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비겁자 (2/6)

02. 비겁자

<애초에 난 그걸 비밀로 할 생각 없었어, 이경아. 그러니까 제안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 네가 영원히 입 다물고 있어 준다면 나도 영원히 말하지 않을게. 이래야 공평하지, 안 그래?>

녹아 버린 뺨을 잡고 뒹구는 이경에게 박윤형이 낮게 속삭였다. 이경이 입 다물면 저도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한 후로 그는 이경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지금 왜 다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결혼도 했었고 나름 괜찮은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운용해 돈을 만진다는 걸 건너 건너 들었다.

박윤형은 스타 선수를 꽤 보유한 매니지먼트 대표로 누구보다 탄탄한 인생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단물이 다 빠져 버린 자신한테 왜? 털어 봐야 나오는 건 늙은 몸이었다. 자산? 수중에 있는 돈은 부모님 손에서 굴려지고 있었다.

이경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큰돈을 빼내려면 부모님의 눈과 귀를 거쳐야 했다. 돈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만져 본 사람이었고, 가진 게 많아 눈치가 빨랐다. 몇 년을 집에서 숨만 쉬던 이경이 갑자기 큰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럼 목적이 뭐지? 입안으로 들어간 엄지손톱이 이에 뜯겨 점점 줄었다. 따끔한 느낌이 들어 손을 빼냈을 때는 이미 피가 맺혀 있었다.

딩동.

경고음 같은 벨이 울리자 이경은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꿈속을 찾아오던 끔찍한 괴물이 이젠 현실까지 찾아와 들쑤시고 있었다. 반쯤 정신을 잃었다. 이경은 급하게 뛰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들어가기 위해 무릎까지 넣었을 때다.

반응이 없자 현관 앞에 선 사람이 탕탕탕 문을 두드렸다. 조용했던 인생에 자꾸 파동이 일고 있었다. 어제는 태화가 오늘은 박윤형이 인생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경아, 얘 이경아.”

얇은 여성의 목소리에 이경의 고개가 움직였다. 걱정처럼 윤형이 아니었다. 어머니였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자니? 이경아, 있으면 문 좀 열어 봐.”

옷장에 숨어 있던 이경은 문을 열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밖을 향했다. 어머니는 이경이 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둘이 만나는 것보단 그 사이에 어머니가 있으면 더 낫지 않을까? 이경은 흔들리는 현관을 마주하다 문을 열었다. 보조 잠금쇠에 걸려, 닫혀 있던 문이 반 뼘 정도 벌어졌다.

밖엔 세월이 아름답게 내려앉은 은발을 하나로 틀어 올린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아들을 많이 사랑했다. 그늘 없고 어디 내놓아도 흠 없는 아들. 그래서 이경의 얼굴이 망가졌을 때 누구보다 분노했고 아파했으며 슬퍼했다. 그녀는 저보다 태화를 끼고 돌았다. 마지 자신의 대용품처럼. 그런 어머니가 직접 별채까지 왔다.

“무, 무슨 일이세요?”

침을 꿀꺽 삼키며 조금 벌어진 문틈으로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도 박윤형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세워 둘 거니?”

보조 열쇠를 해제하지 않은 채 밖에 세워 둔 걸 보며 어머니 윤연옥 여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경은 그제야 문을 열어 주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 엉망인 방을 보고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골프 하자, 이경아.”

빙 돌려 말하지 않고 찾아온 목적부터 말했다. 골프라는 소리에 이경은 입술을 뻐끔댔다. 그놈의 골프, 골프, 골프. 이제는 왼쪽 뺨만큼이나 염증이 이는 단어였다.

“윤형이가 좋은 제안을 해 왔어. 내가 읽어 봤는데 꽤 괜찮은 조건이더라. 네가 골프 생활 접을 때까지 지원하겠대. 훈련지는 미국이고 레지던스도 이미 구해 놨대. 훈련 성과가 좋으면 다음 해에 대회까지 노려 보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머리가 아찔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레지던스, 미국, 대회까지 이경의 동의 없이 다른 사람 입과 손으로 정해졌다.

“이경아, 듣고 있니?”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알기나 할까? 이경을 지옥으로 떠밀고 있었다. 멍해진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잖니. 엄만 네가 다시 골프 치는 거 보고 싶어. 윤형이한테 전화라도 해 봐. 연락 기다린대. 둘이 친했잖아. 이번에 회포도 풀고, 응?”

그녀가 손에서 명함 한 개를 꺼내 이경의 손에 꽉 쥐여 주었다. 부탁하듯 마지막까지 두 손으로 꽉 쥐였다. 사각진 명함 끝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경의 어깨의 두어 번 두드린 어머니가 밖으로 나갔다.

[박윤형]이라 선명하게 새겨진 명함을 노려보았다. 명함에 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날을 잊지 말라는 듯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듯했다. 100m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어 뇌가 흔들렸다. 입술을 벌리면 그대로 위에 있는 것들을 토해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그는 이경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거론 부족했는지, 다시 기어들어 오려고 했다. 목이 졸리는 기분인데 살려 달라고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노련한 사람답게 꽤 괜찮은 비밀을 약점으로 잡아 이경의 목을 졸랐다.

숨이 막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물속에 밀어 넣고, 올라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발버둥 칠수록 깊은 곳에 몰아 놓고 비웃고 있는 거 같았다. 숨 쉬는 게 어려웠다. 익사해 버릴 거 같았다. 이경은 얼굴이 희게 질려 꺽꺽댔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과호흡이었다. 이 고질병은 이경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의지와 상관없이 과도하게 숨 쉬려 할 때마다 손발에 경련이 일었다. 새파랗게 질린 이경이 봉투를 찾아 헤맸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봉지를 끌어와 입술 앞에 뒀다. 봉지 안으로 차분히 숨을 들이마시며 내쉬었다. 그동안 차가운 무언가가 눈꼬리 쪽으로 흘러내렸다. 살고 싶었다. 어머니 마음만 바꾸면 된다.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지? 희미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화였다.

이성이 반쯤 도려내진 이경은 휴대폰을 찾아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태화에게 연락해야 했다.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어머니를 설득해 외국으로 가지 않게 해 달라고, 지금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혀 죽어 버릴 거 같다고. 지금 박윤형의 달콤한 말에 젖은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태화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자취를 감춘 휴대폰을 찾았다.

어둡고 물건이 마구 헝클어진 집에서 물건을 찾기란 힘들었다. 바닥을 쓸며 네모난 물체를 찾아 헤맸다. 이경은 소파 아래서 휴대폰을 찾아 귀에 댔다. 그러다 순서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신호가 갔다. 끊길 듯 말 듯 위험한 신호음을 들으며 이경은 이로 손톱을 깨물었다.

[왜요?]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하는 ‘여보세요’나 ‘누구세요’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는데도 상대방은 이경이라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경은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불안감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도와줘. 어머니가 계약서에, 그러니까 윤형이와 말해서 골프를, 아니, 그것보다 더 큰 문젠 날 미국에 보내겠대. 태화야, 듣고 있어? 왜 말을 안 해. 불안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입으로 밀고 나와 완벽한 문장이 되지 않았다.

[지금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해요.]

“태화야, 어머니한테 가서 안 된다고 해. 가서 네가 나 책임진다 해. 귀찮게 안 할게. 아무 방해 안 할게.”

[간단히.]

주위가 시끄러웠다. 그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끊어 주기를 원했다.

“골프 하기 싫어! 여기 있고 싶어!”

여기 이 안전한 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경은 답답한 마음에 발을 굴렸다.

[투정 좀 그만 부려요. 형이 싫다고 한 것들 했으면 좋겠는데요. 좋잖아요.]

겨우 그런 이유로 전화했냐는 듯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투정 아냐! 오, 오늘 언제 와? 만나서 이야기하자. 보고 말하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가 왜 그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다들 투정이라고 말할까. 답답해서 가슴에 있는 걸 모조리 꺼내 보여 주고 싶었다. 내장까지 전부 발라, 제 속이 얼마나 타고 있는지 말이다.

[기다리지 마요. 오늘 못 가요.]

“왜?”

[바쁘다고 했어요.]

“우리 집에 와.”

제발.

[우리요?]

태화가 어색한 단어라는 듯 한 번 더 되물었다.

[언제 그쪽과 내가 ‘우리’가 된 건지 모르겠는데요. 아까 입장 정리했잖아요. 이제 그만해요.]

“필요한 사람이 되면 되잖아.”

[어떻게요?]

“돈 줄게. 아버지한테 받은 것도 있고 벌어 놓은 것도 있어. 그거 다 주고 유산도 안 물려받는다고 공증할게.”

[그건 형 앞가림하는 데 쓰세요. 돈이라면 저도 남부럽지 않게 있어요. 잊었어요? 우리 형제라는 거. 똑같은 부모를 가졌는데, 내가 가난할 일이 없잖아요. 머리를 써요. 바보처럼 굴지 말고.]

“태화야.”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와하하 전화기 너머로 맑은 여자의 웃음이 들렸다. 이십 대 그 또래가 원하는 거. 그게 뭘까? 자유? 구속되지 않을 자유? 그러면 난? 이경의 입술 사이에서 울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나 버리지 마.”

잠시 전화가 끊긴 것처럼 태화가 말을 하지 않았다. 불안해 ‘태화야?’ 하고 이경이 다시 부르자 그가 인기척을 냈다.

[그럼 그쪽도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돼야죠. 안 그러면 내가 억울하잖아.]

“될게. 내가 잘할게.”

[당신에게 원하는 거 하나 있긴 해요. 별로 어려운 건 아닌데 할 수 있겠어요? 진짜 ‘우리’가 될 수 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말보다 유혹적이고 달콤한 말이었다. 이경은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시험해 보죠, 오늘 내가 오라는 데로 와요. 올 수 있겠어요?]

“응.”

[기다리긴 할 건데 내가 하라는 건 했어요?]

“아니.”

[그것부터 해요.]

주변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와태화가 있는 수화기 건너편의 시끌벅적한 곳과 달리 이곳은 조용했다. 그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툭,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끊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경은 소파에 머리를 댔다. 전화가 끊기자 다시 불안이 엄습해 이경은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면서도 태화가 시킨 걸 하려고 몸을 움직였다.

느릿느릿 방을 정리하려고 커다란 봉투를 꺼내 손에 잡히는 것마다 집어넣었다. 그걸 거실 한편에 세워 두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자그마한 빈백이 놓여 있었고 이경은 가만히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누웠다. 햇빛이 몸을 감싸자 인상을 썼다. 뜨거운 건 싫었다. 마치 그날의 기억이 되풀이되는 느낌이라 에어컨이 돌아가는 거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십 분간 햇볕을 쬐라는 말이 떠올라 그대로 있었다.

초조하게 휴대폰을 보며 십 분을 채웠다. 입속에 손가락을 넣고 물어뜯었다. 손톱이 점점 짧아져 갔다. 정확히 10분 동안 태양 아래 서 있다가 달리듯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없이 안으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 무언가 떠오른 이경은 무거운 소파를 밀어 현관 앞에 댔다. 이불이고 뭐고 현관문 앞에 쌓아 두고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너무 위험했다. 무방비하게 자고 있다가 언제 또 박윤형이 뜨겁게 달군 다리미를 들고 올지 몰랐다. 이경은 휴대폰을 꽉 쥐고 옷장 문틈으로 닫힌 방문을 오래도록 응시하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무서웠다.

* * *

[12시 한국대 입구 펌킨]

태화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단조로운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메시지였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높낮이 없는 중음이 들리는 듯했다. 이경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웅크리고 있던 몸을 세웠다. 고개를 조금 틀어 올리자 초침이 없는 시계가 11시라는 걸 알려 주었다.

이경은 희게 굳은 손가락으로 택시 한 대를 예약했다. 얼마 후 도착할 거라고 알림이 오자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이경은 블라인드를 걷어 밖을 확인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은 휑했다. 비가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오른손으로 부여잡았다. 집 밖에 나가는 게 사실 두려웠다.

다리가 저려 절뚝이며 걷던 이경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이라 온 집이 조용했다. 사용인들은 9시가 되면 모두 퇴근했고 노부부는 10시가 되면 잠이 들어 아무도 이경이 밖으로 나가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자 예약한 택시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에 찍힌 목적지를 택시기사에게 보여 주자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택시가 움직이자 이경은 창에 머리를 기댔다.

투둑 소리가 잠든 귀를 깨웠다. 귀가 맞붙은 유리에서 소리가 났다. 살짝 턱을 세우자 어두웠던 택시 내부에서 하늘로 시야가 바뀌었다. 무언가가 하늘을 사선으로 그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영근 빗방울이 가로등에서 뿜어 나오는 빛에 다채롭게 빛났다.

불안함에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택시는 이경을 목적지와 가까운 곳에 데려다 놓았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이경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길가에 사람들이 많았다. 빠르게 뛰어가는 사람들, 부슬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이 혼재되어 있어 부산스러웠다.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걷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고기 누린내가 나자 이경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코를 가렸다. 뜨거운 것, 타는 냄새는 혐오하는 것들이었다. 타는 냄새 중 제일 혐오스러운 건 고기 냄새. 이경은 뺨이 녹아내린 이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힐끔 이쪽을 보자 이경은 자연스레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약속 장소를 찾아 헤맸다.

멀지 않은 곳에 메시지로 받은 상호를 가진 술집이 있었다. 그 앞에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워 댔다. 젊은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이경이 들어서자 자연스레 시선이 모여들었다. 뺨만 아니면 병약한 미인인 이경을 훑어보던 사람들이 흥미를 잃고 고개를 치웠다.

침을 삼킨 이경은 손바닥으로 왼뺨을 덮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 서 있는 이경의 팔을 누군가 낚아채자 발작하듯 그 팔을 쳐 냈다.

“보기보다 팔팔하네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라 조금 걱정했는데.”

눈을 감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이경은 눈을 크게 떴다. 태화였다. 전혀 걱정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술을 꽤 많이 마셨는지 그의 입술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마신 거야. 이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여기로 왜 부른 거야?”

도대체 여기에서 이경이 뭘 도와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달팽이처럼 숨어 느리게 움직이는 게 전부인 사람이었다.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태화는 비틀거리며 몸을 틀었다. 이경은 가만히 술에 취해 불안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꽤 많은 학생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과 모임이나 동아리 뒤풀인 것 같았다. 태화가 들어서자 술로 뺨이 발갛게 물든 학생 몇이 손을 흔들었다. 얼른 오라는 뜻이었다. 멍하니 그들을 보던 이경은 홀로 서 있는 게 머쓱해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태화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자신이 그의 형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태화가 앉아 있는 맞은편 테이블이라 태화와 마주할 수 있었다. 따로 앉은 이경에게 점원이 다가와 몇 명이냐고 물었다.

“혼자요.”

“혼자요?”

어이없다는 듯 점원이 되묻자 이경은 확인시켜 주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요일 거기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려 손님이 더욱 몰리는 날, 혼자 테이블을 차지한 이경을 진상으로 본 듯했다. 깊은 한숨을 쉰 아르바이트생이 아무 언질도 없이 카운터 쪽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왔다. 이미 이경이 어떤 손님인지 듣고 온 사장의 얼굴에 짜증이 잔뜩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손님인지라 사장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민폔지 알고 있다. 그렇다고 길거리에 서서 태화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밖은 더웠고 사람이 많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까닥 잘못하면 태화를 놓칠 수도 있었다.

“저 손님. 오늘 같은 날은…….”

사장이 말을 더 이으려는 찰나 이경은 메뉴판을 열어 처음부터 끝까지 쭉 손가락으로 훑었다.

“전부 주세요. 술도 종류별로 가져다주고요.”

짜증이 묻었던 뺨이 내려앉았다.

“아,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아니에요, 손님.”

사장이 메뉴판을 들고 돌아섰다. 이경은 몸을 낮추고 태화만을 바라봤다. 꼭 그 모습이 주인을 기다리는 개의 모습과 똑같았다.

“술 마시다 말고 어디 갔었어?”

“조금 어지러워서 밖에 나갔다 왔어요. 술을 많이 마셨나.”

약간 비틀거린 태화가 입술을 떼며 이쪽을 힐끔 보았다. 질문한 여자는 태화에게 호감이 있었다. 과하게 반짝이는 눈이라든가 태화 쪽으로 기울어진 몸이 그걸 알려 주었다. 그걸 눈치챘을 텐데 태화는 기울어진 몸을 밀어내지 않았다.

저런 스타일이 태화 스타일인가? 이경이 천천히 여자를 훑었다. 찰랑이는 긴 머리와 사슴처럼 길게 뻗은 하얀 목을 물끄러미 보았다. 호탕한 성격인지 이를 드러내고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에든 잘 섞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탁, 태화가 들고 있던 잔을 빙 한 바퀴 돌리더니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경의 시선이 여자에게서 다시 태화에게로 돌아갔다. 검은 눈과 마주했다. 서리가 내려앉은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치우죠.’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럽게 벌어진 입술을 응시했다. 글자를 읽은 이경은 화들짝 놀라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여자를 빤히 봐서 기분이 상했나?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으니까 나갔잖아. 솔직히 말해 봐, 이야기하기 곤란하지? 그치?”

이경은 술을 마시며 귀를 기울였다. 짓궂은 남자 하나가 태화에게 물었다.

“없는데요.”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요. 설마 고작 몇 번 대답을 해 줬다고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아니죠?”

고분고분 잘 대답해 준다고 생각했다. 저래야 태화였다. 뾰족한 목소리로 힐난하자 당황한 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태화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연애하고 결혼하게 되면 자신에게 소홀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사랑하며 평범한 인생을 살았으면 했다. 점원이 미리 가져다 놓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왔다.

솔직히 태화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태화는 이질적이었다. 딱히 재밌어하지 않았고 사람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지루한 표정이 여기까지 보이는데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태화는 연거푸 술만 마셨다. 그가 입속에 술을 털어 넣을 때마다 이경도 따라 술을 입속에 머금었다가 도로 뱉어 냈다. 술주정뱅이라 또 한 소리 듣는 건 싫기도 하고.

“근데 태화야, 저 사람 누군지 알아?”

맥주잔을 들고 빙 돌리고 있던 태화의 고개가 이쪽으로 기울어졌다.

“아니요.”

“근데 왜 자꾸 사람을 힐끔대? 기분 더럽게. 봐, 지금도 시선 안 피하잖아.”

“스토커. 얼마 전부터 따라다니더라고요. 신경 쓰지 마요.”

태화는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줬다. 쉽게 버릴 수 있는 가벼운 존재.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수치를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 양심이 있어야지. 저 얼굴로?”

이경의 뺨이 순간 굳었다. 한 손으로 뺨을 가렸다. 화끈함이 양 볼에서 귓불로 옮겨 가고 있었다. 순간 장난스럽게 입술 끝이 올라가 있던 태화의 뺨이 굳었다. 그 주변 공기가 내려앉았다. 단번에 이경은 그가 화났다는 걸 알아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떠들어 댔다.

“좆같네.”

평화롭게 속도를 내며 달리던 차가 급발진해 앞으로 튀어 나간 것처럼 그는 상스러운 욕을 뱉었다.

“응? 뭐가?”

“좆같다고요. 저 얼굴로 따라다니는 사람이 제 애인이라서요.”

물을 뿌린 것처럼 테이블에 고요함이 맴돌았다. 이경조차 심장이 서늘해져 멍하니 눈을 깜박였을 때였다. 태화는 종잡을 수 없었다. 스토커였다가 애인이었다가 변덕처럼 이리저리 멋대로 뛰어다니는 말에 정신이 쏙 빠졌다.

애인이라는 폭탄발언이 떨어진 테이블 위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샅샅이 이경을 훔쳐보며 품평하는 시선. 마지막엔 비웃음이 섞여들었다. 더는 여기 있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민망해 도망치려 할 때였다. 이경은 의자를 뒤로 빼냈다.

“김이경 선수 맞으시죠?”

순간 이경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쪽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테이블까지 다가와 물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닌데요.”

프로골퍼 김이경은 죽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회상하고 있었다.

“어, 맞는 거 같은데. 맞잖아요, 김이경 선수님이요! 저 그때 중계도 챙겨 보고 그랬어요. 스포츠웨어 광고도 찍으셨잖아요. 김이경 선수님이 광고 찍고 유행했던 그거요. 저도 엄마 졸라서 사 입었는데.”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남자는 팬이라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이경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지 말고 사인해 주세요! 저 정말 팬이에요! 선수님 헛소문 같은 것도 믿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이경은 고개를 숙였다.

“……제발 가 달라고요.”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네?”

계산서를 뒤집어 메모지를 만든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이 시끄러워 이경의 입술을 뚫고 나온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제발 가 주세요.”

프로 골퍼 김이경은 죽었다. 앞에 있는 남자가 찾는 그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허상이었다. 영원히 죽은 채로 살고 싶었다. 불안함에 엉덩이가 계속 들썩거렸으나 이경은 결국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도와달라고 고개를 들자, 태화가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났다. 벌써 일어나냐고 주위에서 야유를 쏟아부었다. 야유를 등에 업은 그가 이경에게 다가왔다.

그림자가 지자 남자가 태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태화는 느리게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있는 펜을 빼갔다. 그리고 대충 메모지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김이경.]

“뭐 하는 거예요?”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쪽은? 싫다는 사람 붙잡고 뭐 하는 건데?”

“어? 저는요, 그게 아니라.”

“비켜.”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태화는 그의 어깨를 밀치고 테이블 쪽에 있는 계산서를 챙겼다.

“가죠.”

태화가 얼른 일어나라고 고갯짓을 했다. 이경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 서 벌써 저만치 간 태화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가 어떻게 사귀는 사이가 돼?”

이경은 주위를 훑으며 내내 마음에 걸리던 말을 꺼냈다. 하. 태화의 입술에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협상 안 할 거예요? 곧 협상 테이블에서 마주할 사람이 이렇게 감정적이어도 돼요?”

그놈의 협상 소리.

“감정적인 게 아니잖아. 내가 왜 네 애인인데?”

“귀찮아서요. 옆에 있던 여자. 들러붙잖아.”

그제야 사슴처럼 목이 길고 맑은 눈을 가졌던 여자가 태화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이경은 눈을 껌벅였다.

“썸 타던 거 아니었어?”

“내 스타일 아니에요.”

그러면 아까 이경이 그녀를 훑어봤을 때 닿던 시선은? 왜 시선을 치우라고 했던 거지? 머릿속에서 오류가 나 빨간불이 들어와 고개가 기울어졌다.

“형은 그런 여자가 취향이에요? 그래도 꼴에 어딘가에 넣고 싶어요? 오메가여도 좆 세우는 남자나?”

“뭐?”

이경은 시선을 들었다.

“왜 최하나 얼굴을 꼼꼼히 훑어봤어요?”

“그런 거 아냐. 오해하지 마. 그냥 네 옆에 있어서.”

“아아.”

이경은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애인이라니. 내가 왜 네 애인이야?”

형제인 자신을 그런 식으로 소비하면 나중에 불경한 소문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는 말이 가지는 힘과 무서움을 모르는 천덕꾸러기 같았다. 만약 자신이 형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근친상간을 한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다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더구나 저 작은 가게 안엔 이경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가서 아니라고 해. 나중에 말 나오면 어떡해. 다시 들어가서 형이었다고 말해.”

악독한 기사가 쏟아지고, 매일 밤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올랐을 때 이경은 병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걸 또 겪고 싶지 않았고 그도 겪지 않길 원했다. 더구나 오늘은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급살에 휘말리지 않길 바라 마음이 급해져, 태화의 팔을 끌어당겼다.

“내가 형이라 말하지 않을 건데 누가 우리가 형제인지 아는데요? 저 안에 있는 사람 중 누가 형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뭐라 떠들든 뭔 상관이야.”

“……그래도 그렇지.”

소문이 무서웠다. 쏟아져 나오던 기사.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던 말 못 할 기사가 만들어 낸 소문은 이경을 괴롭혔다. 원래 싸가지가 없었다. 달마다 연예인 갈아치우며 터지던 스캔들 기사 보면 모르냐?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게 취미라 그런 일 당해도 싸다. 뺨을 저렇게 만든 범인은 예전에 연애설 터졌던 걔일지도? 아니, 걔일 거다. 누군가의 술상에 올라 심심풀이 안주가 되곤 했다. 이경은 코를 찡그리며 따가워지는 뺨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등으로 땀이 송골송골 찼다.

“이제 집에 가자.”

태화의 팔을 잡아끌자, 그가 단호히 손을 빼냈다. 이경이 살짝 밀리며 둘 사이가 벌어졌다. 태화는 바깥 후미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탈탈 바쁘게 돌아가는 실외기 소리가 귀를 잠식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문 그는 이내 라이터를 꺼냈다.

탁, 라이터 스위치를 누르자 푸른 불이 튀어 올랐다. 이경은 불빛이 무서워 한 걸음 떨어져 섰다. 작은 불이라도 눈앞에 있으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꼴사나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이경은 다리에 힘을 주고 불안한 눈으로 불빛을 보았다. 태화의 얼굴에 빛이 돌았다. 오래도록 담배를 가져다 대자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다음에라도 아니라 말해.”

“내가 알아서 해요.”

“난 네가 깨끗했으면 좋겠어.”

아무 티 없이. 흠집 하나 없는 무결한 상태로 있었으면 했다. 담배 끝에 있던 검은 시선이 이경 쪽으로 옮겨 와 짙어졌다.

“그건 형 바람이죠. 누구나 마음속엔 어두운 부분이 있어요. 검고 음울한 나만의 세계가.”

말할 때마다 입에서 부슬부슬 안개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태화가 젖고 있었다. 이경을 바라보는 검은 눈은 한 치의 빈틈 없이 견고했다. 부슬비에 머리와 어깨가 젖어 동떨어져 보였다.

멀어져 가는 그의 세계를 잡아 융합되고 싶어졌다. 이경은 저도 모르게 발을 내밀어 손바닥을 겹쳐 그의 머리를 가려 주었다. 190cm가 되는 장신을 가리기 위해 가깝게 붙어야 했다. 가슴이 붙을 정도로 가까워져 턱을 들었을 때였다. 내리깐 그의 검은 눈과 마주하자 갑자기 목덜미로 서늘한 손이 밀고 들어왔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담배가 바닥에 뒹굴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퇴로가 막히고 스치듯 입술이 지나갔다.

눈이 커졌다.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겁고 야릇한 향이 묻은 혀가 들어와 치아를 훑고 지나갔다. 놀라 두 손으로 가슴을 밀어내고 떨어졌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그를 바라봤다. 인장이 찍힌 것처럼 홧홧한 뜨거움이 아직도 남았다.

“……뭐 하는 짓이야?”

태화가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취했나 봐요. 갑자기 다른 얼굴로 겹쳐 보였어요.”

“누구랑.”

질이 나쁜 장난이다. 이경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태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비틀댔다. 실수라 변명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이경은 깊은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취한 사람에게 따져 물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을 듯, 앞뒤로 움직이는 그를 보자 이경은 노심초사했다. 크게 비틀리자 이경은 참지 못하고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어 지지대 역할을 자처했다. 어깨와 목으로 온전히 느껴지는 무게가 나쁘지 않았다. 살이 스친 어깨에 퍼지는 미미한 열에 기분이 좋아 심장이 고요하게 뛰었다. 이상하게 닿지 않은 입술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오피스텔로 가요. 여기서 안 멀어.”

거기가 어딘지 몰라 당황하기도 전에 태화가 먼저 발을 뗐다. 이경은 그가 걸을 수 있도록 지지대 역할을 하면 됐다.

언제 이렇게 큰 거지? 품에 쏙 안겼던 아이는 꽤 키가 커져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했다. 분내가 나던 아이에게서 희미하게 페로몬 냄새가 풍겨 왔다. 살이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미미한 열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정말 이경의 취향이 모두 혼재되어 있는 향이다. 이렇게 좋은 냄새를 내는 알판 처음이다.

오피스텔로 들어가자 비틀거리며 걷던 태화가 갑자기 멈추더니 이경의 어깨를 밀어냈다. 무게 중심을 못 잡고 그가 넘어질까 봐 얼른 달려갔다. 그는 걱정과 달리 흔들림 없이 똑바로 걸었다. 오히려 흔들린 건 이경의 눈동자였다

술에 취한 게 아니었나? 아니면 걸어오는 동안 술이 깬 걸까? 그럼 아까 그 키슨? 무조건 그가 취해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 모든 걸 변명할 명분이 생기니까.

“왜 귀신을 본 것처럼 사람을 봐요?”

“안 취했었어?”

“취하지 않았는데. 아, 형은 내가 취했으면 좋겠죠? 그래야 그 키스가 정당방위가 되니까?”

멍한 얼굴로 태화를 보던 이경은 얼른 고개를 젓고 그를 따라갔다. 태화는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어떤 여지도 주기 싫은데.”

이경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파고 들어왔다.

“형은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비밀번호를 눌러 도어락을 해제하며 그가 묻자 이경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입술을 천천히 뗐다.

“죽을 때까지 나 버리지 말기, 외면하지 않기.”

양심 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이경은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준비해 왔던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어쩐지 잘못된 길로, 악어의 입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이 들었다.

“평생 옆에 있어 달라…… 뭐, 좋아요.”

“너는. 넌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글쎄요. 하는 거 보고요.”

술을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태화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이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싫다던 그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제 뭐 하면 돼?”

의욕이 과다한 사람처럼 이경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우리 정원에 키우던 개 생각나요? 흰둥이와 검둥이 두 마리였잖아. 암캐, 수캐.”

한 어미 아래서 태어난 새끼 두 마리를 업어 와 정원에 풀어 놓고 키웠다. 사이가 꽤 좋았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잔디를 둘이 사이좋게 파내 정원사 아저씨가 질색하곤 했다. 매일 저놈의 똥개 새끼. 그러며 툴툴댔는데 어느 날 흰둥이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아, 그 똥개가 6마리로 늘어났다.

“그 개가 요즘 어른거려요.”

이제 검둥이와 흰둥이는 죽고 새끼들인 점박이들만 남았다.

“키우면 되잖아.”

“형, 그거 알아요? 개는요. 형제를 못 알아본대요. 서로 눈이 맞으면 꺼릴 거 없이 붙어먹어요.”

“그러니까 짐승이라는 거지.”

띠, 띠, 띠. 비밀번호 오류를 알리듯 도어락 주변에서 붉은빛이 돌았다. 그가 도어락 키패드에 손을 올려놓고 속삭였다. 이경은 그걸 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개가 될 생각 없어요?”

개? 취미가 고약했다.

“나랑 자요.”

불시에 떨어진 말에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잠시 귀를 의심했다. 이번엔 옳게 눌렀는지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나자 태화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틈이 벌어지자 그는 대답이 뭐냐고 재촉하듯 시선을 보냈다. 혹시 자신을 떼어 내려고 모진 수를 두는 걸까. 이경은 침을 삼키며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태화는 정말 좋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나한테 왜 그래?”

저의를 모르겠다. 내내 화가 난 건 알겠는데, 굳이 자신에게 이런 농담을 해 얻을 게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에서 피가 전부 빠진 것처럼 이경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왜 그러냐고요?”

태화가 문을 다시 밀어 쾅 닫으며 무서운 얼굴로 이경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의 눈이었다.

“적당해서요.”

단지그런 이유로 피가 이어진 형에게 자자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경은 뒤로 발을 물렸다.

“적당한 사람이 그쪽밖에 없어서 제안하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이 할 만한 게 그거밖에 없잖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자신을 지목하지 않아도 그는 손쉽게 잠자리 상대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은 어떤 이유로든 적당하지 않았다. 우선 예쁘지 않았고 늙었으며 피가 이어진 형제였다.

“침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발설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해요. 형은 나와 자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테고 내 아이를 낳겠다고 애써 발버둥 치지도 않겠죠. 알아서 피임도 잘할 거고 침대 위에서 있던 일을 발설하지도 않겠죠.”

귀를 후벼 파는 말들이 정신없이 이경을 몰아쳤다.

“왜요? 아이라도 가지게요? 아이 욕심 없었잖아요. 평생 연애만 하며 혼자 살고 싶다 했었는데. 내키면 줄게요.”

“……미쳤어?”

이경의 목에서 긁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지극히 정상인데요.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아요.”

“나 네 형이야. 말 가려서 해.”

“난 개새끼고요.”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깊은 관곌 가지자는 것도 아니고 그쪽이 필요할 때만 쓰겠다는 거잖아요. 마음이 있으면 문젠데 그것도 아니잖아. 형한테 욕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 해소하지 못한 호기심이 계속 머릿속을 긁어 대면서 녹여요.”

미수로 그쳤던 그때를 회상하듯 그의 눈이 흐릿해졌다.

“돌아 버릴 거 같아.”

짧게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화의 목젖이 움직였다.

“아직도 후회해요. 그때 확 덮쳐 버릴걸. 덮쳤으면 이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지 않을 텐데 매일 밤 꿈에서 형을 침대에 눕혀 놓고 섹스를 해요. 그 다리를 내 허리에 두르고 발기한 걸 밀어 넣는 상상. 그럼 형이 가랑이를 열고 내 걸 깊게 밀어 넣으려 애쓰죠. 그 상상이 끝나면 적당할 때 버려 줄게요.”

“……더러워.”

몸이 덜덜 떨렸다. 뜨겁게 타는 시선이 이경의 배를 마구 휘저었다.

“그걸 누가 정의하는데요?”

“사람들이.”

“그건 그 사람들이 정한 기준이고 내 기준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럼 먼 과거에 사촌끼리 결혼했던 관행은 뭔데요? 그 기준이란 게 결국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잖아. 그 사람들처럼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섹스만 하겠다는 건데.”

궤변이다! 말도 안 되는 논리! 그때와 지금은 시기가 다르다. 우린 과거가 아닌 현대에 살고 있었다. 경악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태화를 바라봤다.

“그냥 하자는 거잖아. 섹스가 더러워요? 더러운데 그렇게 벌리고 다녔어?”

“무슨, 말 하는 거야?”

몰아치는 거칠고 저속한 말에, 이경의 말이 반으로 동강 났다.

“몰라서 물어요? 내가 봤던 알파가 몇인데? 당신 휴대폰으로 날아오던 그 저질스러운 사진과 말들.”

이경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사귀던 사이였어! 그게 무슨 문제야.”

태화가 이경의 뺨을 툭툭 치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말하고 있잖아요. 섹슨 더러운 게 아니라고. 우리가 이러는 게 뭐가 문젠데요?”

“그 말이 아니잖아, 우리 관계 때문에 말하는 거잖아. 그런 짓을 하면 우리 관계가 뭐가 되는데?”

“형과 내가 입만 다물면 계속 형제죠.”

더 끈끈하고 우애 있는.

“아무도 형제끼리 그런 거 안……!”

복도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이경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리 한 층에 두 집밖에 없다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비상계단을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들었다.

“형제여서 안 된다고 말할 거면 그냥 가요. 결혼하자는 것도 애를 낳아 달라는 것도 아닌데요.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집안 돈을 까먹는 당신에게 적당한 일을 찾아 준 거잖아요. 그쪽이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그거 말고 또 있어요?”

이경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들어오려면 오고 아님 말아요.”

“차라리 다른 걸 해! 내가 누군지 잊었어? 어떻게 자자는 말을 쉽게 해?”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형제라는 관계성이 머릿속에서 지워진 걸까? 누가 들을까 싶어 이경은 목소리를 낮췄다.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 골프 치기 싫다더니 이것보다 그게 나은가 봐요. 그럼 가서 골프나 쳐요. 박윤형이 그쪽 뒤를 따라다니며 나이스샷 외쳐 주니 더 좋겠네죠. 둘이 환상의 커플이었잖아?”

그가 팔을 휘둘러 스윙하듯 움직였다. 투명한 공이 날아와 가슴에 처박힌 것처럼 아팠다. 박윤형. 증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이름이 그의 입에 나오자 머리가 아득해졌다. 찌를 뜻이 뺨이 아팠다. 그런 개만도 못한 새끼와 미국에 가느니 욕조 물에 고개를 처박고 죽는 게 나았다. 손이 달달달 떨렸다. 그가 시선을 내려 떨리는 손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싫어.”

“싫음 뭘 해야겠어요? 내 조건은 그거 하난데.”

“그것도 싫어.”

“그럼 어쩔 수 없고요.”

코앞에서 문이 탁 닫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동아줄이 싹둑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등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둠이 저를 덮치는 기분이었다. 딱 맞춰 복도가 어두워졌다. 혼자 있다는 괴로움에 이경은 겁이 났고 패닉에 빠졌다.

어머닌 행동력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이경을 집 밖으로 몰아세우고 박윤형의 손에 자신을 쥐여 줄 것이다. 낯선 땅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박윤형 하나밖에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도 없었다. 공포가 뇌를 녹여 댔다. 그제야 제 처지가 떠올랐다.

“태화야! 태화야! 내 이야기 들어 봐. 내 이야기 좀!”

주먹을 쥐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단단하게 닫힌 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시다발적으로 입술 밖으로 숨이 튀어나왔다.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할게. 하면 되잖아. 살려 줘, 살려 달란 말이야. 차라리 정신병원에 넣어 줘. 나 아프잖아. 정신병자야! 혼자 밖에 돌아다니면 안 돼! 태화야!”

정신병자야, 보호자가 필요하단 말이야!

이경은 고개를 휘휘 돌렸다. 꽉 막힌 폐쇄에 혼자 있는 것처럼 두렵고 무서웠다. 숨 쉬는 게 어려웠다. 어떡하지. 죽을까. 그냥 죽을까. 근데 죽는 건 너무 무섭다. 아픈 건 싫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고개가 떨어질 때 닫혔던 문이 살짝 벌어졌다.

어둠 사이로 창백한 얼굴이 귀신처럼 떠 있었다. 팔짱을 낀 그는 현관을 막아섰다.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절대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난 개가 필요하다 했는데 왜 아직도 두 발로 기고 있어요?”

“…….”

“그 조건으로 하기엔 늦었잖아요. 그쪽도 성의를 보여요.”

이경은 입술을 깨물고 무릎을 굽혀,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짐승이 되자, 굴욕감이 배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복도로 사람이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기어가 그의 종아리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들이 오면 어떡해? 들어가게 해 줘.”

“보라 해요. 뭐, 어때요. 개들이 사람 시선 신경 쓰는 거 봤어요?”

이경의 얼굴에 피가 돌아 붉어졌다. 발끈했다. 아무리 개 흉내를 내도 본질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개가 될 순 없었다.

“아, 아직 사람 새끼구나?”

“김태화.”

“개가 돼야 들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이경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위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알잖아요. 알 텐데.

쏟아지는 태화의 시선이 뭔가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경이 웡웡 개 소리를 내자 그제야 그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안은 어두웠고 어둠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네 발로 기어 들어가는 이경의 등 뒤로 태화가 두 발로 걸었다. 굴욕적이었다. 끼이이익. 그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경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내 말도 들어줘.”

뭔데요? 그는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까닥했다.

“대신 나도 조건 있어. 선은 넘지 말자. 자는 건 안 돼.”

“어떤 자는 거? 수면? 섹스? 수면까지 안 된다는 거면 완전 날강돈 건 알죠?”

“세, 섹……스.”

낯부끄럽고 어려운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 단어가 지나간 혀가 염산이 닿은 것처럼 홧홧하게 아팠다.

“하……!”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진짜 어이없네. 다른 건 다 되는데 잠은 자지 않겠다?”

“싫으면…….”

“좋아요.”

태화는 이경의 말을 싹둑 자르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박윤형 언제 치워 줄 거야? 내 인생에서 안 보이게 해 줘.”

“어머닌 내 말이라면 껌벅 죽으니까 내일이라도 치워 줄 수 있어요.”

안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도 시선이 느껴졌다. 첨예한 시선에 등골이 송연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던 검은 눈에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먹던 짐승의 잔인성이 드러났다.

“그럼 벗어 봐. 이경아.”

이경이라니. 이경은 낯선 호칭으로 자신을 부른 태화를 응시했다.

“그럼 형이라 불러 줄까요?”

“아니, 됐어.”

아니다. 차라리 죄책감이라도 덜 받게 형보다 이경이라고 부르는 게 나았다.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외면하려 했던 것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경은 침을 삼키곤 상의 끝자락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손끝으로 부드러운 섬유가 느껴졌다.

고민이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 그런데 오늘이 지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경이 고뇌하는 동안 태화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오래 정체되어 있어 혼탁한 공기가 이경의 몸을 감쌌다. 시선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경은 조금 헐떡이며 눈을 꽉 감고 티를 끌어 올렸다.

좁은 라운드를 거치고 나온 머리칼이 이리저리 사정없이 흐트러졌다. 태화의 눈이 옷을 벗기듯 샅샅이 훑어 댔다. 그래서 옷을 벗는 건 자신인데 마치 태화가 벗기는 기분이었다. 다리를 감싸고 있던 바지와 속옷까지 모조리 벗었다.

태화는 말라 갈비뼈가 드러난 몸을 숨기지 않고 훑었다. 이경을 발라먹듯 천천히. 딱히 성욕을 일으키지 않는 볼품없는 몸이었다. 이런 몸에 왜 욕정 하며, 밤마다 잠을 못 이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정상이야. 이경은 얼른 그가 마음을 돌리길 염원했다.

“핥아요.”

교차해 있던 두 허벅지가 거만하게 갈라졌다. 언제부터 솟은 걸까. 얇은 여름 청바지 밖으로 페니스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경의 머릿속에 산재되어 있던 생각들이 시끄럽게 짖어 댔다.

이게 맞는 걸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여기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생각은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은 근육으로 쌓인 허벅지 안으로 향했다. 고작 몇 번 빠는 것만으로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면, 안락한 자신의 요새를 지킬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이경은 몸을 낮췄다. 무릎을 꿇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혹독한 겨울 같은 매서운 향이 코를 자극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벨트를 풀고, 맞물린 후크를 빼냈다.

검지로 지퍼를 끌어 내리자, 안에 갇혀 있던 여자의 팔뚝만 한 것이 튕겨 나왔다. 이경의 힘이 풀렸다. 이런 걸 어떻게 담아? 몇 번 오가면 혓바닥과 목구멍이 다 해질지 모른다. 이경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릴 뿐 벌리지 않았다. 엄지 하나가 이경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쓸고 빠져나갔다. 페로몬 때문인지 몰라도 스치고 지난 혓바닥이 화했다.

이 사이를 지나 혀를 고르게 내리누르고 빠져나간 손이 이번에 이경의 머리칼을 가르고 들어왔다. 태화는 후끈한 두피를 손가락으로 눌러, 이경의 얼굴을 바짝 당기며 삼킬 걸 요청했다.

가까워진 그의 성기를 바로 삼키는 대신 이경은 곧 사정할 것처럼 올라간 고환을 혀로 핥았다. 그러자 귀두가 더욱 커졌다.

“키우고 삼킬 거예요?”

아니, 이경은 입술을 떼 페로몬이 뭉친 그곳을 물고 빨았다. 혀로 귀두부터 소심하게 빨아 대며, 불거진 핏줄을 따라 혀를 움직였다. 기분 좋은지 그가 나른한 손으로 귓바퀴를 잡고 만지작거렸다. 그게 신경이 쓰여 한쪽 눈살을 찌푸린 이경은 혀 위에 성기를 올려놓았다.

태화의 엄지가 이경의 아랫입술을 헤집었다. 입술을 마구 문지르다 엄지를 이경의 입에 쑤셔 넣었다. 향긋한 냄새가 났다. 비누 냄샌지, 스킨 냄샌지, 페로몬인지 모를 냄새는 자극적이었다. 태화는 혀를 손톱으로 긁으며, 성기를 핥느라 자꾸 처지는 이경의 고개를 세워 시선을 맞추게 했다.

이경이 핥을수록 태화는 눈썹을 모으고 집중해 느끼고 있었다. 더 깊게 삼킬 수 있도록 자꾸 말리는 혀를 넓적하게 해,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혀로 그의 고환을 훑었다. 단단한 곳을 쓸자 태화의 입술에서 나른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의 페로몬 때문인지 몰라도 다리 사이가 습해지는 기분이었다.

“음, 잘 빠네요. 몇 명 걸 빨아 봤어요? 가만있자. 내가 기억하는 남자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태화는 희미하게 눈을 내리깔고 숫자를 세었다. 이경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어린 태화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나요?”

언제 적 이야긴데. 기억 안 나.

목구멍 속에서 말이 웅얼댔다.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이의 옹알이보다 못한 수준의 말이 이어졌다. 온전한 말을 하는 건 태화밖에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키는 건 불공평했다.

“그래서 그 새끼들 거 다 빨아 줬어요?”

그런 건 왜 묻는데? 대답해 주고 싶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은 너무 흐릿했다. 이경은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착취하는 박윤형에게 보란 듯이 여러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 이제 그만 떨어져 달라고, 아무리 우겨도 넌 수면 밖으로 밀고 나올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듯. 그건 박윤형에게 보여 주려던 경고였지, 태화의 어린 시절을 검게 물들이려고 만난 건 아니다.

이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가 아니면 밑구멍으로 닦아 줬어요?”

입술을 스친 손이 갑자기 아래로 향했다. 이경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 안을 꽉 틀어막은 성기 때문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경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아래로 내려가던 손이 다시 돌아왔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런 새끼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당신 만나지 않았을 거 아냐.”

나른한, 적당히 쾌감이 올라 즐거워진 그의 손가락이 이경의 왼뺨을 두드렸다. 차분하게 이경은 해야 할 것들을 해 나갔다. 핥고 힘주어 빨고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이제는 남자 가랑이 사이에 코를 박고 성기를 핥는 것도 단순한 일처럼 느껴졌다.

“씨발. 좆같게.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화의 눈썹이 휘어졌다. 어둠에 잠겨 무광이던 그의 눈이 반지르르 빛이 났다. 그가 일어서 이경의 어깨를 잡고 성기를 깊게 처박았다. 목젖까지 치고 들어온 성기에 이경은 진저리 쳤다.

“나 혼자.”

이 아래로 성기가 여린 살을 헤집고 지나가 목구멍 끝에 닿았다. 입술을 감싸고 있는 막이 벗겨질 정도로 뜨거워 녹아내릴 거 같았다.

“발기하고.”

딱딱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이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입 안에 든 것이 점점 부피를 키우며 단단해지고 있었다. 해면체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불쾌했고 무서워 살면서 노팅을 누군가에게 허락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태화가 뭘 하려는지 잘 안다.

노팅이다.

“욕정 하는 거 기분 나쁘다고요. 흥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이러면 그쪽 부탁 들어줄 맛이 나겠냐고요. 개새끼가 되려면 똑바로 해야지, 어설프게 사람 흉내 내면 개새끼인 내 기분이 어떻겠어요?”

이경이 입 안에 있는 것을 뱉어 내고 도망가려고 하자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단단히 쥐었다.

“입 구멍에 싼다고 임신하는 건 아니니까 뱉어 내지 말고 꽉 물고 있어요. 아래에 박고 싶은 거 참아 줬잖아.”

그가 엄지로 조금 흘러나온 타액을 닦아 주었다. 혀와 입천장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가 목구멍까지 확장해 숨을 먹어 갔다. 끝을 모르고 커지는 성기에 이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코로 숨 쉬어.”

이경이 참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비릿한 정액이 목구멍을 적셨다. 고작 정액 조금 삼킨다고 임신하는 것도 아닌데, 삼키기 무서웠다. 이경은 참지 못하고 입 안에 있는 성기를 뽑아냈다. 이경의 타액으로 흐려진 성기가 허공에서 흔들리며, 정액을 줄줄 흘렸다.

이경은 땅에 엎어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안에 있는 정액을 뱉어 냈다. 그의 체액 같은 건 먹기 싫었다. 자신은 그저 도구니까. 저벅 발소리를 내며 그가 다가왔다. 불길함에 이경은 발바닥으로 땅을 밀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왜 그래, 끝난 거 아냐?”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보호하자 아래쪽에 바람이 들었다. 허했다. 그 틈을 노리지 않고 그의 손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연약한 아래를 강하게 쥐었다.

“핫……!”

순간 머리에 흰 불꽃이 일었다. 아래에서 시작한 짜릿함이 곧장 뇌에 꽂혔다

“겨우 이 정도로? 누가 끝났대요? 끝나고 말곤 내가 정해.”

연약한 아래 살덩이를 그러쥐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자 뇌 속이 쾌감으로 뭉근하게 비벼졌다. 이경은 그만하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을 막기 위해 엉덩이에 힘을 주어 누르자 오히려 그 팔 위에 앉은 것처럼 되었다. 습한 다리 사이를 뚫고 들어온 그것이 맞물려 있는 살덩이 뒤에 숨겨진 출입구를 찾아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으흡, 안 넣는다 했잖아!”

이경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빼내려 할수록 그가 몸을 이용해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몸이 자신을 누를 때마다 안쪽에 처박힌 손가락도 안으로 더 밀고 들어왔다. 손가락이 길쭉해, 꽤 깊은 곳까지 들쑤셨다. 안쪽으로 기어 들어오는 손가락을 피해 이경은 엉덩이를 들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움직임이 용이해진 태화의 팔이 마구잡이로 안에 드나들었다.

끔찍한 쾌락이 배 아래와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힘이 빠져 공중에 떠 있던 엉덩이가 아래로 추락해, 태화의 굵은 팔 위로 안착했다. 팔이 오갈 때마다 고운 손바닥이 회음부를, 단단한 손목이 고환의 사이를 쓸었다. 진저리 쳐질 정도의 쾌락이 쓸고 지나갔다. 울음과 같은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넣고 싶어 죽겠는데 이걸 넣을 수 없잖아요.”

그가 노팅으로 아플 것처럼 부풀어 오른 성기를 눈짓했다. 이경은 정신없이 치대는 아래에 신경을 끄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성기 끝에서 계속 투명한 정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흐흣. 이, 게 읏, 섹스가 아니면 뭐야?”

“순진한 척은. 고작 손가락 넣은 게 뭐 어떻다고요. 얘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정액을 싸지르길 해요? 그렇다고 노팅을 해요? 손가락 넣은 게 섹슨 아니지.”

이런 것도 섹스지 거짓말쟁이! 빼! 빼라고! 자신을 누르는 몸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몸부림을 쳐 봤으나 자세도, 힘도 유리한 위치에 있는 건 그였다. 이경은 이를 악물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손 하나는 이경의 안에 처박혀 있어 반사신경이 좋은 태화라도 뺨을 그대로 내줘야 했다.

“싫다면서 왜 질질 흘려요?”

이미 그의 손에 끈적한 것이 흘러내렸다.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이경의 몸이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오랜만의 침입에 안쪽 근육이 반응했다. 아등바등 그게 뭔지도 모르고 꼭꼭 씹었다.

위에서 비웃음이 떨어졌다.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온 손가락이 안을 휘젓는 걸 느껴야 했다. 회음부가 문대질 때마다 성기가 위로 솟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휘저어 예민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안쪽 어딘가를 문대자 정신없이 떠들던 이경의 입이 다물어지고, 손톱으로 사정없이 그곳을 긁자 이경의 입술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쾌감이었다. 역치가 낮은 몸에 몰려오는 짜릿함에 반쯤 누워 있던 이경의 성기가 꼿꼿하게 섰다. 이경은 저도 모르게 맞붙은 태화의 단단한 배에 성기를 문질렀다. 덥고 끈적했다. 이런 건 끔찍하게 싫은데도 멈출 수 없었다. 뇌가 익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쯤은 본능이었다.

점점 문대는 속도가 빨라질 때쯤 눈앞이 희게 튀었다. 그리고 한계치까지 부풀어 오르던 성기가 바람 빠지듯 쪼그라들었다. 빠져나온 손가락에 흥분과 쾌감의 흔적이 가득했다. 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에 연결된 애액이 늘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쌌다.

“좋죠?”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태화는 뜨겁게 열이 오른 사정의 기운에 진저리 치는 이경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경은 계속 늘어지려는 다리를 모았다. 뒤꿈치로 그곳을 보호했다.

“지금은 안 돼. 갔잖아. 한 번 갔잖아. 아직 몸이 멈추지 않았어. 지금은 아냐. 더 안 돼.”

이경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없이 안 된다고 했다. 애원을 비웃듯 태화는 이경의 발목을 잡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이성이 죄 끊어졌다. 뇌가 밟혀 으깨지는 기분이었고 몸이 부산스럽게 떨렸다. 그러면서도 안이 미끄러워 손가락 하나를 쉽게 먹었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중지가 더해졌다. 아까보다 더한 압력이 아래에서 밀고 들어왔다.

이경은 허벅지로 그의 손을 꽉 조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문대지는 것만으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태화는 아까의 탐색으로 찾아낸 이경의 약한 곳을 집중적으로 문댔다. 아까 느꼈던 수치심이 머릿속에서 모조리 날아갔다. 뜨거운 용암에 던져진 것처럼 온몸이 녹아내렸다. 더, 더 강렬한 자극을 원했다.

“태화야. 제발, 하읏. 태화야.”

미치겠다. 돌아 버리겠다. 태화의 이름을 헐떡이며 속삭이는 걸 들으면서 명곡을 감상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더. 더. 안에, 읏, 안에. 괴로워.”

“알아요. 나도 그래.”

내내 괴로웠고 이때만을 기다렸어요.

헐떡이는 메마른 이경의 뺨으로 열기가 더한 입술이 닿았다. 타액이 엉킨 혀가 이경의 볼품없는 뺨을 핥았다. 불이 붙었다. 낙인이 찍힌 곳부터 시작해 뜨거움이 옮겨 갔다. 배가 뜨겁다. 뜨거운 걸 안쪽에 부어 달라고 보채며 이경을 괴롭혔다.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게 눌러 주길 바랐다. 크기가 부족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아래를 꽉 막아 몰아붙여 줬으면 좋겠다. 아래가 다 닳아 사라질 정도로 말이다. 이경의 엉덩이가 그의 손 위에서 들썩였다. 그때마다 습하고 끈적이는 소리가 났다.

“……해 줘.”

넣어 줘, 태화야. 이경은 그의 손가락에 질척하게 끈적한 물을 흘리며 울었다. 매섭게 몰아붙이던 태화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힘없이 허물어져 있는 이경의 다리를 벌리고 그가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흥분으로 담금질된 뜨겁고 단단해진 귀두가 들어가려, 아래를 짓누르고 있을 때였다. 손가락이 수차례 드나들어 녹진하게 풀어져 저항 없는 곳으로 귀두가 진입하려 했다.

“줄게, 이경아.”

사냥을 완성하기 위해 목표물을 오래 기다려 취한 짐승처럼 그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음이 목을 울리고 나왔다. 서늘한 이가 목에 내려앉았다.

<……이경아>

그렇게 부르며 미성숙한 몸으로 이경을 깔아뭉개던 그가 떠올랐다. 뜨거운 숨을 학, 학, 뱉어 내며 목덜미를 깨물려 하던 그때가. 이가 내려앉으려는 순간 이경은 반사적으로 목을 가렸다. 이렇게 되면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확 정신이 깬 느낌이다. 자신을 누르고 있던 태화의 눈이 몇 년 전과 다르지 않다.

축축하고 음습한 어두운 것.

기대에 찬 숨이 목덜미에 닿자 몸을 감싼 공기가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냐, 이건 아냐.”

정신없이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잔잔하던 그의 눈에서 짜증이 치솟았다. 사냥의 완성은 식사까지였다. 중간에 망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에서 음울한 소리가 나왔다. 이경은 느슨해진 팔을 뿌리치고 네 발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쾅쾅 뛰는 심장만큼이나 대리석 위에 닿는 무릎도 쿵쿵댔다. 알싸한 통증이 무릎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이경의 발목이 잡혔다. 두려움에 돌아보자 어둠 속에 태화가 있었다.

“오지 마, 꺼져! 꺼지라고!”

몸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속삭이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넣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제 끝이야!”

평생을 몰랐으면 하는 걸 볼 것 같은 큰 불안감이 이경의 등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하? 태화는 한숨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사냥을 마치고 막 식사를 하려던 맹수의 얼굴에불쾌함이 드러났다. 뜨겁게 타올랐던 눈이 식어 내렸다. 조금 허탈한 웃음을 내뱉은 그가 일어나 옷을 털었다. 식사를 방해당해 기분 나쁜 눈치였다. 그는 공포에 질려 도망갈 눈치만 보는 이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싫으면 여기 있을 자격 없잖아. 나가.”

태화는 버림에 있어 가차 없었다.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 뭘 위해서 그걸 했는데? 한 번만 핥으면 도와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이경은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해 줄 거지?”

“뭘요? 난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핥으면 된다 했잖아.”

“그건 그때고 지금은 다르잖아요.”

“김태화.”

“침대에 눕혀지기 싫으면 나가. 지금 어디에라도 처박고 싶은 심정이거든.”

이경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난 크기에 놀라 현관 쪽으로 달려 나갔다.

“구경거리 되고 싶지 않으면 옷은 입고 나가야죠.”

그러곤 자신이 벗어 놓은 옷가지가 날아드는 걸 보자 이경은 화가 끓어올랐다.

“자는 건 안 된다고 했잖아! 먼저 약속 어긴 건 너잖아!”

약속을 어긴 건 넌데 왜 그러냐고 악다구니를 썼다. 엄연히 계약을 위반한 건 그였다.

“어쩌라고.”

시정잡배와 같은 껄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이미 내 앞에서 넣어 달라고 가랑이까지 벌려 놓고 그런 소리 하는 게 웃겨서요. 사실 당신도 내가 넣길 바랐잖아?”

그랬나? 그랬었나? 이경의 머릿속이 정신없었다. 정말 그를 원했나? 아직도 그의 손가락이 든 것처럼 아래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여전히 습했고 페로몬을 풍기며 그를 당기고 있었다. 나른하고 뜨거운 몸에 그를 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잖아.

“그래 놓고 계속 나만 비난할 건가. 비겁자.”

이경은 뜨거운 비난을 등으로 받아 내며 허겁지겁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걸치고 도망쳤다. 비겁자, 비겁자, 비겁자, 그 말이 머릿속에 뱅뱅 떠돌았다. 그의 손가락이 드나들었던 아래가 아팠다. 태화라는 이름이 오늘따라 유난히 다르게 뇌리에 깊게 박혀 왔다.

* * *

찰나였을지라도 태화에게 그런 불경한 마음을 가졌다는 죄책감이 이경의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페로몬에 이끌렸든, 상황이 이경을 거기로 몰아세웠든 결국 스스로 다리를 벌린 건 사실이었다. 넣어 줬으면 했다. 단단한 몸에 깔려 신음을 지르고 싶었다. 혼자선 도달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가 데려다주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괜찮은 핑계도 있었다. 태환 알파고 이경은 오메가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빌려 보려 했었다. 그때만큼은 피부 아래에 흐르는 피 따위 꺼릴 게 없었다. 그래 놓고 지레 겁먹고 그를 비난했다. 태화의 말이 맞다. 이경은 비겁자였다.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이경은 며칠 앓았다. 피부로 독한 페로몬을 먹은 몸이 알파를 달라고 울어 댔다. 차라리 히트사이클이었으면, 억제제라도 먹어 볼 텐데 이건 약으로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특히 아래, 막 들쩍지근한 사탕을 집어삼키길 고대했던 그곳이 제일 보챘다. 다리 사이가 뻐근하고 배 안이 뭉근했다.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다니는 열기에 이경은 온 집 안을 굴러다니며 태화가 남긴 열병을 앓았다.

앓는 동안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 물 한번 마시지 못해 입 주변에 거스러미가 올라오고, 얼굴이 많이 상했다. 특히 눈 아래가 거뭇거뭇했고, 도망의 흔적이 무릎엔 시퍼렇게 멍으로 남았다.

얼굴의 피가 다 뽑힌 것처럼 희게 죽은 얼굴로 이경은 거실로 갔다. 생수병 하나를 까 입에 댔다. 빨리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마시다 보니 물이 절실해져 생수병을 크게 기울였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코끝이 매웠다. 입으로 마구잡이로 들어온 물 때문에 욕실로 달려갔다. 쿨럭대며 기도로 잘못 넘어간 물을 세면대에 뱉어 냈다. 어느 정도 기침이 멎어 갈 때쯤, 레버를 올려 쏟아지는 물로 이경은 입 안을 헹궜다.

일주일이 지나갈 동안 태화는 전화하지 않았다. 찾아오지 않았다. 사회적 통념과 도덕은 지켰어도 관계는 지키지 못했다. 잘한 걸까? 차라리 그때 해 버렸으면 사회적 통념은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관계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혼자 앓는 게 아니라 옆에 태화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지? 이경은 멍한 표정으로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 다 죽어 가는 무광의 눈이 이경을 쏘아보고 있었다. 쏴아아. 물이 세차게 떨어져 수챗구멍으로 빠지고 있었다. 자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이기적이었다. 단순한 쾌락과 향락이 좋은,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

이경이 고개를 숙여, 입을 헹구자 맡지 못했던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땀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맴도는 태화의 페로몬에 이경은 와락 눈살을 구겼다. 그날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태화가 내뿜고 있던 페로몬이 농도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려 줬다. 거기에 몇 시간 동안 노출되었으니 앓는 게 당연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밖에 나오던 이경은 흠칫했다. 낯선 풍경이다. 거실에 어머니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곳을 싫어했다. 아마 이곳에서 이경의 음울한 인생 냄새가 지독히 나 기피했을 거다. 이곳에 매몰된 이경의 꿈, 시간이 싫었겠지. 누구보다 또렷하게 찬란했던 이경의 인생의 전성기를 가까이서 봤고 기억하니까.

어머니 윤옥연을 보자 안 그래도 얇아져 끊어질 거 같은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는 요즘 매일 찾아와 이경을 몰아세웠다. 어느 날은 다정한 말로, 어느 날은 혹독하게 이경을 매질했다. 이경이 프로로 활동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머니와 이경의 이견은 좁아지지 않았다. 골프는 좁아질 수 없는 문제였다.

태화, 박윤형, 어머니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이경을 몰아치고 있었다. 갯벌에 갇혀 밀려오는 밀물을 보는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건 끝이라도 있지, 이건 끝없는 고통이었다.

“안 한다고 했어요. 골프라면 치가 떨려요. 쏟아지던 기사 못 봤어요? 어머니 그거 고소하고 그랬잖아요. 누구보다 화내셨잖아요. 거기에 절 또 세우려고요?”

“우선 앉아.”

“제 인생이에요. 어떻게 쓰고 이용하든 제 마음이에요.”

“우선 앉으라 했어.”

털을 잔뜩 세우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이경은 욕실 앞에 서서 말을 쏟아 냈다. 대조되게 어머니는 침착했다. 어제까지 이 집에서 나가라며 화를 내던 그녀는 오늘은 침착한 가면을 쓰고 온 듯했다.

“욕심이세요.”

“김 선수 보고 싶단 게 욕심 아니잖아. 행복했잖아. 트로피 들고 인터뷰하던 네가 아른거려.”

그녀는 과거에 사로잡혀 매일같이 이경을 찾아와 김선수 노랠 불렀다. 그렇게 기뻐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골프 안 해요. 안 한다고 했어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이미 윤형이랑 계약했어.”

“됐다고 해요. 없던 거로 하자고 하라고요. 잘 말하면 물러 줄 거예요.”

“무를 생각 전혀 없어.”

“어머니 마음대로 한 거지 내가 한 것도 아니잖아요.”

“네 대리인이 한 거지.”

머리가 아찔했다. 거대한 벽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이미 어머니 윤옥연은 거대한 벽이 되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이경의 의견을 고려할 생각이 없었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안 한다고 했잖아요. 가서 물러요.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면 걘 괜찮다고 할 거예요. 박윤형이 어머니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면서요. 설마 고모한테 위약금을 물어내라 하겠어요?”

그래, 박윤형은 사촌이었다. 평생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던 이유. 그가 수면 밖으로 나올 수 없던 이유였다.

“이런 기회 없어. 지금이 적기야, 이경아. 복귀할 수 있는 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더 늦으면 돌아갈 수 없어. 얼굴 그렇게 된 거 흠 아니야,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린 사람들도 잘만 살아. 왜 너만 유난이야? 이쯤 기다려 줬음 됐잖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니?”

얼굴이 다친 게 아니다. 마음이 잘려 나간 거다. 사람들에게 환멸이 났다. 그래도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잖아. 넌 왜 그러지 못하고 주저앉아? 좋은 부모님 덕분에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그래. 돈 벌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이경의 귓속을 웅웅대는 말 때문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염증이 이는 말이 어머니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그렇다고 어머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지 백번 양보하면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그런데 상대가 잘못됐다. 박윤형. 그게 잘못됐다. 치가 떨리게 무서웠고 두려웠다. 최대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오래오래 피해 다니고 싶었다.

“저 정신병자예요. 아프대요. 제정신이 아니래요. 사람들이 다 미쳤고 아프다는데 어머니 혼자 괜찮대요. 돌아가지 못한다고요. 여기 이 집이 제 한계라고요.”

“그래서 하자는 거잖니. 아프니까 다시 찾아 주고 싶은 건데, 아프지 않던 그때로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을 왜 몰라. 다 서포트 해 줄 수 있어.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없어.

어머니는 말을 전부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그거 어머니 욕심인 거 아시죠?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 떠밀어서 뭐 하게요. 당장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든데!”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이경은 망가졌다는 걸 외면하는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 주려 더 혹독한 말로 몰아세웠다.

“사실 내가 아니라 어머닐 위해 그런 건 아니고요?”

어머니는 이경이 밖으로 집어 던졌던 트로피들을 주워 본가로 가져가 진열했다. 이경이 나온 기사를 모조리 스크랩 했던 파일도 아직 가지고 있었다. 이경이 쓰레기같이 버린 과거를 끌어안고 집착하는 건 그녀였다.

“어머니라도 소송할 거예요. 그럴 권리 없어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이경은 겁박하려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한번 집착하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지라 이런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만큼 싫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진절머리 났다.

“윤형이 말 들어 보고 정해.”

“그 새끼 말은 들을 가치도 없어요.”

“여기 와 있으니까 이야기해 보고 결정해라.”

뭐? 이경의 손에 들려 있던 수건이 아래로 추락했다.

“곧 손님 오니까 얼굴 좀 단정하게 하고.”

꼿꼿하게 앉아 있던 어머니 윤옥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간 그녀가 문을 열었다. 반듯한 등에 가려 밖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냄새나 말투, 그것들은 이경이 경계하던 거였다.

“많이 기다렸니?”

“아뇨, 별로 안 기다렸어요. 이야긴 다 끝났어요?”

“그래.”

밖에 누군가 있었다. 희미하게 남자 목소리가 났다. 손가락을 입속에 밀어 넣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숨을 죽였다.

“정말 들어가도 돼요? 이경이가 놀랄까 걱정돼요.”

오지 마, 제발.

애타는 이경의 절규에도 저벅저벅 발소리가 났다. 땀이 별로 없는 이경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자 투명한 땀방울이 묻어났다. 어두운 내부와 달리 문밖으로 쏟아지는 빛이 무서웠다.

“오랜만이다.”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귀를 강타하자 이경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침이 절로 목 뒤로 넘어갔다. 눈앞에 선 박윤형은 십 년 전과는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뺨이 찌르르하고 울었다. 찌그러든 뺨이 움찔거렸다. 그때의 통증이 다시 유발했다. 수차례 꿈에서 그를 찔러 죽였었다. 눈알을 빼내고 내장까지 산 채로 도려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게 케케묵은 증오냐면 그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자비 없이 자신을 훼손하던 그 잔인함을 알기에, 이경은 뒤로 물러섰다.

“이경아, 인사 안 할 거니?”

반쯤 패닉에 빠진 이경의 팔을 어머니가 재촉하며 끌어당겼다. 긴장이 풀려 버린 근육은 조그마한 힘에도 다리가 풀려 고꾸라졌다. 멍하니 주저앉자 그녀가 놀라 다가왔다. 걱정스레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 뒤로 박윤형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와서 이경이가 많이 놀랐나 봐요. 아직도 사람이 무섭대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데. 이경이가 왜 이러는지.”

여기라고 안전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방심했다. 더 좋은 은신처를 만들어야 했다.

“이경아.”

다급하게 소리치는 윤옥연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박윤형만이 눈에 들어왔다. 뺨이 뜨겁고 아파 이경은 가만히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미미하게 박윤형의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아무런 반응 없이 얼어 있는 이경을 응시하며 박윤형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하다.”

“괜찮아요, 저희 꽤 친했어요. 금방 적응할 거예요.”

“윤형아.”

“저 믿어 봐요. 항상 고모님께 좋은 소식만 들려주잖아요. 본채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박윤형은 입술을 벌려 악마처럼 어머니를 속이고 있었다. 이경의 뺨을 망친 손으로 어머니의 팔을 잡고 부축해 밖으로 떠밀었다.

그는 입술을 말아 올리고 힐끔 이경을 바라봤다. 악마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야 했으나 힘이 빠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처럼. 자고 있는 자신의 뺨에 뜨거운 다리미를 올려놓던 그날처럼.

<애초에 난 그걸 비밀로 할 생각 없었어, 이경아. 그러니까 제안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 네가 영원히 입 다물고 있어 준다면 나도 영원히 말하지 않을게. 이래야 공평하지, 안 그래?>

죽을 듯이 아픈데 입에서는 괴로운 신음밖에 나지 않았다. 아파서 기어가는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벌려 강간한 사람이 앞에 있는데 이경은 입술을 뻥긋거리기만 했다.

<그래서 신고할래?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말할래?>

잠시 먼 과거에 그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네가 내 아래서 앙앙 우는 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근친상간이래. 너랑 나랑 몇 년이나 이러고 살았는데 그거 다 말할래?>

마지막에 박윤형이 지껄이던 말이 잡음으로 들렸다.

<근친상간했다고! 사실 사촌과 붙어먹었다고! 아주 좋다. 골프 스타 김이경 인생이 어떻게 얼룩지는지 보자.>

어두운 곳에서 벌어진 이경의 동공이 좁아지지 않았다. 악마 새끼.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윤형이 이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던 어머니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문이 닫히자 집이 어두워졌다. 다정한 미소를 짓던 박윤형은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들췄다. 틈 사이로 어머니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그는 천천히 이경에게로 돌아섰다. 머릿속에서 이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이경이 돌아서 도망가려 하자, 윤형이 내달려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두피가 벗겨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안녕?”

통상적으로 안녕이란 인사는 친한 사람들끼리 오고 가는 안부였다. 건재하던 인생을 무너트려 놓고 이렇게 다정하고 달콤한 인사라니 끔찍했다. 이런 인사를 건넬 자격이 없었다. 꺼지라고, 당장 나가라고 소릴 지르고 싶었지만, 대신 이경은 숨을 빠르게 들이마셨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면 못 올 줄 알았어?”

박윤형은 비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집착했었다.

“잘 찍혔네. 내가 남긴 거 잘 가지고 있네. 그러니까 왜 헤어지자고 해. 안 그랬으면 얼굴을 망칠 필요가 없었잖아.”

박윤형의 손가락이 뺨을 쿡쿡 찌르자 아래에서 샐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이경은 갑작스러운 배뇨감에 그의 손을 쳐내고 화장실로 미친 듯이 달려가 바지를 찢듯이 내렸다. 공포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 소변이 질질 흘러내렸다.

연한 물줄기가 변기통에 고여 있던 물과 섞이는 걸 보지만 이경의 신경은 등 뒤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등으로 남자가 바짝 붙었다. 겁이 나 움직이지 못했고 손이 달달 떨려 오줌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쪼그라든 이경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정확히 변기 안으로 소변이 들어가도록 방향을 맞춘 박윤형은 코로 목덜미를 문댔다. 그의 살이 닿은 피부에 박힌 털이 바짝 섰다.

제발 가, 싫으니까. 또 얼마나 괴롭히고 착취하려고.

이경은 염불을 외웠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그는 듣지 못했다. 들렸다 해도 들어줄 사람도 아니었다.

“많이 아프다고 하더니 소변도 제대로 못 눌 정돈지 몰랐어.”

왜 온 거냐고,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찾아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은 그였다. 그가 심어 둔 공포를 학습한 몸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뜨거운 뺨을 잡고 뒹굴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박윤형은 두 번을 사정할 때까지 놔주지 않았다. 사람의 뺨을 무참히 훼손하고 그는 겁을 먹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신고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사촌과 치정으로 생긴 이 흉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걸.

“난 말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거니까 나가. 내 인생 들쑤시지 말고 가.”

“그건 나도 똑같지. 네가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근데 그 약속에 다시 찾아오지 않겠단 건 없었잖아.”

이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윤형은 휴지로 성기 선단에 묻은 소변을 닦아 주며 정신없이 벗어 놓은 바지를 도로 입혔다.

“내가 와서 충격 먹었어?”

태연하게 박윤형이 묻자 이경은 이를 꽉 물었다.

“뺨 때문에 그래? 사과하면 되잖아. 미안해.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거든. 그렇게 오래 사랑하고 기다려 줬는데, 네가 누굴 만나든 참아 냈는데 헤어지자니까 내가 제정신이겠어? 전부 부정당한 거잖아. 같이 해 놓고 재수 없게.”

“…….”

“내가 겁간했던 것도 아니잖아.”

박윤형의 말대로 처음엔 겁간이 아니었다. 사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첫 히트사이클이 온 밤은 부모님이 결혼기념일로 여행을 갔던 날이었다. 마침 박윤형의 아버지도 출장을 갔었다. 어른들이 모두 집을 비우자 이경은 사용인들을 피해 박윤형의 집에서 지냈다. 동갑내기 사촌. 홀아버지 아래서 커 비교적 사생활 터치가 없는 그곳은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새벽이 될 때까지 게임을 하던 이경은 박윤형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에 이끌려 코를 킁킁댔다. 반쯤 충동 상태였다. 왜 그러냐고 묻는 박윤형을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히트사이클에 정신이 맛이 간 상태였다. 상대가 사촌이든 뭐든 그때는 상관없었다. 우선은 욕구를 해결하고 싶었다.

솟아오르는 욕구를 해결하고 잠에서 깨어났을 땐 하루가 지나 있었고, 옆에 옷을 벗은 박윤형이 있었다. 그때 깨달았었다. 사촌이어도 몸을 데워 주는 건 똑같고 연인들끼리 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걸. 비틀린 사춘기의 감수성은 그게 짜릿하다고 느꼈었다.

어른들이 모르는 행위를 하는 건 근사하고 멋진 줄로만 알았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박윤형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바람이 빠지는 웃음을 냈다.

“몇 년을 너 하나만 보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헤어지자 해? 봐, 네 주위에 남은 게 누구야? 네가 결혼하겠다던 그 적당한 알파? 그 새끼 네 얼굴 그렇게 되자마자 제일 먼저 도망갔잖아.”

“나가. 나가라고!”

“나가서 떠벌려도 돼?”

“가서 말해 봐. 내 뺨 이렇게 만든 게 너라고 말할 거야. 내 인생 망가뜨린 거 너라고 다!”

“그래, 같이 말하자. 그것도 말하자. 네가 제일 숨기고 싶어 하는 그거.”

‘비밀’

박윤형은 또 비밀을 걸고넘어졌다. 이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에 가시처럼 박힌 태화가 걸리적거렸다. 그게 밝혀지면 태화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반복되자 이경은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 그건 무서워? 그렇구나. 이경인 그게 제일 무서운 거구나. 하지 말까?”

이경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고모님에게도 말하지 말까?”

이경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대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고모님한테 가서 얌전히 골프 하겠다고 해. 우리 그때 좋았잖아. 다시 돌아가는 거야.”

좋았다고? 언제? 그때? 한 번도 좋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비이성적으로 난잡하게 몸을 굴렸었다.

“태환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가 뭔 짓을 한다고? 이경아, 난 누구보다 태화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 근데 눈이 돌아 버리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되더라. 그날처럼.”

“할게, 다 할 수 있어. 하면 되잖아.”

옛날에도 했던 거였다. 어려운 건 아니다.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박윤형은 가볍게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럼 키스부터 해 볼래?”

목이 막혔다. 입술 사이로 드나드는 통로가 좁아져 쉭쉭 거리는 바람 소리가 났다. 이경은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눈을 꽉 감고 박윤형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안으로 살덩이가 밀려왔다. 물컹거리는 감촉에 토악질이 났다. 고기가 싫다. 짐승의 고기든, 사람 고기든.

박윤형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경을 밀어내더니 큼지막한 손으로 뺨을 내리쳤다. 무시무시한 폭력이었다. 이 집에 틀어박힌 이후로 이경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픈 감각이 낯설고 무서웠다.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모두 십 년 전 그때로 연결되었다.

“너 이렇게 눈을 반쯤 내리감고 깔보듯이 키스하는 걸 좋아했잖아. 마치 모든 걸 다 가진 왕처럼. 그렇게 해.”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이라 이경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으로 서 있자 박윤형의 눈이 화로 얼룩졌다.

“됐어. 내가 가면 고모님께 오늘 만남이 유익하고 재밌었다고 전해. 다음에 올 때는 놀라서 주저앉지 마. 안 그럼 확 불어 버릴 테니까.”

이경이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윤형이 큼지막한 손으로 머리를 덮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고분고분해서 좋다. 사랑하는 거 알지? 우리 좋게 좋게 가자.”

작게 속삭인 그가 눈을 휘며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기분이 좋은지 낮게 노래를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빛 속으로 그가 사라지고 집이 다시 어둠에 잠기자 이경은 다리 사이에 힘없이 얼굴을 묻었다.

정신없이 웃던 이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윤옥연에게 연락했다.

하겠다고, 그 빌어먹을 골프를 다시 시작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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