. 가르티에가 그 기묘한 억양에 턱을 조금 떨다 이내 꽉 깨물었다. 루드비히의 말은 시의가 가을 이후로 줄곧 저를 의심하고 관찰해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일견, 폐하의 조부이신 레오폴드제帝께서 서거 전 보이셨던 광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레오폴드제라. 영광스러운 정신병이군.”
루드비히가 표정 없이 픽 웃었다.
“역사상 황실에 유전과도 같이 그와 유사한 광증이 빈번하게 나타났던 터라 사사받던 시절에는 늘 주의를 받았습니다. 괜한 노파심에 주제도 지키지 못했나이다.”
“그대의 본분이 노파심이나 불안인 것을 모르겠는가. 그대의 진단에는 가까워졌나? 얼마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근거를 말해 보라. 그대의 손이 하나둘 꼽았을 증상 같은 것. 혹은 내게 광증을 확진했다는 가정하에, 내가 어떻게 변할 것이라고 말해 보는 것도 좋겠군.”
“…….”
“내가 어찌 되는가.”
가르티에가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심각한 수준의 환상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르티에의 말이 잠시 멎었다가 이내 이어졌다.
“자주 불안하고, 망상이나 우울감이 흔히 찾아오게 됩니다. 말은 점점 불편해지고, 헛소리를 하거나 이유 없이 말을 반복하다가 때로는 말이 없어지게 되고,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살의를 이유 없이 빈번하게 느끼실 겁니다. 병은 느리게 나타날 겁니다.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병이 진행될수록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으실 겁니다.
사지가 떨리고, 근육이 경직되며, 기억을, 말을 조금씩 잊습니다.”
“…….”
“그렇게, 종래엔 아무것도 혼자 하실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의식을 잃고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때로부터 계절이 하나 채 다 지나기 전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대의 말을 절반으로 자르면, 그것이 모두 내 증상과 같다.”
“폐하.”
가르티에의 말을 줄곧 담담하게 듣고 있던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그대는 지금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황제의 아들로 죽겠느냐, 창녀의 아들로 살겠느냐. 낡고 헤진 기억 속에서 제 부황의 비릿하고 서늘한 음성이 울렸다.
루드비히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평생 딛고 선 곳 없이 늪 속을 허우적대던 발밑이 비로소 단단하게 굳었다. 그 굳은 땅이 곧 깨어질 얼음판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는 창녀의 아들로 살았으나, 황제의 아들로 죽을 것이었다.
봄의 한가운데, 따스해진 날씨에 몸이 닿을 만한 곳마다 둘러져 있던 벨벳들부터 사라지는 것이 황궁이겠으나 정작 황제의 침실은 아직도 겨울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보이지도 않는 아편 냄새가 흐릿하게 방 안을 떠도는 것 같았다. 설핏 찡그려진 눈가가 이내 무표정하게 변했다.
비올레타는 한숨도 쉬지 않고 마른 시선으로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등받이 없는 기다란 소파 위에 본디 정갈하게 놓여 있었을 남색 다마스크 비단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바닥에 끌려 있다.
비올레타는 제가 밟은 비단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의식도 없는 황제의 얼굴은 눈을 뜨고 있는 것보다 더 강퍅하게 보였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녀를 침실로 안내했던 아드리아나는 어느새 나가고 없었다.
비올레타가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때 무언가 그녀를 잡아챘다. 비올레타는 제 손목을 잡아챈 루드비히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쥐어 터트릴 듯 거센 악력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시체에게 잡힌 것처럼 느껴져 비올레타는 반걸음 당겨진 채로 가만히 굳어 섰다.
“파사칼리아.”
몇 해 전, 그 거대한 접견실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때처럼 낮은 목소리가 파사칼리아를 불렀다. 비올레타가 멎어 있던 숨을 삼켰다. 어렴풋이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선이 멀었다.
아득한 침묵이 흘렀다. 그늘에 빛이 들 듯 흐린 눈동자 위로 이채가 서렸다. 비올레타는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지듯 그의 손이 제 손목에서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소파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폐하.”
“…….”
“폐하.”
비올레타가 거듭 부르는 소리에도 루드비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눈꺼풀만이 느릿하게 닫혔다 열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짜낸 한마디 아래로 서늘한 한기가 목구멍을 차고 올랐다. 루드비히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알을 세공한 것처럼 예기 어린 암녹색 눈동자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죽었는가?”
“네?”
“나는, 죽었는가?”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목 뒤가 선득했다. 루드비히의 말은 느릿했으나 분명했다. 비올레타는 조금 망연히 그를 바라보다 여상하게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분명, 그가 나를 죽였다. 그가 나를 죽이러 왔지.”
“…….”
“저기에 서서.”
공허하게 내뱉는 소리는 공포 한 점 없이 덤덤한 소리였다. 비올레타는 제가 금방 대꾸한 것과 같은 평온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누구였습니까.”
“그가 지금도 있다. 그가 날 데려갈 것이다.”
“아무도 없습니다.”
“클라우스.”
루드비히가 천천히 이름을 발음했다. 비올레타의 표정이 파삭파삭 굳었다.
루드비히의 가늘어진 눈매가 천장을 응시했다.
“클라우스 드 에델가르드…….”
마치 높낮이 없는 노래처럼 죽은 선대 에델가르드 공작의 이름이 유려하게 허공을 울렸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비올레타가 낮게 대꾸했다. 제 외숙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그럴 리 없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어차피 환상이 만들어 낸 망령이었다. 루드비히는 비식 웃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 내 손에 죽기에는, 지나치게.”
“…….”
“파사칼리아의 아들이 그러했듯이.”
“폐하.”
“어찌하여 그의 망령조차 나를 죽여 주지 않는가. 내 목을 끝까지 조르지도 못하고, 내 목에 칼을 찔러 넣지도 못해.”
“…….”
“죽어서까지 그리 어리석어야 하나. 왜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가.”
비올레타가 침음을 삼키며 소파 모서리에 이마를 기댔다.
루드비히가 저를 닮은 적갈색 머리칼이 소파 위로 흐트러진 것을 손끝으로 살짝 쓸었다. 그녀의 뒤로 클라우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 안을 떠다니던 망령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에게, 그 아이가 바라는 것만 안겨 주시면 저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야말로 내 목숨이니까.
흐릿하게 짓뭉개진 기억 속 여자가 속삭였다. 제 목숨을 두고 갔노라고.
“모두 잊는다면, 나도 잊을까.”
루드비히가 클라우스를 응시하며 물었다. 망령은 대답이 없었다. 루드비히가 웃었다.
“나를 잊을 수 있다면……. 그래야지.”
루드비히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영영 잊기만 한다면. 네가 죽어서라도 편안해지려면.
“비올레타.”
이 방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그녀를 선명하게 부르는 음성에 비올레타가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파사칼리아가 죽은 계절이 돌아오는구나.”
“어느덧 여름이 가까워졌으니…….”
“시간이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손안에서 이미 많은 것이 떠나갔구나.”
“폐하…….”
“그중 태반을, 네 손이 쥐고 있길 바란다.”
“…….”
“나의 딸아.”
자두나무 몇 그루 위로 어느덧 흰색의 작은 꽃봉오리들이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다. 비올레타는 아직 쌀쌀한 기운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정원이 거대한 규모와 완벽한 조경으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황제궁 뒤편에 위치한 후원은 채 열 그루도 되지 않는 나무들과 그리 크지 않은 연못이 전부였다. 마치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처럼 후원의 식물들은 제각기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석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원이라는 작은 증거였다. 계절 내내 번갈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후원은 그리 화려하거나 아름답지 않았지만 후원에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은 없었다.
비올레타는 이제 갓 꽃이 피기 시작한 나무 아래에 서서 연못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수면 아래로 커다란 헬리네트리아 잉어들이 묵직하게 움직였다. 연못 바닥에 깔린 먹색 자갈 위로 잉어들의 느릿한 그림자가 선명하게 비쳤다. 비올레타는 연못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손목에 매고 있던 주머니를 열어 잉어 밥을 연못 위로 뿌렸다.
평온한 수면이 돌연 일그러졌다. 물 아래에서 유유히 움직이던 검은 잉어들이 수면 위로 아가리를 내밀었다. 연못 바닥에 깔린 자갈이며 모래가 잉어들을 따라 일며 연못이 뿌옇게 변했다. 비올레타가 잉어 밥을 조금 더 던지자 작게 첨벙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잉어들은 몇 개로 떼를 지어 서로를 물밑으로 밀어내며 밥을 먹었다. 그 모습이 꽤 험악했다. 유유히 헤엄치던 모양새는 온데간데없었다.
비올레타는 제 손바닥만 한 주머니에 가득 차 있던 잉어 밥이 반쯤 줄어들 때까지 밥을 주다,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밥이 얼마간 떨어지지 않자 떼를 지어 모여 있던 잉어들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붙어 흩어졌다. 아마 제가 밥을 먹고 있었던 것도 잊어버렸으리라. 비올레타는 다시 고요해진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뒤돌았다.
“언제부터지?”
비올레타가 주머니를 닫아 버렸을 즈음 와 있던 빌키어스가 그렇게 물었다. 비올레타는 그리 놀란 기색도 없이 주머니 끈을 제 손목에 달았다.
“지난가을부터. 몇 마리가 죽었을 때요.”
“그래. 그즈음부터 폐하께서 돌보지 않으셨지.”
“정확히는 몰레느 경이 죽어 버린 탓이 크죠.”
비올레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황제의 잉어들에게 친히 밥을 주던 후원 관리자 몰레느 남작은 지난가을 제가 30년을 돌봐온 후원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기에는 너무나 변변찮은 이유였으나 그즈음에는 그의 죽음이 어째서인지 궁금해 하는 이도 없었다. 그렇게 죽어 나간 이들이 그때도 이미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비올레타가 돌아서기 전 바라보고 있던 곳을 말간 벽안으로 바라보고 있던 빌키어스가 비올레타의 말에 픽 웃었다. 웃음보다는 나직한 한숨에 가까운 소리였다.
“좋은 사람이었지.”
“지난여름 이후 죽어 나간 이들 중에서는 제법 장수한 편이니, 그도 죽으며 제 영예를 알았겠죠. 폐하께서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시종이었으니까.”
“그것을 영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됐구나.”
“아닌가요?”
“영예라는 데 동의한다. 다만 네가, 내가 동의할만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동의하신 것치고는 어쩐지 실망한 눈치시군요.”
“난 네게 실망할 자격이 없는데.”
“하지만 기대를 꽤 쉽게 하시는 편이셨죠.”
“그래. 그것도 퍽 이기적인 발상으로.”
빌키어스가 비올레타의 조용한 비난 같은 말에 평온한 목소리로 그것을 긍정했다. 비올레타가 빌키어스 가까이로 걸어가며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부황은 뵙고 오셨나요?”
마치 평범한 부자 사이를 묻듯 비올레타의 물음은 살가웠다. 빌키어스가 입매만 끌어 올려 웃었다.
“그래.”
“어떻던가요?”
“폐하? 아니면 나.”
“당신.”
비올레타가 그의 앞에 서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 감상이 궁금하네요.”
빌키어스가 미려한 눈매를 휘며 낮게 말했다.
“네 목소리야 귀하니 감사히 듣고 있다만 오라버니 쪽이 좀 더 듣기 좋았는데.”
“여태까지 그래 왔듯, 말 잘 듣는 아드님답게 계속 잠자코 기다릴 생각인가요?”
“네 관심은 기쁘나 부디 선을 넘지는 마라.”
“이번에야말로 그 아비 같지도 않던 사람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지는 않던가요? 그는 완전히 미쳐 있잖아요.”
비올레타의 목소리가 빌키어스의 귓가로 은근하게 스며들었다. 빌키어스는 비올레타의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그늘을 묘한 눈으로 응시했다.
“비올레타, 부황께선 너를 아끼신다. 이런 곳에선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오라버니는 아니었죠.”
“그래, 그랬지.”
빌키어스는 조금 쓰게 웃었다.
“네 말처럼 그토록 쉽게 정의될 만한 동기였는데,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
빌키어스가 모호한 형태로 그녀의 위험한 말을 긍정했다. 비올레타가 말갛게 웃었다.
“동기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걸요. 내가 오라버니를 이토록 미워하는 것처럼. 거슬러 올라가면 그보다 단순하고 명료할 수가 없죠.”
“네 미움은 그럴 만한 것이니까. 내 음습한 욕심 같은 것과는 달리.”
제 속이 음습하다는 말과는 달리 빌키어스의 얼굴은 지나치게 말끔해 괴리감마저 느껴졌다. 비올레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빌키어스가 가볍게 마주 웃었다.
“미하일도 그렇게 있었지.”
“…….”
“방금 전 네가 서 있던 그 자리.”
“당신의 그 추억 같은 것은…….”
“내 추억이 아니라, 네 오라비의 이야기지. 여덟, 아홉 살이던 네 오라비는 네가 그리 쉽게 걸어 들어온 그 자리에서…….”
“…….”
“고작 물고기에게 밥을 주려고 울타리 밑을 기어 들어오곤 했어.”
비올레타는 조용히 빌키어스를 응시했다. 빌키어스는 웃을 듯 말 듯 묘하게 찡그린 눈으로 연못을 바라보았다.
“미하일과 어렸을 적에는 이곳에서 자주 놀았지. 미하일이 이 후원을 좋아했거든. 늘 같이 가자고 졸랐어. 여긴 항상 몰래 숨어들어야 했으니까, 혼자는 무서웠겠지. 폐하께선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걸 싫어하셨거든.”
“…….”
“원래 애들이란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말리고 들면 더 하고 싶어 하니까. 어쩌면 미하일은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는지도 몰라. 보다시피 그 외엔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곳이지. 폐하의 후원 출입은 황태자에게 유일하게 금지된 것이었거든. 조금 우스운 것은 언제고 시종들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면서도 그 아이가 부황을 마주치고 싶어 했다는 거야.”
빌키어스는 제 이야기가 제게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래. 나도 그랬겠지. 고작 시종들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혹시 부황을 뵐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폐하를 뵌 적 있나요?”
“딱 한 번. 미하일이 그때 거의 울 뻔했는데, 네가 그 얼굴을 봤어야 했어. 저쪽에서 폐하가 걸어오셨지.”
“많이 혼났겠네요.”
“아니.”
빌키어스가 비올레타가 서 있던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고요한 수면 아래로 잉어들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우리는 여기서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어.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로.”
“…….”
“그 후로도 우린 계속 이곳에 왔어. 한 번은 미하일이 잉어들에게 사탕을 주고 싶다고 작은 사탕을 잔뜩 가져와 연못에 뿌린 적도 있지. 그다음 날 왔더니 절반이 죽어서 떠 있어서 미하일이 하루 종일 울었어.”
비올레타가 픽 웃었다. 빌키어스가 연못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비올레타를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아무도 우리를 혼내지 않았는데. 나는 울고 있는 미하일 곁에서 덩그러니 앉아 죽은 잉어의 수나 셌지.”
“…….”
“나는, 그런 네 오라비의 흉내를 내며 살아왔어.”
기묘하게 바뀐 목소리가 귀를 긁었다. 빌키어스는 낮게 웃었다. 그럼에도 깨끗한 얼굴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타고나길 그다지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진 못했어. 고작 물고기들이 죽었다고 울고 있던 미하일이 옳다고는 생각 안 해. 그저 미하일이 좋으니, 그 모습이 좋아 보였지.”
“…….”
“나는 미하일을 위해 울 수는 있지만, 미하일을 위해 죽을 수는 없는 인간이야. 흉내의 한계지. 결국 미하일은 나를 이겼어.”
“…….”
“죽음으로써.”
빌키어스는 천천히 웃었다.
“난 그 아이에게 있어 두 번째로 금지된 거였고, 어리석게도 그 아이는 날 좋아했거든.”
빌키어스의 단정한 입매 위로 처음으로 비뚜름한 웃음이 어렸다. 일견 죽은 미하일을 비웃는 듯한 말은 그 스스로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비올레타는 빌키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금 기막힌 듯 툭 내뱉었다.
“당신, 정말로 오라버니를 좋아했네요.”
옅은 경멸이 우아하게 맞춰진 음성 위로 넘실거렸다.
“사실은 흉내 같은 것도 낸 적 없죠. 당신은 원래 그랬을 테니까.”
“…….”
“인정하기 어렵지만 인정할 수 있어요. 당신은 본래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 사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중요하지 않다, 라.”
“당신이 내 오라버니를 거꾸러뜨리기로 결심했을 때, 당신의 그 마음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빌키어스의 가까이에서 속삭이던 비올레타가 서서히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를 마주한 것처럼 해사했다.
빌키어스는 그 환한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난 당신이 더 싫어졌다는 거예요.”
비올레타의 싸늘한 말에 빌키어스가 웃었다. 비올레타는 그를 더 바라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로 빛 한 점 돌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가 카펫 위 문양을 훑었다. 먼바다를 건너온 이국의 물건들은 지나치게 오래되어 그리 이질적이지도 않았다. 라키엘은 더 걸어가지 않고 서 있었다.
루드비히는 요즘 들어 보기 드물게 멀쩡한 행색이었다. 이발사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으로, 그는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라키엘은 그 옆모습을 그리 눈여겨보지도 않고 시선만 그에게 두었다. 몇 시간 전 공작을 친히 불렀다는 루드비히는 정작 라키엘이 제 바로 앞에 온 것을 한참 동안 몰랐다. 소름 끼치게 명료한 시선이 라키엘 주위를 배회했다. 마치 그 주위에 누군가 있고, 라키엘이 보이지 않는 망령인 것처럼. 라키엘은 그를 굳이 부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에델가르드 공.
루드비히는 입안으로 소리 없이 발음했다. 라키엘을 부르는 소리는 아니었다. 죽은 공작들의 초상화가 기묘하게 거꾸러진 채로 어스름한 불빛들 사이를 떠돌았다. 그 초상화들은 가끔 액자를 비집고 나와 움직이기도 했고, 시신을 박제해 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젊어서 죽은 그의 이복형제들은 창가에도 앉아 있고, 죽었을 때처럼 바닥에 널려 있기도 했다. 죄는 많았고, 그의 방은 너무 좁았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한참이나 죽은 이들 사이를 떠돌았다. 저 스스로도 그 사이를 죽어 떠다니는 망령인 것처럼.
라키엘이 천천히 그를 불렀다.
“폐하.”
그 나이 특유의 깨끗한 음성 아래로 낡은 종잇장이 바스러지듯 스산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그것은 자살한 외조부의 애달프고 노쇠한 것이었다가 어느 날은 레이노어의 분노이기도 했으며, 실상 많은 날이 부황의 경멸이기도 했다. 루드비히는 어느덧 무겁게 내리깔린 눈꺼풀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손질이 잘된 검은 구두코 앞으로 에르가넷의 잘린 머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제 어미의 반쪽짜리 주검을 무심하게 지나쳐 아래서부터 위로 느릿하게 거슬러 올라갔다.
“오늘은 꽤 상태가 좋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루드비히는 퍽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라키엘이 비스듬히 입매만 끌어 올려 웃었다.
“말끔해 보이십니다.”
“새 이발사 솜씨가 제법 괜찮았지.”
“시종장이 고른 사람이니.”
“그래.”
루드비히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그나마 정신이 온전해. 일전에는 꼴이 말이 아니었겠지.”
“지금, 그리고 늘 그랬던 것과 같이 단정하셨습니다.”
“짐이 제정신이긴 하던가?”
“황망한 하문이십니다.”
“공치사로 부정하지 않아 좋군. 공은 언제나 거짓말을 적당한 선까지 하곤 했지.”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까.”
라키엘이 무심한 얼굴로 여상하게 반문했다. 루드비히가 라키엘의 가까이로 천천히 걸어왔다.
“짐이 평생 들어온 말의 8할이 거짓말이고, 그중엔 물론 공이 한 말도 있지.”
“저로서는 생계가 달려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부디 그것을 불충이라 생각하지 않아 주시면 좋겠는데.”
“허나 개중 공은 정직한 편이야. 이렇게 가까이 서 있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이 눈을 보면…….”
루드비히의 시선이 라키엘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잔잔한 평온 밑바닥에 깔린 증오를 긁어 내듯. 루드비히가 비식 웃었다.
“이렇게 정직한 건 부친을 닮았군.”
“송구한 말씀이나 그리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닙니다.”
라키엘의 대꾸가 퍽 우스운 듯 루드비히가 낮게 소리 내 웃었다. 라키엘이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문득 말했다.
“후작 휘하의 사병들이 후작령 중앙으로 밀집 중입니다.”
“언제부터지?”
루드비히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렇게 물었다. 라키엘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것은 약 열흘 전입니다. 맹수들이 많은 산간지역을 개척한다는 명목으로 용병의 수가 급격히 과도한 형태로 증가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명백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대비라. 무엇을?”
“반역자는 본디 최초의 제 시도보다 그 뒤 돌아올 반격을 두려워하곤 한다더군요.”
반역이란 지나치게 직접적인 단어와는 달리, 평온한 목소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결론까지 그리 긴 말도 필요 없다는 듯 단조로운 말이었다. 그다지 은밀한 발고처럼 들리지도 않는. 루드비히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재고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것이로군.”
그들이 재고 있는 시간도. 라키엘은 루드비히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루드비히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기묘하게도 강퍅했다. 그는 초조해 하고 있었다.
“공은 짐의 상태를 알고 있지.”
“…….”
“짐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폐하께서 잠시 미편하신 것은 오로지 약의 오랜 복용 탓으로…….”
“공이 알다시피 발피움도, 아편도, 이 방에서 사라진 지는 수십 일이 지났고, 광기는 이제 온전히 짐의 것이지. 약을 끊은 것은 오로지 유언장의 효력 때문이나 기실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짐이 세상에 남겨두는 답은 오로지 그대의 사촌뿐일 테니.”
루드비히는 마른 웃음을 뱉었다.
“짐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어쩌면 그들보다 더.”
“폐하.”
“짐이 이를 공에게 알려 두는 것은……. 그래.”
“…….”
“어쩌면, 그대의 조부가, 짐을 살렸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황제를 살린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제 조부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라키엘은 그때 아주 어렸고, 고모의 인생 같은 것은 알지 못했으며 제 자랑스러운 조부가 실각한 것에 그저 실망할 나이였다. 라키엘을 볼 때면 으레 장난스럽게 휘어지던 눈매가 서늘했다. 레이노어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렇게 말이 없다가 말했다.
후회하지 않노라고.
라키엘은 태연한 얼굴로 역하게 끓어오르는 숨을 목구멍 아래로 억눌렀다. 제 딸이 사랑하는 사내니까. 제 딸과 평생 살아갈 사내니까. 죽지 않기를, 누군가 그를 죽이지 않기를 바라서.
그래서 살렸다. 그러기 위해 많은 죄를 지었고, 대신 네 고모가 살았지. 나는 그런 이기적인 방법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라키엘이 가만히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정말로, 네 딸이라고.
희열은 없었다. 경멸도 없었다. 네 딸이 이미 죽고 없다는 조롱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혐오감이 치밀었다. 루드비히는 그를, 제가 평생 경계하고 죽이고 짓밟아 온 에델가르드의 주인을, 그래서 뱃속에 품은 것이 칼밖에 없는 사내를 제 딸과 살아갈 사내라고 생각했다. 루드비히가 처음으로 그것을 인정했듯, 라키엘은 그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미하일은 아직도 매일 밤 제 머릿속에서 죽었다. 미하일이 그렇게 그리던 그 누이동생 역시 별반 다를 것 없는 꼬락서니로 죽었다. 그들은 모두 가치도 없이 죽었다. 평생 그 씨 받아 태어난 것이라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놓고, 정작 그에게 진짜인 것이 제가 만든 가짜뿐이라니.
파사칼리아에게 이것을, 보여 줬다니.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혐오스러운 것은 루드비히였다가도 곧장 자신이었다. 그러니 비웃을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도 남은 진짜는 그녀뿐이었다.
“부디 오래 살라. 그 아이 곁에서.”
“…….”
“공의 아비는 너무 정직해서 제 생을 다 깎아 먹었거든.”
그들 사이에 흐르는 모든 오래된 증오를 알면서도 루드비히는 클라우스를 말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황제는 어쩌면 그 모든 의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라키엘이 저를 당장 죽인대도 상관없다고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라키엘도 그가 저 스스로 때가 다 되어 죽어도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라키엘은 여전히 평온한 눈으로 마차의 잔해가 박혀 있던 시신들을 떠올렸다. 목 아래로 비스듬히 커다란 잔해가 박혀 있던 제 아비와, 박제된 나비처럼 등이 관통된 제 사촌. 클라우스가 하나뿐인 제 가족이었다거나, 미하일이 주군이나 제 미래 그 자체였다는 구구절절한 감상을 떠올리지 않아도 그 광경은 라키엘에게 언제나 그것만으로 선명했다.
잔해에 할퀴어 온몸이 너덜너덜한 그 시신들이나, 반파된 마차나, 혹은 절반은 알아볼 수 없었던 미하일의 단정한 얼굴.
그리고 선연한 자상. 진짜로 그들을 죽였을 흔적들. 그 보란 듯이 내보인 증거.
그것을 보고도 세상에 숨긴 것은 자신이었다. 살인자들이 바라던 대로 그 모든 것을 터트리고 미쳐 죽는 대신, 마치 제 반대편에 선 공모자가 된 것처럼 제 아비와 황태자의 죽음을 은폐하고 정리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의 죽음이 그리 완벽한 카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정말로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라키엘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제 아비의 죽음을 재어 본 순간 미쳤거나, 혹은 제 아비가 죽었을 때 미쳤을 것이다.
그래. 미쳐 있기 때문에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저 황제의 앞에.
라키엘은 선득하게 날이 선 시선을 공손하게 내렸다. 질척한 살의가 검은 눈 위를 일렁거렸다.
사실 제 아비나 미하일이 죽은 것은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제가 이미 미쳐 있고, 또한…….
제 앞에 선 미치광이가 그랬듯, 저 역시도 살인자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각하.”
카디링거 후는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의 인사에도 한동안 가만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눈가에 가늘게 잡힌 주름이 조금 깊어졌다. 메마른 시선이 문을 거슬러 끝까지 올라갔다. 문은 거대했다. 서른 해 전, 처음으로 이 문 앞에 서 있었던 스무 살배기 공자에게 그랬듯. 그 어린 갈망으로부터 얄궂은 동경과 탐욕, 증오에 이르기까지 제 모든 생이 배인 문이었다.
스무 살배기 앞에 이 문이 열렸을 때, 그 거대한 홀에 서 있던 선황제는 그에게 있어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은…….
후작은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두꺼운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수백 번을 드나든 문을 지나며 후작이 걸었다. 멀리 황제가 서 있었다. 대리석 위로 부딪치는 구두 소리가 아득하게 높은 허공을 울렸다. 이윽고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러자 바깥의 조용한 소리마저 끊어졌다. 그는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지도 위에 섰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백색의 대리석 위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숨 막히게 밝은 빛은 지나치게 밝은 나머지 공허했다. 체스 테이블 뒤에 서서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루드비히가 후작이 선 곳을 응시했다. 생기 없이 서늘한 암녹색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돌았다.
괴물의 눈이었다. 레이노어 드 에델가르드가, 그리고 제 아비가 키워 낸 괴물.
“폐하.”
후작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루드비히는 멀거니 서서 그 인사를 받고도 조금 더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간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루드비히가 체스테이블을 돌아 몇 걸음 걸어왔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 거리는 존재했다. 후작은 무표정하게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곧,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짐도, 그대도 알지.”
후작은 굳이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그것이 비단 세간에서 수군대는 황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어떤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끝이 누구 하나에게 특별히 기울어진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제가 급히 내몰려 있는 것만큼이나 루드비히 역시 초조한 것을 알아챘다.
“우리는 참 오랜 시간을 봐 왔지. 짐이 그대를 알 듯, 그대도 짐을 알아.”
“감히 폐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짐을 알기 때문에 그대가 그리 급히 대비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병들의 움직임을 겨냥한 말이었다. 달리 숨겨 온 행보도 아니었기에 후작은 그저 나직하게 웃고 대꾸했다.
“그것은 단지 제가 겁이 많은 탓입니다.”
“그대가?”
“제가 폐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는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죽은 그대 아비가 웃겠군. 그러고 보면 그대 아비는 참 인내심이 많은 자였다. 짐이나, 그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참을성이 그리 없어. 그렇지 않은가?”
“영광된 분류군요.”
“궁금하지 않나.”
루드비히가 몇 걸음 더 걸어왔다.
“누구의 인내심이 더 짧은지.”
후작이 입매를 미묘하게 끌어 올렸다.
“제가 아니겠습니까.”
“글쎄, 짐은 도통 모르겠더군. 누가 먼저였는지.”
루드비히가 후작을 따라 하듯 입매를 미묘하게 끌어 올렸다. 일견 멀쩡해 보이던 얼굴 위로 희미한 광기가 덧씌워졌다. 후작이 싸늘한 눈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짐이 그대에게 남겨 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지. 그대가 짐에게 짧은 시간을 매겨 두었듯.”
“감히 그럴 수 있겠나이까.”
“짐은 그대 탓이라 할 수 있고, 그대는 짐의 탓이라 할 수 있겠지. 어쩌면 그대가 짐에게 남겨 준 그 짧은 시간 탓에 짐은 그대의 시간을 쥐어짜고, 그대는 그 우그러든 시간에 초조해 짐의 시간을 갉아 내려 하는 것일지도. 무엇이 먼저인지는 이제 알 수도 없어.”
“…….”
“그러나 짐이 단 하나 내려 줄 수 있는 답이 있다면, 그대보다는 짐의 인내심이 훨씬 짧다는 것이다.”
후작은 여전히 말이 없는 채로 서 있었다. 루드비히가 웃고 있던 입매를 끌어내렸다.
“그대의 그 사병들은 절대로 수도에 들어오지 않을 테지. 그대의 그 결벽증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그대가 평생 떠받들고 산 조카에게 세상에 다 알려질 반역은 있을 수가 없고.”
“평생 충성했습니다. 부디 모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참으로 끔찍하게 정갈하고 느긋한 대비야. 낭떠러지 끝에 선 걸 알면서도 그리 생각하지. 서두르면 발이 미끄러질 것을 아니까. 사실 그대는 선대 후를 참 많이 닮았어.”
“…….”
“그래서 짐이 초조해. 그대 발이 도통 미끄러질 생각을 안 하니까.”
루드비히가 기묘하게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이 냉랭하게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하나 묻지.”
“하문하십시오.”
“내가 죽어 가고 있는가?”
“폐하.”
후작은 그리 당황하지도 않은 얼굴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루드비히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달리 묻지. 나를 죽이고 있는가.”
“감히 아룁니다. 폐하께선 저를 모욕하고 계십니다.”
그가 추밀원의 일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루드비히가 여상한 얼굴로 웃었다.
“아주 오래전 일 같은데…….”
“…….”
“이 방에서 말이네. 그대가 이렇게 서 있고, 그대의 아비는 좀 더 앞에 서 있고.”
후작이 입안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숨소리가 서늘해졌다.
“결국, 그것입니까?”
“기억하는가?”
“…….”
“그대들에게 내 아들을 죽이도록 허락했던 날 말이네.”
“기억합니다.”
후작이 평온한 얼굴로 담담하게 인정했다. 짙푸른 눈에 차마 억누르지 못한 살의가 떠올랐다. 루드비히가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문득 말했다.
“황태자 시해에 준하는 대가를 이제 치러야 되지 않겠는가.”
“시해라…….”
“짐은 그리 조심스러운 그대를, 차마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
루드비히의 온화한 목소리에 후작이 낮게 실소했다. 루드비히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은 날의 그대를 반역자로 데려오기로 했지.”
어쩌면 처음부터 루드비히는 협약이 아니라 약점을 틀어쥔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와 배신당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분명 일방적인 약점은 아니었다. 황제의 손에 카디링거의 약점이 들어 있다면,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카디링거에게 황태자 시해 혐의를 오롯이 씌울 수 있다면, 카디링거 또한 그것이 오롯이 황제의 명령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동등하게 치명적이었다. 앞으로 살날이 많고, 통치할 것이 있고, 사서에 올라갈 제 이름자에 대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군주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제야.
잃을 것이 없는 이만큼 상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가운데도 기계적으로 이성적인 반문이 튀어 나갔다.
“약조하신 보장들이 있습니다. 아닙니까?”
“분명 그런 바 있다.”
“그날의 허락이 명령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이도 있습니다. 지금, 바로, 폐하의 뒤에. 페르벨리테의 서약을 공증한 이가.”
페르벨리테는 황제가 신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약조였다. 그로 인해 황위에서 거꾸러진 황제가 역사에 존재할 만큼. 후작의 시선이 벽에 붙어 선 기사에게로 향했다. 그날도, 그가 있었다. 후작이 조용히 말했다.
“데튈르리 경이, 저기 있습니다.”
루드비히의 시선도 느릿하게 제 뒤의 기사를 향했다.
“황제께선 그것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그래, 데튈르리 경이 있지.”
루드비히가 카디링거 후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낮게 중얼거리듯 물었다.
“짐이 아주 아끼는 이야.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표정 없이 서 있던 기사는 황제가 저와 가까워져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느릿하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기사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칼이 우악스레 뽑히며 칼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사가 제 칼에 살해당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기사는 분명 페르벨리테의 증인으로 세울 만큼 황제가 믿었던 이였다. 스무 해를 충성한 황제의 충복이, 황제의 뒤에서 천천히 거꾸러졌다. 루드비히가 칼을 뽑아내고 몸을 돌렸다. 선득하리만큼 창백한 얼굴 위로 피가 몇 방울 튀어 있었다. 루드비히는 칼을 칼집 위로 떨어트렸다.
“이제…….”
“…….”
“문제는 없는 것 같군.”
“그렇군요.”
후작은 마치 제 일이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그 말에 긍정했다.
“프란츠!”
루드비히가 시종장의 이름을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선 것은 시종장이 아닌 라키엘이었다. 후작은 그를 힐끗 돌아보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이것을 생각하셨습니까?”
“우리의 새로운 증인일 뿐이네. 그 역시 기사니까.”
라키엘이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후작이 눈을 감았다. 루드비히가 온화하게 물었다.
“증인이 왔으니, 새로이 확언하지.”
“…….”
“그대가 황태자와 선대 공을 죽였다. 그렇지 않은가?”
“구태여 제 입으로 확언해 제게 돌아올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실을 1황자와 엮지 않을 것이란 보장 정도면 부족하겠는가.”
“멍청한 모순을 강요하시는군요.”
곧 죽을 황제가 가만있어 주겠다는 제안이 그리유효하게 들릴 리 없었다. 제 입으로 확언하는 순간부터 이미 1황자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황태자가 죽은 것만으로 이미 제가 반역자였고, 그것이 이 방을 나가 공언되고 황립 재판소가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반역자의 아들이 된 제 부황과는 달리, 장성한 황자에게는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었다. 결국엔 그와 함께 반역자로 재판에 서게 되리라. 반역자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거꾸러질지언정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후작이 비식 웃었다.
“다른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그 자리에 있었던 네 명 중 두 명은 이미 죽었고, 남은 것은 폐하와 저뿐입니다.”
거짓말처럼 침착한 음성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기사가 거꾸러지는 순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것이 최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제 누이에게.
“제가, 모든 것을 안고 죽는 것입니다.”
“확언하느니 죽겠다?”
“아들을 죽인 그 추악한, 폐하의 죄악까지, 모두 안고서.”
라키엘이 무심한 눈으로 후작을 응시했다.
“그로써 바라는 것은 1황자와, 제 아들이, 그리고 제 누이가 그 일과 전연 관련 없다는 것을 폐하께서 확언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러지.”
후작이 제 뒤에 서 있던 라키엘을 한 번 돌아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죽은 기사에 가까워진 후작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었다. 칼날 위로 얼룩져 있던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망설임은 없었다. 칼날이 목울대 아래를 그었다. 피가 왈칵 쏟아졌다. 굳건하게 서 있던 몸이 일시에 허물어졌다.
웃고 있나.
바닥에 쏠려 있던 눈동자가 빙글 돌며 움직였다. 후작의 시선이 황제를 지나 젊은 공작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모든 일이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양 라키엘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정치가 특유의, 일종의 결벽증이나 다름없었다.
철저히 선 밖에 서서,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움직이던 자.
오로지 그 선 밖에 서 있기 위해 제 아비의 죽음까지 제 손으로 묻은 사내.
소름 끼치는 새끼.
후작은 마치 제가 죽지 않을 것처럼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라키엘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우아한 걸음걸이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낮은 시야로 무릎이 굽혀지는 것이 보였다. 차가운 손이 후작의 꽉 쥐어진 손을 펴고 칼을 빼냈다. 시야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가 라키엘의 소매를 꽉 잡아챘다.
“결국…….”
“…….”
“너도, 나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새까만 눈동자가 힘겹게 달싹이는 후작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죽어 가는 이의 눈꺼풀이 힘없이 움직였다. 라키엘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무심하게 말했다.
“그보다 조금 더 위를 그으셨다면 편히 죽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평온한 음성 위로 차분한 증오가 흘러들어 왔다. 검고 잔잔한 눈이 악의로 일렁였다. 후작이 끊어지는 숨 사이로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저주하듯 말했다.
“너도, 하나 다를 것, 없는 놈이야……. 그렇지?”
라키엘이 말없이 몸을 일으키며 후작의 곁에 칼을 떨어트렸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치워지지도 못한 제 오라비의 시체를 베티스의 발이 지났다. 겨우 루드비히의 앞까지 걸어온 베티스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러나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스스로 죽었군요.”
마치 죽어 널브러진 후작의 시체가 제 오라비가 아닌 것처럼 베티스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차가웠다. 루드비히가 그녀를 보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그래.”
“어떤 환담을 나누셨나이까.”
웃음기마저 담긴 살가운 물음이 기괴했다. 루드비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대들이 준비했듯, 짐 역시 준비했을 뿐이다.”
루드비히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그제야 양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손이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루드비히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리고 베티스는 그 광경을 처음 보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꼬박 반년을 넘은 탓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미쳐 가고 있었느냐고. 베티스는 말을 차마 더 잇지 못하고 망연히 서 있다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숨이 목구멍을 태웠다.
허공에 떠 있던 손이 아무것도 짚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내 일생을 걸어 울지는 않겠습니다. 내 죽은 아비를 부르지도, 내 아비와 오라비가 폐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바쳐 왔는지도,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도, 내, 일로벨라가…….”
“…….”
“폐하께 돌아갈 그 아주 작은 이익을 위해 그 먼 곳에 팔려 간 것도, 우리에게 대가라고 내밀었던 그 같잖은 것들도, 모두 파사칼리아의 무덤 앞에 처박힌 것을 아니까.”
루드비히가 손을 내리고 눈을 들었다. 베티스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울고 있었다. 악다문 잇새로 조용히 악에 받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든 것을, 내 평생을 폐하께 바쳤다 한들, 애초부터 당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으니. 겨우 그리 하찮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반대편으로 기울어지는 저울 위에 서서 지켜본 지는 오래되었다. 평생 움직이던 저울이 어느 순간부터 멈춰 버린 것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제 눈앞의 남자를 제 남편으로 착각한 적이 없었다. 절망하기엔 그녀가 기대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가까웠다. 지나치게 가깝던 것이 멀어졌다. 고지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어느새 멀어졌으나 분명 그런 적도 있었다.
베티스는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카드리어를 떠올렸다. 그 젊은 황태자의 곁에 서 있었던 열여덟 적의 파사칼리아도. 제 첫 스무 해가 거꾸러지던 순간이었다. 순진하게 황태자비가 되리라 믿었던 그날들, 오로지 그것에 맞추어 자랐던 그 어린 계집. 세상은 정해진 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기대한 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카드리어는 그 미련한 계집을 버렸다. 그리고 에델가르드에 의해 고작 스물둘에 죽었다.
그 거꾸러진 스무 해를 바로 잡기 위해 베티스는, 그녀의 아비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시는 기대하지 않고, 새로이 정해진 것들을 거스르기 위해서. 그렇게 다시 스무 해를 훌쩍 넘도록 바라고 갈망해 온 것이 바로 앞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파사칼리아의 아들이 사라졌을 때. 제 어릴 적 믿어 온 순리를 부수고 생겨난 것들이 하나씩 다시 사라져 갈 때.
그때가 어느새 멀었다. 어쩌면 제게 다시 유리해지자 그것이 본래부터 그랬던 양 착각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정해진 정도에 서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다시 기대도 했을 것이다.
애초에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갔다면 지금 저 자리에는 카드리어가 살아 앉아 있었을 테고, 파사칼리아의 관 위에 놓인 황후의 홀은 제 손안에 있었으리라.
그러나 결국에는 미치광이와 시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처음부터, 이것이었습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처음부터 자신들은 단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그때부터, 황태자가 죽고도……. 처음부터…….”
“…….”
“내 아들로, 단 한 순간도 그리 정한 적 없으십니까.”
루드비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 대한 아주 희미한 일말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 베티스는 역겨운 듯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내 아들을, 아주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금세 쉬어 버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대답은 알고 있었다. 제 오라비의 시체로도 충분했으니까.
“내 딸도, 아주 조금도……. 파사칼리아의 딸처럼 생각한 적 없으십니까.”
“…….”
“당신의 딸이라고.”
베티스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뒤로 걸어갔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베티스가 선득하게 웃었다.
“이제야, 파사칼리아를 좀 알겠군요. 평생 알고 싶지 않았던 계집인데.”
“…….”
“당신을 얼마나 죽이고 싶어 했는지 말이에요. 당신이 내 아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만큼이나.”
베티스는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하며 제 발치에 떨어진 칼을 주웠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오페라무대 위에 선 여왕처럼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칼날에 묻어 있던 피가 베티스의 흰 드레스 자락을 스치며 점점이 붉은 자국을 남겼다.
갈로이스가 제 희생으로 그들이 다시 회생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과 달리, 베티스는 제 오라비의 죽음으로 끝을 마주했다. 끝이었다. 더는 돌이킬 수도 없는 끝이었다. 제 오라비의 죽음은 어차피 소용없을 것이었다. 베티스는 루드비히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여자였다. 어쩌면 그를 평생 외면하고 살았던 파사칼리아보다도 더.
황제는 이미 빌키어스를 죽일 생각이었다. 혹은 같이 죽을. 베티스는 그 길지도 않은 걸음 속에 제 아들의 남은 목숨을 재어 보았다. 평생 제 아들의 목숨은 절반이 죽음이었다. 황제가 되지 못하면 영영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키워 낸 아들이었다. 베티스는 그것이 이제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현재라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죽이면…….”
베티스가 낮은 계단을 올랐다. 길고 무거운 칼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히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루드비히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편해지겠죠.”
“그래.”
“나한테 미안한가요?”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렇군.”
루드비히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긍정했다. 그들이 함께 산 세월이라곤 제 자식들에게서조차 찾을 수 없는데, 고작 저 한마디에 비로소 묻어나는 것이 우스웠다. 루드비히의 말은 여전히 조금 느릿했다. 베티스가 웃었다.
“어느새 병신이 다 됐군요.”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베티스가 웃음기를 지워 냈다. 말린꽃처럼 생기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 루드비히를 내려다보았다.
“죽여 줘요. 나를.”
차가운 손이 맞부딪쳤다. 루드비히의 손안에 칼이 들어왔다.
“시작은 내가 먼저 했으니, 끝은 당신이 내요.”
루드비히는 물끄러미 베티스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당신이 죽인 거예요.”
“…….”
“그리고 당신은, 내 아들에게 죽는 거예요.”
베티스가 메마른 입술 사이로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오가 지나기 전 카디링거 후가 자결하고, 이른 저녁 무렵 황제가 1황비를 죽였다. 지나치게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이 황제의 죽음이 정말로 머지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빌키어스를 주시했다. 그러나 1황자궁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황비가 제 오라비의 죽음에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정확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 이야기대로라면 빌키어스는 반역자의 아들로 내몰리거나, 혹은 반역자로 돌변해야 했다. 그러나 황자가 가만히 제 궁에 있는 것만큼이나 황제 역시 제 아들에 관하여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기묘한 평화와 공포 속에서 소문들이 조용히 황궁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이윽고 황궁에 밤이 찾아왔다. 아무 일도 없는 날보다 오히려 더 조용한 밤이었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황자가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
그리고 비올레타의 궁에 급사가 찾아온 것은, 그날 자정을 막 넘어선 시각이었다. 황제가 아닌 빌키어스가 보낸 급사였다.
“맞게 왔구나.”
빌키어스의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문가에 못 박힌 듯 서서 더 걸어가지도 못하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알현실을 지나 다섯 번째로 있는 이 방은 황제가 멀리 물려 놓은 시종들과 아주 멀었다. 제가 걸어온 그거리가 그렇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제가 오는 것을 알려 두었기에 라키엘은 지금쯤 시간을 맞춰 궁에 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조차 막막했다. 손끝부터 천천히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빌키어스는 천천히 아래로 칼을 떨어트렸다. 비올레타의 시선이 빌키어스의 손에서 떨어지는 칼을 따라 바닥에 처박혔다. 그제야 바닥에 쓰러진 루드비히가 보였다.
홀린 듯 비올레타가 걸음을 옮겼다. 루드비히가 좀 더 가까워졌다. 그는 죽어 있었다. 띄엄띄엄 하나씩 머릿속으로 들어오던 사실이 이내 한눈에 보였다. 저도 모르게 멎어 있던 숨이 확 터져 나왔다. 루드비히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벌건 괴물처럼 황금빛 대리석을 타고 서서히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왔다. 비올레타는 힘이 빠진 다리로 겨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빌키어스는 한동안 비올레타와 조금 멀리 마주 선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 위에 점점이 튄 붉은 피가 선득했다. 그러나 그는 우습게도 그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언젠가 그녀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비올레타가 멀거니 그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고로 생각했다. 카디링거의 사병은 여전히 후작령에 있었다. 황성을 둘러싼 군사들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황자가 구금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이것이 반란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저 황제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얼마간 더 정적이 흘렀다. 빌키어스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벽으로 걸어갔다. 붉은 마호가니 목재로 된 벽에는 황제의 무구들이 몇 가지 걸려 있었다. 빌키어스가 벽에 매달려 있던 총신이 조금 긴 권총을 빼냈다. 비올레타가 반사적으로 제 권총이 달린 허벅지 근처를 짚었다. 그러나 빌키어스는 동요 없는 얼굴로 해머를 당기며 그녀에게 걸어왔다.
찰칵, 총신이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올레타가 조금 물러서려 하자 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그녀가 무언가 더 생각하고 반응할 새도 없이 빌키어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제가 들고 있던 권총을 그녀의 손에 올려 주었다. 비올레타가 멍한 얼굴로 빌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방엔 죽은 황제와, 황제를 죽인 반역자와, 황제의 딸이 서 있지.”
“당신…….”
“제1 계승권자로서, 반역자를 처리해.”
빌키어스의 목소리는 비올레타에게 늘 그랬듯 저 홀로 다정했다. 그 부드러운 미소부터 저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이 상황과 어울리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비올레타의 흔들리는 시선이 빌키어스의 얼굴 위에 남은 루드비히의 핏자국을 현실감 없이 더듬었다.
비올레타의 입술이 문득 달싹였다.
“당신은, 어쩌면 죽지 않을 수도 있어요.”
살아남는대도 어차피 당장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얄궂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저 지금 제 손을 더럽히기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손바닥에 배인비릿한 피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비올레타는 마치 빌키어스가 아닌 제 쪽이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외람된 말씀이나 최근의 폭정과, 지나치게 가혹한 숙청으로……, 그러니까, 이번의 사건은, 당신의 구명을 지지할 귀족들이…….”
“저분은 내 아버지고, 나는 저분의 아들이야. 네가 저분의 딸이듯.”
평온한 목소리가 비올레타를 달래듯, 그러나 분명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어떤 명분이 있어도 내 손으로 저분을 죽인 건 정당화될 수 없지. 저분이 내 외숙을, 내 목숨 같은 어미를 죽였을지언정, 나도 아비를 죽였을 뿐이야. 앞으로도 살아갈 생각으로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네가 군주의 아량으로 나를 살린다 한들, 비올레타.”
“…….”
“나는 평생을, 황제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비올레타는 흐릿한 시야를 깜빡였다.
“그리고 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살아온 자들이 있지.”
“…….”
“내가 죽지 않으면, 넌 그들을 평생 얻지 못할 것이다.”
“오라버니.”
“하지만 고맙구나. 날 살리려 해 줘서.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모를 거다.”
빌키어스는 정말로 기쁜 듯 웃었다. 비올레타가 멍하니 그 웃는 얼굴을 보다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십니까.”
“황제를 시해한 황자를 처치한 공이라면, 그 누구도 네가 계집이라 섬길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제게.”
“네 앞길이 완벽하길 바란다. 미하일이나, 나 같은 것과는 달리.”
“…….”
“어쩌면 알량한 뇌물일지도 모르지. 곧 미하일을 만날 테니까.”
비올레타는 천천히 입안에 고여 있던 숨을 삼켰다. 가시 박힌 덩어리처럼 숨이 목구멍을 할퀴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구질구질한 부탁을 하나 하마. 일로벨라는 이 모든 것과 관련이 없음을 너도 잘 알 테니, 부디…….”
“그녀는 이미 이렌시아의 황족입니다.”
“그래.”
빌키어스가 낮게 웃으며 비올레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시간이 됐다는 듯, 비올레타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빌키어스가 소리쳤다.
“시종장!”
비올레타는 그 외침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증인을 부르고 있었다.
“이건, 이건 아니에요. 당신이 이렇게 죽는 건…….”
“모든 것은 돌아와.”
“오라버니!”
“내가 미하일을 죽였듯이…….”
빌키어스는 선명한 발음으로 그 말을 천천히 한 번 더 되뇌었다. 마치 제 스스로에게 새기듯이.
“네가 날 죽이는 거야.”
“…….”
“이제야 드디어, 그 대가를 치르는 거니까.”
그리 두껍지 않은 문 새로 시종장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빌키어스가 죽은 루드비히 쪽으로 빠르게 다가가 칼을 집어 들었다.
“이제, 모두 준비됐어.”
늘 그랬듯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이미 장전된 총을 든 손이 아래로 늘어진 채로 덜덜 떨렸다. 비올레타는 마치 연극무대 위에 처음 떠밀려 올라간 배우처럼 떨었다. 모든 것이 연극 같았다. 죽어 널브러진 루드비히도, 그 곁에서 칼을 든 빌키어스도, 총을 쥔 자신도. 비올레타에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맞춰 놓은 무대였다. 한 점 의혹 없이 완전한 공로만 그녀 손에 들어가는 것이다.
빌키어스가 자신의 가슴께를 짚었다.
“여기야.”
“…….”
“그리고 그가 들어서면,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비올레타는 여전히 총을 들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빌키어스가 그녀를 달래듯 나직하게 말했다.
“비올레타, 그건 생각보다 아주, 쉬운 일이란다.”
문이 열렸다. 비올레타가 창백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억지로 손을 잡아끌리듯 총을 들었다.
“폐하!”
루드비히를 발견한 시종장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1황자가 반역을 일으켰다!”
반역을 알리는 소리에 빌키어스가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말했다.
지금이야.
비올레타가 이를 한 번 세게 악물었다가, 이내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
커다란 폭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허물어지는 인영이 보였다. 비올레타는 그것이 제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표정 없이 시종장에게 선고하듯 말했다.
“나는 반역자를 처리했고, 반역은 종료되었다. 경이 그 증인이다.”
얼마간 허공에 그대로 뻗어 있던 손이 느리게 내려왔다. 루드비히의 사체를 임시로 수습하다 그대로 멈췄던 시종장이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그대는 지금 당장 반역과, 폐하의 승하와, 반역의 종료를 공표하고 에델가르드 공에게 파발을 보내 추밀원을 긴급 소집하라 이르라.”
허리를 더 깊이 숙인 시종장이 밖으로 급히 나갔다. 비올레타의 손이 곧장 총을 떨어트리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릿한 쇠 냄새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비올레타가 넘어질 듯 조금 비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똑바로 걸음을 옮겼다.
빌키어스의 가슴이 얕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비올레타는 그 앞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이 빌키어스의 총상 위를 짚었다. 피가 손바닥으로 계속 솟아올랐다.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빌키어스가 눈을 감은 채로 희미하게 말했다.
“울고 있구나.”
“…….”
“내겐 지나치게……, 과분한 눈물인데.”
“내가 당신을 죽였, 어요.”
빌키어스가 피식 웃었다.
“고맙게도 그렇지.”
“잘 쏘지도, 못했고요.”
“울지 마.”
“…….”
“부탁이니, 나를 위해 울지는…….”
빌키어스가 쿨럭 피를 토해 냈다. 빌키어스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뿌옇게 바란 눈동자가 비올레타의 얼굴을 찾았다. 빌키어스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우니 정말로…….”
“…….”
“미하일과……, 눈이, 똑같네.”
미하일과 눈이 똑같네. 다 쉬어 버린 목소리 위로 지금보다 힘 있고 맑았던 음성이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 제 얼굴을 처음 본 빌키어스가 탄성처럼 내뱉었던 그 말. 비올레타는 멍하니 빌키어스를 바라보았다. 빌키어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희미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미안해. 이 모든 걸, 너에게…….”
빌키어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로 죽었다. 비올레타는 그대로 그 옆에 조금 더 있다가, 몸을 겨우 일으켜 루드비히에게로 걸어갔다. 비스듬히 쓰러진 몸을 바로 눕히고, 시신의 머리가 동쪽 창을 향하도록 힘겹게 돌려놓았다. 팔을 바로 정돈하고 아무렇게나 꺾인 고개도 바로 뉘었다. 빌키어스의 피가 황제의 남색 예장 위 곳곳에 묻어났다. 비올레타는 가만히 제가 정돈한 루드비히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아마 여신도 받아 주지 않으시리라.
비올레타가 그들의 피가 묻은 손을 제 드레스 자락에 아무렇게나 닦았다. 그리고 루드비히의 마른 얼굴을 조심스레 쓸어 피를 닦았다. 제 손끝에 닿은 것이 이미 죽은 거죽이라는 것을 비올레타는 억지로 실감했다. 눈물은 더 나오지 않았다.
결국에는, 껍질인 제가 남았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비올레타는 발밑이 기묘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슴푸레한 불빛이 비친 유리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정돈된 루드비히의 시신과는 달리 빌키어스의 시신은 쓰러진 그대로였다. 루드비히는 황제로 죽었고, 빌키어스는 반역자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비올레타는 빌키어스를 얼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턱을 조금 들어 올리고, 등을 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문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기다란 복도에 그녀와 시종장의 발소리만 한참을 울렸다.
이윽고 복도 귀퉁이를 돌자 멀리 새로 밝혀 둔 밝은 등 빛이 보였다. 비올레타는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높은 천장을 치고 메아리처럼 발소리가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빛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거대한 출구에 서 있던 시종들이 비올레타를 발견하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이 묵직한 소음을 내며 열렸다. 열리는 틈 사이로 비교도 할 수 없이 밝은 빛이 쏟아졌다. 밤이 무색하게도 궁 앞이 낮처럼 밝았다. 궁을 둘러싼 병사들의 횃불과 하인들이 든 등불들이 눈부셨다. 눈에 익은 추밀원의 의원들을 비롯한 대귀족들과 궁정 사람들이 황제의 커다란 전정前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가장 앞에 선 라키엘을 응시했다. 비올레타와 눈이 마주치자 라키엘의 눈매가 여상하게 휘어졌다. 그 대수롭지 않은 웃음에 저도 모르게 빨라진 맥박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비올레타는 다시 걸음을 옮겨 문을 지났다.
비올레타의 발은 이내 계단의 끝에서 멈추었다. 그란토니아의 가장 고귀한 귀족들이 그녀의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웅장한 소리가 전정을 먹먹하게 울렸다. 기묘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저를 향하는 소리였다. 비올레타는 제게 조아린 고개들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내리깐 시선의 가장 아래로 피로 얼룩진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비올레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밝은 빛과 제 드레스가 뒤섞였던 혼잡한 시야가 사라졌다.
이윽고 비올레타가 빛 속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너무 밝아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빛속으로.
curtain call_Dramatic irony
1)
1) 비극에서 흔히 사용되기 때문에 비극적 아이러니라고도 한다.
특정 인물이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사 속에 그 사람이 의식하지 못한 의미가 추가되는 것으로, 극작가는 그 의미를 관객에게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상례이다.
셰익스피어가 『오셀로』에서 쓰고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즉, 주인공 오셀로는 신뢰하는 이아고가 자기를 배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오셀로가 하는 말은 복잡한 의미나 효과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809년, 가을.
드 포네의 창백한 회갈색 나무들 사이로 기사들이 길게 줄지어 말을 달렸다. 말들이 뿌옇게 일으킨 흙먼지가 길 위를 부유했다. 이윽고 하얗게 칠한 사두마차가 우아하게 뒤를 이었다. 여제의 마차였다.
야트막한 산세가 제법 험준한 것과는 달리 여제의 행렬이 지나는 길은 깨끗했다. 말 두 마리가 겨우 나란히 달릴 수 있었던 이전의 길은 새로이 닦여지며 너른 길로 변했다. 여제의 부군인 대공의 지시였다. 본디 드 포네의 그 험한 산세가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은, 그 모습 자체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보다는 젊은 대공이 더 완고했다.
불과 한 해 전 드 포네의 사냥터에서 롬바르디안의 암살 시도가 있었으므로 추밀원의 반대는 극심했다. 그러나 여제의 즉위 이후 첫 추수제였다. 비올레타는 결국 사냥 행차를 감행했다. 처음이라는 중요성은 차치하더라도, 그 불안이나 위험에 관하여 그녀가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어떤 상징으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계집이 몰고 온 불길함 같은 것으로.
지금의 사냥 행차는 그런 필요성과 반대의 중간 즈음에 있는 모양새였다. 선대 황제들이 추수제가 되면 열 명 남짓한 수행원만 대동하고 드 포네로 왔던 것과는 달리, 여제의 마차 전후에는 50명에 달하는 황실 근위대 기사들과 열 명의 고위 시종들이 열을 맞추고 있었다. 간소한 방식에서 대여섯 배로 늘어난 규모는 역시 계집이라 겁이 많다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지만, 아예 행차하지 않는 것보다는 확연히 나은 결과를 낳았다. 혹은 이전과 같이 허술한 수행 속에 있는 것보다도.
길게 이어지던 행렬이 서서히 느려졌다. 마차가 이윽고 중턱에 섰다. 라키엘이 마차에서 홀로 내려섰다. 가늘게 뜬 눈매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헤집었다. 제법 거창한 행차였으므로 애초에 개사냥처럼 고전적인 방식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라키엘은 사냥개들에 포위된 여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목과 뒷다리를 물린 지 오래된 여우는 힘이 다 빠진 채로 비틀거렸다. 본래라면 황제가 직접 사냥을 지시한 뒤 이루어져야 했으나, 이렇게 규모가 큰 행차 후에는 근방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라키엘이 손짓하자 수행원들이 미리 잡아둔 사냥감으로 다가갔다. 우두머리인 검은색 그레이하운드가 꼬리를 흔들며 수행원들의 뒤로 물러났다. 라키엘은 다시 뒤돌아 마차 문을 열었다. 곧 비올레타가 마차에서 내렸다.
“폐하.”
마차를 경호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얕게 고개만 끄덕인 비올레타가 머리를 가리고 있던 로브를 내렸다. 짙푸른 로브가 어깨로 내려가자 단정하게 틀어 올린 적갈색 머리칼이 드러났다. 라키엘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비올레타가 그 손을 잡고 걸었다. 한 해 전에도 그랬듯, 그들이 사냥감과 가까워지자 개들이 온순하게 뒤로 비켜섰다. 비올레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란 목을 빳빳하게 세운 하얀 그레이하운드에게 상을 주듯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수고했다.”
비올레타가 허리를 들며 미리 사냥을 지휘한 시종에게 가볍게 치하했다. 라키엘이 제 뒤에 서 있던 기사로부터 레이피어를 받아 들었다. 길고 가느다랗게 뻗은 황금색 레이피어가 꼿꼿한 날을 드러냈다. 이제 예장용으로나 쓰이는 레이피어는 사냥터와 그리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로 내려오는 황제의 무구 중 가장 유명한 하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결국 상징적인 것에 상징적인 것이 더해진 셈이었다. 그 자체로 허상이나 다름없이.
라키엘이 다른 손을 들어 레이피어의 끝을 평평하게 받쳤다. 비올레타가 몸을 돌려 라키엘의 손 위로 제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쥐던 차가운 손끝이 라키엘의 손바닥을 천천히 깊게 긁었다. 마차 속 냉전의 연장 선상이었다. 겉으론 우아한 표정을 하고서는 손끝으로 제게 시위하는 것이 우스워 라키엘이 입안으로 피식 웃었다. 라키엘이 웃는 것을 눈치챈 비올레타가 무표정한 얼굴을 미세하게 일그러뜨렸다. 라키엘이 천연덕스럽게 비올레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모로 까딱했다. 사냥을 미리 지휘했던 시종이 걸어 나와 여우를 바닥에 내리눌렀다. 제 종보다 꽤 큰 몸집이 바닥에 눌린 채로 바르작거렸다.
“어디가 가장 좋지?”
비올레타는 여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시종에게 물었다.
“예?”
“나는 이걸 처음 써보거든. 애꿎게 고문까지 하기는 싫어서.”
비올레타가 눈꺼풀을 내리깔며 레이피어를 흘깃 바라보았다. 시종이 그제야 질문을 알아듣고 제 손이 짚고 있던 자리를 무릎으로 내리눌렀다. 시종의 손이 여우의 목울대를 천천히 쓸었다. 그러다 뼈 사이 움푹 파인 부분을 손끝이 몇 번 꾹꾹 눌렀다. 시종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적당할 것입니다.”
비올레타는 시종이 짚은 부분을 얼마간 응시하다, 레이피어가 아래로 향하도록 다시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그 위로 마주 잡았다. 좁고 기다란 칼끝이 여우의 가죽 위에 닿았다. 비올레타가 허리를 숙이며 칼 위로 무게를 실었다. 가느다란 칼날이 길이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좌우로 조금 휘청거리다 이내 가죽을 뚫고 살 속으로 쑥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빨려 들어가듯 땅까지 꽂혀 들어갔다. 비올레타가 조금 비틀거리자 라키엘의 손이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잡아 일으켰다.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넣은 것처럼 여우는 레이피어에 꿰여 있었다. 레이피어가 꿰뚫은 부분은 회갈색 털로 멀쩡하게 얼마간 뒤덮여 있다가, 이내 검붉게 물들어갔다. 비올레타는 여우의 눈이 제 앞만 망연히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제가 누워서 죽어 가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걸어 나가듯 여우의 다리가 몇 번 바르작거렸다. 그리고 이내 죽었다.
라키엘이 레이피어를 잡고 뽑아냈다. 황금색 검신이 벌건 피를 흘리며 다시 드러났다. 라키엘이 황실의 문장이 커다랗게 수놓인 볼리니티에를 받아 레이피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볼리니티에는 황제궁 위에 걸리는 세 개의 깃발 중 하나로 새로운 즉위를 알리는 것이었다. 라키엘이 시종에게 볼리니티에를 내밀자, 그가 받아 여우의 피를 적셨다. 그들이 돌아가면 볼리니티에는 이제 좀 더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추수제의 피를 적신 채로.
납작한 함에 볼리니티에가 가지런히 접혀 담기는 것을 확인한 라키엘이 비올레타를 돌아보았다. 비올레타는 여전히 죽은 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파리해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라키엘은 얼마간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과 함께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다시 달렸다. 그녀의 곁에 나란히 앉은 라키엘이 손수건을 꺼내 비올레타의 손을 닦아 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에서 무언가를 지워 내듯 손수건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히 쓸었다.
“앞으로도 계속.”
손수건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비올레타는 그렇게 말하다 문득 제 말을 잘랐다. 라키엘이 손수건을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툭 놓으며 몸을 뒤로 기댔다.
“계속?”
라키엘이 그녀의 끊어진 말을 마저 묻듯 그렇게 말했다. 비올레타가 어깨를 벽에 기댔다.
“매년, 이렇게.”
비올레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호흡이 짧았다. 라키엘은 그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그녀가 제 말을 끝내길 기다렸다. 드 포네의 황량한 숲이 창밖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무언가를 죽여야 하겠죠.”
“우리는.”
라키엘이 그녀의 말을 정정하듯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올레타가 계속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나랑 당신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말아요. 내 쪽이 억울하니까.”
“이제 와서?”
“당신은 지은 죄가 나보다 훨씬 많잖아.”
“모른 척하기엔 폐하도 이미 늦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비올레타가 고개를 벽에 기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그럼 어떻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까?”
라키엘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비올레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키엘이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반대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처럼?”
낮게 속삭이는 음성은 은밀했지만 거리도 표정도 모두 담백했다. 비올레타가 코웃음을 쳤다.
“놀리지 말아요.”
“폐하께서 제대로 된 말을 않으시는 것을.”
“단둘이 있을 땐, 단둘이 있을 때처럼.”
비올레타가 뒤로 고개를 기대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녀답지 않은 말에 라키엘이 조금 신선한 듯 삐뚜름하게 웃었다.
“이런 말도 할 줄 아셨나.”
“내용 그대로예요. 확대 해석하지 말고.”
“아침부터 조금 이상하긴 해.”
“뭐가요.”
“계속 짜증에 신경질에, 이젠 답지 않게 이런 어리광까지 부리고.”
어리광이라는 단어에 문득 소름이 끼친 비올레타가 괜히 인상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벽 쪽으로 당겨 앉았다. 라키엘이 짧게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좋다는 말씀인데, 폐하.”
“당신 그렇게 말할 때마다 놀리는 것 같아요. 불쾌하고…….”
비올레타가 짜증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라키엘이 여상한 얼굴로 입매만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조용히 있어 줄 테니 편히 앉아 있어. 몸도 안 좋으면서.”
“난 멀쩡해요.”
“연회는 늦어도 돼. 시의부터 만나지.”
“대체 내가 어딜 봐서 시의 만날 상태예요?”
“아침에 어지러웠다면서.”
“아침엔 일어나면 늘 그래요.”
“늘 그렇다니 더 만나야겠네. 그리고 아까도.”
“아까도?”
라키엘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안 좋고.”
비올레타는 제 얼굴을 찬찬히 쓸었다.
“사냥은 적성에 맞다면서. 아니야?”
비올레타는 그제야 정작 이번이 제가 라키엘과 처음으로 사냥을 함께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비올레타가 사냥하는 것은, 사실 이번에는 그저 죽인 것이었지만 어쨌든 라키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라키엘이 감색 드레스 위로 가지런히 놓인 손끝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그동안 늘 그랬다고는 생각하기 싫은데.”
“내가 억지로 해 왔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지.”
라키엘이 그녀의 손끝을 제 손끝으로 쓸었다.
“네 얼굴이.”
비올레타는 저 스스로도 이상했던 기분을 돌이켜 곱씹었다. 추수제 사냥이 평범한 사냥과 다르다고 한들 처음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림은 저번이 훨씬 더 껄끄러웠다. 비올레타는 불현듯 목 아래로 메스껍게 차오르는 기운에 얼굴을 찡그렸다. 라키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올레타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그렇고.”
“그냥, 오늘따라 속이 좀 안 좋아요.”
“조금 안 좋은 걸로 티 나는 얼굴 아닌 거 알아.”
“연회는…….”
“첫 추수제니 나올 필요 없다고는 못하겠고, 그래도 시의는 만나.”
“싫어요.”
“고모님처럼 어리석게 굴지 마.”
줄곧 평온하던 목소리가 낮게 일그러졌다.
또다시, 불안한 눈이었다.
결국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비올레타는 침실에 떠밀리듯 들어가 누웠다. 사실 그것이 과보호라고 말할 자격은 제게도 없었다. 그녀는 제 몸보다 그 얼굴에 약했다. 그 완벽하게 짜인 얼굴이 고작 저 하나의 불안에 흐트러지는 순간. 제 안위가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사실상 라키엘이 그것까지 생각하지도 못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정작 그것을 늘 생각하는 것은 이제 그녀뿐이었다. 제 몸뚱이에 새겨진 가치 같은 것. 라키엘이 그 값을 매기지 못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키엘은 시의와 함께 침실에 들어왔다. 비올레타는 그 사이 피곤하게 흐트러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이 침대맡에 앉으며 물었다.
“잠은.”
“그냥 누워 있었어요. 누워 있으니 자고 싶어져요.”
“속은 여전히 그렇고.”
“조금 나아요.”
“여전히 성가셔?”
“당신은 언제나 그래요.”
비올레타의 뾰족한 대꾸에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폐하께서 제게 화가 조금 나 계십니다.”
“오늘은 그러신 것 같군요. 항상 사이가 좋으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시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비올레타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오늘 자택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송구한 말씀은 부디 말아 주십시오. 제가 어디에 있든 이것이 제 소임입니다.”
시의가 그렇게 말하며 비올레타의 손목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가 박동 수를 재는 동안 비올레타는 조금 무기력하게 라키엘에게 기대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정적이 흐르고, 시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요사이 특별한 증세가 있었다면 부디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
심각한 목소리에 라키엘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기댄 채로 가만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저번과 그리 다를 바는 없어요. 다만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 됐고, 사실 입맛도 그리 없었고.”
“그리고요?”
비올레타는 살짝 눈치를 보듯 라키엘을 힐끗 바라보았다. 라키엘이 어디 계속 읊어보라는 듯 고개를 모로 까딱였다.
“도저히 먹지를 못하겠어서 끼니를 자주 거르기는 했어요. 속은 요즘 들어 종종 안 좋기는 했는데 오늘은 유난히 그랬고.”
“특별히 피곤해지진 않으셨습니까?”
“항상 조금씩은 피곤했는데, 그러고 보니 요사이 잠을 못 잔 것도 아닌데 졸린 적이 제법 있었던 것도 같네요. 아니, 생각보다 좀 더.”
“증세를 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 것 같군요.”
비올레타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시의가 라키엘을 힐끔 보고는 묘한 얼굴로 웃었다.
“대공 전하가 계시니 다른 것을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
“상관없는데.”
“상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기대 있던 얼굴을 들어어깨 위로 턱을 괴고는 작게 시비조로 속삭였다. 라키엘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달거리를 마지막으로 하신 게 언제입니까?”
라키엘이 불현듯 반색한 것도 모른 채 비올레타가 멍하니 대꾸했다.
“이제 오 주 가까이 됐네요.”
“이미 지났군.”
라키엘이 단정 짓듯 짤막하게 말했다. 묘하게 뜬 목소리였다. 비올레타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봄에 대관한 이후로 제때 한 일이 없어요. 저번에는 칠 주나 없어서 의심했는데 아니었잖아. 그리고 그 후에도 한 번. 그게 기억도 안 나요?”
“기억난다, 다.”
비올레타가 핀잔하듯 하는 말에도 라키엘은 건성으로 끄덕거리며 시의를 바라보았다. 시의가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폐하께서 대공 전하께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태중에 계신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듯합니다.”
비올레타는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사냥 행차 탓에 새벽부터 일어나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셨을 테니 당연합니다.”
“어쩐지 요 며칠 온갖 짜증을 다 피우던 차라 그리 놀랍지도 않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고 받아 낼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폐하께서 폐하 몸에 유독 무던하시니.”
라키엘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맙소사…….”
“워낙 온갖 정무로 바쁘시니 폐하께서 스스로 신경을 못 쓰실 만도 하지요.”
시의가 비올레타를 두둔하듯 말했다. 비올레타가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라키엘을 홱 돌아보았다.
“정무라면 당신이 훨씬 더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폐하가 문제라는 겁니다.”
라키엘이 그렇게 말하며 혀라도 찰 것 같은 표정으로 비올레타를 내려다보았다. 비올레타가 할 말을 잃고 입술만 삐죽였다. 라키엘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웃으며 키스했다. 피식 웃는 소리가 피부 위를 가볍게 울렸다.
시의가 당장 조심해야 할 것들을 몇 가지 당부하고 디아나와 함께 사라졌다. 어차피 그것들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시녀들이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이 미는 대로 얌전히 누워 눈만 깜빡였다.
“진짜 맞을까.”
“아니었으면 해?”
라키엘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난 좋은데.”
되묻기 무섭게 매끄럽게 나온 대답이 내심 마음에 드는 듯 비올레타가 오므리고 있던 입매를 조금 휘었다.
“그럼 나도 좋다고 할래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냥 좋다고 말할 순 없나?”
“무서운데 어떡해요. 앞으로 어떡해……. 당신은 결국 당신 일 아니라서 그런 거예요.”
“알겠으니 짜증은 더 내지 마.”
“내가 언제 짜증 냈는데?”
“지금. 이제 막 시작했다.”
“나 짜증 안 냈어요. 안 냈다고요.”
“그래, 안 냈어.”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짜증 어린 말에 성의 없이 긍정했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을 올려다보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건성이죠, 또.”
“짜증 내신 적 없으십니다, 폐하.”
“그거 놀리는 것 같아서 싫다고 말했잖아요.”
“놀리는 것 맞으니 이제 좋아해.”
라키엘이 얄궂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입술 위로 온기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행복해요?”
“너는?”
“우린 항상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묻기만 하네요.”
“그것만큼은 내가 너한테 배웠지.”
“그런 쓸모없는 건 배우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서, 대답해 봐요.”
라키엘이 말없이 그녀를 내려 보았다. 빛을 등지고 앉은 남자의 검은 눈은 그저 어두웠다. 시선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비올레타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내 한 뼘도 채 남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새까만 눈동자 위로 베드 테이블 위의 촛불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이보다 더 행복해 본 적이 없어.”
목 아래 깊이, 아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뜨거운 숨과 함께 피부 위로 떨어졌다. 비올레타는 마치 라키엘을 달래듯 그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었다. 정작 제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라키엘이 비식 웃으며 그 손을 낚아채듯 잡아 키스했다. 마치 손등 위로 화인을 찍는 것처럼.
“우리 연회는.”
비올레타가 문득 생각난 듯 가볍게 말했다. 라키엘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늘은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당신은?”
“나중에.”
“공표는 언제 해?”
“시일이 지나고.”
“오늘 당장 공표할 것 아니면 나도 자리를 지켜야 해요. 알잖아요.”
“자질구레한 건 알아서 할 테니 내일도, 모레도 여기서 가만히 누워 있어.”
“모레로 끝날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말하네요. 나 당분간 갇혀요?”
“표현이 그다지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그래.”
라키엘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렸다. 커다란 손바닥이 배를 천천히 감쌌다. 맨살을 만지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운 손길이 기묘했다. 비올레타는 라키엘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공표할 때 사면령도 내릴까?”
라키엘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원래 사면령은 탄생일에 내리잖아요.”
“두 번 내리면 더 좋겠지.”
“당신도 그런 걸 믿어요?”
“안 믿어. 그래도 남들 하는 것만큼은 해야 해.”
“좋아요. 근데 탄생 주간에 금주령은 내리지 말아요. 금주령 내릴 때 보니 여신보다 사람 저주가 더 무섭더라.”
“그래, 그렇게 하자.”
라키엘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의 배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라키엘의 고개가 그녀의 배로 느릿하게 떨어졌다. 천천히 드레스 옷감 위로 입술이 닿았다. 몇 겹의 천 위에 닿은 키스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못한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에 경배하듯 경건한 입맞춤이었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배에 입을 맞췄다가 떼고서 중얼거렸다.
“네가 날 구하고 있어.”
불과 몇 분 전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처럼은 들리지 않는, 절박한 음성이 비올레타의 귓가를 긁듯이 말했다. 끝내 눈가에 고여 있던 것이 떨어졌다.
“정말로, 나를.”
“…….”
“이게 무슨 의민지, 너조차도 아마 모르겠지.”
숨이 탁 벅차올랐다. 비올레타는 어느새 여우를 잊었다. 그녀의 손이 라키엘을 제 위로 끌어당겼다.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커다란 품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바닥은 금방이라도 아래로 꺼질 것처럼 불안한데 이것만이 온전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818년 봄.
곱슬곱슬한 적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씩 흐트러졌다. 반으로 묶은 머리 뒤로 달랑 매달려 있던 남색 공단 리본도 덩달아 조금씩 흐트러졌다.
이제 갓 여섯 살이 된 황녀 아델라는 도주 중이었다.
아델라 드 그란토니안 모레 에델가르드. 제 기나긴 이름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찰 나이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사실 그런 항변을 엇비슷하게나마 제 스스로 한 순간, 아델라는 이미 부모의 기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쪽의 엄청난 기대를 덤으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더 촘촘해진 개인 수업도.
여섯 살의 황녀는 이미 공용어와 펠로베르어까지 3개 국어에 능통했다. 어디까지나 여섯 살 기준에서지만 그러했다. 그녀는 펠로베르에 어느 날 뚝 떨어트려 놓아도 아무렇지 않게 펠로베르에서 6년간 살아 온 것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능통한 능력만으로도 포화 상태였던 황녀는 결국 피아노 수업에서 도주했다. 아델라는 제 어머니인여제가 피아노 연주를 자주 즐기는 것과 정반대로, 이렇듯 자주 도주했다.
도주하는 곳은 사실 뻔했다. 여섯 살배기 아델라의 세상은 그리 넓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오라비가 아홉 살이 되면서 황태자궁에서 따로 살게 되자 세상이 조금 넓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작년에만 해도 아버지 대공과 죽고 못 살던 아델라는 여섯 살이 되고 본격적인 조기교육이 시작된 순간부터 대공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다.
“전하!”
멀리서 아델라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종종거리는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어차피 뻔한 곳으로 도망칠 것을 알아 시녀들이 저렇게 가까이서 찾고 있는 것이었지만 아델라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쫓기는 기분에 시달렸다. 작은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번에도 들키면 안 된다. 아델라는 이미 많은 이가 자신을 곳곳에서 발견한 것은 꿈에도 모른 채 황태자궁의 후원으로 재빠르게 숨어들었다. 자신을 숨겨 줄 사람은 오빠뿐이었다. 암녹색 눈동자가 초조하게 움직였다.
조금 더 걷자 툭툭 끊어지는 말들이 희미하게 들렸다. 아델라에게는 낯선 이렌시아 말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제 오라비의 목소리인 것은 알아들은 아델라가 눈을 빛내며 뛰었다. 여태까지 그렇게 조심한 것이 무색한 행보였다.
“오라버니!”
하루 못 본 새 이발을 했는지 짧고 단정하게 손질된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소년이 아델라의 목소리에 뒤돌았다. 아버지를 닮아 조금 날카로운 눈매가 아델라를 보자 누그러졌다. 그녀가 어떤 사유로 또 이곳에 저 꼴로 있는지 이젠 짐작 못 할 바도 아니라, 미하일은 나무라는 기색도 없이 웃었다. 제 누이와 똑같은 암녹색 눈동자 위로 가볍게 웃음기가 어렸다.
“아델라.”
다정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울컥한 아델라가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피아노 선생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황녀 전하.”
미하일의 옆에 서 있던 귀공자였다. 아델라가 눈만 잠시 깜빡이다 슥 시선을 돌려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이 공자님은 뉘시온지.”
금세 새침을 떨며 물어 오는 제 누이를 보며 미하일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아델라는 아직 어린 주제에 기호가 명확했다. 그간 미하일의 놀이 시동들이 아무리 앞에 돌아다녀도 본체만체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유는 분명했다.
“네 대부님의 장자야. 콘라드.”
콘라드 드 로드리고. 제 아비를 빼닮은 백금발이며 청회색 눈동자가 눈부신 미소년이었다.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것치고는 키도 제법 컸다. 콘라드가 아델라의 시선에 씩 웃었다.
순간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던 아델라가 미하일쪽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미하일이 습관적으로 물었다.
“오라버니보단 한 살 어리고. 그러면 아델라 너보다는 몇 살이 많지?”
“두 살.”
미하일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정답 말하듯 대꾸한 아델라가 미간을 팍 찡그렸다.
“내가 바본 줄 알아?”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라 어쩔 수 없어. 질문은 불시에 하라고 하셨지.”
“이럴 줄 알았어. 배신자! 앞잡이 같으니라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서…….”
씩씩대던 아델라가 문득 콘라드의 존재를 기억해 내고 다시 평정을 찾은 척 우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제 어머니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 아델라가 콘라드를 바라본 채로 미하일에게 도도하게 물었다.
“그런데, 칼의 아들이라고?”
콘라드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콘라드의 고개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콘라드의 머리를 누른 큰 손을 따라 아델라의 시선이 올라갔다.
“또, 숙부한테 버릇없게.”
“칼!”
아델라는 콘라드를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칼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존재감이 흐려진 콘라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흐려졌다. 기다란 팔이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칼이 아델라의 정수리에 입 맞추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전하, 숙부라니까.”
“칼!”
“숙부란 어감이 영 마음에 안 드는 거면, 대부님은 어때?”
“칼?”
“그래, 마음대로 불러라.”
칼은 이내 더 말하기도 귀찮은 듯 아델라에게 대접 받기를 곧장 포기했다.
“죄송합니다. 누이가 아직 버릇이 없어요.”
그 와중에 아홉 살배기 황태자가 공손하게 사과했다.
“전하 태어나실 적에 왼쪽 발 잡고 맹세한 게 저인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이를테면 업보 같은 거죠.”
“업보가 뭔데?”
아델라가 고개만 돌려 제 오라비에게 물었다. 칼이 아델라의 뺨에 입 맞추며 말했다.
“귀한 보물 같은 거지. 전하처럼.”
“좋아요. 앞으로 날 업보라고 불러요.”
미하일이 아델라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칼이 미하일을 힐끗 보며 낮게 웃었다.
“전하께서 날 대부님이라 부르면. 전하 오라버니가 클레이런스 후 뵐 때마다 깍듯이 대하는 것 못 봤어?”
“칼은, 어머니도 칼이라 부르잖아요.”
“전하가 폐하랑 같아?”
“나중에 될 수도 있지.”
“전하 오라비는 어쩌고?”
“유모가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랬어요.”
“불경한 말씀을 잘도 하신다. 그러다 나중에 오라버니가 국외 추방시키면 어쩌려고.”
“내가 당하겠어요?”
아델라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칼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아델라를 꽉 껴안았다.
“대부가 가만 안 있지. 황태자고 뭐고.”
“숙부님, 정작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미하일이 조금 억울한 듯 말했다. 칼이 씩 웃으며 한 손을 내려 미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의 목을 아예 휘감고 있던 아델라가 문득 뒤늦게 물었다.
“그런데 왜 왔어요?”
“황녀 전하 보러 왔지.”
“거짓말. 그럼 왜 오라버니 궁에 있어요?”
“곧 보러 가려고 했어.”
“거짓말.”
“도대체 이 귀여운 게 네 아버지 어디를 닮았나 했더니, 사람 의심하는 것 하고는.”
“아버지 얘기는 하지 말아요.”
“오늘은 아버지가 싫은 날이냐?”
칼이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우울한 얼굴로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델라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칼을 응시했다.
“왜?”
“칼.”
“왜 그런 얼굴이야. 불길하게.”
“있죠.”
“네 모친이 그런 표정으로 날 보고 나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겼어.”
아델라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저녁 같이 먹어요.”
“어려운 일도 아니구나. 귀찮기는 하다만.”
“이렇게 계속 안고 있다가요.”
“그때까지 내려놓지 말라고?”
“계속, 계속. 아버지가 보일 때까지.”
칼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델라가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칼을 되게 많이 싫어하니까.”
“…….”
“이렇게 칼이 날 계속 안고 있으면 꼴 보기 싫고 괴로울 거야. 그쵸?”
이상한 쪽으로 벌써 되바라진 황녀를 칼이 멀거니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악감정을 이용해 먹을 생각은 벌써부터 하고 있지만, 정작 제 아비가 저를 왜 싫어하는지는 조금도 모를 것이다. 칼이 웃거나 말거나 아델라는 진지했다.
“괴롭힐 거예요.”
“네 아버지를?”
“복수야.”
“아델라, 오늘도 네가…….”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며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던 라키엘이 멈칫 멈춰 섰다. 식탁에 앉아 있던 미하일과 콘라드가 일어서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것을 대강 받아 준 라키엘이 중앙에 가만히 앉아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저를 등진 채로 칼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고 잠든 제 딸을.
“황녀 전하께서 잠들어 계신 터라 불충하게도 대공께 예를 취할 수가.”
“그대의 불충이야 새삼 궁금하지도 않아. 대체 여기에 왜 있는지가 궁금한 건데.”
라키엘이 여상하게 받아넘기며 웃었다.
“황녀 전하께서 초대하셨는데 어떻게 감히 거절을 하겠습니까?”
“무리하시는 것 같군요. 아이가 제법 무거우니 바닥에 놓아 버려도 되는데.”
“어찌 전하를.”
“그 손에 안겨 있을 바에야 돌바닥에 누워 있는게 낫지. 안 그래?”
“그거야 대공 전하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라키엘이 웃는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미하일이 난처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슬며시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일방적이라, 그 애는 내 딸인데.”
“어쩌겠나. 따님께서 대공이 싫다 하시는데.”
“뭐?”
조기교육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로, 면전에서 아버지가 싫다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어온 주제에 라키엘은 새삼스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말이 칼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 하나만으로. 칼이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어린애를 잡고 무리를 시켜?”
“막 키우면 후처럼 되니까.”
“내가 어때서.”
“선친 아니었으면 빌어먹고 살았겠지.”
“나야 타고났으니 노력을 않는 거지, 타고나지 않았대도 이렇게 살았겠어?”
“그렇다고 보는데.”
라키엘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칼에게로 걸어왔다. 칼에게서 어거지로 뺏어 가는 손길에 아델라가 작게 칭얼거렸다. 칼이 턱을 괴며 빙그레 웃었다.
“쉽지가 않지?”
“뭐가.”
“네 딸은 날 더 좋아해.”
“작년에 아델라가 날 얼마나 좋아했는지 네가 못 봐서 그렇다.”
라키엘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대꾸했다. 칼이 소리 내 웃었다.
“구구절절하기는.”
“네가 뭐라고 하든.”
“어차피 내가 그 아이 대부야.”
“그래서.”
“내 아들놈 줄 테니 바꾸지.”
“일을 안 하니 심심해서 그런 개소리나 하지. 네 아들 같은 걸 어디다 쓰는데?”
아직 남아 있던 콘라드가 서러운 얼굴을 했다. 라키엘이 힐끗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칼이 씩 웃었다.
“바꾸기 싫으면 나중에 며느리로 주든가.”
“그럴 일 절대 없다.”
“모를 일이지. 네가 봐도 내 아들 껍데기는 썩 괜찮을 텐데.”
“너보다야 낫지. 속도 부인을 닮았으면 비할 바 없이 더 낫겠고.”
“네 딸 취향이잖아. 안 그래?”
“여섯 살짜릴 두고 못 지껄이는 소리가 없군.”
“네가 내 아들 앞에서 네 딸이 어떻게 구는지를 봤어야 해.”
칼이 흐뭇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라키엘이 서늘한 눈으로 콘라드를 응시했다. 콘라드가 흠칫 몸을 사렸다. 라키엘이 다시 칼을 바라보았다.
“로드리고.”
라키엘이 문득 칼을 정중하게 불렀다. 칼이 고개를 들었다.
“기억해.”
“뭘.”
“네 아들 출세는 네가 막았다는 거.”
라키엘이 입매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려 웃었다. 칼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 하겠지. 나랑은 달리 부지런한 아이거든.”
라키엘이 칼의 말에 콘라드를 힐끗 보았다.
“껍데기부터 신빙성이 없군.”
칼이 비식 웃으며 콘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콘라드가 라키엘의 눈치를 보며 칼 옆에 섰다.
그때 문이 열렸다. 비올레타가 미하일과 함께 다이닝룸으로 바쁘게 걸어오다 칼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칼.”
“폐하.”
칼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비올레타가 반가운 얼굴로 칼에게 다가가는 것을 라키엘이 심드렁하니 바라보았다. 아델라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든 채 라키엘의 어깨를 침으로 적시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콘라드!”
“폐하.”
“로드리고 공자님이 다 컸구나. 요즈음 미하일과 같이 이렌시아 고전을 공부한다고? 영특하기도 하지.”
“예, 이런 기회를 받아 영광스럽습니다.”
“네가 똑똑하니 미하일을 많이 도와주렴.”
“아직 한참 부족함이 많아 영민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후일 로드리고로서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설탕이 치덕치덕 발린 말은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어린 공자는 당장 황태자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고 겸손을 떨면서도 동시에 제가 미래에 쓸모 있는 존재인 것을 잊지 않고 피력했다. 비올레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하일에게만? 이 고모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을 테야?”
“다섯 살 때부터 늘 폐하를 보필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폐하께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언제나 송구스럽습니다.”
“어머, 벌써부터 이렇게 옳은 말만 하고.”
비올레타가 흐뭇하게 콘라드의 뺨을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키스했다. 콘라드가 청회색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배시시 붉혔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여제는, 어린 콘라드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물론 그 엄청난 평가에는 최고 권력의 후광이 절반 가까이 영향을 미쳤다.
“오늘은 황태자 전하와 포 레말라를 배웠는데, 다음에 들려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밤에 들려주렴. 저녁을 먹고.”
“예.”
비올레타가 흔쾌히 수락하자 콘라드는 더 붉어질 것도 없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라키엘이 불쾌한 듯 칼을 돌아보았다.
“저거 네 아들 맞나?”
미심쩍은 목소리에는 여러 가지 의혹이 담겨 있었다. 칼의 아들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강렬한 출세 욕구나 지나치게 성실한 삶의 태도부터, 비올레타 앞에서 저 수줍어하는 모양까지. 칼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좀 징그러워서.”
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비올레타가 곁눈질로 칼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델라를 안고 있던 라키엘에게로 걸어왔다.
“혼내지는 않았죠?”
“혼냈으면 이렇게 팔자 좋게 늘어져 있지도 않지.”
“아델라. 아델라?”
비올레타의 목소리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아델라가 고개를 들고 반색했다.
“어머니!”
“아델라, 이리 온.”
“무거워. 들 생각 하지 마.”
라키엘의 무심한 목소리에 아델라가 화들짝 놀라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제가 안겨 있던 게 라키엘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얼굴에 라키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머니, 어머니! 절 구해 주세요!”
아델라가 애절하게 버둥거렸다. 라키엘이 기가 찬 듯 아델라를 내려 보았다. 아델라의 다급한 마음이나 라키엘의 배신감을 알 리 없는 비올레타가 여유롭게 웃으며 물러났다.
“칼, 들었어요? 살려 달래.”
“살려 드려. 저렇게 절박하신데.”
칼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델라가 라키엘을 노려보며 외쳤다.
“절 이렇게 두지 마세요!”
비올레타가 테이블 곁에 서서 와인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대꾸했다.
“아델라, 아버지는 널 해치지 않아.”
“기가 찬다. 겨우 그렇게 말하나?”
“그럼 뭘 더 어떻게 해요? 그 좋던 평판 떨어트린 건 오로지 당신인걸. 당신 업보려니 하고 견뎌요.”
비올레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포도 한 알을 집어 미하일의 입에 넣어주었다. 포도를 삼킨 단정한 입매가 오물거리는 것을 비올레타가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말쑥하게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칼이나 선이 뚜렷한 귀족적인 이목구비가 곧장 제 아버지를 연상시키곤 했지만, 좀 더 부드럽고 얌전한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해가 바뀌면서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홀로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 어른스러운 얼굴을 손끝으로 살살 쓸며 비올레타가 다정하게 물었다.
“내 아들, 오늘 수업은 재밌었니?”
“네, 어머니. 콘라드와 함께 포 레말라를 배웠어요.”
“어렵지는 않고?”
“아직은요.”
“어머니는 어려웠는데.”
“그럼 저도 어려웠나 봐요. 아, 어머니, 오늘도 국정으로 수고 많으셨어요.”
칼이 이상한 표정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아델라를 내려놓고 작게 타이르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라키엘이 칼의 시선에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왜?”
“난 네 아들이야말로 볼 때마다 소름 끼쳐. 저게 대체 누굴 닮은 건데?”
“아버지, 황태자 전하께 무엄한 언동이세요.”
어려운 단어들을 급작스레 많이 배우기 시작한 나이답게 콘라드는 착실히 제 배움을 반영해 칼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방금 전은 황태자 전하를 욕한 게 아니라, 대공 전하를 욕한 거란다.”
라키엘이 칼을 비웃듯 코웃음을 치고는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매가 제 아들의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어른스러운 양 꼿꼿하게 서서 말하고는 있지만 제 어미와 똑같은 암녹색 눈이 잔뜩들떠서 반짝거린다.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우리한테서 제일 좋은 것들만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긴 아냐.”
아델라는 결국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반항을 포기하고 다시 라키엘에게 안겼다. 비올레타가 미하일을 의자에 앉히다 그것을 보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behind the scenes_The world passes ruthlessly again
-세상은 다시 자비 없이 흘러간다-
809년 봄의 62일, 브나리오의 루드비히 3세가 1황자 빌키어스에게 암살당한다. 5황녀 비올레타가 이복 오라비를 죽이고 그란토니아의 황제이자 루스빌과 칼마르의 왕으로, 또한 디스트의 제후이며 빌렌덴부르크의 공작으로 즉위한다.
809년 봄의 65일, 대관식이 있다.
809년 봄의 75일, 여제가 에델가르드 공과 혼인한다.
809년 겨울의 83일, 수도 헤젠 거리에서 롬바르디안의 폭동이 있다. 폭동으로 행인 15명이 사망한다. 폭동을 일으킨 젊은 몰락 귀족 청년들 중 주도자 3명이 처형된다.
810년 여름의 33일, 황태자 미하일 폰 그란토니안 모레 에델가르드가 태어난다.
810년 가을의 32일, 재무총국에서 황태자 탄생 100일을 기념하는 주화를 대량으로 발행한다.
810년 가을의 94일, 칙허 회사 플랑도르에서 약 38만 온스의 금을 추출한 위조 주화가 적발된다.
810년 겨울의 2일, 플랑도르 위조사건 이후 대공이 이끄는 대대적인 감사로 인해 9개의 칙허회사 중 플랑도르, 리스빌, 보르제가 적격하지 못한 것으로 여제의 칙령으로 칙허가 철회되고 공식 폐쇄된다.
810년 겨울의 48일, 여제가 방직산업을 적극 장려하는 칙령을 내린다. 산업이 남부 공장주에게 조세를 절반으로 절감해 주는 등 4가지의 특혜가 명시되었다.
811년 봄의 9일, 시데른의 대공이 죽고 토스카나 공이 대공위를 승계한다.
811년 봄의 47일, 시데른에서 제국과의 강화조약을 일방 파기한다.
811년 봄의 49일, 시데른이 볼레냐 성을 공격해 교전이 발발한다. 병사 174명이 전사하고 약 2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130명의 민간인 포로가 발생한다.
811년 봄의 81일, 30일간 크고 작은 교전이 이어지던 시데른과의 국경 블리싱겐에서 그란토니아가 국제적인 개전을 선언한다. 여제의 부군인 대공 라키엘 드 에델가르드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5만의 제국군이 출정한다.
811년 겨울의 13일, 토스카나 공이 항복한다.
811년 겨울의 17일, 블리싱겐에서 종전협상이 열린다.
811년 겨울의 21일, 블리싱겐 종전 조약이 체결된다. 아군은 987명이, 시데른 측에서는 약 5,300명이 전사한다. 시데른 공국 본토의 절반이 제국에 복속된다.
812년 여름의 79일, 펠로베르의 황제가 서거한다. 황태자의 독살설이 도는 가운데 황태자 드니히가 펠로베르의 황제로 즉위한다. 반 그란토니아 노선을 주창하던 황태자의 즉위로 추밀원에서 펠로베르에 대한 불안을 제기한다.
812년 여름의 84일, 여제가 펠로베르에 축하 사절을 보내는 것과 함께 베르됭 조약의 재확인을 요구한다.
812년 가을의 39일, 그란토니아-펠로베르간 9개의 상호 합의로 이루어진 새로운 평화 조약이 리스뷔르흐에서 체결된다.
813년 봄의 25일, 여제의 칙령으로 내무부가 폐지되고 26년 만에 부활한 재상부Chancellory로 편입된다. 내무 장관이었던 에델가르드 대공이 재상으로 집권하기 시작한다.
813년 겨울의 3일, 2황녀 아델라 드 그란토니안 모레 에델가르드가 태어난다.
814년 가을의 77일, 리오빌레네 해에 출몰한 이렌시아의 사략선privateer들과 제국 해군의 교전이 있다.
814년 가을의 79일, 여제가 클레이런스 후를 리오빌레네 총독으로 파견한다. 이후 리오벨레네 해에서 그란토니아의 선박을 약탈하던 사략선들이 클레이런스 후에 의해 대부분 진압된다.
814년 가을의 98일, 이렌시아에서 사략선을 이끌던 민간업자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대사를 보낸다.
814년 겨울의 1일, 대공이 거절을 알리는 대사를 이렌시아로 보낸다.
815년 봄의 31일, 45척의 배가 일라나 해에서 이렌시아에 나포된 것이 알려진다.
815년 이렌시아와의 통상을 금지하는 수출입 금지법이 추밀원에서 통과된다.
815년 가을의 78일, 여제의 칙령으로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국가적으로 8곳에 동시 설립된다.
816년 봄의 8일, 추밀원의 법률 제정 기준이 개정된다.
816년 가을의 19일, 밀니로에서 최초로 실용성이 증명된 증기기관차가 발명된 후 프레들랑과 몰바르디 사이에 최초로 공공철도가 개통된다.
816년 겨울의 1일, 수도와 제국 남부를 잇는 철도 건설을 추진하는 법안이 추밀원에서 통과된다.
817년 봄의 61일, 여제의 발의로 추밀원에 상정된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초등 교육법 제정이 통과된다.
817년 가을의 27일, 클라르 브라네로부터 시작되는 철도가 착공된다.
818년 봄의 83일, 이렌시아로부터 수출입 금지법의 해소를 요청하는 사절단이 도착한다.
818년 봄의 87일, 제국과 이렌시아간 통상 조약이 체결된다.
818년 겨울의 53일, 3황자 프리드리히 드 그란토니안 모레 에델가르드가 태어난다.
819년 가을의 46일, 클라르 브라네로부터 수도 근방 드레스덴에 이르는 철도가 완공된다.
819년 가을의 89일, 드레스던 역이 완공된다.
819년 겨울의 11일, 이렌시아에서 계승전쟁이 일어난다.
820년 가을의 29일, 시데른이 제국에 독립을 선언한다.
820년 가을의 30일, 시데른의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820년 가을의 57일, 클레이런스 후가 시데른의 알셀스타인 지역에서 전사한다.
820년 가을의 71일, 에델가르드 대공이 빌렘스트 전투에서 대승하며 독립전쟁을 종식한다.
820년 가을의 73일, 시데른의 영토가 제국에 완전히 복속된다.
821년 여름의 44일, 탄광이 발견된 안트베르펀 지역의 철도 경영권 분쟁으로 대규모 총격전이 일어난다.
821년 여름의 81일, 에른스트와 브란젤 간 영토분쟁으로 워너턴 전쟁이 발발한다.
821년 겨울의 16일, 귀족의 세금에 젠트리와 동일한 조세율을 매기는 법안이 추밀원에서 통과된다.
821년 겨울의 91일, 여제가 서른셋의 나이로 급작스레 서거했다.
821년 겨울의 92일, 황태자 미하일 드 그란토니안 모레 에델가르드가 열두 살의 나이로 그란토니아의 황제이자 루스빌과 칼마르의 왕으로, 또한 디스트의 제후이며 빌렌덴부르크의 공작으로 즉위한다.
821년 겨울의 94일, 여제의 부군이자 재상부의 수장인 대공 라키엘 드 에델가르드가 서른여덟의 나이로 섭정공의 지위에 오른다.
그것이 실상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대공이 여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온 수도를 떠돌았다.
825년, 봄.
“그 척식회사 새끼들에 관해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어.”
“그럼 그대로 진행합니까?”
“그래.”
부관에게 대강 짤막하게 대꾸한 라키엘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5층 복도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묵직하게 닫히자, 드높은 천장을 가득 메운 정적 사이로 제 발소리만 한적하게 울렸다. 라키엘은 무심한 눈으로 복도 중앙을 응시하며 걸었다.
집무실과 엘데르디움이 있는 공저의 5층은 에델가르드 공저를 전부 통틀어 가장 웅장한 복도를 가졌으나, 빛 하나 들지 않아 봄도 겨울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복도에 붙은 창문이라고는 오로지 바깥에서만 보이는 가짜 창문뿐이었다. 낮에도 환히 켜 놓은 등이나 음지 특유의 쌀쌀하고 습한 기운, 그리고 적막. 전부 라키엘의 평생 익숙한 것이었으나 결국 좋아하지는 못한 것들이었다.
언젠가 이 외로움을 동경했던 시절도 있었으리라.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그 어린 시절에는, 제아비의 손을 잡고 이 복도를 걸을 때마다 제가 주인으로서 걷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이 싸늘한 공기와 습하게 살을 스치는 기운과 오로지 홀로 남은 듯한 적막까지 오롯이 제 것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다 손에 쥐고 나서야 달콤한 맛이라고는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만. 사실 쥐고 돌아보니 정작 곁에 남은 것이 없기도 했다.
스물셋. 젊고 강퍅했던 청년은 그렇게 혼자가 되어 이 기다란 복도를 증오하며 걸었다. 좋아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혹은 다시 혼자가 아니게 된 순간부터.
라키엘은 제 어린 갈망이나 치졸한 젊음을 그저 건조하게 응시했다. 그는 굳이 제 밑바닥을 긁어내 자조하기엔 아직 너무 젊거나, 혹은 너무 나이 들었다. 그는 이제 마흔을 넘었다.
라키엘이 몇 개의 문을 지나 복도의 끝까지 걸었다. 그의 손이 프록코트 안으로 들어가 기다란 열쇠를 꺼냈다. 복도의 끝에는 다른 문들보다 작고 간소한 문이 있었다. 애초에 협실 용도로 쓰이던 방이었다. 라키엘은 익숙한 듯 열쇠로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싱싱한 라일락 향기가 지독하리만치 짙게 풍겼다. 라키엘은 마치 그 향기가 느껴지지도 않는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벼운 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뒤에서 닫혔다.
방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작은 창으로 지는 햇살이 들어왔다. 라키엘은 햇살이 닿은 곳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방 안은 온통 라일락이었다.
바닥 위에 수북이 산처럼 쌓인 것도, 테이블 위에 가득 올려져 있는 것도, 창가에 놓인 것도 모두 라일락이었다. 라키엘은 조금 시들기 시작한 작은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봄 중순이 지나서야 피어나는 연한 자주색 꽃은 아무리 계속 바꿔서 채워 넣어도 스무 날을 겨우 넘기곤 했다. 이제 라일락이 지고 있으니 올해는 다시 새로 갈아 넣을 수 없었다.
봄이 다시 지나고 있었다.
라키엘의 시선이 짙게 시든 꽃잎에서 조금 위로 움직였다. 액자를 가린 검은 벨벳천이 햇살을 비스듬히 받고 반질반질 윤기를 냈다. 라키엘이 천천히 천 끝을 잡아당겼다.
황제궁에 걸린 거대한 액자를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듯한 액자 속에는 준수한 흑마와 여자가 있었다.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과 푸른 잔디, 그리고 말 위의 여자.
말 위에 길게 엎드린 여자의 등 위로 탐스러운 머리칼이 그 날의 햇살에 붉게 타올랐다. 하얀 손끝은 여전히 말의 검은 목 위를 다정하게 쓸고 있고,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은 애정을 가득 담아 말을 응시했다. 마치 대화라도 나누는 양. 그림 속에서 희미하게 올라간 입매가 금방이라도 달싹일 것만 같았다. 라키엘. 죽은 짐승을 부르던 그 맑고 살가운 음성.
액자 앞에 덩그러니 선 라키엘의 시선이 그림 속을 부유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웃고 있는, 스무 살의, 이제는 세상에서 저만 아는 여자의 모습이 남아 있다. 라키엘은 초상화를 보며 저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을 절박하게 떠올리거나, 현실이라고 착각하거나, 혹은 정반대로 정말로 죽어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그리고 말을 내려 보는 여자의 눈이 저를 돌아보지 않음에 절망하고, 혹은 돌아보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이유를 알 수도 없이 라키엘은 그렇게 한참을 그림만 들여다보곤 했다. 여자가 죽고 없는 현실을 잊기 위해서인지, 혹은 죽은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인지 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오래 있기 싫어 의자 하나 놓아두지 않은 방이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늘 오래도록 방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죽어야 해요.’
사랑스럽고 끔찍한 목소리가 귓전을 서늘하게 울렸다. 1년 가까이 그 거대한 침실에서 죽어 가던 여자는 꽃이 시드는 것보다도 더 빨리 시들었다. 계승권을 가진 아이는 아직 어렸다. 여자는 불안과 기대 속에 몇 개의 계절을 보낸 후로, 제 병이 사라지리라 믿는 것을 어느 순간 포기했다. 아마도 제 스스로 방을 걸어 나가는 것조차 힘겨워졌을 때. 그즈음에.
그 대신 그녀는 초조해 하기 시작했다. 죽지 못해 초조했다.
‘나는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숨기는 것은 한 계가 있고, 당신의 아들은 아직 어려요.’
마치 미하일이 제가 낳은 아들이 아닌 것처럼 여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자는 제 투병이 오랠수록, 그리고 천천히 추락할수록 그 시간만큼 아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에 관하여 라키엘에게 지겹도록 말하곤 했다. 제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지만 부디 가능성이 없는 일에 매달리지는 말라고, 어느 날은 그렇게 경고하듯 날 선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서서히 죽어 가는 것보다 차라리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낫다. 아무도, 욕심낼 새도 없이 당신이 보란 듯이 전부 다 쥔다면.
‘그러니 이제 그만 날 죽여 줘요.’
초상화 속 여자가 말간 눈으로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스무 살의 여자는 금세 서른둘로 변해 애원하듯 라키엘의 팔에 매달렸다. 라키엘은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제발, 나를…….’
그게 우리에게 남은 최선이라고 이성적으로 되뇌던 여자는 서서히 애원하고 강요할 힘조차 잃어 갔다. 라키엘은 환각처럼 제가 그림 위로 흐릿하게 덧씌운 상을 지워 냈다.
사실은, 이제는…….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여자가 병에 걸린 후 처음으로 울며 말했다.
라키엘은 그림을 제 눈에 아로새기듯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제 손이 잔을 기울이고, 술이 그 입안으로 떨어지던 순간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게 낫다고, 이성적인 말 한마디 섞이지 않은 그 처절한 고통을 라키엘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그는 제 손으로 와인글라스에 독을 떨어트렸다. 세상은 틀리지 않았다. 제가 죽였다. 제 손으로 그 잔을 들고, 고개를 제 다리에 얹고, 잔을 기울였다. 나흘간 고통에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여자는 독에 취해 많은 말을 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아프기 전처럼 멀쩡했다.
‘사실은 계속, 생각했어요. 언젠가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붙잡고, 내 원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은 그 불안을 어느 순간인가 잊고, 진실보다 착각이 현실과 더 가깝고, 그러다 내가 가진 전부가 정말로, 처음부터 다 내 것이라고 느꼈을 때.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내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가진 모든 것이 처음부터 가짜란 증거고, 당신의 목에 죽을 때까지 겨눠진 칼이고, 그러니, 난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죽어야 한다고요. 필요한 만큼만 살기를, 사실은 그렇게 평생 상관없는 것을 바라듯, 영원히 살 것처럼 나는 바라고 있었어요. 내 바람보다 너무 빨리 찾아왔지만, 사실죽기에 적당한 때 같은 건 애초에 없잖아. 당신이 잃은 사람들이, 내가 잃은 사람들이 모두 그랬듯 말이에요. ’
……죽으면, 진짜가 될까.
파리한 얼굴 위로 기묘한 생기가 떠올랐다.
‘내가 죽으면 당신도, 내 아이들도 모두 진짜가 될 거예요.’
그리고 나도. 어쩌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라키엘은 결국 울었다. 비올레타는 천천히 손을 들어 라키엘의 뺨을 쓸었다. 사랑한다, 라키엘이 끊어지는 숨 위로 절박하게 읊었다. 비올레타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웃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나타나 그렇게 웃는다. 매일 아침, 매일 밤, 매 순간. 그녀는 결국 봄에 죽지 못했고, 방은 시체 없는 무덤이었다. 이미 지난 죽음에 봄을 만들어 주듯 라키엘은 매년 봄마다 그림 아래 라일락을 가득 채워 두었다.
꽃은 계속 시들었지만 라키엘은 계속 살아 있었다. 그 막막함이 생에 가득 차 있었다.
제 피와 제 살을 받은 이들조차 영영 알지 못할 이 죽음은 오로지 저만 알고 저만 기억하는 것이었다. 라키엘은 에비가일의 무덤에 서서 가만히 스무 살의 얼굴을 헤집었다. 언젠가 제 생이 끝나면, 이 죽음도 사라지리라. 저 모습이 제 기억 속에만 살아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살게 했다.
에비가일. 라키엘은 스무 번도 채 부르지 못한 이름을 입안으로 소리 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말 위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가 말 위로 손을 뻗었다. 낭창한 허리가 팔 안에 감기고, 무게가 제 위로 실린다. 땅 위에 내려선 여자는 겨울바람에 발개진 뺨으로 웃었다.
라키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인 벽 위에 걸린 액자가 황량했다. 라키엘은 바닥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았다.
봄이 다시 흘러간다. 이제 꽃을 치워야 했다. 그리고 얼마간 저는 이 방을 잊을 수 있으리라. 라키엘은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행복해요?‘
환청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라키엘은 다시 문을 잠갔다.
epilogue_Happily ever after
“나 결혼해야겠어.”
“그래.”
미하일은 보고서에 시선을 둔 채로 대수롭지 않게 아델라에게 대꾸했다. 아델라가 이 방에 들어온 후 말했던 총 열다섯 마디가량의 쓸모없는 수다에 그랬듯. 아델라가 들리지도 않는 새까만 정수리를 가만히 보며 의미심장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오라버니가 분명히 그래, 라고 했어.”
“그래, 네 맘대로 해.”
미하일은 여전히 으레 그렇듯 여상하게 대꾸했다. 아델라가 저를 보지도 않는 미하일을 향해 우아하게 예를 취하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집무실을 총총 걸어 나섰다. 종알종알 떠들던 아델라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집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미하일은 그 만족스러운 정적 속에 종이를 한 장 뒤로 넘겼다.
“나 결혼해야겠어.”
문득 미하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미하일은 제 귓전을 존재감 없이 스치던 아델라의 목소리를 불현듯 떠올렸다. 그가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델라!”
흡사 고함에 가까운 부름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에 시립해 있던 젊은 황제의 시종들이 흠칫 놀라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그들의 가운데 서서, 어느덧 복도 끝으로 빠르게 사라져 가는 제 누이를 응시했다. 일부러 던지고 도망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하일은 가늘어진 눈으로 아델라를 노려보다 턱으로 가리켰다.
이내 아델라는 시종들에게 포위된 채로 다시 순순히 미하일의 앞에 돌아왔다. 낭패라는 듯한 표정에 기가 막혔다. 미하일이 다시 아델라를 제 집무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아, 자연스러웠는데…….”
“어디서 감히 수작이야?”
미하일은 으르듯 아델라에게 말했다. 어릴 적의 그 선한 얼굴이라곤 도무지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다. 아델라가 피식 웃었다.
“넘어갈 뻔했으면서?”
미하일의 위협은 아델라의 사근사근한 말 한마디에 곧장 풀렸다. 미하일이 한숨처럼 말했다.
“어차피 내게 말해 봤자 소용 없어.”
“저번에도 말했잖아. 또 말하지 않아도 돼.”
“너도 그래. 더 말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네가 내 말을 조금만 더 새겨듣는다면 지금은 그 누구에게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도 말해 주고 싶고.”
아델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황제 폐하 주제에.”
“그 이전에 난 아버지 아들이지. 그리고 넌 겨우 열여섯이고.”
“오라버니도 열여섯에 결혼했잖아.”
“너와 난 경우가 달라.”
“이건 아들딸 차별이야.”
미하일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델라가 흔히 쓰는 비약이었다. 주로 라키엘의 얼굴에 들이밀곤 하던.
“언제나 네게 더 좋은 차별이지. 아버진 널 더 좋아하시잖아.”
미하일은 이제 달래듯 아델라의 어깨를 쓸었다. 일단은 이 사태가 다시 라키엘 앞에 상정되는 일이 없도록 말려야 했다. 게다가 제가 그래, 하고 대답해 준 것까지 생각한다면?.
아델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콘라드랑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열여섯 되도 록…….”
“더 기다려. 아버지도 콘라드를 그렇게 싫어하진 않으셔.”
순 거짓말이었으나 아델라는 애초에 콘라드가 자격을 심사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미하일의 말에 입술을 조금 삐죽이고는 미하일을 지나쳐 소파에 풀썩 앉았다.
“이러다 콘라드를 놓치면 어떡해.”
“불안해 해야 하는 건 로드리고 공자지. 네가 아니라.”
벌써 기사 서품도 받았고 서기관 배지까지 달고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 공자라는 호칭은 그를 비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델라는 제 오라비의 아주 자그마한 악의를 눈치채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너무 잘났단 말이야.”
아델라는 소파에 얼굴을 비비며 발을 허공에 차 댔다. 이럴 때면 열여섯이란 그 나이가 무색하게도 여섯 살 때 하던 짓이 그대로 튀어나오곤 했다.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온종일 우아 떠느라 바쁜 그 모습을 생각하면 그다지 나무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라키엘이나 미하일 앞에서나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연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그 주제가 결혼이었을 뿐이었다. 미하일은 아델라가 몸부림치는 것을 내심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도, 저도, 모두가 변한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 하나만.
“넌 내 동생이야. 그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황송해 해야 해.”
미하일이 낮게 속삭이며 아델라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고는 몸을 돌렸다.
“이러다간 다른 계집들이 채 갈 거야.”
“장담하건대 널 채 가고 싶어 하는 사내들이 더 많을걸.”
“콘라드가 아니면 날 누가 데려가. 아버지가 내 옆의 사내는 다 죽이려고 드는데? 그 모든 핍박을 버틸 수 있는 건 콘라드뿐이야.”
“그건…….”
사실 아델라가 데려오는 것이 일단 콘라드만 아니어도 라키엘의 반감이 절반은 줄어들 테지만, 미하일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더불어 아델라가 콘라드를 내버리지 않는 이상, 그가 절대로 그녀를 마다할 리는 없다는 것도. 아델라는 그란토니아의 미혼 여성 중 가장 고귀했고,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권력 지향적이었던 로드리고의 공자는 그 동기 하나만으로도 맹목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가 자신들의 어머니 여제를 거의 숭배에 가깝게 동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계산과 순수가 공존할 수 있다는 건 참 희한한 일이었다. 미하일이 콘라드를 괘씸해 하면서도 결국 아델라의 곁에 두고 마는 것은 그 계산적으로 시작된 사랑이 결과적으로는 어떤 순수한 동기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폐하, 로드리고 경입니다.”
“제 얘기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델라가 반색하는 것을 보며 미하일이 짧게 혀를 찼다.
“들어오라고 해요.”
미하일이 그렇게 시큰둥하거나 말거나, 아델라는 집무실이 제 방인 양 시종에게 상냥하게 외쳤다. 이윽고 콘라드가 열린 문 사이로 예의 바르게 들어섰다.
“폐하.”
콘라드가 미하일에게 예를 취하느라 저를 보지 않는 그 짧은 순간조차 답답한 듯, 아델라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황녀 전하.”
저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델라가 자석처럼 끌려갔다. 미하일은 혀를 차며 뒤로 몸을 기댔다.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은 열여덟 살의 미려한 공자는 미하일이 보기에도 퍽 조각 같은 생김새였다. 아델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취향이 확고했다. 그리고 그 고급스러운 취향에 콘라드보다 더 부합하는 사내는 분명 없었다. 사실 미하일이 콘라드의 취향을 괘씸하다 여기기엔 제 누이의 동기부터가 불순했다. 그리고 미하일은 그것을 잘 알았다.
미하일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아델라의 소매 끝에 붙은 먼지 따위를 세심하게 떼어 주고 있던 콘라드가 미하일의 시선에 그런 적 없다는 양손을 깔끔하게 뗐다.
“무슨 일로?”
“송구스러운 말씀이나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시던 차, 복도 중앙에서 시종들에게 갑자기 겁박되어 다시 끌려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진심으로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미하일은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짐이? 누이를?”
“역시나 전하께선 이렇듯 무사하시고, 사실 폐하야말로 누구보다 누이를 아끼시니 외람된 염려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게 불과 몇 분 전이라고 경이 아는 걸까.”
“전정에 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꼬박꼬박 예의 바르게 돌아오는 말이 묘하게 더 신경을 긁었다. 미하일이 내색 없이 웃었다.
“짐이 진짜로 그랬으면?”
“…….”
“정말로 짐이, 황녀를 겁박해 끌고 왔다면.”
“폐하.”
아델라가 양순한 척 살벌한 눈으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델라가 애초에 그리 끌려올 만한 계집도 아닌 것을 콘라드는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다만 콘라드는 이것이 제 충성에 대한 시험이거나, 황녀에 대한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거나, 혹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콘라드가 마른 입술을 축이다 이내 웃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황녀 전하께서는 폐하께 반기를 드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제가 감히 폐하께 역심을 품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실 테고, 저 역시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폐하는 세상 모든 것의 존재보다 앞서 계십니다.”
마치 미리 짠 듯이 줄줄 쏟아지는 말에 미하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황녀의 충성심부터 은근슬쩍 앞에 내세워 저는 일단 곤란한 것을 피해 가고, 동시에 아델라는 띄워 줌으로써 아델라도 방심시켰다. 사실 무사히 출세하는 것과 권력이 지상 목적인 콘라드로서는 감히 황제 앞에서 ‘역심’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것만으로도 아델라에 대한 마음의 전부를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하일은 나름대로 그 단어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 단어가 불가능한 이유로 ‘아델라가 원치 않아서’를 갖다 붙인 것은 콘라드가 얼마나 성실하게 약은 놈인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황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감히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될 테지만, 황녀께서 원하지 않으니 하지 않겠다.
요약을 다시 한 번 더 요약하자면 결국 저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모르고 아델라가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미하일이 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더 들을 필요도 없었으므로 미하일은 이제 콘라드의 그 성실한 입이 닫히길 바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둘의 애절한 치정극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제가 전하께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콘라드…….”
“전하보다 제가 먼저 죽으리란 겁니다.”
그 나직한 한마디에 감격한 아델라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콘라드를 부르며 안겼다. 제 말에 한 치의 맹점도 용납하지 않는 놈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고는, 그 불완전함을 죽겠다는 말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또한 역심이라는 단어가 불러올지 모르는 의혹을, 죽어도 반역은 없다는 말로 찍어 누른 것이기도 했다.
콘라드는 정말이지 쓸모없이 철저했다. 어차피 미하일이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콘라드는 그가 매일같이 보던 얼굴이었다. 그들은 비록 육촌 간이지만 비올레타나 라키엘 모두 형제가 달리 없었던 탓에 가족을 제하면 가장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설령 콘라드가 그를 죽이겠다고 말한들 미하일은 그러려니 넘겼으리라.
“오라버니, 정말 너무하세요.”
상황에 심취한 아델라가 가련하게 항의했다. 소파에 드러누워 허공에 발길질이나 할 땐 언제고, 콘라드의 앞이라고 또 가증스럽게 저 꼴이었다. 미하일은 심드렁하니 턱을 괸 채로 손을 대충 휘저었다. 나가란 뜻이었다.
“폐하께서 아무리 반대하셔도 저는, 콘라드는!”
콘라드에게 끌려 나가듯 방을 나서며 아델라는 열연했다. 정작 미하일이 콘라드 자체를 그리 반대한 적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억울할 정도였지만 미하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콘라드의 인사를 눈으로 대강 받으며 다시 서류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보던 것은 그대로인데 급격히 피곤해진 기분에 미하일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직은 한낮이었고, 쉴 때가 아니었다. 미하일은 억지로 다시 글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종이 한 장을 겨우 다시 넘겼을 때였다.
“폐하.”
겨우 조용해진 지 불과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다시 시종의 목소리가 문을 타고 울렸다. 미하일이 눈가를 설핏 찡그렸다.
“황후 폐하십니다.”
미하일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책상에서 일어나 문가로 조용히 걸어갔다. 어느덧 그의 얼굴엔 짜증의 흔적조차 없었다. 조금 날이 서 있던 인상이 거짓말처럼 허물어졌다. 미하일은 문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했다.
“드시라고 해.”
문이 열렸다.
천천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던 여자가 정작 책상에 미하일이 보이지 않자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왼편에 서 있던 미하일이 뒤에서 낚아채듯 그녀를 당겨 안았다. 문이 닫혔다.
“리빌레테.”
“폐하!”
리빌레테 메이어, 올해로 스물이 된 메이어가의 장녀였다. 더불어 황제의 단 하나뿐인 정비이기도 했다.
그녀는 열일곱, 유학에서 돌아온 지 고작 스무 날도 지나지 않아 황제와 결혼했다. 애초에 유학이 그 결혼을 마다하기 위한 것이었던 게 무색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미하일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그녀의 유학을 허락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가 돌아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잡아챘다. 소꿉친구랍시고 그가 마냥 제 의사를 존중해 주리라 방심하고 있었던 리빌레테는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황후의 홀을 안았다. 그녀는 제 아비의 뜻대로 순순히 살아오던 미하일이 평생 처음으로 욕심낸 것이었다.
사실 그가 굳이 안달 내지 않아도 그들은 당연히 그리됐을 것이다. 그와 그녀의 결합은 그리 대수로울 일이 아니었다. 에델가르드와 메이어의 오랜 친선이나, 어머니 간의 각별한 우정을 생각한다면.
리빌레테의 어머니이자 미하일의 대모이기도 한 여백작 밀로일라 메이어는 미하일에게 무엇 하나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리빌레테가 그것을 거스를 정도로 미하일을 싫어한 적이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미하일을 좋아했다. 다만 미하일의 곁에 있음으로써 제가 잃을 것들을 꺼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정도로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하일은 언제나 그 미지근한 마음에 안달하곤 했다.
심지어 아직도 여전히.
“놀랐잖아요.”
리빌레테가 부드럽게 미하일을 밀어내며 웃었다. 미하일은 그녀를 다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기어이 관자놀이며 암갈색 머리칼 위에 입을 몇 번이나 맞춘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리빌레테가 작게 웃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황녀께선 안 계시네요.”
“황녀는 왜?”
“분명히 이 시간쯤 와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델라가 제 방패막이 정도로 불러 둔 것이 분명했다. 미하일이 조금 실망한 듯 비식 웃었다.
“짐이 보고 싶어 온 것도 아니군.”
리빌레테가 조금 놀란 얼굴로 미하일을 껴안았다.
“당연히 보고 싶었죠.”
“그리 기다렸는데, 열흘 만에 온 것이 아델라 때문에.”
“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폐하는 바쁘시니까.”
“그래.”
“그리고, 우린 매일 밤 만나잖아요.”
리빌레테가 미하일을 달래듯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하일의 손이 리빌레테의 허리를 느릿하게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등을 단단하게 받치듯 제게로 당겼다. 입매에 옅게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진해졌다.
아델라가 괜히 콘라드 앞에만 서면 그런 가증을 떨어 대는 것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제가 아델라에게 기실 뭐라 할 처지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저를 닮았으니까.
“황녀께선 뭐라고 하세요?”
“그냥, 별 말도 안 되는 말. 결혼하고 싶다고.”
“안 되나요?”
리빌레테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미하일이 리빌레테의 머리 위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 앤 겨우 열여섯이야.”
“폐하도 열여섯에 결혼했어요.”
아델라와 똑같은 말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미하일이 짧게 웃었다.
“그댄 열일곱이었잖아. 그것조차 일렀지.”
“그걸 잘 알면서 그랬어요? 난 심지어 스물둘까지는 결혼 생각조차 않을 생각이었어요.”
“알아. 미안해.”
미하일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부드럽게 웃으며 사과했다. 리빌레테가 미하일의 품 안에 갇힌 채로 그의 목울대를 부루퉁하게 노려보았다.
“그런 나를 열일곱에 혼인시켰으니, 당신은 할 말 없어요. 황녀는 심지어 스스로 원하시고요.”
“원하지도 않는 그대도 이르게 혼인시켰으니, 원하는 그 아이는 원하는 대로 하게 두라고?”
“정확하네요.”
미하일이 부러 하는 말에도 리빌레테는 달리 부정하지 않고 반듯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미하일은 별말 없이 그녀를 떼어 냈다.
“삐쳤죠. 미하일.”
열넷, 그리고 열다섯. 그 어린 시절처럼 리빌레테가 장난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이 조금 허탈한 듯 웃었다.
“넌 날 항상 갖고 놀아.”
“감히 그럴 리가 없잖아요. 폐하라도 그 문제에 관해 좀 너그러워지시란 말이에요. 황녀도 힘드실 테니까.”
“난 더없이 너그러워. 그놈에게.”
“당신의 생각만큼은 아닐 거예요.”
리빌레테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미하일의 크라바트를 끌어당겼다. 결코 넘어가선 안 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서걱서걱, 펜 끝이 질 좋은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콘라드는 기다란 깃펜이 책상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재상부의 고고한 위세를 나타내듯 대공의 집무실은 간결하지만 웅장했다. 콘라드의 시선이 콘솔 위에 놓인 고풍스러운 촛대며 마호가니 나무로 조각된 벽 따위를 훑다가 이윽고 벽에 걸린 액자에 멈추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액자 속 그림은 모작이었다.
이제는 황제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그 거대한 액자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819년 가을, 그리고 지금은 828년 여름. 콘라드는 가만히 그림 속 여제 부처와 3명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그림처럼 우아하게 앉은 여제와 그 품 안의 막내아들, 그 옆에 손을 잡고 선 열 살의 황태자와 일곱 살의 황녀, 발치의 검은 개, 그리고 그들의 뒤를 지키듯 서 있는 남자.
콘라드는 제가 이 방에 들어선 지 30분이 넘도록 저를 아는 체도 하지 않는 대공을 다시 조심스레 응시했다. 긴장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던 청회색 눈이 차분하게 관찰에 가까워졌다. 그림 속 여제가 어린 그의 권력 지향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의 이상 그 자체였다. 정작 콘라드가 대공에게 받아 온 것이라고는 푸대접뿐이었으나, 콘라드는 언제나 대공을 존경했다.
그는 섭정공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재상부와 추밀원의 수장이었고, 위정자爲政者들의 정점에 선 남자였다. 제 어린 동경과 갈망, 이상을 모두 한데 그러모아 만든 것만 같은 완벽한 사내.
불현듯 눈이 마주쳤다. 라키엘은 콘라드가 방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관찰하던 시선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라키엘은 펜을 책상 위로 소리 없이 놓았다.
“로드리고 경.”
“전하.”
콘라드가 다시 예의 바르게 눈을 들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이가 보이지 않는 우아한 얼굴 위로 포식자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떠올랐다. 콘라드는 그 시선을 머릿속에 성실하게 새겼다. 제 아버지에게서는 도무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별 여지도 없는 꿈을 꾸고 있다고?”
라키엘은 그답지 않게 콘라드에게 퍽 친절한 말투로 물었지만, 내용은 불친절했다. 콘라드는 내색 없이 웃었다.
“당장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후일도 안 돼.”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글쎄.”
라키엘은 성의 없이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콘라드는 급히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황녀야 낭만에 빠져 있을 나이지. 헌데 경도 그런가?”
“…….”
“기사 서품도 받았고, 궁내부에 놓인 경의 책상도 있고. 같이 손잡고 꿈꿀 나이도 지난 것 같고.”
“아직 열여덟이긴 합니다.”
“기껏 어른 대접해 줬더니 걷어차는군.”
어차피 어떤 대답을 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제가 어른이라고 대꾸했다면 나잇값도 못하고 망상에 젖어 있는 놈이 되었을 테니까.
“경 말대로 경은 아직 어리지. 아직 불완전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경의 결정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겠나?”
“결정이라 말씀하시니 송구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바라고, 대공 전하의 결정을 기다릴 뿐입니다. 다만 그것이 저 혼자만의 과욕은 아닙니다.”
“지금 경이 겨냥한 것이 내 딸인가?”
“제 의사는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황녀 전하의 뜻은 존중해 주십시오.”
라키엘의 눈길이 콘라드의 옅은 백금발로부터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볍게 훑었다. 장성하고 나서는 아예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그 한량 같은 얼굴로 저렇게 건실한 태도인 것부터가 반칙이나 다름없다. 라키엘은 아니꼽게 보던 시선을 내려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콘라드에게 손짓했다. 콘라드가 라키엘에게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라키엘이 책상 위로 꺼내 둔 것은 손바닥보다 좀 더 큰 크기의, 젊은 여인들의 초상화였다. 콘라드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루도비카, 펠론, 코르제.”
“…….”
“경은 여제께서 특별히 아꼈던 아이지. 난 경을 그다지 각별히 여기진 않았지만 경이 얼마나 중요한 인재인지는 인지하고 있고, 충분한 성의를 보일생각도 있어. 경은 폐하의 십 년 후, 이십 년 후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사람이지.”
“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 기쁩니다. 그러나…….”
“욕심은 적당할 때 좋지. 인생을 적당히 더 좋게 만들어 주니까. 그리고 경의 인생을 적당히 행복하게 만들어 줄 계집들은 바로 여기에 있고.”
콘라드는 입을 다문 채로 말이 없었다.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싫은가?”
콘라드가 초상화들과 거리를 두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젠 고귀한 황녀가 아니고선 눈에 차지도 않나?”
“감히 황녀 전하를 뭇 영애들과 동일 선상에 둘 계제는 못 됩니다.”
아델라를 어찌 여자로서 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라키엘이 혀를 찼다. 착실하게 약삭빠른 이상한 종자였다. 콘라드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유를 다시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가 싫다.”
지나치게 간단한 이유였다. 얼추 예상은 했어도 면전에서 직접적으로 듣기는 처음이라 콘라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라키엘은 성가신 듯 대강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딸의 곁에 있는 게 싫다. 그게 이유다.”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떨어져 나가 준다면 좋을 것 같아.”
라키엘이 가볍게 대꾸하고는 콘솔로 걸어갔다. 콘라드가 그 뒤를 쫓았다.
“떨어져 나가는 것 말고, 붙어 있기 위해서는 어찌하면 됩니까?”
“그 자체가 싫은 것이니 네가 더 애쓸 필요는 없지.”
“원하시는 것을 하겠습니다.”
“그럼 떨어져.”
“그것 말고 바라시는 것을 하겠습니다. 싫으신 것은 바꾸겠습니다.”
“네 생긴 것이 싫다.”
“…….”
“그러니 그 번드르르한 껍데기라도 바꿔 오든지.”
“제가 잘생긴 것이 문제입니까?”
공손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전혀 겸손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런 걸 보자면 제 아비와 알맹이가 전혀 안 닮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라키엘이 조금 소리 내 웃으며 글라스를 들었다.
“사람 웃길 줄도 아는군.”
“살을 찌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돼. 경도 귀한 몸이야. 누릴 것 다 누리고 살겠지.”
“저는 아델라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콘라드가 아델라, 하고 그 이름을 직접 발음하자 라키엘의 눈가가 묘하게 씰룩거렸다. 시종일관 조심스럽던 청년의 말투는 조금씩 과감해졌다.
“이렇게 말이 계속 안 통하면 내가 경에게 실망하게 돼.”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는 실망시켜 드릴 일이 없으리라 자신합니다.”
“이번엔 실망시키겠다는 말이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아비와 의절이라도 하겠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까?”
콘라드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되물었다. 왠지 제 아버지가 마음에 안 찰 만하다는 듯 납득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진짜 이유와는 하등 상관도 없겠지만 라키엘은 굳이 그것을 시정해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네 아비랑 사돈 같은 것 맺고 싶지 않아.”
“아버지는 간절히 원하시니 전하께서 많은 요구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콘라드가 매끄럽게 대꾸했다. 라키엘이 묘한 얼굴로 웃었다.
“후가 효자를 낳았군.”
“아델라와 결혼한다면, 저는 대공의 효자가 될 겁니다.”
라키엘은 그제야 저 껍데기 말고도 계속 제 속을 거슬리게 했던 무언가를 깨달았다. 비단 아델라와 함께 있는 콘라드가, 젊은 시절의 비올레타와 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러니 저를 좀 더 확실한 폐하의 사람으로 만드십시오.”
어쩌면 일종의 동족 혐오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라키엘은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단조로운 걸음 소리가 층계 위로 길게 이어졌다. 이제 막 공저에 돌아온 라키엘은 피곤한 얼굴로 4층에 멈춰 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두 개의 문을 지나, 세 번째 방에 들어섰다.
새하얀 방, 라키엘의 눈은 금세 이질적인 존재를 찾아냈다. 아래로 길게 늘어트린 곱슬곱슬한 적갈색 머리칼을 발견한 눈이 조금 시렸다. 제 딸 아델라. 스무 해도 더 전에는, 아델라가 아닌 그녀의 어미가 저렇게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같은 방, 같은 창가. 라키엘은 가만히 그 시간을 헤아리듯 제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미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델라.”
창가에 서 있던 아델라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아버지.”
“어차피 며칠 후면 볼 것인데, 궁에서 왜 나와.”
“오늘 조찬도 오지 않으셨잖아요. 기다렸는데.”
아델라가 입술을 조금 삐죽이며 밉지 않게 그를 탓했다. 라키엘이 소파에 풀썩 앉았다.
“네가 날 기다릴 이유가 훤히 보이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오지 않으신 건 아니죠?”
“네 얼굴에 대고 싫은 소리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니 네 예쁜 얼굴을 보는 게 낫겠지. 바빴어.”
조금 부루퉁해지던 얼굴이 예쁘다는 말에 다시 펴졌다. 아델라가 라키엘의 곁으로 걸어와 앉았다.
라키엘이 턱을 괸 채로 시선만 돌려 아델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델라가 방긋방긋 웃었다. 라키엘이 미심쩍은 듯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을 일이 있나 본데.”
“이젠 괜찮아요.”
“뭐가?”
“오라버니가 허락했거든요.”
“뭘?”
“폐하께서 콘라드와의 결혼, 허락하셨어요. 확언으로.”
라키엘이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아델라가 순간 멈칫했다가 위축되지 않으려는 듯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아버지 허락 같은 건 안 기다릴 거예요. 애원도 않을 거고……. 아버지가 반대하든 말든, 오라버니가 실상 가장이잖아요.”
“네가 내게 애원을 몇 분이나 했다고? 누가 들으면 백 일은 내가 고사한 줄 알겠다. 네가 노력한 거라곤 내 집무실 소파에 드러누워 허공에 발길질이나 몇 번 하던 게 전부야.”
“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어요!”
“그래서 아비를 네 혼사에서 밀어내?”
아델라는 순식간에 울상이 됐다.
라키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성미는 그를 닮은 것이었으니 라키엘로서는 그리 대수로울 일도 아니었다. 미하일에게서 허락을 얻어 낸 순간부터 그녀는 라키엘에게 보란 듯이 일방 통보할 생각이었으리라. 결국은 이런 것을 꺼리고 말지만. 혹시나 제 아비에게 상처라도 입힐까 싶었는지, 금세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러니 괘씸하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허락할까 했는데.”
“…….”
“로드리고 놈이 낮에 다녀갔거든.”
아델라가 눈만 겨우 깜빡이다, 이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라키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 진짜예요?”
“그래.”
“맙소사, 진짜 허락하실 거란 말이에요?”
“그래. 그러려고 했지.”
라키엘이 아델라를 다정하게 마주 안아 주며 속삭였다.
“그런데 내 딸이 너무 괘씸해서 들어주기가 싫어졌어.”
아델라가 라키엘의 품에서 그대로 밀려나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네 앞에.”
라키엘이 비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내 허락은 필요도 없고.”
아델라는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별 소득도 없이 미하일과 제 입장만 난처해진 상황이었다. 그 짧은 기다림조차 참지 못하고 라키엘의 권한을 뒤로 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차라리 라키엘이 계속 반대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나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굳이 바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델라에겐 라키엘의 허락이 제일 중요했다. 아델라가 웃었다.
“아버지가 허락하면 누구의 말도 필요 없어요.”
라키엘은 애초에 더 괴롭힐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제 딸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헤집었다.
“하지만 생각은 더 해. 시간을 들여서.”
“이미 충분히 했어요. 콘라드는 완벽해요.”
“그래, 제법 똑똑하고, 처신 잘하고. 네가 좋아할 만한 껍데기도 가졌고.”
“세상에, 아버지 지금 콘라드를 칭찬한 거예요?”
“평가한 거지.”
“콘라드가 이걸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라키엘의 냉담한 목소리에도 아델라가 감격에 젖어 중얼거렸다. 라키엘이 조금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퍽 욕심이 많은 놈이야.”
“욕심 없는 사람이 더 싫어요.”
“갖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놈이고.”
“그건 좋은 것 아니에요?”
“별로.”
라키엘은 물끄러미 벽면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아델라가 태어나기 전에 그려진, 비올레타와 어린 미하일의 초상화였다. 미하일을 안고 있는 여자는 겨우 스물하고도 서넛. 아델라가 공저에 들이닥치지 않으면 굳이 들여다볼 일이 없는 방이라, 그가 저 그림을 본 지도 벌써 제법 오래되었다.
아델라는 이 방을 좋아했다. 제 어미가 고작 수십 일 쓴 적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욕심이 많은 놈은 결국 제 주위를 괴롭히거든.”
라키엘이 뇌까리듯 낮게 말했다. 아델라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콘라드는 자수성가할 거예요.”
“로드리고 다 물려받을 장자가 자수성가는 무슨.”
“그러니까, 혼자서도 알아서 잘할 사람이란 말이에요.”
“세상이 그리 돌아가지는 않을 거다.”
“아버지는 너무 비관적이야.”
“아델라.”
묘하게 무게가 실린 음성에 아델라가 말없이 눈을 들었다. 라키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벽에 걸린 초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콘라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놈이 네 아비 같은 종자기 때문이다.”
“…….”
“네 생각처럼 마냥 번드르르한 귀공자가 아니라.”
욕심이 많은 놈은 결국 제 주위를 괴롭히거든. 세상이, 그리 돌아가지 않으니까.
아델라는 그제야 라키엘이 그 스스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라키엘은 그렇게 자조하듯 말하고 피식 웃었다. 아델라를 다시 내려다보는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애정과, 가볍고 온화한 감정들.
“넌 그놈이랑 혼인하면 분명 네 어머니처럼 고생하며 살 거다.”
장난스럽기까지 한 다정한 말투였다. 아델라는 라키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금세 흔적조차 남지 않은, 참담한 회한을 찾듯.
“어머니처럼 살면 좋지 않아요?”
문득 아델라가 툭 내뱉었다.
“어머니는 행복하게 살았잖아요.”
라키엘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듯 조금 멍하니 아델라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들어 벽면의 액자를 바라보았다. 아델라도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고요였다.
그림 속 여자와 아이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영원히, 시간이 그렇게 멈춘 것처럼. 다이닝룸, 어머니의 침대, 아버지의 집무실 소파, 미하일의 정원, 아델라의 피아노, 프리드리히의 작은 요람……. 그 행복한 장소들도, 영원히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행복했어요.”
제 입안에 아로새기듯 천천히 되뇐 아델라가 몸을 일으켜 제 아버지를 안았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커다란 손이 버릇처럼 제 딸의 등을 받쳐 주었다. 아델라가 작게 웃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어요. 그래서 그가 좋은 것 같아요.”
“……그새 아첨이 늘었구나. 그래도 이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라키엘이 여상하게 대꾸하며 아델라를 떼어 냈다.
아델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제 어미를 닮은 얼굴이 정말로 울어 버리기 전에 라키엘은 이마에 짧게 입 맞춰 주었다.
‘행복해요?’
오래된 기억들을 헤집고 여자가 다시 물었다. 그는 어쩌면 이제 대답할 수도 있었다.
네가 행복했다면, 나도 행복할 수 있다고.
여자가 남긴 모든 것이 제게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복한 생조차, 여기에 모두 남아 있었다. 여전히.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하리라.
809년 봄의 65일.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쳤다. 비올레타는 시녀들을 물리고 방에 홀로 남았다. 방 안은 대관식에 쓰일 물건들로 온통 어수선했으나 공허할 정도로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제 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비올레타는 방 한가운데 서서 곳곳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제 것이라 느끼는 수많은 것들이 가득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을지언정 어쩔 수 없는 사소한 애정은 묻어났다.
꼼꼼히 방 안을 훑은 그녀는 이윽고 가장 밝은 불을 껐다. 중앙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잘 보였다. 창밖이 근위병들의 횃불로 낮처럼 밝았기 때문이다.
달칵, 고하는 소리도 없이 문이 조용히 열렸다. 비올레타는 돌아보지 않았다. 들어온 이도 말이 없었다. 그저 규칙적인 걸음 소리만 그녀와 가까워졌다. 비올레타가 그것을 돌아보려는 찰나, 기다란 팔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기묘한 안도감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비올레타는 그제야 제가 불안해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드레스는 입어 봤어?”
“잘 맞았어요.”
“보고 싶었는데.”
“다시 입어요?”
“됐어. 예쁘겠지.”
라키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비올레타의 옆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에게 안긴 채로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밤 아래로 불빛들이 일렁였다. 차분한 불안이었다.
“별문제는 없어요?”
“아직은.”
여지를 두는 말과 달리 라키엘의 말투는 명료했다. 비올레타가 라키엘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가 뒤돌았다.
“나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요?”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평생 걸어 온 대로만 걸어.”
“아무래도 연습할까 봐. 봐 줘요.”
비올레타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조금 들었다. 일순 표정이 변했다. 라키엘은 감상하듯 그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다 비올레타를 방의 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는 듯 어깨를 꾹 눌러 준 뒤, 소파로 가 묵직한 망토를 가져왔다.
어스름한 불빛에 반질반질 윤이 나는 붉은 벨벳 아래로, 안쪽에 두툼하게 대어진 새하얀 담비 털가죽이 어른거렸다. 라키엘은 비올레타의 뒤로 손을 뻗어 네글리제 차림인 그녀에게 망토를 걸쳐 주었다. 여상한 손길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마저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 만큼. 라키엘은 이윽고 망토 위에 놓여 있었던 관冠도 들고 왔다. 느슨하게 땋은 머리 위로 로드리고의 황금으로 둘러싼 붉은 벨벳 모자가 씌워졌다. 모자 위로 장식된 진주와 보석들이 호화로운 빛을 냈다.
블라디모로에 들어설 때 걸칠 망토가 거의 여덟 걸음 가까이 뒤로 길게 늘어지는 것과는 달리, 궁을 나서며 걸치고 있을 망토는 그녀 혼자서도 걸을 수 있게 했다. 라키엘은 뒤로 멀리 물러나, 그녀가 앞으로 우아하게 한 걸음 내딛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올레타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걸었다. 마치 단 한 번 걸어볼 기회를 얻은 것처럼. 무거운 망토속에서 상아색 네글리제가 나풀거리고, 가느다란 발목이 네글리제 아래로 조금씩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라키엘의 집요한 시선이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머릿속에 새기듯 그녀를 좇았다. 이내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라키엘이 비스듬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과장된 우아함으로 한쪽 무릎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폐하.”
비올레타가 고고하게 손끝을 들어 라키엘의 손바닥 위에 댔다. 그 순간 아귀를 벌리고 있던 악어가 먹이를 집어삼키듯 그녀가 아래로 끌려왔다. 입술이 깊게 맞부딪쳤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라키엘이 비올레타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입안에 잠시 머물던 뜨거운 숨도 이내 사그라졌다.
그는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이내 얼굴을 가볍게 쓸고 떨어트렸다. 비올레타가 작게 웃으며 허공으로 떨어지는 그 엄지의 끝에 살짝 키스했다. 혀끝이 살갗에 스치듯 닿았다. 비올레타는 내리깐 눈을 라키엘의 얼굴로 들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누워. 자는 것 보고 갈 테니까.”
라키엘이 몸을 일으켜 그녀가 둘러쓴 망토를 잡아 쥐었다. 비올레타는 시중을 받듯 가만히 서서 제 몸과 머리를 누르는 것들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녀는 다시 평범해졌다. 밤이면 늘 그랬듯 느슨하게 정리된 머리와 단조로운 네글리제. 그러나 그것이 더 보기 좋았다.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침대에 누였다. 비올레타가 그의 소매를 끌어당겨 그도 곧 그녀의 곁에 누웠다.
정적은 편안했다.
비올레타는 옆으로 누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는 그것을 마주한 채로 한참 시간이 흘렀다. 비올레타가 문득 웃었다.
“얼마나 온 것 같아요?”
“뭐가.”
“우리.”
라키엘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웃었다.
“다 왔나?”
“그러면 좋을 텐데.”
“어쩌면 이제야 시작인 것 같기도 하고.”
라키엘의 말에 비올레타는 조용히 라키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라키엘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셋은 낳았으면 좋겠는데.”
“변태.”
“이건 현실적인 계획이야.”
“그런데 셋은 너무 적지 않아요?”
“네가 더 변태 같군.”
“아니, 하나는 몸이 약하고, 하나는 멍청하고, 하나는 정신이 이상하면 어쩔 거예요?”
“차라리 악담을 해.”
“불안하잖아요.”
“네가 무리하는 게 더 싫어.”
비올레타는 조금 얼굴이 발개진 채로 얼굴을 묻었다. 라키엘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런 걸 좋아하더라?”
“누가요.”
“네가.”
“맞다. 이름, 이름.”
비올레타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라키엘이 순순히 넘어가 주겠다는 듯 가만히 팔에 머리를 괴었다.
“이름 생각해 봐요.”
“앞서 나가긴.”
“난 아들 이름 맡을 테니 당신은 딸 이름 맡아요.”
“뭐라 지을 건데?”
“비밀이에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당신도 생각해 둬요.”
“그래.”
라키엘이 이불 위로 흐트러진 비올레타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대강 대꾸했다. 가만히 그 손길을 받고 있던 비올레타가 얼핏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내가 너무 오래 살면 어떡해요?”
“별 멍청한 염려를 다 들어 보는군.”
“그럼 우리 아들은 나이만 먹을 것 아녜요.”
“양위하면 되겠지.”
“양위하면 난 뭐 해요?”
“글쎄…….”
라키엘이 얕게 한숨을 뱉으며 내리깐 눈을 들어 비올레타의 눈을 바라보았다.
“공작령에 내려가 살까.”
비올레타가 반색했다.
“그럴 수 있어요?”
“그게 좋을 것 같아?”
“좋아요. 여길 벗어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럼 미리 별궁도 하나 지어 놓고.”
“이미 공저가 있잖아요. 어릴 적엔 거기서 살았죠?”
“그랬지.”
“궁금해요. 어떤 곳이에요?”
“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곳이야. 다만 내가 좋아할 뿐이지.”
“그럼 벌써 특별한 거네요.”
라키엘이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간 눈이 어둠 속을 조금 헤매다 그의 눈 위에 멈췄다. 동그란 눈매가 길게 휘어졌다. 라키엘이 씩 웃으며 그녀의 콧잔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나른한 한숨이 흘렀다.
809년 봄의 65일.
블라디모로에서 황녀 비올레타가 여제로 즉위했다.
시간은 그들의 것으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