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 *
조립식 옷장 앞에 선 재환은 낭패감에 빠졌다. 이미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들추는 옷마다 죄 시꺼먼 색이라 적잖게 난감했다. 딱히 검은색 옷이 취향인 건 아니었다. 집안이 망하고서 생긴 다소 이상한 버릇이었다. 사람들 눈에 뜨이기 싫어 무의식중 어두운색 옷만 샀더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마크만 다른 검정 모자만 수 개에 이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옷장 속 많지 않은 옷을 끝까지 파헤친 재환은 결국 흰 셔츠 하나를 찾아냈다. 공연 때도 시커멓게 입을 거냐며 당시 밴드 보컬, 그러니까 형찬이 하도 난리 쳐서 큰맘 먹고 샀던 옷이었다. 이 셔츠마저 없었으면 꽤나 곤란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검정 면바지 위에 셔츠를 꿰입었다. 그래도 아직 단정함이 부족한 것 같아 셔츠를 바지 안에 넣고 벨트를 맸다. 욕실로 가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니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문제는 머리였다. 안 그래도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이도 스타일도 영 애매했다. 그렇다고 그냥 나가자니 아르바이트 모집 글에서 보았던 ‘용모 단정’이 마음에 걸렸다. 당연히 평소처럼 모자를 쓸 수도 없었다.
고민하던 재환은 욕실 수납장을 열어 2년 동안 쓸 일 없던 왁스를 꺼냈다. 혹시 몰라 뚜껑을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자 다행히도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한들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면접 한 번 보자고 미용실에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럴 돈이 없었다.
왁스를 적당량 손에 덜어 쓱쓱 머리에 묻혔다. 그 상태로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스타일이 괜찮은지는 둘째 치고, 이렇게 이마까지 훤히 드러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상당히 어색했다. 꼭 답지 않게 멋을 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새삼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었나 싶기도 했다. 용모 단정한 사람을 우대한다고 했으니 외모도 본다는 뜻 같은데. 에이. 눈, 코, 입 멀쩡히 달렸으면 된 거지, 뭐.
그렇게 얼추 단장을 끝낸 재환은 핸드폰으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아무리 카페가 집 가까운 곳에 있다지만 여유 있게 도착하려면 지금쯤 나가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고민이 재환의 발목을 붙잡았다. 태군이 새로 잡아 알려 준 합주 날짜가 하필이면 또 오늘이었다.
음…, 소리를 내며 재환은 텔레가 들어 있는 기타 가방을 응시했다. 면접 후 집에 들러 옷 갈아입고 기타를 챙길 시간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고민이 될 때는, 그냥 맘 편한 쪽을 택하는 게 상책이었다. 생각보다 금방 결론을 내린 재환은 주저 없이 기타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멨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됐다고요? 그럼 학교는?”
“아직 휴학 중이라서, 가을에 복학할 예정입니다.”
“그 전까지는 프리?”
“네.”
‘흠….’ 하며 카페의 남자 사장은 손에 든 이력서와 재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테이블 옆에 세워져 있던 기타 가방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이런 상황을 영 짐작 못 했던 것은 아닌지라 재환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 취미로 밴드를 하고 있기는 한데, 일하는 데에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밴드? 좋네. 나도 옛날에 록 음악 좋아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장은 많아 봐야 삼십 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다. 캐주얼한 차림에 조금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는데, 상당히 멋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가게 분위기도 사장 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벽면과 천장이 노출 콘크리트 형식으로 된 카페는 전체적으로 매우 세련된 느낌이었다. 주문을 받거나 음료를 만드는 직원들도 하나같이 단정한 검정 셔츠 차림이었다. 그러니 재환은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아무래도 제가 면접을 볼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기실 면접 연락이 온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일했던 곳은…. 호프집이랑 고깃집, 편의점. 카페 알바 경험은 없네요?”
“네, 없습니다.”
사장이 전에 하던 아르바이트를 왜 관두었냐 묻지 않아 내심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편의점은 입대 때문이었다지만, 호프집이나 고깃집은 그만둔 이유가 썩 떳떳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엄청난 짓을 저질렀던 것은 아니다. 그냥, 진상 손님을 상대하다 나중에는 재환 자신이 더 빡친 정도랄까. 평소에는 잘 참다가도 한번 꼭지가 돌면 앞뒤 보이지 않는 성격이 문제였다. 그래도 군대에 다녀와서는 제법 나아졌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일단, 재환은 그렇게 믿었다.
“커피는 좋아하고?”
“보통… 정도입니다.”
“하하하, 엄청 솔직한 친구네.”
사장은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재환으로선 혹 일을 시작하기라도 하면 금방 들킬 거짓말을 뻔뻔히 할 수가 없었다. 옹졸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 카페에 왜 지원했어요?”
하지만 이 질문에서는 아무리 재환이라도 차마 진실을 말하기가 저어되었다. ‘어쩌다 실수로요’라고 대답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집에서 엄청 가깝거든요. 그래서 지각할 일도 절대 없을 거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사장은 ‘그건 그렇겠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대뜸 ‘공부는 잘해요?’ 하고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재환은 잠시 답을 망설였다.
“아니, 이상한 뜻은 아니고. 커피도 안 좋아하는데 레시피 외우려면 공부하는 머리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사장은 손가락 끝으로 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조금 더 고민하던 재환은 ‘그럭저럭요.’라고 대답했다. 제 입으로 ‘공부 잘했어요’ 말하긴 조금 그렇고, 그렇다고 ‘아니요’ 하긴 영 거짓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학교도 좋은 곳 다니네. 나 고등학교 때도 이 과는 진짜 성적 좋은 애들이 가던데. 학교에서 인기 많죠?”
“예? 아뇨, 별로.”
“에이, 너무 겸손하다.”
이쯤 되니 재환은 자신이 면접을 보고 있는 건지, 그냥 사장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있는 건지 슬슬 헷갈렸다. 어쨌거나 일과 별 상관없는 질문을 연이어 던져 오는 걸로 보아, 저를 채용할 생각은 그다지 없는 듯했다. 크게 기대했던 것은 아니나, 어떤 의미로든 거절당한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 힘은 좀 센 편이에요?”
이거 봐. 또.
“네, 힘도 그럭저럭.”
“그래? 우리 애들이 좋아하겠다.”
“애들이요?”
재환의 물음에 사장이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카운터를 가리켰다. 재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무슨 영문인지 일순 카운터에 있던 여자 아르바이트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손을 파닥이며 서로의 어깨를 때리기도 했다. 재환은 머뭇머뭇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모레부터 출근하는 걸로 할까요? 유니폼도 준비해야 하니까.”
“네?”
재환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눈도 덩달아 크게 뜨였다. 재환의 표정을 본 사장이 시원스레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재환 군 같은 사람을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일단 초반에는 오전 타임에 나와서 일 배우고, 그다음에 근무 시간을 점차 늘리는 걸로 합시다. 어때요?”
“아, 네. 저는 좋습니다.”
여전히 얼떨떨함을 떨치지 못한 재환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눈치는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셈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기분 좋은 착오였다.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이후 사장에게 일에 관한 설명을 마저 들은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타 가방을 멨다. 함께 일어난 사장이 ‘잘 가고, 모레 봅시다.’ 했다. 그대로 카페를 나서려다 카운터에 있는 아르바이트생 둘과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매일같이 보게 될 사이이니 그들에게도 한 번 고개를 꾸벅였다. 재환의 인사를 받은 아르바이트생들도 같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해 주었다. 들어설 때보다 더 향긋하게 느껴지는 듯한 커피 향을 뒤로하고 재환은 카페를 나섰다.
재환이 나가자마자 카페 A’Clock의 아르바이트생 희연과 상지는 조르르 사장 세훈에게로 달려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너 나 할 것 없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사장님, 저 오빠 뽑은 거예요? 언제부터 출근이래요?”
“대박. 나 아직도 심장 뛰어. 방금 저희한테도 인사하는 거 보셨어요?”
손님이 몇 없었기에 망정이지 둘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A’Clock에는 온통 여자 아르바이트생들뿐이었다. 안 그래도 훈훈한 남자 아르바이트생 하나 들어오면 참 좋겠다 싶던 차였는데, 때마침 이에 딱 부합하는 상대가 면접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두 소녀는 한껏 들뜰 수밖에 없었다. 못 말리겠다는 듯 세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야, 누가 보면 니네가 사장인 줄 알겠다?”
“에이, 그게 아니라요. 남자 알바생도 좀 있어야 여자 손님이 더 늘죠! 근데 그 오빠 뭐 한대요? 음악 한대요?”
특히 희연의 두 눈이 유독 반짝였다. 언제 같이 호들갑 떨었냐는 양 옆에 있던 상지가 보다 못해 툭, 친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눈썹을 찡그린 희연이 상지에게 ‘왜?’ 했다.
“음악 하면 뭐? 어쩌게?”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지.”
볼을 부풀리고 대답한 희연은 조금 전 보았던 길쭉한 뒷모습을 떠올렸다. 키도 큰 오빠가 기타 가방까지 메고 있으니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밴드 한다던데?”
“진짜요?”
속으로 환호한 희연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쭉쭉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떤 스타일의 밴드를 할까? 이미지를 보면 펑크나 메탈처럼 요란한 장르는 아닐 것 같았다. 단정한 느낌이 있으니 아무래도 부드러운 모던 록 쪽이지 않을까 싶었다. 의외로 거친 음악을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멋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아, 궁금해 죽겠네.
“자자, 더 자세한 건 나중에 출근하면 직접 물어봐.”
등을 떠미는 세훈 때문에 희연과 상지 두 사람은 마지못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에도 희연은 자꾸 얼굴로 열이 올라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상지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뿅 갔네, 갔어.”
“씨발, 서재환 너 뭐냐?”
아니나 다를까,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환을 보자마자 태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래서 잠시나마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지 고민했던 거였다. 물론 꼭 태군 때문만은 아니고, 합주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추리닝이 제일 편하니까. 어쨌든 오늘은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소개팅?”
그새 냅다 달려온 태군이 아예 재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재차 물었다. 참 그다운 상상력이었다. 대답 대신 피식 웃은 재환은 ‘일단 가자.’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양옆으로 으리으리한 단독 주택들이 쭉 늘어선 길목이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씨발, 왜 대답을 안 하는데? 진짜 소개팅? 대낮부터? 어? 예쁘냐?”
재빨리 재환 옆으로 따라붙은 태군은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질문을 쏟아 냈다. 말하는 속도가 거의 트윈 페달로 킥 드럼을 때리는 수준이었다. 목소리가 작지도 않아서 조금 귀가 따가웠다.
“새끼, 예뻤나 보네. 어?”
“알바 면접 봤다.”
결국 재환은 한숨 쉬듯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태군은 ‘에엥?’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알바 면접? 이렇게 입고? 씨발, 무슨 호스트 같은 건 아니지? 그지?”
재환은 저도 모르게 푹 눈썹을 구겼다. 사실 과거 딱 한 번, 인터넷으로 호스트 일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기는 했다. 진짜 할 생각이 있었다기보다,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하나 관련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감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물론 태군이 그런 재환의 속사정까지는 알 턱이 없었다.
“호스트 같은 소리 하네. 카페다, 카페.”
“카페라고?”
그러자 이제는 또 다른 질문 세례가 퍼부어졌다. 서재환 네가 무슨 카페냐, 커피 맛을 알기는 하냐, 거기 알바들은 예쁘냐, 여자 손님들은 많더냐, 어쩌고저쩌고…. 길지 않은 길을 걷는 내내 태군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반은 무시하고 반은 적당히 대답하는 사이 어느덧 재환은 예의 대문 앞에 다다랐다. 그 옆에 서서 먼저 온 지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몸도, 담배를 쥔 손가락도 참 길었다.
“왔어?”
“그래. 왔다, 인마!”
잠시 지우의 손에 들린 담배를 멍하니 바라보던 재환은 서둘러 ‘안녕.’ 하고 인사했다. 재환과 눈이 마주친 지우가 씩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오늘은 딴 사람 같네.”
“아, 응. 낮에 일이 있어서.”
이쯤 되니 재환은 ‘내가 지난번에 그렇게 거지같았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생각이 평소 차림을 바꾸자는 데에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럴 의지도, 돈도 없었다. 그사이 비밀번호를 누른 태군이 벌컥 대문을 열어젖혔다.
“들어가자!”
재환은 태군, 지우를 뒤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쩌면 이 문을 통과하는 게 오늘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며칠 전 밟았던 돌길을 걷고, 철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다만 앞선 두 사람과 함께 재환이 들어선 합주실은 그날처럼 텅텅 비어 있지 않았다. 키보드 뒤에 그가 앉아 있었다. 분홍 머리를 한, 유한영이.
“헐, 웬일이냐. 오늘은 먼저 다 와 있고.”
“그러게.”
별일이라는 듯 태군과 지우가 한마디씩을 던졌다. 그러나 의자 위에 두 무릎을 세워 앉은 한영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차피 제가 인사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재환은 그냥 앰프 옆으로 가 앉았다. 뒤이어 가방에서 꺼낸 기타를 튜닝하려는데, 이상하게 기타를 향해 숙인 얼굴이 영 따끔거렸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엷은 색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한영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재환은 더럭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러다 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나 그러기에는 합주실에 들어온 후 재환이 딱히 한 게 없었다. ‘아이돌 같다’라는 말은커녕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 혹시.
“안녕.”
재환이 인사를 건네자 한영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더니 별안간 푹 고개를 숙였다. 거기까지면 모르겠는데, 대뜸 소리도 안 나오는 키보드 건반을 꾹꾹 눌러 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재환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 들었다.
결국 기타를 내려놓은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키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제가끔 악기를 매만지고 있던 태군과 지우가 불현듯 행동을 멈추고서 그런 재환을 주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리를 굽힌 재환은 두 손으로 키보드 모서리를 짚었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건반 위로 재환이 만들어 낸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졌다. 그제야 손을 멈춘 한영이 분홍 머리통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좁은 거리를 두고 재환과 한영,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가까이서 본 한영의 눈동자는 더욱 색이 엷고 투명했다. 그 위로 드리운 속눈썹은 숱도 많으며 길기도 길었다. 거기에 날렵한 선으로 올라간 코끝과 붉은 입술, 새하얀 피부까지. 이러니 재환은 ‘역시 아이돌 같네’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말주변이 없어 딱히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주위로 솜사탕 같은 머리 색처럼 솔솔 달콤한 향도 풍겼다. 다만 지금은 첫날 그랬듯 상대의 외양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빤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한영과 잠시간 눈을 맞추던 재환은 말문을 뗐다.
“야.”
역시나 한영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인형처럼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재환을 올려 볼 뿐이었다. 예상과 다르지 아니한 반응에 흠, 소리를 낸 재환은 말을 이었다.
“지난번 아이돌 같다고 한 거, 미안해.”
쿨럭. 저 옆에서 태군이 기침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환 자신도 적이 머쓱한 마음이 들어 한 손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그럼에도 지금 한영에게 사과를 전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쨌거나, 서로 어색한 분위기에서 합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전 제가 내뱉은 말이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은 사실이니까. 며칠 동안 찬찬히 생각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냐. 진짜 잘생겼다, 뭐 그런 뜻이었어.”
“진짜야?”
갑자기 나온 대꾸에 일순 재환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재빨리 제 크기를 찾았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서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는 헤드폰이나 앰프 너머로 들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 낮으면서, 또 적당히 간질간질한 기운이 섞여 있어 참으로 오묘했다. 하마터면 저 목소리로 노래하는 걸 영영 제 귀로 직접 듣지 못할 뻔했다는 생각에 재환은 설핏 철렁한 마음이 일었다. 물론, 아직 그럴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기분 풀고, 우리 오늘 합주 재밌게 하자.”
재환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응?’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답을 고르듯 살짝 아래로 향한 모래색 눈동자가 좌우를 오갔다. 덩달아 붉은색 입술이 달싹였다. 인내심을 가지고 재환은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 안 가 고막을 사로잡는 묘한 목소리가 다시금 한영에게서 흘러나왔다.
“네가 더 잘생겼어.”
“…어?”
거짓 없이 당황한 재환은 저도 모르게 얼뜬 표정을 지었다. 그새 다시 재환을 향한 말간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진지한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조차 순간 깜빡하게 될 정도였다. 그 상태로 얼마쯤 더 멀거니 있다가, 옆에 있던 지우가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재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응. 고, 맙다.”
뚝뚝 끊기는 말투에서 여전한 당황이 묻어났다. 진심으로 이게 뭔가 싶었다. 차라리 농담조로 한 얘기라면 웃어넘기기라도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니 재환은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직도 고개를 내저으며 웃고 있는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지우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조금 더 고개를 돌려 태군을 보았다. 입꼬리를 쭉 늘어뜨린 태군의 표정은 딱 ‘니네 뭐 하냐’였다. 졸지에 한영과 서로 사이좋게 ‘잘생겼다’라는 말을 주고받았으니 태군이 저런 썩은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민망함을 감추려 폭 눈썹을 구긴 재환은 그대로 뒤돌아 자리로 갔다. 그 짧은 틈에도 뒤통수에 한영의 시선이 따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는 기분 탓으로 여겼다. 그리고 다시 기타를 쥐고 앉았을 때, 다행히도 고개 숙인 한영은 노드를 매만지고 있었다. 재환 역시 서둘러 튜너를 켜고서 기타의 음을 맞추었다.
튜닝이 끝난 다음에는 페달과 앰프의 노브를 이것저것 만져 가며 기타 톤을 조절했다. 그사이 한영은 마이크를 건반 앞으로 갖고 와 아, 아 소리를 냈다. 약간의 리버브를 입은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릴 때마다 재환은 괜히 한영 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그러나 부러 쳐다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완벽히 연주 준비를 끝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준비 끝?”
잠시 후, 지우가 다른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재환과 한영은 고개를 한 번씩 끄덕였고, 태군은 몸이 영 근지러운지 스틱을 돌리며 ‘야, 빨리 좀 하자!’ 하고 안달했다. 한 바퀴를 죽 돈 지우의 시선이 다시 재환에게 와 닿았다.
“뭐부터 할래?”
예상치 못하게 곡의 선택권이 주어진 재환은 금방 답을 내지 못했다. 고민된다기보다는, 무엇을 먼저 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곡 모두 가능한 한 완벽을 기해 준비했으므로.
“너희 편한 것부터 하자.”
“I See You.”
재환이 말을 꺼내자마자 냉큼 한영이 대답했다. 그 곡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처럼 눈빛은 더없이 단단했다.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딱히 싫다 할 이유가 없었다. 재환은 ‘그래.’ 하고 대꾸하며 기타의 픽업을 바꿨다. 빨간 불이 들어와 있던 드라이브 페달도 발로 한 번 꾹 눌렀다. 보드 위로 빽빽이 늘어선 페달 중 불이 켜진 건 이제 리버브 페달뿐이었다.
“그거 템포 67이던가.”
핸드폰에 연결된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은 태군이 빙 둘러보며 물었다. 메트로놈 박자를 들으면서 연주하려는 모양이었다. 이에 재환은 고민 없이 ‘66.’이라고 답했다. 참고로 〈I Love You〉의 템포는 95, 〈I Miss You〉의 템포는 74였다.
“하여튼, 새끼….”
태군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꿍얼거리며 스틱을 고쳐 잡았다. 마이크에 입을 붙인 한영은 건반 위로 두 손을 올리고, 지우는 베이스의 볼륨 노브를 풀로 돌렸다. 손바닥에 배어난 땀을 쓱쓱 바지에 문지른 재환 또한 기타 볼륨을 최대치로 키웠다. 그때.
“하아….”
별안간 모니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숨소리가 순간 재환의 뒷목에 좌악 소름을 일으켰다. 넥을 쥔 손에는 절로 움칠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한영의 ‘저것’은 습관인 듯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 긴 한숨을 내쉬는 이상한 습관. 마치 그것을 신호탄 삼아, 태군이 ‘그럼 간다!’ 하고서 스틱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딱, 딱, 딱, 딱.
스틱이 정확히 네 번 부딪친 후 하얀 손이 건반을 짚었다. 동시에 쿵, 피아노 음이 울리며 그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얹혔다. I, see, you. 이제야 비로소 진짜 합주의 시작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켠 재환은 오로지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드럼스틱이 일정한 박자로 스네어 모서리를 두드렸다. 이에 맞춰 비교적 단순한 보이싱의 건반 코드 두 개가 한 마디씩 반복되었다. 그리고 한 번 코드가 바뀔 때마다, 여지없이 ‘I see you’란 가사가 들려왔다. 이 모든 것이 음원 파일에서 재환이 들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생생한 현장감과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입은 소리는 재환 안에서 훨씬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소리의 주인공에게서 더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건반 위를 오가는 손을 따라 구불구불한 분홍빛 머리칼이 춤추듯 살랑거렸다. 살짝 아래로 내리뜬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아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와중 음이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노래를 부르는 표정은 시종 차분했다. 여기에 계속 같은 가사만이 흐르니, 오히려 바라보는 쪽이 꿈을 꾸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환은 마냥 이 분위기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연주를 시작할 타이밍을 가늠하며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사이 1절 벌스가 끝난 곡이 첫 번째 후렴으로 접어들었다. 건반 외의 다른 악기들이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다만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한 태군과 지우와 달리, 재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스네어와 하이햇을 치던 태군이 그런 재환을 보며 눈썹을 꼼틀거렸다. 지우 역시 슬쩍 얼굴을 들어 재환을 보았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재환은 그저 발을 까닥이며 노래의 박자를 짚었다. 몸도 살짝씩 앞뒤로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넥을 잡은 왼손, 피크를 쥔 오른손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꼭 곡이 끝날 때까지 줄 하나 튕기지 않을 것처럼.
결국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리던 태군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뒤이어 베이스, 건반, 노래까지 줄줄이 멈췄다. 난데없이 흐르는 침묵에 재환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좌우로 얼굴을 두리번거리자 태군, 지우, 한영 세 사람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훤히 드러낸 이마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왜 멈췄어?”
“왜 멈추냐니. 서재환, 너 기타 안 쳐?”
다급히 물어 오는 태군의 목소리에 당황이 가득했다. 표정도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군만큼은 아니나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에도 의문의 빛이 서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재환은 ‘아….’ 하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영의 눈꺼풀이 일순간 휙 위로 들렸다. 딱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만.
“안 치긴 왜 안 쳐. 아직 아니니까 그러지.”
“엥? 뭐가 아직 아닌데?”
재환의 말에 태군이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1절 후렴에서는 원래 기타의 아르페지오 연주가 나와야 했다. 녹음되어 있던 파일에도 그랬고, 먼젓번 재환이 저 자리에서 한 번 후루룩 연습할 때도 태군은 분명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1절이 다 끝나가도록 아무것도 치질 않으니,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기타 제대로 칠 테니까 걱정 말어. 미안한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주라.”
“진짜지…?”
여전히 태군은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재환은 믿으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이 자세를 고쳐 앉은 태군은 지우와 한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바로 네 번의 카운트 후, 다시 한번 곡이 시작되었다. 묵직하면서도 맑은 피아노 음색과 함께 ‘I see you’를 읊조리는 목소리가 합주실 가득 퍼져 나갔다.
여지없이 재환의 시선은 코드를 짚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분홍 머리칼로 향했다. 뒤이어 그 아래 내리뜬 눈가에 잠시 머물다가, 가만가만 움직이는 희고 기다란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더는 아래를 보고 있지 않은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처럼. 그 순간에도 오묘한 음색을 타고 흐르는 I, see, you 세 단어가 재환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그것이 ‘나는, 너를, 보고 있어’라는 말로 들린 건 분명한 착각이리라.
결국 재환은 노골적인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팍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드럼이나 베이스 연주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저런 얼굴로, 저런 노래를 부르며, 또 저렇게 쳐다보면 아마 누구라도 그리될 터였다.
참 나, 별 경험을 다 하네. 생각하며 재환은 살짝 땀이 밴 손바닥을 쓱쓱 바지춤에 문질렀다.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펴기도 했다. 머릿속으로는 서둘러 새로 준비했던 플레이를 되짚었다. 안 그래도 저에 대한 상대의 인상이 단 몇 마디 대화로 완벽히 좋아졌을 리 없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재환은 어떤 의미로든 어설픈 연주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센 자존심 탓이었다.
곡의 후렴구가 시작되었을 무렵, 나름의 안정을 되찾은 재환은 태군이 스네어를 내리치는 박자에 따라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따로 외울 필요 없던 노랫말을 입 모양으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단, 다시 키보드 쪽으로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한영이 저를 보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또 괜히 눈이 마주쳐서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이제 2절까지 남은 건 한 마디뿐. 기타의 지판을 짚은 왼손에 힘을 뺀 재환은 속으로 정확히 네 박을 셌다. 곧이어 노래가 두 번째 벌스로 들어서며, 오른손에 쥔 피크가 가볍게 줄을 튕겼다. 동시에 땡-, 하고 흡사 종소리 같은 영롱한 소리가 앰프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 옥타브 위의 음을 연주하는 하모닉스 주법이었다.
순간 여섯 개, 총 세 쌍의 눈동자가 기타를 내려다보고 있는 재환을 향했다. 이를 알 리 없는 재환의 손가락이 분주히 넥 위를 오갔다. 바쁜 손과 달리 표정은 자못 여유로웠다. 입가에는 은연한 미소가 비쳤다. 잠시 후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까지도, 단 한 명의 시선만은 그 미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I see you. 한영은 마이크에 더욱 입을 바짝 붙여 노래했다.
2절 후렴이 되자 재환의 하모닉스 연주는 기타 브리지에 손날을 붙이고 치는 팜 뮤트 주법으로 바뀌었다. 벌스와 멜로디 자체는 같았으나 탁탁 끊어지는 사운드가 또 다른 긴장감을 자아냈다. 재환의 표정 또한 한층 진지해졌다. 그사이 드럼에 점차 힘이 실리고, 후렴이 끝난 노래가 드디어 하이라이트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둥! 한쪽 입꼬리를 쭉 끌어 올린 태군이 플로어 탐과 미들 탐을 동시에 강하게 때렸다. 같은 타이밍에서 재환 역시 주저 없이 드라이브 페달을 밟았다. 그와 동시에 깨끗했던 기타 사운드가 한순간에 찢어지고 부서져 거친 입자로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지우의 손이 빠른 속도로 넥을 훑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한영의 ‘I see you’가 더욱 단단하고 거대한 울림을 품었다. 순식간에 좁지 않은 공간이 빈틈없이 소리와 소리, 그리고 소리로 가득 찼다.
각자 다른 주파수로 폭발하듯 터져 나온 소리는 곡의 마지막 후렴에 다다라서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네 사람의 연주와 노래는 더한 절정으로 치달았다. 드럼스틱이 라이드 심벌의 안팎을 오갈 때마다 태군의 코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스네어 피에 부딪혀 잘게 튀어 올랐다. 지우의 이마를 덮었던 머리칼이 쉴 새 없이 흩어졌다 다시 가라앉았기를 반복했다. 피킹하는 재환의 손은 아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줄곧 한 사람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한영조차 지금만큼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I see you’를 외쳤다.
I see you.
I see you.
I see you.
그리고,
쾅. 온 힘을 다해 태군이 크래쉬 심벌을 내리쳤다. 그 순간 모든 이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휘몰아치던 온갖 소리도 함께 멎었다. 그 자리를 이제는 긴 잔향이 채웠다. 그 소리마저 완전히 잠잠해졌을 즈음,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사위가 고요해졌다. 열기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와…, 씨발.”
가장 먼저 적막을 깬 건 태군이었다. 온통 얼굴이 땀범벅이 된 태군은 콧잔등을 찌푸리고서 Doom Boys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앞섶을 연신 팔랑거렸다. 그사이에도 매끈매끈한 정수리에서 또르르 떨어져 내린 땀방울이 미간을 갈랐다. 추구하는 장르가 바뀌었을지언정 드럼을 때리는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온몸에 열이 오르기는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앰프 옆에 있는 스탠드에 기타부터 세워 둔 재환은 팔꿈치 위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쇄골께까지 잠겨 있던 단추도 하나 더 풀었다. 그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재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지우에게로 향했다.
곡 후반에 들어서 거의 미친 듯이 슬라이드를 하던 지우는 왼쪽 손목을 탈탈 털고 있었다. 두꺼운 베이스 줄을 연달아 손끝으로 문질러 댔으니 손가락이 꽤나 얼얼할 터였다. 그러다 재환과 눈이 마주쳐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얼결에 지우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린 재환은 슬쩍 그 옆자리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는 한영은 노래를 시작하기 전과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멍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재환은 어쩔 수 없이 조금 김이 샜다. 새로 준비했던 세 곡의 플레이 중에서도 〈I See You〉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지라 더욱 그랬다. 지금 한영의 반응만 보아서는 방금 연주에 만족을 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와, 존나 덥네. 에어컨 리모컨 어딨냐?”
그새 아예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 던진 태군이 검정 민소매 차림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우면 차라리 가만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태군은 리모컨을 찾아 부산스럽게도 합주실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한 두 바퀴 돌았나, 끝내 리모컨 찾기에 실패한 태군은 ‘아씨, 왜 없냐!’ 하고 투덜거리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걸로 에어컨은 포기한 줄 알았건만, 별안간 눈을 번쩍 뜨고서 한영에게 소리쳤다.
“야, 유한영! 너 뒤! 너 뒤에!”
공교롭게도 리모컨은 한영 뒤편에 자리한 믹서 랙케이스 위에 있었다. 한영이 뒤돌아 쭉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위치였다. 그러나 태군의 다급한 외침에도 한영은 꼼짝하지 않았다. 무시가 분명한 한영의 반응에 태군이 와작 눈머리를 찌푸렸다. 더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야, 씨! 나 더워 죽어!”
보다 못한 재환이 대신 일어나 리모컨을 가지러 가려는 때였다. 직-,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영이 일어섰다. 이제야 태군의 말을 좀 들어주려는 건가 싶어 재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처음 이 자리에 네 사람이 모였던 그날과 같았다. 그대로 성큼성큼 합주실을 가로지른 한영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벌컥 문이 열리고, 그 밖으로 기다란 몸뚱이가 쑥 빠져나갔다. 뒤이어 쾅 닫힌 반투명 유리문 너머 흐릿하게 비치던 분홍 머리가 금세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이 어이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재환의 두 눈이 서서히 경악에 물들었다. 사지가 쩍 굳었다.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요 며칠간의 일들이 휙휙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때마침 들려오는 빗소리에 운 좋게 영감을 얻었던 것, 그렇게 새로 짠 플레이에 지레 만족해 혼자 바보처럼 피식피식 웃었던 것, 그 플레이가 손에 익을 때까지 밤새워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것….
그 모든 순간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이 속이 버글버글 끓기 시작했다. 아연했던 얼굴이 삽시에 붉으락푸르락한 색으로 달아올랐다. 덩달아 눈썹이 꿈틀거리며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렇게 사람을 개똥 나부랭이로 여기는 놈을 더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재환은 결국 입 밖으로 우레와 같은 분노를 터뜨렸다.
“저 새끼가 진짜!”
벌떡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앉았던 의자가 콰다당 소리를 내며 뒤로 나가자빠졌다. 하지만 그런 걸 안중에 둘 여유 따위 없었다. 어디로 튀었는지 모를 괘씸한 분홍 머리를 쫓아 서둘러 발이 움직였다. 굳게 닫힌 문으로 손이 뻗어 나갔다. 이윽고 막 문고리를 쥐려는 찰나, 난데없이 튀어나온 손이 덥석 재환의 팔을 붙잡았다. 시뻘건 분심에 절여진 눈이 제 팔뚝을 움켜쥔 손에서 천천히 그 주인의 멀끔한 얼굴로 옮겨 갔다.
“이거 놔라.”
재환은 살짝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지우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팔뚝에 닿은 커다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환은 마지막 한 줌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다시 말했다.
“퇴짜 맞을 때 맞더라도, 저 새끼랑 얘기 좀 해야겠으니까 이거 놓으라고.”
“퇴짜 맞은 거 아닐걸?”
안 그래도 좁아져 있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빙긋 웃고 있는 지우를 마주한 눈동자에 기가 막힌다는 기색이 서렸다. 이쪽은 속이 뒤집힐 지경인데 참으로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으득 이를 간 재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장난하냐, 지금?”
“너 우리 멤버 된 거 같은데?”
“뭐?”
팔뚝을 그러쥔 손이 어느새 쫙 펼쳐져 재환 앞에 내밀어졌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지우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어느새 후다닥 옆으로 달려온 태군이 재환의 주먹 쥔 손을 억지로 펼쳐 앞에 있는 손을 맞잡게 했다. 지우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미리 인사.”
“새끼, 표정 좀 풀어라!”
태군이 짝, 소리가 나게 재환의 등짝을 때렸다. 손을 놓은 지우가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재환만이 분노와 당황 사이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음이 되었다.
* * *
“암튼 한 10분 있으면 한영이 올 거야.”
“…어.”
다행히 그럭저럭 화는 가라앉았으나 그것과 별개로 재환은 영 찜찜함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사실 이거 다 몰래카메라 아냐, 하는 다소 황당한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태군이라면 몰라도 지우가 굳이 제게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 싱거운 장난을 칠 성격 같아 보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설사 그런 성격이라 한들 아직 그 정도로 지우와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나도 첨에 존나 깜짝 놀랬다니까? 새끼가 멀쩡히 노래하다 갑자기 뛰쳐나가서.”
한여름처럼 씽씽 찬 바람을 내뿜는 에어컨 바로 밑에 선 태군이 민소매 자락을 팔락거리며 낄낄거렸다. 물론 재환은 같이 따라 웃어 줄 수 없었다. 대신 슬쩍 핸드폰을 꺼내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지우가 말한 10분 중 1분여가 지나 있었다.
“애인하고 막 헤어졌다 그랬었나. 그때 유한영이 만들어 온 노래가 뭐였지? 그, 겁나 옛날 영화 노래 제목이랑 같았었는데…. 그거 부르다가도 튀어 나갔잖어.”
“I Will Follow Him.”
지우의 대답에 태군이 ‘맞다!’ 하며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아예 허리를 숙여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방향으로 반짝거리는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뒤늦게 땀이 묻은 기타 줄을 쓱쓱 융으로 닦아 내던 재환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들어 올려졌다.
“‘I Will Follow Her’가 아니고?”
“어. 씨발, 존나 하나님한테 귀의한 줄. 하여튼 겁나 특이해요.”
재환은 더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한영이 전에 부르던 노래 제목이야 기실 어찌 됐든 좋았다. 요는 노래를 부르다가도 감정이 벅차오르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는 이야긴데, 이걸 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데 또 바로 조금 전 문제의 장면을 제 눈으로 봐 버렸으니 두 사람의 말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기도 뭐했다. 진짜 감정이 끓어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화장실이 존나게 급했던 건지는 모르겠다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는 문득 재환 자신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저도 모르는 새 제법 긴장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화장실은 어디야?”
“아, 1층으로 올라가면 됨. 형님이 같이 가 주까?”
이제야 몸이 좀 식었는지 슬렁슬렁 자리로 돌아가는 태군에게 ‘됐다.’ 대꾸하며 재환은 합주실을 나섰다.
은은하게 간접 조명이 깔린 계단을 올라가자 신발을 벗어 두었던 계단참의 간이 현관이 나왔다. 이 위로 더 올라가면 한영이 사는 진짜 집이 나올 터였다. 그렇게 뛰쳐나가 저 위에서 당최 뭘 하고 있는 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단참을 도는 찰나.
계단 아래까지 지그재그 모양으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 끝자락에 문득 발이 걸렸다.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고개가 들렸다. 그림자가 시작되는 곳에 지상층의 햇살을 등진 분홍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약간의 눈 부심을 느낀 재환은 벽에 붙은 핸드레일을 짚은 채 몇 차례 눈을 끔뻑였다. 역광 탓에 상대의 테두리만 밝게 빛날 뿐 표정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재환의 눈머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이내 타박타박, 하얀 맨발을 감싼 슬리퍼 밑창이 나무 바닥에 닿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훌쩍 계단을 밟고 내려온 한영이 어느덧 밝은 빛에서 빠져나와 재환 앞에 있었다. 얼굴에 조금 그림자가 져 있기는 했으나, 더는 눈을 찌푸리지 않아도 표정이 훤히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와 함께 달콤한 과일 같기도, 푹신한 솜사탕 같기도 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어디 가.”
예외 없이 낮으면서도 묘하게 간질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괜히 한 번 이마를 찡그린 재환은 의외로 저보다 조금 더 높이 있는 한영의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신기하게도 기다란 속눈썹 아래 자리한 눈동자는 주위가 밝든 어둡든 선명한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재환은 저도 모르게 탁 맥이 풀려 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뒤쫓아 가 결판을 내고 싶었는데, 왠지 이 녀석에게는 말싸움도 드잡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그래서 ‘그러는 너는 어디 갔었냐’ 따지는 대신 짧게 대꾸했다. 당연히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 줄 줄 알았던 한영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만 크게 깜빡였다.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아, 문득 마이크 앞에서 그렇게 ‘I see you’를 외치던 녀석이 맞나 싶었다. 물론 생각보다 커다란 키와 골격은 아이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어쨌거나 한 사람은 내려가고 한 사람은 올라가려면 둘 중 하나가 벽으로 붙는 수밖에 없었다. 재환은 한영에게 지나가라 고갯짓하며 계단 벽에 몸을 붙였다. 한데 한영은 밑으로 내려가기는커녕 오히려 재환이 물러난 만큼 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에게서 풍기는 달큼한 향이 한층 진해졌다.
“왜?”
그러더니 당최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왔다. 슬쩍 눈썹 사이를 좁힌 재환은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조금 전까지의 대화를 되짚었다. 아니, 되짚을 것까지도 없었다. 어딜 가냐 묻기에 화장실이라고 답한 게 전부였으니. 설마 진심으로 화장실에 왜 가느냐 묻고 있는 건가. 아마 이런 상황에서 태군이었다면 ‘왜, 딸이라도 칠까 봐?’라고 짓궂게 답했을 터다.
“볼일… 보러?”
“볼일?”
재환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의 개수가 순식간에 배로 늘어났다. 묻는 놈이 바보인 건지, 대답하는 자신이 바보인 건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더 이상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한 재환은 그냥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명료한 답을 꺼냈다.
“오줌 싸러.”
“아…, 오줌. 응.”
그제야 살짝 눈을 아래로 내리깐 한영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 표정이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건 아무래도 기분 탓인 것 같았다.
슬쩍 어깨를 부딪치며 한영을 지나친 재환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어서 다음 계단을 밟는 순간, 별안간 손목이 붙잡히며 휙 몸이 반절 뒤로 돌아갔다. 바로 몇 초 전 재환이 조금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엷은 색 눈동자가 비슷한 각도로 재환을 올려 보고 있었다.
때마침 해를 가리던 구름이라도 비켜난 듯 1층에서 흘러든 빛이 온 계단을 환히 비추었다. 동시에 재환의 코앞에 있던 얼굴에서도 순식간에 그림자가 걷혔다. 하니 재환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빛나는 한영의 얼굴을 그대로 눈에 담는 수밖에 없었다.
예쁘면서도 잘생겼고, 잘생겼으면서도 예쁜 참 희한한 얼굴이었다. 이목구비뿐만이 아니었다. 이마나 눈썹 뼈, 인중 같은 데까지 그린 것처럼 반듯반듯한 게 어떻게 저런 데까지 잘생겼냐, 하는 실없는 감탄이 속으로 흘렀다. 그게 또 불식간에 입 밖으로 툭 튀어 나갈까 싶어 재환은 정신을 다잡았다.
그즈음 불현듯 제 살갗에 닿은 손바닥이 지나치게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한참이나 찬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붙잡힌 곳에서 살금살금 번진 소름이 어느덧 손등과 팔뚝을 뒤덮었다. 그것이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서 더욱 팔을 빼낼 수 없게끔 만들었다. 붉은 입술 새에서 또 어떤 황당한 말이 나올지 몰라 목구멍 너머로 꿀꺽 침이 넘어갔다.
“오늘 왜 안 썼어?”
“…뭐?”
“모자.”
재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화장실에 왜 가냐는 질문보다는 그나마 나은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거기서 거기였다. 어째서 한영이 저런 걸 궁금해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바 면접 있어서.”
“아….”
또다. 또 빛살을 고스란히 담고 있던 한영의 눈동자가 뚝 아래로 떨어졌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던 손에서는 스르르 힘이 풀렸다. 얇은 면티에 감싸인 어깨도 조금쯤 아래로 처졌다. 그 모든 행동이 딱히 잘못한 것 없는 재환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러다가 오늘 화장실에는 영영 못 갈 것 같았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던 재환은 입을 열었다.
“알바해도 밴드는 할 수 있어.”
“어?”
이게 아닌가. 다시 시선을 맞추며 되묻는 한영의 반응에 살짝 머쓱해진 재환은 뒷목을 긁적였다. 그러다 계단 한 칸 아래로 내려가 한영을 마주 보고 섰다.
“사실은 내가 이 밴드 하고 싶어. 니네 음악 진짜 맘에 들거든. 네 목소리도.”
태군이나 지우는 벌써 재환 자신이 멤버가 된 것처럼 굴었지만, 한영의 생각은 또 어쩔는지 몰랐다. 혹시라도 그가 저를 탐탁지 않아 한다면 미련 없이 물러나는 게 맞았다. 그래도 이 정도의 진심은 전해 두고 싶었다.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뭐, 아직 두 곡 남았으니까 합주 끝나고서 천천히 생각해 봐. 난 화장실 갔다 금방 내려갈게.”
눈을 동그랗게 뜬 한영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린 재환은 1층을 향해 훌쩍훌쩍 남은 계단을 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슬슬 화장실에 가고픈 마음이 간절해지던 차였다. 막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뗐을 때 저 아래에서 쿵, 합주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남의 집을 헤매는 거 아닌가, 했던 걱정과 달리 1층으로 올라온 재환은 금방 화장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로 조그맣게 불투명 창이 난 문을 열고 쏙 안으로 들어가자 꼭 합주실에서처럼 폴폴 좋은 향기가 풍겼다. 화장실은 넓기도 상당히 넓었다.
서둘러 볼일을 본 후 합주 때부터 줄곧 땀이 맺혀 있던 손을 꼼꼼히 씻었다. 그러던 중 팔목에 새겨진 붉은 손자국으로 눈이 갔다. 조금 전 한영이 만든 것이었다. 건반을 쳐서 그런가 생긴 것과 다르게 손힘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막상 붙잡혔을 때는 마냥 차갑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손이 살짝 젖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얼음물에 씻기라도 했나.
한 번 어깨를 으쓱한 재환은 새하얀 수건 위로 톡톡 손을 두드리며 물기를 닦아 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삐져나온 머리칼 한 가닥을 내리누른 뒤 화장실을 나섰다.
올라왔던 계단을 그대로 밟아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대화를 나누던 세 사람의 말이 뚝 끊겼다. 태군은 괜히 하이햇 페달을 밟아 칙칙 소리를 내며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곁눈질로 슬금슬금 재환의 눈치를 살폈다. 음…. 왠지 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을지 재환은 짐작이 갈 듯했다. 남은 두 곡은 연주해 볼 필요도 없었던 건가. 그렇게 내 플레이가 별로였나. 어쩔 수 없이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씨!”
갑자기 챙, 스틱으로 하이햇을 내리친 태군이 손바닥으로 벅벅 뒤통수를 문질렀다. 자리로 가 앉은 재환은 그런 태군을 빤히 응시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라는 뜻이었다.
“오늘은 막창 안 먹어도 되지?”
“뭐?”
오늘 이 팀이 아주 단체로 작정을 했나. 어째 물어 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두서도, 맥락도 없었다. 당황한 듯 되물으며 재환은 일단 기타부터 집어 들었다. 혹 이대로 다시 가방 안에 넣어야 할지도 모르니.
“아니, 너 막창 좋아한다니까 저 새끼가 오늘 죽어도 그거 먹어야 된다고 난리잖어!”
태군이 손에 쥔 스틱을 까딱거리며 성을 냈다. 스틱 팁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한영이었다. 다만 한영은 뭘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새빨간 노드의 버튼만 이것저것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당연히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재환의 얼굴이 휙 태군에게로 돌아갔다.
“막창을 왜 먹는데?”
“엥? 오늘 너 환영회 하기로 했다던데?”
이건 또 뭔….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은 이미 저녁을 가리켰으나, 창밖으로는 이제야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널따란 거실 가운데 자리한 탁자 위는 한밤중의 야식 타임을 방불케 했다. 치킨, 피자, 족발, 그리고 또 피자까지. 한 사람이 끝끝내 결사반대를 외친 까닭에 막창은 없었다. 물론 시킬 곳이 마땅치 않기도 했다. 어쨌든 태군으로서는 썩 뿌듯한 일이었다.
“자, ‘네가 더 잘생긴’ 서재환이의 합류를 축하하며! 짠!”
적잖이 얄미운 태군의 건배사에 재환은 눈을 한 번 흘겨 주고서 맥주 캔을 들어 올렸다. 송골송골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캔들이 서로 연달아 부딪치며 텅텅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대로 캔을 입에 가져가려는데 아직까지 제 앞으로 쑥 내밀어져 있는 캔 하나가 재환의 눈길을 붙잡았다. 뻗어 나온 기다란 팔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자 여지없이 예의 직시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는 한영과 시선이 맞닿았다. 아무래도 저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게 버릇이지 싶었다.
결국 입가에서 캔을 내린 재환은 한영의 캔에 가볍게 끄트머리를 부딪쳤다. 다시 텅, 소리가 나고 그제야 팔을 접은 한영이 캔 입구에 입술을 붙였다. 뒤이어 미끈하게 드러난 턱선 아래 불거져 나온 목울대가 몇 번 꿀렁거리더니 작게 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이대로 한영을 보고 있다가는 또 눈이 마주칠 것 같아 부러 더 고개를 크게 젖힌 재환은 꿀꺽꿀꺽 맥주를 삼켰다. 상대가 아무리 절로 ‘꽃’ 자를 수식해 주고픈 미남이라 할지라도 그래 봤자 같은 거 달린 사내놈이었다. 쓸데없이 계속 눈빛을 주고받아 봤자 딱히 서로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밴드에 여자가 있기를 바란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고.
과거 재환이 하던 밴드에는 여자 멤버가 딱 한 명 있었다. 실용음악과에서 건반을 전공하는 친구였는데, 재환보다는 한 살이 어렸다. 밴드에 제일 마지막으로 합류하기도 했거니와 시커먼 사내놈들 사이에서 꽤나 어색해하는 것 같아 처음에는 재환이 더 나서서 챙겨 줬더랬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오빠, 오빠 하며 재환을 제법 따랐다. 그런 그녀를 재환도 퍽 귀여워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여동생 같은 마음에서였다.
그날은 인디 밴드만 참가하는 작은 경연에서 밴드가 2등인가 3등인가를 한 날이었다. 당연히 멤버들은 잔뜩 신이 났고,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그러다 술을 물처럼 마시는 사내 녀석들의 페이스를 쫓아가지 못해 유일한 여자 멤버가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 다른 놈들의 상태도 썩 좋았던 것은 아닌지라 그나마 멀쩡한 재환이 그녀를 데리고 술집 밖으로 나섰다.
장소가 문제인지 시간이 문제인지 좀처럼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서 재환은 좀 더 택시가 잡힐 만한 곳으로 걸었다. 그사이 다행히도 상대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오빠, 좋아해요.’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키스해 오기 전까지는.
그날 새벽, 남은 멤버까지 모두 챙겨 보내고 집에 돌아온 재환은 깊은 후회에 잠겼다. 안 그래도 평소 꽤나 진지하게 ‘사내 연애는 금지다’라는 말을 멤버들에게 하곤 했었는데, 제가 그걸 어긴 것 같아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당연히 고백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뭐라 말도 못 하고 당황해서 그대로 택시에 태워 보냈으니까. 하지만 분명 상대의 키스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취하지도 않았었는데 말이다. 제 성격상 진짜 싫었으면 아마 바로 그 자리에서 떼어 냈을 터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뜨자마자 확인한 핸드폰에는 ‘오빠, 제가 어제 취해서 완전 필름 끊겼었어요. 혹시 진상 부렸으면 죄송해요. ㅠㅠ’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째선가 심장 한편이 꽉 조여 와, 재환은 한참이나 답을 보내지 못했다.
이후 밴드의 새로운 싱글 준비로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사소한 데 신경 쓸 정신일랑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밤의 일은 재환의 머릿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물론 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것도 없잖아 있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잊은 체, 혹은 모른 체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며칠이 더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새 싱글의 마스터링본이 나왔다. 마스터링이란 간단히 말해 곡의 음압을 끌어올리면서 특유의 색채를 입히는 작업으로, 믹싱이 끝나 한 트랙이 된 음원은 최종적으로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 그리고 음원 발매의 순이었다. 게다가 마스터링이 완료된 음원은 더 이상의 수정이 불가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마스터링 스튜디오에 다녀온 리더 형찬이 보내 준 메일을 열며 재환은 심장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곡이 완성된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간 고생했던 순간들이 휙휙 머릿속을 스쳤다. 밤새워 플레이를 짜고, 마음에 들 때까지 녹음을 반복하고, 믹싱 기사와 몇 번이나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이처럼 인디 밴드에게 곡 하나 내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너무 재미있고 좋은 것을.
급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재환은 서둘러 다운이 완료된 음원 파일을 클릭했다. 노트북 양옆으로 자리한 작은 모니터 스피커에서 몇 번을 들어도 뿌듯한 제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럼 인트로 좋고, 후에 나오는 보컬도 시원시원하고, 밑에 깔리는 건반이나 베이스도 잘 살아 있고. 여기에 마스터링을 통해 공간감이나 생동감까지 쫙 끌어 올려진 곡의 사운드는 그야말로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적어도 재환이 듣기에는 그랬다. 그사이 2절 후렴이 끝난 노래가 대망의 브리지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던 재환의 얼굴이 일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떨리는 손으로 급히 마우스를 클릭해 노래를 브리지 전으로 되돌렸다. 이윽고 다시 재생된 노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재환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경련하고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씨발!”
붕 날아간 노트북이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구석으로 처박혔다. 그 위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얹혔다. 그렇게 고생해서 녹음했던 제 기타 솔로가 음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송두리째.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곡에 어울리지도 않는 조악한 기타 솔로였다. 누구의 연주일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형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씨발, 이게 뭐 하자는 거냐고, 남이 녹음한 걸 얻다 멋대로 갖다 버렸냐고 소리쳐 따져 물었다. 그러자 되돌아온 말은 딱 한마디였다.
“그러게 누가 남의 여친 건드리래, 이 씨발 새끼야.”
아…. 그러니까, 형찬과 키보디스트인 그녀가….
두 사람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냐 재환은 형찬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그날 밤 저와의 키스는 뭐였냐고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이제 와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사실은 저 빼고 이미 모든 멤버가 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에도 그다지 놀라움은 없었다. 그저 조금 허무했다. 평소 열심히 좀 하자고 멤버들을 너무 다그쳤었나 싶기도 했다. 그래 봤자 하등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그날로 재환은 밴드를 나왔다. 가능한 한 가장 이른 날짜로 입영 신청도 넣었다.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결정이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두 번 다시 밴드 같은 거, 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런 개짓거리 시간 낭비, 돈 낭비임을 몸소 아주 제대로 체험한 덕이었다. 그 굳은 다짐을 속없이 무너뜨리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찬기가 서려 있는 캔 표면을 엄지로 만지작거리던 재환은 탁자 주위를 한 번 빙 둘러보았다. 한 손에는 닭 다리, 또 다른 손에는 피자를 쥔 태군은 아예 양 볼이 터져 나가라 음식을 씹고 입었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같은 소파에 앉은 지우가 그런 태군 앞에 쓱쓱 티슈를 뽑아 던졌다. 1인용 소파에 두 무릎을 세워 앉은 한영은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우물우물 피자를 뜯어 먹었다. 그러다 예외 없이 눈꺼풀을 들쳐 마주 보는 자리에 있는 재환을 보았다.
안 먹어?
입만 벙긋벙긋 벌려 한영이 묻고 나서야 재환은 자신이 연신 맥주만 들이켜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거한 환영회 자리를, 그것도 친히 제집 거실에서 마련해 주었는데 음식에 손도 안 대는 건 당연히 예의가 아니었다. 재환은 가장 가까이 놓인 피자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집어 올리지는 못했다. 절로 눈썹이 찡그려지며 으, 소리가 나왔다.
반지르르 기름기가 도는 피자 위에는 샛노란 파인애플이 콕콕 박혀 있었다. 웬만해서는 못 먹는 음식이 없는 재환이었지만 예전부터 저것만큼은 좀체 납득할 수도, 입에 댈 수도 없었다. 입가심으로 먹는 게 당연한 파인애플을 도대체 왜 멀쩡한 피자 위에 얹어 놓는 건지. 왠지 태군이 고른 게 아닐까 추측하며 재환은 좀 더 멀리 있는 불고기 피자로 쭉 손을 뻗었다.
한창때 사내놈 넷이 모여 있으니 제법 넉넉하게 시켰던 음식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치킨은 얼마 가지도 않아 동이 나고, 족발은 큼지막한 뼈 한두 덩어리만이 남았다. 그 외에는 커다란 박스 위에 덩그러니 놓인 피자 한 조각씩이 전부였다. 그 와중 맥주만큼은 끝도 없이 새로 채워졌다. 더는 탁자 위에 빈 캔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배달 음식이 담겨 왔던 봉지에 다 마신 캔을 적당히 모아 넣은 재환은 이제 몇 개째인지도 모를 새 맥주 캔의 꼭지를 들어 올렸다.
술이 센 것과 별개로 재환은 평소 그렇게 음주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새로 산 페달 때문에 거의 숨 막히기 직전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술 마시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이런 기회를 맞으니 어쩔 수 없이 술이 그야말로 술술 들어갔다. 아니면, 괜히 마음이 들떠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속에서는 ‘서재환, 밴드 다시 하니까 그렇게 좋냐?’ 하는 물음이 툭툭 비어졌다. ‘그러게, 좋네.’라고 혼자 피식 웃으며 자문자답할 무렵.
“야, 솔찍히 니네 줜나 놀랬지? 우리 째환이 기타 음청 잘 쳐서?”
난데없이 큰소리치는 태군의 혀는 배배 꼬여 있었다. 작은 머리통은 반질반질한 정수리까지 죄 벌건 색을 띠었다. 술도 세지 않은 놈이 초장부터 맥주를 그리 부어 대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일 먼저 취한 모양이었다. 더 심한 주정으로 번지기 전 재환이 태군의 손에서 맥주를 빼내려는데, 태군 옆에 있던 지우가 한 박자 빨랐다.
“그래, 그래. 줜나 놀랬으니까 이거나 마셔.”
맥주가 들려 있던 자리에 물컵을 쥐여 주며 지우가 어르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익숙해 보이는 것이, 한두 번 취한 태군을 상대해 보는 게 아닌 듯했다. 어쨌거나 일전 들었던 태군의 푸념처럼 그를 무시하는 태도로는 절대 비치지 않았다. 이로써 태군이 그냥 소심한 것뿐이라는 재환의 생각에 더욱 힘이 실렸다.
꼴깍꼴깍 물을 잘도 받아 마신 태군은 푸아, 하며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쓱쓱 문질렀다. 거기서 적당히 그만두면 좋았으련만, 민머리의 주정뱅이는 보란 듯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야, 유한영! 너도 말을 좀 해 봐, 새끼야아-. 째환이 기타가 세웅이보다 훨 좋았지?”
살짝 위로 휘어져 있던 지우의 입매가 순식간에 일자를 그렸다. 그러더니 눈알만 휙 돌려 한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 반응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재환의 마음이 하릴없이 조금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태군이 들먹인 ‘세웅’이라는 이름이 문제인 것 같았다. 그게 누구의 이름일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영이 꽤나 좋아했을 것이 분명한 이전 기타리스트의 이름일 터였다. 그가 밴드를 나갔을 때 한영 본인도 그만두겠다 했었다지, 아마.
“여보세요, 유한영 씨 거기 계세여-?”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예 팔을 쭉 뻗은 태군이 한영의 얼굴 앞에서 휙휙 손을 흔들어 댔다. 그때, 문득 살이 듬성듬성 붙은 족발 뼈다귀가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여보세용?’ 하고 재차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있는 태군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러다 다시 뼈다귀를 한 번 보고, 태군을 보고. 눈치 없는 소리나 내뱉고 있는 저 입에 뼈 하나 물려 주면 딱 좋겠지 싶었다. 차마 그럴 수 없어 폭 눈살을 구기는데.
“응, 좋았어.”
낮게 깔린 것 같기도, 반대로 둥둥 떠 있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목소리가 훅 재환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태군을 보고 있던 눈이 자연스레 목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질문을 던진 건 분명 태군인데, 대답하는 이의 시선은 어째서인지 재환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찰나의 침묵이 한영과 재환,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이씨, 진작 그럴 것이지! 야, 유한영! 나 피자나 줘어-.”
이어지는 태군의 앙탈이 잠시간의 침묵을 저 멀리로 날려 보냈다. 뚫어져라 재환을 보고 있던 한영은 그런 적 없다는 듯 쑥 탁자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서 바로 제 앞의 불고기 피자를 두고 굳이 재환 가까이에 있던 파인애플 피자를 집었다. 이를 태군에게 내밀자 당연히 ‘엥. 아니, 나 불고기 피자 달라고….’ 하며 꿍얼대는 소리가 흘렀다. 그러든 말든 태군의 손에 피자를 쥐여 준 한영은 불고기 피자 한 조각이 남아 있는 박스를 쓱 재환 앞으로 밀었다. 살짝 눈을 아래로 내렸다 치켜뜨며 재환에게 ‘먹어’라는 신호를 보냈다.
눈알만 굴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지우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함은 오롯이 재환의 몫이었다. 한영 나름대로 저를 챙겨 주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또 마냥 고맙다고 하기에는 뭔가가 좀 애매했다. 어쨌거나 마다할 이유는 없기에 재환은 약간의 떨떠름함을 안고 불고기 피자를 집어 들었다.
재환이 피자 끄트머리를 베어 무는 것을 지켜보던 한영이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우에게 ‘나, 부엌.’이라고 짧게 말하더니 저벅저벅 거실을 가로질렀다. 걸음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분홍 머리가 금세 쏙 거실 밖으로 사라졌다. 조금 식은 피자를 씹으며 멍하니 그 자리를 응시하던 재환에게 지우가 대뜸 의미 모를 말을 던져 왔다.
“재환아, 너 어떡하냐.”
약간의 웃음기가 맺힌 목소리와 달리 지우의 눈썹 끝은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마치 사람을 대단히 안쓰럽게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만 무엇을 안쓰럽게 여기는지 재환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입 안에 있는 피자 조각을 꿀꺽 삼키고서 ‘왜?’라고 물으려는 찰나, 다시 저벅저벅 맨발로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한영의 양손에는 와인병과 잔이 들려 있었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한 한 명의 몫은 빠져, 잔은 총 세 개였다.
“너 이거 따려고? 나중에 아주머니 한국 오시면 난리 날 텐데.”
시커먼 병 표면 위에 붙은 라벨을 보고는 지우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이를 들은 체도 하지 않은 한영은 병 입구를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 끄트머리를 돌려 넣었다. 얼마 안 가 퐁, 하는 새침한 소리와 함께 마개가 뽑혀 나왔다. 와인에 대해서 조금도 아는 바가 없는 재환은 그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밴드 회식 자리에 와인이라니, 생소해도 너무 생소했다. ‘야, 나느은?’ 하며 혀 꼬인 소리를 내는 태군을 무시한 채 한영은 지우와 재환에게 검붉은 액체가 반절씩 담긴 잔을 차례로 내밀었다.
“아, 고마워.”
엉겁결에 잔을 받아 든 재환은 일단 한 모금을 호로록 들이켜 보았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애매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살짝 미간에 힘을 주고 한 모금 더 와인을 마셔 보는데,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시선이 콕콕 피부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왠지 그 눈빛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아 재환은 한영에게 툭 한마디를 건넸다.
“맛있다.”
‘많이 마셔’나 혹은 ‘다행이다’ 따위의 말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한영은 그저 웃었다. 볼우물이 질 정도로 입매를 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커다란 눈은 살짝 반으로 접혔다. 그러니 재환은 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만난 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처음 본 한영의 웃음은, 같은 남자가 봐도 넋 나갈 정도로 예뻤다.
하여튼 잘생긴 놈들이란. 싱겁기 짝이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환은 서둘러 남은 와인을 훅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종전보다는 조금 더 강한 단맛이 혀를 적셨다.
* * *
넷 중 입 하나가 빠졌음에도 와인병은 채 15분도 지나지 않아 텅텅 비었다. 1인용 소파 등받이에 깊이 등을 기댄 재환은 손등으로 제법 열이 오른 뺨을 꾹꾹 눌렀다. 영 익숙하지 않은 술을 마셔서인지 평소보다 취기가 오르는 속도가 빨랐다. 그렇다고 태군처럼 저렇게 소파에 대자로 누워 잠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도 옆에 앉은 이의 무릎을 베개 삼는 민폐까지 끼치면서.
“나, 화장실.”
취했는지 아닌지 도통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을 한 한영이 짧은 말을 남기고서 거실을 나갔다. 부엌이든 화장실이든 어디 갈 때마다 저렇게 꼬박꼬박 잘도 보고하면서 합주 때는 대체 왜 그런 건지 재환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하간에 제가 연주한 기타를 좋다고 해 주었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그냥 됐다 싶은 정도가 아니라, 자꾸 열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술 때문이었다.
짝, 소리가 나게 양 뺨을 한 번 가볍게 내리친 재환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다 소파 위에 태군의 머리통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담배 피우러 갈래?”
언제 쿨쿨 잤냐는 양 귀신같이 이를 알아들은 태군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허공에 휙휙 손을 내저으며 ‘새꺄, 우리 째환이 담배 안 피워….’ 하고 웅얼거렸다. 아직 뭘 잘 모르는 친구의 말에 픽, 웃은 재환은 지우에게 가자고 눈짓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다 그새 다시 눈을 감은 태군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니네 째환이 담배 피워.”
지우를 따라나선 정원에는 제법 선선한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우거진 정원까지는 아니었으나, 중간중간 은은한 조명이 밝혀져 있어 그럭저럭 운치가 있었다. 몇 년을 집 앞 좁은 골목의 벌레 낀 가로등만 보아 온 재환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잠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술기운을 떨쳐 낸 재환은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열었다.
한 달 가까이 기타 가방에 넣어 두기만 했던 담배는 다행히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한 개비를 빼 물자 옆에 선 지우가 쓱 라이터를 내밀었다. 딱 라이터만 없는 건 또 어떻게 알았나 모르겠다.
‘땡큐.’ 하고서 라이터를 받아 든 재환은 손으로 바람을 막은 뒤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동시에 한 모금 크게 빨아올리자 폐부로 흘러들어 간 연기가 순식간에 온몸 가득 끔찍한 안정감을 퍼뜨렸다. 너무 좋아 눈물 콕 나올 정도로. 제대와 동시에 결심했던 금연을 포기하는 건 이토록 한순간이었다.
“얼마나 참았어?”
“한 달.”
“많이 참았네.”
흡연가라면 누구나 고개 끄덕이며 이해할 만한 대화 몇 마디가 오갔다. 지우의 눈치가 상당하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허공을 향해 후-, 긴 숨을 내뱉었다. 노란색 구 모양의 조명 아래 뿌연 연기가 너울너울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오늘 너 기타 진짜 좋긴 좋더라.”
“아, 응. 고맙다.”
예고 없이 툭 던져진 칭찬에 재환은 머쓱함을 감추지 못했다. 괜히 뒷목을 한 번 쓸었다가 뒤늦게 ‘네 연주도 좋았어.’라는 말을 지우에게 전했다. 말투는 영 멋대가리 없었지만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지우의 연주는 딱 그의 인상과 비슷했다. 어딘가 여유로운 본인의 분위기처럼 연주에도 여유가 넘쳤다. 그러면서도 시종 센스 있게 곡을 이끌어 갔다. 고작 세 곡을 맞춰 본 것뿐이지만 한두 해 연주해 본 솜씨가 아님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합주가 더욱 기대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그만큼 저도 연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터였다.
“특히 첫 곡 좋던데? ‘I See You’.”
“그래?”
이번에는 지우에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보다 들뜬 기색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재환 역시 세 곡 중 단연 〈I See You〉의 연주가 가장 만족스러웠다. 상대도 같은 것을 느꼈다는 게 못내 기꺼웠다. 그래서 답지 않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덧붙이게 되었다.
“사실 그거 플레이 짤 때, 비 왔었거든. 약간 노래 느낌이랑 비슷해서 아이디어가 금방 떠오르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재환 저조차도 기타를 치기 시작한 이래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평소의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플레이를 완성시키는 편이었고, 따라서 즉흥적 악상 이런 거와는 그다지 연이 없었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한마디로 센스가 조금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더 악착같이 연습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나름 비 내리는 느낌을 내 보려고 하긴 했는데, 그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멋쩍은 듯 살짝 눈을 내리깐 재환을 보고 있던 지우의 시선이 흘끔 건물 쪽으로 옮겨 갔다. 1층 거실에 커다랗게 난 전면 창 너머로 선명한 분홍빛이 비쳤다. 저곳에 누가 서 있을지 뻔히 짐작이 가 딱 재환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슬쩍 웃은 지우는 담배의 마지막 모금을 크게 빨아들였다. 재떨이용으로 놓인 커다란 깡통에 툭 꽁초를 떨구고서 아예 창을 등진 채 재환을 보고 섰다.
“재환아.”
“어?”
“그 얘기, 절대 한영이한테는 하지 마라.”
그사이 다 피운 담배꽁초 끄트머리를 툭툭 검지로 쳐 내던 재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유독 새카만 눈동자에 ‘왜?’라는 순수한 의문이 서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우가 말한 ‘그 얘기’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영 모호한 탓도 있었고, 이를 헤아려 보기에는 제가 꺼낸 이야기가 꽤나 시시껄렁한 탓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아,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며 괜한 고집을 부릴 만한 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재환은 상대의 진심 어린 충고를 흘려 넘겼다.
“아, 맞다.”
불 꺼진 꽁초를 깡통에 버린 재환은 무언가 생각난 듯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던 지우를 불러 세웠다. 이렇게 둘이서만 나온 참에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태군이랑은 어쩌다 같이 하게 된 거야?”
“태군이? 오디션 겸 합주해 보고 뽑았지.”
발을 멈춘 지우에게서 빠른 답이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재환도 태군으로부터 한 번 들은 바가 있는 이야기였다. 모르긴 몰라도 경쟁자가 존나 많았을 거라며 태군답게 한껏 으쓱해하기도 했다. 해서 재환은 조금쯤 궁금해졌다. 오디션을 본 많은 드러머 중 왜 태군을 뽑았는지. 친구의 드럼 실력을 의심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고,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제 재환 자신도 같은 밴드의 멤버가 되었으니 이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건 들었어.”
“아, 그럼 왜 하필 태군이를 뽑았냐고?”
“뭐…, 응.”
역시나 지우는 눈치가 빨랐다. 어떻게 더 자세히 물어야 하나 고민하던 재환은 지우의 속 시원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필’이라는 말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상황상 적절한 표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지우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음….’ 하며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재미난 걸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내 입꼬리를 씨익 위로 당겨 올렸다. 하지만 약간의 장난기가 서린 표정과 달리 지우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꽤나 뻔한 것이었다.
“드럼 잘 쳐서.”
재환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조금 힘 빠진 소리를 냈다. 그래도 정론이라면 정론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답이 나오는 것도 좀 웃겼다. 그래, 예를 들자면….
“그리고 귀엽잖아.”
폭탄 같은 말을 던지고 휙 재환을 등진 지우가 슬렁슬렁 정원에 난 돌길을 따라 걸었다. 제자리에 붙박인 재환은 지나치게 길쭉한 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만 끔뻑였다. 떫은 감을 한 입 와작 베어 문 것처럼 표정은 영 편치 않았다.
보폭이 어찌나 넓은지 그새 벌써 현관 앞에 다다른 지우가 문을 반쯤 열고서 ‘안 들어가?’ 하고 재환에게 소리쳤다. 그제야 ‘어, 어.’ 대답한 재환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밴드에는 정상이 없는 것 같다.
“나 화장실 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곧장 거실로 가는 대신 화장실로 향했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따라 걷자 화장실 문 너머 저 끝에 2층으로 난 계단이 보였다. 화장실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재환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오는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 벽에 가려 커다란 티브이와 그 옆의 스탠드 정도만 얼핏 보였다.
합주가 끝나고, 환영회를 집에서 하자는 한영의 말에 당연히 재환은 그의 부모님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태군에게서 ‘괜찮아, 이 새끼 혼자 살어!’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야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집이 좋고 나쁜 건 둘째 치고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 자연스레 진짜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사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영에게 꼬치꼬치 사생활을 캐물을 수는 없었다. 아직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애초에 재환은 남의 사정에 관여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나 살기도 벅차 죽겠는데, 하는 이유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타인에 대한 하등 영양가 없는 궁금증을 금세 떨쳐 낸 재환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단 볼일부터 본 후 세면대 앞에 서자 저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물론 감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놈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았다.
푹신한 소파에서 잔뜩 뭉갠 탓인지 합주 직후만 해도 그럭저럭 멀쩡했던 머리가 아주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것뿐이면 모르겠는데, 술이 올라 낯빛까지 벌긋벌긋한 것이 절로 ‘볼만하네.’ 소리가 나왔다. 휴, 한숨을 내쉰 재환은 오른쪽 끝까지 돌린 수도 레버를 위로 들어 올렸다.
세면대로 바짝 허리를 숙인 뒤 주저 없이 손바닥에 물을 받아 얼굴로 끼얹었다. 촥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신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물이 연신 살갗을 때렸다. 정신이 들다 못해 이까지 다 덜덜 떨릴 즈음에서야 콸콸 흐르던 물을 잠근 재환은 숙였던 허리를 폈다. 앞머리고 옷 앞섶이고 죄 척척하게 젖었지만, 얼굴이 제 색을 되찾아 그나마 좀 나아 보이는 것 같았다. 수건 위로 얼굴을 한 번 쿡 찍고 화장실을 나섰다.
“어씨…!”
문 옆에 쪼그려 앉은 인영을 발견한 순간 찬물에 닿아 하얗게 질린 입술 새에서 거친 소리가 터졌다.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필이면 또 눈에 확 띄는 분홍 머리일 건 뭐람. 그 분홍색 머리통이 위로 들린 후에도 재환의 기겁한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직 물기가 맺혀 있는 손바닥으로 벌렁거리는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야, 진짜…. 아오….”
“놀랬어?”
‘보면 모르겠냐?’ 하는 소리가 목젖을 쿡 쳤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반사돼 유독 반짝이는 상대의 눈동자가 욱해서 따지려 들던 재환의 의지를 여지없이 앗아 갔다. 대신 재환은 일순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를 주물렀다. 몇 번 헛기침해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질러 칼칼해진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뗐다.
“거기서 뭐 하는데?”
“갔어.”
바닥에서 훌쩍 긴 몸을 일으키며 한영이 꺼낸 얘기는 여전히 재환에게 있어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여 슬그머니 눈머리를 찌푸리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이쪽이 되묻기 전 한영이 알아서 말을 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 재차 재환의 눈을 찡그리게 했다.
“지우랑 태군이랑 갔어.”
“뭐?”
“태군이가 집 가고 싶다고 울었어.”
미친…. 하는 수 없이 재환은 또 거친 소리를 뱉었다. 과거 그도 태군에게 무척 비슷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술 먹고 잠들었던 놈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집 보내 달라고 그야말로 애처럼 울며 찡찡거렸더랬다. 사람들의 흘긋대는 눈길 속, 그런 태군을 질질 끌고 같이 택시에 올라탔던 기억이 아직도 재환의 머릿속에 선연했다. 그 몹쓸 버릇을 여태 태군은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니 태군을 챙겨 갔을 지우에게 재환은 진심으로 짠한 마음이 들었다. 뭐, 그런 모습까지 귀엽다 여긴다면 할 말 없었다. 그건 그거고.
“지금 몇 시지? 나도 그만 가 봐야겠다.”
핸드폰을 소파 위에 두고 왔다는 걸 떠올린 재환은 서둘러 복도에서 걸음을 뗐다. 그러나 몇 발자국 옮기지도 못해 우뚝 발이 멎고 말았다. 당황의 빛이 서린 눈동자가 제 팔목을 꽉 움켜쥐고 있는 하얀 손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왜 이러느냐고 한영에게 따져 물으려는 찰나.
“자고 가…!”
* * *
팬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욕실을 나서던 재환의 고개가 뚝 아래로 떨어졌다. 그대로 쪼그려 앉아 집게손가락으로 발밑에 가지런히 놓인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하나하나 확인할 때마다 눈매가 점점 좁아 들더니, 종국에는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입에서는 흠…, 하고 침음하는 소리가 흘렀다. 숨길 수 없는 난처함에서 기인한 반응이었다.
한영이 준비해 둔 옷을 입은 재환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드레스 룸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쭈뼛쭈뼛한 걸음걸이로 밖에 나오니 다행히 한영은 방에 없었다. 지금 얼굴을 맞닥뜨렸으면 꽤나 부끄러울 뻔했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방 한 면을 전부 차지하다시피 한 창으로 휙 고개가 돌아갔다. 그 위로 비친 제 모습을 보자 다시금 슬그머니 얼굴이 찌푸려졌다.
알록달록. 그 외에는 달리 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일단 위에 걸친 티셔츠부터가 그랬다. 목이 늘어난 건지 원래 이렇게 생긴 건지 흐물흐물 늘어지는 셔츠는 딱 누구의 머리 색과 같은 분홍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바지는 꼭 어디 꽃물에 빠뜨렸다 건진 것처럼 아주 곱디고운 보랏빛을 띠었다. 이쯤 되니 재환은 바지 안에 입은 남색 드로어즈가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영이 입고 있던 옷은 위아래가 모두 청록색인 면 재질의 트레이닝복이었다. 취향 참 확고하네….
상대의 다리 길이를 실감하게 하는 바지를 꾸물꾸물 정강이까지 걷어 올린 재환은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렀다. 남의 침대 위에 앉기는 조금 그런 것 같아 책상 밑에 들어가 있던 의자를 빼 앉았다. 방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한영의 방 분위기는 지금 재환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방이 알록달록 현란한 색채로 가득해 여기 살고 있는 이가 아티스트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방이었다. 각각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을 띤 벽면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 위로는 수십 개의 그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떤 그림은 대충 연필로 쓱쓱 그린 것 같기도, 또 어떤 그림은 붓에 물감을 묻혀 제법 정성 들여 그린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미술에는 조예가 없는 재환이 보기에도 하나같이 그럴듯한 그림이었다. 단, 저렇게 어지럽게 엉겨 있지 않으면 훨씬 보기 좋을 것 같았다.
얽히고 섞인 그림들을 따라 휙휙 움직이던 재환의 시선이 이윽고 방 한편에 다다라 멈추었다. 그곳에는 페인트칠을 해 겉면이 온갖 그림과 글씨로 덮인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기타를 비슷하게 꾸며 놓은 건 봤어도 저렇게 색을 입힌 피아노는 또 처음이었다. 그런데 마냥 지저분해 보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꼭 장난감 피아노 같기도 한 게 묘하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이를 상상하면 더더욱.
하여튼 특이하다니까. 오늘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금방 싱거운 결론을 내린 재환이 크게 하품할 즈음, 그가 입은 티셔츠와 똑같은 머리 색을 한 남자가 타박타박 방으로 들어섰다. 품에는 두툼한 이불 뭉치가 안겨 있었다. 딱 보아도 한겨울용이었다.
“저기, 혹시 더 얇은 이불 있어?”
까탈스럽게 비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재환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꽤나 더위를 타는 편이었고, 고로 감히 저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무릎 꿇어 바닥에 이불을 내려놓은 한영이 왜 그런 걸 묻냐는 양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혹 그대로 이불을 펼쳐 버릴까 싶어 재환은 냉큼 대답했다.
“지금 덥기엔 너무 두껍잖아.”
“괜찮아. 나 추위 많이 타.”
순간 얼뜬 표정을 지은 재환이 ‘뭐?’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이 방 주인은 오늘 밤 자신이 바닥에서 자려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요 하나 깔지 않고. 손님 된 입장에서 절대 그리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 그러지 말고 침대에서 같이 자자.”
“뭐…?”
저리 커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별안간 한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꼭 못 들을 걸 들은 얼굴이었다. 심지어 꿇었던 무릎은 아예 절반쯤 도로 펴져 있었다. 그러니 도리어 말을 꺼낸 재환 쪽이 당황하고 말았다. 멋쩍은 마음을 감추지 못해 아직 물기가 맺힌 뒷목을 긁적이며 나름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꼭 변명하듯이.
“아니, 너가 바닥에서 자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침대도 넓은 것 같고. 난 별 상관없는데. 아, 혹시 잠버릇이 안 좋아? 난 딱히 그런 건 없거든.”
상황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재환은 꼭 손만 잡고 자자며 애인을 꼬시는 음흉한 남자 친구라도 된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놀란 듯 입만 벙긋이 벌리고 있는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그럴수록 나가는 말은 점점 중언부언 맥락이 흐려졌다. 말주변이 부족할지언정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법은 없었는데 말이다.
“근데 나 코는 좀 골지도 모르겠다. 피곤하면 가끔 고는 것 같더라고. 아, 그럼 난 아예 소파 가서 잘까?”
“같이 자!”
이번에는 반대로 재환의 눈이 커다래질 정도로 한영이 큰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바닥에 펼치려던 이불을 꾹꾹 구석진 자리로 밀었다. 다소 멍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던 재환은 ‘아, 응.’ 하고 대답했다. 일단 난데없이 시작된 잠자리 논쟁은 일단락이 된 셈이었다. 해서 베개는 더 없어도 되나 싶어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한영이 벌떡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훌쩍 올라간 눈높이를 따라 재환의 고개도 함께 들어 올려졌다.
“나 씻고 올게. 침대, 누워도 돼.”
‘그래’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한영은 후다닥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탁, 소리를 내며 닫히는 미닫이문을 보며 재환은 푸르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것으로 방 주인을 바닥으로 내모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게 되었으나 어쩔 수 없이 조금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싫다는 놈한테 괜한 억지를 부렸나 싶었다. 침대도 널찍하겠다 저야 같이 자도 아무렇지 않다지만, 한영은 또 어떨지 몰랐다. 섬세한 아티스트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재환에게 있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 코라도 골면 진짜 큰일인데, 생각하며 재환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침대 위 베개는 한 개뿐이었으므로 거실 소파에서 쿠션이라도 하나 가져와야 할 성싶었다. 그새 쑥 아래로 내려간 바짓단을 다시 접어 올리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짧지 않은 복도를 지나쳐 거실로 갔다. 어스름한 스탠드 조명만 켜져 있는 거실은 이곳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을 때와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컷 마시고 먹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테이블 위에 남아 있었다. 잠시간 서서 이를 눈에 담던 재환은 고민 없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십수 개에 이르는 빈 캔은 작게 찌그러뜨려 봉지에 담고, 박스는 납작하게 눌러 한데 모았다. 이 집 어딘가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 두는 곳이 있기는 할 텐데, 뒤져 보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어 일단 정리한 것들을 부엌 한편에 두었다. 조심조심 와인 잔까지 씻어 싱크대 옆에 올려놓으니 뒷정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젖은 손을 탁탁 털며 재환은 다시 거실로 갔다. 제 몸을 움직인 보람이 있게 깔끔해진 모양새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소파 위에서 오늘 밤 베개 삼을 쿠션을 하나 집어 든 뒤 달칵, 스탠드 불을 껐다.
덜렁덜렁 쿠션을 흔들며 2층으로 올라온 재환은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아까는 그냥 지나쳤던 다른 방의 문 앞에서 불현듯 발이 멈추었다. 슬쩍 고개만 돌려 벌어진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던졌다.
넓은 창으로 희끄무레한 달빛이 흘러든 방 한가운데에는 한영의 방에 있는 것보다도 더 커 보이는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단, 그 위에 이불은 없었다. 그제야 재환은 한영이 어디서 그 두꺼운 이불을 가져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이 집에 침대가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재환의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뭐, 중요한 일은 아닌지라 다시 방을 지나쳐 복도를 따라 걸었다.
정신 번쩍 들 만큼 알록달록한 방으로 들어서자 드레스 룸의 미닫이문 너머 자그마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거실 정리에 걸린 시간을 생각했을 때 한영은 꽤 오래 씻는 편인 듯했다. 언제 나오려나, 생각하며 재환은 가져온 쿠션을 끌어안고 털썩 침대 끄트머리에 주저앉았다. 매트리스의 탄력이 어찌나 좋은지 엉덩이가 닿은 침대 표면이 한참이나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그대로 1분, 2분…, 그리고 10분여가 지났다. 여전히 문 두 개를 넘어 작게 들려오는 물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재환은 자신이 꽤나 지루한 상태임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물론 한영의 말대로 이대로 확 누워 버릴 수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주인 없는 침대를 먼저 차지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푹신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면 한영이 나오기도 전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결국 벌떡 일어난 재환은 아까부터 내심 흘긋흘긋 눈길이 갔던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울긋불긋한 염료의 요철이 그대로 느껴지는 뚜껑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그 밑에 가지런히 자리한 흑백의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요란한 색채와 대비되어 흰 건반은 더욱 희게, 검은 건반은 더욱 검게 비쳤다.
뚱-.
아무 생각 없이 오른손 검지로 건반 하나를 꾹 눌렀던 재환은 지레 놀라 흠칫 손을 뗐다. 생각보다 피아노 소리가 너무 컸다. 과장 조금 보태어 제 옆집 사는 고시생이 들었다면 당장에 거품 물고 뛰어왔을 법한 크기였다. 그 상황이 너무도 있음직해 재환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공연히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보다 조심스럽게 같은 자리를 눌러 보았다. 여지없이 한 음절의 맑은 소리가 톡 터져 나왔다.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 고운 음색이 몇 년 동안 진득이 기타만을 쳐 온 청년에게 괜한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예 왼손 검지까지 건반 위로 올린 재환은 서로 딱 붙은 흰 건반 두 개를 연달아 똥똥똥 누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점차 그 간격을 벌려 나갔다. 피아노의 ‘피’ 자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도 칠 수 있는, 젓가락 행진곡이었다.
박자는 죄 어긋나고 몇 번이나 엉뚱한 자리를 눌러 끔찍한 불협화음이 나기도 했다. 한데 신기한 일이지. 재환은 이 엉망진창인 연주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기타를 처음 칠 때는 음 하나도 제대로 내질 못해 애를 먹었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제법 그럴듯한 연주처럼 들렸다. 그새 태군의 넘치는 자신감이 조금쯤 옮은 건지도 몰랐다.
하니 갈수록 흥이 올라 절로 고개가 까딱거리며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어깨도 조금씩 들썩거렸다. 그래서 바디 워시 향까지 더해져 한층 진해진 달콤한 향기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병신같이.
“피아노 치고 있었어?”
예고도 없이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훅 귓가로 불어닥쳤다. 그와 동시에 억, 소리를 터뜨린 재환의 엉덩이가 펄쩍 의자 위로 튀어 올랐다. 그대로 호흡을 삼킨 재환은 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 끝에 방울방울 물기를 매단 분홍 머리가 바로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이 방, 그리고 이 피아노의 주인이었다.
아, 탄성을 흘린 재환은 그대로 푹 고개 숙여 피아노 위로 이마를 박았다. 수 개의 건반이 한꺼번에 눌리며 쾅, 기괴한 음을 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당장은 심장이 벌렁거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한영에게 과하게 질겁하는 꼴을 보여 창피한 탓도 조금 있었다. 원래 이렇게 약심장이 아닌데, 오늘만 해도 이리 놀라는 게 당최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지나치게 기척이 없는 한영이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아니, 사실은 쓸데없이 흥에 취해 버린 자신이 문제였다.
“놀랬어…?”
건반에 이마를 붙인 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종전의 끔찍한 화음이 아르페지오로 울렸다. 그 괴상한 소리를 고스란히 귀에 담으며 재환은 그새 제 옆에 쪼그려 앉은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얼마나 한참을 씻었는지 말간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짤막하게 한숨을 내쉰 재환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 쫌.”
당연히 ‘쫌’ 놀란 게 아니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대답했다. 서툰 거짓말을 눈치챈 듯 한영이 빤히 재환을 들여다보았다. 멋쩍어진 재환은 서둘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렇다고 영 마음에 없던 말은 아니었다.
“이 곡 원래 둘이 치는 거지?”
“응.”
“그럼 같이 쳐 보자.”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당긴 재환은 의자 빈자리를 툭툭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어서 와 앉으라는 눈짓을 보내자 재환을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이던 한영이 한 박자 늦게 ‘아, 응.’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재환은 씻고 나온 한영의 옷이 위아래 모두 형광 주황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제가 입은 옷이 그가 가진 것 중 그나마 무난한 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옆자리에 무게가 얹혔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한영은 곧장 건반 위로 기다란 손가락을 가져갔다. 무심코 이를 내려다보던 재환은 상대를 왜 옆으로 불렀는지도 순간 잊고서 속으로 감탄했다.
딱 나 ‘피아노 쳐요’ 하는 손이었다. 그만큼 가까이서 본 한영의 손은 길기도 길고 곱기도 고왔다. 거기다 새하얗기까지 해 하는 수 없이 남자 손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누구처럼 손가락 마디마디가 툭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여기서 ‘누구’란 당연히 재환 자신을 뜻했다.
“안 쳐?”
“어, 쳐야지.”
왼편에서 울리는 간지러운 목소리에 재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자 손에 넋 놓는 별 경험을 다 해 본다 여기며 관절마다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 두 개를 건반에 얹었다. 역시나 한영의 손 옆에 있으니 좋은 의미로는 다부지고, 나쁜 의미로는 고생깨나 했을 손처럼 보였다. 굳이 비교하니까 그렇다는 얘기지, 기실은 그냥 평범한 남자 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왼손 손가락 끝이 조금 더 뭉툭할 뿐이었다.
재환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 평범한 남자 손에 머물렀던 시선을 슬그머니 거둔 한영이 ‘그럼 시작할게.’ 하며 하나, 둘, 셋을 세었다. 이윽고 서로 생김새가 다른 손가락이 동시에 건반을 눌렀다. 공간을 감싼 알록달록한 색감만큼이나 발랄한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재환과 한영, 두 사람만의 첫 합주였다.
얼마 가지 않아 연주는 재환이 두 손 번쩍 들어 올리는 것으로 중지되었다. 거의 적장에게 항복을 외치는 듯한 자세였다.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야, 나 더는 못 하겠다.”
입에서 나온 말은 더 항복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그럭저럭 따라갈 만했던 한영의 반주가 갈수록 점점 빨라져 나중에 재환은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템포로 따지면 거의 처음의 두 배는 올라가지 않았나 싶었다. 재환이 갑자기 피아노에서 손을 뗀 이유를 알지 못하는 한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두 손은 여전히 쾅, 건반을 내리친 채 그대로였다. 재환의 시선이 흘끔 그곳으로 향했다.
“혹시 화났어?”
“어…?”
대뜸 재환이 던진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한영의 얼굴이 한층 벙벙해졌다. 옆에 앉으라 그래서 앉았고, 같이 피아노 치자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왜 자신에게 화났냐 묻는 건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때, 별안간 재환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 노래 싫어하지?”
이어지는 물음은 더욱 수수께끼 같았다. 재환이 저렇게 웃는 이유도 짐작 가는 바가 없어 한영은 그저 눈만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그사이 몇 번 더 쿡쿡 소리 내어 웃은 재환이 도로 입을 뗐다.
“아니, 너 꼭 반주하는 게 그래 보여서.”
“내가…?”
“어. 엄청 화난 것 같던데? 젓가락이랑 무슨 원수라도 졌는 줄 알았네.”
이에 ‘아….’ 하는 소리를 흘린 한영의 눈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급히 허벅지 위로 내린 두 손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한국에 온 후 한참이나 잊고 지냈던 목소리가 불현듯 웅웅 귓가를 맴돌았다.
한영아. 넌 왜 아직도 젓가락질 하나 제대로 하질 못하니. 형 하는 것 좀 봐.
“그러지 말고 다시 쳐 보자. 나 이거 좀 재밌는 것 같아.”
한심함을 가득 품은 목소리 사이로 딱 듣기 좋은 울림을 가진 음성이 울렁울렁 파고들었다. 잠시간의 상념에서 깨어난 한영은 고개를 돌려 바로 제 옆에 앉아 있는 재환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한 웃음기가 가득 번져 있었다. 한영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화내지 말고. 어?”
‘화낸 거 아냐….’ 하고 어물거리며 한영은 두 손을 건반 위로 올렸다. 뒤따라 재환 또한 힘이 바짝 들어간 손가락을 건반에 얹었다. 재환은 꼭 대단한 공연을 앞둔 것처럼 후-, 긴 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이 지나치게 비장해 보여, 한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며시 위로 말아 올렸다.
하나, 둘, 셋.
다시 한번 두 사람의 합주가 시작되었다. 단, 이번에 연주된 젓가락 행진곡은 종전처럼 빨라지지도, 중간에 뚝 멈추지도 않았다. 화나지 않은, 즐거운 젓가락 행진곡이었다.
“하아-.”
들뜬 기색이 서린 한숨과 함께 재환은 털썩 침대 위로 누웠다. 그 반동으로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며 재환의 몸도 덩달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마저도 신이 나서 입가에는 자꾸 벙글벙글 웃음이 피었다. 침대 끝자락에 한쪽 다리를 접어 앉은 한영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 피아노 진짜 잘 치긴 잘 친다.”
뺨과 베개 사이에 손을 넣고 한영을 향해 모로 누운 재환은 진심 어린 감탄을 뱉었다. 젓가락 행진곡에 반주를 넣어 줄 때까지야 그러려니 했지만, 제 부탁으로 한영이 그 곡을 혼자 연주할 때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더랬다. 젓가락 행진곡이 그렇게 엄청난 곡인 줄 정말이지 처음 알았다. 고막으로 쏟아지는 멜로디에, 건반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손가락에 넋이 나갈 정도였다. 그 후에 한영이 연주한 〈I See You〉의 피아노 버전은 또 어떻고. 옆에 앰프만 있었더라면 재환도 당장 그 자리에서 기타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그냥… 보통이야.”
“뭘 그런 걸로 겸손 떠냐? 나도 어릴 때 피아노나 배울걸.”
어린 시절 재환의 집은 꽤나 잘사는 편이었고, 따라서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거 모두 다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태권도 4품을 땄고, 모자란 실력으로 바둑 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며, 잠깐이지만 미술 학원에 기웃거린 적도 있다. 그런데 딱 피아노만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 피아노를 쳤다면 지금쯤 손이 더 길쭉길쭉했을까. 재환은 침대에 푹 잠겨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어?”
대답과 동시에 쭉 뻗어 나간 손이 침대를 딛고 있던 하얀 팔목을 휙 낚아챘다. 순간 한영의 상체가 재환 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뒤로 빼려는데, 별안간 손바닥에서 오른 뜨끈뜨끈한 열이 한영을 멈칫하게 했다. 숨김없이 당황한 한영은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어느새 맞닿아 있는 자신의 손과 재환의 손을 바라보았다.
“음….”
맞붙은 두 개의 손을 코앞으로 가져간 재환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고서 살짝 길이에 차이가 있는 서로의 손가락을 여러 각도로 살폈다. 하도 집중한 나머지 제게 손을 내어 준 상대가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역시 네가 더 기네.”
무심히 한마디 툭 던진 재환은 그제야 한영의 손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순식간에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은 것치고는 힘 빠지도록 싱거운 결론이었다. 슬그머니 손을 허리 뒤로 감춘 한영은 다소 허망한 눈빛으로 재환을 쳐다보았다.
그새 다시 철퍼덕 침대 위에 누운 재환은 천장을 향해 쫙 손을 펼쳐 보았다. 손가락 길이가 딱 한영만큼만 됐어도 참 좋았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짧은 편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손가락이 길면 또 긴 대로 가능한 기타 연주가 있으니 괜스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조금쯤 사소한 욕심이었다.
“…연습이나 열심히 하자.”
“응?”
혼잣말처럼 다짐을 중얼거리던 재환은 한영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다시 휙 한영에게로 몸을 틀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있던 한영의 어깨가 일순 작게 움칠했다.
“근데 너 왜 안 누워? 안 잘 거야?”
“자야지. 잘 거야.”
재촉인지 뭔지 영 가늠하기 어려운 재환의 말에 급히 답한 한영은 방문 옆으로 가 불을 끄고 왔다. 재환은 한영이 누울 수 있도록 보다 침대 끝 쪽으로 몸을 붙였다. 사실 침대는 충분히 넓었으므로 구태여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적어도 침대 주인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어쨌거나 이대로 더 어물쩍거릴 수는 없기에, 한영은 바닥에 슬리퍼를 벗어 두고 재환 옆에 몸을 누였다.
* * *
구석구석 푸르스름한 달빛이 새겨진 방 안은 인공적인 빛 하나 없음에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그것이 묘하게 재환의 눈을 말똥말똥 뜨여 있게 했다. 오늘 하루를 떠올리면 금방 깊은 잠에 빠질 법도 한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긴 하루였다. 알바 면접에, 합주에, 환영회에. 심지어 야밤에는 난데없는 피아노 연주 삼매경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또 그게 생각 이상으로 너무 즐거워서, 재환은 오히려 합주나 환영회 때보다도 더욱 들뜨고 말았다. 꼭 어린애처럼. 그런 제 모습을 되새기자 절로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소리가 생각보다 조금 컸던 모양이다. 곁에서 부스럭부스럭 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예의 간질간질한 목소리를 타고 짧은 질문이 건너왔다.
“안 자?”
재환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었던 듯 한영의 목소리에서는 그다지 잠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응, 아직. 대답하며 재환은 한영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예외 없이 주위가 어두우나 밝으나 또렷한 갈색빛을 띤 눈동자가 재환을 보고 있었다.
“왜 안 자?”
한영은 참 궁금한 것도 많았다. 낮에 그에게서 화장실에 왜 가느냐는 질문을 받았었던 걸 떠올려 낸 재환은 살짝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해서 한번 한영이 던진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줘 보았다. 재환 나름의 장난이었다.
“너는 왜 안 자?”
다만 누군가에게 장난치는 데 영 익숙하지 않은 재환의 말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 심드렁하고, 적당히 무뚝뚝했다. 표정 또한 한 치의 변화가 없었다. 질문 받은 사람을 딱 헷갈리게 하기 쉬운 태도였다. 하니 한영은 여지없이 혼란에 빠졌다.
소리 죽여 꿀꺽 침을 삼킨 한영은 영 속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가 모자를 쓰지 않고 온 오늘에서야 제대로 눈에 담은 얼굴이기도 했다. 그 말쑥한 얼굴을 주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더위를 타는 편도 아닌데 손바닥에는 땀이 배어들고, 덩달아 심장도 빨리 뛰었다. 삽시에 건조해진 입술을 한 번 혀로 축인 한영은 애써 태연한 체 재환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너는… 왜 안 자는데.”
“그러는 너는?”
이번에도 재환은 냉큼 대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물론 한영이 또 물어 오면 또 같이 되물어 줄 심산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재환은 장난을 치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이 한영의 입술로 향했다. 저 붉은 입술 사이에서 재차 ‘그럼 넌?’ 하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이는 상대가 모른 척하려야 그럴 수가 없는 시선이었다.
한 사람은 답을 기다리고, 한 사람은 견디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그사이 이불 밑에서 움찔거리며 조금씩 움직이던 하얀 손이 어느덧 재환의 손에 닿기 직전이었다. 새끼손가락만 쫙 펼쳐도 두 사람의 손끝이 스칠 만한 거리였다. 그 하나를 하지 못해 몇 번이고 꼴깍꼴깍 한영의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한계가 성큼 눈앞까지 다가왔다. 죽을힘을 다해 혼란을 감춘 눈동자가 재빠르게 반듯한 이마와, 새카만 눈동자와, 곧은 콧대와, 그리고 단정한 입매를 훑었다. 그 후에는 또 반대로 훑어 올라갔다.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마저도 힘에 부쳐 올 때 즈음, 결국 스르르 한영의 입이 열렸다.
“난, 너….”
“야, 비 온다!”
별안간 아이처럼 외친 재환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살그머니 상대의 손을 잡아 보려던 손이 한순간 확 움츠러들었다. 재환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한영도 얼굴을 돌렸다. 토독토독 작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나던 빗방울의 개수는 점점 늘어나 주룩주룩 매끄러운 유리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멍하니 이를 바라보는 한영의 입술 새에서 미처 끝맺지 못한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빗소리에 잠겨 그 누구의 귓가에도 닿을 수 없는 한마디였다.
난 너 때문에 잠이 안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