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 *
집을 나서서 목적지를 향해 걸을 때만 해도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던 길은 아무래도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더디게 움직이는 다리가 문제인 건지, 그냥 심리적인 문제인 건지 판단을 내릴 정신이 되지 못하는 재환은 그저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으로선 길 한복판에 철퍽 주저앉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깐이라도 정신 줄을 놓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재환은 집을 한참 앞두고 발을 멈추었다. 가장 가까운 가로등 아래 서서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뱃갑을 꺼냈다. 무게가 하도 가벼워 어째 불안하다 싶더라니, 안에는 돗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하며 입에 문 담배 끝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담배가 있으면 무얼 하나. 아무리 칙칙 휠을 돌려도 라이터에서는 불이 피어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라이터가 왜 갑자기 말썽을 부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몇 번 더 엄지로 휠을 긁던 재환은 기어이 답답함을 참지 못해 라이터와 담배를 냅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꺼끌꺼끌한 아스팔트 표면에 플라스틱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할퀴었다.
씹…,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제는 핸드폰만 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등까지 구부정 굽힌 채로 도통 나타나지 않는 집을 향해 남은 걸음을 뗐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도로 멈춰 서서 손을 빼야 했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 본 재환은 하, 하고 허탈함이 가득 담긴 숨을 뱉었다. 안 그래도 별로인 기분에 재를 뿌리듯 한 방울, 두 방울씩 톡톡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야 밤늦게 비가 올 거라던 일기예보가 생각났다. 오늘따라 딱딱 들어맞는 일기예보가 썩 달갑지 않았다.
젖은 듯 만 듯한 손바닥을 바지춤에 쓱쓱 문지른 재환은 이제 절대 중간에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심을 비웃듯 빗방울은 금세 굵기를 키웠다. 덩달아 수도 늘어났다.
툭, 커다란 물방울이 이마를 때렸다. 짜증 났다.
또 툭, 떨어진 물방울이 코끝을 건드렸다. 서러웠다.
또다시 툭, 떨어진 물방울이 눈두덩이 아래로 흘러 뺨을 적셨다. 야속했다.
이윽고 시커먼 밤하늘을 뚫고 낙하하는 물방울이 삽시에 배가 되어 얼굴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금세 머리칼이 젖고, 속눈썹이 젖고, 시야가 젖었다. 거기까지면 좋았으련만.
어느덧 솨- 소리를 내며 산발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기어코 터지기 직전이던 마음의 둑을 무너뜨렸다. 기다렸다는 듯 부서지고 깨어진 틈으로 와르르, 온갖 부정적이고 너절한 감정들이 쏟아져 흘렀다. 차마 막을 새가 없었다.
좆같아. 거지같아. 병신 새끼. 등신 새끼. 속없는 새끼. 한심한 새끼. 쪽팔린 새끼.
미안하다는 메시지에 덜컥 마음이 흔들려 욕을 짓씹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주체가 명확한 욕들이 줄줄이 솟구쳐 올라 목젖을 쳤다. 아마 그중 몇은 소리를 입고 입 밖으로 비어져 나갔을 것이다. 혹 우산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라도 했다면 웬 미친놈이 있다고 뒷걸음질 쳤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울화와 서러움이 뒤번진 속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감각 체계가 고장 난 것처럼 몸 온갖 군데를 때리는 비가 빌어먹게도 아팠다. 그럴 주제가 못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 모든 탓을 자꾸 한영에게 돌리고 싶어졌다. 주인 없는 집에 쳐들어가 버티고 있던 건 저고, 제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건 한영인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쯤은 붙잡아 줄 줄 알았다. 그렇지 않은가. 본인의 집까지 자신이 어떤 생각, 내지는 각오를 하고 갔을지 뻔히 알아차렸을 텐데. 그래서 재환은 더더욱 쪽팔림을 견디기 어려웠다. 있는 대로 내빼다가 결국 섹스하자고 조르르 달려간 꼴이 된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맞다. 그런 거다. 섹스해 달라고 조르르 달려간 거다.
“씨발….”
사위를 온통 요란한 물소리로 뒤덮은 거센 빗줄기 아래, 재환은 끝내 발을 멈추고야 말았다. 더는 짙어질 수 없을 만큼 시커멓게 젖은 바짓단을 내려다보다가, 똑같이 더럽게 젖어 든 눈가에 팔뚝을 갖다 댔다. 얼마나 비가 세차면 눈 안으로까지 다 들이칠까. 하다 하다 꼴사납게 애먼 비를 탓하는 지경에 이른 재환은 속절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꽉 깨물린 입술 사이로 병신처럼 끅끅거리는 소리가 샜다. 차라리 빗소리에 묻히기라도 하면 좀 나을 것을, 고막에까지 물이 차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환아.
그걸로 모자라 환청까지 들렸다. 하필이면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상대의 목소리였다. 다만 기억하던 것과 달리 목소리는 조금도 달콤하거나 간질간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듣는 쪽이 왈칵 눈물을 터뜨리고 싶어질 만큼 가슴 미어지는 절박함을 품고 있었다. 뭐, 이미 눈물은 한참 전에 터져 버렸지만.
한데, 환청이 아니었다.
“재환아.”
눈물샘을 막고 있던 팔을 툭 아래로 떨어뜨린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좍좍 무수한 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빗발 너머, 어른어른 비치던 한 사람의 형상이 점차 또렷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곱게 반짝이는 분홍색 머리칼과, 채도를 잃은 듯 새하얀 얼굴. 가장 보고 싶지 않았지만, 또 가장 보고 싶었던 상대가 빗속에 서 있었다. 어쩌면 저보다도 더한 꼴로 쫄딱 젖은 채.
“재환아.”
다시 한번 오로지 절절함만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줄기찬 빗소리를 갈랐다. 사고도, 호흡도, 움직임도 모두 멎어 버린 재환은 계속해서 빗물이 맺히는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달콤한 향기까지 함께 가까워지는 듯한 건 분명한 착각일 터다.
“재환아….”
저와 다를 바 없이 물기에 푹 젖은 갈색 눈동자가 이제 한 뼘 거리에 있었다. 그 아래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매끈한 뺨을 타고 흘렀다. 저렇게 비를 맞고 있으면 입술이 허옇게 질릴 법도 하건만, 몇 번이고 제 이름만 소리 내는 입술은 꽃처럼 붉디붉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재환도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유한영….”
“우산…, 우산 갖다 주려고….”
뚝뚝 빗방울을 떨어뜨리는 뾰족한 턱 끝, 빗물 고인 쇄골, 티셔츠가 달라붙어 윤곽이 드러난 가슴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간 재환의 눈에 하얀 손에 들린 우산 손잡이가 담겼다. 야무지게 접혀 단추까지 채워진 투명 우산은 이 빗속에서 펼쳐진 흔적일랑 없었다. 흠뻑 비를 맞고 있는 한영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되돌린 재환은 작게 허, 소리를 터뜨렸다. 차마 웃을 수가 없어 나간 소리였다. 우산은 폼이냐는 말이 혓바닥을 간질였다.
쉼 없이 쏟아지는 비를 사이에 두고도 재환의 표정이나 눈길이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아챈 한영은 늦게나마 우산을 여민 단추로 손을 뻗었다. 뒤이어 꽉 조여 있던 비닐이 펄럭펄럭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한영은 젖은 눈꺼풀을 깜빡이며 막 우산을 펼치려던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다부진 손을 보았다. 고개가 들리고, 다시금 두 사람의 시선이 빗줄기를 헤쳐 잇닿았다.
일순, 지면에 곤두박질쳐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물에 젖은 세상이 흑백에 잠기고, 오직 눈앞의 상대만이 제 색으로 빛나 보였다. 한영에게도. 재환에게도.
채 펼쳐지지도 못한 우산이 풀썩 빗물 고인 땅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비를 맞고도 식을 수 없는 열을 품은 손바닥이 서로의 목덜미를 감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개의 입술이 부딪쳤다.
바람 소리, 빗소리, 우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지금의 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코를 비비고, 입술을 비비며 상대의 숨을 받아 마시기에 급급했다. 성마르게 얽히는 혀에 거듭 빗물이 스몄지만, 그것마저 뜨거운 타액으로 느껴졌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주 잠시 입술이 떨어져 호흡할 틈을 얻었을 때, 그토록 어루만져 보고팠던 분홍색 머리칼 사이로 재환은 손가락을 감아 넣었다. 몇 번이나 답삭 끌어안는 상상을 했던 재환의 허리로 한영은 팔을 둘렀다. 젖은 옷가지 너머로 가슴팍이 밀착하며, 재차 입술이 거세게 맞부딪쳤다. 숨결이 뒤섞였다.
세상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아득한 입맞춤 속에서 재환은 매일 밤 잠을 설치게 했던 고민과 걱정을 잊었다. 당장 한영이 제게 전해 주는 열기에 비하면 한없이 사소하고도 하찮은 것이었다. 왜 그토록 불안에 절어 끙끙거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이 비가 쏟아지는 내도록 한영과 이렇게 입 맞추고 싶었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그를 향한 제 펄떡펄떡 뛰는 욕망을 인정해야만 했다. 빗물을 먹고 더 쑥쑥 자라나는 열망이었다.
젖은 머리칼 사이를 애달프게 헤집던 재환은 내처 한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한영의 손이 어깻죽지를 감싸 왔다. 그러다 한 손으로 재환의 동그란 뒤통수를 받쳐 휙 고개를 틀었다. 크게 벌어진 입술과 입꼬리가 맞물리며 한층 더운 숨이 급물살을 타고 입 속으로 쏟아져 들었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빗발이 서로의 머리칼, 콧잔등을 타고 흘러 쉼 없이 얼굴을 두드렸으나 어느 쪽도 개의치 않았다.
이곳이 좁은 골목 한복판이라는 것 또한 이미 의식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다지만, 무슨 비가 이리도 요란하게 오냐며 누구든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다 빗속에서 엉겨 붙은 두 남자를 발견하고 기함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라지. 실컷 보라지. 재환은 아무래도 좋았다. 애타게 저와 숨을 나누는 한영이 그렇게 느끼게끔 만들어 주었다.
또 한 번 쾅, 천둥이 쳤을 무렵 오직 서로만을 느끼기에 벅찼던 입맞춤이 잠시 멎었다. 두 손으로 한영의 귓가를 감싼 재환은 주렁주렁 빗방울이 매달린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하얀 이마에 콩, 제 이마를 맞대었다. 비슷한 열기에 잠식된 두 사람의 어깨가 같은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아, 하아. 달아오른 숨이 살짝 멀어진 입술 사이로 흩어지다 조금씩 잠잠해졌다.
한영은 맞닿은 코끝을 살살 비비며 흰 셔츠 소매가 철떡 들러붙은 재환의 팔뚝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눈알을 조금씩 움직여 우주처럼 새카만 눈동자와 그 주위를 촘촘히 감싼 속눈썹을 하나하나 시야에 새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인력에 이끌리듯 한영은 재환에게 쪽, 입 맞추었다. 그다음에는 재환이 한영에게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다시 한영이, 다시 재환이. 쪽, 쪽 물먹은 소리를 내며 이어지던 입맞춤은 이내 서로의 숨을, 빗물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격한 움직임이 되었다. 곧은 등허리, 단단한 어깨를 더듬는 손이 더한 열기를 품었다.
어둠을 가르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돌아간 두 사람의 입맞춤도 멈추지 않았다. 나동그라진 우산 주위로 차오른 물웅덩이 위, 하나처럼 엉킨 두 개의 그림자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함께 일렁일렁 번졌다.
* * *
쾅, 문이 닫히며 빗물에 전 두 쌍, 총 네 개의 신발이 우왕좌왕 좁은 현관에 들어섰다. 제구실 한 번 하지 못한 우산이 현관을 넘어 습기 맺힌 장판 위로 넘어졌다. 문의 잠금을 돌릴 여유 따위 없었다. 투두둑투두둑 빗물이 때리는 창에서 아슴푸레한 빛이 흘러드는 가운데, 센서 등 하나 없는 공간에서 두 사람은 다시금 조급히 입술을 맞대었다. 푹 젖은 바짓단을 타고 뚝뚝 떨어진 물이 타일 바닥에 얼룩덜룩 고였으나, 집주인도, 방문객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으, 음….”
“후….”
어느새 벽에 등을 붙인 재환은 두 팔을 들어 미끈하게 뻗은 한영의 목을 안았다. 높이를 맞추기 위해 조금 허리를 굽힌 한영이 접은 팔로 재환의 머리 옆을 짚었다. 이러한 자세도, 위치도 아직은 재환에게 영 낯설게 다가왔으나, 같은 남자와 입 맞추는 것에 이미 거리낌이 없어졌듯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두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들어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칠 떨게 되었다.
“읏….”
그새 벽을 타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온 손이 허리에 둘렸다. 꼬리뼈 부근을 더듬거리다가 별안간 양 엉덩이를 꽉 움켰다. 동시에 재환의 고개가 휙, 뒤로 꺾이며 자연스레 서로 입술이 떨어졌다. 한영의 입술 사이에서 ‘아….’ 하는 소리가 흘렀다. 냉큼 위로 올라온 손이 등허리를 감쌌다. 분홍 머리통이 툭, 어깨 위로 숙어졌다.
“미안, 재환아….”
한영이 사과하는 이유를 선뜻 이해하지 못한 재환의 눈썹 사이에 미세한 주름이 팼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더 이상 한영에게 ‘미안’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그러다 또 괜히 제 욱하는 성질이 튀어나오면 큰일이었다. 여기서 더 홧김에 저지를 일이 있기는 할까 싶다만.
픽, 나지막하게 웃은 재환은 비에 젖어 한층 구불구불해진 분홍색 머리칼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어설프게나마 쓱쓱 빗어 넘겨 주자 한영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위로 들렸다. 물기 어린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그렇게 말갈 수 없었다.
비를 맞으며 한영이 그랬던 것처럼 뾰족한 코끝에 톡, 제 코를 맞댄 재환은 살살 얼굴을 좌우로 움직였다. 딱딱한 듯 말랑한 살이 비벼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 의도치 않게 아주 잠깐 안정을 되찾았던 상대의 마음에 화르르 불을 지폈다.
“읍…!”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고 재환을 보다 벽으로 밀어붙인 한영은 허겁지겁 눈앞에 놓인 불그스름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쑥 혀를 내어 불붙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축축한 입 안을 헤집다가 날렵한 턱선을 따라 쪽, 쪽 입 맞췄다.
“흐, 읏….”
돌변한 한영의 태도에 도리 없이 긴장한 재환은 마디가 불거진 손으로 급히 벽을 짚었다. 몰캉한 입술이 뺨이나 귓바퀴에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목빗근이 꿈틀 솟아올랐다. 절로 밭은 숨이 터졌다. 여기에 자꾸 사타구니를 문지르는 허벅지가 불안함을 가속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은 한영의 손이 옆구리를 훑으며 슬금슬금 가슴 부근까지 올라왔다. 기다란 엄지손가락이 젖은 천 위를 더듬다가 어렵지 않게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돌기를 찾아냈다. 판판한 손끝이 꾹 그곳을 누르는 순간 재환의 허리가 파드득 요동쳤다. 본능적으로 제게 밀착한 어깨를 다급히 붙잡았다.
“유한영…!”
붙잡은 어깨를 밀어내자 정염에 물든 갈색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 왔다. 붉은 입술이 침인지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인지 모를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혀가 위험하리만치 새빨갰다. 어둠을 핑계로 차마 모른 체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자, 잠깐만….”
더듬더듬 말을 이으며 재환은 한영의 어깨를 조금 더 뒤로 밀었다. 일말의 저항 없이 한영은 순순히 거리를 벌려 주었다. 딱 그만큼 재환에게 얄팍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다른 건 몰라도, 더 이상 이 행위를 진행시키기에 장소가 부적절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빗물에 젖어 온몸에 들러붙은 옷가지도 슬슬 성가시게 느껴졌다. 사실은 다 아니고, 그저 조금 시간을 벌고 싶은 것뿐인지도 몰랐다.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씻고 나올게. 아니면…, 네가 먼저 씻을래?”
누구에게도 꺼내 본 적 없는 대사를 읊는 목소리가 본의 아니게 조금씩 떨렸다. 이를 눈치챈 건지, 다시 순순한 태도로 돌아간 한영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유야 어쨌든 재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티 안 나게 폭 숨을 내쉰 재환은 철퍽거리는 운동화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양말을 벗어 대충 구석에 던진 뒤 스탠드 불을 켤 때까지도 한영은 현관에 멀뚱히 서 있었다. 이를 보고 잠깐 멈칫했던 재환은 다시 한영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하얀 팔목을 붙잡았다.
“신발 벗고 빨리 들어와. 바닥 젖어도 상관없으니까.”
아, 응. 대답하며 한 번씩 뒤꿈치를 밟아 로퍼 스타일의 신발을 벗은 한영이 머뭇머뭇 장판 위로 올라섰다. 그제야 한영의 손목을 놓은 재환은 쏙 화장실로 들어가 일단 수건 하나를 꺼내 왔다. 어쩌고 신장개업이 쓰인 노란색 수건을 휙 한영의 머리에 얹었다. 분홍색 머리칼과 색 대비가 다소 묘했다.
“금방 씻고 나올게.”
대답은 듣지 않고 얼른 다시 발을 틀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군데군데 나뭇결이 갈라진 문을 닫자마자 보다 긴 숨이 흘렀다. 하나 한영에게 ‘금방’ 씻고 나간다 말한 만큼 지체할 틈이 없었다. 흡반처럼 몸에 쩍 붙은 옷을 서둘러 벗고서 샤워기 앞에 섰다.
몸을 식혀야 하는지 덥혀야 하는지 고민하던 재환이 그냥 가운데 둔 레버를 위로 올릴 때, 한영은 현관 바로 옆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세운 무릎에 쭉 뻗은 팔을 얹고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속으로 되새겼다.
재환을 겁먹게 하지 말 것. 놀라게 하지 말 것. 몰아붙이지 말 것.
사실 어느 쪽도 자신 없었다. 그러나 종전 재환을 화장실로 도망치게 한 것과 같은 일을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한영은 절절 끓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오늘, 재환에게 끔찍한 기억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지워야 할 기억으로 남기도 싫었다. 이미 오늘 재환에게 미움받을 만한 일은 충분히 많이 했다.
하나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한영은 굳은 다짐이 비바람 앞 갈대처럼 흔들리는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유한영.”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난 한영은 새하얀 불빛을 등지고 화장실 문간에 선 남자를 혼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씻는다는 것치고 너무 빨리 나와서가 아니라, 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데에 원인이 있었다. 가히 눈앞이 노래지는 어찔함에 한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 하나 대지 않고 상대를 순시에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재환은 태연자약하게 제 할 말을 꺼냈다.
“같이 씻을래? 아무래도 옷 젖은 거, 찜찜할 것 같아서.”
눈가까지 벌겋게 물든 한영은 차마 답을 하질 못하다, 끝내 성큼성큼 재환에게 다가갔다.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어깨를 덥석 붙잡고 다소 힘주어 화장실 안으로 밀었다. 당황한 재환이 ‘어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를 악물고 문을 당겼다. 쾅, 소리와 함께 닫힌 문짝에 손바닥을 짚고 이마까지 붙이고서야 막혔던 숨을 쏟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은 찰나와 같았다.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문고리로 한영은 냅다 두 손을 뻗었다. 절대로 뒤에서 당기지 못하도록 손아귀와 팔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야! 왜 그러는데?’ 하고 어이없다는 듯 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매서운 투였으나 한영은 이대로 재환이 문을 열게 놔둘 수 없었다.
“야! 유한영!”
“재환아. 나, 나 괜찮으니까 먼저 씻어. 그냥 빨리 씻어.”
하마터면 제발, 이라고 덧붙일 뻔했다. 만약 여기서 재환이 더 곤란한 고집을 부린다면 제발 그러지 말라며 정말로 빌지도 몰랐다. 그만큼 한영은 저를 잘 알았다. 저 좁고 훤한 공간에서 재환의 맨몸을 마주하면, 그때는 그냥 키스 몇 번으로 절대 끝내지 못하리라. 온몸에 입 맞추고, 빨고, 심지어 혀까지 집어넣게 될 것이다. 죽었다 깨어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니 하얀 손등에 울툭불툭 핏줄이 돋아날 때까지도 한영은 문고리를 놓을 수 없었다.
“하…. 그래.”
난데없이 벌어진 소란 아닌 소란에 황당함을 삭이던 재환은 결국 닫힌 문을 쳐다보며 떨떠름히 답했다. 사람이 기껏 생각해 줬더니만. 아무리 서로 입술을 맞대고 혀를 얽었다 해도 한영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재환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 주었다. 그렇다고 이런 별스럽지 않은 일로 더 실랑이하기도 그랬다. 감기 걸려도 난 모른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샤워기 앞으로 가 섰다.
그래도 물에 젖은 사람을 저대로 밖에 두기가 뭐해, 재환은 가능한 한 서둘러서 씻었다. 머리도 얼른 감고, 몸에 비누칠도 잽싸게 했다. 이토록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한영이 알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후딱 씻은 후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화장실을 나섰는데, 한영은 또 이해 못 할 반응을 보였다. 삐진 아이처럼 끌어안은 무릎에 푹 얼굴을 파묻은 채 재환에게 빨리 옷이나 입으라고 꿍얼거렸다. 누가 누구 집에 온 건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씻으러 들어간 한영은 갈아입을 옷을 굳이 화장실 문 앞에 놓아 달라고도 했다. 옷이야 몇 번이든 빌려줄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서로 내외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이제 더한 일도 하게 될 텐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재환은 가진 것 중 그나마 크기가 넉넉한 옷을 골라 화장실 앞에 잘 개어 두었다. 특별히 포장을 뜯지 않은 새 팬티도 얹었다. 재환 나름의 손님 대접이었다.
다만 제게는 딱 맞던 바지가 막 씻고 나온 한영의 복사뼈 위로 껑충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재환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떨떠름한 마음이 들었다. 반대로 자신이 그의 옷을 빌려 입었을 때는 바짓단이 바닥에 질질 끌렸던 게 생각났다. 그 알록달록한 옷은 아직도 잘 입고 있나. 이렇게 속 편한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비누 냄새 폴폴 풍기며 가까이 온 한영이 매트리스 끝자락에 걸터앉는 순간, 허리에 비스듬히 베개를 받쳐 벽에 기대앉아 있던 재환은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웠다. 동시에 잠시 잊고 있던 긴장이 빠르게 발끝부터 차올랐다.
얼마나 오래 씻었는지, 양 뺨이 다 발갛게 물든 한영의 얼굴을 오래도록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여 갑자기 부산스러워진 눈동자가 이리저리로 굴러다녔다. 날름 나온 혀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손에 쥔 핸드폰에서는 시간이나 때우려 틀어 놓았던 외국 밴드의 라이브 영상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오래… 씻었네.”
“미안.”
미안하단 소리 좀 그만해라, 라는 타박은 건조해진 입 안을 맴돌기만 했다. 그리하여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 멈추지 못한 영상의 작은 노랫소리가 미지근한 침묵 언저리를 배회했다.
재환이 꾸물꾸물 손가락만 움직여 핸드폰 화면 속 정지 버튼을 누를 즈음, 갑자기 푹 상체를 숙인 한영이 매트리스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그대로 천천히, 재환에게 다가왔다. 꼴깍, 마른 점막을 뚫고 침이 넘어갔다. 곧게 섰던 허리는 다시 기울어 베개와 함께 벽에 붙었다.
매트리스 위를 기어 어느새 한 뼘 거리까지 다가온 한영이 빤히 재환을 보았다. 주황색 스탠드 빛을 정면으로 받은 얼굴이 비 내리는 골목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품고 있었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다가도, 또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차갑디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욱 커진 긴장만큼 쿵쿵,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빨리 한영이 아무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재환의 바람과 달리 한영은 매트리스 옆, 키 낮은 협탁으로 긴 팔을 뻗었다. 톡,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스탠드 불이 꺼졌다. 이윽고 준비도 없이 맞이한 어둠은 재환이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상대의 윤곽조차 구분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제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치 부푼 긴장이 온몸을 뻣뻣이 굳혔다.
“유한영….”
“재환아.”
낮게 잠긴 목소리가 올올히 솜털이 선 귓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응…, 하고 재환은 조금 뜸 들여 답했다. 비슷한 틈을 두고 다음 말이 이어졌다.
“나, 이제 너랑 섹스할 거야.”
“…응.”
“괜찮아?”
“응.”
아마, 저 괜찮냐는 물음에는 제법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터다. 어쨌거나 이제 와 마음을 물릴 생각이 없던 재환은 긍정의 답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한영이 남자라는 사실은 새삼 상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남자끼리 어디를 써서 섹스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도 않았다. 물론, 한영이 어느 입장이기를 바라는지도 진작 눈치챘다.
“내 거…, 그니까 내 거를 너한테….”
“알아. 뭔 말인지.”
이제야 슬슬 이목구비가 보이기 시작하는 한영과 눈을 맞춘 재환은 다시금 제가 내린 결정에 쐐기를 박았다. 다 알았으니까, 이제 네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어쩌면 나도 원했던 그 일을 하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대답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돌아왔다.
“음….”
바스락, 매트리스 위에 깐 얇은 시트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따듯한 숨결이 입 안으로 물결쳐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재환은 그것만으로 삐죽삐죽 솟구치던 긴장이 차츰 수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한영의 키스는 달콤하고 상냥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보다 꾹 닫은 재환은 언제 빗속에 서 있었냐는 양 보송보송해진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팔뚝에 언뜻언뜻 스치는 머리칼만이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서두름 없이 재환과 혀를 문지르던 한영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었다. 등 쪽에서 어깨를 붙잡아 가볍게 끌어 내리자, 재환의 등이 납작한 베개를 타고 스르륵 매트리스 위까지 내려왔다. 덩달아 미끄러진 베개가 뒤통수에 닿았다.
엎드린 한영 아래 완전히 누인 자세가 된 재환은 턱을 뒤로 젖혀 보다 입 맞추기 쉬운 각도를 잡았다. 딱히 상대가 요구한 건 아니었으나, 자연스레 그리 행동하게 되었다. 살짝 세운 무릎이 한영의 옆구리에 닿았다.
혀를 풀어 재환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쪽쪽 빨던 한영은 천천히 손을 밑으로 내렸다. 판판한 배를 덮은 면 티셔츠 자락 아래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었다. 뒤이어 손끝이 배꼽 주변에 닿았을 때, 재환의 몸이 작게 흠칫 튀었다. 이를 기민하게 알아챈 한영은 손을 도로 밖으로 뺐다. 슬쩍 미간을 좁힌 재환이 한영과 입술을 붙인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응.”
한영 또한 입술을 떨어뜨리지 않고서 답했다. 다시 옷자락을 파고든 손가락이 제법 예쁘게 근육이 잡힌 배를 더듬었다. 그 간지러우면서도 야릇한 접촉이 재환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했다. 그러나 방금 뱉은 말이 있기도 하고, 또 영 싫지는 않은 느낌이라 재환은 그대로 한영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한 팔로 베개 옆을 짚은 한영이 입맞춤을 이어 가며 거듭 부드럽게 재환의 배를 쓰다듬었다. 맨살에 닿는 손바닥의 감촉은 분명 평소대로 서늘한데, 재환은 한영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자꾸 뜨끈뜨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손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탓이 컸다.
“으응….”
보다 옷 속 깊이 밀려들어 온 손이 가슴 부근을 만졌다. 그러다 엄지 끝이 돌올하게 솟은 유두를 스쳤을 때, 한영과 맞닿은 재환의 입술 새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렀다. 저조차 처음 듣는 젖은 음성에 재환은 발가락을 움칠 굽혔다. 얼른 재환에게서 입술을 떨어뜨린 한영이 다른 손으로 굵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어르듯 속삭였다.
“만지기만 할게.”
만지지 않으면 또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재환은 이윽고 뺨에 닿아 오는 커다란 손바닥의 포근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입매를 휜 한영이 동그랗게 드러난 재환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그게 또 그렇게 심장을 간질거리게 만들어 재환은 어깨를 슬쩍 움츠렸다.
이제는 재환의 뺨과 이마에 쪽, 쪽 입 맞추며 한영은 정말 조심스레 작은 돌기를 살살 어루만졌다. 눈을 내리깐 재환의 시야에 잡히는 건 가슴께에서 불룩 솟아오른 티셔츠뿐이었지만, 그 아래로 하얀 손이 제 살결을 만지고 있음을 인지하자 저절로 허리가 들썩였다. 단단한 어깻죽지에 얹힌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재환아, 너 귀여워.”
하지만 귓가에서 울리는 다음 말에는 콱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만져도 된다고 했지, 저런 낯부끄러운 대사를 읊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 끈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한영이라는 사실이 쿵쾅대는 재환의 가슴에 적잖은 당황을 심어 주었다. 저와 귀엽다는 표현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음을 잘 아는 까닭도 있었다.
“야….”
“응?”
귓불에 입술을 문지르던 한영이 고개를 틀어 재환과 눈을 맞췄다.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 아래 자리한 모래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선명한 빛을 틔우고 있어, 재환은 여지없이 타박이나 핀잔의 말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그냥 주름 하나 없는 것 같은 도톰한 입술에 제 입술을 묻었다. 살짝 커졌던 한영의 눈이 이내 스르르 감겼다.
“으음…, 읏….”
잠깐 움직임을 멈췄던 엄지가 이제는 제법 딱딱해진 유두를 살금살금 둥글렸다. 바짝 깎은 손톱으로 아프지 않게 긁기도 했다. 그곳에서 퍼지는 간지러우면서도 찌릿찌릿한 느낌이 재환은 좋은 건지 불쾌한 건지 통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감각임은 분명했다. 타인의 손으로든 제 손으로든 지금껏 만질 일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한영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사내새끼 가슴을 정성스럽게 매만지는지 모르겠다.
재환은 알지 못하나, 한영의 마음은 이렇게 재환을 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노골적이고 농염한 일까지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진작 충만해 있었다. 이를테면, 물거나, 빨거나, 깨물거나…. 제 손길에 몸체를 딱딱히 굳힌 저 작은 살점을 입 안에 넣고 살살 굴리면 정말이지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리하면 재환이 더 고운 목소리를 내 줄지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한영은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멋대로 선을 넘는 순간, 재환이 제 품에서 훨훨 달아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이 천금 같은 시간을 절대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재환과 이러는 꿈만 몇 번을 꿨고, 또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몽정하고 자위했는데. 고추가 까지지 않은 게 다 용했다.
그 고추가 바지 안에서 괴로울 만치 부푼 것을 느끼며, 한영은 재환과 진득하니 혀를 얽었다. 엄지로는 계속해서 유두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움직이는 대로 콩알보다 작은 돌기가 요리조리 튕기는 감각이 벌건 속을 부채질했지만, 한영은 쓸 줄도 모르는 참을 인 자를 필사적으로 머리에 새겼다.
“후으…. 읏….”
참기 힘든 사람은 한영만이 아니었다. 빡빡 씻어 낸 몸을 어느새 땀으로 촉촉이 적신 재환은 한영의 허리를 가둔 무릎을 꿈틀거리며 연신 낮게 신음했다. 그 와중 사타구니를 감싼 드로어즈가 영 불편하게 느껴져 미간을 계속 옴짝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드 같은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함은 알겠지만, 다 됐고 빨리 바지를 벗고 싶었다. 어차피 서로 똑같은 걸 달고 있는데, 괜히 부끄러움에 겨워 숨길 이유가 없었다. 성미 급한 재환은 결국 한영의 가슴팍을 슬그머니 위로 밀어냈다.
“야. 안 되겠다.”
“어…?”
“바지라도 좀 벗어야겠어.”
반쯤 상체를 세운 한영은 제 밑에서 엉덩이를 꿈지럭거리는 재환을 망연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말릴 틈도 없이 재환의 양 엄지가 검정 트레이닝팬츠의 밴드 부분에 걸렸다. 그러더니, 이내 바지가 쑥 하고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그것도 속옷과 함께.
동시에 일자로 툭 튀어 오른 성기가 눈에 담기는 순간, 사고가 정지된 한영의 귓속에서 시끄러운 이명이 울렸다. 흡사 앰뷸런스가 지나갈 때 나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위험 신호라는 뜻이었다.
대뜸 맨몸으로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도 언뜻 봤다만, 거짓 없이 재환의 성기는 너무 예뻤다. 지나치게 예뻤다. 발기하니 더 예뻤다. 어떻게 저런 곳까지 저럴까, 라는 생각을 안 하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얼굴만 잘생긴 것으로도 충분하거늘, 이쯤 되니 한영은 괜히 재환이 야속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저처럼 따로 관리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숱 적은 음모는 딱 적당한 면적으로 사타구니를 살포시 덮고 있었고, 그 아래 꼿꼿이 솟은 기둥은 굵기며 길이며 나무랄 데가 없었다. 주위가 많이 어둡긴 하지만, 깨끗한 얼굴색처럼 색도 고와 보였다. 징그럽게 우둘투둘 핏줄이 도드라지지도 않았다. 동그란 귀두는 또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그 가운데 옴폭 팬 부분에 맺힌 이슬 같은 물방울이 한영에게 숨 턱 막히는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절로 혓바닥에 신침이 고였다.
“야, 유한영….”
아예 넋을 빼놓고 있던 한영은 느릿느릿 위로 시선을 옮겨 잘생긴 성기의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머리와 심장을 강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좀 창피한데.”
“아…, 응…. 미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려 해도 그러기가 어려운 한영의 반응에 재환은 눈머리를 구겼다. 사람 민망하게, 하고 중얼거리며 발끝에 채는 옷가지를 툭 매트리스 밖으로 떨구었다. 이제야 하반신의 답답함이 해소되어 좀 살 것 같았다. 뒤이어 눈알만 슬쩍 움직여 저와 마찬가지로 불룩하게 부푼 한영의 가랑이를 일별했다.
“넌?”
“어?”
“넌 안 벗느냐고.”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건넸을 뿐인데, 한영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미묘한 빛으로 바뀌었다. 살갗까지 발라낼 기세로 사람의 거기를 뚫어져라 볼 때는 언제고. 그러더니 한영은 살살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뭐…, 그래.”
싫다는 놈을 억지로 벗기는 취미는 없었다. 그 안에 숨은 게 미친 듯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보나 마나 저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더 강요하거나 캐물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내가 조금 성급했나 하는 생각이 설핏 재환의 뇌리를 스쳤다. 남자와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없어, 도대체 어떤 수순대로 일이 진행되는지 알 도리가 만무했다. 단, 유두 말고 만져야 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알았다.
“저기, 있잖아….”
“응?”
그새 다시 몸을 기울여 상체를 밀착한 한영이 매끈한 모양새의 눈썹을 들추었다 내리며 재환에게 답했다. 자연히 아래로 늘어진 티셔츠 자락이 재환의 사타구니를 스쳤다. 남이 입은 옷이 맨살에 닿는 감각이 일순 재환의 피부 위로 오스스 잔소름을 일으켰다. 그러나 크게 티 낼 정도는 아니었다.
“거긴 안 건드려도 돼?”
“거기?”
“엉덩이.”
불현듯 한영의 표정에 깃든 당황과 함께 찾아온 고요가 둘 사이를 메웠다. 아예 말문을 닫아 버린 한영을 보며 재환은 쪽팔림과 후회의 중간쯤 걸쳐진, 조금 더러운 기분에 잠겼다. 아무래도 제가 마음만 급해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환에게도 충분히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홧김에서든 뭐 때문이든 섹스하자는 한영의 말에 그러자 답한 건 저였다. 그래서 그간, 재환은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려 애썼다. 샤워하다 비누칠한 제 가운뎃손가락을 노려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그중 몇 번은 엉덩이 사이로 슬쩍 가져다 댄 적도 있다. 물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번번이 욕을 뱉으며 포기했지만, 한영과 섹스하는 데 있어 그것, 혹은 그곳이 가장 난제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럼….”
잠시간 닫혀 있던 붉은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재환은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아래로 늘어뜨린 한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어질 말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일단 한 번 쌀래?”
“어?”
“싸면, 몸이 릴랙스 돼.”
재환은 미심쩍다는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한영의 말에 의심을 품거나 반기를 들기에는, 남자끼리의 섹스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적었다. 왼쪽으로 쓱 눈을 굴려 잠깐 생각을 정리하던 재환은 확인차 물음을 건넸다.
“자위하라는 거야?”
바지까지 훌렁 벗은 판에, 하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 마음가짐을 증명하듯 오므린 손가락으로 슬쩍슬쩍 성기를 쓸어 올리며 한영의 답을 기다렸다. 발기 상태가 꽤나 오래 이어진 터라 슬슬 시원히 싸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흘긋 눈을 내려 재환 하는 양을 본 한영은 목울대를 꿀렁이며 한 번 크게 침을 삼켰다. 덤덤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 속 뒤집는 행동을 하는 재환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상대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영은 재환의 그런 대담함이 많이 얄밉고, 많이 꼴렸다.
“해, 말어.”
그러다 꼴리는 쪽으로 훅 마음이 기울어 버리고 말았다.
“빨아도 돼?”
“뭐?”
“빨고 싶어, 재환아.”
성기를 매만지던 손이 우뚝 멎었다. 눈썹 사이에 힘을 준 재환은 고민도 없이 대꾸했다.
“그러지 마.”
아…. 한영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것이 얼핏 재환의 눈에도 비쳤다. 하나 과거 여자 친구한테도 시켜 본 적 없는 일을 한영에게 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부끄러움이라든가, 창피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대신 얼마든지 다른 방법도 있을 테다.
“손으로 해 줘. 그게 나을 것 같아.”
“…응, 그럴게.”
최대한 담담하게 답하며 한영은 풀썩 재환 옆에 등을 대고 누웠다. 재환을 향해 몸을 모로 틀자, 재환도 방향을 돌려 한영을 마주 보았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거리에서 두 사람은 잠시간 가만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종전의 아주 작은 갈등을 상쇄하고자 하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키스할게.”
“응.”
대답이 있자마자 살그머니 눈을 감은 한영은 부쩍 조심스러워진 움직임으로 재환에게 입술을 포갰다. 촉, 초옥 소리를 내며 연한 살결이 거푸 붙었다 떨어졌다. 그 틈을 타 다부지게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목을 찾아 쥔 손이 슬쩍 제 허리로 팔을 두르게 했다.
한영이 이끄는 대로 미끈한 허리에 팔을 얹은 재환은 다음 순간 ‘읏….’ 하며 짧은 숨을 토했다. 아직 벗지 않은 윗도리 아래로 내려온 손이 부드럽게 성기를 쥔 까닭이었다. 이윽고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서로의 혀끝을 맞대는 정도의 입맞춤으로 변모했다. 한영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흣….”
한영은 기둥을 죽 쓸어 올릴 때는 손목을 안으로 감고, 아래로 훑을 때는 반대 방향으로 풀었다. 재환의 성기가 워낙 곧은 탓에 이 일련의 과정에 막힘이 없었다. 여기에 귀두 끝에서 몽글몽글 새어 나온 선액이 함께 비벼지며 기둥 따라 오르내리는 손의 움직임이 한층 더 수월해졌다. 다만 그로 인해 찔꺽찔꺽 울리는 습한 소리가 재환의 정신을 조금 산란하게 했다. 민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응, 읏…. 후으….”
물론 자신의 목구멍 아래에서 연신 끓어오르는 더운 신음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재환은 다른 사람 손에 이렇게 버젓이 성기를 쥐여 준 적이 없었다. 행위 자체는 평소 저 스스로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상황이 낯선 탓인지, 한영의 손이라 그런 건지 자꾸 내어 본 적 없는 목소리가 비어졌다. 갈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입맞춤 때문에 소리를 제대로 터뜨릴 수 없음에도 그랬다.
“으, 읏…!”
사정감은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찾아왔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옆으로 흘러 베개를 적시는 것도 모르고, 입을 크게 벌린 재환은 한영의 입 속으로 툭툭 끊어지는 숨을 토했다.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며 복부에 꽉 힘이 들어갔다.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을 때는 이미 한영의 손바닥에 거하게 정액을 싸지른 후였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보나 마나 상당한 양이었다. 재환의 짐작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재환의 이마에 입술을 누른 한영은 허연 정액으로 질척해진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뜨끈하면서도 미끌미끌한 감촉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도리어 날름 혀로 핥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입으로 고추를 빠는 데에도 거부감이 있는 재환을 펄쩍 뛰게 하기 충분한 짓이었다. 그러니 참아야 했다.
“야…, 닦아야지.”
엉큼하다 못해 시커먼 속내를 들킨 걸까. 끙, 하며 몸을 튼 재환이 협탁에 놓인 티슈 곽에서 쓱쓱 티슈를 뽑아 한영의 손바닥을 직접 꼼꼼히 닦아 주었다. 사실 재환에게 별다른 뜻은 없었다. 남의 손에 좋다고 정액을 줄줄 싸 버린 게 조금 창피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바지 한 장 벗지 않은 한영의 가랑이 부근으로 흘긋흘긋 눈이 갔다.
저 자식, 괜찮나.
“너도… 해 줘?”
“응?”
“네 것도 만져 줘?”
귀찮은 마음이 앞서 꽁꽁 뭉친 티슈를 휙 매트리스 밖으로 던진 재환은 재차 한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한영은 애매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옷도 벗기 싫어, 만져 주는 것도 싫어. 진짜 나랑 섹스하고 싶은 게 맞긴 한가, 라는 옹졸한 의구심이 들 즈음 한영이 불쑥 생뚱맞은 질문을 건네 왔다.
“재환아. 집에 로션 있어?”
“로션?”
“응. 젤 있으면 더 좋고.”
아…. 다음 말이 있고 나서야 재환은 한영이 대뜸 저런 걸 묻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 그냥 넣을 수는 없겠지.
아직 사정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몸을 꾸물꾸물 일으킨 재환은 바닥으로 두 다리를 내디뎠다. 어느덧 제 크기로 돌아간 성기나 훤히 드러난 엉덩이는 가릴 생각도 않고 저벅저벅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평소 쓰는 로션 통을 용케 한 번에 찾아 집어 들었다. 기실 씻고도 안 바르는 날이 많아 불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내용물은 아직 반도 줄지 않은 상태였다.
그사이 매트리스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한영에게 도로 다가가 로션 통을 내밀었다. 그리고 저도 한영을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기서부터는 진짜 오롯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자, 재환은 살짝 막막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뭐 어떡하면 돼?”
그 마음이 하는 수 없이 표정이나 말투에서 묻어났다. 땀에 젖은 재환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 준 한영은 한 손에 들어오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긴장, 걱정 따위가 스민 새카만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 상대를 안심시키는 말을 속삭였다.
“재환아. 아프게 안 할게. 걱정하지 마.”
꼭 아플 게 겁나서 불안감을 내비친 건 아니었지만, 재환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심 한영이 이렇게 듬직해 보인 적이 있었나 싶기도 했다. 밴드를 할 때는 늘 제가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그를 이런 눈으로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영은….
“너 절대 힘들게 안 해. 믿어 줘.”
친애로 넘치는 키스가 이마에 와 닿는 순간, 재환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갑자기 갈빗대가 부서질 것처럼 그 안에 자리한 심장이 쾅쾅쾅 위험하게 펌프질을 해 댔다. 벌게진 얼굴은 방 안에 깔린 어둠으로 그럭저럭 가릴 수 있다 쳐도, 가슴팍에서 울리는 이 소리는 창밖에서 이어지는 빗소리에 가려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엇…!”
냅다 한영의 옷깃을 쥐어 잡은 재환은 그를 풀썩 매트리스 위로 넘어뜨렸다. 평균 신장보다 제가 얼추 큰 편이란 것도 알지만, 그만큼 무게도 더 나갈 테지만, 일단 그런 것 따위 모조리 잊고 한영 위에 몸을 겹쳐 입맞춤을 퍼부었다. 여기에는 아직 마음 저변에 남은 일말의 주저함을 잊고자 하는 바람도 한몫했다.
“후….”
“으, 음….”
조급하게 입술을 문대고 혀를 얽을 때마다 면 재질의 바지에 가려진 한영의 성기가 재환의 샅에 비벼졌다. 그럴수록 딱딱한 정도나 모양이 옷감 너머 실감 나게 전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실물을 마주하면 같은 남자로서 적잖이 자존심이 상할 만한 수준의 물건일 터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재환은 또다시 차오르려는 불안과 걱정을 한영이 제게 건넸던 달콤한 언사로 애써 지워 냈다.
아프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믿어 달라고.
너라면, 정말 그렇게 해 줄 것 같았다.
* * *
“괜찮아?”
“아, 응…. 읏, 잘 모르겠…. 후….”
한영을 마주 본 채 모로 누운 재환은 잘록한 허리에 얹은 허벅다리를 연신 움찔거렸다. 비슷하게 콧잔등에도 푹 주름이 잡혔다 펴지길 반복했다. 걱정한 대로 아프지는 않다만,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이 괴이쩍은 감각을 당최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미끌미끌하고, 질척하고, 간지럽고, 빡빡하고. 혼재할 수 없는 온갖 불쾌감이 뒤섞여 있었다. 거기에 찰박찰박 점성질의 액체가 늘어지고 뭉개지는 소리가 가히 귀에 거슬렸다. 쉼 없이 한영이 뺨이나 입술에 입 맞춰 주지 않았다면 진작 거기서 손가락 빼라고 성냈을지 모를 일이다.
“아프진 않고?”
“아니, 아프진 않은데…. 아아…!”
일순 손가락이 내벽을 긁는 듯한 느낌에 재환은 팔꿈치를 접어 붙잡고 있던 한영의 양어깨를 콱 움켰다. 씨발, 이라는 소리가 앙다물린 앞니를 쳤다. 그래도 이런 자리,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어떻게든 참았지만, 이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지 자신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또 퍅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씨발, 그냥 넣으라고!’라고 윽박지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으로선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환은 더욱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양미간에 힘을 주었다.
“재환아, 뺄까? 응…?”
재환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양 곧 죽어도 도리질했다. 그런 재환의 이마에 쪽, 입 맞춘 한영은 가운뎃손가락 하나를 겨우 빠듯이 물고 있는 구멍 안에서 다시금 찬찬히 마디를 접었다 폈다. 배를 향한 쪽, 내벽에 도톰히 튀어나온 부분은 부러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 또 재환이 당황하고 말 것이다.
아쉬운 대로 한영은 구멍 주위를 배회하던 검지 끝으로 조금 팽팽해진 주름을 더듬었다. 얇은 눈꺼풀을 내려 앉히고 지금 제 손으로 만지고 있는 재환의 그곳을 눈앞에 그렸다. 아직 시야에 담아 보지는 못했지만, 한순간 숨을 멎게 만든 성기처럼 재환은 여기도 예쁠 터였다. 손끝의 감각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성기도 그러했으니, 분명 색도 연연하며 고운 빛깔을 띠고 있으리라.
그 어여쁜 곳에 혀끝 한 번 댈 수 없다는, 못내 울적한 마음을 입술에 닿은 뺨의 보드라운 감촉으로 덮었다. 발긋발긋 열이 오른 재환의 뺨에 연거푸 입술을 누르며, 한영은 부지런히 따뜻하고 축축한 구멍 안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체하지 않아야 어서 손가락을 하나라도 더 넣을 수 있었다.
“후, 으…. 야, 이거 얼마나 해야 돼…?”
영 편치 않은 듯 재환이 뾰족한 눈머리를 찡긋거리며 한영에게 물었다. 쭉 뻗은 장딴지에 닿은 발끝이 불안하게 움칠거렸다.
“오래 해야 네가 안 아파.”
“그니까 얼마나 오래….”
한영은 쭉 떨어진 채 좀처럼 입꼬리가 올라갈 기미가 없는 재환의 입술에 쪽, 하니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미안함과 달래는 마음이 함께 녹아든 입맞춤이었다.
“조금만 더.”
빽빽이 돋아난 속눈썹 아래서 슬그머니 눈동자를 내리깐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함을 삭이듯 한영의 어깨에 얹힌 손으로 티셔츠의 천을 살짝 그러쥐었다. 그 작은 초조함까지 덜어 주고 싶었던 한영은 재환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만 내용이 재환을 조금 흠칫하게 했을 뿐이다.
“손가락 하나 더 넣을게.”
빠듯한 틈새로 허연 로션이 질금질금 새어 나오고 있는 구멍에 손가락 하나가 더 파고들었다. 읏, 하며 아랫입술을 깨문 재환은 내처 한영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넓은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옆얼굴이 맞닿으며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아 촉촉한 머리칼이 재환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동시에 저와 같은 샴푸를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향긋한 향이 콧속 점막으로 스몄다. 그것이 재환에게 작은 안도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찰나와 같았다.
“후으…!”
하필이면 길기도 한 손가락이 굼질굼질 보다 안쪽으로 파고드는 순간, 꽉 깨물린 재환의 잇새로 억눌린 숨이 흘렀다. 묽어질 대로 묽어져 한영의 손목굴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 로션이 미리 시트에 겹쳐 깔아 둔 수건 위로 떨어졌다. 비슷한 양이 힘을 줘 파르르 떨리는 엉덩잇살을 타고 흘렀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한영은 달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재환이 대답하기 어려운 말을 속삭였다.
“힘 조금만 풀어 봐.”
네가 해 봐. 재환은 속으로만 불만 섞인 소리를 중얼거리며 복부와 엉덩이를 점령한 긴장을 어떻게든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근육이 느슨히 풀어질라치면 안에서 손가락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바람에 또다시 콱 힘이 주어졌다. 이물감을 밀어내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재환아.”
“으, 응….”
“아직 많이 기분 나빠?”
살짝 상체를 뒤로 뺀 한영이 재환과 지그시 눈을 맞추며 물었다. 몇 번 답을 피했던 것과 다르게 재환은 응, 하고 순순히 답했다. 제 얼굴만 봐도 훤히 알 수 있을 사실을 굳이 한영에게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안에 조금 만져도 돼?”
‘뭐?’ 하며 재환은 눈썹 사이를 폭 움츠러뜨렸다. 언짢은 기색이 묻어나는 표정에 의문이 함께 떠올랐다. 한영 하는 말이 듣기 싫다기보다, 잘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만지고 있잖아.”
다소 떨떠름한 대꾸가 나갔다. 이미 손가락을 넣어 자신은 절대 만지지 못할 곳을 실컷 만지고 있는데, 어떻게 더…. 그때, 뜨끈한 속살에 감싸여 있던 손가락이 대뜸 한 지점을 꾹 눌렀다.
“윽…!”
눈을 크게 뜬 재환은 참을 틈도 없이 단말마를 터뜨렸다. 일순간 눈앞이 번뜩이는 어찔한 자극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옆으로 누워 타인의 허리에 얹은 허벅지, 어깨를 안은 손이 죄다 발발 떨렸다. 손가락을 문 주름이 멋대로 옴찔거리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한영이 어딘가 만져서는 안 될 곳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여기, 이렇게.”
순서가 뒤바뀐 설명이 이미 충격을 한 아름 안겨 준 행위를 뒤따랐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을 뻐끔거리던 재환은 겨우 경직된 혀를 움직였다.
“방금 그거…, 뭐야….”
대답 대신 재환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꽉 감싼 한영이 별안간 휘딱 몸을 틀었다. 낡은 스프링이 삐거덕거리며 재환의 몸이 매트리스에 등을 댄 한영 위로 겹쳐졌다. 단단한 어깨 너머로 베개에 코를 박을 뻔한 재환은 가까스로 고개를 틀어 숨 쉴 공간을 확보했다. 귓구멍 가까이 붙은 입술에서 말끝이 올라가는 물음이 아닌 통보의 언사가 떨어졌다.
“좀 더 만질게.”
“으, 읏…. 아흑…!”
길쭉한 손가락 끝이 종전의 그 위험한 곳을 작정한 듯 꾹꾹 눌러 젖히기 시작하자 숨넘어가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회음부를 타고 아예 물처럼 줄줄 흐른 로션이 맞닿은 상대의 바지를 적셨다. 그 사이에 낀 성기로 삽시에 피가 몰려 답답한 통증이 번졌지만, 저 아래에서 연신 전기 오르듯 저릿저릿 번지는 괴상한 감각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야, 유한…, 윽…!”
부드러운 음으로만 구성된 이름이 끝까지 발음되지 않았다. 굽어든 발끝으로 득득 시트 위를 긁던 재환은 결국 곱게 개어 벽 쪽으로 붙여 두었던 이불까지 매트리스 밖으로 차 버렸다. 그 와중에도 베개 위로 옆머리를 누르는 손은 절대 거두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방식으로 구멍을 휘젓는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우, 응…. 후윽….”
그럴수록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비어지는 신음이 민망한 곡조를 띄었다. 제가 내는 소리라고 인정하기에는 너무 높고, 또 너무 헐떡거렸다. 스스로도 듣기 싫은 그 소리를 한영에게는 더더욱 들려주기 싫었지만, 지금의 재환으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조금쯤 함께 흐른 침이 베갯잇에 작고 축축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재환아, 한 번 더 쌀래?”
싫어, 안 싸…! 재환은 끅끅 신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생소한 느낌이 지속되면 정말 성기를 건드리지 않고도 싸 버리는 기겁할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엉덩이 안쪽에 퍼부어지던 위험천만한 자극이 멎었다. 내벽에 푹 파묻힌 손가락은 아직 빠져나가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 재환은 한 숨, 아니, 열 숨은 돌릴 수 있었다. 머리통을 감싼 손바닥이 땀에 전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놀랬어?”
“존나….”
상대의 가슴에 맞닿은 가슴팍을 천천히 부풀렸다 꺼뜨리며 넋 나간 표정으로 답했다. 베개에 뺨을 댄 얼굴이 벽을 향해 있어 이토록 풀어진 낯을 한영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죽는 줄 알았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려나.
“이제 그건 하지 마.”
“응….”
어렴풋한 대답이 있고 나서야 재환은 슬그머니 상체를 세워 한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이 아직임을 한영도 알고, 저도 알았다. 이쪽이 보내는 눈빛으로 그 생각을 눈치챈 듯, 재환의 뒤통수에 손을 감은 한영이 고개를 들어 이마에 쪽 입을 맞춰 왔다.
“콘돔 있어?”
“아마, 책상 서랍에.”
마지막으로 쓴 지 몇 년이나 지난 물건의 행방을 더듬으며 답하자, 살포시 어깨를 붙잡은 손이 조심스럽게 재환을 시트 위로 눕혔다. ‘내가 가져올게.’ 한 한영은 훌쩍 일어서서 책상 앞으로 갔다.
“거기 말고 한 칸 밑에.”
한쪽 팔을 베고 옆으로 누운 재환은 책상 첫째 서랍을 여는 한영에게 휙휙 손짓했다. 훤히 드러난 두 다리를 살짝 옹크리며 제 공간에 제 옷을 입고 선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윤곽을 흐릿하게 비추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리가 긴지, 목덜미가 미끈한지, 머리 색이 고운지 따위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이마 아래로 삐죽한 선을 그리며 솟은 코도 그렇게 높을 수 없었다.
홀린 듯 잘난 실루엣을 감상하던 재환은 한영이 굽혔던 허리를 펴는 동시에 휙 몸을 벽으로 틀었다. 탁 서랍 닫는 소리가 울리고, 저벅저벅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장판 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몇 차례나 잊었다 복기하기를 반복했던 긴장이 다시금 가슴께를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주 본 벽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며 매트리스에 사람 한 명분의 무게가 얹혔다. 부풀던 긴장이 거의 가슴을 쾅쾅 내리치는 수준으로 커졌다.
“재환아.”
“어, 응….”
부러 등을 돌리지 않고 어물쩍 답했다. 그러자 벗지 않은 티셔츠 아래, 얼굴 대신 상대를 보고 있던 엉덩이 옆쪽으로 커다란 손바닥이 와 얹혔다. 쭈뼛 소름 돋을 만치 서늘한 감촉이 겹치고 있던 발끝을 움칠, 곱아들게 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맨살에 닿은 손바닥이 골반 밑으로 부드럽게 둔덕진 부분을 살살 쓰다듬었다.
“엎드릴래? 아니면 마주 보는 게 좋아?”
흠칫 옆으로 눈을 굴렸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린 재환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한영이 했던 많은 질문 중, 방금의 것이 가장 답하기 곤란한 질문일지 몰랐다. 엎드리는 건 꼴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고, 마주 보는 건 또 자신 없었다. 자근자근 아랫입술을 깨물던 재환은 결국 애매한 중책을 내놓았다.
“그냥 이대로 하면… 안 돼?”
나는 이렇게 벽을 보고, 넌 내 뒤통수를 보고 하자는 뜻이었다. 잠깐 말이 없던 한영이 이내 ‘응, 그러자.’ 하며 재환의 마음을 한결 놓이게 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재환은 얕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럼 재환이 네가 좀 불편할 수도 있어.”
“괜찮아.”
엎드려서 엉덩이를 대거나,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느껴야 할 민망함을 생각하면 그 정도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재환은 괜찮다는 대꾸가 고민도 없이 나갔다.
일언지하에 단호히 답하는 재환의 옆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던 한영은 둥글게 말린 등 뒤로 몸을 붙였다. 긴장으로 좁게 움츠러든 어깨를 꼬옥 손바닥으로 감쌌다.
“일단, 조금만 더 풀고.”
안도는 잠깐이었다. 허, 하고 헛숨을 터뜨리는 재환의 엉덩잇살을 비집고 다시금 찬찬히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이러다 밤이 다 가도록 섹스 못 하는 건 아닐까. 제법 그럴싸한 예감이 재환의 머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조금만 더’ 풀자던 한영은 거의 1시간이 지나도록 재환의 엉덩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코를 찡긋거리며 가시지 않는 불쾌감을 삭였지만, 이제 재환은 얼얼함 이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엉덩이고 구멍이고 죄다 흐물흐물 녹아 버린 것 같았다. 물론 밑에 깐 수건으로 녹아내린 것은 엉덩이가 아닌, 그 가운데로 몇 번이나 듬뿍 부어진 로션이었다.
“후으….”
입구와 내벽이 온통 녹신녹신해질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던 손가락 세 개가 마침내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끌미끌한 로션에 전 채로 동그랗게 벌어졌던 구멍이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스르륵 다물렸다. 손가락을 질척하게 적신 로션을 수건의 깨끗한 부분에 쓱쓱 닦아 낸 한영이 재환의 뒤통수 위로 입술을 눌렀다. 그 상태로 재환이 더없이 기다리던 말을 속삭였다.
“다 됐어, 재환아.”
“어….”
진이 다 빠진 탓에 대답하는 목소리에 매가리가 없었다. 베개에 옆얼굴을 묻고 쌕쌕 숨만 내쉬는데, 오래지 않아 재환의 등 뒤에서 북, 하고 짧게 비닐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굼뜨게 상체를 비튼 재환은 찢어진 비닐 조각을 입술 새에 물고 있는 한영과 눈을 맞추었다.
“이제… 넣는 거야?”
푸 비닐을 뱉은 한영이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히 재환의 시선이 모로 누운 한영의 상체를 타고 내려가 날씬한 허리 아래로 향했다. 때마침 살짝 복근을 드러내며 성기가 보이기 직전까지 내려갔던 바지춤이 갑자기 훅 위로 올라갔다. 늘어났던 고무줄이 제자리로 돌아가며 탁, 소리가 났다. 꼭 안의 것을 감추듯 급히 바지 밴드를 놓은 손이 재환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뒤를 보지 못하도록 슬쩍 앞으로 밀었다.
“보지 마, 재환아.”
어깨가 떠밀려 몸이 돌아간 재환은 속으로 ‘뭐야’를 중얼거렸다. 사람의 온갖 부끄러운 곳은 다 만져 놓고서, 정작 자신의 거기는 보여 주기 싫다는 한영의 속내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그때, 또 비닐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등 뒤편에서 작게 울렸다. 하나 궁금증을 가질지언정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일은 이제 재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영이 보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리하여 재환은 시커먼 벽을 보고서 멀거니 눈을 껌뻑였다. 여전히 창밖에서는 제법 세찬 빗소리가 들려왔다. 저 빗속에서 입 맞춘 순간부터 예견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바야흐로 목전에 있었다. 이를 상기해 주듯 엉덩이 사이에 닿아 오는 미끌미끌한 감촉이 일순간 재환의 사지를 뻣뻣하게 경직시켰다.
“읏….”
“재환아, 긴장 풀어.”
아스라한 빗소리를 뚫고 흐른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재환에게 곧 벌어질 일을 예고했다. 동시에 겉을 감싼 콘돔 위로 로션을 잔뜩 묻힌 성기가 오밀조밀한 주름을 건드렸다. 주인만큼이나 흠칫 긴장한 구멍이 언제 노글노글 풀어졌냐는 양 꽉 다물리었다.
“그래야 안 아파.”
앞으로 둘러진 손이 근육의 이완을 도와주듯 살살 복부를 쓰다듬었다. 옷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쪽, 쪽 정성 어린 입맞춤이 앉았다. 한영이 건네주는 이토록 애틋한 접촉 속에, 재환은 조금이나마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바짝 굳었던 몸에서도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덩달아 아무것도 들어오지 말라는 듯 오므라졌던 입구가 살그머니 긴장을 놓을 때였다.
“후읍…!”
얼굴 근처에 두었던 손이 시트 자락을 콱 움켰다.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미끄덩한 감촉과 함께 두툼하고 딱딱한 덩어리가 구멍을 벌리는 소름 돋는 감각에 재환은 감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무 이상하고 낯설어서, 이게 아픈 건지 뭔지 당최 판단도 안 섰다. 그럼에도 주름을 누르며 더 안쪽으로 파고드는 저것이 손가락 세 개와 비견되지 못할 굵기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이래서 보지도 못하게 한 건가. 얼른 숨긴 건가. 이제 와 던져 봤자 무의미한 물음에 답을 구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으, 윽…. 허윽….”
“재환아, 숨 쉬어. 응?”
고작 귀두를 넣은 것만으로 안쓰럽게 어깨를 벌벌 떠는 재환을 보며 한영은 어르듯, 혹은 비는 듯이 부탁했다. 그러나 이를 들어줄 상태가 되지 못하는 재환은 계속해서 헛숨만 들이켰다. 빠르게 부풀었다 꺼지는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산소가 아닌 한참 늦은 후회였다.
내가 이딴 걸 왜 하자고 그랬지. 숨도 못 쉴 만큼 버거운 이 짓을 뭐 하러, 뭘 얻자고. 다 망했다. 다 망쳤다. 우리의 관계도, 밴드도, 음악도….
삽시에 손쓸 수도 없이 버글버글 끓어오른 참회가 기어코 눈물샘을 건드릴 즈음이었다. 재차 이어진 재환아, 라는 부름과 함께 보드라운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마치 인공호흡 하듯 따뜻한 숨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라고.
후, 하…. 후, 하…. 후…, 하….
제대로 이어지질 못하던 재환의 호흡이 그 숨소리를 따라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들썩이던 가슴이 가라앉고, 안쓰럽게 구부러졌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조금씩 펴졌다. 그러나 저 안에서 쿵쿵 맥박 치는 심장 소리까지 함께 꺼뜨릴 수는 없었다. 귓속으로 굽이치는 숨결이 절대 잊지 못할 과거의 순간을 와락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까닭이다.
처음 한영의 노래를 들었던 그때, 헤드폰에 갇힌 귓구멍으로 들이치는 숨소리를 막지 못한 것이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거기에 마음을 사로잡혀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소리가 재환에게 포기와 인정을 종용하고 있었다.
여전히 귓가에서 따뜻하고도 습한 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어렵사리 손을 뒤로 뻗은 재환은 바지에 감싸인 단단한 허벅지를 짚었다. 조금은 밭지만 그럭저럭 고른 숨을 내쉬며 제 딴에는 절박한 청을 했다.
“숨, 쉬고 있으니까. 그거 그만해….”
낮고 길게 이어지던 숨소리가 조용히 멎었다. 뒤에서 재환을 끌어안고 있던 한영은 복부를 감싼 손을 위로 올려 토닥토닥 가슴팍을 두드렸다. 달걀 섬을 다루듯 더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물론 바지춤 밖으로 빠져나와 재환의 엉덩이에 머리를 넣고 있는 성기는 전혀 다정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제 괜찮아?”
“어…. 근데 절반은…, 들어갔어?”
머뭇머뭇한 기색과 함께 나온 질문이 한영의 표정에 곤란함을 드리웠다.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뜨린 한영은 작디작은 목소리로 ‘아니….’ 하고 답했다. 만약 여기서 재환이 겁먹어 다시 빼라고 한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뭐, 재환 안에 다 넣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럼 빨리 넣어. 그냥 한 번에 넣어.”
재환의 뒤통수를 보는 한영의 표정이 한층 복잡해졌다. 응, 대답하며 등 뒤를 더듬어 그새 내용물이 상당히 줄어든 로션 통을 집었다. 앞니로 뚜껑을 연 뒤,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은 성기에 주르륵 부었다. 일부가 동그란 엉덩잇살로 떨어지자 재환의 허리가 움칠, 작게 튀었다.
“그럼 마저 넣을게.”
질척한 마찰음을 내며 허연 로션이 덕지덕지 발라진 성기가 쑤욱 좁은 틈을 비집었다. 끄윽,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기둥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며 이내 두 사람의 둔부와 사타구니가 철떡 맞닿았다. 재환의 어깨 위로 묻은 한영의 입술 사이에서 기나긴 숨이 터졌다.
“하아….”
바들바들 떠는 재환의 몸을 꽉 안은 한영은 그대로 꼼짝하지 못했다. 미친 척하고 콘돔을 두 개나 씌우지 않았다면 진작 싸고도 남았을 아뜩한 감각이 하반신을 한가득 메웠다. 이대로 펑 하고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꿈에서, 상상 속에서 재환을 안으며 느꼈던 기분과 지금의 벅찬 마음을 감히 비교 선상에 둘 수 없었다. 눈가가 뜨끈하게 젖어 들었다.
“으, 읏….”
한영의 품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할 상황에 처한 재환은 미약하게 신음했다. 감각이 무뎌질 때까지 구멍을 풀어 둔 덕에 그럭저럭 거대한 성기를 끝까지 받아 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괴로운 느낌이 없는 게 아니었다. 배 속에 자리한 장기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위로 밀려 올라간 것 같았고,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는 홧홧하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거기다 내벽에 감싸인 성기가 꿈틀꿈틀 맥동하는 감각까지 전해져 뒷덜미에 오싹오싹 소름이 번졌다. 그럼에도 저를 묶은 단단한 팔을 뿌리칠 수 없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재환아…. 재환아….”
귓전에서 반복되는 애절한 부름이 신기하게도 고통이나 거부감을 뒤덮었다. 저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울컥울컥 복받쳐 오르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제 몸이 떨리고 있는 건지, 등 뒤에 꼭 붙은 한영의 몸이 떨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한영….”
재환은 매달리듯 가슴팍에 둘러진 한영의 팔뚝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지금은 저도 이럴 여유가 없긴 하다만, 그래도 애써 괜찮은 척 손바닥에 닿은 보드라운 살결을 살살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한영이 안쓰럽게 여겨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명, 지금 더 버거운 것은 이쪽일 텐데.
“재환아…. 하….”
엉덩이에 들러붙은 샅은 조금도 떨어질 기색이 없고, 성기는 내벽 깊숙한 곳에 도달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함께 벌어진 입구, 당겨진 주름이 슬슬 콧잔등 찌푸려지는 통증을 일으킬 즈음, 재환의 목 언저리에 뜨듯한 물기가 스몄다. 까만 벽을 시야에 담던 재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질근 감기고 말았다.
“허윽…!”
벌건 속살을 문지르며 반절쯤 느릿느릿 빠져나갔던 성기가 비슷한 속도로 꾸욱 안쪽까지 쑤셔 박혔다. 새된 신음을 터뜨린 재환은 이제는 제가 도리어 가슴을 감싼 한영의 팔을 매달리듯 붙잡았다. 배 속에서 뜨겁고 굵은 살덩이가 움직이는 느낌은 물론이고, 엉덩이에 닿은 바지의 부들부들한 감촉마저 끔찍하리만치 생소하게 다가왔다. 미친 듯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허으…, 윽….”
“후…, 재환아.”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다시금 재환을 숨 못 쉬게 만든 한영은 제 품속에 들어온 상체를 꼬옥 압박한 채 느린 허리 짓을 시작했다. 옆으로 누워 유연한 허리를 부드럽게 치댈 때마다 딱 허벅지까지 내린 바지 위로 드러난 엉덩이 옆이 움푹움푹 팼다. 재환의 뒷덜미에 닿은 입술에서는 연거푸 절절한 숨이 흘렀다.
“하아, 아….”
“읏, 윽…. 후으….”
딱딱한 귀두가 안쪽을 꾹꾹 찌를 때마다 재환은 도리 없이 밭게 신음했다. 모은 무릎을 움칠움칠 떨었다. 다만 아직은 흥분이나 쾌감 같은 것보다 싸는 것도, 넣는 것도 아닌 괴란한 느낌이 강했다. 아니,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딱 붙인 허벅지 사이에서 힘없이 덜렁거리는 성기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한영과 섹스를 하긴 하는구나, 라는 묘한 기분이 가슴을 술렁이게 할 무렵이었다.
“아아…!”
밑으로 쑥 내려간 손이 늘어진 성기를 거머쥐었다. 동시에 조금 각도를 바꾼 허리가 쾅, 재환을 밀어붙였다. 이윽고 비교적 얌전히 들락거리던 성기가 여태까지 건드리지 않았던 곳을 건드리는 순간, 재환의 전신이 덜컥 흔들렸다. 한영의 어깨에 뒤통수가 닿을 정도로 휘딱 고개가 꺾였다. 멋대로 아랫구멍이 꽉꽉 수축하며 가득 들어찬 성기를 조였다.
“야, 그거 싫…, 허으…!”
철썩, 사타구니가 엉덩잇살을 때리며 또다시 같은 부분에 같은 자극이 퍼부어졌다. 짧은 문장 하나 끝맺질 못한 재환은 넓고 단단한 어깨에 머리통을 딱 붙이고서 지금껏 냈던 그 어떤 소리보다 큰 소리를 터뜨렸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하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한, 영…. 씹, 거기 싫다… 고, 으읏!”
조급하게 살점을 문지르는 손길이 기어코 흐물거리던 성기를 단단히 발기시켰다. 벌그스름해진 귀두에서 질금질금 흐른 맑은 액이 같이 비벼지며 손은 더욱 빨라졌다. 여기에 배 속의 한 군데만 집요하게 찌르는 움직임이 억지로 사정감을 가속했다. 기분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 감당키 벅찬 자극들이었다. 차라리 충격에 가까웠다. 재환은 이렇게 막무가내인 한영을 몰랐다.
“응, 읏. 유한…, 흡…!”
갑자기 턱 아래로 들어온 손이 홱 얼굴을 돌렸다. 흐려졌다 초점이 잡히기를 반복하는 눈앞에 분홍색 머리칼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뜨거운 숨이 입 속으로 들이닥쳤다. 함께 밀려든 혀를 재환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겁지겁 제 혀로 얽었다. 마구잡이로 타액이 뒤섞이고,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후드득 베갯잇으로 떨어졌다. 불편하게 비틀어진 상체의 각도를 유지하기 위해 시트 위를 짚은 팔이 위태롭게 떨렸다.
“흐, 읍…!”
입술과 성기, 엉덩이 사이까지 모두 한영에게 점령당한 재환은 그대로 커다란 손바닥 안에 묽은 정액을 토해 냈다. 농도는 옅을지언정 사정은 한참이나 이어져, 전신의 경련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복부가 한 번 꿈틀거릴 때마다 울컥울컥 솟구친 정액이 결국 손바닥에서 넘쳐 밑에 깔린 수건을 더럽혔다. 그사이 자신이 얼마큼의 힘으로 한영의 성기를 조였는지는 당연히 인지하지 못했다.
“흐….”
마지막 한 방울이 맥없이 픽 튀어나왔을 때, 힘이 싹 빠져나간 재환의 사지가 매트리스 위로 늘어졌다. 벌그름히 물든 채 촉촉이 젖은 눈꺼풀이 스르르 아래로 감겼다. 반대로 다물리지 않은 잇새에 아쉬움과 애틋함이 한데 섞인 숨을 길게 불어넣은 한영은 입술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깊고 좁은 곳에서 성기를 빼냈다. 볼록한 고무 막 끝부분에 허연 액이 출렁출렁 고여 있었다.
더러워진 콘돔을 벗기는커녕 엉덩이 아래 걸린 바지춤도 추스르지 않은 채, 한영은 꾹 눈을 감은 재환을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여 짧고 숱 많은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을 조심스레 입으로 호록, 빨아들였다. 기대와 다를 바 없이 재환의 눈물방울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뒤이어 코끝에도, 붉은 뺨에도, 도담한 입술에도 한 번씩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손바닥으로 쓸어 넘긴 머리칼 아래 드러난 이마에는 보다 길게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깨어 있는 재환에게는 절대 전하지 못할 한마디를 나지막이 속삭였다.
…해, 재환아.
너무 많이.
정말 많이….
잔잔한 어둠이 깔린 공간. 투둑투둑 굵은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가 쌕쌕 울려 퍼지는 숨소리 사이로 흘러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불은 곱게 펴져 매트리스에 누운 한 사람의 몸을 살포시 덮고 있었다. 그 곁에 함께 누운 한영은 천천히 부풀었다 꺼지는 재환의 가슴팍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두드렸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아이처럼 잠든 얼굴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밤이 다 지나면, 언제 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별안간 밖에서 훅 불어 젖힌 비바람이 창을 요란스레 뒤흔들었다. 으음…, 하며 몇 번 눈머리를 움칠거리던 재환이 천천히 눈꺼풀을 위로 들추었다. 혼몽한 시선이 코앞에 있는 멀끔한 외양을 느리게 훑었다.
“…안 잤어?”
“잤어.”
“응….”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꺼풀을 다시 반쯤 아래로 내려 앉힌 재환이 몸을 꿈지럭거리며 한영 가까이 붙었다. 그러더니 제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툭툭 잡아당겨 한영에게 절반을 내어 주었다. 멈칫 굳은 한영은 어설픈 모양새로 덮인 이불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다.
“새벽엔 추워….”
“…응.”
얇은 이불 아래 갇힌 손이 허벅지 근처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한 이불을 덮고 잠들어야 했던, 그래서 결국 도둑질하듯 입 맞추고 바닥으로 도망쳤던 그때와 참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 끝끝내 상대의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던 손이 이번에는 용기 내어 그를 꼭 끌어안아 보았다. 그랬더니 상대도 덩달아 이불 안에서 한영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여전히 덜컹덜컹 창을 흔들며 몰아치는 비바람에 상반되는 온기가 둘 사이에 고였다.
“한영아….”
“응.”
“오늘만이야. 오늘 한 번만, 우리 이러는 거야.”
“응, 알아. 내가 한 번만이라고 그랬어.”
“…미안.”
“아냐. 너 하나도 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게 뭔 소리야…, 하며 재환은 푸스스 웃었다. 재환의 이마에 쪽, 입 맞춘 한영도 재환을 따라 여릿하게 웃음 지었다. 저 세찬 비가 그치면 함께 그칠 웃음이었다.
함께 끝날 너와 나의 밤이었다.
* * *
창밖에서 짹짹 새 우는 소리에 매트리스에서 홀로 눈을 뜬 재환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 봤자 얼마 팔을 뻗지 못해 딱딱한 벽에 툭 손이 부딪혔다. 다시 팔을 접어 뻑뻑한 눈가를 주먹으로 문지른 재환은 느짓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서 바닥으로 두 다리를 뻗을 때도, 발을 질질 끌며 창가로 걸어갈 때도 하반신에서 저릿저릿 오르는 통증의 원인은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잘 때 꼭 누가 작신작신 밟고 간 것처럼 엉덩이고 허리고 죄 욱신거렸지만, 무덤덤하게 넘겼다.
드르륵 창문을 열자 자라다 만 고드름 같은 물방울들이 창틀에 오종종히 맺혀 있었다. 그 너머에서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청아한 새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백번 양보해 그럭저럭 포근하다 할 만한 햇빛도 함께 들이쳤다. 햇빛 때문에 집 앞의 지저분한 골목이 더 적나라하게 보이는 감이 있었으나, 대단한 경치라도 되는 양 창가에 선 재환은 한참이나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수거를 기다리며 길목에 쌓여 있는 쓰레기봉투, 언제 수명이 다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낡은 가로등, 그 주위로 얼기설기 얽힌 새까만 전깃줄…. 남자와 섹스하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당연하게도 재환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쨌거나, 이제 저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내리붓는 비 아래서 나눴던 폭풍 같은 입맞춤이 떠오를 것이다.
망했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환은 저벅저벅 냉장고 앞으로 갔다. 생수를 꺼내 병째 벌컥벌컥 들이켜고서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입술을 매만져 보았다. 통통하게 부은 듯한 것이, 아무래도 기분 탓은 아닐 성싶었다.
도로 생수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던 재환의 시선이 문득 책상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임에도 재게 발을 놀려 그 앞으로 다가서자, 노트북 옆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옷 한 벌이 재환을 맞이했다. 어젯밤, 한영에게 빌려줬던 검정색 트레이닝복이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재환은 가격에 비해 제법 감이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 옷으로 천천히 두 손을 뻗었다. 누군가가 기껏 잡아 놓고 간 모양새가 흐트러지겠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옷을 집어 들었다. 고개 숙여 그 한복판에 코를 묻는 데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과거, 그 누군가도 이렇게 제 옷에 코를 파묻고 있었다.
후아….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켜자 보들보들한 옷감에 밴 미미한 향기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평소 나던 세제 향이나 땀 냄새가 아니었다. 밤새 곁에서 풍겼던 것과 같은 향기였다. 한영의 향기였다.
재환은 몇 번이고 더 숨을 들이마셨다. 그럴수록 조용해진 하늘만큼이나 잠잠히 가라앉았던 가슴속에서 울렁울렁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 후회인지, 그리움인지, 미안함인지 재환은 구분할 수 없었다. 무어가 되었든 어제도 몇 차례 고장 났던 눈물샘을 콱콱 찌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향기에서 재환이 코를 떼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일 때, 알록달록 온갖 그림이 붙여진 벽에 등을 대고 앉은 한영은 멀거니 제 방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으로 비치는 새파란 하늘이 자꾸 어제 비를 내린 적 없는 체를 해, 한영은 조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콸콸 쏟아지는 비를 맞을지언정, 지금도 그 아래서 한 사람과 함께 서 있고 싶었다.
새벽 해를 보며 집에 돌아온 후 내도록 꼼짝을 안 했던 한영은 더디게 긴 다리를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없는 걸음으로 드레스 룸에 들어가 여태 빗물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옷을 하나씩 벗었다. 툭, 툭. 바닥에 바지, 셔츠 따위가 차례로 떨어지고 마침내 새하얀 맨몸이 되었다. 차마 재환에게는 보여 줄 수가 없던 모습이었다.
탁, 벽면의 스위치를 누른 뒤 넓고 쾌적한 욕실로 발을 들였다. 곧장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섰지만, 물을 틀 수는 없었다. 대신 한영은 고개 숙여 제 성기로 망연한 눈길을 보냈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문 한영은 성기를 한 손으로 쥐었다. 물컹거리는 살덩이를 몇 번 위아래로 쓸었다가, 코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쫙 펼친 손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콧속으로 기어드는 건 그다지 향기롭다 할 수 없는 고무 냄새뿐이었다. 이것 말고, 한영은 재환의 향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럼 몇 날 며칠 씻지 않고도 버틸 자신 있었다. 정말이었다.
괜히 또 서러워진 한영은 도리 없이 두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기다란 속눈썹 끝에 못나게 눈물방울을 매달고서, 왼쪽 끝까지 돌린 레버를 들어 올렸다. 솨,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금세 물줄기는 부스 안에 부옇게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뜨끈뜨끈해졌다.
재환의 숨결이 닿았던 입술, 그의 고운 성기를 쥐었던 손, 그리고 고무 막 두 겹을 사이에 두고 세상 가장 따뜻한 곳에 파묻혔던 성기가 온통 물에 젖어 들었다. 이윽고 재환이 남긴 모든 것이 물과 함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밤새 더 커다랗게 부푼 마음은 아무리 세찬 물을 맞아도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씻어 내지 못할 마음이었다.
<3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