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29)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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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지 않은 방 안에는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까만색이었다. 사방에 둘린 계란판 같은 방음재가 까맸고, 벽 한 면을 모두 차지하다시피 한 미디 책상이 까맸다. 그 위에 양옆으로 놓인 투웨이 스피커와 가운데 자리한 모니터의 베젤도 죄다 까만색이었다. 그나마 노트북이 메탈 재질의 그레이 컬러였으나, 블랙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심지어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조차 위아래가 검정인 트레이닝복이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가 있던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조금 내린 재환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스피커에서 ‘우주 같은 너-!’라는 가사의 노랫소리가 반주도 없이 터져 나왔다. 방음재가 없었더라면 당장 이웃집에서 고성방가로 신고가 들어왔을 법한 크기였다. 노래는 따로 정지시키지 않았음에도 5초 남짓 재생된 후 알아서 멈추었다.

몇 번 마우스를 딸깍인 재환은 다시 또각,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우주 같은 너’라는 같은 가사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원스레 뻗어 나가는 보컬 밑에 둥둥거리는 베이스 음이 깔렸다. 조금 전과 같이 노래는 플레이된 후 약 5초 후에 자동으로 정지했다.

그다음에는 쿵쿵, 드럼의 킥 베이스가 추가되었다. 또 그다음에는 댐핑을 충분히 살린 스네어가 추가되었고, 그러다 종국에는 모든 악기와 보컬이 한꺼번에 재생되었다. 물론 가사의 구절은 모두 똑같았다.

우주 같은 너!

1시간 동안 약 백 번 이상의 ‘우주 같은 너’를 들은 재환은 결국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두 눈을 꾹 감고 양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기를 잠시,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어뜨린 후 작은 인공 눈물 튜브를 집어 들었다.

벽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방음재로 도배된 천장을 향해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눈을 부릅뜨고 가느다랗게 핏발 선 눈 안으로 똑똑 맑은 액을 떨어뜨렸다. 눈꺼풀을 몇 번 내렸다 올리자 그제야 뻑뻑했던 시야가 좀 깨끗하게 걷히는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쭉 기지개까지 켜고서 책상 위로 인공 눈물을 던졌다. 그러나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탓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짜증이 섞인 탓인지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튜브는 책상 구석에 쌓인 CD 더미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찮음이 앞서 주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또 필요하게 될 테지만.

항상 믹싱을 하다 보면 재환은 지금처럼 귀보다도 눈으로 더 피로감이 몰려왔다. 몇 시간이나 얼기설기 얽히고 쌓인 트랙들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보컬은 보컬대로, 드럼은 드럼대로, 또 기타는 기타대로 한데 묶어 트랙에 알록달록한 색감을 입혔으나,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종전까지 질리도록 들은 구간을 다시 틀어 볼까 고민하다 노트북에 연결된 모니터 위로 메일 창을 띄웠다. 빼곡히 적힌 내용을 재차 찬찬히 읽어 내리는데, 절로 마른 입술 새에서 ‘흠….’ 침음하는 듯한 소리가 흘러 나갔다. 두 눈은 맨 마지막에 적힌 ‘우주 공간에서 울리는 것처럼’이라는 원곡자의 요구 사항에 고정되어 있었다.

본디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공기가 없는 우주에서는 소리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굳이 그렇게 심오하게 파고들지 않더라도 우주 공간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 모호하게 다가왔다. 펄펄 끓는 태양 근처인지, 메말라 버린 행성 위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우주선 안인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트랙을 보내 준 원곡자에게 이게 당최 무슨 뜻이냐 따질 수는 없었다.

원래 수십, 때로는 수백 개에 이르는 음악 트랙을 조화롭게 하나의 트랙으로 만드는 믹싱이란 이런 작업이었다. 설사 원곡자의 요구가 뜬구름 잡는 소리 같더라도 기술적 한계가 있지 않은 이상 최대한 따르는 것이 믹싱 기사의 역할이었다. 게다가 과거에는 이보다 더한 요청도 수도 없이 들었었다.

여기는 더 비 오는 것처럼 해 줄 수 있어?

아예 바닷속에 잠긴 걸로 해 줘.

새벽 숲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

그때는 모자란 믹싱 실력으로 어떻게든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려 퍽 진땀을 흘렸더랬다. 정말 노래에 빗소리를 넣을 수는 없으니 드럼의 라이드 심벌을 빗소리 비슷하게 만들고, 진짜 바닷속에서 녹음한 느낌이 나도록 온갖 리버브 플러그인은 다 만져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에게서 ‘너무 좋다’라는 답이 돌아오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징-.

별안간 울린 진동음이 아무 영양가 없는 기억에 빠져 있던 재환을 현실로 불러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재환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했다. 마른세수한 후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응, 희성아.”

- 형! 메일 받으셨죠?

“어, 지금 피드백 참고해서 다시 작업하고 있어.”

늘 그랬듯 상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밝고 활기찼다. 최근 밴드 일이 잘 풀리고 있어 더욱 그러한 듯했다. 이러니 번번이 재환은 희성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 그, 딴 게 아니라 메일에 못 적은 게 있어서요.

“뭔데?”

- 3분 10초 정도에 브리지 끝나고 브레이크 들어가는 부분 있잖아요.

“잠깐만.”

통화를 스피커 모드로 돌린 재환은 몇 번 키보드의 방향 키를 탁탁 두드려 희성이 말한 부분으로 커서를 옮겼다. 노래가 세 마디 정도 재생될 수 있도록 구간을 지정한 후 ‘찾았어, 말해.’라고 덧붙였다.

- 거기 브레이크 끝나고 드럼에 탐 때리는 거요. 그거 완전 우주 폭발하는 느낌으로 가능해요?

“…….”

정말 그런 느낌을 내고 싶으면 우주 폭발하는 소리를 녹음해 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대신 뒷목을 긁적인 재환은 스페이스 키를 눌러 설정한 구간을 재생시켜 보았다. 노래가 끝나고 반 박자 정적이 흐른 뒤 탕, 하는 탐 소리와 함께 곡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음…. 지금은 기본 효과만 입혔는데 어택을 더 살려 달라는 얘기지?”

- 어택 정도가 아니라 아예 펑! 하고 터지게요.

지금도 밸런스는 충분히 올라가 있는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희성은 더 극적인 느낌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모니터에 메모장을 띄운 재환은 급히 타자를 두드려 ‘브리지 끝나고, 우주 폭발 느낌’이라고 희성의 말을 옮겨 적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 부분만 탐의 볼륨을 높이는 걸 테고, 리버브를 바꾸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그 전에 컴프레서의 릴리즈 타임을 좀 건드릴 필요가 있었다. 여하간 진짜 우주가 폭발하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나, 이것저것 만지면 얼추 비슷한 느낌으로는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형, 어때요? 될 것 같아요? 네?

생각에 잠긴 재환이 말이 없자 상대가 조르는 듯한 어투로 답을 재촉했다. 피식 웃은 재환은 ‘그래. 어떻게든 해 봐야지.’ 하고 대답했다. 동시에 노트북 옆에 둔 핸드폰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피커에 바짝 귀를 대고 있었으면 아마 고막이 꽤나 얼얼했을 것이다. 누가 보컬 아니랄까 봐.

- 아, 역시 재환 형이 존나 짱이야. 나 형 진짜 사랑하는 거 알죠?

시커먼 사내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봤자 기쁠 리 없었다. ‘됐다, 됐어.’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한 재환은 작업 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새 또 눈이 뻑뻑하게 말라 오는 느낌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끙,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까 인공 눈물을 떨어뜨렸을 거라 예상되는 책상 밑 구석진 공간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바닥에 뽀얗게 깔린 먼지뿐이었다. 최근 귀찮다는 핑계로 청소기를 돌리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에 먼지를 닦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번 작업에 들어가면 괜한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물론 허울 좋은 핑계였다. 대신 부지런히 인공 눈물을 찾던 중, 책상다리와 바닥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손이 뻗어 나갔다.

숙였던 허리를 편 재환은 의자 등받이에 깊이 등을 기댔다. 고작 바닥에 떨어진 물건 하나 주웠을 뿐인데, 최근 내도록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던 탓인지 등허리가 온통 뻐근하게 당겼다. 하긴, 이제 창창한 이십 대가 아니니 슬슬 몸에 위험 신호가 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괜히 목을 한 번 크게 돌린 재환은 손에 쥔 것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끝이 닳고 닳아 인제는 쓸 수 없는 기타 피크였다. 표면에 새겨진 그림이나 미리 수 따위의 글자도 거의 지워져 있었다. 당연히 언제 떨어뜨렸는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재환은 엄지 끝으로 뭉툭해진 피크 단면을 더듬어 보았다. 먼 과거, 밴드 멤버들과 합주실에서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아씨, 잠깐만. 피크 또 떨어뜨렸어.’

‘잘 찾아 봐.’

‘야, 됐어. 어차피 서재환 저 새끼 절대 못 찾아.’

당시 멤버 한 놈이 절대 못 찾을 거라고 단정 지었을 만큼 바닥에 떨군 피크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환이 애용하던 피크는 합주실의 나무 바닥과 색이 엇비슷하여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몇백 원이 아쉬웠던 시절이라 어떻게든 찾아내려 눈에 불을 켜고 바닥을 헤집곤 했다. 물론 열에 아홉은 포기로 끝났지만.

그날도 합주 도중 시원히 피크를 날려 버린 재환은 한참이나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다녔다. 떨어뜨리는 족족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니 슬슬 오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열 번 중 한 번 피크를 찾는 행운은 거머쥘 수 없었다. 종내 기타 가방에서 새 피크를 꺼내며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맨날 사라지지.’

아닌 게 아니라, 재환은 정말로 조금 짜증이 났다. 꼭 피크 산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고,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번 그러지를 못하니까. 그러자, 키보드 뒤편에 앉아 있던 녀석이 대뜸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냈다.

‘피크 요정이야.’

‘뭐?’

‘피크 요정이 주워 간 거야.’

말하는 표정이 하도 진지해 그게 당최 무슨 헛소리냐는 타박이 나가지 않았다. 내심 참 참신한 발상이다 싶기도 했다. 하긴, 그렇게 특이한 구석이 있으니 남들은 절대 흉내 내지 못할 곡들을 만들어 오는 것이었을 테다.

“피크 요정은 개뿔.”

나중에 지가 다 주워 갔으면서.

짧은 시간 사이 그다지 되짚고 싶지 않은 과거를 연거푸 반추한 재환은 괜히 기분이 저 끝까지 가라앉았다. 버려 버릴 생각에 방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마치 다트 던지듯 피크를 조준했다. 그러다 그냥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과거에도 늘 그랬다. 실수로 잃어버릴지언정 이상하게 제 손으로 피크를 버리는 일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모으는 것과 비슷한 심리인 것 같았다. 이거야말로 헛소리인가. 조금 쓰게 웃은 재환은 책상 위에서 핸드폰을 집었다.

좀처럼 정리를 하지 않아 몇 페이지나 아이콘으로 도배된 화면을 휙휙 옆으로 넘겼다. 이윽고 화면이 맨 끝 페이지에 멈추었을 때, 액정을 누를 듯 말 듯 그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까닥거렸다. 저도 모르게 앞니로는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끝끝내 아이콘 하나를 누르지 못한 재환은 집어 던지듯 핸드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엎어 두었다. 이럴 게 아니라 희성이 전화로 얘기한 부분부터 일단 해결하자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서 문제의 구간을 다시 찬찬히 들어 보려 노트북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둥 드럼의 탐 때리는 소리가 울리고,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재생이 종료되었다. 그것을 서너 차례 더 반복했다.

“젠장.”

이제는 눈이 아니라 귀까지 말썽이었다. 탐 소리가 큰지 작은지, 어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작업을 지속해 봤자 이미 사공이 맛이 갔으니 결과는 산으로 갈 것이 뻔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긁적인 재환은 다시 핸드폰을 쥐었다.

방금 전의 일을 고대로 반복하듯 재빨리 화면을 옆으로 넘겼다. 아까는 끝까지 누르지 못했던 아이콘을 꾹 누르는 손끝에 망설임이 없었다. 몇 번 더 화면을 톡톡 두드리자 작은 프로필 사진과 함께 짧은 설명이 적힌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 하나하나를 쓱쓱 눈으로 훑으며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27세, 바텀, 곰 타입 형님 찾아요]

[38세, 탑, 호텔에서 바로 만나실 분]

[30세, 올, 애인 구함]

나이도 제각각, 포지션도 제각각, 원하는 것도 다 달랐다. 하지만 늘 그랬듯 저 중에서 딱 마음 가는 상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진에는 얼굴이 안 나와 있기도 했거니와, 재환에게는 그 소개가 다 그 소개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게이 바 같은 곳에 가 상대를 물색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과거 한번 갔다가 이러저러한 사유로 술 한 잔 비우기도 전 도망쳐 나와야 했었으니까.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다소 흐린 눈으로 화면을 보며 죽죽 목록을 내리기만 하던 중, 일순 엄지손가락이 멈칫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재환은 얼굴 가까이 핸드폰을 가져갔다. 손톱만 한 사진 속 남자의 머리칼에서 한동안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옆에 적힌 프로필로 시선이 간 건 그다음이었다.

[29세, 탑, 언제든 오케이]

소개 한번 참 간결했다. 그만큼 쓸데없는 조건이 붙어 있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낼 수는 없었다. 우습게도 남자의 사진에 눈길이 갔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일단 사진이나 좀 크게 보자는 생각에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보통 이곳에 당당히 얼굴을 올리는 이들은 어느 정도 외모에 자신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속 남자도 예외는 아닌 듯했다. 짐작했던 대로 꽤나 반반한 얼굴이었다. 곱게 쌍꺼풀이 지지 않고, 눈동자 색이 옅지 않고, 뭘 바른 것처럼 입술이 붉지는 않았지만. 물론 그게 재환 본인의 취향을 벗어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실 재환에게는 딱히 취향이랄 게 없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손톱 끝으로 톡톡 화면을 두드리던 재환은 한 번 피식 웃고는 남자의 아이디를 눌렀다. 메시지 보내기를 선택하자 곧바로 깨끗한 창이 떠올랐다. 그 위에 빠른 속도로 짧은 문장을 입력했다.

[오늘 어때요]

전송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 또한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몇 시, 어디요?]

좋다, 혹은 싫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답이었다.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것저것 재지 않는 쪽이 재환도 편했다. 툭 까놓고 말해 연애 대상을 찾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밤 10시 어때요. 집 주소 보내줄게요.]

얼마 안 가 ‘좋아요’ 하는 깔끔한 답이 돌아왔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재환은 담뱃갑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며칠이나 청소를 미루고 미뤘던 집 안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식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좁은 탁자 위에는 배달 음식 용기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개수대 안에는 또 그만큼의 설거짓거리가 가득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제법 깔끔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게으른 인간이 되었나 싶어 재환은 조금쯤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부엌 한편에 줄줄이 늘어선 빈 맥주 캔을 보니 그러한 기분은 배가 되었다.

우선 설거지부터 모조리 해치운 재환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꺼내 재활용할 것들을 나누어 담았다. 꽉 찬 봉지를 현관 앞에 가져다 놓으니 일단 부엌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느낌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거실 청소로 들어갔다.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내친김에 밀대로 걸레질도 했다. 그러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속옷을 발견해 곱게 갠 후 침실 서랍 안에 넣었다.

다행히 잠만 자는 침실은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손님이라면 손님인 사람을 들일 곳이니 그냥 둘 수 없었다. 재환은 몇 안 되는 빨랫감을 세탁기 안에 옮겨 두고 침구를 깨끗이 정리했다. 환기를 위해 방 창문도 활짝 열었다. 아직 겨울인 탓에 제법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들이쳤으나, 청소하느라 적잖이 땀을 흘린 재환에게는 적당히 시원하게 느껴졌다. 잠시 그 앞에 서서 창틀에 팔을 얹고 한숨을 돌렸다.

재활용 쓰레기를 밖에 내놓는 것을 끝으로 청소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두 손을 탁탁 털며 굳게 닫힌 작업실 문을 흘끔거렸다. 사실 집에서 제일 더러운 곳은 아마도 저 문 너머일 것이었다.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장소인 만큼 별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닥에 쌓인 먼지만 해도 상당했고, 정리해야 할 물건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포장 안 뜯은 CD도 여럿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재환은 벽에 걸린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약속 시간까지는 약 1시간 반 남짓. 아직 씻지도 못했으니 작업실 청소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오늘 저곳에 누가 더 들어갈 일은 없을 성싶었다. 깔끔히 포기를 택한 재환은 새 속옷을 꺼내 쏙 욕실로 들어갔다.

웃옷을 벗고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 남자의 몰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꾀죄죄했다. 머리는 산발에 눈은 충혈돼 있고, 설상가상 턱 끝에는 거뭇거뭇 수염까지 돋아났다. 그제야 제대로 씻는 게 3일 만임을 깨달은 재환은 와, 라고 낮게 탄식했다. 이런 게 바로 재택근무의 폐해인가 싶었다. 그러다 그마저도 초라한 변명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레버를 끝까지 돌려 물을 틀고 세면대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작업에 찌든 서재환에서 잠시 벗어날 시간이었다.

약속이 약속인 만큼 씻고 나름의 단장을 마치는 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거울에 비친 결과물이 썩 나쁘지 않아 재환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기실 단장이래 봐야 별 대단한 건 없었다. 평소 생략하기 일쑤인 스킨과 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머리에 왁스 좀 묻히고, 트레이닝복이 아닌 다른 옷을 꺼내 입는 정도랄까. 그 다른 옷이란 것도 당연히 슈트 따위는 아니었고, 그나마 가진 것 중 깔끔한 바지와 티셔츠였다. 다만 위아래로 색이 죄 검어 조금 칙칙해 보이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집에서 만나는데 괜히 차려입는 것도 사실 웃긴 일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도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어 본 재환은 아차 했다. 그래도 맥주 몇 캔쯤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생수 말고는 마실 거리가 전무했다. 서둘러 두툼한 후드 집업을 걸친 뒤 운동화를 구겨 신고 문밖으로 나섰다.

크고 작은 빌라들이 쭉 늘어선 골목은 오늘따라 유달리 어둡고 조용했다. 종종 마주치던 길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타닥타닥, 중간에 맛이 간 가로등 점멸하는 소리만이 쌀쌀한 적막 위로 얹혔다. 그 아래서 후딱 담배 하나를 태운 재환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문 꼭대기에 달린 풍경이 짤랑짤랑 제법 맑은 소리를 냈다. 어쩌면 오늘 들은 소리 중에서 가장 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소리일지 몰랐다. 이런 것도 직업병이다 싶어 슬쩍 헛웃음 지은 재환은 입구 옆에 놓인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다른 코너는 둘러볼 필요도 없었으므로 곧장 맥주가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활짝 맥주 칸의 문을 열고서 고민도 없이 영국산 흑맥주를 줄줄이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다 불현듯 맥주를 사러 온 이유를 떠올린 재환은 손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조금은 대중적 취향의 맥주를 고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근데 그 대중적 취향이라는 게 뭐지? 나도 모르겠다. 속으로 자문자답하며 그나마 눈에 익은 상표의 맥주를 차례로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금세 묵직해진 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앞서 온 중년의 남자 손님이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 담배 한 갑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뒤에서 들으니 최근에는 피우는 사람이 거의 없는 담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바이트생은 여기에 그 담배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거, 내가 지난번에 갖다 놓으라고 했지!”

“예? 아니, 그게….”

남자는 놀란 토끼 눈이 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편의점은 장사할 생각이 있냐느니, 손님이 왕이라느니 별 같지도 않은 소리를 연신 침 튀기며 쏟아 냈다. 안 그래도 슬슬 바구니 손잡이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파 오기 시작한 재환은 팍 미간을 구겼다. 다른 손으로 툭툭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저기요, 딴 데 가세요.”

“뭐라고?”

난데없는 간섭에 남자는 씩씩거리며 휙 뒤를 돌았다. 한데 상대의 눈이 저보다도 한참이나 위에 있어 한순간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나이는 한참 아래인 것 같다만, 눈빛도 살벌하고 옷도 죄다 시꺼먼 게 좋게 봐 줘도 절대 호락호락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재환의 낮게 깔린 목소리도 한몫했다.

“죄송한데, 담배 딴 데 가서 사시라고요.”

결국 눈알만 부라리던 남자는 쳇, 혀를 차며 쿵쾅쿵쾅 편의점을 나갔다. 그제야 겨우 차례가 돌아온 재환은 계산대 위에 맥주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는 사이 집업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려는 때였다.

“이분 얼마 전에 제대하셨죠? 광고 후에 유한영의 ‘Night Fall’ 들려 드리겠습니다. 노래 듣고, 직접 스튜디오에도 모셔 볼게요!”

편의점 내부에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경쾌한 목소리가 일순 재환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머니에서 빼내던 카드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급히 허리를 숙인 재환은 바닥에 납작 붙은 카드를 얼른 주워 들었다. 맥주를 종류별로 담았던 게 문제였는지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대리운전은 영식이 대리운전! 대리운전은 영식이 대리운전! 금요일 밤에 걸맞은 라디오 광고가 꽤나 시끄럽고 경박했다.

이어지는 광고는 숙취 해소제였다. 철 지난 덥스텝 스타일의 로고 송이 좀 요란한 게 아니었다. 이쯤 되니 재환은 한시라도 빨리 편의점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게다가 광고가 모두 끝나면…. 눈썹을 구기고서 삑, 삑 소리가 멈출 기색이 없는 바코드 스캐너를 주시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맥주가 잘 찍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캔 표면이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그거 그냥 안 살게요.”

아르바이트생의 손에서 거의 맥주 캔을 빼앗다시피 한 재환은 성큼성큼 편의점 구석의 주류 코너로 걸어갔다. 서둘러 맥주를 제자리에 놓고 계산대로 돌아왔다. 카드를 내밀며 ‘빨리 계산해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이자, 오늘 영 손님 운이 없던 아르바이트생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를 보고 있자니 재환은 없는 담배를 내놓으라던 진상남과 저 자신이 별반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다만 그사이에도 계산을 재촉하듯 운동화 앞축이 탁탁 바닥을 짚었다. 모르긴 몰라도 슬슬 광고가 끝나갈 타이밍이었다. 초조함이 커졌다.

드디어 계산을 마친 카드가 넘어왔다. 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재환은 맥주가 담긴 봉지를 낚아채듯 집어 올렸다. 막 라디오 광고가 끝난 편의점 안에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거의 내달리듯 편의점을 가로지른 재환은 유리문을 박찼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 노래가 시작되며 쾅, 건반으로 서스 코드를 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위로 짤랑거리는 풍경 음이 겹쳐졌다. 재환은 다급히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등 뒤로 편의점 문이 닫히고 나서야 사위는 조용해졌다.

비로소 원치 않은 소리에서 벗어난 재환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껏 마신 숨을 후, 길게 내뱉자 희끄무레한 김이 입 주변으로 퍼졌다. 그새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났다. 심장도 조금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급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빼 물었다. 휠이 자꾸만 헛도는 라이터로 겨우 불을 붙인 뒤 재빨리 한 모금 빨아들였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에 들어차자 우습게도 그때서야 재환은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필터를 입에 문 채 습관처럼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흩트렸다. 나름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가 금세 부스스 일어났다.

담배는 얼마 안 가 필터 가까운 부분까지 타들어 갔다.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짧아진 담배를 지진 재환은 옆에 있던 큼지막한 깡통에 꽁초를 툭 던졌다. 집업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채 녹지 않은 눈이 꺼멓게 얼어붙은 골목길을 터덜터덜 밟기 시작했다. 차마 들을 수 없었던 노래의 제목처럼 지금이 ‘Nightfall’, 그러니까 해 질 녘이 아닌 것을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 * *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쥔 비닐봉지가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아직까지 귓가에 맴도는 한 음절의 피아노 코드를 그 작은 소음으로 지워 내며, 재환은 부지런히 발을 재촉했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저 앞에 집이 보였다.

이제 다 왔다, 라는 생각이 들 무렵 불현듯 두 다리가 우뚝 멈추어 섰다. 5층짜리 빌라를 마주 보는 자리, 낡은 가로등 아래 밝은 머리 색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은 남자의 머리칼이 주황색도 분홍색도 아닌 오묘한 빛깔로 빛났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환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바깥 기온 따라 차가워진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집 앞이에요]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 그새 약속 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딱 10시에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쉰 재환은 담벼락 앞에 서 있던 분홍 머리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막 전자 담배를 입에 물던 남자가 담배를 내려놓고 재환과 눈을 맞추었다.

“어플로 연락하신 분?”

“네, 죄송합니다. 오셨다는 메시지를 지금 봤네요.”

가까이서 본 남자는 사진에서보다 훨씬 훤칠한 인상이었다. 키도 제법 컸으며 이목구비도 뚜렷뚜렷했다. 한마디로 꽤나 미남이라는 얘기였다. 거기에 특이한 머리 색까지 더해져 어딘가 이 골목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겼다. 꼭 과거의 누구처럼. 그때, 남자가 등에 메고 있던 것으로 문득 재환의 눈이 향했다. 새카만 악기 가방이었다.

“아, 얼마 안 기다렸어요. 다짜고짜 초인종 누르기는 좀 그래서.”

‘네.’라고 대답하며 재환은 냉큼 남자의 가방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동시에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그래 봤자 이제 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든, 설사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든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다. 이러나저러나 오늘 밤 재환은 저 남자와 섹스를 할 거였다.

재환은 남자에게 따라오라고 고갯짓한 후 빌라 입구로 들어갔다. 계단 몇 개를 밟자마자 집이 있는 3층에 금방 도착했다. 별생각 없이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남자는 알아서 슬쩍 옆으로 등을 돌렸다. 썩 매너 있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짧은 멜로디를 울리며 잠금이 풀린 문을 열고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에게 편히 앉아 있으라 말한 재환은 일단 부엌으로 갔다. 사 온 맥주를 전부 냉장고 안에 집어넣으려다 거실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메고 있던 기다란 가방을 소파 옆에 세워 두는 중이었다. 하얀 LED 등 아래 그의 분홍색 머리가 유독 선명히 비쳤다. 거기에 또 멋대로 넋을 빼앗길 뻔한 재환은 부러 더 큰 소리로 물었다.

“맥주 마실래요?”

“괜찮아요.”

코를 찡긋하며 웃은 남자가 털썩 소파에 앉았다. 그러더니.

“아, 일단 씻고 싶은데.”

다분히 속셈이 빤히 보이는 대사였다. 물론 재환의 속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은 맥주를 그냥 봉지째 냉장고에 넣은 재환은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후드 집업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 두고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욕실 어디?’라고 물으며 앞에 선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재환은 대답 대신 달칵, 입고 있던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씻는 건,”

당황이 비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발목까지 내렸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남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중에 하죠?”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집 주소 보내 줬을 때. 혹시나 해서 로드 뷰도 찾아봤어.”

외모도 준수하고 섹스도 꽤 잘하는 남자에게는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생각보다, 말이 좀 많았다. 필로우 토크 이상의 수준으로.

“보통은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니까. 근데 집에서 만나면 안 무섭나? 난 집으로는 못 부를 것 같은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남자는 틈틈이 맥주를 삼키며 잘도 떠들었다. 이렇게 말이 많은데 섹스 도중에는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접은 팔을 베고 모로 누운 재환은 반은 대답하고 반은 적당히 넘기며 남자의 말에 응수했다.

“나 부를 때 진짜 안 무서웠어요?”

“별로.”

“아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집에 있는 물건 막 훔쳐 가거나.”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반대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으면?”

남자는 대단한 진리라도 깨달은 양 엄지와 중지로 딱 소리를 내며 ‘맞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팔뚝에 자리 잡은 근육이 보기 좋게 꿈틀거렸다. 목울대가 튀어나올 정도로 휙 고개를 뒤로 젖힌 남자가 남은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아, 그건 좀 걱정됐다. 엄청 못생긴 사람일까 봐. 사진이 없길래.”

팔을 뻗어 협탁 위에 빈 맥주 캔을 내려놓은 남자가 재환을 마주 보고 누웠다. 스탠드 불빛에 반사된 남자의 분홍 머리칼이 몇 시간 전 가로등 아래서 처음 봤을 때처럼 오묘한 빛깔을 띠었다. 저런 색을 내려면 한 서너 번은 탈색해야 한다고 했던가.

“근데 이건 뭐.”

“이건 뭐.”

재환은 가까워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뒷말을 따라 했다. 무슨 뜻이냐는 의미였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남자의 입꼬리가 시원스레 위로 올라갔다.

“완전 대박이지.”

재환은 저도 모르게 픽,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마 작업실에 며칠간 틀어박혀 있는 모습을 봤다면 빈말로도 저런 소리는 못 하지 싶었다. 재환의 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남자가 더욱 신나 말을 이었다.

“거기다 인상이랑 다르게 엄청 야하고. 아까 내 앞에서 바지 벗었을 때, 나 진짜 싸는 줄 알았잖아.”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남자가 적당한 타이밍에서 사정을 컨트롤하던 것을 재환은 똑똑히 기억했다. 괜히 속으로 섹스를 잘한다는 후한 평가를 내려 준 게 아니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섹스도 잘하는 사람이 왜 게이가 아닐까?”

“뭐?”

살짝 미소 짓고 있던 재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걷혔다. 판판하던 눈썹 사이에 폭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더 싱글싱글 웃더니 뒤통수와 베개 사이에 두 팔을 집어넣고서 천장을 보고 누웠다.

“왜, 게이더라 그러잖아요. 나 그런 쪽 촉이 엄청 좋거든. 내 말 맞죠?”

“남자랑 섹스하면 그게 게이 아닌가.”

“에이, 이게 움직여야지.”

머리 밑에서 팔을 빼낸 남자가 손가락을 모아 제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재환은 흥, 콧방귀 뀌며 ‘게이더는 무슨.’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는 ‘아님 말고.’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슬쩍 곁눈질로 재환의 눈치를 살폈다. 재환은 왜, 라는 의미로 눈썹을 한 번 쑥 들쳤다가 내렸다.

“담배 피워도 돼요? 전자 담배라 냄새는 덜 나는데.”

고개를 끄덕이자 ‘고마워요!’라고 말한 남자가 침대 밖으로 상체만 내밀어 벗어 놓은 옷가지를 뒤적였다. 그 옆으로 끄트머리를 묶은 콘돔 두엇이 나뒹굴었다.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액상 형식의 전자 담배를 꺼낸 남자는 다시 침대에 누워 흡입구를 입에 물었다. 뒤이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수증기 같은 연기가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연기에서는 남자의 머리 색처럼 달큼한 향이 났다.

“딸기 향이에요. 피워 볼래?”

남자는 재환이 대답도 하기 전 쓱 전자 담배를 내밀었다. 흡입구에 살짝 입술을 붙인 재환은 크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후 연기를 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다시금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담배 피우는 것도 섹시하네.”

“별….”

남자는 재환이 눈썹을 구기거나 말거나 씩 웃으며 담배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이 내뿜은 연기로 인해 금세 방 안이 달짝지근한 냄새로 가득 찼다. 괜히 몇 모금 빌려 피웠다가 진짜 담배가 피우고 싶어진 재환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집 안에서는 웬만하면 피우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아, 근데 그거 안 물어보네.”

“뭐?”

“내가 메고 있던 거.”

피워? 말아? 두 개의 질문을 거듭 머릿속으로 반복하던 재환은 무심코 ‘아, 베이스?’ 하고 되물었다. 의외라는 듯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사이 결국 ‘피워’ 쪽으로 마음이 기운 재환은 훌쩍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미 한참 전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몇 걸음이면 닿을 부엌으로 걸어 나갔다.

재환은 식탁 의자에 걸쳐 두었던 웃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몇 남지 않은 담배가 쪼르르 한쪽으로 기울었다. 편의점 간 김에 담배도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랬다면 쓸데없이 계산만 더 늦어졌을 터였다. 그러면 적어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곡의 인트로까지는 들었을 테고, 그러면 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상상하는 멍청한 짓을 관둔 재환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따로 재떨이가 없었으므로 협탁 위에 남자가 놓아두었던 빈 맥주 캔을 집어 창가로 갔다.

아무리 제집이라지만 알몸으로 슬렁슬렁 잘도 돌아다니는 재환을 보며 남자는 슬쩍 눈매를 좁혔다. 지금 자기 모습이 상대를 얼마나 꼴리게 하는지 영 알지를 못하는 눈치였다. 저렇게 자각이 없으니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남자의 야릇한 시선이 따라붙거나 말거나 창문을 활짝 연 재환은 차가운 창틀에 두 팔을 얹고 엉덩이를 쭉 뒤로 뺐다. 훅 들이친 늦겨울 바람이 맨살에 오슬오슬 한기를 퍼뜨렸으나, 꽤나 요란했던 섹스의 여운을 식혀 주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인 재환은 창밖의 찬 공기와 함께 입에 문 필터를 습 빨아들였다. 이내 전자 담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매캐한 감각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금세 그에 비례하는 만족감과 안정감이 손끝까지 퍼져 나갔다. 이래서 백해무익하다는 걸 알면서도 담배를 끊을 수가 없다.

“베이스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창 너머로 연기를 내뿜던 재환은 남자의 물음에 침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남자와 빤히 눈을 맞추다 ‘그냥. 길어서.’라고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호오-.’ 하며 눈썹을 씰룩였다.

“잘 아네. 혹시 악기 연주해요?”

“아니.”

이번에는 보다 빨리 대답하고서 남자를 등지고 필터를 빨아올렸다. 후, 길게 숨을 내뱉자 부연 담배 연기가 어둠이 깔린 창밖 허공으로 너울너울 흩어졌다. 이를 멍하니 눈으로 좇던 재환은 역시 말 많은 남자는 별로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나는 베이스 치는 게 직업이에요. 프로 세션 맨. 세션 맨이 뭔지 알아요?”

재환은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창틀에 올려 둔 빈 맥주 캔에 다 피운 꽁초를 쏙 집어넣고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름 잘나가요. 아이돌 곡 많이 녹음했고. 아, 며칠 전에 유한영 노래도 하나 녹음했는데.”

순간 재환이 물고 있던 담배가 스르르 잇새에서 미끄러졌다. 그대로 담배는 어찌할 틈도 없이 저 아래 길바닥으로 추락했다. 급히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 재환은 고개 숙여 새카만 골목길을 살폈다. 하지만 3층 높이에서, 게다가 이 밤중에 바닥에 떨어진 담배가 보일 리 없었다. 절로 미간이 푹 구겨졌다.

“유한영은 알죠? 드라마 OST도 많이 불렀으니까. 근데 진짜 잘생겼더라. 무슨 아이돌인 줄. 제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던데.”

불도 붙여 보지 못한 아까운 담배를 버려 버린 재환은 적잖게 짜증이 났다. 심지어 이제 남은 건 돗대뿐이었다. 그 틈에도 남자의 얘기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우와, 아이돌 같아요!’ 했다니까. 무슨 소녀 팬처럼.”

“뭐라고?”

느닷없이 큰 소리가 튀어 나갔다. 재환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남자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새 담배 따위 까맣게 잊은 재환은 아예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한쪽 무릎을 접어 걸터앉았다. 다시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진짜 유한영한테 아이돌 같다 그랬어?”

“아…, 응. 고맙다고 좋아하던데?”

언제 다그쳤냐는 양 남자의 대답을 들은 재환의 표정이 얼뜨게 변했다. 대꾸를 잃은 입이 헤벌어졌다. 영 종잡을 수 없는 태도를 보이는 재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슬쩍 손을 뻗어 바깥바람에 차가워진 뺨을 감쌌다.

“유한영 팬이었어? 나 좀 질투 나는데.”

“팬은 무슨.”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재환은 어깨를 돌려 남자의 손을 떨쳐 냈다. 꽤나 짓궂어 보이는 시선을 피해 풀썩 침대 위로 엎어졌다. 이제는 남자의 눈이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로 향했다. 슬그머니 그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아, 그거 아나? 유한영 옛날부터 게이라는 소문 있는 거.”

부드럽게 풀린 구멍 안으로 쑥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다. 재환은 남자의 물음에 답하지도, 넣은 걸 빼라고도 하지 않은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유 모를 황당함을 삭였다. 손가락은 찔꺽찔꺽 젖은 소리를 내며 제법 여유롭게 내부를 드나들었다.

“그래서 내가 한번 꼬셔 볼라 그랬거든. 근데 한다는 말이 참.”

남자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두꺼운 베이스 줄을 누르느라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끝이 은근슬쩍 예민한 부분을 톡 건드려 왔다. 속으로 신음을 삼킨 재환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직 섹스의 여파가 남아 있어 자극이 과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네? 차라리 게이가 아니라 그러지. 나 그렇게 차인 건 또 처음이었어.”

“야.”

대뜸 길이가 짧아진 부름에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재환은 고개를 외로 틀어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이대로 박을래, 아니면 내가 올라탈까.”

‘와….’ 하고 탄성을 내뱉은 남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졌다, 졌어.

공들여 정리했던 게 무색하게 이불은 잔뜩 구겨지고 시트는 아예 절반 정도가 침대 밖으로 밀려났다. 그 위에 대자로 누운 재환은 눈을 끔뻑이며 그다지 높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으나 연이어 피운 담배 냄새와 꿉꿉한 정액 냄새가 집요하게 콧속을 파고들었다. 방문 너머에서는 솨-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거듭 오늘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무성의하게 쓱쓱 티슈를 뽑아 정액이 말라붙은 사타구니를 대충 문질렀다. 그러고서 꿍꿍 뭉친 티슈를 휙 침대 밖으로 던졌다. 아무리 그래도 방바닥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이러다가 씻지도 않고 잠들 것 같았다.

남자야 씻으면 알아서 돌아갈 테니 그대로 꾹 눈을 감았다. 하나 남자 위에 올라타 실컷 헉헉댔던 탓인지 뒤늦은 갈증이 몰려왔다. 에이씨, 하고 짜증을 짓씹은 재환은 침대 밖으로 두 발을 내디뎠다. 입고 있던 옷은 진작 거실 바닥에 벗어 두었으므로 이번에도 그냥 벗은 몸으로 저벅저벅 부엌으로 나갔다.

벌컥 냉장고 문을 연 재환은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냉장 칸 안쪽에서 고민 없이 흑맥주를 꺼냈다. 닫힌 문짝에 등을 기대고서 엄지로 캔 꼭지를 들어 올렸다. 칵, 맥주 김빠지는 소리가 그렇게 달갑게 들릴 수 없었다.

꿀꺽꿀꺽 단숨에 쌉싸래한 맥주 절반을 들이켠 재환은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훔쳤다. 그러다 2인용 소파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는 남자의 베이스 가방으로 눈이 갔다. 어둠 속에서도 검정 가죽 표면이 매끈매끈 윤이 나는 것이 제법 선명히 보였다. 프로 세션 맨이라더니 가방 하나도 신경 써서 관리한 모양이었다. 재환은 재차 맥주를 들이켜며 저 안에 어떤 녀석이 들어 있을지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재즈 베이스? 프레시전 베이스? 5현 베이스? 남자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아예 뮤직맨 같은 느낌의 놈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바디까지 본인의 머리 색과 같은 쉘핑크 컬러면 꽤나 웃기겠다 싶어 재환은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깐 입가에 머물렀던 웃음은 남은 맥주를 몽땅 털어 넣었을 무렵 도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재환은 단 몇 모금 만에 텅텅 빈 맥주 캔을 적당히 개수대 안으로 던졌다. 금속 재질이 서로 부딪히며 꽤나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한데 아직도 완전히 갈증이 가시지 않은 느낌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새 맥주를 꺼낸 재환은 서둘러 입구를 땄다. 그즈음.

“에이, 아까 나랑 같이 마시지.”

바지만 입은 남자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슬렁슬렁 재환에게 다가왔다. 욕실에서 새어 나온 빛에 비추어진 남자의 젖은 머리칼이 흡사 잘 익은 토마토 속살 같은 색을 띠었다.

“기다리기 심심했어?”

수건을 목에 걸친 남자가 재환의 손에서 맥주를 가져가 옆 싱크대 위에 올렸다. 난데없이 맥주를 빼앗긴 재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씩 웃은 남자는 재환에게 진득하니 입술을 맞물렸다.

새 칫솔의 위치를 알려 준 결과인지 입 안으로 들이친 남자의 혀에서 싸한 치약 맛이 감돌았다. 이미 질펀하게 섹스한 사이에 키스 한 번 더 못하랴, 싶어 재환은 눈을 감고 남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들러붙은 입술 사이로 젖은 살덩이가 맞비벼지는 소리가 꽤나 질척했다.

한참을 물고 빨았던 입술에 쪽, 뽀뽀하는 것을 끝으로 남자는 재환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렸다. 입가에 묻은 타액을 직접 엄지로 닦아 주기까지 했다. 박고, 싸고, 그대로 끝내도 이상할 게 없는 관계인데 남자는 은근히 로맨틱한 구석이 있었다. 행동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난 그쪽 무지하게 마음에 드는데.”

재환은 대꾸하는 대신 저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나 평균적인 짙기의 검정 눈동자였다.

“속궁합도 괜찮은 것 같고.”

“그런데?”

“사실은 애인이 더 하고 싶긴 하지만. 섹파도 괜찮아요.”

재환이 대답을 꺼내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다시 남자의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 그러고는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뭇 게이들이 봤다면 꽤나 호들갑 떨었을 법한, 상당히 근사한 미소였다. 다만, 그 미소가 재환에게 온전히 통하지 않았을 뿐이다.

“뭐, 생각 있으면 다시 연락해요. 아니면 아예 폰 번호 알려 줄까?”

재환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습관처럼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남자는 재환의 뺨에 가볍게 뽀뽀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재환은 거실로 가 허물처럼 벗어 놓았던 드로어즈와 티셔츠를 꿰입었다.

잠시 후 이곳에 들어설 때와 같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온 남자가 익숙한 폼으로 한쪽 어깨에 베이스 가방을 멨다. 재환이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별안간 남자가 재환 앞으로 쑥 허리를 숙여 소파 등받이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뭐?”

“어플에서, 나 왜 골랐어요?”

음…, 하며 재환은 고민하듯 눈알을 굴렸다. 사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머리 색.”

“머리 색이 왜?”

“예뻐서.”

남자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흐트러진 재환의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넘겨 이마에 쪽, 하고 입술을 눌렀다. ‘염색하길 잘했네.’라는 말도 덧붙였다.

숙였던 허리를 편 남자는 ‘그럼 갈게요.’ 하더니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신발을 신기 전 다시 뒤를 돌았다. 위에 걸친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휙 재환에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물건이 어느새 재환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고. 악기 안 한다는 거짓말은 그런 거나 치우고 하지?”

느물느물 웃는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저도 모르게 매서워졌다. 재환은 손가락을 접어 손안의 피크를 꽉 움켜쥐었다.

“아, 손가락에 굳은살도. 아주 딱딱하던데? 그럼 또 봐요!”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재환은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꼭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사위가 온통 고요해졌다. 그러자 이제는 째깍째깍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 위잉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따위가 스멀스멀 고막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 소리들이 의식 속에서 막무가내로 증폭되기 전, 재환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해 뜨기 전까지는 찾을 일 없을 줄 알았던 작업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에 달린 LED 등 대신 더듬더듬 책상 위를 짚어 스탠드를 켠 후,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의자 위에서 축 몸을 늘어뜨린 재환은 등받이 너머로 휙 고개를 젖혔다. 발끝으로 바닥을 밀며 빙글빙글 의자를 돌리자, 올록볼록 나오고 들어간 천장의 방음재가 시야에서 원을 그렸다.

꾹 눈을 감은 재환은 왼손 엄지로 나머지 손가락 끝에 박인 굳은살을 매만져 보았다.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살결은 끝끝내 지워 내지 못한 미련의 증거였다. 과거를 향한, 과거의 사람을 향한, 그 사람의 노래를 향한. 사실 그 증거는 손가락이 아니더라도 이 방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예를 들면.

돌아가던 의자가 우뚝 멈추었다. 재환은 방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 가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근처와 달리, 시꺼먼 가방 표면에는 반질반질 윤기가 돌았다. 어쩌면 분홍 머리 남자의 베이스 가방보다도 더.

가방 앞으로 달달 의자를 끌고 간 재환은 가방 지퍼를 지익 밑으로 끌어 내렸다. 겉과 마찬가지로 까만 내피 사이에서 정신 번쩍 들 만큼 새빨간 기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환이 한때 목숨만큼이나 아꼈던 72년 빈티지 텔레캐스터였다.

기타를 빼내 허벅지 위에 얹은 재환은 가방 앞주머니에서 클립형 튜너도 꺼냈다. 피크는 아까 남자가 친히 주워 준 것이 있었으므로 굳이 필요 없었다. 덕분에 몇백 원은 아꼈다.

재환은 전원 켠 튜너를 기타 헤드에 끼우고서 익숙하게 6번 줄을 튕겼다. 튜너의 작은 LED 창에 알파벳 E가 떠오르며 그 아래 자리한 세로 바가 좌우로 몇 차례 왔다 갔다 했다. 기타의 헤드 머신을 돌려 그것이 가운데 고정되면 다음 줄을, 또 다음 줄을 튕겼다. 이윽고 E에서 시작된 음계가 다시 E로 끝나서야 재환은 튜너 전원을 껐다. 대략의 연주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일단 손이나 풀 겸 차례로 지판을 짚으며 크로메틱 스케일을 연습했다. 그다음에는 오픈 코드나 파워 코드 몇 개를 쳐 보고, 아무거나 생각나는 곡의 아르페지오를 따라 연주했다. 그러다 내친김에 기타 가방 옆에 있던 30W짜리 소형 앰프에 케이블을 연결했다. 전원 버튼을 꾹 누른 뒤 다짜고짜 드라이브를 걸고 리버브 노브를 3시 방향 이상으로 돌렸다. 이 정도면 확인할 것도 없이 딱 취향에 부합하는 소리가 날 터였다. 그리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켠 재환은 피크 끝으로 거침없이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충분한 잔향을 품은 기타 사운드가 넓지 않은 공간 사방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점점 지판을 짚는 손이 빨라지고, 자연스럽게 리듬을 탄 고개가 까딱였다. 얼마 안 가 재환의 입가에 쓴웃음이 아닌, 헛웃음이 아닌, 오롯이 즐거움만을 담은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책상 위에 놓인 LED 시계의 시 단위 숫자가 바뀔 즈음에서야 재환의 연주는 끝이 났다. 마치 섹스 후처럼 숨은 할딱거리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으며, 양 뺨은 잔뜩 상기되어 벌건 색을 띠었다. 그 상태로 잠시 숨을 고르던 재환은 가방 앞에서 융을 꺼내 땀 묻은 기타 줄을 쓱쓱 닦아 냈다. 그럭저럭 깨끗해진 기타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서 달칵 스탠드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거의 날밤을 지새우다시피 했으나 껌껌해진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그새 거실에는 어슴푸레한 여명이 깔려 있었다. 작업이 아닌 이유로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는 건 재환에게 있어 꽤나 오랜만인 일이었다. 침실로 들어가는 대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바지를 주워 든 재환은 손바닥으로 탁탁 먼지를 털었다. 그 안으로 두 다리를 집어넣은 뒤 위에는 집업을 걸쳤다. 머리에 후드까지 푹 뒤집어쓰고서 현관을 나섰다.

집업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은 느적느적 푸른 새벽빛이 깔린 골목길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 밑창이 시멘트 바닥에 끌리며 직직 소리를 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들이마시는 공기도 퍽 상쾌하게 느껴졌다. 간만에 성욕을 푼 탓일 수도, 손가락을 실컷 움직인 탓일 수도 있었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때마침 눈에 익은 치즈색 고양이 하나가 휙 앞을 지나쳐 갔다. 그러고는 훌쩍 담장 위로 뛰어올라 몸을 옹크렸다. 상대는 저를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었으나, 일단 재환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물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담배와 먹거리를 좀 사서 나온 재환은 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다행히 고양이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짜식, 먹을 복은 있네. 하고 중얼거린 재환은 봉지를 뒤적여 연어 캔을 꺼냈다. 캔의 뚜껑을 따서 담장 위, 고양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탈탈 내용물을 털었다. 딴에 또 까탈스러워 제가 지켜보고 있으면 먹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집 앞에 다다른 재환은 예의 가로등 아래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필터를 한 모금 습 빨아들이는데, 이상하게도 담배에서 달큼한 맛이 나는 듯했다. 꼭 딸기 맛 같은.

먼 과거에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밤새워서 합주를 하고 나왔을 적, 그때 피우는 담배는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진짜 딸기 향처럼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누군가가 슬쩍 곁에 다가와 묻고는 했다.

‘맛있어?’

‘어, 맛있어. 근데 넌 피우지 마라.’

‘왜?’

‘왜긴. 보컬이잖냐.’

회색과 청색 사이 오묘하게 걸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재환은 후, 마지막 연기를 내뱉었다. 이리저리 흩어지던 연기는 얼마 안 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시간이 지나도 기억은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아서, 발끝으로 꽁초를 짓이기는 재환의 입가에 조금은 아릿한 웃음이 걸렸다.

* * *

널찍한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왁자한 소음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소리, 잔 부딪치는 소리, 그 위로 얹히는 최신 유행곡…. 눌러쓴 검정 볼캡의 챙을 살짝 들어 올린 재환은 재빨리 가게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 저 구석진 자리에서 휙휙 손을 흔드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미소 지은 재환은 다시 볼캡을 푹 누르고 걸음을 뗐다.

“오랜만이에요, 형.”

“와, 이 형 또. 진짜 형한테서는 모자 좀 뺏어야 돼.”

“뺏어도 또 있다.”

장난 섞인 시비에 대꾸하며 재환은 자리에 앉았다. 재환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벌써 500cc 맥주를 절반 이상 비운 상태였다. 한 사람은 밴드 코스믹 라테의 보컬 겸 기타 채희성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같은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우정수였다. 최근 믹싱 작업을 해 준 팀이기도 했다.

“하여튼 저 형은 옛날부터 공연 때만 멀쩡했다니까.”

“그럼 지금은?”

‘아오, 몰라서 물어요?’라고 볼멘소리를 내뱉은 희성은 재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집어 가며 못마땅한 구석을 읊기 시작했다. 모자는 디폴트냐, 잠바까지 왜 이렇게 시꺼멓냐, 바지는 이것밖에 없냐,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나 그냥 가?”

“에이, 형! 그러면 섭하지. 믹싱 기가 막히게 해 줘서 오늘 우리가 쏘는 거잖아요!”

언제 타박을 늘어놨냐는 양 허허 웃은 희성은 손을 번쩍 들어 점원을 불렀다. 그사이 정수가 재환 앞에 냅킨을 깔고 수저를 놓았다.

“형도 일단 맥주부터?”

“그래.”

재환이 대답하기 무섭게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켠 희성이 점원에게 ‘오백 둘이요!’를 외쳤다. 밴드 보컬답게 다소 과할 정도로 목청이 좋았다. ‘안주는 나중에 시킬게요!’ 하고 덧붙인 희성은 재환 앞에 쓱 메뉴판을 내밀었다.

“뭐 드실래요?”

메뉴판을 받아 든 재환은 주먹 쥔 손에 턱을 괴고 페이지를 넘겼다. 이자카야 스타일의 선술집인 만큼 메뉴도 오코노미야키니 나가사키 짬뽕이니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몇 장 넘기다 보니 금세 술 종류가 적힌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맘에 드는 거 없어요? 일본 있을 때 이런 거 너무 많이 드셔서 그른가?”

당치도 않은 소리에 재환은 다시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며 피식 웃었다.

“야, 가난한 유학생이 술집 갈 돈이 어딨어.”

“헐, 진짜? 우리 재환 형 막 굶고 다닌 거야? 안 되겠네.”

흑흑 우는 시늉을 한 희성은 메뉴판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여긴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고 등등 나름의 평가를 줄줄이 내놓았다.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가 한마디 했다.

“야, 재환 형이 고르게 해야지.”

“됐어. 나 다 잘 먹으니까 그냥 희성이 네가 골라라.”

‘앗싸!’를 외친 희성은 재환이 건넨 메뉴판을 아예 제 코앞으로 가져갔다. 진짜 믹싱이 잘 끝나서 그런 건지, 그냥 저 먹고 싶은 걸 고를 수 있어서 신이 난 건지 콧노래까지 흥흥거렸다. 눈이 마주친 재환과 정수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서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얼마 안 가 희성이 시킨 생연어 사시미, 소고기 타타키, 고로케, 치킨 카라아게 따위의 메뉴들이 넓지 않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정수가 ‘생각보다 양이 많은데?’ 했더니 ‘이거 다 재환 형 드실 거다!’라고 희성은 큰소리쳤다. 심지어 빨리 먹어야 모츠나베를 시킨다나 뭐라나.

“자, 그럼 우리 미니 앨범 ‘MY GALAXY’를 멋지게 믹싱해 준 재환 형님께 감사의 뜻을 담아. 짠!”

세 개의 맥주잔이 연달아 부딪치며 캉, 하는 제법 맑은 소리를 터뜨렸다. 그와 함께 잔 안에 담긴 뽀얀 맥주 거품이 넘실넘실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이윽고 거품은 세 남자의 목구멍 너머로 금세 사라졌다.

“캬! 암튼 형, 진짜 감사함다.”

“됐어.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아니에요. 진짜 형한테 맡기길 잘한 것 같아요. 다른 멤버들도 다 마음에 든댔어요.”

정수의 말에 ‘다행이네.’ 하며 재환은 젓가락으로 연어 회를 집어 올렸다. 이 집에서 연어는 무조건 시켜야 한다는 희성의 얘기처럼 때깔이 꽤나 좋아 보였다. 먹어 보자 맛도 제법 훌륭했다. 내친김에 한 점을 더 집는 때, 맞은편에서 물음 하나가 건너왔다.

“형은 이제 기타 안 쳐요?”

집었던 연어를 앞접시에 내려놓은 재환은 맥주잔을 들어 목을 한 번 축였다. 뒤이어 나오는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 안 쳐.”

이토록 거짓말은 쉬웠다. 다만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상대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 진짜 너무 아쉽다. 나 형 플레이 겁나 좋아했는데.”

재환은 ‘그랬냐?’ 하고 희성에게 대꾸하며 내려놨던 연어를 다시 집어 입에 넣었다. 어째서인지 종전보다는 맛이 조금 덜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 짧은 시간 사이 연어 맛이 갑자기 변했을 리는 없었다.

“형 지금 내 말 안 믿죠? 나 옛날에 형 솔로 막 카피하고 그랬다니까?”

“솔로? 카피할 만한 솔로가 있었나?”

“아니, 왜 형 하던 ‘더 숨’에서…. 컥!”

신나서 떠들던 희성이 난데없이 외마디 비명을 토했다. 그러더니 옆에 앉은 정수에게로 홱 고개를 틀어 ‘야이씨, 왜?’라고 따졌다. 테이블 밑으로 팔을 뻗어 다리께를 매만지기도 했다. 꼭 어디 한 군데 대차게 차이거나 꼬집히기라도 한 반응이었다. 재환은 그냥 모르는 체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때까지도 희성은 어지간히 아픈 듯 눈썹을 구기고 구시렁거렸다.

“존나 아퍼, 새끼….”

“채희성, 그냥 이거나 처먹어.”

정수는 큼지막하게 자른 고로케 덩어리를 집어 희성의 입 안에 욱여넣었다. 그 와중에도 슬쩍슬쩍 재환의 눈치를 살폈다. 본의 아니게 상대를 신경 쓰게 만들어 버린 재환은 조금 멋쩍게 웃었다. 사실 희성이 말실수한 건 딱히 없었다. 어쨌거나 이쪽의 기타 연주를 칭찬해 준 것이니 듣는 입장으로선 기분 좋아 마땅한 일이었다.

“내 솔로를 다 카피해 주고 영광이네. 근데 희성이 너 치기엔 엄청 쉬웠을 텐데.”

입 안 가득 들어찬 고로케를 겨우 씹어 삼킨 희성은 당치도 않다는 듯 크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걸 살리기가 존나 어렵다니까. 그리고 형만 내는 특유의 톤이 있어.”

“특유의 톤은 무슨. 그냥 리버브 왕창 걸면 돼.”

희성은 ‘이씨, 저 형 또 저러네!’ 하며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나 재환의 말은 절대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기타 연주가 특별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아마 곡 자체가 좋았기 때문일 거라고, 재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나도 텔레를 써야 하나?”

이번에는 보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희성의 밴드는 꽤나 거친 사운드를 지향했으므로 지금 그가 사용하는 기타인 레스폴이 여러모로 딱이었다. 다만 그 레스폴로 녹음한 트랙을 ‘우주 공간에서 울리는 것처럼’ 만들기가 조금 까다로웠을 뿐이다.

“근데 형 기타가 이쁘긴 엄청 이뻤어요. 캔디 애플 레드였나? 무대에 서면 진심 한영이 형 머리랑 형 기타만 보였는데…. 크흑!”

말이 끝나자마자 희성은 다시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참이나 끙끙거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수를 향해 ‘아씨, 왜 그러는데!’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덩달아 표정을 구긴 정수가 손바닥으로 탁, 소리가 나게 희성의 뒤통수를 때렸다.

“새끼야, 넌 눈치가 없냐?”

“뭐? 내가 뭐랬는데?”

“야, 됐어. 나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보다 못한 재환이 입을 뗐다. 괜히 저 때문에 술자리 분위기가 쓸데없이 이상해지는 건 별로였다. 아무래도 잠시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좋을 성싶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담뱃갑을 집어 든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대 태우고 올게.”

습관처럼 볼캡을 한 번 꾹 누르고서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렀다. 점원에게 혹시 흡연실이 있냐고 물은 뒤 가게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요란한 환풍기 소리가 재환을 맞이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가게의 소음에서 벗어난 것을 위안 삼으며, 재환은 입술 새에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찾을 때였다.

“아, 형.”

스르륵 문이 열리고 정수가 흡연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도 하나 피우려구요.’ 하더니 지포 라이터를 꺼내 재환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건 그다음이었다. 금세 넓지 않은 공간이 두 사람이 내뿜은 부연 연기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환풍기는 소리만 시끄러운 듯했다.

“마스터링은 잘했고?”

“네. 컴프 사운드에서 했어요.”

“아, 요새 거기 잘 나가지.”

이외에도 두 사람은 앨범의 재킷 이미지는 어떻게 했는지, 뮤직비디오는 잘 찍었는지 따위를 서로 묻고 답했다. 그러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형, 죄송해요.”

“뭐가.”

“채희성 저 새끼가 눈치가 없어서.”

재환은 피식 쓰게 웃었다. 나이 어린 동생에게 저런 말을 하게 한 저 자신이 퍽 한심하게 여겨진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야, 나 괜찮아!’ 같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성격도 되지 못했다.

“희성이나 너나 죄송할 게 뭐 있어. 그냥 내가 했던 밴드 문젠데.”

“그…, 한영 형이랑은 아직 화해 안 하신 거예요?”

화해라….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재환은 노출 콘크리트 스타일인지, 진짜 마감을 안 한 건지 회색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 흡연실 벽에 등을 기댔다. 얼굴을 슬쩍 들어 딱딱한 벽에 뒤통수까지 붙이고서 필터를 한 번 크게 빨았다. 후 연기를 내뱉으며 막 재를 떨려는 무렵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한영 형한테 연락 왔었어요.”

살짝 눈이 커진 재환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정수를 보았다. 그새 치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 담배 끝이 알아서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다음 달에 클럽 공연 크게 한다는데, 저희한테 오프닝 부탁하시더라고요.”

입을 꾹 다문 채 몇 번 눈을 깜빡인 재환은 ‘잘됐네.’ 하고 짤막한 축하 인사를 전했다. 뮤지션 유한영의 오프닝 공연이라니,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정수의 밴드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밴드 코스믹 라테는 충분히 그런 큰 무대에 설 자격이 있었다. 친한 동생들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랜 기간 언더에서 고생한 만큼 그들에게는 실력도, 배짱도 있었다.

“진짜 잘됐다.”

진심임을 알리기 위해 한 번 더 말했다. 그러자 정수는 ‘감사합니다, 형님.’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깍듯한 모습을 보일 때면 무대 위에서 그렇게 드럼을 후려치던 녀석이 맞나 싶었다.

“근데 사실 저도 더 숨 노래 진짜 좋아했어요. 거짓말 안 치고 맨날 들었는데.”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썼으니까.”

재환의 말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 터였다. 두 번째 담배를 빼 무는 재환 앞에 정수가 다시 뚜껑 연 지포 라이터를 내밀었다.

“다른 멤버도 플레이가 좋으니까 그런 곡들이 나온 거죠.”

재환은 ‘그런가?’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또한 과거에는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밴드는 한 명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상대가 솔로 뮤지션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건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밀려올 즈음.

“그래서 더 아쉬워요. 뭐 각자 음악적 성향이 다르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음악적 견해 차이. 대외적인 밴드의 해체 이유는 그러했다. 마치 연예인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을 발표하는 것처럼. 담배를 쥔 손을 툭 아래로 떨군 재환은 여기저기 담뱃재와 가래침 자국이 낭자한 흡연실 바닥을 멍하니 응시했다.

“…았는데.”

“네?”

“사실… 다 좋았는데. 다 좋았어.”

중얼거리듯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한 재환은 스탠드형 재떨이에 아직 절반 정도 남은 담배를 꾹 지져 껐다. ‘마저 피우고 와.’라고 정수에게 말한 뒤 흡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와 동시에 고막으로 쏟아지는 공간의 소음이, 지금은 조금 반갑게 느껴졌다.

“아, 역시…. 존버가 정답이었어, 존버가. 이 바닥은 존나게 버텨야 된다니까?”

“너나 좀 버텨 봐, 이 자식아.”

같은 팀 멤버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친 상태에서도 길을 밟는 희성의 발이 불안하게 갈지자를 그렸다. 보다 못한 재환이 희성 옆에 다가가 나머지 팔을 붙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나서 맥주에 소주를 마는 걸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닥쳤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였다. 생긴 건 말술을 먹게 생긴 놈이 이렇게 한순간에 꽐라가 될 줄 누가 알았나. 옛날에도 이랬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버티니까, 어? 막 한영 형한테 연락도 오고, 어? 씨발, 나 진짜 눈물 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희성은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내가 존나, 감개가 무량이야. 씨발, 할렐루야!’라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 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흘끔대는 시선은 둘째 치고, 이렇게 맛이 간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게 재환과 정수는 걱정이었다.

“정수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얘 기독교냐?”

“술 마시면 불교도 됐다 기독교도 됐다 그래요. 지난번에는 또 알라신을 그렇게 찾더라고요.”

아예 손뼉까지 치며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 희성을 내려다보며 재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컬 아니랄까 봐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게 뒤통수 한 대 때려 주면 딱 좋겠지 싶었다. 대신 재환은 희성을 등지고 쪼그려 앉아 정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형이 업으시게요?”

정수가 희성과 재환을 번갈아 쳐다보며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희성이 재환보다 무거우면 무거웠지 절대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이 자식 키가 있잖냐. 내가 업어야지. 빨리.”

결국 고개를 끄덕인 정수는 희성의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재환의 등 위로 엎어뜨렸다. 크게 심호흡한 재환은 딴딴한 엉덩이를 받친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형, 괜찮아요? 이 새끼 엄청 무거울 텐데.”

“괜찮으니까 넌 빨리 가서 택시 좀 잡아라.”

네, 대답한 정수가 서둘러 앞서 달려 나갔다. 희성을 한 번 고쳐 업은 재환은 그럭저럭 안정적인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그 와중에도 바로 귓전에서 울리는 희성의 노래는 멈출 줄을 몰랐다. 저게 찬송가인지 록인지. 재환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잠깐 노래가 끊긴 틈을 타 냉큼 희성을 불렀다.

“야, 희성아.”

“넵, 형님!”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거리 여기저기에서는 온갖 색의 네온사인들이 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그 색의 수만큼 들려오는 소리도 다양했다.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편의점 앞 인형 뽑기 기계의 조악한 전자음, 굳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차가 빵빵대는 소리…. 그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재환은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한영이 공연 오프닝 서는 거, 그렇게 좋냐?”

“넵! 조오온나 좋습니다!”

시야는 현란하고, 귀는 소란하고, 등 뒤에 업은 놈은 오지게 무겁고.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재환은 조금 웃음이 났다.

“그래. 준비 열심히 해라.”

“네! 아싸, 파이팅!”

희성이 난데없이 두 주먹을 번쩍 쥐어 올리는 바람에 순간 재환의 몸이 휘청였다. 이대로 그냥 확 놓아 버릴까, 하던 재환은 ‘그래그래. 파이팅이다, 인마.’ 하며 자세를 고쳤다. 그랬더니 이제는 귓가에서 ‘우주 같은 너!’가 울려 퍼졌다. 그래도 자기 노래라고 술 취한 놈의 라이브치고는 썩 들을 만했다. 이를 배경 음악 삼아 재환은 다시 걸음을 이었다. 저 앞 길가에서 택시를 세워 둔 정수가 크게 팔을 흔들었다.

* * *

“형, 진짜 죄송해요.”

“됐어. 쟤 좀 잘 챙겨라.”

“네, 담에 또 봬요!”

두 사람이 탄 택시 문을 탁, 소리가 나게 닫은 재환은 숙였던 허리를 폈다. 금세 택시는 기다란 후미등 궤적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그제야 재환은 주먹 쥔 손으로 온통 뻐근하고 결리는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절로 잇새에서는 끙 신음하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제 키만 한 사내놈을 업고 한참을 걸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동생들에게 술을 얻어먹은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한 것이었다.

원래는 이대로 뒤이어 오는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희성을 등에 이고 걷는 사이 마음이 바뀌어 버린 재환은 핸드폰을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막 새벽 2시로 앞자리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정한 목적지의 영업이 끝날 때까지 아직 두어 시간은 남아 있는 셈이었다. 재환은 고민 없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취객을 피하고, 예약 표시가 뜬 택시를 피해 조금 더 구석진 길로 들어갔다. 먹자골목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패딩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은 과거 달마다 몇 번씩은 밟았던 길을 느릿하게 걸었다. 다만 불 꺼진 카페 유리창에 비친 남자는 그때와 달리 등에 멘 것도, 손에 쥔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희성이 놈 때문인 것 같았다. 물론 나이 탓도 있을 터였다. 아니면, 지금은 혼자라서….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발은 더욱 느려졌다. 이제 와 괜한 걸음을 했나 싶기도 했다. 답지 않게 청승맞은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그냥 분위기 좋은 곳에서 음악이나 들으며 한 잔 더 하고픈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했다. 곧 눈에 익은 건물 앞에 다다라서야 재환은 구실과 상관없이 이루지 못할 바람이었음을 깨달았다.

LP판으로 틀어 놓은 음악이 새어 나와야 할 길가가 온통 조용했다. 밤 8시부터 자정 전까지 출연하는 밴드 목록이 적힌 입간판도 없었다. 무엇보다, 적어도 새벽 3, 4시까지는 활짝 열려 있어야 할 시꺼먼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위에 다닥다닥 붙은 여러 밴드의 로고 스티커와, 그 가운데를 차지한 ‘임대’ 글자만이 재환을 반겨 주었다. 안 그래도 쫙 펴지 못하고 있던 어깨가 축 아래로 떨어졌다.

한참을 철문 앞에 붙박여 있던 재환의 시선이 ‘임대’가 적힌 종이 귀퉁이로 향했다. 누렇게 빛바랜 종이 아래로 절반 정도 삐죽 튀어나온 스티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곳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핑크지! 얘 머리 색도 핑크 아니냐!’

‘핑크는 우리 음악하고 좀 아니지 않냐.’

‘그럼, 뭐? 또 검정?’

‘아니.’

한참이나 실랑이한 끝에 결정된 밴드의 로고 색은 터코이즈 블루, 즉 청록색이었다. 누구보다 재환이 고집부린 결과였다. 명쾌하게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밴드의 노래를,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냥 그런 색이 떠올랐다. 토독토독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색깔이. 그 색이 이제는 바래고 바래 희끄무레한 연두색이 되어 버렸다. 마치 흘러간 시간처럼. 임대 표시에 절반이 가려진 ‘더 숨’의 스티커를 매만지던 재환의 손이 툭 아래로 떨구어졌다.

이제야 취기가 오르는지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졌다. 한 번 코를 훌쩍인 재환은 건물 앞, 통나무 모양을 흉내 낸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나마 이 벤치는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한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삐걱삐걱 영 불안한 소리를 냈다. 그래도 아래로 주저앉은 적은 없었다.

9년 전 여기 앉아 보이는 길 건너편에는 구제옷샵이 있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꽤나 멋쟁이였던 것은 기억했다. 지금은 그 자리를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감의 디저트 카페가 대신하고 있었다.

저 카페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으로 향하며 재환이 보았던 가게 태반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서서 먹는 분식집이 있던 자리에는 인형 뽑기방이, 작은 음반 가게가 있던 자리에는 코인 세탁실이 들어섰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 라이브 클럽은 그대로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그다지 낙관적인 성격도 아닌데 말이지. 여지없이 담배를 빼어 무는 재환의 입가에 슬쩍 찬웃음이 걸렸다. 이윽고 거리 곳곳에 남은 옛 기억은 잊고 있던 과거의 목소리를 하나둘 귓가로 불러왔다.

‘와, 씨발. 야, 나 오늘 드럼 존나 쩔지 않았냐?’

삐거덕 소리가 날 정도로 벤치 빈자리에 털썩 앉아 제 자랑을 늘어놓던 태군.

‘마지막 곡에서 박자 절던데?’

그런 태군을 내려다보며 무심히 툭 한마디 던지던 지우.

‘나 가사 틀린 것 같아.’

그 옆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고백하던 한영. 그리고,

‘야, 조용하게 담배 좀 피우자.’

눈치 없는 멤버들 때문에 혼자 담배 한 대 빨며 공연의 여운을 즐기는 데 실패해 버린 재환. 그래도 다 좋았던 것 같다. 설사 무대에서 작은 실수가 있었더라도, 그날따라 관객이 적었더라도, 멤버들과 함께 있으면 재환은 마냥 즐거웠다. 그러다가 태군이 공연 전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며 화장실로 달려가고, 지우가 다음 팀 라이브가 시작됐다며 지하 클럽으로 내려가면.

‘나 어땠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반짝이는 모래색 눈동자가 절대 피할 수 없는 시선을 던져 오고는 했더랬다. 꼭 무대에서 라이브 도중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어땠긴. 멋있었지.’

나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며 노래하는 그는 언제나 넋 나갈 정도로 빛이 났다. 그걸 구구절절이 설명할 수 없어 ‘멋있었지’ 네 글자에 감상을 욱여넣는 것이 재환에게는 최선이었다. 물론 그 후에 상대에게서 되돌아오는 말도 항상 똑같았다.

‘그럼 키스해 줘.’

언제부터였을까. 고민 없이 녀석의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던 것은. 그 잠깐의 입맞춤이 공연 때 느꼈던 설렘이나 흥분을 모조리 뒤덮을 만큼의 열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그러니 지척에서 차 소리나 말소리 따위가 들려와도 쉬이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친 짓이었다.

상대의 보드랍던 입술 대신 담배의 씁쓸함만 실컷 맛본 재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괜히 건물 유리에 제 비루한 모습을 비춰 보지 않고 그냥 바닥만 보고 걸었다. 꼭 어깨에 무거운 기타 가방을 멘 것처럼 몸도 마음도 하염없이 저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비겁하게 이 또한 희성의 탓으로 돌렸다.

* * *

“으으….”

곁에서 울리는 요란한 진동음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옆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은 재환은 쉬이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을 몇 차례 끔뻑였다. 핸드폰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부재중 전화 표시가 찍혀 있었다. 필요하면 또 걸겠지, 뭐. 핸드폰을 옆으로 던지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조금 전 봤던 부재중 표시보다는 그 위에 떠 있던 시간이 재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PM 2:30.

“미쳤네.”

아니나 다를까 중천에 떠오른 해가 방 안을 온통 훤히 밝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게서 풍겨 오는 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절로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 재환은 벅벅 뒷머리를 긁으며 거실로 걸어 나갔다. 그곳 상황을 보니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탁자 위에 나뒹구는 과자 봉지와 절반은 줄어 버린 양주병. 바닥에 나무색 술이 조금 고여 있는 유리잔. 재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 굴려 지난 새벽의 일을 되짚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울적함이 가시지 않아 예전 선물 받았던 양주를 꺼냈던 것 같다. 안주 할 게 딱히 없어서 유통 기한이 아슬아슬한 과자도 한 봉지 뜯고, 잔에 술을 물처럼 따르고, 그다음에는….

“하아….”

절로 탄식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희성이 술 먹고 개 비슷한 꼴이 되는 걸 직접 봤으면서, 집에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말았다. 혼자 술 마시고 취하는 것처럼 궁상맞은 일이 또 없건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저건 또 뭔….

재환은 현관 앞에 놓인 시꺼먼 비닐봉지로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기억은 없지만, 왠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알 것만 같았다. 좀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비닐봉지 앞으로 걸어갔다.

“…씨발, 미친.”

어김없이 예상은 들어맞았다. 거칠게 마른세수한 재환은 제법 목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작업실로 향했다. 그사이에도 몇 번이나 푹푹 긴 한숨이 나왔다. 속으로는 거듭 같은 말을 되뇌었다. 술이 웬수지. 술이 웬수야.

불 켠 작업실 바닥에 철퍼덕 봉지를 내려놓고 일단 의자에 앉았다. 다시 갖고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저 안에 담긴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릴 생각을 하니 재차 골이 지끈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알면서 왜 그랬을까. 그저 후회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간사했다.

후회 반, 답답한 마음 반으로 흉물스러운 봉지를 노려보기를 잠시, 재환은 그 안으로 쑥 손을 넣었다. 가장 먼저 집히는 것을 꺼내자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CD였다. 연필로 대충 쓱쓱 그린 듯한 재킷 이미지 가운데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는 이름 세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유한영’. 차라리 예명이라도 쓸 것이지, 하고 애먼 타박을 하며 다음 물건을 꺼냈다. 역시 같은 뮤지션의 CD였다. 다음 것도, 그다음 것도. 디지털 음원이 보편화된 시대에 굳이 CD를 찍어 내는 상대도, 또 그걸 사 모은 저 자신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이어서 봉지에서 나온 것도 CD이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재킷에 적힌 이름이 달랐다. 청록색 글씨로 ‘The SUM’이 적힌 CD 몇 장을 책상 구석에 쌓아 올린 재환은 그새 절반 정도가 빈 봉지 안을 쓱 들여다보았다. 남은 건 구겨진 종이 뭉치 몇 개와 책상 위에 있던 LED 시계, 그리고….

하…. 하는 수 없이 또 한숨이 흘렀다. 다른 건 그럭저럭 알겠는데, 튜너나 기타 줄, 카포 같은 건 도무지 왜 버리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도저히 기타를 버릴 용기는 없어 관련된 용품이나 처분하려고 했던 건가.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재환은 진심으로 저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았다. 어찌 됐든 봉지에서 꺼낸 것들을 꾸역꾸역 기타 앞주머니에 집어넣은 재환은 시계도 꺼내 있던 자리에 두었다. 자, 그럼 이제….

넌더리 치면서도 그럭저럭 고민 없이 정리한 다른 물건들과 달리, 봉지 안에 남은 종이 뭉치에는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제자리에 두려면 아무래도 구겨진 결 펴야 할 테고, 또 그러면 안의 내용물을 눈으로 봐야 할 테다. 무릎에 팔꿈치를 올린 재환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손으로는 무엇 하나 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젠장, 하고 욕을 뇌까린 재환은 결국 봉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잠시 후, 실눈 뜨고 옴팡지게 꾸겨진 종이를 쓱쓱 펴 서랍에 넣는 것을 끝으로 한심한 짓거리의 뒷수습이 얼추 끝났다. 이래서 웬만해서는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던 거다. 맨날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까. 질리지도 않고. 물론 작업 후 마시는 맥주 한 캔 정도는 예외였다. 아, 아주 가끔 하는 섹스 후에도. 그마저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따위의 핑계만도 못한 말들을 속으로 늘어놓던 재환은 원래대로 돌아간 방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이제야 좀 야트막한 안정감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센 술’은 멀리하자는 다짐을 했다. 이러다가 정말 집 앞 쓰레기 내놓는 자리에 기타라도 갖다 두는 날이면…. 감히 상상하는 것만으로 재환은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재차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인 재환은 묻은 것도 별로 없는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삐뚤어진 시계를 고쳐 놓고 불을 끈 후 방을 나섰다.

창문 하나 없는 새카만 방. 다시 책상 서랍 깊숙이 들어간 종이에는 재환과 똑 닮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어질러져 있던 거실을 정리하고, 내친김에 밀렸던 빨래도 하고, 술내 풍기는 몸을 씻고 나오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제야 재환은 눈뜨고 나서 목구멍으로 넘긴 게 물뿐임을 깨달았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냉장고 앞으로 갔다. 그래도 뭔가는 먹을 게 있겠지, 싶어 문을 열었는데 지나친 기대였다. 언제 넣어 놨는지 기억도 안 나는 김치와, 유통 기한 지난 닭 가슴살, 육안으로 봐도 썩기 직전의 사과 몇 알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핸드폰을 꺼내 배달 앱을 뒤적이거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술에 취해 미친 짓을 한 다음 날이면 항상 이랬다. 전에 없던 의지, 내지는 의욕 같은 게 마구 퐁퐁 샘솟았다. 갑자기 운동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할 것 같고, 담배도 줄여야 할 것 같고…. 냉장고 구석에서 연분홍빛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닭 가슴살도 과거 그러한 변덕의 결과였으리라. 물론 이번에도 하루 이틀의 변덕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내일은 한동안 나가지 않았던 조기 축구회에라도 가 보자, 생각하며 재환은 별 소득 없이 냉장고 문을 닫았다. 방으로 가 대충 머리를 말린 후 검정 트레이닝복을 꿰입었다. 머리에는 같은 색의 볼캡을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제대로 찬거리를 살 생각이었기 때문에 늘 들렀던 편의점은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 다시 뒷걸음질 쳐 편의점의 유리문 너머를 유심히 살폈다. 모자를 한 번 고쳐 쓴 재환은 성큼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예의 풍경이 짤랑거리며 맑은 음색을 터뜨렸다.

재환은 노릇노릇 색색의 호빵이 익고 있는 투명 찜기를 지나 곧장 온장고 앞으로 향했다. 안에서 프랜차이즈 카페의 로고가 새겨진 병 커피를 꺼내 계산대로 갔다. 커피만 살 수는 없어 담배도 한 갑 달라고 했다. 물론 오늘부터 담배를 조금씩 줄이자는 나름의 다짐은 기억하고 있었다.

“팔천육백 원입니다.”

“그만두신 줄 알았어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건네는 말에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새 안 보이시길래.”

“아….”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서렸다. 이 새끼는 뭐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계산이 끝난 담배를 주머니에 넣은 뒤 아르바이트생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지난번에 죄송해서요.”

“예?”

음…. 잠시 고민하던 재환은 눌러쓰고 있던 볼캡을 벗었다. 머리가 납작하게 눌려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생은 웃을 수 없었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멀끔한 탓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무어라 더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사이, 재환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맥주.”

“아…!”

재환은 그제야 저를 기억해 낸 듯한 아르바이트생 앞에 재차 커피를 들이밀었다.

“자, 잘 마시겠습니다.”

상대가 일전의 맥주 진상남임을 떠올려 낸 것과 별개로 적이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은 엉겁결에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아 들었다. 다시 모자를 푹 뒤집어쓴 재환은 챙을 쥔 채 ‘그럼 많이 파세요.’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훌쩍 자리를 떴다.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벙한 얼굴로 편의점을 나서는 시커먼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잘생기고 이상한 사람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약 1시간 후 집으로 돌아온 재환의 양손에는 찬거리가 가득 담긴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직 요리를 한 것도 아닌데 이것들을 냉장고와 수납장에 채워 넣는 것만으로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단, 이번에는 유통 기한을 넘겨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본격적으로 아침 겸 점심 겸 저녁 준비에 들어간 재환은 일단 쌀부터 깨끗이 씻었다. 쌀뜨물은 따로 받아 두고 밥을 안친 뒤 북어를 손질했다. 딱 한입에 들어갈 크기로 북어를 잘게 찢은 후 살짝 불리기 위해 물을 부었다.

5분쯤 지났을까, 재환은 참기름 두른 냄비에 북어를 넣고 달달 볶기 시작했다. 이내 침 꼴깍 넘어갈 정도로 고소한 냄새가 온 집 안에 가득 찼다. 여기에 치직치직 기름 달구어지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진짜 대단한 요리 하나 하는 기분이었다. 배달 음식으로 대충 해결하던 평소를 떠올리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남은 과정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쌀뜨물, 북어 불린 물을 모두 붓고 그 위에 계란을 휘휘 풀었다. 새우젓으로 간한 뒤 마늘과 청양고추까지 송송 썰어 넣으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양새의 북엇국이 완성되었다. 이러니 재환은 자신이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뿐이었다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굳힐 수밖에 없었다.

갓 지은 밥과 함께 국 한 그릇을 크게 퍼서 거실로 가져갔다. 김치도 곁들일까 했지만 신 냄새가 심해 포기했다. 뭐, 뜨끈한 국 하나 있으면 열 반찬 안 부러울 테니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탁자 위에 간소하지만 제법 만족스러운 상을 차려 둔 재환은 밥을 먹기 전 티브이장 앞으로 갔다.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쌓인 여러 밴드의 라이브 DVD들을 뒤적이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버리려고 안 했었네, 한마디 중얼거리며 다시 서랍에 넣은 뒤 다른 DVD를 꺼냈다. 낡은 플레이어에 DVD를 넣고 소파로 가 앉았다.

소복이 쌓인 밥을 국에 퐁당 빠뜨리는 동시에 티브이 스피커에서 제법 묵직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한순간에 고막을 사로잡는 기타 리프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래, 이거지.

입 안에 스며드는 구수한 북엇국 맛을 향한 감탄이기도 했으며, 리버브와 딜레이가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는 기타 사운드를 향한 감탄이기도 했다. 여기에 묵직한 베이스 음과 힘 있는 드럼 연주까지 더해져 별 볼 일 없던 거실은 순식간에 콘서트장이 되었다. 다만 영상 속 관객들처럼 두 팔을 흔드는 대신, 재환은 목구멍 너머로 훌훌 밥알을 씹어 삼켰다. 밴드의 라이브는 기가 막히고, 밥은 맛있고. 글래스턴베리가 부럽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 설거지까지 깨끗이 끝낸 재환은 창밖으로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즈음에서야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믹싱은 술술 되었다. 단출하지만 맛있는 밥으로 배를 채웠고, 간만에 집구석에서 우상과 같은 밴드의 공연을 관람하는 호사도 누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집중이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왠지 그런 것 같은 느낌….

최근 믹싱을 시작한 곡은 기타와 건반으로 이루어진 여성 듀오 팀의 곡이었다. 여름 초입에 발매 스케줄을 잡아 놨다고 하더니, 정말로 들을 때마다 넘치는 상큼함과 청량감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게 우주를 부르짖는 시커먼 남자 녀석들의 노래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순식간에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1차로 끝낸 믹싱 파일을 상대에게 메일로 보낸 재환은 쭉 기지개를 켰다. 잠에서 깬 시간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럭저럭 알찬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좋았다. 물론 첫 결과물인 만큼 피드백이 줄줄이 돌아올 테지만, 그런 것쯤이야 이미 익숙했다. 난데없이 ‘바닷속에서 울리는 것처럼’이라고만 하지 않는다면.

내처 핸드폰으로 ‘메일 보냈으니 확인해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후 노트북을 껐다. 맥주 생각이 간절했으나 이왕 바른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 오늘만이라도 좀 참아 보자 싶었다. 대신 딱 담배 한 대만 더 피울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공교롭게도 바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어 댔다.

꺼내어 확인해 보니 화면에 뜬 숫자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일단은 통화 버튼을 눌러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서재환 씨 핸드폰 맞습니까.

지나치게 딱딱한 상대의 어투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네,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낮에는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저는 JY 엔터 실장 배정환이라고 합니다.

아. 낮에 왔던 부재중 전화. 나름 바쁜 반나절을 보내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데 JY라는 회사명이 영 낯설었다. 적어도 재환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 다름이 아니라, 저희 쪽 아티스트 곡 믹싱을 좀 의뢰하고 싶어서요.

“아, 네.”

인디 뮤지션 위주로 의뢰를 받는 재환에게 회사에서 직접 연락이 오는 경우는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인맥이 꽤나 중요한 이쪽 바닥에서 재환의 인맥이란 뻔하디뻔했다. 누구한테 소개라도 받은 걸까. 우선은 잠자코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 일단 트랙 소스 파일을 보내 드리고 싶은데, 메일 주소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한 번 보냈었는데, 저희가 갖고 있던 주소는 잘못되었는지 반송되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럼 지금 불러 드리겠습니다.”

약간의 미심쩍은 마음을 품은 채 재환은 상대에게 메일 주소를 불러 주었다. 정 아니다 싶은 의뢰라면 메일을 받은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래 봤자 경우의 수는 많지 않았다. 트랙 음질이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수준이라든가, 아니면 그 개수가 천 개가 넘는다든가. 둘 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렇지 않은 이상 이쪽에서 믹싱 의뢰를 가린다는 건 사실 꽤나 배부른 짓이었다.

- 아, 주소 뒤에 메일 사이트가 달랐었네요. 그럼 바로 파일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자마자 전화가 뚝 끊겼다. 재환은 다소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새 통화 화면은 꺼져 있었다. 아니, 믹싱을 맡긴다면서 아티스트 이름도 안 알려 주나? 메일을 잘못 보냈었다는 것도 그렇고, 영 일 처리가 허술해 보였다. 아무래도 이런 작업에 익숙지 않은 신생 기획사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노트북을 다시 켜 막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재환의 그러한 생각은 더욱이 확고해졌다.

뭐야, 이게.

제목도 없어, 내용도 없어, 메일에는 덜렁 첨부된 압축 파일 하나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 파일의 이름도 ‘제목없음.zip’이었다. 형식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건 좀 성의가 없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흠…, 소리를 내며 일단은 파일을 다운로드 했다. 트랙 수는 꽤 되는지 다운이 완료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한쪽 손에 턱을 괸 재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압축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로딩 상황을 보여 주는 바가 빠른 속도로 채워지고, 이윽고 모니터 위로 새 폴더 창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아티스트가 가믹스한 것으로 추정되는 MP3 파일 하나와, 트랙 소스들이 담겨 있을 폴더 하나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음악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 라는 생각에 MP3 파일을 먼저 클릭하려는 순간.

마우스를 쥔 손이 일순 멈칫했다. 제가 뭘 본 건가 싶어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덩달아 호흡도 턱 멈추었다. 그 상태로 5초, 10초, 15초…. 점차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눈이 모니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 사이 수십 번 확인한 파일명에는, 적히지 말아야 할 것이 적혀져 있었다.

[유한영_Reverb(가믹스).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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