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불순한 초대
[26일 밤 12시경 김이경은 박윤형을 만나기 위해 약속한 집에 도착 (증거품 11호 CCTV 영상 참고)]
[박윤형은 김이경에게 계약 무효 소송한 걸 취소해 달라 함. 서명한 대리인이었던 윤옥연은 최근 치매 진단을 받음. 이로 인해 무효 신청했음. 박윤형은 사채업자에게 막힌 자금을 끌어 사용하고 있었음. 돈이 매우 급한 상태로 계약이 꼭 유지되어야 했음. 이를 김이경이 거절하자 흥분한 박윤형이 폭력을 행사]
[12시 28분 공포로 느낀 김이경이 바깥으로 도망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별채로 끌려감 (증거품 11호 CCTV 영상 참고)]
[밤 01시 36분. 그 상태로 정신을 잃은 김이경을 두고 박윤형은 아래 주유소에 가서 등유를 현금으로 구입]
[새벽 02시 02분 박윤형은 기름통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감 (증거품 11호 CCTV 영상 참고)]
[새벽 02시 22분 김태화가 집에 들어감 (증거품 11호 CCTV 영상 참고)]
[김이경을 구출해 병원으로 옮김. 병원 도착 시간 3시 20분]
[최초 신고 시간은 3시]
[화재가 완전히 잡힌 시간은 새벽 5시 21분]
[박윤형은 거실 중간에 엎어진 상태로 발견. 불에 심하게 탄 상태, 형체가 많이 훼손돼 정확한 사망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
펜으로 사건을 수첩에 정리하는 버릇이 있던 박 형사는 글을 적어 내리다 인상을 썼다. 피해자의 진술은 입구 쪽에 설치되어 있는 CCTV에 찍힌 영상이 신빙성을 실어 주었다. 녹화된 영상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번 사건은 돈과 관련된 박윤형의 방화 쪽으로 일관성 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가해자가 죽었으니 이대로 종결의견서를 작성하면 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뭔가 거슬린단 말이지. 박 형사는 펜의 뒷부분으로 책상을 일정하게 두드려 탁, 탁, 탁, 소리를 냈다.
“뭘 그렇게 봐?”
갑작스러운 부름에 몰두해 있던 박 형사의 어깨가 놀라 위로 튀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귀신이라도 봤어?”
“김 형사님, 왔으면 기척이라도 내셨어야죠.”
박 형사보다 두 기수 위인 김 형사였다.
“박 형사가 못 들어 놓고 왜 나한테 그래? 뭐야, 그 사건 아직도 고민하고 있어? 끝난 사건이잖아.”
“뭔가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한데?”
김 형사는 잠바를 벗어 의자에 걸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구린내 나요. 이런 사건을 지금 종결하는 게 좀. 너무 급하게 끝내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뭐가 급해? 증거가 확실한 사건을 일 년 이 년 잡고 있어? 김이경은 박윤형한테 오랜 시간 학대당했고 기름통을 사 간 사람도 박윤형이잖아. 도망가려는 김이경을 골프채로 내려쳐서 별장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는 CCTV 같이 확인해 놓고 왜 이래? 피해자 전신에 골프채로 인한 손상. 목을 졸린 흔적까지 나왔는데.”
“그게 구리다는 겁니다. 준비되었다는 듯이 딱딱 증거들이 나오니까.”
김 형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박 형사. 그게 진실이니까 피해자 진술하고 일치하는 거지. 죄 없는 사람 그렇게 모는 거 아냐. 설령 범인을 잡지 못해도 억울한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게 하라잖아. 그 유명한 말 몰라?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그러는 거 아냐.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건 맞죠. 그래도 김태화 씨 말입니다.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 어째서 박윤형 씨를 구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요. 현관에서 박윤형 씨가 있던 곳까지 거리가 13M밖에 되지 않았어요. 김태화 씨요. 유학 시절 미식축구를 했을 정도로 운동 신경이 좋아요. 충분히 죽겠다는 사람 끌어냈다면 살릴 수 있었는데 이상하단 겁니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요. 신고도 하지 않고 김이경 씨 먼저 병원으로 옮긴 것도 이상해요.”
“박윤형이 자포자기했다잖아. 어차피 거기서 살아 나가도 사채업자한테 죽을 목숨이라며. 죽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끌어내? 들어가면 같이 뒈지는 건데.”
“그건 피해자들 말이잖아요. 찝찝합니다. 시신이 훼손돼서 뭐 증거도 없고.”
“원래 그런 범죄들 끝이 다 그런데 뭘 더 고민해. 다 끝난 사건 그만 들여다보고 쉽게 쉽게 가자.”
“아무리 그래도 찝찝하다니까요. 그 주변에 있는 집들이 전부 빈집이었어요. 그 일대를 매입한 법인이 있는데 그 소유주가 김태화 씨랍니다. 화재경보기가 딱 그 별채에 없었고요. 그리고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데 1시간 걸린 것도 이상하고요. 안에 블랙박스가 없었던 건 왜 문제 삼지 않아요? 정말 구리지 않습니까?”
흠, 심각한 얼굴로 듣던 김 형사가 눈썹을 모으더니 팔짱을 꼈다. 이제야 좀 먹혀들었나 싶어 박 형사는 얼른 입술을 떼 말을 덧붙였다.
“잘 생각해 보시라고요. 이대로 종결하실 건지. 반장님한테 다시 재수사하자고…….”
“역시 박 형사야. 대단해, 아주 훌륭해.”
김 형사는 주먹을 쥐더니 엄지를 하늘 위로 뻗어 올렸다. 사수에게 따봉을 받자 박 형사는 조금 으쓱해졌다. 그러자 김 형사가 갑자기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 똥촉이야. 소설가 해도 되겠다, 우리 박 형사. 사서 일을 만들지 말고 그만하자니까. 이런 일 한두 번 겪어? 블랙박스야 그 사람들 정도면 사생활 문제 때문에 설치 안 하잖아. 병원 가는 시간이 길어진 건 가는 길에 김이경 씨한테 과호흡이 와서 조치 취하느라 늦은 거고. 더구나 끔찍한 상황을 겪은 직후라 둘 다 심신미약이라잖아. 정신없었겠지. 우연의 일치라니까.”
그 사람이 심신미약이요? 조사차 몇 번 경찰서를 오간 김태화란 남자와 마주쳤었다. 심신미약이란 단어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거 같지 않은 냉혈인이었다. 찌르면 차가운 얼음이 떨어지면 모를까. 사촌이란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 꺼낸 말이 이거였다.
‘박윤형이 확실히 죽었습니까? 증거 보여 주세요.’
눈으로 보기 전까지 절대 믿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고온에 녹아 뼈조차도 온전치 않은 걸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을 건네자 김태화는 입술 끝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러니까 그 웃음을 뭐라 말해야 하지? 박 형사는 적정한 단어를 찾기 위해 뇌를 작동시켰다. 머릿속에 한 단어가 꽂혔다.
“사촌이 죽었다니까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았다니까요. 나중에 시신 양도 가능하냐고 물을 때도 어쩐지 섬뜩했잖아요.”
“그거 감성 추리야, 박 형사. 미우나 고우나 사촌이니까 그쪽에서 수습하는 게 맞지. 재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박윤형 그 사람 가족 하나 없다며. 조사 다 끝났으니까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자. 그 오피스텔 살인 사건 말이야.”
“아니, 김 형사님. 생각 좀 해 보시라니까요. 김이경 씨 전혀 협박당할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어린 시절부터 박윤형 씨한테 질질 끌려다녔는지도 이해 안 되잖아요. 분명 구린 뭐가 있단 겁니다. 이대로 종결할 게 아니라 수사 전환해야 합니다.”
김 형사는 귀찮다는 듯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왜 그 사람들 사정까지 알아야 해? 증거만 보고 판단하면 되지. 증거들이 하나같이 아니라잖아.”
“그리고요. 김 형사님, CCTV에 찍힌 마지막 장면이요. 분명 형제라고 했는데 둘이…….”
“무슨 재미난 이야기 중이셨습니까?”
박 형사 얼굴로 그림자가 지더니, 서늘한 미소를 지은 남자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박 형사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호랑이가 되지 못하는 자다. 어쩐지 싸늘한 감각이 등에서 느껴져 박 형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건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영상이지 않나. 수사 도중 입수한 자료로 피해자의 사생활에 대해 떠드는 건 좋아 보이지 않네요. 따로 기자들 입에 들어가면 제 쪽에서 어떻게 할 거 같아요?”
피해자가 이 부분을 걸고넘어지면, 징계를 받을 수 있었고, 주변에 이 사건 때문에 기자들이 많이 접촉하고 있었다.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은 박 형사는 작게 신음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입 다무는 거로 합의 보죠. 저는 이 일을 원만하게 끝내고 싶거든요.”
이 남자는 경고하고 있었다. 아니, 강요하고 있었다. 더 파내지 말고 묻으라는 일종의 압박이었다.
“그래야죠. 안으로 들어가시죠.”
김 형사는 반색하며 안으로 안내했다. 깔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가 박 형사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더니 돌아섰다.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깊고 어둠이 서려 있었다.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확실한 건 이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거다.
목적이 생기면 뭐든 해내고 마는 무서운 사람. 저런 사람에게 걸리면 인생이 피곤하다. 박 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수첩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 * *
투둑.
태화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비가 음울한 회색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오늘도 그러고 있겠지. 이경은 비가 오면 가만히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빗소리를 듣는다거나 비가 내리는 걸 보는 건 아니다. 콧잔등에 빗방울이 내려앉아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해봐야 쓸데없는 고민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다.
이경은 고민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심장이 뜯어질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태화가 ‘이경아.’ 부르면 안긴다. 두 팔에서 느껴지는 무게.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 않은 알맞은 온도, 숨을 쉴 때마다 그에게서 불어오는 향. 그렇게 이경이 괴로워하는 걸 알면서도 태화는 만족스러웠다.
차가 비를 제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지하주차장에 차가 멈춰 섰다. 시동까지 완벽하게 끈 태화는 시트에 등을 묻었다. 비 때문에 시원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습도가 높아 찝찝했다. 증기로 찌는 듯한 더위가 미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툭툭. 긴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태화는 촉이 좋은 편이다. 쥐새끼 같은 기자들이 숨어 있는 걸 정확하게 짚어냈다. 이경이 여기 있다는 걸 흘리자 파리 떼처럼 몰려들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이경은 어디에도 나가지 못하고 태화의 집에 고립되었다.
이제 기자들도 슬슬 치워야 할 때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심신이 쇠약한 이경을 여기까지 몰아넣었으니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이다. 내심 불안함이 가중되어 몸을 섞을 때도 집중하지 못했고, 어떨 때는 무섭다며 태화의 팔목을 잡고 안아 달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요즘 이경에게 정신이 아프면 몸을 혹사하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그걸 이용해 태화는 여러 번 이경을 취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안기는 게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차에서 긴 다리를 꺼내 보안이 잘된 오피스텔 안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머리를 쓸어 올려 정리하고 구겨진 슈트를 손으로 쓸었다. 이경은 흠 없는 태화를 좋아했고, 언제까지든 그 취향에 맞출 생각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 앞에 도달한 태화는 긴 손가락을 뻗어 벨을 눌렀다. 안에서 기척이 없다. 다시 벨을 눌러도 똑같다. 불길한 생각이 태화의 뇌를 좀먹었다. 위태롭게 통창 앞에 앉아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경이 떠오르자 등으로 공포가 엄습했다.
창 앞에 앉아 생각했던 게 아래로 몸을 던지는 상상이었다면? 심신이 미약한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는 거였다. 적당히 했어야 했다. 아니라면 집 안에 CCTV라도, 그게 아니면 사람을 붙였어야 했는……!
숨이 빨라지고 머리가 뜨끈해졌다. 그는 도어락에 지문을 올려놓고 잠금을 해제하는 동안 심장에서 계속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경아, 김이경. 너 어디 있어?”
불러도 계속 대답이 없었다. 등으로 습기가 찼다. 만약 창밖에 몸을 던졌다면 지옥으로 가 다시 현세로 끌고 올 거다. 만에 하나 도망갔다면 두 다리를 잘라 다신 걷지 못하게 할 테다. 내장이 뒤틀리다 못해 다져지는 고통이 드나들었다. 드물게 평정심을 잃은 태화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관자놀이가 아플 정도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신발도 벗지 않고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가 중간쯤 도달했을 때 거실 쪽에서 미약한 소리가 났다. 태화의 발이 멈춰 섰다.
“나 여기 있는데 왜 그렇게 불러. 무슨 일 있어?”
발음이 불분명한 소리였다. 속에서 천둥이 치는 태화와 달리 목소리는 평온했다.
“벨 눌렀는데 왜 안 나왔어요?”
태화는 화를 애써 삭이며 자꾸 입 밖으로 뚫고 나오려는 엄청난 감정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 통증을 흡수한 가슴이 뻐근했다.
“……잤어.”
졸음이 가득 실린 목소리에 갑자기 모든 긴장이 풀렸다. 지옥에 떨어졌던 태화가 다시 현실로 끄집어졌다.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리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김이경은 그런 사람이지.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선 태화에게 어떤 식으로든 아픔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의 꿈은 태화가 흠 하나 없이 무결한 것이다. 태화를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 주기 위해 이경은 스스로 지옥에 남았다. 그런 사람이 그럴 리 없지.
태화는 고개를 내렸다. 검은 구두코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이성을 잃었다는 걸 이경에게 들키지 않으려 복도 중앙에 있는 발을 물려 다시 현관으로 갔다. 구두를 벗는 동안 거실 쪽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막 잠에서 깬 이경이 얼굴을 드러냈다. 졸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이경이 다가오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지나치게 좋은 냄새가 났다. 드디어 태화의 집에 이경의 냄새가 뱄다. 집뿐만이 아니다. 태화의 몸에도 이경의 냄새가 배기 시작했다. 이경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내장을 뒤틀던 분노가 녹을 듯이 사라졌다.
“경찰서 다녀왔지? 어떻게 마무리된대?”
조금은 겁이 묻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킷을 벗었다. 그러자 긴장으로 습기가 찼던 등이 조금 서늘해졌다. 대답을 기다리느라 이경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됐냐니까?”
태화는 이경이 제 상태는 보지 않고 사건에만 관심을 갖자 조금 불쾌했다. 그래도 제게 가만히 쏟아지는 시선이 나쁘지 않아 이경이 불안에 떨며 자신을 샅샅이 훑는 시선을 즐겼다.
“태화야, 말해 줘야지. 알아야 나도 대처하지. 결과가 그렇게 안 좋아?”
가깝게 붙은 이경이 태화의 옷자락을 잡고 마주쳐 왔다.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태화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어렸을 때는 저 눈을 볼 때마다 바다가 떠올랐었다. 끝없이 펼쳐진 경이로운 바다. 아름답고 그 속에 무얼 숨기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미지. 항상 이경의 눈은 태화를 볼 때마다 도망가려고 파도가 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살 떨리게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저 바다를 말려서든, 흡입해서든 가져야겠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바닷속에 발을 넣고 잡아 봐도 일부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이경은 매회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점점 만족할 수 없었다. 목이 찢어지는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걸 가지려면 바다로 몸을 던질 수밖에.
육체가 썩어 해류에 썩은 살이 뜯겨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밖에. 태화의 안엔 물에 퉁퉁 불어 썩은 괴물이 살고 있었다. 언제나 바다와 하나가 될 걸 기다리며. 어서 이경을 괴물이 살고 있는 집에 초대하고 싶었다. 아니, 반반이다.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마음과 발견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나 감옥 가야 해?”
허기가 졌다. 그래서 태화는 조금 장난치고 싶었다.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뭔가 감지한 듯 이경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단 표정이다.
“아마도요. 눈치 빠른 형사 하나가 이리저리 들쑤시고 있어요. 꽤 똑똑하더라고요. 냄샐 잘 맡아.”
이경은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어른인 척하고 있지만, 태화는 이 남자가 얼마나 여린지 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밀리는 편이다.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 금이야 옥이야 끼고 사니,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몰랐다. 좋은 것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미 이 사건에 이름을 올린 형사들은 줄줄이 태화 쪽에 매수됐다. 시체를 수습하러 올 가족도 없는 박윤형의 죽음을 자살로 매도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쪽으로 덜 똑똑해서 좋다.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 더 오래 걸렸을 테니까.
“저도 같이 갈 거니까. 공범이잖아요. 형제가 나란히 콩밥 먹으면 재밌겠네요.”
순간 이경의 눈이 커졌다. 이경이 한달음에 다가와 태화의 셔츠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이경은 자기 일에 순종적이면서 태화 일엔 반항적이었다.
“네가 왜? 박윤형을 죽이려 했던 건 난데. 가서 말할게. 넌 아무 죄도 없다고, 내가 가서 말하면 되잖아. 가자. 얼른 가서……!”
이경은 사색이 되어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바지도 입지 않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막 잠금을 풀고 문손잡이를 내리려 할 때, 태화는 이경의 허리를 낚아챘다. 갑자기 몸이 들리자 놀란 이경이 왁 비명을 지르며 어서 내려달라고 이경의 셔츠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널 감옥에 넣는다잖아. 널.”
이경은 어떻게든 태화를 흠내지 않으려 애썼다. 속엔 썩은 괴물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농담이에요.”
“농담……?”
“곧 혐의없음으로 종결될 거예요.”
“거짓말. 안 믿어. 내가 바본 줄 알아?”
“진짠데.”
형사 한 명이 의문을 가진다 해도 결과는 뒤집히지 않는다.
“곧 종결될 거예요. 언론도 곧 잠잠해질 거고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다행이다. 이경은 안도했다. 힘이 풀렸는지 몸을 늘어뜨리려다 습관처럼 태화의 목에 팔을 둘렀다. 태화는 두 팔 안으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만족스러웠다. 얼마간 잘 먹였더니 살이 올라 꽤 무거워졌다. 마른 것보다 지금이 좋았다. 입으로 빨려 들어오는 살덩이가 많아 더 잘 음미할 수 있었다. 살이 닿는 것만으로 발기할 것처럼 아래가 뻐근했다. 그걸 이경의 다리 사이에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태화는 소파로 가 소파헤드에 등을 묻고 허벅지 위에 이경을 내려놓았다. 머리 조명을 받아 더 눈이 부셨다. 태어나 처음 본 신이 이제는 제 위에 있었다. 이경의 얼굴에서 태화는 평화를 찾았다.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자 그가 있어야 할 곳이다. 이경은 태화의 목을 갑갑하게 조이는 넥타이를 손으로 쭉 뽑아 옆으로 던졌다. 숨이 트이지 않았다. 이경을 보면 항상 목이 말랐다.
“태화야.”
긴장이 풀어졌는지 이경이 태화의 어깨에 턱을 대고 눈을 감았다. 이경을 닮은 순한 숨이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네.”
“뺨이 그렇게 됐던 날, 왜 나한테 그 말을 했어? 아, 모르겠구나.”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그땐 태화가 어려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태화는 기억력이 좋았다. 어린 날의 기억까지 머릿속 저장고에 일렬로 늘어놓고 저장 중이었다. 이경의 뺨이 그렇게 된 날의 기억 테이프를 재생했다.
이경은 그때 정말 아름다웠고 어디로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이경을 찾아대 바빴다. 그리고 그때 태화는 어렸다. 따라다닐 수조차 없는데 그때의 이경은 태화를 기피하기까지 했다.
어른이 되었을 땐 이경의 옆을 누군가 꿰차고 있겠지. 절망하는 태화에게 이경이 낙인 같은 화상을 입은 채 돌아왔다. 정말로 기뻤다.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야 내 옆에 있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어느 때보다 상처 입은 이경이 아름다웠다.
아이가 순수한 목적을 갖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긴 알까. 그리고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태화의 머릿속에서 이경은 여러 번 죽고 강간당했다.
아마 박윤형이 이경의 얼굴을 이렇게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태화 손으로 망쳤을 테다. 그리고 이경의 옆에 누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있으면 죽여 치우면 되니까. 박윤형처럼.
태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이경은 태화의 목이 마지막 동아줄인 것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이경의 인생에 남은 건 태화뿐이었다.
“예뻤죠.”
“지금은 괴물이잖아.”
“괴물이기도 하죠.”
태화가 괴물이니 이경도 괴물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경은 사랑스럽게도 자신을 괴물이라 자처했다. 사랑스러운 눈앞의 괴물은 태화라는 존재가 위험한 독극물인지도 모르고, 그저 태화라는 이유로 끌어안으며 소중하게 품고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지만 불안하다. 본성을 숨긴다고 숨겨 보지만 자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언젠가 태화 안에 살고 있는 괴물과 마주했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조카가 보고 싶어요.”
족쇄를 만들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가지 못하게,김이경의 삶이 김태화와 관련된 것들로 가득 차 무거워져 도망갈 수 없게. 도망가더라도 얼마 가지 못하고 돌아올 수 있게.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이용할 생각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이경의 눈썹 한쪽이 무너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망한 얼굴이다.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싫다 했잖아.”
“동의한 적 없는데요. 아이가 보고 싶어요. 내 아이.”
“아인…….”
이경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거기까지가 이경에겐 넘어선 안 되는 선이다. 그렇게 열심히 지키면 더 넘고 싶어진다. 한계에 도전해 보고 싶다. 그 한계를 넘을 때 밀려올 그 짜릿함은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이경의 가랑이 사이에 처음으로 좆을 묻을 때보다 더한 쾌감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경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쪽과 날 닮은 아이. 무척 예쁠 거야. 그렇죠?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하지 않나요? 꽤 몸이 무거워진 거 같은데. 침실 서랍장 맨 아래 칸에 있어요. 일어나기 싫으면 내가 가져다줄게요.”
이경은 느리게 침을 삼키며 움직이려는 태화의 양어깨를 꾹 눌렀다. 싫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하며 버텼다.
“미안해, 태화야. 나 아이 못 낳아……. 저번 검사할 때 주치의가 그랬어. 거기가 못 낳을 정도로 훼손됐대.”
“그래요?”
거짓말. 이경의 검사 결과지는 태화도 받아 봤다. 갈비뼈와 오른쪽 정강이에 금이 가고 손가락 인대가 나간 걸 제외하고 괜찮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태화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만약 낳을 수 있었다면 그래 줬을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으며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응.”
이경은 희미하게 대답했지만, 거의 거절에 가까웠다.
“근데 그때 박윤형한테 무슨 말을 했어?”
바쁘게 머리가 돌아가는 태화에게 이경이 말을 걸어왔다. 내뱉고도 아차 싶은 눈치다.
“날 엿 먹이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래서…….”
태화는 말을 하다 말고 끝맺었다. 네 발이 잘린 짐승처럼 바닥을 기던 박윤형이 떠올랐다. 끝이란 걸 알고 어떻게든 지옥을 선사하려 발버둥 치는 그에게 오히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이경의 눈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럴 거면 물어보지 말았어야지. 태화는 떨어져 있는 이경을 다시 가슴에 끌어왔다. 따듯한 뺨이 가슴에 닿았다.
“그래서? 뭐라 했는데?”
“생각이 안 나요. 다음에 기억나면 말해 줄게요.”
태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눈도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때 뱉은 말은 평생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언제?”
이경이 작게 속삭였다. 태화의 손이 이경의 머리를 반복적으로 매만졌다.
“태화야, 잠 와.”
“자요.”
제가 건네주는 단꿈을 꾸며.
* * *
태화는 잠든 이경을 침대에 곱게 눕혔다. 침대에 눕혀 주자마자 그물로 들어가는 물고기처럼 이경은 시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태화는 협탁 위에 있는 스탠드 불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이경의 얼굴로 쏟아졌다. 침대 맡에 걸터앉은 태화는 이경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손 아래로 울퉁불퉁한 피부가 느껴졌다.
‘그때 박윤형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죠?’
태화는 자고 있는 이경에게 눈으로 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나한테 그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요. 근데 나 그쪽 안 닮았어. 넌, 널 낳은 어미랑 그렇고 그런 짓은 안 하잖아?>
아마 이 말을 이경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면 까무러치겠지. 태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경이 뭘 숨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도. 고작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타격을 받을 거라 생각 했다면 오산이다. 어떤 형태로 존재해도 김이경은 김이경이었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온 태화는 이경의 지정석 앞에 섰다. 이경은 볕이 좋은 날에 이 창문 앞에 앉아 어딘가를 계속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앞을 서성이던 태화는 벽에 등을 기대고 이경이 보던 곳을 빤히 봤다. 창틀이었다. 그 사이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있었다. 고개를 기울인 그는 그 안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넣어 끄집어내자 반으로 접힌 A4 용지와 여권이 나왔다.
지정된 날짜는 없었고 이경의 이름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언제든 갈 수 있게 예약금을 걸어 놓은 항공권이었다. 와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경은 언젠가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면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끓어올랐다.
태화는 앞뒤로 종이 맨 아래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이경이 써 놓은 글이었다.
<떠날 때가 되면 언제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누구 마음대로?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경을 잡으려 거대한 덫을 놓았다. 이경과 부모님 사이가 가까워지지 못하게 고립시켜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명을 알았을 때부터 차분하게 시골로 요양을 가게 유도했다. 박윤형의 자금줄을 막아 사채를 끌어 쓰게 했고 돈이 급해 이리저리 뛰는 그에게 이경을 던져 주었다. 짠 대로 잘 맞춰 굴러갔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굴러갔고 태화가 만든 미로 속을 도망쳐 나오는 이경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부모님은 지방에 갔고 박윤형은 죽었다. 그렇게 설계했는데도 한 사람의 마음만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김이경.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이경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진 이경의 육신이라도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거다. 태화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버튼을 눌러 불을 피웠다. 종이 모서리에 오래도록 대자 얇은 종이에 불이 붙었다.
태화는 불길이 번져 가는 A4용지를 창밖에 던졌다. 너울너울 춤을 추며 떨어지는 동안 종이는 검은 재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은 금방 사그라들어도 태화의 머릿속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창문에 비춘 제 모습이 퉁퉁 불은 괴물로 변하고 있었다.
기척이 났다. 어둠 속에 매일 밤 태화를 절망으로 이끈 이경이 서 있었다. 타는 냄새에 민감한 이경이 놀라 뛰어왔다가 멈춘 것이다. 문틈 사이 눈은 놀라 확장되어 있었다.
……봤어?
내 안에 살고 있던 괴물을? 오로지 당신 때문에 스스로 괴물이 된 날? 어디까지 눈치챘어?
이경이 겁을 먹고 뒷걸음치고 있었다. 그를 끌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지하에 가둬 두고,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자신만 보게 하고 싶었다. 눈을 가리고, 두 손과 두 발을 묶고.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잔인성이 태화의 이성을 잡아먹으려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망아지처럼 날뛰어 대, 여권이 손 안에서 말렸다.
“태화야.”
겁먹은 눈과 마주하자 태화는 차츰 저를 좀먹어 가던 감정을 진압했다. 아직은 아니야. 이경은 심적으로 나약한 상태였다. 태화가 흠결 하나 없길 바랐다. 깊숙한 곳에 있는 괴물을 꺼내 보여 주면 울려나? 아직은 이 달콤한 환상 속에 살게 놔두고 싶었다.
“오해야. 언젠가 너한테 짐이 되면 떠나려 했던…….”
이경이 뒷걸음질을 쳤다. 여태 봐왔던 태화와는 다른, 낯선 분위기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지금 왜 일어났어요. 더 자지.”
태화는 이경이 더 말할 수 없도록 중간에 끊었다. 머릿속에 득실거리는 뱀들이 이경의 다리를 끊어 놓으라 저를 부추겼지만, 모르는 척 웃었다.
“왜 묻지 않아? 무섭게.”
“물어보면 뭐가 달라져요? 차라리 못 본 거로 하는 게 낫잖아요.”
이경이 도망가려 했던 거.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거짓말한 거. 그게 모두 뭘 향하는지 아는데. 말할 때마다 꼬챙이로 들쑤셔지는 기분을 느끼며 애써 웃었다.
“곧 집을 구입할 생각이에요. 거기에 당신만 오면 될 거 같은데. 올래요?”
오래전부터 이경을 맞이하려고 서울 근교에 담이 높은 집을 구입했었다. 태화는 검은 머릿속을 숨기고 이경을 제 집으로 초대했다.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어 준다면 자신은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이경 옆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가 꿈꾸는 무결한 김태화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