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줄타기 (3/6)

03. 줄타기

[비운은 골퍼 김이경 월드 스포츠와 계약해]

[잠적했던 김이경 선수 복귀 초읽기]

[내년 미국으로 훈련을 떠날 예정 목표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

[아름다운 날갯짓, 김이경 선수 다시 비상을 꿈꾸다]

[김이경 선수 그날에 대해 입 열까?]

다음 날 기사가 쏟아졌다. 박윤형의 행동력은 놀라웠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배고픈 기자들에게 자극적인 소스를 던져 놓았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을 앞두고 얼굴에 테러를 당해 사라졌던 김이경이 복귀한단 소스는 잘만 요리하면 며칠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이경은 쏟아지는 웹 기사들을 눈으로 읽다가 휴대폰을 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비운의 골프 스타가 김이경이 다시 돌아온다는 기사에 기뻐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권위 있는 대회에서 3회 우승컵을 쥐었고 그 당시 이경의 나이가 어린 편이었기에 누구도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실패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랬던 이경이 불의의 사고로 추문에 휩싸이며 은퇴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끌어내려진 거라 이경의 복귀 소식에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응원해요, 김이경 선수!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기쁜 사람 중에 이경만이 웃지 못했다. 화려한 성과 뒤에 숨은 이면을 자신만이 알기 때문에. 박윤형의 폭력과 학대, 착취로 나온 결과였다. 경기로 부서질 듯한 정신을 안고 싫은 박윤형과 몸을 섞어야 했다. 싫어도 훈련장에 나가야 했고, 부상을 입어도 박윤형의 말이라면 경기를 뛰어야 했다.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박윤형은 이경을 욕하고 때리고 협박했다. 화려한 경기 성적은 이경이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결과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기사가 이렇게 났으니 발을 빼기 더 어려워졌다. 다시 골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헛웃음만 나왔다. 근 십 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18홀로 구성되어 있는 골프 코스를 돌려면 오래도록 필드에 머물러야 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골프는 정신 싸움이었다.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부서질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풍향, 바람 양을 계산하고 잔디 위를 구르는 골프공의 마찰력과 해저드(장애물), 갤러리 등, 코스를 돌며 만나는 모든 변수를 전부 생각해야 한다. 감으로 하는 게 아니다. 노련하게 경험에 기대어 사용할 골프채, 공을 쳐올리는 각도, 파워까지 짧은 시간에 수만 번 고민해 계산해야 한다. 만약 하나라도 잘못 선택하면 그대로 성적에 반영된다.

정신이 불안한 이경이 그 기나긴 시간을 견뎌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갤러리에게 분풀이를 하든지 골프채를 던져 놓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라니. 무엇보다 PGA 투어를 다시 준비한다는 것부터 웃음이 났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도 국내 경기에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몇 년을 훈련해도 겨우 아마추어와 어깨를 나란히 할까 말까다.

성적이 없어 자격이 소실된 이경의 경우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프로로 올라가려면 요건을 갖춰야 했고, 요건을 갖추는 데 1~2년, 거기에 시드권을 얻으려면 PGA 투어 2부에 응시해야 했다. 퀄리파잉스쿨*이 폐지된 이후로 PGA투어 프로로 가는 길이 어려워졌다.

오래도록 이경과 호흡해 온 박윤형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공수표를 마구 날리며 언론 플레이를 하는 이유가 뭘까. 그게 아니면 뒤를 봐주는 부모님의 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부모님이 쓰러져 가던 매니지먼트에 투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고, 가지고 있던 협회에 가맹되어 있는 골프장까지 아낌없이 박윤형에게 오픈했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다. 얼마간 기초 체력을 올리고 예전에 이용했던 연습장에서 간단하게 체크를 할 생각이었다. 골프백을 채울 클럽을 다시 구성해야 했고 과거에 멈춰 있는 프로필 사진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스튜디오 촬영이, 몇 주일 후엔 잡지사 인터뷰가 잡혔다.

단조롭고 일정이라곤 없던 이경의 스케줄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해야 했다. 그게 더 싫었다. 웅웅.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려 줬다.

[골프존에 가서 골프채 테스트해. 전에 네가 자주 쓰던 거로 준비해 놨어. 늦으면 어떻게 되는진 알지? 말하는 것도 입 아프다]

박윤형이었다. 보자마자 이경의 이마에 실금이 생겼다. 반쯤 협박조가 뒤섞인 메시지를 지우던 이경의 손이 멈췄다. 메시지 하나가 더 와 있었다.

[좋아요?]

발신인에 ‘태화’라고 적혀 있었다. 이경은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말이 순수하게 읽히지 않았다.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그래, 좋아]

이후로 태화에게서 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 구분되지 않았다.

* * *

가볍게 골프채 테스트가 끝났다. 준비해 놓은 채들은 이경이 프로 시절 즐겨 썼던 것들이었다. 우드, 아이언, 퍼터 등 만져 보지도 않고 눈으로 골랐다. 스윙 웨이트를 가늠하기 위해, 선수들은 보통 여러 테스트를 하기 마련이다.

이경은 이번엔 박윤형에게 맞아 죽어도 골프 하는 시늉만 할 생각이었다. 골프는 이경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이 골프채를 다시 잡기 원한다면 적당히 시늉만 하다가 뒤로 빠질 생각이었다. 이런 정신 상태로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고, 안 되는 걸 질질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골프를 그만두었던 그때가 적기였다. 그 시기 어깨 부상을 입은 채로 무리하게 대회를 진행하고 했었다. 한계에 부딪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습 경기도 번번이 성적이 지지부진했고,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규모가 작은 대회에서 갤러리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부담감이 온몸을 따라다녔다. 이유야 어찌 됐든, 어떤 뒷소문에 휩싸여 은퇴했다지만, 모두가 박수칠 때 떠난 것이다.

이경이 고른 골프채를 더블 체크한 매니저는 이 목록으로 주문을 넣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이경은 체력실로 내려가 오랜만에 런닝을 뛰었다. 줄줄 흐르는 땀을 닦고 트레이너와 함께 가볍게 코어 운동을 끝냈다. 운동 강도는 높지 않았고 길지 않았다. 오랜 기간 권태와 게으름으로 늘어진 근육을 확인한 트레이너는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건 무리라 판단해 차차 늘려 가기로 결정했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운동을 끝내고 이경이 탈의실에 들어갔다.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 취업 전선에 뛰어든 신입이라 작은 일에도 긴장했다. 특히 이경을 어려워했는데 그게 얼굴에 다 드러났다. 아직 감정을 숨기지 못할 만큼 사회의 때가 덜 묻어 있었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매니저가 검은 봉지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생수 한 병을 꺼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이경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햇병아리 같은 매니저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찾아내려 애썼다. 팬이었다면서 눈에 열기를 띠고 자기소개를 하던 게 어렴풋이 생각났다. 한단비라고 했던가. 우람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귀여운 이름이었다.

“단비?”

“네.”

성도 없이 단비라 이름이 불리자 쑥스럽다는 듯 매니저는 목을 쓰다듬었다.

“이름만 불리니까 기분 이상해요. 사실 저 단비라는 이름 싫거든요. 친구들도 놀리고. 하필 제가 태어난 날 단비가 내려서 그게 이름이 됐지 뭐예요.”

“좋은 이름인데요.”

이름 이야기가 길어지자 뇌 한쪽에서 묻어 두었던 태화가 생각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부모님은 이경에게 작명을 맡겼었다. 이경은 얇은 강보에 싸여 울지도 않고 이경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가 싫고 무서웠다. 울고 보채는 아이다운 맛이 없었다.

언젠가 그 아이가 커서 자신의 인생을 삼키러 올 것 같았다. 그래서 클 태에 불 화자를 써 태화라고 지었다. 태화는 이경의 인생을 삼킬 거대한 불. 썩 좋은 의미를 붙여 주지 않은 게 안타까웠다.

“……잘못 지었어.”

“네? 역시 그렇죠. 이름이 저하곤 어울리지 않죠?”

멍하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매니저는 머쓱함에 목을 매만졌다.

“아니요. 단비 씨한테 한 말 아니에요. 누가 생각나서. 그리고 일 열심히 안 해도 되니까 애쓸 필요 없어요.”

이경은 고개를 저으며 뭐든 열심히 하려 애쓰는 그에게 짧게 조언을 해 주었다. 뭐든지 잘해 보려는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조금 있었다. 어쨌든 이경은 열심히 하지 않을 테니까. 이경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땀을 가볍게 씻어 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몸에 남아 있는 찬물의 기운 때문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몸이 서늘하게 식었다. 이경은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 내고 물기가 조금 남은 몸에 옷을 걸쳤다. 얇은 셔츠가 금방 젖어 들었다.

“대표님이 와 계셔요. 같이 이동하시겠대요.”

대표? 박윤형? 이경의 뺨으로 덜 닦인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왜? 다른 일정이 더 생겼어?”

“모르겠어요. 오늘 같이 가겠다는 말만 하셔서요. 도망가지 못하게 잘 잡고 있으랬어요.”

바빠 전화나 메시지로 일정을 전해 오던 박윤형이 며칠 만에 나타났다. 벌써 머리 한쪽을 공포가 사로잡고 있었다. 이경은 침을 삼킬 뿐 더 대답하지 않았다. 도망가 봐야 손바닥 위였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가 비밀을 지키고 있는 한 싫어도 그와 공존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약해지면 안 됐다. 이럴수록 더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눈 뜬 상태로 집어삼켜지지 않을 테니까. 이경이 옷을 전부 입는 동안 매니저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려운 사람의 전환지 그는 화들짝 놀라 전활 받았다.

“네, 대표님, 전화 받았습니다. 지금 샤워 끝내고 나오셨어요. 네, 네, 잠시만요.”

손으로 휴대폰 아랫부분을 막은 매니저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경의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입술로 옮겨 갔다.

‘준비 다 끝나시면 저 따라오면 돼요. 들으셨죠? 저 따라오시면 돼요.’

이경이 못 알아들을까 봐 매니저는 입술을 크게 벌려 느릿느릿 반복해 말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이경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개인 물품을 세탁 바구니에 던졌다. 가기 싫어 절로 동작이 느려졌다. 느리게 신발을 신는 동안 그는 소화한 일정과 기타 사항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먼저 탈의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는 이경이 돌아서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네, 다 고르셨어요. 대표님이 주신 목록과 다르지 않아요. 추가로 요청하신 거 없었고요. 채희 씨에게 목록 넘겼어요. 네, 트레이닝은 2시간 하셨고요. 근데 대표님 어디 계세요? C-3요? 네, 당연히 찾을 수 있죠. 이제 그 정도는 해요. 네, 거기로 갈게요.”

매니저가 지하주차장과 건물 내부를 나누는 문을 잡고 섰다. 열린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제일 처음 맞이한 건 웅웅 하고 도는 환풍기 소리와 코끝을 맴도는 주차장 특유의 먼지 냄새였다.

거침없이 걸어가던 매니저가 지하주차장 C구역 앞에 멈춰 섰다. 그곳엔 시동이 걸린 검은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주인을 닮아 존재만으로 기분이 나빴다. 선팅이 잘된 창이 내려갔다. 흰 소매, 커프스가 순대로 드러났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박윤형이 얼른 조수석에 타라고 엄지를 세워 옆을 가리켰다. 이경은 고집처럼 뒷좌석에 올라탔다.

“소속 선수를 태운 게 아니라 사장을 태웠네. 이경아, 이제부터 네가 사장 해라.”

우스갯소리로 들었는지 매니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웃으라고 내뱉은 말이 아니다. 미세한 짜증을 이경만이 알아차렸다. 뺨이 굳었다. 그렇다고 사람 눈이 많은 곳에서 이경을 끌어 내리진 않았다. 바짝 고개를 숙이는 매니저의 인사를 받은 그는 창문을 올렸다.

창문이 홈에 모두 맞물리는 소리가 나자 웃음을 지운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 왔다.

“표정 좀 풀지? 우리 사이 안 좋다고 광고라도 할 거야?”

차 안에서 작금의 상황과 맞지 않은 클래식 음악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상황을 주도하기에 적당한 배경음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내적 불안을 부추겼다.

“또 대답 안 하지?”

“대답하든 안 하든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잖아. 대답 안 해도 주제 파악은 똑바로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듣고 있고 웬만하면 네가 하는 말 따를 거야.”

“이제야 김이경답다.”

기분이 좋은 듯 박윤형이 흥얼거렸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등을 꼿꼿하게 세우며 창밖을 내다봤다. 눈이 시리도록 밝은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근데 이윤 알자. 이러는 목적이 뭐야?”

“뭐가? 똑바로 말해야지. 그렇게 댕강 잘라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 가당키나 해?”

“하란 대로 해. 나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네 꿈이 그거였잖아. 내가 우리 이경이 평생 꿈 이뤄 준다잖아.”

꼭두각시처럼 자신을 움직여서 취하고 싶은 거라도 있을까.

“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 몰라도 그 정돈 구분해. 지금 내 상태론 무리야. 정정 기사 내. 국내 대회 몇 번 뛰고 말 거라고. 아니면 내 이름 팔아서 차라리 사업을 해.”

“왜 안 된다고 생각해? 자격이야, 뭐. 비경기 몇 번 뛰고 성적 괜찮으면 초청선수로 넣으면 되잖아. 우리 쪽에서 로비 중이야. 거기서 우승하면 자격 생기잖아.”

간단하다는 듯 말하지만, 미친 소리에 불과했다.

“옛날이랑 지금이 같아?”

옛날이라면 그러겠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골프를 해 봤던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 선뜻 동조할 수 없었다.

“우스워질 거야.”

“왜 부정적으로 생각해? 봐, 사람들이 다 널 응원하잖아. 그 응원 등에 업고 시작하면 돼. 어려운 거 아니잖아.”

“어려운 거야.”

“기분 좋아서 비위 좀 맞춰 주려 했는데 진짜 안 되겠네. 네가 토 달 위치야? 방금까지 주제 파악 잘한다던 김이경 어디 갔어? 자꾸 그러면 확 불어 버리고 싶어지잖아.”

머리가 아찔했다. 날카로운 송곳이 목구멍을 찌르고 들어왔다. 숨이 빨라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빠르게 심장이 뛰어 댔다. 이경은 독을 삼킨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가 익숙한 길 위를 막힘없이 달리고 있었다. 정체가 안 되는 시간대라 거리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올 곳이 집이었다면 굳이 바쁜 박윤형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충분히 매니저를 시켜도 될 일이었다.

화들짝 놀라 내리려는 이경을 보고 그가 웃었다. 그는 이경의 등에 팔을 얹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경의 부모님이 내려와 있었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다. 늘 걱정 속에 살아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두 분 다 고왔다.

박윤형은 능청스럽게 어머니를 향해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잘 왔다는 뜻으로 어머니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고모님, 이렇게 이경이 보내 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용기 낸 이경이랑 윤형이 덕분이지. 더운데 어서 들어와. 들어가서 앉자. 태화도 와 있어.”

섞이지 못하고 이물질처럼 서 있던 이경의 눈꺼풀이 위로 튀었다. 비난을 등에 업고 도망친 지 2주 만이다.

“태화가요? 아니, 형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방금 집에 도착했거든. 준비하고 내려올 거야.”

“그런 거였어요? 그것도 모르고 제가 험담부터 했네요.”

짧은 웃음이 현관을 메웠다. 항상 고요하고 죽은 것 같던 집에서 오랜만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그래, 억울해하지 말자. 죽을 만큼 싫은 박윤형이 옆에 붙고, 염증이 치미는 골프도 다시 시작하게 됐지만, 이 정도면 나름 가치 있는 일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태화도 곧 제자리를 찾아가겠지.

이경은 조용히 신발을 벗고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었다. 코끝을 좋은 냄새가 자극했다. 한때 머금었던 페로몬을 기억하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축하해요.”

목소리에 귀부터 반응했다. 불쑥 나타난 태화가 들고 있던 꽃을 이경에게 안겨 줬다. 비었던 이경의 품으로 붉은 장미가 피었다. 만개한 장미에서 짙은 향이 났다. 이경은 꽃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다 태화와 눈이 마주쳤다.

“……고마워.”

목에 가시가 걸린 말들 대신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사실 눈을 마주치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자신과 달리 샅샅이 훑는 눈길이 느껴졌다. 뜨거웠다.

“잘 지냈어요?”

……잘 지냈냐고? 이경은 안녕하지 못했다. 울고 싶을 정도로 끄집어내져 여기저기 끌려다녀 육체는 피곤했고 정신은 혼곤해 스치기만 해도 부서질 거 같았다. 거기에 태화라는 문제까지 더해졌다. 해답지가 없는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지만 꼭 풀어야 하는. 이경은 어떻게든 답을 알아내 풀어 헤치고 싶었다. 이경은 대답을 하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했다.

“넌?”

그날 이후로 넌 태연할 수 있었어? 아직도 눈을 감으면 태화 앞에서 개처럼 네 발을 땅에 붙이고 짖던 때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죄책감이 번쩍번쩍 들 때마다 이경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서 괜찮았는지 물었다. 태화의 눈썹이 미미하게 위로 솟구쳤다.

“후회했어요. 또.”

입술을 올려 다정하게 웃고 있지만,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허공에 맞닿은 시선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해 지나갔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이경은 너무 빤히 태화에게 몰두해 있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틀었다.

“옥연 씨가 오늘 솜씨 부렸어. 놀라지 마라.”

노부부는 금슬이 좋아 여전히 이름에 씨를 붙여 서로를 불렀다. 어서 밥을 먹으러 가자며 아버지가 이경의 팔을 끌었다.

“여전히 두 분은 사이가 좋으셔요.”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에 어머니가 부린 솜씨로 음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경이 먹지 않는 고기로 만든 요리까지 있었다.

“태화야.”

박윤형이 지나쳐 가려는 태화를 불렀다.

“여기 앉아.”

박윤형은 다른 자리로 가 앉으려는 태화를 불러 옆에 앉히려 했다. 손수 의자까지 빼 주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 비웃듯 태화는 맞은편에 앉았다. 완벽히 무시하는 행위에도 박윤형은 태화에게 다정하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요즘 어떤지 그리고 뭘 하는지. 태화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짧게 대답했다.

과한 친절이었다. 왜? 둘이 친해질 근거가 전혀 없었다. 둘은 나이 차이가 나 생태계가 달랐으며, 어릴 때부터 유대를 쌓아 온 것도 아니었다. 태화가 남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닌데도 윤형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가려 했다. 혹시 친해져 술이라도 마시다 둘만의 비밀을 폭로한다면? 생각이 그곳으로 치닫자 불안이 밀려왔다. 비밀이 태화를 파괴할까. 이경의 아래 눈꺼풀이 위로 튀었다.

“이경아?”

자리에 앉지 않고 멈춰 서 있는 이경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무슨 고민 있어?”

“아뇨.”

이경은 별일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박윤형이 당겨 놓은 의자에 앉았다. 이경이 앉자 집안일을 도맡아 온 아주머니가 이경 앞에 밥과 국을 내려놓았다.

“바쁜 윤형인 왜 불렀어요? 우리끼리 하면 되지. 민폐예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태화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윤형이 생긋 웃었다.

“내가 시간 된다 했어. 바빠도 축하는 해 주러 와야지. 그렇지, 이경아?”

유난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동의를 강조할 때 박윤형은 말끝에 ‘그렇지?’를 붙였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이기적이며 결국 사람을 제 뜻대로 조정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 했다. 이경이 대답하지 않자, 허벅지에 박윤형의 손이 내려앉았다. 뱀처럼 스르르 기어와 악력으로 허벅지를 그러쥐었다.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이경은 그 손을 무시했다.

“왜 화가 난 거니?”

어머니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요.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다 설레발이잖아요. 아직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축하는 무슨 축하.”

이경아. 보다 못한 어머니가 한 소리를 하려고 입술을 뗐다. 갑작스러운 투정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괜찮아요, 고모님. 갑자기 스케줄이 몰아닥쳐서 이경이가 힘든가 봐요. 제가 많이 몰아붙이긴 했죠.”

중간에 껴 난처한 듯 웃는 부모님 사이에서 박윤형이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다. 화가 묻어 열이 올라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 좋은 날. 아무리 윤형이랑 친해도 그렇지.”

저자세로 나오는 박윤형의 눈치를 보며 어머니가 이경을 타박했다. 미안한 눈치였다.

“친구니까 다 이해해요. 우리가 그냥 친구예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잖아요. 누구보다 이경이 잘 알아요.”

“윤형이가 이해심 많아서 다행이야.”

어머니는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밥을 많이 먹으라며 생선 살을 발라 그의 밥그릇 위에 놓아 주었다. 가식적인 박윤형의 미소에 속아 넘어갔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몇 년을 봐 왔는데 그걸 모르겠니? 흰 생선 살을 좋아하잖아. 요즘 깜박거려도 과거 기억은 선명해.”

속이 아팠다. 매일 밤 병실을 지키며,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든 놈을 찾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라던 어머니가. 밤마다 몰래 숨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던 그녀가 누굴 챙기고 있는지 안다면 매일 밤 이를 갈지도 모른다.

이경이 숟가락을 국에 푹 담그려 할 때였다. 거의 손대지 않은 밥 위로 은색의 젓가락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양념에 재워져 잘 익은 고기를 살포시 놓고 갔다. 짙은 고기 냄새에 이경은 인상을 쓰며 앞을 바라봤다.

박윤형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기를 건네준 사람은 태화였다. 빨리 먹으라는 듯 그가 고개를 까닥했다.

“이경이 고기 안 먹어. 아주머니, 여기 밥 새 걸로 가져다주세요.”

좋은 분위기를 망쳐 버릴까 봐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일어났다.

“먹어요. 언제까지 반찬 투정할 건데요.”

태화가 싱긋 웃었다.

“태화야.”

이경은 젓가락으로 고기를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익은 고기가 혀 안에서 이물질처럼 떠도는 걸 이로 뭉갰다. 양념된 고기의 육즙이 혀로 흘러나왔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한 맛이었다. 이경은 뱉어 내고 싶은 걸 참아 내며 희게 질린 얼굴로 고길 삼켰다. 그걸 말없이 지켜보던 태화는 조용히 밥을 떠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말씀 주신 거 생각해 봤는데, 독립 유지할 생각이에요. 집에 들어올 생각 없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어머니였다.

“너라도 집에 있어야지. 곧 네 아버지랑 지방으로 내려가는…….”

어머니는 갑자기 말을 끊고 불현듯 이경을 보았다. 윤옥연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으나 어디로 갈지 이미 태화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태화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요. 말해도 돼요.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태화 넌 왜 그런 이야기까지 했어.”

어머니는 이마를 잠시 짚으셨다. 조금 퍼즐이 맞춰진다. 왜 그렇게 싫다던 이경을 떠밀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서 요양하기로 했어.”

반쯤은 체념한 얼굴로 긴 숨을 내쉬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평생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나?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네 아버지가…….”

“여보.”

이곳에서 말없이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어머니 말을 잘랐다. 잘 들여다보니 살이 많이 빠져 수척해진 얼굴이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네 앞길만 생각해. 그보다 태환 왜? 집이 싫니?”

“학교가 너무 멀어요. 왕복하는 데 3시간 넘게 걸려서요. 주말에 올게요. 형도 성인인데 제가 매일 붙어 있을 필요 없죠. 지금도 잘해 주고 있잖아요.”

힐끔 태화의 눈이 이경 쪽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래. 이제 이경이 옆에 윤형이도 있으니까.”

아버지는 반대하는 윤옥연과 달리 태화가 나가 사는 걸 허락했다.

“가끔 윤형이가 이경이 들여다봐 주고.”

“그건 염려하시지 않아도 돼요.”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는데 벌써 목구멍이 막혔다. 박윤형은 입을 벌려 이경을 통째로 삼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그런 부탁을 왜 해요?”

옆에 있던 어머니가 말렸다.

“그런 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저 지난 십 년 동안 이경이 많이 생각했어요. 자나 깨나 이경이 생각밖에 하지 않았고, 이경이 얼굴 이렇게 만든 새끼……, 죄송해요.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아서요. 진짜 마주치면 제가 찢어 죽이고 싶거든요.”

그게 너잖아. 소리 없는 이경의 고함이 몰아치고 있었다.

“괜찮아.”

“내내 그 사람 만나면 제가 먼저 가만두지 않을 거라 다짐했어요.”

거짓말! 이경은 억울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거짓말을 내뱉으며 부모님을 농락하는 그에게 뜨거운 국그릇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식탁 위에 드러난 이경의 얼굴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경이가 이렇게 된 거 내 탓도 있다 생각해요. 그때 무리하게 대회 진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 집을 렌탈하지 않았다면, 내가 같이 있었다면 괴한에게 그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항상 이런 죄책감에 시달려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이경이 옆에서 지내려고요.”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번지르르한 입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박윤형의 입술을 찢고 싶었다.

“그건 차차 너희 둘이 선택할 문제야. 이 늙은이가 뭘 할 수 있는 건 없지. 이젠 너무 늙어서 그런가. 이제는 너희가 행복하다면 우린 뭐든 해 줄 수 있어.”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리고 태화야.”

“네.”

“형한테 잘해야 한다. 잘 지내야 하고.”

태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 쌍의 눈이 향하자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떤 형태로든 잘 지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래, 잘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이 너도 부모처럼 태화를 보살펴 주고.”

부모처럼. 입술이 사막의 모래처럼 바짝 메말랐다.

“내가 이렇게 당부하는 건 네 어머니와 잠깐 시골에 내려가려고 그래. 도시는 지쳐. 좋은 공기 쐬다 오마.”

이 집에 완벽하게 이경 혼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집에 박윤형이 드나든다 생각하자 뺨이 찌르르 아팠다. 잔 경련이 일었다. 이경의 조용한 아우성을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다.

“학굔 어때?”

이경의 눈이 움직였다. 박윤형이 태화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흐뭇한 시선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눈이었다.

“다닐 만해요.”

“환경이 달라져서 적응하기 어려웠을 텐데.”

“글쎄요. 여기나 거기나 사람 사는 건 똑같죠.”

“그래, 뭐든 잘하니까 걱정 안 해.”

“그걸 그쪽이 왜 걱정하는데요?”

“그야 형이니까 그렇지.”

“하던 대로 해요.”

순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태화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전 이만 일어날게요.”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아무도 잡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자기 할 일이 끝나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게 태화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일어나 2층으로 사라지자 작게 안도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 줄이 조금 느슨해졌다.

“이경이 이제 별채 정리하고 본채로 들어와. 태화가 나가는데 네가 거기 있을 이유가 없지.”

“태화 때문에 이경이가 별채 생활했던 거예요?”

“아무래도 알파랑 오메가니까. 남 말하기 좋은 조합이라 이상한 소문이 돌기 전에 별채로 내보냈지.”

“이경이랑 태화가요? 설마요, 둘이 죽어도 그럴 일 없어요.”

박윤형이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죽어도 그럴 일이. 이경은 그 말을 따라 속으로 조용히 읊었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박윤형은 부정했다. 마치 어떻게 부모와 자식이 그럴 수 있냐고 못을 박는 거 같아 심장이 덜컹거렸다. 얼마 전 했던 용납할 수 없던 행동이 이경의 가슴을 짓눌렀다.

* * *

“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이경이 내일 촬영도 있는데 이러다 시간 밀리겠어요.”

아버지와 약주를 하던 박윤형이 손목에 차고 있는 은색 시계를 보는 척하더니 일어섰다.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사용인들도 모두 퇴근했고, 노모가 잠을 버티기 힘들어 중간에 방으로 사라졌다.

박윤형이 일어나자 아버지가 따라 일어섰다. 술에 젖은 걸음으로 현관까지 나오려는 걸 박윤형이 손을 저어 말렸다.

“안에 계세요. 이경이랑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 밖에서 얘기 좀 하다 갈게요.”

“그래. 멀리 안 나가마.”

살갑게 아버지를 안은 박윤형은 벗어 두었던 재킷을 한 손에 쥐고 현관으로 나섰다. 술에 취해 약간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려, 벽을 짚고 신발을 신었다. 그가 구두에 두 발을 끼워 넣는 동안 이경은 먼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 시끄럽게 풀벌레들이 울어 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윤형은 기분이 좋은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내내 예의 바른 착한 조카 흉내를 내던 그가 껄렁하게 움직였다. 기분 좋게 이경의 어깨로 뻗어 오는 손을 가볍게 틀어 피해 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빈 팔을 확인한 박윤형의 입에서 “씨발.” 작게 욕이 튀어나왔다.

“태화한테 접근하지 마.”

이경은 짧게 경고했다. 이때만큼은 그가 두렵지 않았다.

“왜?”

“네가 무슨 자격으로 태화한테 다가가? 다 참아도 걘 안 돼. 놔둬. 얼룩 묻히지 마.”

“왜 안 되는데?”

“여태 관심 없었잖아.”

“관심이 없던 게 아니라 너 때문에 참은 거지. 나한테 그럴 권리 있지 않냐? 내 자리, 내 것들 하나씩 찾는 게 나빠?”

뭘 찾아? 이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비밀로 하겠다 약속했어. 그래서 쳐다보기도 싫은 골프도 하는 건데 왜 말이 달라져?”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이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풀벌레 우는 소리만 시끄럽게 들릴 뿐, 조용했다. 박윤형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이경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몰아세웠다. 등에 거친 벽이 닿았다.

“아, 맞다. 그랬지. 다 비밀로 하기로 했지. 미안, 미안. 그랬었지. 취해서 잊어버렸어.”

“박윤형.”

“김이경, 근데 오늘따라 왜 그러냐. 지금 진짜 짜증나는데 너까지 보태야겠냐?”

뺨에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박윤형은 숨을 들이켜며 주변 눈치를 봤다.

“씨발. 좆같은데 빨기라도 해, 새끼야. 기분도 안 좋은데 너까지 긁어야겠어? 응?”

그가 이경의 어깨를 꽉 눌렀다. 무릎을 굽히고 앉자 그가 소변을 볼 때처럼 지퍼만 내려 성기를 꺼냈다.

“하, 좋은 냄새 난다.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히트사이클에 완전히 들어가겠는데?”

어쩐지 아까부터 열이 돈다고 생각했다. 미묘하게 기분이 나쁘고 늘어진다 생각했지만, 피곤이 누적돼 그런 거라 생각했다. 히트사이클이라니. 이경에게 이제 낯선 단어였다.

원체 집에만 있어 히트사이클을 신경 쓰지 않았고. 뺨이 뭉개진 이후 이경의 히트사이클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게 왔다 갔다. 완전히 기능이 죽어 버린 것처럼 성욕과 함께 거의 없어졌다. 그래서 차분하게 머리로 날짜를 계산하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알파들은 그런 쪽으로 빠삭하니까.

“어차피 억제제 잘 안 듣는다며?”

이경은 그 말을 무심히 흘려듣곤 입술을 벌리고 흥분해 발기한 성기를 삼켰다. 페로몬이 잔뜩 묻은 성기 끝에 정액이 묻어 비릿했다. 역한 고기 냄새였다. 혀로 성기를 둥글게 감싸고 소극적으로 핥았다. 문 것만으로 기분이 좋은지 점점 커졌다. 깊게 물자 후, 소리를 내며 박윤형이 이경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씨발. 그래서 영감탱이는 투자해 주겠다는 거야, 안 해 주겠다는 거야? 너네 엄만 골프 소리에 돈 들고 달려오던데 너희 아버진 아니더라. 그 늙은이 깐깐해. 사업제안서를 가져가도 변호사와 이야기하래. 반병신 된 아들 건사해 주겠다는데 쉽게 내어 주는 법이 없어, 망할 영감탱이 새끼가.”

이경의 눈꺼풀이 위로 튀었다. 자신을 욕보이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부모까지 씹어 대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경은 화가 나 근질근질한 이로 살을 씹었다. 상상을 했다. 앞에 있는 박윤형의 좆을 모조리 뜯어 놓는 상상을. 지금이라면 피로 범벅이 된 박윤형의 살덩이는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으, 씨발 좋네. 아무것도 안 해 줄 거면서 왜 이 시간까지 잡고 있는데? 노인네들 비위 맞추기 어렵네. 적당히 하고 보내야지, 적당히. 적당히를 몰라.”

적당히 모르는 건 박윤형이었다. 이경은 이를 세우고 깨물었다. 약한 곳을 물린 박윤형의 날카로운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는 고통스러워 가운데를 쥐지도 못하고 펄펄 뛰었다.

구르지도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문 그를 보며 이경은 태연하게 손등으로 입술을 뻑뻑 문질렀다. 더러웠다. 마음 같아선 훼손한 뺨처럼 그의 연한 살덩이를 이로 모조리 물어뜯어 주고 싶었지만 어렵게 그 충동을 내리눌렀다. 이익. 이경을 본 그가 주먹을 들고 달려들어 이경의 코 주위를 내려쳤다. 깊은 숨을 내쉬며 참았다.

“으윽. 씨발! 김이경 너.”

이따금 통증이 몰려올 때면 그는 이경의 멱살을 밀어붙이는 게 전부였다.

“내일 촬영만 없었으면 뒈졌어!”

더 때려 보라고 뺨을 들이대자, 박윤형은 이를 악물고 벽을 발로 찼다. 여간 분한 게 아닌 듯했다. 얼굴을 때리면 잃는 게 많은 건 그라 어렵사리 참아 내고 있었다.

“가족 건드리지 마. 다 참아도 그건 못 참아.”

이경은 손으로 코를 가렸다. 뜨거운 게 쏟아지고 있었다. 손등으로 꾹 누르고 그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악몽 중심에 있던 눈. 그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김이경, 너. 하, 씨발 말로 해선 안 돼. 진짜 너한테 좋은 사람 되고 싶은데 안 도와주네. 자꾸 이렇게 나오면 진짜 무서운 사람이 되고 싶어지잖아.”

“늦었어. 내일 스케줄 있고. 빨리 가 봐. 빨리 병원에 가 봐야 하지 않겠냐?”

“너, 내일 한번 죽어 봐.”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올린 그가 이경의 어깨를 밀치고 어정쩡하게 걸어갔다. 이경은 멀어지는 박윤형의 등을 보고 집 쪽으로 돌아섰다.

입에 닿았던 살덩이 크기, 살을 씹던 이에 들러붙은 불쾌한 감각이 아직도 느껴져 이경은 손등으로 입술을 꽉 누르며 현관문을 열려다가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입에서 목구멍까지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거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손가락으로 안에 있는 것들을 죄 파내고 싶었다.

습관적으로 문고리부터 잡은 이경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아래로 내렸다. 나갈 때 잠그고 갔던 도어락이 해제되어 있었다. 급하게 떠밀려 나가느라 잠갔다고 착각했나. 요새 정신없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의심을 지우고 이경은 어둠 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

이젠 빛보다 어둠이 익숙했다. 그리고 문을 잠근 기억은 착각이 아니었다. 신발을 벗다 말고 이경은 멈춰 섰다. 누군가 안에 있었다. 집에 묻은 익숙한 체취가 누군가의 냄새와 섞여 변질되었다.

탁, 탁, 탁. 안에서 일정하게 소리가 났나. 끔찍하게 싫어하는 소리라 무슨 소린지 금방 알아챘다. 누군가 반복적으로 라이터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소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간 불에 의해 태화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2층으로 올라갔던 그가 여기 있었다.

갑자기 목이 당겼다.

“밖에서 말소리가 나던데 뭐 했어요?”

“뭐 하긴, 그냥 이야기.”

“박윤형이랑 굳이 화단에서?”

말을 하면 할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태화의 고개가 삐딱해지자 이경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다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가랑이 사이에서 해요?”

사라졌다 나타나는 불보다 무표정한 태화가 더 신경 쓰였다. 탁, 탁. 소리가 반복될 때마다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경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괜히 거실에서 현관이 다 보이도록 가벽을 철거했던 게 후회됐다.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근친상간은 더럽다면서요.”

목 근육이 당겨지며 침이 넘어갔다. 본 걸까. 아니면 다 듣고만 있던 걸까. 만약 보고 들었다면 어디부터? 이경은 샅샅이 과거를 훑어 가며 무슨 말을 했는지, 문제가 되는 말을 밖에서 박윤형과 나눴는지 점검했다. 크게 거슬리는 게 없다. 거슬리는 게 있다면 박윤형의 성기를 빤 것밖엔. 사실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근데 사촌 새끼 좆은 잘 물던데요. 박윤형은 피가 덜 섞여서 괜찮았어요? 그래도 근친상간 아닌가. 그러고 보면 우리 참 닮지 않았어요? 피가 섞인 사람에게 끌리는 거 보면.”

연약한 불을 응시하던 태화의 시선이 어둠을 뚫고 이경에게 닿았다. 말끝에서 화기가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끔찍하게 화가 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구 좆을 빨든, 누구랑 자든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다……. 제일 먼저 가족에서 제외할 거면 형제 운운은 왜 했어요? 그쪽한테 난 형제도 뭣도 아닌데.”

“사생활에 끼어들지 말란 소리잖아.”

말이 왜 그쪽으로 흐르지? 이경의 눈썹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사생활? 사촌한테 다릴 벌리고 다니는 게 사생활이에요?”

이경은 최대한 태연하게 신발을 벗으려 했다. 잘 벗겨지지 않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발에 단단히 박힌 신발이 벗겨지지 않아 뒤꿈치로 서로 문대며 무식하게 구두를 망가트리며 벗으려 했지만, 그조차도 잘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이경은 씨근덕대며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아 발에 단단히 끼워진 신발을 벗었다.

“히트사이클이 다가오니까 참기 힘들었어요? 차라리 나랑 하지 그랬어요. 좆까지 빨아 놓고 아깝잖아.”

“그 이야긴 그만해. 그때 난 심신미약 상태였어. 불안해서 패닉에 빠져 있었다고.”

“심신미약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선택한 게 고작 박윤형 좆 빠는 거라면.”

태화의 말이 뚝 끊겼다.

“열 받는 거 알죠?”

몰아치는 비난에 이경의 눈앞이 희게 변질됐다. 참지 못하고 막 벗겨 낸 신발을 태화를 향해 던져 버렸다. 골프를 칠 때 날카롭게 샷을 날리던 실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신발은 날아가며 가속도가 더해져, 태화의 귀 끝을 스치고 지나가 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너도 물어뜯어 줘? 그러고 싶으면 바지 내리든가.”

“골프가 죽을 만큼 싫다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해 놓고 박윤형이 오라니까 졸랑졸랑 갔어요?”

“그런 거 아니라 했잖아.”

도대체 몇 번을 아니라고 말해야 믿어 줄 건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속을 다 까서 보여 주고 싶었다. 한마음으로 사람들이 골프를 하라고 떠밀었고, 거기서 박윤형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방관한 사람 중 하나는 태화였다. 그때 도와줬었다면! 그때 모른 척하지 않았다면 이럴 일도 없었어! 안락한 이곳에서 이경은 백수로 숨만 쉬고, 잠을 자기 위해 술을 찾으러 다녔을 테다.

“아니라면 그 새끼 좆을 빠는 게 아니라 골프만 쳤어야지. 그쪽이 박윤형이랑 사귄 거 모를 줄 알았어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이경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입에서 침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래가 헐도록 드나들었던 그 새끼를 잊지 못해서 내 앞에서 개새끼 흉내 낼 정도로 싫다던 골프채까지 다시 잡았어?”

맹렬한 비난이 귀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니야.”

“아니긴. 다 봤어. 당신이 박윤형 차에서 뭘 했는지.”

이경이 박윤형과 사귀던 건 그가 까마득하게 어릴 때였다. 어둠 속에 숨어 머리가 까만 짐승이 그걸 봤다는 걸 생각하자 아찔해졌다. 이렇게 도덕과 통념이 무너진 게 만약 자신 때문이라면. 어렸을 때 그걸 몰래 보고 자라서 그런 거라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걸까. 홀로 그런 생각에 빠졌던 태화일까. 아니면 자신일까.

“안 되는 이유가 뭘까 고민해 봤어요. 근데 이유를 찾을 수 없더라고요.”

그가 집요하게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 똑똑한 머리로 닿지 않을 곳에 닿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박윤형이랑 그런 거 안 했어. 네가 착각한 거야, 나가.”

나가란 말에도 그는 계속 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이경의 말을 믿을 의향도, 여기서 나갈 생각도 전혀 없었다. 일정하게 라이터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이경의 신경을 긁었다.

“그거 내려놔. 위험하잖아.”

불이 싫었다. 감당할 수 없는 열기로 모든 걸 쉽게 삼킨다. 인생, 꿈, 얼굴. 이경은 그의 손에 든 라이터를 뺏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건데. 닿는 것만으로 익히고 녹였다. 필요하지 않으면서 그저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기에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만하라고.”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경의 신경 줄이 끊어지려고 했다. 관자놀이 부근 힘줄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라이터 내놔.”

태화는 일어나 손을 천장으로 바짝 올렸다. 그에게 가슴을 밀착해 손을 뻗어 올렸다. 뒤꿈치를 들어 키를 키워도 한 뼘 정도가 닿지 않았다. 178센티미터인 이경은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태화가 작정하고 주지 않으려 마음먹으면 뺏는 게 어려웠다.

“내놔. 내놓으라고!”

“코는 왜 그래요?”

공중에서 뻗어 나온 손가락이 코 아래를 훔쳤다. 말라 끈적해진 피가 손가락을 따라 길게 그어졌다. 코에서 뺨까지 붉은 길이 났다.

“오다 넘어졌으니까 신경 쓰지 마.”

“거짓말.”

“왜 내 말은 안 믿어 주는데?”

이경은 씩씩거리며 태화를 노려보았다. 허공에서 오래도록 시선이 부딪쳤다.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고, 거짓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아 분했다. 찰나에 목덜미가 당겨졌다. 가만히 이경은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두껍고 유연한 혀가 목적을 품고 들어와 이경의 혀를 뱀처럼 감쌌다. 혀에서 만들어지던 말이 뭉개지고 입에 틀어막혔다. 혀뿌리가 빠질 것처럼 강하게 빨아 당겼다. 또 불시에 키스를 당하고 머릿속을 점령당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화를 내고 비난한 주제에 열렬히 탐하듯 키스를 했다. 이경은 고개를 흔들어, 제 입속을 파고드는 혀를 뽑아내고 뒤로 물러섰다.

꼴사나운 키스다. 코에선 피가 흐르고 있는 상태였고 상댄 더 최악이었다. 손등으로 코를 문대며 도망가려고 하자 태화가 이경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들어 올렸다.

“뭐 하려고? 너 뭐 하려고?”

“네가 박윤형이랑 하던 거.”

“내려놔!”

이경은 몸부림치며 그의 등을 마구 내리쳤다. 무릎으로 그의 배를 찍어 댈수록 더 강하게 허리를 조여 왔다. 이경은 옷을 꽉 부여잡고 도리질을 쳤다. 갑자기 태화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거봐요, 했던 거잖아. 섹스라고 한 적도 없는데 강간당하기 직전의 얼굴을 하는 거 보면.”

속아 넘어갔다. 애초에 본 적도 없이 이경을 떠본 거다. 이경은 태화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렸고, 휘둘리면서 모든 걸 고했다.

“그 입 다물어! 할 수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난 안 되는 것들이 다른 사람한테 쉽다는 사실에 돌 거 같으니까.”

마침내 이경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태화는 이경이 움직이지 못하게 두 어깨를 꽉 누르고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무게가 더해져 등이 아팠다.

“다시 기회 줄게. 다 돌릴 수 있어.”

어느 악마보다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마 태화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경은 바로 끄덕였을 것이다. 도와줘,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했다. 근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일의 시작은 모두 태화를 위해서였으니까…….

“왜 꼭 그런 짓을 해야만 도와줄 수 있다는 건데? 우리 형제잖아. 내가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도와줘야 하는 거지. 너야말로 이 상황을 가지고 유리한 쪽으로 몰아세우잖아. 내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제일 불손한 마음으로 다가온 건 너야. 그래서 싫단 거야. 모르겠어?”

이경은 무릎으로 그의 성기를 차올렸다. 그의 눈썹이 한쪽으로 몰릴 때 이경은 몸을 굴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도망갈 곳이 필요했다. 방과 붙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내 이쪽으로 쿵쿵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다른 새끼하고 다 자도 너랑은 싫어. 봤지? 윤형인 협박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다 해. 피가 이어져서 싫은 게 아니라 너라서. 말로 해야 알아들어? 몸부터 붙여 오는 애새끼라 싫은 거야!”

이경은 화장실 문을 꽉 잡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메아리쳐 화장실 내부에 웅웅 울려 댔다. 부서질 듯 흔들리는 문을 이경은 꽉 부여잡고 오만함 가운데에 서 있는 그의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내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적정한 말을 모두 끄집어냈다.

“김이경.”

낮은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날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잘 알았으니까 여기까지 해.”

그런 호칭으로, 그날 자신이 허락했던 호칭으로, 제발 부르지 마. 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던 게 멈췄다.

“그래, 해봐. 어차피 곧 히트사이클인데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죠. 결국 당신이 먼저 달려들어 다리 벌릴 거야. 나라서 싫다고? 처음이 어렵지, 두세 번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문에 태화가 기대는 게 느껴졌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이경과 달리 그는 여유로웠다. 문틈으로 자욱한 그의 향이 파고들었다. 몸이 들뜨고 있었다. 약하게 환풍기가 돌아가지만, 밀폐되어 있는 공간에서 독한 페로몬을 마시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정신을 잃고 달려들겠지. 그는 그걸 노리고 있었다.

“너랑은 안 자. 네가 싫어. 분명 말했어.”

밖에 움직임이 없었다. 그게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이경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해볼래? 지금 서비스 부를 거야, 내가 누구한테 가서 안기는지 볼래?”

“지금 뭐라 했어요?”

“알파 서비스 부를 거니까 당장 나가. 제발 나가.”

이경은 보란 듯이 알파 서비스 번호를 눌렀다. 태화 같은 부류는 어떻게 해야 포기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 뻣뻣한 코를 눌러 주면 된다. 히트사이클 기간 중엔 합법적으로 알파를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이경은 천천히 주민등록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상담사가 연결됐다.

“당장 끊어요.”

문틈으로 낮고 단단히 화가 난 태화 목소리가 넘어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도움? 나쁜 생각에 사로잡힌 태화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청하고 싶었다. 착하고 예쁘던 그때로 돌려달라고. 계속 거칠어지려는 숨을 고르며 이경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고 했다.

“여기 한남동 숲빌리지 길 11, 본채 쪽이 아니라 별채, 억제제에 내성 있는 환자예요. 히트사이클이 온 거 같은데, 알파 좀 보내 주세요.”

이 순간에도 계속 이경은 문밖에 있는 태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쾅.

이경의 머리가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주먹으로 가격한 듯했다. 찌르르한 통증이 문을 타고 관자놀이로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여진이 남아 문이 잘게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이경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온통 신경은 문밖에 있는 그에게 향했다.

“나갈 테니까 당장 취소해요.”

그만해.

그만하라고!

차분한 말속에 절규가 들려오는 듯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경의 심장이 주저앉았다. 앞쪽에 멈춰 서 있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소리가 났다. 이경은 깊은숨을 내쉬며 화장실 문을 빼꼼 열었다. 아까 전쟁 같은 상황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꼭 폭풍전야 같았다.

[알파 19번이 10분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래 이어지는 주의 사항을 확인하고……]

이경은 웅웅 소리를 내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취소를 원하실 땐 0912#을 눌러 보내 주세요]

취소할까. 잠시 고민하던 이경은 뺨을 소파 헤드에 대고 밖을 응시했다. 어차피 보여 주긴 해야 했다. 이경은 물티슈를 뽑아 피로 얼룩진 얼굴을 정리하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얼마간 생각 같은 걸 하지 않으려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였다.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도착했는데 어디로 들어가야 하나요?]

벌써 알파 서비스가 도착했다. 이경은 인터폰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 주었다. 얼마 후 현관 쪽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취소하지 않은 알파 서비스가 도착한 듯했다. 이경은 무거운 몸을 세워 현관 쪽으로 갔다. 자동으로 잠기던 도어락이 고장 난 건지 작동하지 않았다. 내일 따로 사람을 불러 고쳐야 할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 희미하게 담배 향이 났다. 오래도록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던 듯했다.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는 말쑥했다. 그는 신발을 벗으며 들어와, 지저분한 집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폭탄이 휩쓸고 간 것처럼 지저분한 내부에 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불 켜도 될까요?”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이경이 몸을 틀어 불을 켰다. 탁 소리와 함께 빛이 급하게 눈으로 밀려들어 오자 따가웠다.

“어? 김이경 선…….”

남자는 손가락으로 이경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죄송합니다. 전 여기서 본 거 오늘이 지나면 다 잊으니 걱정 마시고요. 봐도 못 본 거고 외부에 이를 발설하지…….”

“시작하세요.”

이경은 그의 말을 끊어 버리고 시작하라고 끌어당겼다. 남자는 침대로 가며 이경에게 차분하게 하나씩 물었다. 무릎이 올라오자 무게만큼 침대가 옆으로 기울었다.

옷을 벗겨 드릴까요?

애무 필요하시나요?

호칭은 어떻게 부르길 원하시나요?

성적 취향, 강도 등을 물으며 옷을 벗은 그는 얌전히 침대 위에 누운 이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이 없는 이경의 위에 올라온 그가 이경의 옷을 잡았다. 목까지 잠긴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가며, 그 속으로 입술을 내렸다. 마른 몸 위에 그의 무게가 점점 전해졌다.

살갗에 닿는 더운 숨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유일하게 불쾌하지 않았던 건, 입으로 들어오던 살덩이 중 유일하게 불쾌하지 않던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태화, 김태화.

어둡고 깜깜한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그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이경이 제 몸에 올라타려는 알파를 옆으로 밀어내려고 할 때였다. 아까 어둠 속에서 안광을 빛내며 문 앞에 서 있던 그가 인척과 페로몬을 죽이고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간 게 아니었어? 그는 눈에 핏줄이 터질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순간 겁에 질린 알파가 뒤를 돌아보았다. 태화는 이경의 배 위에 엎어져 있는 알파를 침대 밖으로 끄집어냈다.

“뭐 하는 거야? 일하러 온 사람이잖아!”

불시에 공격을 당한 알파가 거센 비명을 질렀지만 태화의 손은 무자비했다. 현관까지 그를 끄집어낸 그는 무작정 밖으로 던져 버리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경이 침대에 누워 있는 방으로 와 문을 잠갔다.

“김태화.”

“다시 생각해도 열 받아서요. 매일 그쪽만 꿈꿨는데 나한테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게.”

“우리 사이에 기회가 가당키나 해?”

“박윤형하고 수시로 잤잖아. 그 말이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날 설득하려면 더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오는 게 좋아요.”

이경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눈으로 태화를 노려보았다. 계속해서 몰아붙여 오는 태화를 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질주해 오는 걸 멈출까. 이경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불현듯 머리로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차라리 한번 자면 멈추지 않을까. 태화가 이경에게 집착하는 건 그런 거다. 사춘기 때 충족되지 않은 호기심. 딱 그뿐이다. 그게 채워지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다. 개소리에 이유가 붙자 그럴싸해졌다.

“해.”

이경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허락이 떨어지자 태화의 정리가 잘된 눈썹이 위로 솟았다. 시선이 제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아.

“어디 해 봐. 어차피 한번 자고 나면 나을 병이야, 한번 배설하면 사라질 감정. 그때 못해서 뇌가 이상해진 거야. 자고 나면 다 사라질 충동이야.”

어떤 것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시선이 들러붙어 이경을 압박하며 매섭게 비난했다.

이경은 단추가 다 풀린 셔츠를 벗었다. 몸에 걸쳐진 옷이 하나, 둘 땅으로 추락했다. 이경의 마음도 옷과 함께 떨어져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고 있었다.

“사라져야지. 그만해야지. 그 마음 위험한 거야.”

이경은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 알파를 의식하며 어금니를 악물고 속삭였다.

“대신 약속해. 끝나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더워진 눈의 열기가 식어 내렸다.

“나도 하날 버렸으니까 너도 포기해야 공평한 거잖아. 그렇게 원하는 게 몸이면 줄 수 있어. 사춘기 때 하지 못해 생긴 호기심이 널 사로잡은 거야.”

“내 감정을 왜 멋대로 정의해요?”

“하면 다 끝나 버릴 감정이야.”

태화가 무섭게 이경을 응시했다. 이경도 그의 팔목을 잡아 침대로 밀어 눕혔다. 이경은 무릎부터 침대에 올렸다. 무게만큼 매트리스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태화는 이경이 다가오는 걸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봤다. 허벅지를 벌려 굵은 허리를 가두고 그를 내려다봤다.

“대신 하고 나면 내일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가서 불손한 마음 접는 거야. 나란 사람 지우고 사는 거야. 알아들었어?”

미국으로 돌아가란 말에 그가 입술을 짓씹더니 올라탄 이경을 밀어냈다. 왜 몰라? 흠집 없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얼룩 하나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걸 왜 당신이 정의 내리는데.”

짓씹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말에 잔잔한 화가 깔려 있었다. 어느 때보다 차갑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마음이 쉽고 불순한 거였구나. 나도 모르던 걸 그쪽은 아네요.”

“너보다 어른이니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태화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근데 만약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감정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말이 이경의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어느 때보다 힘 있는 진실한 말이었다. 섬찟한 고통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건 형 바람이죠. 누구나 마음속엔 어두운 부분이 있어요. 검고 음울한 나만의 세계가.>

그 음울한 세계가 이경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경은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머리가 굵어진 태화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제멋대로였다. 자신과 달리 흠 없이 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을 몰라줬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불순한 짓을 한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 안다. 그게 이경이었다. 가슴에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안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세상 밖으로 내쳐지는 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라져 버리면 비밀을 아는 자가 폭로해 버릴지 모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살아 있어야 했다. 죽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비참한 삶이었다. 화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으로 달아올라 이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뛰듯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단단히 버티고 선 태화의 가슴을 툭툭 밀며 현관 쪽으로 밀어냈다. 인생의 선배자로서, 그가 가려는 길을 가 봤던 선행자라 더욱 거칠게 반응했다.

“가, 제발, 내 인생 쑤시지 말고 꺼져 버려! 너 아니어도 복잡하니까 사라져 버리라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내몰았다. 쥐새끼처럼 문에 붙어 있던 알파가 갑자기 열린 문 때문에 고꾸라졌다. 이를 억세게 문 태화는 도망가려는 알파의 머리를 꽉 틀어쥐고 신발을 신다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태화는 이경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면서 흔들림 없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살면서 본 적 없는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이경을 뜨거운 용암에다 던져 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아 내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잘 자요.”

화가 나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로 그는 여상하게 인사를 던지고 한 손으로 알파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이경은 입술을 꾹 깨물곤 그를 밖에 세워 두고 문을 닫았다. 깜빡이는 약한 현관 등이 그를 비췄다. 스러질 듯 약한 빛과 함께 그가 사라지자 이경은 힘없이 늘어져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싸 안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태화 때문에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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