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12/29)

3장

* * *

달이 바뀌어 이제는 더운 여름이라 부르지 않아도 될 계절이 되었다. 그렇다고 선선한 바람까지 함께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귀청을 때리던 매미 소리가 사그라지고, 숨 막히는 지면의 열기가 다소 식은 것만으로 재환은 그럭저럭 살 것 같았다. 자다가 속으로 ‘존나 덥네’를 투덜거리며 깨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딘가. 가끔 다른 이유로 잠을 설치는 경우가 있기는 했는데, 그건 제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사이 재환은 두어 번 더 믹싱을 배우러 현철을 찾았고, 그에게 배운 대로 찬찬히 밴드의 노래를 작업해 나갔다. 그 탓에 일정보다 싱글 발매 시기가 조금 늦춰졌으나, 고맙게도 멤버 누구 하나 재환을 재촉하지 않았다. 기실 이렇게 된 데에는 한영의 영향이 크므로 다른 멤버들로서는 재환을 재우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이처럼 나름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재환은 또 한 번 한영에게 ‘아니’라고 말 못 할 순간을 맞닥뜨렸다. 집에 있는 장비가 영 탐탁지 않아 ‘빨리 돈 모아서 바꾸든지 해야지.’라고 짧게 푸념했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 한영이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타개책을 재환에게 제시해 왔다.

우리 집 와서 해.

사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적절한 대책도 없었다. 한영의 집에 있는 장비는 두말할 것 없이 여느 스튜디오 못지않았고, 옆집 신경 쓰느라 스피커 볼륨을 높일 때마다 마음 졸일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진작 그곳에서 작업했어야 하는 거였는지도 몰랐다. 다 좋았다. 다 좋은데….

“…안 심심해?”

재환이 흘끔 눈을 돌리며 묻자 거의 딱 붙다시피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영이 고민도 없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부들부들해 보이는 분홍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졌다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재환은 앞에 놓인 노트북과 연결된 커다란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지금처럼 한영은 재환이 믹싱하는 내도록 좀처럼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본인의 방이니 딴 데 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만, 솔직한 심정으로 작업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 분, 혹은 몇 초 간격으로 옆얼굴을 콕콕 찌르는 시선이 느껴져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해 줘라, 저렇게 해 줘라 훈수라도 두면 그러려니 하겠거늘, 한영에게는 딱히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니 도리어 재환이 먼저 그에게 자꾸 말을 걸게 되었다.

“여기 딱 한 마디만 일부러 보컬을 먹먹하게 했어. 후렴 들어갈 때 확 터지는 느낌 나게 하려고. 어때?”

“좋아.”

“진짜? 안 이상해?”

“응, 좋아.”

배를 누르면 ‘I love you’가 나오는 봉제 인형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한영의 반응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술을 비죽였다. 무엇을 물어도 한영에게서는 방금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다 좋고, 다 괜찮단다. 이쯤 되니 재환은 ‘진짜 내 믹싱이 좋긴 한 건가’ 하는 조금 옹졸한 의심이 들었다. 그 마음이 끝내 툭 입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예, 예. 그렇겠죠.”

그래 놓고 지레 놀라 합,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를 이리 비꼬다니, 도통 저답지 않았다. 좀스럽고 못난 행동이었다. 겸연쩍은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던 재환은 종전 한영에게 들려줬던 구간을 얼른 다시 틀었다. 내처 볼륨도 잔뜩 올렸다. 스피커에서 시원스레 터지는 소리에 정신이 다 번쩍 들 정도였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냅다 키보드의 스페이스 키를 누르고서 휙 몸을 옆으로 틀었다.

“유한영.”

‘응?’ 하며 시선을 맞춰 오는 갈색빛 눈동자가 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새하얀 얼굴 위로 그려진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만큼은 저 순수한 체하는 낯에 껌뻑 넘어가지 않으리라.

“진짜 좋은 거 맞아?”

“뭐가?”

“아니, 옆에서 들으면서 이상한 부분 있을 거 아냐.”

한영은 커다란 눈만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무슨 소리인지 영 못 알아듣겠다는 태도였다. 이를 지켜보는 재환의 얼굴은 반대로 구깃구깃해졌다. 이러다 결국, 또 저만 이상한 놈이 될 것 같았다. 혼자 발끈하고, 혼자 성내고. 유한영을 상대로 씩씩거려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이것으로써 한 오십 번째쯤 깨닫는 순간이었다.

“됐다, 됐어.”

팩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 재환은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습관처럼 커서를 트랙 앞머리로 되돌려 처음부터 곡을 재생시켰다. 잠시 후, 막 간주가 끝난 노래가 2절 벌스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재환아.”

“어?”

“여기는 더 비 오는 것처럼 해 줄 수 있어?”

퍼뜩 재생을 멈춘 재환은 다시금 고개를 틀어 한영을 보았다. 모니터에 말간 시선을 고정한 한영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그렇다고 조금 전과 비교해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환의 눈에는 그리 비쳤다.

“더 비 오는 것처럼?”

‘응.’ 하고 고개를 끄떡인 한영이 별안간 마우스를 쥐고 있던 재환의 손 위로 손을 포갰다. 그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휙휙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커서를 트랙 한곳으로 옮긴 후 프로그램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뒤이어 스피커에서 나오는 부분은 금방 들었던 간주 구간이었다.

“응. 여기에 이 땡땡, 하는 소리가 더 잘 들렸으면 좋겠어. 이게 꼭 비 떨어지는 소리 같아.”

“아아…, 라이드 심벌.”

한영이 요구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한 재환은 고민에 잠겼다. 지금도 심벌 소리 자체는 작지 않았으므로 무조건 심벌이 녹음된 오버헤드 트랙의 볼륨을 높이는 게 능사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어찌한담….

재환은 이것저것 시퀀서 프로그램의 플러그인을 열어 소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생각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흠…, 하며 슬쩍 눈썹을 구겼고, 반대의 경우에는 씩 입매를 휘며 눈을 반짝였다. 지금까지 그랬듯 한영은 그 옆자리를 조용히 지켰다. 간혹 고개를 밑으로 기울여 재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기도 했으나, 작업에 잔뜩 집중한 재환은 딱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들어 봐!’라는 말과 함께 재환이 톡, 노트북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떨어뜨린 한영은 벌어진 다리 사이를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뺐다. 살며시 눈을 감고서 스피커에서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건반, 기타, 베이스가 내는 모든 음이 촉촉하게 어우러진 가운데, 재환이 라이드 심벌이라고 한 소리가 지면에 부딪히는 빗방울처럼 맑게 퍼졌다. 이윽고 재환이 자판을 눌러 노래를 멈추고 나서야 얇은 눈꺼풀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어때?”

재환은 내심 긴장되는 기분을 감추며 넌지시 한영에게 물었다. 한영이 믹싱 도중 무언가를 먼저 요구한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이번에야말로 ‘좋아’라는 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그냥 ‘좋아’ 말고, ‘진짜 좋아’.

“진짜 좋아.”

아아. 그토록 기다렸던 한마디에 재환의 입이 활짝 옆으로 벌어졌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뿌듯했다. 뿌듯함이 넘치다 못해 재환은 한영이 묻지 않은 것까지 신나서 떠들고 말았다. 꼭 칭찬받아 들뜬 어린애처럼.

“볼륨만 높이면 오히려 드럼 밸런스 무너질까 봐, 고음만 조금 더 강조하고 그 부분 리버브 종류를 아예 바꿨어. 컴프레서로 소리 눌러서 좀 이어지게 만들고. 이렇게 하니까 확실히 더 비 오는 느낌이 나네.”

“재환아.”

‘응?’ 하며 잔잔한 부름이 들려 온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순간 입술에 닿는 몰캉한 감각이 재환의 두 눈을 거대해지게 만들었다. 채 막거나 피할 틈이 없었다. 오로지 부드러움만을 전하던 입술은 여지없이 쪽, 새침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진짜로 좋아, 재환아.”

어, 응…. 얼뜨게 대꾸하며 서둘러 마우스와 자판으로 손을 가져갔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공연히 이퀄라이저를 켰다 끄거나, 스크롤을 죽죽 아래로 내려 의미 없이 트랙들을 건드렸다. 한영의 집에서 믹싱하며 재환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불시에 다가오는 입맞춤에서 번번이 도망칠 수 없었다. 이번으로 몇 번째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잠깐만 스튜디오에 들러 그간 작업한 음원을 간단히 현철에게 점검받았다. 다음에 뵙겠다 인사하고 스튜디오를 나선 후, 집으로 가기 위해 터벅터벅 밤중의 거리를 걸었다. 이상하게 지하철 탈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 역을 지나쳐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5분쯤 더 걸어 정류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재환은 저만치 앞에서 막 떠나가는 버스를 발견했다. 조금 더 서두를걸, 하는 마음에 탄식하는 찰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재환의 입에서 짧은 안도의 숨이 샜다.

“어, 지우야.”

- 지금 어디? 나 녹음실 근천데.

“나 버스 정류장.”

- 아직 버스 안 탔지? 쏘주 한잔 어때?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근처에 있었던 듯 지우가 금방 정류장 쪽으로 왔다. 밖에서 따로 만나니 유독 늘씬해 보이는 자태에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언제나처럼 씩 웃은 지우가 재환에게 꽤 반가운 제안을 해 왔다.

“막창 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근처에 잘하는 집이 있다기에 재환은 냉큼 지우를 따라나섰다. 막창을 참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먹게 되는 음식은 아닌지라 지금 같은 기회가 재환에게는 상당히 귀했다. 최근 누구랑 편히 만나 술 한잔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지우가 먼저 연락을 준 건 썩 고마운 일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손님들로 북적북적한 가게에 들어서서 자리를 잡자마자 둥그런 깡통 테이블 위로 재빨리 밑반찬이 차려졌다. ‘주문 바로 하시겠어요?’ 하고 묻는 점원에게 지우가 소금구이 2인분과 소주 두 병을 시켰다.

곧바로 소주가 나왔다. 자잘하게 물기가 맺힌 병을 얼른 집은 지우가 가볍게 뚜껑을 따 재환의 잔에 꼴꼴 술을 채워 주었다. 병을 건네받은 재환 역시 지우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짠.’ 하며 잔 끄트머리를 부딪친 두 사람은 찰랑찰랑 담긴 소주를 훅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약속한 듯 잔에 술을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 소주 오랜만이다.”

“그래? 근데 재환이 너도 술 은근 잘 마시지?”

‘그냥, 적당히…?’라고 대답하며 재환은 드디어 나온 막창 2인분을 눈으로 좇았다. 초벌 하여 나온 막창은 이미 제법 먹음직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녁을 거른 탓에 입에 군침이 돌았다. 치직, 철판 위에 돼지기름 지져지는 소리가 꽤나 경쾌했다.

슬슬 노릇노릇해지는 막창을 부지런히 뒤집으며 재환과 지우는 으레 그랬듯 최근의 이러저러한 밴드 소식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곧 미국 밴드 누구가 내한을 할 거고, 영국 밴드 누구가 새 앨범을 냈으며, 우리나라 밴드 누구가 해체를 했고…. 그사이 주거니 받거니 서로 잔을 비웠더니 첫 번째 소주병이 금세 밑바닥을 보였다.

“다 익은 것 같지?”

“응. 먹자.”

간만에 맛보는 막창은 실로 입에서 살살 녹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기보다는 쫄깃쫄깃 씹힌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어쨌거나 재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게다가 술은 또 어찌나 단지. 오늘 지우가 만나자고 하지 않았으면 퍽 아쉬웠을 뻔했다.

“진짜 막창 좋아하나 보네. 재환이 너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본다.”

“나 원래 이런 종류 엄청 좋아해. 막창, 곱창, 닭발 같은 거.”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생긴 게 뭐 어때서.’ 하며 재환은 지우가 새로 따라 준 소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뒤이어 이번에는 제가 두 사람의 잔에 차례로 소주를 채우다가 손이 살짝 삐끗하고 말았다. 지우 때문이었다.

“뭐 어떻긴. 겁나 잘생겼다는 얘기지.”

테이블 위로 찔끔 넘친 소주를 쿡쿡 휴지로 찍으며 재환은 지우를 한 번 흘겨 주었다. 절로 ‘지는’이라는 말이 목젖을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시기나 하라는 의미로 지우의 잔에 탁, 잔을 부딪쳤다. 재환이 그러거나 말거나 꿀꺽꿀꺽 소주를 삼킨 지우는 비슷한 이야기를 조금쯤 더 이었다.

“왜, 한영이도 재환이 너보고 잘생겼다 그랬었잖아. 자기보다 더.”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대비도 없이 튀어나온 이름이 재환의 미간을 움찔 좁아 들게 만들었다. 지우 입장에서야 그냥 다른 멤버를 농담 삼아 언급한 정도겠지만, 이상하게 재환은 저 이름을 듣고 태연히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숫제, 모른 체해 버렸다.

“그랬나. 기억도 안 나.”

“그래?”

젓가락으로 막창을 집으며 지우가 쑥 눈썹을 들췄다가 내렸다. 진짜로 그런 건지, 재환 본인이 지레 그렇게 느낀 건지 이쪽을 보는 표정이 영 묘했다. 재환은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근데 현철 기사님, 진짜 빵 잘 드시더라.”

결과적으로 나름 괜찮은 방책이었다. 자리에도 없는 현철의 이야기로 술자리 분위기가 이내 물씬 달아올랐다. 현철의 빵 예찬이 끝나지 않아 첫날 진짜 식겁했다는 얘기를 재환이 들려줬을 때, 지우는 아예 손뼉을 치고 웃었다. 지우가 그 아저씨 의외로 말 엄청 많지 않냐기에 재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둘 다 내린 결론은 엇비슷했다. 어쨌거나, 현철이 정말 대단한 엔지니어라는 것이다.

“맞다. 기사님이랑 너희 부모님이랑 잘 아는 사이셔?”

“부모님이라기보단, 아빠랑 친구 사이. 그래서 나도 옛날부터 봤고.”

“아아. 너 어릴 때부터 똑똑했다 그러시더라.”

혹 아버지도 음악 하시냐고, 지우에게 물어볼까 하다 재환은 그냥 관두었다. 대신 지우가 일찌감치 시켜 두었던 새 소주병을 땄다. 꼴꼴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지우는 예외 없이 한 번에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조금 예상치 못한 질문을 건네 왔다.

“아저씨한테 또 내 얘기 들은 거 없어?”

재환은 설핏 당황했다. 물론 현철에게 더 들은 얘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고대로 당사자에게 전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 아니다,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어물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대뜸 긴 팔을 쭉 뻗은 지우가 재환의 어깨를 툭 쳤다.

“표정 봐라. 재환이 너 진짜 거짓말은 못 하겠다.”

“어…?”

“그 아저씨 말 많은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그냥 아저씨가 어디까지 말했나 궁금해서 그래.”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지우의 표정은 정말로 그래 보였다. 하니 더 이상 시치미 떼기가 뭐했다.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 팔뚝을 매만지던 재환은 결국 현철에게서 들은 바를 솔직히 지우에게 털어놓았다. ‘흠….’ 하며 재환의 말을 듣던 지우의 얼굴이 이윽고 조금 심드렁하게 변했다.

“뭐야. 난 또.”

“이게 다야. 너희 어머니가 밴드 싫어하신다는 거.”

픽, 웃은 지우가 재환 앞으로 쓱 잔을 내밀었다. 덩달아 잔을 들어 부딪치면서도, 재환은 지우의 기분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하여 잔 끄트머리에 입술을 붙여 살살 소주를 넘기는 와중 저도 모르게 슬쩍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때, 넘어가던 술이 훅 숨구멍으로 들이칠 만큼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아빠, 용광로 기타리스트였어.”

쿨럭, 기침을 토한 재환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우를 보았다. 입 주변에 묻은 술을 미처 닦지도 못했다. 슬슬 오를 듯 말 듯 했던 술기운이 대번에 저 멀리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가게 여기저기서 왁자하게 터지는 소음도 지금만큼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지우의 얘기로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근데…. 부모한테 이런 말 쓰면 안 되지만, 사람이 좀 개차반이라. 나 어릴 때 엄마랑 이혼했거든.”

말을 멈춘 지우는 손을 번쩍 들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점원에게 ‘여기 소금구이 2인분 더 주세요!’를 외쳤다. 그러고서 얼른 ‘소주 두 병도 같이요!’를 덧붙였다. 씩씩하게 주문한 후 이야기를 마저 하는 지우의 얼굴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미미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음악 하는 인간이라면 아주 치를 떤다. 고등학교 때는 내 베이스도 여러 대 부쉈어. 진짜 이렇게.”

스테인리스 접시에 담겨 있던 오이를 눈앞으로 가져간 지우는 손가락 길이 정도의 조각을 똑, 반절로 부러뜨렸다. 이를 본 재환의 눈머리가 푹 구겨졌다. 저도 한 번 기타를 부러뜨린 적이 있어서 아는데, 사람이 웬만큼 꼭지가 돌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그걸 몇 번이나 목도했을 지우에게 절로 안쓰러운 마음을 품게 됐다.

“속상했겠네….”

“별로. 그럴 때마다 더 비싼 걸로 샀지. 어디까지 부시나 한번 보자, 하고.”

지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한순간 까닭 모를 섬찟함을 느낀 재환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잠깐이나마, 지우의 눈빛에서 광기 비슷한 것을 본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라고 생각할 즈음 어느새 반으로 자른 오이를 우적우적 씹은 지우가 나머지 절반을 재환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하기에 냉큼 고개를 저었다. 어깨를 으쓱한 지우는 오이를 쏙 입 안으로 넣었다. 마침 점원이 두고 간 소주를 새로 따며 본인의 얘기를 계속했다.

“어쨌든 피는 못 속인다고, 엄마가 아무리 거품 물어도 이걸 또 계속하게 되네.”

“밴드?”

“응.”

제 잔에 술을 따라 주는 지우에게 재환은 구태여 왜, 라고 묻지 않았다. 지우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돈 하나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어쩌면 시간만 잡아먹는 일일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 밴드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피차 다 거기서 거기였다. 재밌으니까. 즐거우니까. 음악이, 연주가 너무 좋으니까…. 인제 보니 참 별거 없다.

두 사람은 피식, 실없이 웃으며 넘치기 직전까지 술이 담긴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넘실거리던 맑은 액이 잔 밖으로 넘쳐흘렀으나, 고작 그런 걸로 짜증 내거나 까탈 부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크, 하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훔친 재환은 테이블에 꺼내 놓았던 담뱃갑을 집어 살살 흔들어 보였다. 그 뜻을 능히 알아들은 지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 밖으로 나서는 훤칠한 청년 둘의 뒷모습을 일부 가게 손님들이 흘끔흘끔 곁눈질로 보았다.

가게 앞, 흡연 구역 삼아 테이블과 재떨이가 놓인 곳에서 재환은 지우와 함께 담배를 피웠다. 간간이 연기를 뿜으며 자신의 얘기 또한 담담히 지우에게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실수로 집안이 폭삭 망하고, 가정이 하루아침 콩가루가 되어 버리고, 그 와중에도 대학 다니며 악착같이 밴드를 하고….

그랬더니 지우는 누구 인생이 더 파란만장했냐 겨루자는 겨냐며 웃었다. 물론 이데아에서 탈퇴했던 사정을 자세히 들려줬을 때는 ‘씨발놈’이라고 형찬에 대한 욕을 아끼지 않았다. 하긴, 지금 생각해도 녹음한 트랙을 바꿔치기하는 건 죄질이 나빠도 상당히 나빴다. 제 얼굴에 먹칠하는 짓 같아 남 앞에서는 당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는데, 지우가 이리 격하게 분노해 주니 재환은 속이 꽤나 후련했다. 그 탓인지 담배를 다 피우고 자리에 돌아가서도 소주가 끝도 없이 넘어갔다.

“근데, 형찬인지 뭔지 그 새끼 오디션 있던 날 보니까 기타도 존나 못 치더만. 입만 살아가지고.”

“그것도 많이 는 거야.”

‘미친.’ 하며 지우는 조소를 터뜨렸다. 심지어 ‘다 장비발 같던데.’라고 재환이 속으로만 은근히 생각했던 바를 시원히 내뱉었다. 이다지도 거침없는 지우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는 한편, 재환도 그를 따라 한층 분위기를 타게 되었다. 어느새 몇 병이나 비워 버린 소주의 영향이 없다고는 못 하겠다.

“그때는 진짜 빡쳐서 뒤지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까 걔랑 키보디스트 여자애랑 사귀고 있었던 거고?”

“그렇다더라고. 나만 몰랐지.”

예외 없이 지우는 ‘치사한 새끼들이네!’라고 성내며 막장 소스에 푹 찍은 막창을 입에 넣었다. 재환도 익을 만치 익은 막창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겉이 바삭해진 막창은 초반 먹었을 때보다 더 맛있었다. 분위기에, 그리고 술에 들뜬 기분이 그렇게 느끼게끔 만드는 건지도 몰랐다. 아무렴 어때. 내가 진짜 간만에 실컷 먹고 마시겠다는데.

“근데 넌 또 그 여자애한테 고백받고, 키스도 하고?”

“뭐…, 응.”

“서재환 은근 박력 있네?”

커다란 손이 재환의 팔뚝을 툭 때렸다. 이번에는 조금 힘이 실린 감이 없잖아 있어 재환은 어깨를 움칠했다. 사실 먼저 키스한 건 상대방 쪽이었지만, 거기까지 밝힐 필요는 없을 듯해 더 자세한 설명은 그만두었다. 구태여 상기해서 좋은 기억도 아니었고. 다만 그때와 같은 실수를 이번 밴드에서도 누군가와 반복하고 말았다는 게 문제였다. 속도 없이, 한심하게. 재환은 문득 입이 썼다.

씁쓸한 입 안을 소주로 달래려던 재환은 지나치게 무게가 가뿐한 병을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텅 빈 병 안에서는 함께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 흘깃 눈을 돌리자 점원이 딱히 치워 주지 않은 초록 병들이 테이블 귀퉁이에 가지런하게도 늘어서 있었다. 저게 모두 몇 병이야. 한 병, 두 병, 세 병….

여섯 병까지 세고 속으로 ‘미쳤네’를 중얼거릴 즈음, 지우가 점원을 향해 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의 빈 공간 위로 시원한 초록빛을 내뿜는 새 소주병 두 개가 안착했다. 금방 뚜껑이 열린 소주병이 두 개의 잔 위로 차례로 기울었다.

짠, 잔이 부딪혔다. 꼴깍꼴깍 술이 넘어가고, 잔이 비면 다시 술이 따라졌다. 그러다 시답잖은 얘기로 픽픽 웃음이 터지고, 몇 개째인지 모를 빈 병이 놓였다. 하나둘 손님이 떠나간 가게 안에 두 사람의 목소리만 남을 때까지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가게의 영업 종료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재환과 지우는 밖으로 나섰다. 그래도 가을이라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새벽 공기가 그럭저럭 서늘했다. 단지 어둑한 골목을 따라 걸으며 실실 웃는 두 청년의 얼굴만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뿐이었다.

“미쳤다. 곧 첫차네.”

“걍 택시 타지.”

“돈 없어, 새끼야.”

이번에는 재환이 옆에서 걷는 지우의 팔을 손등으로 툭 쳤다.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지우가 ‘아야.’ 하며 엄살을 부렸다. 문득 생각에 빠진 재환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서 냅다 지우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난데없이 남의 팔을 조물조물 주무르는 재환을 쳐다보며 지우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뭐 해?”

대답을 않은 재환은 내처 얇은 면티에 감싸인 지우의 가슴 위로 척 손바닥을 얹었다. 무언가 확인하듯 꾹꾹 가슴팍을 눌러 보다가 별안간 쳇, 하고 혀를 찼다. 도리 없이 지우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서재환?”

“몸 좋다, 너.”

칭찬이라기에 다소 볼멘소리처럼 느껴지는 말을 툭 던진 재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물렸다. 짧게 하품하며 어슬렁어슬렁 길옆에 둘러진 담벼락 앞으로 가 섰다.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어느새 다가온 지우가 저도 쓱 담배를 내밀었다. 또 이유 없이 쯧, 하고 혀를 찬 재환은 지우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듬성듬성 가로등 불빛이 켜진 새벽 골목.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탁한 연기가 너울너울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현지우 너, 뭐 운동 했었냐?”

“나? 그냥 어릴 때 수영 좀 하고, 검도도 잠깐 했었고. 대학에서 가끔 농구 하고.”

‘할 건 다 했네.’ 하며 재환은 후, 연기를 내뱉었다. 어째 손 아래 만져지는 근육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재환은 괜히 한 번 지우의 몸에 닿았던 손을 접었다 펴 보았다. 그러던 중, 불시에 배 쪽으로 훅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재환은 펄쩍 뛰다 하마터면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야!”

종전의 복수라도 하듯 지우는 느물느물 웃으며 재환의 배를 마구 더듬었다. 자연히 재환은 복부로 팍 힘을 주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재가 튈까 싶어 담배를 높이 들고 반대편 손으로 다급히 지우의 어깨를 탁탁 때렸다. 그제야 재환의 배에서 손을 떨어뜨린 지우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너도 꽤 근육 있는데?”

나름 집에서 짬 날 때마다 윗몸 일으키기나 팔 굽혀 펴기 등을 하기는 했으나, 그래 봤자 맨손체조 수준이었다. 운동을 제법 한 듯한 지우에게서 저런 말을 들으니 재환은 공연히 뻘쭘한 마음이 들었다. 하여 지우가 만졌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며 ‘근육은 무슨.’ 하고 두덜거렸다. 그때, 또 예상치 못한 이름이 부연 연기와 함께 지우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맞다. 유한영 걔, 몸 되게 좋아.”

“유한영?”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재환은 얼른 입술 새에 필터를 물었다. 연기를 뿜으며 한발 늦게나마 짐짓 관심 없는 체 ‘진짜?’라고 최대한 덤덤히 덧붙였다. 아니, 척이 아니라 진짜 관심 없는 게 맞았다. 뭐 하러 굳이 남의 몸에 흥미를 두겠는가. 그런 것 말고도 재환은 요새 관심 가질 일투성이였다. 보컬 잘 믹싱하는 법, 드럼 잘 믹싱하는 법, 기타 잘 믹싱하는 법…. 적잖이 술기운에 절여진 머리를 굴려 보자 당장 생각나는 건 이 정도였다. 여하간, 재환은 한영의 몸에 관심일랑 없었다.

“나중에 벗겨 봐. 겉으로 보기랑 달라.”

“미쳤냐. 내가 왜.”

“싫음 말고.”

저런 실없는 소리를 떠드는 걸 보니 지우도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었다. 하긴, 둘이서 비운 소주가 자그마치 여덟 병이었다. 내일 카페 출근인데 망했다. 잠깐, 내일이 아니지. 벌써 오늘이지. 진짜 망했네…. 따위의 생각으로 푹 한숨을 내쉬던 재환의 어깨 위로 대뜸 척 하니 길쭉한 팔이 얹혔다.

“재환아.”

“왜.”

“난 딱히 밴드 안에서 연애하는 거 반대 안 한다.”

슬슬 꺼 버려야 하는 담배를 어디 지지지도 못한 채 재환은 얼음이 되었다. 목을 감은 묵직한 팔을 떨어뜨리지도 못했다. 무슨 헛소리냐는 말 또한 나가지 않았다.

“그냥, 먼저 차지만 마. 그럼 진짜 음악 관둔다고 할지도 몰라.”

두어 번 툭툭 재환의 어깨를 두드린 지우가 훌쩍 거리를 벌렸다. 지우는 적당히 꽁초를 튕기고서 골목을 따라 다시 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환도 서둘러 운동화 밑창으로 꽁초를 짓이긴 후 지우를 뒤쫓았다. 연애하는 것도, 차는 것도 전부 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항변은 빙글빙글 입 안을 맴돌기만 했다.

다만, 오늘 재환은 새삼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제가끔 사연은 다를지언정, 가벼운 마음으로 이 밴드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쯤의 각오, 희생, 용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했을 터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더더욱 지우의 말을 부정, 혹은 정정해 주어야 하는데 재환은 끝끝내 그러지 못했다. 합주 때 보자. 응, 잘 들어가라. 멀어지는 멤버의 뒷모습을 보며 비겁한 저를 뼈저리게 탓할 뿐이었다.

즐거웠던 술자리에 조금 서글픈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오전 출근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래도 잠은 푹 잔 덕에, 재환은 숙취로 끙끙 고생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멀쩡한 상태로 카페에 출근할 수 있었다. 속 쓰림은 다소 존재했으나, 지난밤 지우와 부어라 마셔라 들이켠 소주량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보고 은근 술 잘 마신다더니, 그러는 지우야말로 아주 말술이었다. 키 큰 놈은 술도 잘 마시나 보다.

영업이 모두 끝난 후, 새로이 메뉴에 추가할 디저트의 시식회를 빙자하여 카페에서 조촐한 회식이 열렸다. 태혁이 만든 케이크야 맛없는 법이 없으니 다들 한 입 먹자마자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것으로 시식회는 시작한 지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다음에는 옹기종기 붙인 테이블 위로 순식간에 먹거리와 술이 차려졌다.

아무리 숙취가 적다 한들 이틀 연속으로 음주를 즐기기는 역시나 무리였다. 미친 척하고 못 마실 것도 없었으나, 그 정도로 흐트러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재환은 일단 잔에 와인을 받아 두고 적당히 즐기는 시늉만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재환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지 않았다.

단, 저만 빼고 사람들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러다 또 지난번처럼 이 자리가 갑자기 클럽으로 뒤바뀔까 재환은 내심 걱정이었다. 뚝딱이라는 별명에 쐐기를 박게 되는 상황은 사절이었다. 그 마음이 티가 났었는지, 와인을 홀짝이던 상지가 대뜸 재환의 이야기를 꺼냈다.

“맞다! 재환 오빠 무대에서는 완전 뚝딱이 아니던데요?”

“어, 진짜. 나도 그 생각 했었어!”

희연까지 상지의 말을 거드니 한순간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이 재환에게로 집중되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상지는 핸드폰을 꺼내 더 숨의 공연 영상을 틀었다. SNS 계정에 지우가 올린 영상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의 손을 차례로 거쳐 가는 핸드폰을 보며 재환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대에서 뚝딱이가 아니었다는 평가는 못내 달가웠으나, 영상을 본 이들이 한마디씩 건네는 말이 아무래도 쑥스러웠다.

“야, 재환이 멋있다! 이렇게 기타 잘 치는 줄 몰랐어.”

“무대에서 빛이 나네. 다른 멤버들도 다 잘생겼는데?”

“그죠? 노래도 짱 좋죠?”

“노래도 좋고, 보컬 목소리도 좋다.”

그러면서도 한영을 향한 칭찬이 나올 때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당연하지!’를 외치게 되었다. 밴드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듣더라도, 한영의 노래는 별로일 수가 없었다. 이러는 자신이 중증이라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재환에게는 정말로 한영이 최고의 보컬이었다.

한 바퀴를 돈 핸드폰이 다시 상지의 손으로 돌아왔을 즈음,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낀 재환은 테이블 아래로 슬쩍 핸드폰을 꺼냈다. 그 최고의 보컬이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퇴근했어?]

최근 이런 식으로 한영이 밴드 일과 별 상관없는 연락을 해 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꼬박꼬박 답장은 하고 있다만, 솔직한 마음으로 재환은 조금 어색했다. 아니, 불편했다. 아니,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고, 어쩌면 무서운 건지도 몰랐다.

‘아니. 카페 회식.’이라고 최대한 짤막하게 답을 적은 후 전송했다. 핸드폰 화면을 끄기도 전,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밖에 비 와]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재환은 목을 길게 빼 가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진짜로 밤거리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환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잇달아 눈길을 돌린 사람들이 하나둘 투덜거렸다.

“헐, 오늘 우산 안 갖고 왔는데.”

“비 온다는 일기예보 없지 않았어요?”

우산이 없기는 재환도 마찬가지였지만, 저 정도 양이면 집이 멀지도 않겠다 충분히 맞고 갈 만했다. 비 오는 줄 몰랐어, 라고 답장을 보낸 뒤 재환은 핸드폰을 아예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비가 거세질까 다들 걱정한 탓인지, 회식 자리는 생각보다 금방 마무리되었다. 클럽 조명이 켜지는 일도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간다는 친구들을 얼른 먼저 보낸 재환은 뒷정리를 자처했다. 매상 확인 작업이 남아 있는 세훈 대신 태혁이 재환을 도왔다.

“이제 홀 정리는 끝.”

“아, 감사합니다.”

카운터 뒤편 싱크대에 서서 설거지하는 재환에게 태혁이 다가왔다. 마저 챙겨 온 그릇을 싱크대 안에 내려놓은 태혁은 재환이 미리 씻어 둔 그릇을 하나씩 집어 마른행주로 꼼꼼히 물기를 닦았다.

“밴드 노래 진짜 좋더라. 앨범 같은 건 언제 나와?”

전에 같았으면 이런 질문을 받아도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재환은 속으로 다행이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앨범은 아직이고, 다음 달에 싱글 나와요.”

“싱글이면, 곡 하나씩 나오는 거지?”

“네.”

물기가 닦인 그릇을 제자리에 놓으며 태혁은 ‘알바도 하느라 바쁠 텐데, 진짜 대단하네.’ 하고 재환을 칭찬했다. 멋쩍어진 재환은 ‘그렇지도 않아요.’라며 멋없이 대꾸했다. 말은 이래도 태혁이 저를 참 좋게 봐 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컸다.

“세훈이 때문에 나도 록 음악 많이 들었었거든. 근데 시끄러운 건 취향이 아니라서. 재환이네 노래 같은 스타일이 좋아.”

계속해서 기분 좋은 말을 들려준 태혁은 그릇에 이어 와인 잔에 행주를 둘러 능숙한 솜씨로 물기를 닦아 냈다. 이쯤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재환은 잠시간 멍하니 싱크대만 내려다보았다. 한참 전 거품이 씻겨 나간 그릇 위로 콸콸 물이 쏟아졌다.

“재환아?”

퍼뜩 정신을 차린 재환은 서둘러 수도의 레버를 돌려 물을 잠갔다.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태혁에게로 천천히 몸을 틀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정말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 수고했어!”

“잘 가.”

함께 손 흔드는 세훈과 태혁을 향해 머리를 꾸벅인 재환은 직원 휴게실을 나와 껌껌하게 불 꺼진 홀을 가로질렀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태혁이 준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어깨로 유리문을 열었다. 곧바로 길가에 발을 딛는 대신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돼 희미한 주황빛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방울이 금세 손바닥에 동글동글 맺혔다.

이 정도면 꽤 젖겠는데, 생각하며 재환은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몇 발짝 옮기지 못해 다리가 멈추었다. 톡톡 이마와 콧잔등을 때려야 할 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높이 쳐들었을 때, 재환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투명한 비닐을 발견했다. 우산이었다.

“안녕.”

얼굴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같은 우산 아래 서 있는 한영과 지척에서 시선이 얽힌 재환은 일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동시에 속절없이 숨구멍으로 흘러든 한영의 향기가 호흡을 정지하게 만들었다. 우산에 툭툭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리버브를 입힌 것처럼 아득하게 울렸다.

“우산 없을 것 같아서.”

빗소리를 가르고 흐르는 목소리가 달콤한 노랫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얼마쯤 넋을 빼앗긴 재환은 ‘어….’ 하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단 몇 뼘 거리에 있는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데려다줄게.”

* * *

찰박찰박 빗물 고인 지면을 밟는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우산 양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어깨가 사이좋게 어두운 색으로 젖었다. 반대쪽 어깨가 걸음을 뗄 때마다 가볍게 맞부딪쳤다. 함께 쓴 우산 속,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는 가운데 솨 내리치는 빗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촉촉한 침묵을 먼저 살포시 걷어 낸 것은 한영이었다.

“회식 잘했어?”

“뭐…, 응.”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불현듯 재환 쪽으로 바짝 얼굴을 기울인 한영이 코를 킁킁거렸다. 가뜩이나 좁은 우산 안에서 도망갈 기회를 놓친 재환은 흡, 숨을 들이켰다.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진 분홍 머리칼이 살랑살랑 관자놀이를 간질였다. 다행히도 한영의 얼굴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봤자 바로 곁에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진짜다. 술 냄새 안 나.”

그걸 꼭 사람 민망하게 맡아서 확인해야 하나. 늘 그랬듯 한영의 행동은 재환에게 의문을 던져 줬지만, 굳이 따지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원한 답이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재환은 한영에게 갑자기 우산을 들고 나타난 연유 또한 묻지 않았다. 그냥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우리 노래 좋대.”

“정말?”

“응. 너 목소리도 좋다 그러더라.”

한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대꾸가 없었다. 또 무슨 까닭인가 싶어 재환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한영에게서 조금 엉뚱한 물음이 건너왔다.

“기타는?”

“어?”

“기타는 좋다고 안 해?”

잠깐 머뭇거리던 재환은 ‘별로…?’ 하고 말았다. 기실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며 악기 연주에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본인도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러니 딱히 자신의 연주가 언급되지 않아도 재환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밴드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보컬이기 마련이었다. 그걸 신경 써서 한영이 저런 질문을 하는 건가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난 네 기타가 제일 좋아.”

참방. 때마침 얕게 고인 물웅덩이를 밟은 신발 밑창과 함께 바짓단이 척척히 젖었다. 신발 안쪽으로도 물이 들이친 것 같았지만, 재환은 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냐…, 며 빗소리에 파묻혀도 무색하지 않을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릴 뿐이었다. 가슴께에서 번지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목덜미를 뜨끈하게 덥혔다.

“응. 재환이 너 기타 치는 거 진짜 좋아.”

자꾸 저 ‘좋아’가 다른 의미로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이었다. 이 기분에서 재환은 벗어나고 싶었고, 또 동시에 벗어나기 싫었다.

다시금 빗소리 섞인 침묵을 나누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슬슬 걷는 속도를 늦춰 5층짜리 연립 주택의 입구 앞에 멈춰 선 재환은 살짝만 몸을 틀어 한영을 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길이 영영 끝나지 않을 듯이 느껴졌건, 그래서 몇 번이나 우산 밖으로 도망치고 싶어졌건, 어쨌거나 여기까지 쫄딱 젖지 않고 온 것은 한영의 덕이었다. 그걸 모른 체할 정도로 재환은 뻔뻔하지 않았다.

“고맙다.”

그럼에도 어쩐지 상대의 지긋한 눈빛을 계속 마주하기가 버거워 슬쩍 눈을 내리깔고 짧은 인사를 전했다. 그리 밝지 않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말갛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문제였다.

“가 봐.”

저도 모르는 새 주먹을 쥐었다 풀고 있던 손을 들어 가볍게 한영의 가슴팍을 뒤로 밀었다. 더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전 얼른 가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닿았던 손을 도로 떨어뜨릴 수 없었다.

재환은 당황에 잠긴 눈으로 제 손등 위로 포개어진 하얀 손을 응시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서늘한 손이 당장의 그에게는 흠칫 몸이 굳을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손바닥 아래서 고요히 요동치는 타인의 심장 소리가 덩달아 자신의 심박까지 쿵쿵 들뛰게 만들었다. 머릿속에서 잔잔한 경고음이 울렸다.

몇 초를 더 굳어 있던 재환은 한 박자 늦게 어깨를 뒤로 뺐다. 하나 손등을 움킨 손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가 거리를 벌리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기는커녕 허리 옆으로 들어온 손이 상체를 확 끌어당기는 바람에 한영과 철떡 가슴팍이 맞붙었다.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이 재환 쪽으로 기울어지며 하늘하늘 흔들린 머리칼이 금세 빗물에 젖었다.

“유한….”

이미 기습적인 입맞춤은 몇 번이나 당했다. 혹 오늘도 그리될지 모르리란 막연한 짐작 또한 있었다. 그렇다고 태연히 반응할 수 있느냐, 하면 결코 아니었다. 도리 없이 혼란에 물든 재환은 입술에 쏟아지는 축축한 감각을 느끼며 두 눈을 거대하게 떴다. 길게 뻗어 나온 속눈썹이 콕 눈알을 찌를 것 같았다. 하지만 구태여 눈을 감지 않았다. 곧 한영의 입술이 쪽, 소리와 함께 떨어질 것을 알았다.

“읍….”

예상은 완전히 비껴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별안간 더운 숨결과 함께 말캉한 살덩이가 밀려들었다. 퇴로를 차단하듯 우산을 쥔 손이 등을 짚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진 빗방울이 콧잔등을 적시며, 머릿속을 울리던 경고음이 삽시에 요란해졌다. 순간적으로나마 질끈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푸핫…!”

상대의 손을 힘껏 뿌리치는 동시에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는 어깨를 황급히 밀어냈다. 겨우 숨 쉴 틈을 얻은 입 속으로 습한 공기가 우르르 들이쳤다. 재환은 한영의 어깨를 붙든 채로 가슴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서로의 숨이 섞였던 시간은 찰나와 같았으나, 호흡이 지나치게 버거웠다. 그 와중에도 얼굴로 쏟아지는 타는 듯한 시선이 끝내 재환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선 재환은 어느새 건물 입구를 덮은 좁은 지붕 아래 섰다. 뜨거운 눈빛에 섞인 의문, 내지는 추궁이 콱콱 심장을 찔렀다. 하얀 손에 들린 우산이 기울어진 채 바로 서지 않았다. 꽃잎처럼 고운 빛깔을 띤 머리카락이 흠뻑 젖고 있었다. 저 애처로운 모습을 목전에 두고도 비겁한 재환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싱글….”

그마저도 단어가 뚝뚝 끊겼다.

“싱글, 내기로 했잖아.”

두서도 없었다.

“먼저 그러기로 했잖아.”

“재환아….”

뒤늦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새 굵어진 빗줄기가 더욱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길바닥을 때렸다. 그 너머로 상대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잘 가…!”

그대로 뒤돌아 달려 건물 현관을 지났다. 계단을 밟았다. 운동화 밑창이 물기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계단참에서 시원히 나자빠질 뻔했지만,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따라 센서 등이 켜지지도 않는 복도를 우당탕 가로질러 서둘러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곧이어 열렸다 닫힌 문 위로 쿵, 등을 기대고서야 재환은 죄 어긋나고 토막 났던 호흡을 천천히 되찾을 수 있었다.

어둠뿐인 방, 거듭해서 물방울이 맺히는 시꺼먼 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더 이상 분홍 머리칼의 주인공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 * *

덜컹덜컹 흔들리는 지하철 칸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제법 승객이 많았다. 아마도 오늘이 금요일 밤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좌석에 앉아 가기는 진작 포기한 재환은 열차 구석진 자리에 서서 핸드폰의 볼륨을 높였다.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이 부쩍 커졌으나 지하철의 소음을 완벽히 덮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귀청만 따가운 것 같아 금방 볼륨을 다시 내렸다.

열차 문, 까만 유리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응시했다. 퀭한 낯빛에서 피곤함이 묻어났다. 퇴근하자마자 역으로 달려가 지하철에 올라탔으니 몰골이 저리 상쾌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요 며칠은 평소보다 잠을 설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로 더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질지, 그렇지 않을지 아직은 미지수였다.

시끄러운 열차 소리에 파묻혀 거의 들리는 둥 마는 둥 했던 노래가 몇 번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사이, 재환은 목적했던 역에 다다랐다. 사람들 틈에 섞여 열차에서 내린 재환은 자꾸 늘어지려는 걸음을 부지런히 놀렸다.

훤히 불 켜진 역에서 올라와 맞닥뜨린 밤거리는 저 아래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훤한 빛을 품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번쩍번쩍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거리에는 불 꺼진 간판이 하나도 없었으며, 지나는 사람이 많아 지금이 초저녁이라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여기에 문이 활짝 열린 가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 소리까지 더해져, 재환은 살짝 정신이 어찔했다. 아무래도 제가 올 동네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하지만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은 조금 어깨를 움츠리고서 오늘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주머니 안에서 꽉 움킨 종이쪽지에 적힌 이름의 간판을 찾아야 했다.

간간이 핸드폰을 꺼내 현재 위치를 확인하며 더, 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재환은 하도 여러 번 되새겨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가게 명이 박힌 간판 앞에 다다랐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막힘없이 왔는데, 은은한 보라색 조명이 새어 나오는 저 안쪽 계단으로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손을 꼭 붙잡은 남자 둘이 계단을 올라왔다.

입구 밖으로 나오는 남자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재환은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제법 독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문득 누군가의 달콤한 향이 그리워진 재환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확인 삼아 주머니에서 꺼낸 쪽지를 펼쳐 간판에 적힌 이름과 비교해 보았다. 틀림없이 제대로 찾아왔다.

바스락, 구긴 쪽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재환은 대단한 일이라도 앞둔 양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어쩌면 제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대담한 짓이 맞을지 몰랐다.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크게 심호흡한 후 가게 입구로 발을 뗐다. 오묘한 빛이 흐르는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내려갔다.

계단 끝에 있는 유리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생소한 풍경이 재환을 맞이했다. 보라색, 붉은색이 주를 이루는 가게 조명은 눈에 담는 것만으로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었고, 바나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차지한 손님들의 얼굴도 조명과 비슷한 색을 띠어 덩달아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언뜻 살펴도 그중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크지 않은 볼륨으로 쿵쿵 울리는 음악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이미 이런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쪽을 향하는 몇몇 남자들의 시선을 애써 기분 탓으로 돌리며, 재환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엉거주춤 스툴 형식으로 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서 앞에 놓인 메뉴판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한글과 영어, 심지어 원과 달러 값이 혼재된 메뉴 사이에서 좀처럼 아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언제 칵테일 같은 걸 마셔 봤어야 말이지. 주문부터 난관에 부딪힌 재환은 답답함,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고르셨어요?”

거의 메뉴판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얼굴이 퍼뜩 위로 들렸다. 그야말로 ‘예쁘장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생김새의 남자가 생긋 웃으며 작은 과자가 담긴 유리 종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복장을 보아 이곳의 바텐더인 모양이었다. 재환은 얼른 답하지 못하고 ‘어….’ 하며 어물거렸다.

“칵테일 추천해 드려요?”

키 높은 테이블 위를 팔꿈치로 짚은 남자의 상체가 바짝 재환 쪽으로 기울었다. 아까 가게를 나서는 손님들에게서 맡았던 것과는 또 다른 향수 냄새가 훅 콧속으로 들이쳤다. 탁, 소리가 나게 메뉴판을 덮은 재환은 일단 생각나는 것을 말하고 보았다.

“맥주요. 맥주 주세요.”

“아…, 네.”

눈을 찡긋하며 웃은 바텐더가 재환의 손에서 메뉴판을 가져갔다. 이때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스친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심지어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며 재환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할 리 없는 재환은 그저 어색하게 굳었다. 자리로 돌아간 바텐더가 바 앞에 앉아 있던 손님과 자신을 보며 귀엣말하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한 대로 바텐더는 잠시 후 다시 왔다. 또 한 번 재환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놓으며 테이블에 휴지로 입구를 덮은 병맥주를 내려놓았다. 재환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대로 바에 되돌아갈 줄 알았던 바텐더가 대뜸 재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풍겨 오는 향수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톡, 팔꿈치가 맞닿았다.

“오빠 되게 잘생겼네요.”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호칭에 흠칫한 마음을 겨우 숨긴 재환은 ‘아…, 예.’ 하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였다. 그래 봤자 1인용 스툴 위에서 이동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아예 자리를 뜨지 않는 이상 상대와 완전히 거리를 벌리기는 불가능했다.

“솔직히 나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그러니 야릇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바텐더를 피할 수 없었다. 살며시 팔뚝을 매만져 오는 손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갑자기 휙 눈이 옆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재환은 바텐더의 다음 말을 놓치고 말았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 둘이 헉, 숨이 들이켜질 만큼 격정적인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비벼지는 입술 사이로 들락거리는 혀가 이쪽에서까지 훤히 보였다. 질척하게 점막이 문대어지는 소리 역시 적나라하게 들렸다. 음악에 묻히려야 묻힐 수가 없는 소리였다. 머지않아 재환은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는 곳이 옆 테이블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게 이곳저곳에서 입 맞추는 남자들, 마침 더 빠른 템포의 곡으로 바뀐 노래, 벌그죽죽한 조명, 그 사이를 파고드는 끈적한 소리들…. 이 모든 것이 미친 듯 재환의 심장 박동을 쿵쾅쿵쾅 치솟게 만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왜 제가 이런 곳에 있는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순간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래요?”

삐걱삐걱 눈알을 돌려 아예 한 뼘 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바텐더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가 한 말을 제대로 귀에 담지 못해 ‘예…?’ 하고 멍청히 되물었다.

“나랑 안 하겠느냐고요. 오빠 너무 내 스타일이라서.”

옆 테이블에서 급기야 밭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팔뚝을 살살 쓰다듬던 바텐더의 손이 보다 안쪽으로 감겼다. 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라도 바른 양 불그스름한 입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바텐더의 팔을 뿌리치며 벌떡 자리를 박찬 재환은 가게 구석, ‘Toilet’ 표시가 있는 곳으로 냅다 달렸다. 막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과 어깨가 부딪혔으나 미처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한층 어두운 조명이 깔린 복도를 지나 꺼먼 철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이 온갖 어지러운 그라피티로 뒤덮인 화장실 내부가 안 그래도 온전치 못한 상태를 저 밑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토기를 참으며 다급히 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우윽!”

더러운 타일 바닥에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변기의 수조 뚜껑을 짚자마자 구역질이 솟구쳤다. 위까지 게워 낼 기세로 컥컥거렸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숙어진 얼굴 아래서 잔잔히 물결치는 물웅덩이는 깨끗하기만 했다. 그때야 재환은 온종일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게이 바 한 번 오는 게 뭐라고. 병신처럼. 요란한 기침으로 인해 질금 눈물이 흐른 눈가를 벅벅 손등으로 문질렀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재환은 변기 손잡이를 눌러 섞인 것 하나 없이 맑은 물을 내렸다. 그대로 칸 밖으로 나서려다 쩍 얼어붙고 말았다. 쾅, 울린 문소리 뒤로 이어지는 소리가 사지를 꼼짝할 수 없게끔 했다.

“하아, 하….”

“후….”

낮게 끓어오르는 신음, 쇠붙이가 직 마찰하는 소리, 무언가가 덜컹거리고….

퍽퍽, 흡사 주먹으로 살갗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재환의 고막을 후벼 팠다. 옆으로 살짝 밀기만 하면 되는 문의 시건장치를 건드리지도 못한 채, 재환은 천천히 다리를 접어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으로 귓가를 틀어막아 보았지만, 저 외잡한 소리를 도무지 걸러 낼 수 없었다.

다시금 속에서 토악질이 치받쳤다. 그러나 아무리 변기 위에 머리를 처박고 있어도 나올 게 없음을 알았다. 바텐더의 손이 닿았던 자리에 우글우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남자끼리 붙어 쩝쩝 입술을 물고 빨던 모습이 멋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이 문 너머에서는, 더한 짓이 벌어지고 있겠지. 그리고, 나도 언젠가….

피가 비칠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씹은 재환은 끝내 열지 못한 문 위로 쿵쿵 이마를 박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밖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 존나 좋아. 좋냐, 씨발아? 어, 좋아. 더, 더, 더….

악몽 같은 순간을 버티는 재환의 마음이 결국 시꺼먼 후회로 물들었다. 오지 말걸. 이딴 데, 오지 말걸.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였다.

다음 날, 카페에 출근한 재환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인 세훈은 재환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감기로 된통 앓느라 며칠 일을 빠진 전적이 있으니, 모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반복해서 같은 변명을 늘어놔야 한다는 점이 재환은 조금 버거웠다.

눈 밑에 짙어진 다크서클도, 허옇게 질린 낯빛도 다 수면 부족 때문이라고. 기타 연습 삼매경에 빠져 어쩔 수가 없었다고. 정신 차려 보니까 아침이더라고….

하필이면 대도 기타 핑계를 대려니 양심이 콱콱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진실을 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이 바에 가서 충격 받고 잠 한숨 못 잤다고 하면, 다들 퍽이나 ‘응,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줄 테다. 결국, 감당하지도 못할 짓을 한 제 책임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것치고 재환은 그럭저럭 멀쩡한 상태로 일할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계산 실수를 저지르는 일도, 바에서 음료를 잘못 만드는 일도 없었다. 대학 때도 몇 번 경험했다만,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깨어 있으면 도리어 정신이 맑아졌다. 그 덕이었다.

오후에는 예상보다 일찍 빈 디저트 쇼케이스를 채우러 태혁이 카페에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태혁 역시 재환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얼굴이 왜 그래…!”

여지없이 재환은 쓱쓱 뒷목을 문지르며 ‘어제 기타 연습하느라 잠을 못 자서요….’ 하고 초라한 변명을 어물거렸다. 대답을 들은 태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을 때는 절로 속이 뜨끔했다. 물론 태혁은 다른 이들처럼 기타가 그렇게 좋냐느니, 연습 때문에 밤을 다 새고 청춘이라느니 하는 뒷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대신 재환 옆에서 가져온 케이크를 정리하며 조금 다른 질문을 건네 왔다.

“지난번 그 친구야?”

“네?”

“회식 있던 날. 우산 챙겨 가라고 하려다 데리러 온 거 봤거든. 분홍 머리 친구.”

“아….”

컵에 끼우는 슬리브를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채워 넣던 재환은 시원히 답을 못 하고 재차 손바닥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역시나 태혁은 예리했다. 덕분에 일전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거지만.

“친구 때문에 고민된다 그랬었잖아. 그래서 게이 바 한 번 가 보고 싶다고.”

“네…. 그때 걔 맞아요.”

재환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는 도움받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으나, 그건 태혁의 탓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안일하고 어리석은 자신의 탓이었다. 순간 비어져 나가려는 탁한 숨을 재환은 겨우 삼켰다.

“재환아.”

“예…?”

스르륵, 쇼케이스 문을 닫은 태혁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제법 단호한 눈빛으로 재환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비난이나 추궁이 아닌, 염려였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쪽 힘들어.”

어설프게 ‘이쪽’을 넘보았다가 지독히 쓴맛만 본 재환의 시선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본의 아니게 좁은 화장실 칸에 갇혀 숨 막히는 자책에 휩싸여야 했던 지난밤의 기억이 다시금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가슴이 답답했다.

“잘 생각해 봐. 뭐, 알아서 잘하겠지만.”

“…네.”

도무지 알아서 잘할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은 그러하겠다 답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이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을 어찌 솔직히 꺼내 보일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태혁에게 더한 걱정을 끼치고 말 터였다.

“그렇게 할게요.”

스스로 다짐하듯 재환은 보다 또렷한 투로 다시 한번 대답했다. 하나 밤을 꼴딱 새워도 찾지 못한 답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고, 한영과 암묵적으로 약속한 날은 찬찬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정말이지 참 간사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으로 속을 시커멓게 태우는 와중에도, 재환은 멤버들과 함께 착실히 싱글 발매 준비를 해 나갔다. 진짜로 작업이나 연습 때문에 잠을 못 자 카페 식구들의 걱정을 사는 일도 있었지만, 그러한 과정들까지 제법 즐겁게 여겨졌다.

그리하여 고생 끝에 완성한 믹싱본을 멤버들에게 들려줬을 때, 이를 들은 멤버 전원이 오케이를 외쳤을 때, 재환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뿌듯함에 잠겼다. 과장이 아니라, 마스터링까지 받고 온 음원을 들었을 때는 콧날이 다 시큰해졌다.

설레는 일은 또 있었다. 싱글의 재킷 이미지는 한영이 직접 그리기로 했는데, 그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재환은 절로 짝짝 박수가 나왔더랬다. 하얀 배경에 검정 선으로 우산 하나 덜렁 그린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이미 한영을 향한 객관성을 잃은 탓인지 재환의 눈에는 그 어떤 그림보다 근사해 보였다. 노래도 잘하고 곡도 잘 쓰는 놈이 그림 실력까지 이리 탁월하다니. 역시, 예술적 감각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다만 그 사이사이, 재환은 문득 극심한 불안과 초조함에 빠져 홀로 허우적거렸다. 한 주가 새롭게 시작되거나 달이 바뀔 즘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동시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처럼 기분이 시도 때도 없이 널을 뛰었다. 그간 쏟은 노력을 생각해서 빨리 싱글이 나오면 좋겠다가도, 그냥 다 없던 일이 되기를 바라는 못난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이 모든 게 밴드의 중대사를 도망칠 구실로 삼아 버린 저의 어리석음과 한심함의 소치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재환은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었고, 핸드폰 캘린더에 한참 전부터 표시해 두었던 날은 끝내 밝아 왔다.

우연찮게 싱글 발매일과 공연일이 겹쳐 오늘은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았다. 일어나자마자 씻고, 밥 챙겨 먹고, 공연할 곡의 기타 연습까지 한 번씩 싹 마친 재환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등에 얹힌 기타 가방의 끈을 조이며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뗐다.

일기예보에서는 밤늦게 비가 올지도 모른다더니, 낮의 하늘은 참으로 높고 청명했다. 그야말로 ‘쪽빛’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색이었다. 심지어 햇발을 막는 구름 한 점이 없어, 쏟아지는 빛은 오롯이 재환의 몫이었다. 그 빛이 덥기보다는 포근하게 다가옴을 느끼며, 재환은 비로소 완연한 가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답지 않게 하늘 구경에 빠져 발이 더뎌진 재환은 예정된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한영의 집에 도착했다. 1층 복도에는 먼저 도착한 멤버들의 악기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열 맞춰 기타 가방과 페달 보드 가방을 내려놓은 재환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야, 빨리 와!”

얼마 전 한영이 멤버들을 위해 방 가운데 들여놓은 소파 위에서 태군이 휙휙 손짓했다. 핸드폰을 꺼내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재환은 ‘응.’ 하며 소파로 가 자신의 자리로 비워 둔 곳에 앉았다. 태군과 한영 사이였다. 지우는 소파의 정면 방향에 있는 책상 앞에 따로 앉아 있었다.

“아직 안 올라왔어?”

“응, 새로 고침 하는 중.”

재환에게 대답하며 지우는 음원 사이트가 떠 있는 인터넷 화면의 새로 고침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때, 태군의 입에서 왁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나왔다! 우리 거 올라왔어!”

동시에 최신 앨범 코너에 버젓이 올라가 있는 더 숨의 앨범 이미지를 발견한 재환은 흡, 숨을 들이켰다. 소리 내어 말은 못 하고 급히 손을 흔들어 지우에게 얼른 클릭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우가 몇 번 마우스를 딸깍딸깍 누르자, 음원 사이트에서 재생되는 더 숨의 〈I See You〉가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래를 듣는 내내 태군은 긴장한 듯 두 다리를 가만두지 못하고 시종 달달 떨었다. 노트북을 보고 앉은 지우는 곡의 박자 따라 고개를 까딱였다. 재환은 딱 그 중간쯤의 행동을 보였다. 초반에는 불안하게 다리를 떨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발바닥으로 박자를 짚었다. 손바닥으로도 가볍게 탁탁 허벅지를 두드렸다. 다만 그 옆에서 제 것이 아닌 하얀 손이 몇 번이나 움칠거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어쩌면 부러 보지 않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씨발, 존나 감동이네.”

말뿐이 아니라, 노래가 끝났을 때 정말로 태군은 코를 훌쩍거렸다. 감동을 색으로도 표현할 작정인지 매끈한 머리통을 온통 고운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친구의 감격적인 순간을 차마 깨뜨릴 수 없어, 재환은 그저 ‘그러게.’ 하며 태군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기실 재환이 느끼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3분 45초를 위해 참 많이 애썼구나 싶었다. 그래서 조금쯤 허무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제 노래는 나왔으니, 남은 것은 보다 많은 사람이 들어 주기를 바라는 일뿐이었다. 이를 위해 지우가 부지런히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 더 숨의 SNS 계정에 발매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야, 노래 한 번 더 듣자!”

그러다 태군의 투정 같은 부탁에 씩 웃으며 노래를 다시 처음부터 틀었다. 이번에 재환은 한층 가라앉은 마음으로 노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보다 집중하기 위해 중간에 스르륵 눈을 감는 여유도 가졌다. 물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녹음하며, 믹싱하며, 심지어 마스터링본을 들으면서도 수 번, 수십 번 떠올렸던 것과 같았다.

좋다. 목소리 참 좋다. 너무 좋다….

하이라이트에 접어든 노래의 리듬 따라 소파 등받이에서 떨어뜨린 상체를 가볍게 앞뒤로 움직였다. 그즈음, 허벅지에 얹어 두었던 손등 위로 문뜩 시원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스몄다.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재환의 시야에 제 손에 포개어진 하얀 손이 잡혔다.

집 앞까지 데려다준 날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재환이 키스를 거부한 날 이후 한영은 딱히 먼저 재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몇 차례나 그러했던 것처럼 뺨이나 입술에 쪽, 입 맞춰 오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나름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문제였나 보다.

재환은 하얀 팔뚝을 따라 느리게 눈을 움직여 상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하나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서 턱을 괸 한영의 고개는 완전히 재환의 반대 방향을 향해 틀어져 있었다. 그러니 재환에게 보이는 것은 오늘도 참 예쁜 빛깔을 띤 산호색 머리와 날렵한 귓불에 매달린 작은 귀걸이뿐이었다.

손가락은 길고 손톱은 바짝 깎은 손 아래에서 몇 번 미세하게 손가락을 움찔거린 재환은 슬그머니 손을 바깥으로 뺐다. 서두르는 티가 나지 않게 노력하며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노래에 빠져든 듯 고개를 푹 아래로 숙였다.

그때야 한영의 고개가 진작 향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애타는 마음을 품은 시선이 좀체 노래에 집중을 못 하고 있는 재환의 귓바퀴를 두드렸다. 둘 중 오늘의 약속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께 만들어 마침내 세상 빛을 본 노래가 정확히 다섯 번 더 재생되었을 무렵, 네 사람은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시켰다. 날이 날인 만큼, 햄버거뿐만 아니라 윙이니 텐더니 하는 사이드 메뉴도 팍팍 시켰다. 태군이 디저트 안 먹으면 죽는다고 앓는 소리를 해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함께 시켰다. 여하간 엄청나게 시켰더니 줄곧 네 사람의 식탁 역할을 하던 거실 탁자에 빈자리가 없었다.

나름 호화로운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재환의 강력한 주장 하에 넷은 지하 합주실로 내려갔다. 아직 클럽으로 출발하기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었고, 그런 귀한 시간을 대충 날려 버린다는 건 재환 기준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재환의 성격을 인제는 잘 알고 있으니, 다른 멤버들도 별달리 토를 달지 않았다. 태군만이 몇 번인가 재환과 지우에게 ‘니네 담배 안 피우냐?’라고 다소 의도가 담긴 질문을 던졌다.

내심 태군이 바랐던 바와 달리 합주는 쉬는 시간 한 번 없이 꽤나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지금껏 공연 전 합주는 점검 차원에서 비교적 가볍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또한 첫 노래가 나온 만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재환의 뜻이었다. 태군은 속으로 ‘징글징글한 새끼!’ 했다.

오늘 공연할 곡을 총 세 번씩 반복한 후,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네 사람은 드디어 클럽으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늘 그랬듯 운전석은 차 주인인 지우의 자리였고, 그의 뒷좌석엔 한영이 탔다. 원래대로라면 조수석은 태군의 차지였겠으나, 이번에는 약간의 변동 사항이 있었다.

저보다 한발 앞서 훌쩍 조수석에 올라탄 재환 때문에 살짝 뿔이 난 태군은 이동 내내 틈틈이 친구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다. 재환이 멍때리고 차창 밖을 보고 있으면 헤드레스트에 살금살금 다가가 귓속으로 후, 바람을 불어 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태군은 이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사이드 미러를 통해 본 재환의 표정이 심히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었다. 태군은 속으로 ‘저 새끼 공연 땜에 긴장했나…’ 했다.

공영 주차장에 주차한 후 조금 걸어 클럽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이 가히 반갑게 더 숨의 네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특히 그새 노랑머리를 회색으로 염색한 보컬 희성의 반응이 아주 열렬했는데, 그는 침까지 튀겨 가며 오늘 발매한 싱글에 대한 칭찬, 내지는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와, 저 듣고 진짜 울었습니다. 존나 짱이던데요? 감성이 아주…. 크!”

심지어 더 숨의 SNS 페이지에 올라온 글에도 빠짐없이 ‘좋아요’를 눌렀다며 직접 핸드폰을 꺼내 보여 주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득 재환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근데 형님…, 혹시 다이어트 하셨어요?”

“다이어트?”

“예. 살이 쪽 빠지셨는데?”

‘그래…?’ 하며 재환은 손바닥으로 제 볼을 슬쩍 쓸어 보았다. 최근 몸무게를 잰 적이 없으니 살이 빠졌는지 어쨌는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체중이 줄었다면, 어렴풋이 원인이 짐작 갈 것 같았다. 그간 싱글 때문에 어지간히도 신경을 썼으니까. 그래서 잠도 꽤나 설쳤으니까. 그렇게 결론짓고 싶었다.

“암튼, 오늘 끝나고 바로 집에 가세요?”

금방 화제를 돌린 희성의 두 눈이 보는 쪽이 짐짓 당황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태군이었다. 태군은 희성과 비슷하게 눈을 반뜩이며 ‘왜?’ 하고 되물었다.

“형님들 오늘 싱글도 나왔는데…, 같이 어때요?”

희성이 입 가까이 가져간 검지를 위로 튕기며 딱,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영락없이 술 한잔하자는 제스처였다. 재환이 채 대답을 꺼내기도 전, 냉큼 재환의 어깨에 팔을 두른 태군이 신나서 답했다.

“나야 존나 좋지! 니들은?”

태군이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머지 멤버들을 차례로 보았다. 그때, 태군 때문에 목이 조여 ‘야야, 아파.’ 하고 눈을 구기던 재환의 시선이 불현듯 한영과 부딪쳤다. 그의 눈빛이 집 앞에서 내리치는 빗줄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했던 순간과 같아, 일순 재환은 숨을 편히 쉬기가 어려웠다. 그사이에도 재환의 목덜미에서 팔을 풀지 않은 태군은 콩콩 뛰며 ‘회식하자, 회식!’을 외쳤다. 피식 웃은 지우가 ‘난 상관없어.’라고 대꾸할 때까지도 재환은 한마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집요하리만치 저를 보는 상대에게서 눈을 돌릴 즈음이었다.

“헉, 우리 이제 리허설이다. 이따 다시 얘기해요!”

이따 다시 얘기하자던 희성은 먼저 무대에 오른 멤버들에게 달려가 ‘야, 오늘 형님들이랑 회식하자!’를 우렁차게 외쳤다. 이미 회식할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했다. 오케이, 좋지, 따위의 대답이 나오는 것을 멀찌감치서 들으며 재환은 뒤늦게 태군의 손을 슬며시 떨어뜨렸다.

“악기 좀 체크하고 올게.”

무대에서 드럼을 차례로 쳐 보는 소리, 불 들어온 앰프에서 나는 노이즈 음, 그리고 마지막까지 저를 향한 한 사람의 시선을 뒤로한 재환은 걸음을 서둘러 대기실로 들어갔다. 앰프, 의자, 악기 가방 등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그나마 기댈 곳을 찾아 벽에 등을 붙였다. 고개를 젖혀 뒤통수까지 기대자 벽 너머에서 쿵쿵 울리는 묵직한 킥 베이스의 음압이 느껴졌다. 꾹 눈을 감고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그러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대기실 밖에서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재환은 가방에서 기타를 꺼냈다. 옆에 놓인 의자에 엉거주춤 한쪽 발을 올리고서 허벅지에 새빨간 텔레캐스터를 얹었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바디가 내뿜는 영롱한 빛깔을 눈에 담고 있으니 그나마 티끌 같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래 봤자 정말 미미한 수준이었다.

어차피 무대에서 한 번 더 음을 맞춰야겠지만, 그래도 꼼꼼히 줄을 튜닝한 재환은 기타를 도로 가방에 넣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가방을 벽에 잘 세워 둔 후 대기실 밖으로 발을 틀었다. 막 문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달큼한 향과 함께 앞을 막아선 상대로 인해 재환의 걸음이 급히 멎었다. 문간에 선 한영이 손가락 두 마디쯤 눈높이가 올라간 곳에서 재환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애써 피해 주춤 옆으로 한 발을 움직였다. 한영의 발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서로의 신발 앞코가 톡, 맞닿았다.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재환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옆걸음질 쳤다. 하나 결과는 같았다. 덩달아 옆으로 자리를 옮긴 한영이 재차 재환의 앞을 막아섰다.

“너 뭐 하…,”

“오늘 같이 가.”

말이 잘리는 동시에 심장이 쿵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하는 수 없이 상대와 시선을 맞추자, 절절 끓는 듯한 눈빛이 어찌할 틈도 주지 않고 시야를 파고들었다. 마침 시작된 코스믹 라테의 리허설 연주가 문밖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그 요란한 소리는 쐐기를 박듯 코앞에서 한 번 더 반복된 문장을 채 묻어 주지 못했다.

“끝나면, 나랑 같이 집에 가.”

부탁하는 건지, 강요하는 건지, 아니면 비는 건지 모를 투였다. 한없이 애처롭게 들리는 것 같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차마 거절을 뱉을 수 없게 다그치는 듯도 했다. 물론 그 어느 쪽이든 재환은 시원한 답을 내어 줄 수 없었다.

“나중에 얘기해.”

절대 비켜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한영의 몸은 손등으로 팔뚝을 살짝 밀치는 것만으로 순순히 옆으로 밀려났다. 그제야 겨우 지나갈 틈을 확보한 재환은 상체를 틀어 한영과 손가락 하나 스치는 일 없이 문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온갖 물건들로 꽉 찬 좁고 답답한 공간과 쾅쾅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의 경계선에 한영만이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한순간 멀어진 상대의 손조차 붙들지 못한 손이 바르르 떨리다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힘없이 몸이 기울다 어깻죽지가 쿵, 문기둥에 부딪혔다. 그대로 무너지듯 무릎을 쪼그려 주저앉은 한영은 서운함을 견디지 못해 조금 울었다.

하얀 손등이 기다란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을 훔쳐 낼 때, 화장실 칸 안에 들어선 재환은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서 참았던 욕을 토했다. 씨발, 씨발, 씨발…! 그럼에도 명치께를 짓누르는 끔찍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시끄러운 연주에도 파묻히지 않았던 애달픈 음성이 아직까지도 고막에 철떡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끝내 재환은 조금 울었다.

“마지막으로 연주할 곡은 ‘I See You’입니다.”

이곳에서 했던 첫 공연 때, 무대의 멘트 담당은 재환이었다. 다들 딱히 하고 싶어하는 눈치가 아니라 하는 수 없이 총대를 멨었는데, 당연하게도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시종 무표정한 얼굴로 앵무새처럼 곡의 제목만 읊으니 공연의 전체 러닝 타임이 줄어드는 의도치 못한 일까지 생겼다. 역시 본인은 연주에만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한층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공연에서는 싫다며 도리질하는 한영에게 억지로 멘트를 떠넘겼다. 그래도 ‘일단은’ 네가 리더고, 또 보컬인데, 무대에서 말 한마디 안 할 거냐며 재환이 거의 종주먹을 댔더랬다. 그리고,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주어나 서술어 따위 모조리 날려 버린 한영은 그야말로 정말 딱 제목만 내뱉었다. 이를테면 ‘I see you.’ 한마디 툭 던지고 바로 연주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그게 또 그렇게 시크하고 멋있었다며 공연을 봤던 상지는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어찌 됐건 한영에게 다시 멘트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공연 중간중간 지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재환은 안도와 배신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아주 희한한 경험을 했다. 스피커를 통해 듣는 지우의 목소리는 평소 인지하던 것보다 훨씬 좋았으며, 심지어 말도 상당히 잘했다. 저럴 거면 진작 지가 멘트를 했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침 오늘 이 노래가 싱글로 발매되었는데요, 저희 더 숨의 첫 싱글이라 많이 떨리고 설레네요.”

다만, 지극히 해야 할 얘기를 하는 것임에도 지우의 멘트를 듣는 재환은 고개를 조금 아래로 숙이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지우와 자신 사이에 서 있는 이 밴드의 보컬과 시선이 엉켜 버릴 것 같았다. 오늘 싱글이 발매되었다는, 뿌듯해 마땅해야 할 말이 하릴없이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발 앞에서 빨갛고 파란 불을 점점이 밝히고 있는 페달 보드만 뚫어져라 보았다.

“그럼, ‘I See You’ 들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지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이크 가까이 붙은 붉은 입술 사이에서 길게 숨을 흩트리는 소리가 흘렀다. 들을 때마다 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그 소리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재환의 살갗 위로 아스라한 소름을 퍼뜨렸다.

기타 넥을 붙잡은 왼손에 꽉 힘을 준 재환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인 피크를 고쳐 쥐었다. 머릿속으로는 최선을 다해 곧 연주할 플레이를 되짚었다. 그런데도 연주 도중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은 불안감이 몸집을 키웠다. 하나, 돌발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I see you….”

네 번의 드림 스틱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한영의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무대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미리 약속한 것처럼 휙 한영에게 돌아갔다. 하나같이 표정에는 당황함이 서렸다. 한영이 부르는 가사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함께 고생해 완성한 한국어 가사는 온데간데없이, 한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건반을 짚으며 ‘I see you’ 한 문장만을 반복했다. 객석을 향한 얼굴은 담담하기 짝이 없어,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선 재환은 저 자식이 당최 무슨 작정으로 저러는지 속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미 노래는 시작되었고, 이 시점에서 한영을 멈춘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한 듯 지우와 태군이 베이스와 드럼이 합류하는 1절 후렴을 앞두고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이를 악문 재환이 2절에서 연주를 시작하고, 후렴을 지나 모든 악기가 하이라이트로 접어들 때까지도 한영이 읊조린 가사는 ‘I see you’ 하나뿐이었다. 물론, 곡이 더한 절정에 치달았을 무렵에는 읊조리는 게 아니라 거의 울부짖듯 외치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재환도 덩달아 넋을 놓은 것처럼 기타 줄에 스트로크를 퍼부었다. 지판을 짚은 손이, 피크를 쥔 손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였다.

마침내 거대한 정적을 남기며 노래가, 연주가 끝났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내쉬며 기타를 향해 숙어졌던 고개를 들어 올린 재환은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객석을 응시했다. 땀 맺힌 속눈썹 사이를 파고드는 조명이 눈 부셔서인지, 연주에 취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인지 이쪽을 보는 관객들의 표정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숨만 헐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왁자하게 손뼉 부딪치는 소리가 귓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한층 멍해진 재환은 입까지 벙긋 벌리고서 눈을 끄먹거렸다. 관절이 새하얗게 튀어나올 정도로 피크를 움키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노래 가사가 영 이상하다며 다들 설레설레 고개를 저어도 할 말이 없거늘, 그러기는커녕 사람들이 박수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재환은 지금의 상황이 보다 어리둥절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주 당연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설사 노랫말 하나만 주구장창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가사가 참 멋없이 들린다 하더라도 한영의 노래는 듣는 이의 고개를 젓게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저 음색과 저 감성이라면, 가나다라마바사를 읊어도 박수를 보내게 될 터다.

단지 오늘따라 그 목소리에 유독 진하게 묻어 있는 애달픔 같은 것이 재환의 심장을 꽉꽉 옥죄었다. 가히 뜨거운 관객들의 반응에도 활짝 웃음 지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 박수를 받으며 지금처럼 가슴이 답답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결단코 없다.

한영을 만난 후 재환은 이렇게 처음 겪는 일투성이였다. 그것이 조금 슬프고, 또 한없이 혼란스러웠다.

당장 도망치고 싶을 만큼.

* * *

모든 공연이 끝나자마자 회식, 회식을 외치는 태군과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 때문에 재환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약간의 자의가 더해져 어영부영 휩쓸리다 보니, 금요일 밤에는 LP 바로 바뀌는 클럽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층 어두워진 조명 아래 1970년대 로큰롤이 흐르는 클럽은 공연이 한창이었을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건배-!”

보컬임을 증명하듯 우렁차게도 외친 희성의 목소리와 함께 두 팀은 서로 손에 쥔 병맥주를 부딪쳤다. 목울대가 꿀렁이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꿀꺽꿀꺽 맥주를 삼킨 희성이 크, 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근데 오늘 형님네 막곡 뭐였어요? 진심 다른 곡인 줄! 완전 쩔던데. 일부러 가사 글케 부르신 거예요?”

흥분을 감추지 못해 어깨까지 들썩이는 희성의 시선이 답을 구하듯 한영을 향했다. 주위 앉은 다른 이들의 고개도 희성을 따라 한영 쪽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섞이지 못한 재환은 앞에 놓인 마른오징어를 집어 들었다. 오징어 몸통을 길게 찢는 중, 느릿느릿 답을 내놓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사… 생각이 안 나서.”

여기저기서 허, 하고 허탈함 섞인 숨소리가 터졌다. 이번에는 재환도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 한번 참 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푸,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샜다. 손으로는 몸통에 이어 오징어 다리를 야무지게 뜯었다.

“헐, 나도 나중에 가사 까먹으면 함 써먹어야겠다.”

개중 여전히 감탄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희성이 중얼거리는 말에 다른 멤버들이 화들짝 놀랐다. 드럼 치는 정수는 내처 희성의 등짝을 내리치며 꿈도 꾸지 말라고 살벌한 경고를 날렸다. 잘게 찢은 오징어가 수북이 쌓인 접시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던 재환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코스믹 라테의 노래 가사가 어찌 되더라.

내게 로켓 펀치를 날려 줘, 그럼 나 우주선 타고 네게 날아가.

음…. 굳이 한 구절만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저대로도 충분히 재치 있는 가사였으니까. 아마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이지 싶었다.

저 형은 되고 나는 왜 안 되느냐, 외모로 사람 차별하느냐 희성이 징징거리는 가운데, 이를 깔끔히 무시한 정수가 아예 화제를 바꾸려는 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싱글 믹싱은 누가 했어요? 느낌 되게 좋던데.”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별안간 뻗어 온 손이 휙 팔목을 낚아챘다. 물 묻힌 휴지로 오징어 찢은 손을 닦아 내던 재환의 팔이 난데없이 높이 쳐들렸다. 범인은 옆에 있던 태군이었다. 태군은 꽉 붙잡은 친구의 팔을 휘휘 흔들며 제가 더 신나 정수에게 답했다.

“그거 이 새끼가 했어! 존나 능력자지?”

와, 진짜요? 대박. 이번에도 코스믹 라테의 멤버들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예외 없이 머쓱해진 재환은 제법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며 ‘배워서 겨우 한 거야.’라고 부연했다. 기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철의 도움이 없었다면 믹싱을 끝까지 해내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가 원하던 대로 ‘비 내리는 느낌’도 제대로 내지 못했겠지.

곧바로 맥주병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켜던 재환은 흘긋 눈을 움직여 대각선 자리에 앉은 한영을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한영은 테이블 밑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는 듯했다.

“진짜 엄청 신경 써서 믹싱한 게 확 티 나던데요? 나중에 저희 것도 해 주세요, 형.”

정수의 요청이 있자마자 한영의 얼굴이 홱 위로 들렸다. 미처 눈 돌릴 틈을 놓친 재환의 시선이 한순간 한영과 얽혔다. 손에 쥔 맥주병 입구를 다시 입에 대지도, 그렇다고 아예 내려놓지도 못한 재환은 입 안에 고인 맥주를 꿀꺽 삼켰다. 저 소름 돋을 정도로 투명한 눈빛이 제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싫어.

이를 애써 기분 탓으로 치부한 재환은 ‘네, 형?’ 하고 재차 묻는 정수에게 어렵사리 눈길을 돌렸다.

“나중에… 더 실력 늘면.”

굳이 따지자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저를 보는 상대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맞추고 있지 않았지만, 뺨에 번지는 따끔따끔한 감각으로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심장까지 쿡쿡 쑤시게 하는 시선이었다. 재환은 이마저도 어떻게든 무시했다. 그런 재환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듯 정수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희는 싱글이나 앨범 내려면 한참 남았어요.”

“왜? 공연하는 곡들만 해도 EP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돈도 없고, 군대 문제도 있고.”

재환은 저도 모르게 ‘아….’ 했다. 더 숨도 그 중요한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저는 진작 다녀왔고, 얼마 전 안 사실이지만 한영은 국적이 여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우는 후에 군법무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은 것은, 당연히 태군이었다. 군대라는 말만 꺼내도 두 귀를 막고 악악거리니 그와는 좀체 진지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뭐, 결국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마는…. 재환은 낮게 한숨 쉬며 곁눈질로 태군을 보았다.

그사이 옆자리에 앉은 코스믹 라테의 베이시스트와 메탈 얘기 삼매경에 빠진 태군은 잔뜩 흥이 나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Doom Boys의 드러머 사진을 그에게 보여 주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대는 박수 치며 형이랑 머리가 똑같다고 껄껄 웃었다. 그걸 칭찬으로 들은 태군은 또 좋다고 헤실거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코스믹 라테 전원이 태군의 핸드폰을 돌려 보았다. 테이블 두 개를 붙여 만든 널찍한 자리가 이내 왁자지껄한 웃음에 둘러싸였다. 함께 웃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재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저 웃음소리라도 있어야 자꾸 다른 곳으로 빠지려는 마음과 정신을 붙들어 맬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집처럼 점원이 재깍재깍 치워 가는 일 없는 빈 맥주병이 테이블 위에 도미노처럼 늘어섰다. 자리에 앉고 나서 그다지 오래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그새 맥주 서너 병을 거뜬히 해치운 재환은 조금씩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물론 재환은 맥주를 마시든, 소주를 마시든 쉽게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취했다고 여기고 싶은 것이 맞았다. 원인은… 하나였다.

고소하기보다는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땅콩을 오독오독 씹으며 재환은 테이블 건너편의 한 사람을 응시했다. 고개를 반쯤 옆으로 돌린 한영은 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감정이 지루함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너, 무슨 생각해? 재환은 절대 소리 낼 수 없는 한마디를 속으로만 중얼거려 보았다.

“헐, 진짜요? 탈색 세 번이나 했는데 머릿결이 이래요? 함 만져 봐도 돼요?”

거의 조르듯 묻는 희성의 말에 한영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희성의 두툼한 손이 분홍색 머리칼 위로 얹혔다. 또 땅콩을 한 줌 집어 입에 털어 넣은 재환은 우두둑우두둑 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딱딱한 알갱이를 씹었다.

“헐, 완전 보들보들해.”

반질반질한 머리카락을 실컷 만져 본 희성은 뒤이어 회색빛을 띤 자신의 머리도 손바닥으로 쓱쓱 쓸어 보았다. 한영의 머리칼과는 흐르는 윤기에서부터 꽤나 차이가 있었다. 입술 끝을 쭉 늘어뜨린 희성은 아니나 다를까 볼멘소리를 했다.

“내 머리는 왜 이러냐. 형 머리 만지다 만지니까 존나 빗자루네.”

겨우 땅콩을 다 씹어 삼킨 재환은 피식 웃었다. ‘아, 형! 지금 비웃었죠!’ 하고 희성이 재환을 보며 바락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서 함께 고개를 돌린 한영도 재환을 보았다. 희성과 대화할 때만 해도 별다른 기색이 없던 얼굴이 재환과 시선이 맞닿자 금세 먹먹함을 머금었다. 도저히 기분 탓으로 넘기지 못할 표정이었다. 이미 오늘 몇 번이나 본 표정이기도 했다. 동시에 재환은 깨달았다. 저 눈빛을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음을.

땅콩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레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눈이 재환을 향했다.

“화장실 가려고.”

클럽을 나와 계단을 오른 재환은 화장실로 들어가는 대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입구 옆, 딱딱한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금 눅눅하게 느껴지는 공기 중으로 희부연 연기를 내뿜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 끝에서 발갛게 타오르는 작은 불꽃이 새까만 눈동자에 고였다.

다른 밴드 믹스해 주는 거 싫어, 오늘 집에는 나랑 같이 가야 해, 그리고 나랑 섹스해야 돼.

한영이 눈빛으로 전했던 억지 아닌 억지들을 찬찬히 되새기자 재환은 불현듯 숨 못 쉴 정도로 가슴이 갑갑해졌다. 담배 몇 모금 빤다고 해소될 감각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공연 전 그랬던 것처럼 또 꼴사납게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았다. 만약 지금, 옆자리에 와 앉아 또 같은 눈빛을 제게 보낸다면 그때야말로 피하지 못하리라. 그 결과가 어찌 될지, 재환은 아무것도 예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어쩌면 이미 한참 전부터 내려 두었던 결정이 후딱 담배를 마저 피우고 벤치에서 일어서게 했다. 서둘러 클럽으로 내려간 재환은 이제는 컨트리 록이 흐르는 홀로 향하지 않고 쏙 대기실로 들어갔다. 기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페달 보드 가방을 집어 드는 일련의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새 조금 더 습해진 듯한 바깥으로 나온 재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밴드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 취해서 먼저 들어가 본다는, 제가 생각해도 참 얄팍하기 그지없는 거짓말 적어 전송했다. 곧바로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른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길가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빈 차 표시등을 밝히며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냅다 팔을 흔들었다. 두 다리 멀쩡한데 택시라니. 정신 나간 짓이 따로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기타 가방을 벗은 재환은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어서 오십쇼.’ 인사하는 기사 아저씨에게 집 근처 초등학교 이름을 댄 후 고개를 뒤로 돌렸다. 택시 후면창 너머로 조금씩 멀어지는 클럽 입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걸로 된 거야. 초라한 합리화를 반복하며 가죽 냄새 물씬 나는 시트에 푹 몸을 기댔다. 당연히 잠은 오지 않겠지만 눈을 감았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눈꺼풀 안쪽이 여지없이 축축이 젖어 왔다.

구제할 길 없는 비겁한 새끼가 되어 너에게서 도망치는 벌이었다.

“감사합니다.”

쓰라린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적지 않은 택시비를 계산하고 차에서 내려섰다. 내린 곳에서 집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으나, 걸음을 서두른 탓인지 재환은 생각보다 금방 집 가까이 다다랐다.

눈곱만큼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집 앞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각 집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만이 수북이 쌓여 안 그래도 좁은 골목을 더 비좁아 보이게 만들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재환은 핸드폰 대신 담뱃갑을 꺼내 한 대를 냉큼 피웠다.

쾅, 문을 닫고 들어선 집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좁고, 어둡고, 답답했다. 장마철도 아닌데 오늘은 습한 기운까지 더해져, 드디어 집에 왔다는 편안한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곧장 매트리스로 가 엎어지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은 재환은 매트리스 옆면에 등을 기대고서 핸드폰을 꺼냈다. 동그란 전원 버튼 위에 엄지를 대고 한참을 주춤거리다 끝내 꾹 눌렀다.

끌 때는 금방 시꺼먼 화면이 되었던 핸드폰은 한참을 기다려도 로딩 화면만 계속되었다. 군대 가기 전부터 썼던 것이라 슬슬 바꿔야 할 시기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엉뚱한 택시비에 몇만 원을 써 버렸으니. 절로 미쳤지, 소리가 나올 즈음 하얀 바탕에 우산 그림이 그려진 대기 화면이 켜졌다. 이내 그 위로 집 오는 사이 도착해 있던 메시지가 하나둘 떠올랐다.

예상했던 대로 태군의 메시지는 ‘야이새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토끼는 법이 어딨냐며 오만 불평을 늘어놓았다. 많이 취한 거냐고 걱정하는 지우의 메시지와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그 중간쯤에서 재환은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전원이 꺼져 있던 동안 같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었음을 알려 주는 문자와 함께.

[재환아]

[내가 뭐 잘못했어?]

[전화를 안 받아]

[대기실에서 겁주고 가사 까먹어서 미안해]

[I’m really sorry]

[진짜 미안해…]

하하…. 핸드폰을 쥔 채 두 무릎을 끌어안은 재환은 겹쳐진 팔 위로 이마를 묻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소리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움츠린 어깨가 다 들썩일 정도였다. 병신 새끼. 모자란 새끼. 상대를 향한 건지, 저를 향한 건지 모를 욕이 속에서 끝도 없이 거듭되었다. 미칠 것 같았다.

당장 달려가 멱살을 쥐어 잡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잘못한 거 하나 없으면서 비굴하게 미안하단 소리는 왜 지껄이느냐고. 사람을 어디까지 나쁜 놈 만들 심산이냐고. 동시에 그 순연한 얼굴을 영영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고작 공연 끝나고 도망치는 것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괴로운 숨을 토하던 재환은 ‘씨발….’ 하는 소리와 함께 끈적끈적한 장판을 두 발로 딛고 일어났다. 얼마 안 되는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좁은 현관에 섰다. 대충 벗어 두었던 신발을 신고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쉽사리 문을 열지 못했다.

이 문을 열면, 그래서 너에게 가면, 그다음은 도대체….

쿵, 차가운 문 위로 이마를 찧었다. 다시금 숨이 가빠지며 눈가로 열이 몰렸다. 수없이 무너뜨리고 세우기를 반복했던 결심을 이제 와 또, 제 손으로 부서뜨리기란 이다지도 힘든 일이었다. 아마 유한영은 좆도 모를 것이다.

이를 악문 재환은 힘주어 문고리를 돌렸다. 새카만 복도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해가 뜨면 분명 후회하게 될 테지만, 지금은 한영을 만나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 * *

매끈한 타일이 깔린 현관에 들어서자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품은 센서 등이 켜졌다. 곧바로 신발을 벗는 대신 한영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노드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자마자 따라 들어온 이에게 와락 등을 끌어안겼다.

“왜 요새 연락이 없었어.”

배를 감싼 팔에 힘을 준 상대가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서 속삭였다. 왼손으로 신발장 문을 짚은 한영은 ‘바빴어.’ 하고 짧게 대꾸했다. 슬슬 현관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상대는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엄청 보고 싶었어.”

쪽, 쪽 살결에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귀밑에서 울렸다. 그 입술의 주인공이 다른 누군가인 상상을 잠깐 했던 한영은 한순간 휙 몸을 틀었다. 엉거주춤 허리에서 풀린 남자의 팔을 덥석 붙잡아 냅다 현관 벽으로 밀어붙였다. 한영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샐쭉, 휘어졌다.

“뭐야, 급했어?”

대답을 않고 불그스름한 기운을 띤 입술에 거칠게 제 입술을 부딪쳤다. 그 안에서 엉키는 혀가 다른 사람의 것인 상상을 또 잠깐 해 버린 한영은 보다 그악스럽게 상대의 숨을 집어삼켰다. 네 개의 발 아래 현관 바닥에 놓인 신발이 이리저리 밟혔다. 남자의 귀에 걸린 수 개의 피어싱이 계속해서 짤랑거렸다.

“으, 음…. 흐….”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는 상대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감아 넣었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보다 깊이 맞물었다. 고개가 홱 뒤로 꺾인 남자가 매달리듯 한영의 목을 두 팔로 껴안았다. 어느새 불이 꺼진 현관에 젖은 점막이 비벼지는 질척한 소리가 한가득 울려 펴졌다.

그때 저벅, 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디뎌지는 소리가 한영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퍼뜩 남자의 어깨를 붙잡아 몸을 떨어뜨린 한영은 현관에 연결된 복도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머리 위 달린 센서 등이 다시 반짝, 빛을 틔웠다.

“…재, 환아.”

얼굴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진 재환이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제야 한영은 줄곧 발에 채던 게 자신의 신발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손끝, 발끝에서 모조리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삽시에 턱까지 차올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전화… 안 받길래. 미안, 갑자기 찾아와서.”

손으로 감싼 팔뚝을 꾹꾹 주무르며 재환이 더듬더듬 입을 뗐다. 비스듬히 벽에 등을 붙인 채 푹 눈을 구긴 남자가 한영과 재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달갑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몹시.

“집 갈 때 답장도 제대로 못 하고 그래서, 그냥 얘기 좀 하려고….”

두서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재환은 하얗게 질린 한영의 얼굴에서 쭉 시선을 떨어뜨려 현관에 나뒹구는 운동화를 보았다. 안 그래도 산 지 오래되어 낡고 때 탄 운동화에 신발 굽 모양대로 얼룩이 찍혀 있었다.

“난 가 볼게.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단 몇 걸음 만에 두 사람이 서 있는 현관 앞에 다다른 재환은 허리 숙여 뒤집히고 뉜 운동화를 가지런히 놓았다. 다시 허리를 펴되 고개는 들지 않은 상태로 운동화 안에 한 발씩을 끼워 넣었다. 안으로 접힌 뒤축까지는 미처 빼지 못했다.

“합주 때 봐.”

이윽고 쾅, 소리를 내며 짙은 색을 띤 문이 닫혔다. 한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재환이 사라진 자리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차마 눈꺼풀 한 번 내렸다 올릴 수 없었다. 여전히 호흡은 거의 멈춰 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뭐야, 쟤. 진짜 네 애인 아닌 거 맞아?”

남자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그 소리가 한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서서히 무너져 내린 한영은 끝내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무릎 꿇었다. 다시 센서 등에 불이 꺼지고, 시야에 담기는 모든 것이 껌껌한 어둠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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