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Reverberation (25/29)

4. Reverberation

한영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혹은 그를 놓아주기 위한 재환의 계획은 나름 치밀했다. 카페에 일찌감치 관둔다는 얘기를 해 놓은 것과 더불어 집주인에게 곧 방을 뺄 거라는 통보도 했다. 미리미리 짐은 어머니의 집으로 옮겼고, 그 근처에서 새로운 아르바이트도 찾았다.

이 모든 일의 기준은 한영이 회사와 계약을 하는 날이었다. 한영이 제대로 계약만 하면, 그의 앞에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도록 재환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때로는 울음을 삼키고 때로는 가슴을 치면서도, 착실히 채비를 해 나갔다.

하지만 정작 힘겨운 시간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이 가장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버린 그날 다음부터였다.

남은 짐을 옮기러 집 근처까지 갔다가 저 멀리서 분홍 머리를 발견하고 후다닥 발을 트는 일이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길에서 분홍색 비슷한 것만 보아도 어깨가 움칠 오므라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번은 대학교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다 ‘봤어? 정문에 분홍 머리?’ 하는 여학생들의 속닥거림을 듣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처박힌 적도 있었다. 매 순간순간이 서글픈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저를 찾아 헤매는 한 사람을 피해 달아날 때마다 재환은 말도 못 할 자책감과 죄악감에 시달렸다. 그중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이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릴지도 모르는 몹쓸 후회와 미련이었다. 그냥 못 이기는 척 앞에 나설 걸 그랬다는 생각이 매번 밀려들어 재환을 끝 간 데 없이 괴롭혔다. 물론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끝났다. 떠올린 바를 행동으로 옮길 만큼 용기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렇듯 분홍색만 보아도 일단 발부터 돌리는 나날이 이어지는 사이, 아버지가 죽었다. 가망이 없다는 말은 진작 의사에게 들었고, 따라서 수술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래서 내심 눈물 한 방울 안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또 사람이 영정 사진을 앞에 두니 그렇지가 않았다. 원망, 그리움, 연민 따위의 감정이 몰아쳐 재환은 어머니와 동생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아무리 그런들 이미 간 사람은 말이 없었다.

빈소를 차린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사장님이라 불렸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날은 조문객이 꽤나 많았다. 그 와중 하필이면 소주용 종이컵이 똑 떨어졌다. 그 바람에 재환은 부랴부랴 병원 근처에 있는 슈퍼에 다녀와야 했다. 슈퍼 구석에서 찾은 종이컵 뭉치를 모조리 들고 계산대로 향하자, 계산대 뒤에 앉아 있던 슈퍼 주인이 재환에게 적잖이 짠한 눈빛을 보냈다. 상복을 입고, 거기다 상주 완장까지 차고 있었으니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부피에 비해 심히 가벼운 봉지를 쥐고 병원으로 돌아온 재환은 주차장 구석에 있는 흡연 구역에서 후딱 담배 한 대를 피웠다. 나온 김에 한 대 더 피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포기하고 입구부터 소독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막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아슬아슬하게 잡아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즈음이었다.

무심코 엘리베이터에 달린 거울로 눈이 간 재환은 쓰디쓴 탄식을 흘렸다. 내리 이틀 밤을 새운 탓에 거울에 비친 몰골이 아주 말도 아니었다. 거뭇거뭇한 눈 밑하며, 볼품없이 삐죽삐죽 돋아난 수염하며. 자연히 저를 바라보던 슈퍼 주인의 안쓰러움 가득한 시선이 떠올랐다.

땡, 하는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까슬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린 재환은 향냄새가 진동하는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경쟁하듯 늘어선 근조 화환들을 지나쳐, 이윽고 저와 성씨가 같은 이름 세 글자가 적힌 빈소로 들어선 순간.

검정 신발 수 쌍이 두서없이 뒤엉켜 있는 입구에서 우뚝 발이 굳었다. 호흡을 집어삼키는 동시에 그대로 다시 뒷걸음질 쳤다. 안에 있던 사촌이나 재희에게 사 온 종이컵을 건네줄 겨를도 없었다. 진짜 귀신이라도 본 양, 넋 나간 얼굴로 복도를 내달린 재환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에 서둘러 올라탔다. 아무 층이나 누르고서 쓰러지듯 엘리베이터 벽에 쿵, 등을 댔다. 헉헉 가쁜 숨이 터졌다.

분명 녀석이었다. 유한영이었다. 검정 양복을 입고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에 섞여 앉아 있던 남자는 유한영이 확실했다. 옆에 지우도 있었으므로 절대 잘못 봤을 리 없다.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남자의 머리는 분홍색이 아니었다. 옅은 갈색이었는지, 짙은 갈색이었는지, 그마저도 아니면 칠흑 같은 검정이었는지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홍 머리가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잠깐. 그럼 진짜로 잘못 본 건가. 유한영이 아니었던 건가.

엘리베이터에 한 명 한 명 사람이 탈수록 재환의 혼란함이 거침없이 가중되었다. 그러다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발을 떼던 재환은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저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꿈에서도 그렸던 그 얼굴을 착각할 확률이 있는가?

대답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날 재환은 몇 시간 동안이나 다시 빈소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그럼에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재환이 기억하는 한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동생 재희에게 있어서는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냥 잠깐 바람이 들었다 만 것인 줄 알았는데, 아르바이트로 착실히 돈을 모은 재희는 진짜로 스튜어디스 학원에 다니며 마음잡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이듬해에는 대학교에도 입학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재환은 가까스로 대학교 졸업장을 땄다.

재환이 전공했던 과목 특성상, 주변에는 곧바로 취업하는 대신 공부를 이어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재환은 그런 일에 뜻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라도, 재환은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하여 재환이 일자리를 얻은 곳은 작은 공연 기획사였다. 회계를 할 줄 아는 직원을 구한다기에 냉큼 지원했더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과거 밴드를 했던 이력이 나름 도움이 된 셈이었다. 하긴 밴드에 그렇게 열심히 매달렸는데, 이 정도 덕도 보지 못하는 건 조금 억울했다. 좌우지간 이제 재환은 열심히 돈 벌 일만 생각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지, 내지는 오기에 잠겨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아무리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일이 고되어도 너무 고되었다. 휴일? 그런 건 개나 주고, 저도 개처럼 일했다. 늘어 가는 건 커피와 담배뿐이었다.

이토록 좆 빠지게 일해서 진짜 그럴듯한 공연이라도 만드는 거면 좀 나았다. 그러기는 개뿔, 어째 공연을 기획하는 일보다 영업 일이 배는 많았다. 이쪽 사장님한테 가서 잘 좀 봐 주시라 싹싹 빌고, 또 저쪽 감독님한테 가서 잘 좀 부탁드린다 굽신거리고.

게다가 다들 어찌나 술을 좋아하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접대 겸 술자리가 이어졌다. 매일 같이 비틀비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며 ‘내가 이러려고 회사에 들어간 건가’라는 허무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무엇 하나. 생각만 실컷 하고, 또 새벽같이 일어나 꾸역꾸역 출근하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답지 않게 성실한 성격이 문제였다.

그러다 정말 숨이 껄떡 넘어가기 직전까지 스트레스가 차오를 때면, 재환은 도망치듯 방구석에 놓인 시커먼 가방 앞으로 달려갔다. 하도 만져 반질반질해진 지퍼를 만지작거리다, 끝내 가방을 열고 안에서 눈부시도록 새빨간 기타를 꺼냈다. 밴드도 관두었으니 이것도 미련 없이 버려 버림이 맞건만, 거기까지는 죽어도 할 수가 없었다. 뭐, 굳이 기타를 팔아야 할 만큼 이제 생활이 빈곤하지도 않았다. 감히 쥐꼬리만 하다는 표현을 붙이고 싶기는 하나, 어찌 됐든 통장에 월급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이따위 합리화를 하며 재환은 가끔가다 기타 연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안 그래도 고단한 하루하루, 이 정도 낙도 없으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다만, 다시 기타를 가방에 넣으며 찾아오는 침울함은 여간해서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기타에 너무도 무수한 기억들이 묻어 있는 까닭이었다. 줄을 튕겨 어줍게 흉내 내던 빗소리, 그걸 또 부끄러울 만치 좋아해 주던 너, 그런 너를 보고 속절없이 흔들리던 마음….

무심코 들어갔던 음식점에서 노래가 들려오면 발을 돌리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사진이라도 보일라치면 창을 꺼 버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이 또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보라고 여겼다. 제가 어떻든 간에 상대가 음악만 잘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야근하고, 출근하고, 접대하고,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사이 2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래도 일한 기간이 있다고 재환은 대리라는 직함을 달았다. 하지만 하는 업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또 야근하고, 출근하고, 접대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더욱더 커피와 담배가 늘어난 것은 물론이요, 여기에 꼬박꼬박 위장약까지 챙겨 먹게 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이렇게나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점심시간.

“쟤 요새 잘나가나 봐.”

“누구요?”

“누구긴. 저기. 유한영.”

과장이 가리켰던 곳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던 재환은 앞에 놓인 선지 해장국으로 퍼뜩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깐이나마 티브이 화면에 비쳤던 얼굴을 시뻘건 선지 덩어리로 지워 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좁은 음식점 안에 울리는 티브이 소리가 너무도 컸다.

“한영 씨, 새 앨범 소개 좀 해 주세요!”

“아…, 이번 앨범 ‘Memory of You’는 사계절을 테마로 잡았습니다. 봄은 설렘, 여름은 사랑, 가을은 이별….”

“와, 영어 발음 죽이네. 쟤 뭐 교포야?”

“어릴 때 미국에 있었다나 봐요?”

갑자기 채널이 돌아가는 행운 따위 일어나지 않듯,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료 직원들의 쓸데없는 이야기도 멈추지 않았다. 저 대화에 낄 마음이 요만큼도 없던 재환은 푹푹 국만 떠먹었다. 평소에는 잘만 먹던 선지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조금 역하게 느껴졌다. 비릿한 맛도 그렇고, 물컹하게 씹히는 식감도 영 거북했다.

“그럼 앨범 타이틀에 있는 ‘You’는 따로 가리키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사실 팬분들이 이걸 가장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쥔 재환은 반찬 그릇에 놓인 무말랭이를 집었다. 그 틈에도 직원들의 수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직원이 ‘저 리포터 누구 닮은 것 같은데….’ 하자 건너편 앉은 직원이 ‘아이, 잠깐만. 유한영 얘기 좀 듣자.’ 하는 핀잔을 주었다.

“‘You’는… 옛날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예?”

“없어졌어요.”

“쟤 컨셉이 사차원이야? 왜 저래.”

두툼한 섞박지를 젓가락으로 집어 와작 깨물던 과장이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표정을 구겼다. 그 말에 다른 직원이 ‘왜, 귀엽잖아요!’ 하며 손사래 쳤다. 그 어느 쪽에도 동의할 수 없었던 재환은 국 대신 물이나 벌컥벌컥 마셨다. 유한영의 저런 모습은 부러 만든 콘셉트도 아니었고, 귀여워 보일 목적은 더더욱 아니었다. 재환은 잘 알았다.

“근데 유한영 요새 개런티 엄청 오르지 않았어요? 기획사빨인 것 같기도 하고.”

“당연히 기획사빨이지. 말이 싱어송라이터지, 아마 곡도 다 회사에서 줄걸?”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물컵을 내려놓은 재환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앉아 있던 직원 너덧이 다소 놀란 눈으로 아직 반이나 국이 남은 뚝배기와 재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사이 티브이에서 한창 나오던 연예 프로그램이 다음 코너로 바뀌었다.

“저 먼저 좀 일어날게요.”

“어? 서 대리 벌써 다 먹은 거야?”

“예.”

짤막하게 대꾸하고 식당을 나서자 저 뒤에서 ‘쟤는 진짜 사근사근한 맛이 없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언사에 일희일비하는 건 시간 낭비였으므로 재환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이나 꺼냈다. 어째 무게가 가볍다 싶더라니, 안에 든 건 돗대 하나뿐이었다. 담배를 산 게 불과 어젯밤 퇴근길이었던 것을 떠올린 재환은 쓰게 웃었다.

해장국집이니 순댓국집이니 고만고만한 식당들이 모여 있는 좁다란 골목. 그 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긴 재환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후 연기를 뱉으며 고개를 높이 쳐들자 다닥다닥 붙은 건물 틈으로 딱 손바닥만큼 하늘이 보였다. 그마저도 치렁치렁 전깃줄이 늘어져 있어 안 그래도 답답한 경치를 보다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곳으로 멍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려니, 재환은 문득 넓은 창 너머로 바라보던 고즈넉한 정원의 풍경이 떠올랐다. 이제는 볼 일 없는 그 풍경을 부연 담배 연기로 지워 내며 툭툭 재를 털었다. 유달리 목이 칼칼했다.

다음 날, 재환은 회사에 사표를 냈다.

가뜩이나 싹싹한 맛이 없다며 평소 재환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과장은 사표를 내밀자 아주 볼만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해,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사원도 몇 없는 회사, 과장이래 봤자 재환과 나이 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도 않았다. 한데도 꺼내는 말의 서두가 ‘요새 젊은 애들은…’이었다. ‘여기 관두고 뭐 하게?’라는 오지랖도 잊지 않았다. 재환은 딱 한마디로 답했다.

“음악이요.”

사표를 낸 그날로 재환은 유학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충동적이라면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또 나름 계획적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었다. 언젠가는 이리되리라고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결국 재환이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일종의 관성이자 예정된 수순이었다.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든 어차피 고되기가 매한가지라면, 재환은 음악을 하면서 고생하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인정하건대, 그냥 저는 그럴 팔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기타를 친다는 것은 고려 사항에 없었다. 기타를 정말 좋아하지만, 동시에 재환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알았다. 세상에 난다 긴다 하는 연주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겁도 없이 그들의 세계로 뛰어들기에 재환에겐 실력, 용기, 자신감 등등 참 많은 것이 모자랐다. 무엇보다, 재환이 함께 기타를 치고픈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에게 이제 재환은 필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제라도 제대로 믹싱 공부를 하기 위해 재환은 뒤늦은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해외살이는 생각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녹록지 않았다. 언어 문제야 둘째 치더라도, 하필이면 유학 간 곳이 집세 비싸고 물가 높기로 유명한 동네라 재환은 또다시 가난한 고학생 처지가 되었다. 안타깝지만 회사 다니며 모은 돈은 기껏해야 학비가 고작이었다.

따라서 학업과 아르바이트의 병행은 필수였다. 마침 재환이 살던 동네와 멀지 않은 곳에 한인 타운이 있어, 재환은 그곳의 삼겹살집에서 학교 다니는 틈틈이 일했다. 가게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한국말을 쓰며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참 편했지만, 아무래도 힘을 요하는 일이 많아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뜨거운 숯을 갈다 보면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밤에는 푹 자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뒤늦게 시작한 학업을 쫓아가기 위해서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해야 했다. 풀풀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몸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재환은 몇 시간이고 책과, 그리고 노트북과 씨름했다. 세상에 컴프레서 종류는 뭐가 그리 많고, 또 EQ는 뭐가 그리 내용이 복잡한지. 이럴 줄 알았으면 과거 현철에게 좀 더 악착같이 배워 둘 것을,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처럼 불평과 짜증, 후회를 적절히 섞어 가며 공부하다 보면 어느새 작은 창문 밖으로 어슴푸레 새벽 해가 밝아 왔다.

그즈음 재환은 직직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집 앞 골목은 늘 떨어진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 한 대 피우는 순간이 재환에게 있어서는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번잡한 술집 골목의 네온사인 불빛도, 어지럽게 얽힌 횡단보도를 건너는 인파도 이곳에는 없었다. 푸르스름하게 여명이 퍼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재환은 세상에 깔린 고요함을 오롯이 즐겼다.

다만 이렇게 청승 아닌 청승을 떨고 있노라면, 현재와는 다른 이유로 밤을 새웠던 과거의 날들이 떠올랐다. 몇 시간을 꽁꽁 갇혀 죽도록 연습만 하던 지하 합주실. ‘와, 씨발. 해 떴겠다!’ 하는 친구의 탄식에 맞춰 악기를 정리하고 올라가 피웠던 담배 한 대. 그 담배가 건네줬던 작은 해방감. 당시 올려 보았던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 스산하고, 적당히 상쾌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달콤한 딸기 향 같은 것을 살살 풍기는 녀석이 재환의 옆에 와 앉고는 했다.

인제는 완연한 남이 된 그 녀석과 연결되어 있을 방법이 재환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죽어라 공부해서 미래에 믹싱 기사가 되면, 그래도 서로 아주 다른 삶을 사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비슷비슷한 업계이니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아예 그에게서 믹싱 의뢰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질 못하는 주제에, 참 야무진 꿈이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건 자유이니, 재환은 같은 하늘 아래 있을 그를 생각하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다 잠깐 눈을 붙이는 시늉만 하고 학교에 가면 새벽녘에 느꼈던 감성 넘치는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내가 왜 내 돈 주고 이 힘든 짓을 하고 있는가 절로 머릿속에 물음표가 뒤덮였다. 오빠를 걱정한답시고 가면 개고생할 거라는 악담을 퍼부어 주던 재희, 힘들면 냉큼 돌아오라던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이런 것도 일종의 향수병인 듯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여기까지 온 이상 재환에게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 관두고 음악 공부할 거란 말에 과장이 보였던 썩은 표정을 떠올리며, 재환은 이를 악물었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아래서 부지런히 자전거 바퀴를 굴리고,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땀 뻘뻘 흘려 가며 숯을 피웠다. 그러다 낙엽 섞인 바람결에 담배 연기를 흘려보내면, 어느덧 발밑에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계절이 되었다. 그렇게 또 해가 바뀌고, 또다시 나뭇가지에는 분홍 꽃잎이 피어났다. 그 자리에 푸른 잎사귀가, 낙엽이, 눈꽃이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엄마, 저기! 저기, 오빠!”

“재환아!”

덜덜 캐리어를 끌며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재환은 근 2년 만에 보는 가족들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걱정만큼 어머니는 늙지 않아 다행이었고, 반면 재희는 ‘누구세요?’ 소리가 나올 만큼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사이 진짜로 스튜어디스가 된 동생에게서는 어른스러운 직장인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동생이 모는 차를 타고 재환은 집으로 향했다.

공항 근처를 빠져나온 차는 기나긴 다리를 건너 금세 한강 변을 낀 대로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한국 음식 생각나지는 않더냐, 학교에서 나이 많다고 무시당하지는 않았더냐, 하는 동생의 질문에 간간이 답하며 재환은 차창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강물 위로 마침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깔려 있었다. 예전 남자 넷이서 큼지막한 차를 타고 공연하러 가는 길에도 종종 보았던 풍경이었다.

막히다, 뚫리다 하는 길을 달려 재희가 운전하는 차는 이윽고 재환에게 다소 씁쓸한 기억으로 남은 한강 공원 옆을 지났다. 공원에는 온화한 봄 날씨를 느끼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 풍경이 꽤나 여유로워 보여, 과거 저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린 재환은 생각보다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했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키보드를 남기고서 멀어지던 한 사람의 뒷모습만 설핏 눈앞을 어물거리다 사라졌다.

지금 와 하는 생각이지만, 어찌 보면 그때 그렇게 한영이 무대에서 도망친 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싶기도 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재환은 끝끝내 마음을 먹지 못했을 테고, 그럼 한영은 정말 미국으로 가야 할 처지에 놓였을지도 몰랐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뮤지션이 된 지금의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차창에 비스듬히 옆머리를 기댄 재환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기실 3시간도 안 되는 비행이었으나, 장시간 비행이라도 한 것처럼 노곤하게 잠이 밀려왔다. 익숙한 고국의 공기가,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고 드디어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재환을 금세 깊은 단잠에 빠지게 만들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잠든 얼굴 위로 지는 해가 퍼뜨리는 따스한 색채가 스몄다. 저 멀리서 붉게 부서지는 강물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살짝 바람만 불어도 후드득 벚꽃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집 안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어젖힌 재환은 이제는 새 보금자리가 된 공간에 부지런히 짐을 풀었다. 이 자리에 과거 낡아 빠진 연립 주택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빌라로 지어진 집 내부는 상당히 깔끔했다. 월세로라도 이 집을 얻기 위해 그나마 가진 돈을 탈탈 털어낸 것을 물론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출도 받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부터, 재환은 과거 살던 이 동네에 다시 자리를 잡고자 하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제게 익숙하다면 가장 익숙한 곳이었을뿐더러, 찬찬히 따졌을 때 주변 환경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골목 자체야 좀 남루해도 조금만 가면 슈퍼도 있고, 시장도 있고, 번화가도 멀지 않고….

또 속으로 변명하듯이 이유를 늘어놓던 재환은 티브이장 서랍에 DVD 몇 장을 넣는 것을 끝으로 탈탈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것으로 얼추 거실 정리는 마무리가 되었고, 이제 남은 건 저 문 너머였다. 커다란 종이 상자를 번쩍 들어 올린 재환은 현관 근처에 있는 문을 발로 밀며 창문도 없는 좁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과장 없이, 방은 바닥만 빼고 온 사방이 시커멨다. 천장과 벽에 빠짐없이 발라 둔 방음재 때문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이 공간에서, 재환은 상자에 담긴 짐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CD 장이 따로 없어 우선 CD들은 옆으로 긴 미디 책상 구석에 쌓았다. 포장을 뜯지 않은 것은 맨 아래에 두고, ‘The SUM’이란 이름이 적힌 것을 맨 위에 올렸다. 건전지만 갈았더니 새것처럼 멀쩡히 작동하는 LED 시계는 보다 눈에 띌 수 있도록 책상 가운데쯤 두었다. 그러다 번쩍이는 숫자가 나중 작업할 때 시야를 조금 방해할 듯싶어 살짝 옆으로 옮겼다.

책상 위를 채운 재환은 그다음으로 서랍 안에 넣을 것들을 상자에서 꺼냈다. 단연 그중에는 기타 줄이니 피크니 카포니 하는 기타 관련 용품이 많았다. 그것들은 책상 서랍 맨 위 칸으로 들어갔다. 그 아래 칸에는 유독 건조해진 눈 때문에 두둑이 사 놓은 인공 눈물이나 라이터 따위가 담겼다. 그리고 가장 아래 칸에는….

유학 시절 썼던 공책을 상자에서 집어 펼친 재환은 자세 그대로 잠깐 행동이 멎었다. 미묘한 기색이 서린 시선이 공책 사이 끼워져 있는 종이로 떨어졌다. 종이 위에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다만 오래 쳐다보고 있기에는 적잖이 남사스러운 자태라, 재환은 얼른 종이 뭉치를 서랍 안에 넣고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다른 물건을 정리할 때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멀쩡했던 눈가가 조금 벌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한 번 방을 나갔다 다시 들어온 재환은 좁은 공간 구석에 기타 가방과 앰프를 놓았다. 아예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놓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기타에 더 눈이 자주 갈 것이고, 또 그만큼 빈번히 연주하게 될 터였다.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 안 가 대강의 방 정리가 끝났다. 털썩 방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재환은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느릿느릿 발로 바닥을 짚어 가며 방을 둘러보자, 얼추 작업실의 모양새가 갖추어진 듯했다. 기분이 묘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나이가 서른 줄에 접어들었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이제라도 내가 하고픈 일을 하겠다고 공부 좀 하다 왔더니, 벌써 이런 나이가 되었다. 좋게 봐 줘도 새 출발 하기 썩 이른 시기는 아니었다. 잘한 짓이 맞긴 한 건지, 아직도 완벽히 확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와 현재를 적절히 섞어 놓은 이 방에서 열심히 작업하다 보면,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다지 긍정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럽게 낙관적인 마음이 들었다. 선택을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을뿐더러, 인제 재환은 예전처럼 모든 일에 안달복달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밴드 생활이 준 나름의 가르침이었다.

돌아가던 의자가 문득 멈추었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한 재환은 훌쩍 일어서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간 거실에서 부스럭부스럭 물건 뒤적이는 소리가 나고, 방으로 돌아온 재환의 손에는 작은 탁상 달력이 들려 있었다. 달력은 시계 옆에 놓였다. 해가 안 드는 이 방에서 흐르는 나날을 잊지 않기 위한 물건이었다.

머지않아 달력이 한 장, 두 장 뒤로 넘어갔다. 창문 없는 방 바깥세상에서는 꽃잎이 떨어지고, 비가 내리고, 추운 바람이 불다 이윽고 계절이 바뀌었다. 달력이 있던 자리에 다음 해 달력이, 또 그다음 해 달력이 놓였다.

그사이 재환은 계획했던 대로, 혹은 바랐던 대로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곡을 작업해 나갔다. 때로는 우주를 부르짖는 밴드의 노래가 되기도, 또 때로는 청량감 넘치는 듀엣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이토록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 과거의 기억은 점점 모난 곳이 둥글게 깎이고 곱게 다듬어져 추억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릿하게나마 웃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 돌아와 자리를 잡은 지 2년, 유학을 간 지 4년, 너를 떠난 지 8년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얻은 평화였다.

그 평화가, 오늘 부수어졌다.

화면 꺼진 노트북 앞에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재환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깊이 숨만 몰아쉬며, 제가 유지하던 일상이, 평화가 대번에 산산이 깨져 나가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목도했다. 혼란함이 넘쳐 현재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허망한지, 당황스러운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잘나가는 뮤지션 유한영이 믹싱해 주십사 의뢰 메일을 보냈다. 그것도 재환이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아니, 기억한다는 말 자체도 상당히 어폐가 있었다. 다름 아닌 재환 자신이 만들었던 곡이었으니까. 그 노래가 완전히 새롭게 녹음되어 당사자에게 돌아온 것이다. 무어라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유학 시절, 새벽에 담배 한 대 피우며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한영의 노래를 믹싱하는 상황을 상상한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한참 전 얘기였다. 먹고살기 바쁜데, 계속 그런 야무진 꿈을 품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뿐인가. 재환은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도망치기 급급했다. 담배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뛰쳐나오고, 화들짝 놀라 티브이를 꺼 버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지난 시간을 추억이라 일컬어도 이것만큼은 고칠 수가 없는 고질병이었다.

그러니 고작 3분 40초짜리 노래를 듣고 이다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였다.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거였다. 속으로는 거듭 같은 말만 되뇌었다. 어쩌라고. 나보고 뭘 어쩌라고. 도대체, 뭘, 어떡하라고….

머리칼을 흩트렸다가, 거칠게 마른세수했다가, 천장을 보며 한숨을 터뜨렸다. 그러다 돌연 주먹으로 퍽퍽 가슴팍을 내려쳤다. 영락없이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마저도 지쳐 두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 푹 상체를 고꾸라뜨렸을 때 즈음, 책상에 대충 던져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힘없이 구부러져 있던 허리가 대번에 꼿꼿이 펴졌다.

엎어진 핸드폰으로 주춤주춤 손이 뻗어 나갔다. 선뜻 기계를 뒤집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크게 숨을 들이켜며 휙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경직되어 있던 입술 사이에서 야트막한 한숨이 터졌다.

화면에 찍혀 있는 열한 자리 숫자는 아까도 한 번 전화가 왔던 번호였다. 혹시, 하고 걱정하던 한 사람의 전화는 아닐 거라는 뜻이었다.

“네, 여보세요.”

- 노래 들어 보셨나요?

전화를 받자마자 기획사 실장이라는 이의 사무적인 물음이 건너왔다. 시커먼 노트북 화면을 멀거니 응시하며 재환은 네, 하고 짧게 답했다. 이쪽의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던지, 상대가 잠시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나 재환이 끝내 말이 없자, 상대는 간결한 문장으로 전화를 건 목적을 피력했다.

- 믹싱 가능하신가요.

언제 오만 난리를 피웠냐는 양 재환은 천천히 눈꺼풀을 아래로 내려 앉혔다 들추었다. 벙긋이 벌어진 입에서는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네’, 혹은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답하면 될 질문일 텐데, 마치 세상 제일가는 난제를 맞이한 듯한 모습이었다.

- 서재환 씨?

입이 조금 더 크게 벌어졌다. 그 틈으로 들숨, 날숨이 빠르게 들락거렸다. 핸드폰을 쥔 손에, 바지의 허벅지 부근을 움킨 손안에 땀이 배어났다.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하는 자못 정중하게 들리는 독촉이 이어졌다. 어서 답을 내어야 했다. 8년 전 그날처럼 마냥 숨거나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 하기 어려우십니까?

못 하겠습니다. 못 해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정작 떠올린 말은 입 안을 맴돌 뿐이었다.

* * *

엔터테인먼트 실장이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은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밤도 작업 도중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재환은 불편하게 목을 수그리고 있다 퍼뜩 눈을 떴다. 으으, 침음하며 고개를 들자 책상 위에서 빛나는 LED 시계가 벌써 해 뜬 아침임을 알려 주었다.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스트레칭 하듯 쭉 팔을 늘인 재환은 비칠비칠 의자에서 일어섰다. 요 며칠 이런 식으로 쪽잠을 잔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온몸이 다 두들겨 맞은 듯이 찌뿌듯하였다. 마지막으로 침대에서 잠을 청한 게 언제인지 요원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작업 스타일은 슬슬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직은 썩 자신 없었다.

일단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고 몇 번 혀를 끌끌 차 준 뒤 면도기를 쥐었다. 꺼슬꺼슬 돋아난 수염을 밀고, 세수를 하고, 샤워기 앞에 섰다. 샴푸 묻힌 머리를 벅벅 긁는 와중에도 눈이 가물거렸다. 씻고 자시고 이대로 한잠 자면 딱 좋을 것 같았으나, 오늘은 외출할 일이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씻고 나와 머리 말리고, 옷을 입고, 대충 아침을 챙겨 먹는 사이에도 뜬 눈으로 꾸벅꾸벅 조는 일이 반복되었다. 두툼한 점퍼를 꿰어 입고 찬 바람 부는 바깥으로 나서고 나서야 흐리멍덩한 정신이 그럭저럭 깨어났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서로 만날 약속을 잡기에는 영 이른 시간이란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약속 상대가 상대인지라 별수 없었다. 갈수록 아침잠이 줄어들어 차라리 일찍 만나는 게 좋으시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점퍼 주머니에 푹 두 손을 찔러 넣고 터벅터벅 길을 따라 걷던 재환의 걸음이 한 빵집 앞에서 멈추었다. 과거와 같은 듯 다른 가게 내부를 창으로 들여다보던 재환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점원에게 고개를 꾸벅인 뒤 구석에 놓인 쟁반과 집게를 집어 들었다. 빵을 파는 곳답게 가게 내부에서는 온갖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단, 과거 재환이 기억하던 것과 파는 메뉴가 상당히 달랐다. 이름도 생소한 독일식 빵이 있던 자리에는 소보로빵이나 카스텔라 등 익숙한 빵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긴, 가게 주인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쟁반 가득 빵을 담은 재환은 계산대로 갔다. ‘적립해 드릴까요?’ 하고 점원이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늘처럼 특정 인물을 만나러 가는 날이 아니면 재환은 굳이 빵을 살 일이 없었다. 예전과 같이 합주하러 가는 길에 빵집을 들를 일은 더더욱 없었고.

두둑이 빵이 담긴 봉지를 쥔 재환은 걷고, 지하철 타고, 또 걸어 오늘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말이 약속 장소지, 기실 재환에게 있어서는 꽤나 익숙한 곳이었다. 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어둑하게 조명이 켜진 계단을 밟아 현철의 스튜디오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신명 나는 트로트 가락이 스튜디오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래의 주인공은 재환도 아는 이였다. 마침 현철 옆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재환을 보고는 반색했다.

“서 군 오랜만이네!”

“아, 왔어?”

재생되던 노래를 멈추고서 스르륵 의자를 돌리는 현철에게 빵 봉지를 내민 재환은 그 맞은편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쓱 봉지 안을 들여다본 현철이 ‘뭘 이런 걸 또.’ 하며 금세 빵 하나를 꺼냈다. 밥보다 빵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유학 후 막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재환은 옛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현철의 스튜디오에서 몇 달간을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당시에는 당장 일이 없기도 했거니와, 엔지니어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그때 현철은 아예 재환에게 쭉 스튜디오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었는데, 트로트 작업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던지라 재환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 후 오늘처럼 이따금 빵을 사 들고 현철의 스튜디오를 찾곤 했다.

“서 군이 올해 나이가 몇이지? 서른은 넘었나?”

“네. 서른둘이요.”

“어우, 얼굴은 아직 이십 댄데!”

종전 재환을 반겼던 중년 여성이 화려하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으로 재환의 손등을 찰싹 쳤다. 현철과 일하던 시절 종종 마주쳤던 트로트 가수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통칭은 송 여사였다.

“지금 애인은 있고?”

“아뇨, 일이 바빠서….”

송 여사는 전부터 유독 재환을 예뻐했다. 본인 입으로 당당히 미남이 좋다며 만날 때마다 재환에 대한 호의를 감추지 않았다. 그녀 기준에서는 이런 얼굴도 얼추 미남 축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송 여사에게 음흉한 뜻이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조금 다른 뜻이 있어서 문제지….

“아이, 그럼 우리 딸 좀 만나 보라니까? 애 착하고 성실해!”

“아….”

“송 여사 이러려고 안 가고 버티고 있었구만.”

‘김 기사는 신경 끄지?’ 하고 현철의 말을 싹둑 자른 송 여사는 아예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딸 사진을 띄워 내밀었다. 조금 난처해진 재환은 멋쩍게 웃으며 코앞에 놓인 핸드폰 화면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분께 공연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올해 스물여덟인데. 나이 차도 딱이잖어.”

“에이, 요새 젊은이들은 그런 식으로 안 만난다니까.”

송 여사에게 면박을 받고도 현철은 꿋꿋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여기에 질 송 여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뭐? 그럼 요새 젊은 애들은 다 클럽 이런 데서 만나나?’ 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이후 얼마쯤 더 두 사람 간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이어졌다. 이럴 때 옆에서 새우 등 터지지 않으려면 잠자코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니면, 얼른 자리를 피하든가.

슬그머니 소파에서 일어선 재환은 발소리를 죽여 스튜디오 뒤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 스튜디오에 딸린 나름의 탕비실로, 손님들을 위한 각종 차와 믹스 커피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좁은 탁자 앞에 선 재환은 전기 포트에 받은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렸다.

이제 나이가 나이인 탓에, 꼭 송 여사가 아니더라도 가끔가다 주변으로부터 저런 류의 제안이 들어왔다. 내 친구 만나 볼래, 내 후배 좀 안 만나 볼래, 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재희에게 ‘내 동료라도 좀 소개시켜 줘?’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원래 오빠 일에 그렇게 관심을 두는 동생이 아닌데, 재환이 누굴 만나는 기색이 좀처럼 없으니 어지간히도 속이 답답했던 듯했다. 심지어 그녀는 생긴 거 멀쩡하고 팔다리 두 개씩 달렸으면서 오빠는 왜 여자가 없냐고 악담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주위에서 그래 봤자 재환이 내놓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일이 바빠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일이 바쁜 건 사실이었다. 밤낮 쉬지 않고 열심히 믹싱해야 월세 내고, 대출금 갚고, 또 저축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람 만날 틈조차 없냐고 한다면… 아마도 아니었다. 정말 시간이 없으면 간혹 남자들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일조차 불가했을 터다.

이 상황의 원인을 따지려면 결국 8년 전 그날로 돌아가야 했다. 날 찾지 말라는 유치하면서도 매정한 말로 상대를 끊어 냈을 때, 재환은 앞으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주고받을 가능성까지 함께 끊어 냈다. 부러 그러려던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애정을 이미 한 번 받아 본 적이 있는데,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나겠는가. 어려운 일이었다.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 이미 한참 전 물이 끓은 포트를 넋 놓고 쳐다보던 재환은 파뜩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동작으로 종이컵 세 개를 착착 꺼내 믹스 커피 가루를 붓고 물을 탔다. 금세 퍼진 고소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커피 향이 어언간 울적해진 마음을 조금 달래 주었다.

조심조심 모아 쥔 커피 석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자, 송 여사는 또 화색을 띠며 어쩜 이리 싹싹하냐고 재환을 칭찬했다. 저 자신이 누구보다 싹싹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임을 잘 알기에, 재환은 이번에도 겸연쩍게 웃고 말았다. 방금 말은 현철 듣기에도 좀 어이가 없었는지, 작작 하라는 듯한 시선이 송 여사를 향했다.

그로부터 약 30분을 더 현철과 사이좋게 아웅다웅하던 송 여사는 ‘그럼 모레 또 온다!’ 하며 거대한 선글라스를 쓰고 가뿐히 자리를 떴다. 사람 하나가 나간 스튜디오에 일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남은 두 남자에게는 꽤나 익숙한 적막이었다.

일단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낸 현철은 재환에게도 한 대 피우라는 눈짓을 보냈다. 예전에나 어렵고 불편했지, 이미 현철과 맞담배를 피우는 일에 익숙해진 재환은 크게 눈치 보지 않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꽤나 오래 흡연을 참고 있었던 듯, 순식간에 한 대를 다 피운 현철이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문을 뗐다.

“요샌 무슨 작업 하나?”

“아…. 그냥 남자 솔로요.”

“인디 쪽?”

비슷해요, 하고 재환은 답을 얼버무렸다. 현철은 더 깊이 묻지 않고 ‘열심히 해.’라며 이미 꽁초가 한가득한 유리 재떨이에 탁탁 재를 털었다. 수염이 꺼슬꺼슬하게 돋아난 턱을 습관처럼 매만진 뒤, 재환에게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툭 던졌다.

“청산도 알아?”

“가끔 낚시하러 가시던 그 청산도요?”

“맞아. 기억하네.”

재환과 일할 적, 가끔 현철은 굵직한 작업이 끝나면 며칠간 잠수를 탔다. 그럴 때면 정말로 연락도 잘 안 되었다. 그러다 시커멓게 탄 얼굴로 스튜디오에 나타나 재환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한 서너 번쯤 되었다. 도대체 뭐 하다 오셨냐 물으면 늘 청산도에서 낚시를 하고 왔다고 했다. 한번은 그곳에서 본인이 직접 잡아 온 도미를 재환에게 준 적도 있다. 맛은 참 좋았으나, 몇 날 며칠 집에서 생선 구운 냄새가 빠지지 않아 꽤나 고생을 했었다.

“거기에 집을 샀거든.”

“집이요?”

“어. 아예 내려가려고.”

재떨이에 빈자리를 찾아 꽁초 끄트머리를 지지던 재환은 눈을 크게 떴다. 반면에 뻐끔뻐끔 연기를 뿜는 현철의 표정은 태연했다. 본디 평소에도 표정 변화가 큰 사람은 아니었다.

“가서 낚시나 하면서 살게. 지금까지 일은 실컷 했으니까.”

쉽게 말해 은퇴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얘기였다. 이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재환은 계속 유리 위에 꽁초를 꾹 내리누르기만 했다. 힘을 받은 꽁초가 반으로 부러지기 직전까지 구부러졌을 즈음에야 흠칫 놀라 손을 떨어뜨렸다. 한 박자 늦게 응당 현철에게 건네야 할 질문이 나갔다.

“그럼 스튜디오는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 네가 할래?”

재환의 눈이 한층 더 커다래졌다. 현철이 내뱉는 부연 연기가 당황이 역력한 얼굴을 얼핏 덮었다 넓게 흩어졌다.

스튜디오에 많다며 현철이 쥐여 준 과일 음료 상자를 손에 든 재환은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걸었다. 스튜디오 근처 곰탕집에서 반주까지 곁들이고 돌아왔더니, 어느새 높이 떴던 해가 슬금슬금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탓인지 오전에 집을 나설 때보다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상자를 들지 않은 손이나마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재환은 걸음을 서둘렀다.

이윽고 낡은 담벼락이 둘러진 길모퉁이를 휙 도는 찰나, 별안간 발이 쩍 굳었다. 호흡까지 함께 멈추고서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던 재환은 얼마 가지 않아 허탈한 숨을 터뜨렸다. 잠깐이나마 그의 다리를 묶어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저 앞 나뭇가지에 걸려 흔들거리는 분홍색 풍선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딴 데 가 있기로서니, 뭐 저런 걸 보고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을까 싶어 재환은 절로 헛웃음이 비어졌다. 심지어 그가 풍선과 착각한 상대는 이제 분홍 머리도 아닐 터였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애처로이 흔들대는 풍선을 지나쳤다.

과거 뻘건 벽돌이 발린 연립 주택이 서 있던 곳에는 인제 세련된 무채색의 빌라가 자리했다. 매끄럽게 열리는 자동문을 통과해 건물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을 꺼냈다. 혹시나 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가, 꼭대기 층인 5층에 멈춰 있는 것을 보고 그냥 계단으로 걸음을 틀었다.

보일러 온도를 한참 낮추고 나간 집은 내부 공기가 상당히 써늘했다. 해서 점퍼를 벗지 않은 채 털썩 거실 소파에 앉은 재환은 손에 쥔 우편물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관리비, 전기료, 통신비 고지서 등등을 차례로 지나 맨 뒤에 있던 우편물을 살피는 재환의 눈동자가 적잖이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당나귀 위에, 개 위에, 고양이 위에, 마지막으로 닭이 올라타 있는 그림이 그려진 엽서는 무려 독일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그 멀리서 재환에게 엽서를 보내 줄 사람은 하나, 아니, 둘밖에 없었다. 소파에 푹 기댔던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은 재환은 세훈이 보낸 엽서를 찬찬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온종일 줄곧 일자를 그리고 있던 입매가 차츰 부드럽게 휘어졌다.

A’Clock에서 아르바이트를 관둔 후에도 재환은 사장이었던 세훈과 종종 연락을 하며 지냈다. 직장에 취업했을 때에는 그가 재환을 따로 불러 거하게 축하 술을 사 준 적도 있었다.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재환은 술에 취해 한영과의 이야기를 줄줄이 세훈에게 털어놓았더랬다.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세훈의 연인인 태혁까지 합세해 그런 재환을 위로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순간 얼굴이 홧홧해질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그랬던 두 사람은 작년, 서로의 가게를 접고 함께 독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 받은 엽서에 적혀 있었다. 상대가 세훈과 태혁이라 그런지, 엽서를 끝까지 읽은 재환은 놀란 마음보다 축하하는 마음이 더 컸다. 기실, 그 둘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일반 부부와 별반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러니 정식 부부가 되었대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도리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재환은 작업실로 향했다. 소중한 인연에게서 온 소중한 엽서는 책상 서랍에 고이 넣은 뒤,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은 개인적인 일정으로 반나절이나 밖에서 보냈으니, 이제 마음잡고 작업에 집중할 타이밍이었다. 한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트랙들을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재환의 마음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정확히 집어 말하자면, 아까 현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본인은 올해 안에 서울 생활을 접고 청산도로 내려갈 계획이니, 이 스튜디오를 맡아 일하고 싶으면 말만 하라는 거였다. 재환이 그럴 돈이 없다고 하자, 그는 ‘내가 너한테 돈을 받겠냐.’라고 했다. 결국, 몸만 들어와서 일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한 말로,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이었다. 스튜디오를 준다는데 마다할 엔지니어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터였다. 재환 역시 사욕이 존재하는 인간인지라 당연히 욕심이 났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 밖으로는 영 속마음과 다른 소리가 튀어 나갔다.

전 그냥 집에서 작업하는 게 편할 것 같아요.

보나 마나 두고두고 후회할 대답이었다. 자다가도 생각나 벌떡 일어나게 될지 몰랐다. 이를 알고 있는지, 현철은 한 번 더 잘 생각해 보라며 재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체 왜 그랬을까, 라고 아무도 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을 스스로 건네며 재환은 어느새 흐릿해진 눈의 초점을 또렷이 잡았다. 다시금 모니터 속 빽빽이 차 있는 트랙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사소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지난번에도 꼭 오늘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믹싱이 가능하냐 거듭 전화로 묻는 상대에게 재환은 생각한 바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하겠습니다. 믹싱, 제가 할게요.

그때는 또 왜 그랬지? 재환은 픽 맥 빠진 웃음을 흘리며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다른 손으로는 머리칼을 한 번 휙 쓸어 넘긴 뒤 자판의 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곧이어 모니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한영의 노랫소리는 역시나 듣는 이의 심장을 자릿자릿하게 만들 정도로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저 목소리를 몇 번이나 더 들어야 작업을 끝낼 수 있을까. 이 또한, 아무도 답해 줄 수 없었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뚜껑 덮은 노트북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던 재환은 번뜩 눈을 떴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 빛을 반짝이는 시계가 지금이 아마도 해 뜬 아침임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재환은 제가 턱도 없는 착각을 했음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장탄식을 흘렸다. 당황스럽게도 시계에 뜬 숫자 옆에는 작게 ‘PM’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지금이 아침일 리 절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12시간을 넘게 잠들었던 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거의 반으로 접혀 있다시피 했던 허리를 세웠다. 두 손으로 벅벅 마른세수한 후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을 켜 며칠 전 의뢰인으로부터 메일로 온 작업 피드백을 다시 한번 읽어 내렸다.

보컬 볼륨 조금만 더 줄여 주시고, 킥 드럼 어택을 보다 살려 주시고, 기타 솔로 볼륨을 가능한 한 키워 주시고, 그리고,

나머지는 원곡자분 알아서.

곡 하나를 붙잡고 이리 오래도록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저 마지막 요구 사항에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뜻이냐 답문하고 싶었지만, 메일을 보낸 이가 한영일지, 아니면 주위에서 함께 작업하는 다른 이일지, 그마저도 아니면 실장이라는 사람일지 선뜻 판단이 들지 않았다. 물론 뮤지션 본인일 가능성이 가장 크긴 하겠으나…. 재환은 쓸데없는 고민을 멈추고 트랙 중간쯤에 놓인 바를 맨 처음으로 위치시켰다. 딸깍, 스페이스 키를 눌러 곡을 재생시킨 후 주먹 쥔 손에 슬그머니 뺨을 괬다. 양쪽 모니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도 같은 노래를 수없이 반복해서 들은 덕에, 이제 재환은 한영의 목소리를 듣고도 처음처럼 괴로이 머리를 감싸거나 가슴팍을 움키지 않았다. 계속 그랬다면 애초 작업을 하지도 못했을 터다. 다만 꼴깍 삼켜지는 침이나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같은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특히 노래가 후반부의 기타 솔로로 접어들면 증상은 조금 더 심해졌다.

재환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연주되는 기타 솔로는 과거 그가 한영에게 녹음해 보내 줬던 음원에 들어간 솔로와 같았다. 물론 이 트랙은 다른 기타리스트가 녹음한 것일 테지만, 멜로디가 재환 자신이 만들었던 라인 그대로였다. 밴딩의 타이밍이나 비브라토의 느낌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똑같은 솔로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니 재환은 그 부분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도대체 누가 녹음한 건지, 한영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기타 솔로를 고대로 넣은 건지,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건지 등등 하등 영양가 없는 질문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어찌 됐건 적어도 믹싱하는 입장에서 가질 의문은 아니었다. 믹싱 기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트랙을 잘 조합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일이었다. 소리의 뼈대, 살, 거죽을 정성스럽게 이어 붙여 살아 숨 쉬는 음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윽고 재생이 모두 끝났을 때, 재환의 뇌리에 ‘되었다’라는 짧은 한마디가 스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곡 전체에 깔린 풍부한 리버브와 그로 인한 현장감이 재환에게 마치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따라서 현재 제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보다는 썩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재환은 얼른 메일 창을 열었다.

방금 작업한 음원을 메일에 첨부한 재환은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짧은 메시지를 적고서 주저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일이 무사히 전송된 것을 확인한 후 노트북을 닫았다. 몇 시간이나 꼼짝 않은 채 작업실에 갇혀 있었으니, 잠시라도 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담뱃갑을 쥐고 슬렁슬렁 집 밖으로 나섰다. 외투 하나 걸치지 않고, 심지어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나온 탓에 바깥 공기가 유독 차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며 꿋꿋이 담배 한 대를 피운 재환은 서두름 없이 건물로 들어갔다. 이리 춥다가도 또 금방 덥다, 덥다 할 시기가 올 것임을 알았다. 실제로 다음 주면 달력상으로 봄이기도 했다.

시간 참 빠르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작업실 의자에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메일을 읽은 상대에게서 피드백이 오기 전까지 다른 작업이나 미리 해 두자는 생각에 노트북을 여는 찰나였다. 책상에 고이 두고 나갔던 핸드폰에 무심코 눈이 갔다. 핸드폰을 집은 재환은 액정을 톡톡 두드려 화면을 켰다. 동시에 낯선 번호로 온 부재중 전화 표시가 떠올랐다.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조금 전이었다. 이쪽에서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재환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고민은 금세 끝났다.

손안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는 동시에 재환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방금까지 눈에 담고 있던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바깥의 찬 공기가 미약하게 스민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인 재환은 핸드폰 화면의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1초, 2초, 화면 속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음에도 귀에 딱 붙인 핸드폰 스피커에서는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5초, 6초, 시간은 계속 흐르는 가운데 의자 바퀴 근처를 디딘 발바닥에서부터 슬금슬금 정체 모를 긴장이 차올랐다. 쿵쿵 심박이 빨라지며 입 안의 침이 빠른 속도로 말라 갔다. 이 모든 증상이 꼭 하나의 결론을 말해 주는 것 같아 긴장은 더욱 커졌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재환은 다시 한번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는 표시를 냈다.

“여보세요?”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았으면 장난 전화, 혹은 잘못 걸린 전화로 치부해 전화를 끊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도리어 핸드폰을 쥔 손아귀에는 한층 힘이 들어갔다. 온몸으로 퍼져 나간 심장의 고동이 귓속에서, 손바닥 안에서 쿵쾅쿵쾅 메아리쳤다. 얼마 안 가 더 꺼낼 수 있는 말이 하나뿐임은 깨달은 순간, 바짝 마른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설마, 혹시, 어쩌면, 이라는 마음과 함께 이 모든 동요를 감추기 위한 낯선 호칭이 입 밖으로 주춤주춤 흘러 나갔다.

“유… 한영 씨?”

15초, 16초, 17초,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 네.

치솟을 대로 치솟았던 전신의 박동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고막을 어지럽게 울리던 소리도 함께 뚝 멎었다. 그 사이를 파고들었던 한 음절의 음성이 호흡마저 멎게 만들었을 즈음, 눈꺼풀은 번쩍 위로 들린 채 제 기능을 잃었다. 그리하여 이제 침묵은 쩍 얼어 버린 재환의 몫이 되었다.

- 보내 주신 거, 들어 봤어요.

너무도 담담한 상대의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꽉 찬 침묵을 부풀렸다. 억눌린 성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두어 번 겨우 입만 벙긋거린 재환은 하릴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쪽을 택해야 했다. 지금의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 이대로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과거와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얹힌 낯선 말투, 그럼에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울림이 기어이 재환의 눈가를 벌겋게 물들였다. 그곳에서 퍼지는 열기로 인해 얼어붙었던 몸은 서서히 풀렸으나, 아직 대꾸를 건네기에는 무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머리가 새하얬다.

- 믹싱 부탁하길 잘한 것 같아요.

그에 반해 조곤조곤 전해져 오는 상대의 음성은 시종 차분했다. 별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재환은 아주 잠깐 자신이 모르는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혼란에 빠졌다. 아닌 말로, 목소리만 똑 닮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건너온 말이 재환의 혼란을 단숨에 잠식시켰다.

- 근데… 예전에 쓰던 메일은 이제 안 쓰나 봐요.

“예?”

혼란이 걷힌 동시에 입도 트였다. 상대가 묻는 바를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재환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요즘 같은 세상, 여기저기 가입해 둔 메일 서비스를 꼽아 보자면 두 손으로 세어도 모자랄 터였다. 하니 저쪽이 말한 ‘예전 메일’이 무엇인지 퍼뜩 생각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듯, 상대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슬슬 통화를 끝내는 방향으로.

- 아니에요. 아무튼, 믹싱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아, 네….”

- …그럼.

인사로 치기에는 애매한 한마디와 함께 상대방의 숨소리가 핸드폰 마이크에서 멀어지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래도 명색이 소리를 만지는 믹싱 기사인데, 절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기다란 엄지손가락이 얼굴에서 떨어뜨린 핸드폰 화면에 닿기 전, 그래서 초 단위로 움직이는 숫자가 멈추고, 이 통화가 영영 끝나 버리기 전, 재환은 전에 없이 다급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유한영!”

다시금 불어닥친 침묵 속에 저만치 멀어졌던 숨소리가 훅 가까워졌다. 재환에게 안도와 먹먹함을 함께 심어 주는 소리였다. 아랫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 놓은 재환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어줍고 멋없는 문장을 어물어물 만들어 냈다.

“노래…, 노래 좋더라. 진짜 좋았어.”

그 몇 마디도 힘에 겨워 숨이 가빠졌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맺혔다. 뜻하지 못한 순간에서 상대의, 한영의 노래를 맞닥뜨려 줄달음치던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본인의 멍청함, 뻔뻔함, 비겁함에 기가 차 헛숨까지 비어질 무렵이었다.

- 재환이 네 노래잖아.

또다시 호흡이 멎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상체가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핸드폰을 쥔 손이 툭 아래로 떨어지며, 팔꿈치가 가까스로 무릎을 짚었다. 짧디짧은 속삭임 하나로 끝내 고막이 녹고, 심장이 바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8년간의 필사적인 도피와, 너 없이 멀쩡히 살아 보려던 노력이 단번에 무용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추위 속에 담배를 피우며 재환이 예견했던 대로, 겨울은 금방 물러났다. 시린 바람이 불어오던 자리에 새순이 움트고, 꽃망울이 맺혔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겨울이 끝나갈 즈음 잠깐 위기를 맞이했던 재환의 일상은 다행히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았다. 곡 하나에 매달려 있느라 하지 못했던 다른 작업들을 착실히 해 나갔고, 다시 한번 현철을 찾아가 그가 해 주었던 고마운 제안을 말끔히 거절했다. 물론 오래도록 후회로 남겠지만, 그 후회 또한 응당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 언젠가부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재환에게 있어 퍽 익숙한 것이었다.

마지막 작업물을 넘겼을 때에서야 목소리를 들려줬던 지난 의뢰인은 다시 연락을 해 오는 일이 없었다. 재환이 빠르게 일상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덕이 컸다. 그가 남긴 영향이라곤, 저장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올 때 괜히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점 정도였다. 물론 잔뜩 긴장해서 전화를 받아 보면 열에 아홉은 광고였고, 나머지 하나쯤이 일 관련이었다. 괜히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단, 그 긴장감이 기대감과 조금 닮아 있다는 것은 재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사이 의뢰인은 새 앨범을 발매한 모양이었다. 본인에게서 들은 얘기는 당연히 아니었고, 스스로 찾아본 정보도 아니었다. 믹싱이 끝났으니 언젠가는 신곡을 내겠지, 하고 대충 짐작만 하고 있던 때 밴드 코스믹 라테의 보컬인 희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형님! 저희 공연 보러 진짜 안 오실 거예요?

“공연?”

- 아이, 한영 형님 앨범 발매한 거 기념 콘서트요! 저희 오프닝 선다 그랬잖아요.

아…, 하며 재환은 일순 대답할 거리를 잃었다. 정확히 공연 날짜가 며칠인지를 모르니 그날을 콕 집어 바쁘다 하기도 뭐했고, 그렇다고 제게는 한영의 공연을 보러 갈 자격도, 염치도 없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이걸 어쩌나, 하며 머뭇거리던 중 희성이 다소 생각지 못한 질문을 건네 왔다. 그것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 저…, 한영 형님이랑 아직 많이 좀 그래요?

“어…?”

적잖이 당황한 재환은 핸드폰을 쥔 채로 흠칫 굳었다. 이놈이 뭘 알고 이러나 싶었다. 기우였다.

- 형님 둘 싸운 거요. 전에 제가 눈치 없이 굴어서 정수 새끼한테 졸라 혼났잖아요….

재환의 입 밖으로 나지막이 안도 섞인 헛숨이 흘렀다. 맞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한영과의 사이가 틀어진 원인이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한 다툼으로 되어 있었다. 이쪽에서 부러 그런 식으로 설명한 적은 없으나, 나름 편리한 오해인 듯해 재환은 딱히 정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평소 같았으면 상대가 저런 걸 물어도 여상히 넘어갔을 텐데, 최근의 일 탓인지 그러지를 못했다. ‘한영’ 두 글자만 나와도 지레 당황하는 꼴이라니. 퍽 한심한 모습이었다.

“아냐, 그런 거.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래서, 공연이 며칠이라고?”

뻔뻔히 거짓말을 읊은 재환은 뒤이어 희성이 신나 알려 준 날짜를 찬찬히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분명 같은 날 무언가 일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선뜻 떠오르지 않아 미세하게 눈썹 사이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이내 아, 하고 작게 탄성이 터졌다.

“미안, 희성아. 나 그날 친구 결혼식이 있어.”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이었는지, 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며 재환은 편의점 한편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손에 든 바구니에 거침없이 척척 흑맥주를 담았다. 도르르 굴러간 맥주 캔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바구니가 기우뚱 기울었다.

1달도 훨씬 전쯤, 집에서 혼자 술판을 벌이다 술에 취해 본인이 저질렀던 귀여운 짓거리는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업실 물건을 모두 버려 버린답시고 야무지게 쓰레기봉투에 죄 쑤셔 넣었었지, 아마. 그러고서 정작 봉투를 바깥에 내놓지 못한 건 차마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웬만하면 나 홀로 술 마시는 일을 자제하려 했건만, 살랑살랑 불어오기 시작하는 봄바람이 문제인 건지 재환은 시원한 맥주 맛이 그리 그리워질 수 없었다. 그러다 또 술에 절어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한들, 어차피 저는 한영이 준 시계건 그림이건, 하물며 몰래 사 모은 그의 CD건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버릴 수 있었다면 진작 버렸다.

“어…, 안녕하세요.”

묵직해진 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가자 그 뒤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알은체를 했다. 일전 재환이 계산을 재촉하느라 본의 아니게 곤란함을 안겨 줬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물론 이후 그녀에게 커피 한 잔 건네며 나름의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네, 안녕하세요.”

삑, 삑, 매끄러운 캔 표면 위로 바코드가 찍혔다.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재환은 계산대 구석에 놓인 핸드폰으로 무심결에 눈이 갔다. 아르바이트생의 핸드폰인 듯했는데, 화면에서 꽤나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노래를 포함하여 그들의 앨범을 믹싱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재환 자신이었으므로.

“노래 좋죠?”

“예…?”

바코드를 모두 찍은 맥주를 큼지막한 비닐봉지에 담던 아르바이트생이 살짝 벙한 표정을 지었다. 재환은 그녀에게 카드를 건네며 고갯짓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코스믹 라테요.”

“네? 아, 네. 제가 이런 밴드 노래 좋아해서….”

“그래요? 저도 좋아해요.”

드르륵 영수증 출력되는 소리가 났다. 아르바이트생은 계산 끝난 카드를 내밀며 재환에게 ‘여, 영수증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괜찮다며 가볍게 얼굴을 저은 재환은 맥주 캔이 한가득 담긴 봉지를 쥐었다. 고개를 꾸벅여 안녕히 계시라 인사한 뒤 편의점을 나섰다. 시커멓고도 길쭉한 뒷모습을 좇아 얼굴이 발그스름해진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이 오래도록 따라붙었다.

밤바람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희미한 꽃향기가 풍겼다. 아직 세상 빛을 보지 못한 꽃송이들이 곧 만개할 날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솨, 소리를 내며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어오자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도 함께 짙어졌다. 바뀐 계절을 여실히 알려 주는 그 내음이 괜스레 재환의 가슴께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꼭 무슨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발부리에 걸린 작은 돌멩이를 데구루루 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데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워질수록, 은은히 끼치는 꽃향내 틈으로 묘하게 낯선 듯 익숙한 향이 조금씩 섞여 들었다. 가슴을 부풀려 크게 맡고 싶다가도, 까닭 없이 뒷덜미를 서늘하게 식히는 향이었다. 이윽고 5층짜리 빌라 건물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향기의 정체를 직감한 재환의 고개가 퍼뜩 저만치 앞의 골목 어귀로 돌아갔다.

아주 찰나였으나, 담벼락 끄트머리에 기다란 그림자가 살짝 걸렸다 사라지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늦은 밤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길고양이를 잘못 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손가락에 걸려 있던 봉지가 툭,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헤벌려진 봉지에서 우르르 굴러 나온 맥주 캔이 사방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안중에 둘 겨를이 없었다. 한순간 힘이 실린 다리가 길바닥을 박차며, 시선이 닿았던 저 앞을 향해 몸이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요란한 발소리가 좁은 길을 꽉 메우고, 포근했던 봄바람이 갈퀴가 되어 얼굴을 할퀴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죽기 살기로 달렸다. 명치를 터뜨릴 기세로 숨이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길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두 다리가 멈추었다. 급정거의 여파로 운동화 밑창이 땅바닥을 긁으며 거친 마찰음을 일으켰다. 속을 게워 낼 듯 헉헉 쏟아지는 숨소리가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새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눈썹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지도 못하고, 재환은 다급히 고개를 앞뒤로 돌렸다.

없었다. 향기의 범인이, 그림자의 주인이 어디에도 없었다. 재환을 맞이하는 건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늘어진 한밤중의 텅 빈 골목길뿐이었다. 좁고, 지저분하고, 심지어 바닥 여기저기 홈까지 팬 허름한 길에는 방금 사람이 지나간 흔적일랑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저 헌옷수거함 뒤에 숨었나. 아니면 번호판이 비뚤어진 저 낡디낡은 세단 뒤에 숨었나. 말도 안 되는 의심 몇 가지가 휙휙 마음을 스쳤으나, 끔찍한 허탈함과 허무함으로 뒤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불과 조금 전 시끄러운 발소리가 울렸던 길목에 터벅터벅, 터벅터벅 스러지는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한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저 자신을 향한 한심함이 필연적으로 출렁출렁 밀려들었다. 속으로는 거듭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말이 안 되지….

나이 앞자리가 바뀌어 이제 보이는 것도 이십 대 같지가 않다고, 그래서 헛것을 보고 엉뚱한 착각이나 한 거라고 실없는 합리화를 하며 맥주를 내팽개친 자리로 되돌아왔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캔을 찬찬히 다시 봉지 안에 주워 담았다. 캔이 터져 바닥이 맥주 범벅이 되지 않은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다리가 위태로이 후들거렸다. 급히 건물 벽을 손으로 짚은 재환은 야밤에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처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빌라 현관으로 들어설 즈음이었다.

우편함 앞에서 문득 걸음이 묶였다. 멈칫 굳은 재환은 우편함 밖으로 빼꼼히 튀어나와 있는 붉은색 종이봉투 귀퉁이로 주춤주춤 손을 뻗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편의점에 가기 위해 빌라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 없던 것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색부터 범상치 않은 봉투를 휙휙 앞뒤로 돌려 보았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도 봉투 겉에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었다. 받는 이의 이름 하나 쓰여 있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재환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맥주 봉지를 아예 바닥에 내려놓고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서 반질반질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손바닥 길이도 안 되는 작은 종이였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절취선이 그어진 종이 위에는 ‘유한영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제야 재환은 깨달았다. 오늘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었음을. 방금 이곳을 다녀간 이가 있음을.

* * *

사방에 꽃이 만발한 봄날 야외에서 열리는 결혼식은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그림이었다. 길게 늘어진 드레스 끝자락에서 부서지는 햇살, 그보다 더 희게 빛나는 신부의 얼굴, 그녀를 보고 만면에 웃음이 번진 신랑, 두 사람을 향한 축복 어린 눈길, 박수…. 이 모든 광경을 구름 한 점 없이 시푸르게 펼쳐진 하늘이 굽어보았다.

뜻하지 않게도, 그 한복판에서 재환은 기타를 치게 되었다. 고등학교 동창 좋은 게 뭐냐며 거의 반강제로 축가 부탁을 해 오는 친구 놈을 뿌리치지 못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한때 좁은 동아리실에서 부대끼던 부원들은 오늘 양복 차림으로 다 함께 악기를 잡았다. 그것도 달랑 합주 한 번 만에.

서로 사는 게 바빠 연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리 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게 실로 오랜만이라 재환은 긴장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한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턱시도 위에 베이스를 메고 마이크 앞에 선 신랑의 입이 열리는 순간 긴장은 단숨에 저 멀리로 날아갔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만, 신랑님의 노래 실력이 처참해도 너무 처참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는 오늘의 주인공을 보며 하객들은 너나없이 터지는 웃음을 참기에 필사적이었다. 어찌저찌 손을 움직이면서도 재환과 나머지 멤버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부만이 못내 감동한 얼굴로 눈물을 훔쳤다. 진정한 사랑이었다.

식이 끝난 후 이어진 피로연 자리에서 축가 무대가 단연 화제에 올랐다. 음치라 부르기도 민망한 신랑의 노래가 재차 회자되며 동창 여럿이 빙 둘러앉은 원형 테이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대뜸 화제가 다른 한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아니 근데, 서재환 얘는 손도 하나 안 굳었어?”

“그러게. 새끼 너 일 안 하고 맨날 기타만 치나 보다?”

그러겠냐, 하고 픽 웃은 재환은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뒤이어 호로록 입 안으로 흘려 넣은 와인에서 단맛, 신맛, 쓴맛 등 온갖 맛이 느껴졌다. 여전히 재환에게 있어서는 아리송한 맛이었다.

한 모금 맛만 본 와인 잔을 도로 내려놓은 재환은 테이블 아래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왼손 끝을 살살 엄지로 문질러 보자 딱딱한 굳은살이 만져졌다. 밴드를 할 때에도, 밴드를 관둔 후에도 단 한 번 부드럽게 풀린 적이 없던 굳은살은 이제 거의 돌덩이 같았다. 건드려도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근데 서재환 너 일하는 게 음악 쪽이라 그랬지?”

“비슷해. 믹싱.”

“믹싱? 그게 정확히 뭐 하는 건데?”

한 녀석의 물음에 ‘야, 이 무식아!’ 하는 원성이 빗발쳤다. 명색이 밴드 하던 놈이 뭐 그런 것도 모르냐는 거였다. 멋쩍게 웃은 재환은 모를 수도 있지, 하며 졸지에 화살 여러 대를 맞아 버린 친구를 두둔했다. 친구는 역시 잘생긴 재환이밖에 없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십 대에 만나든, 이십 대에 만나든, 삼십 대에 만나든 오가는 대화들이 참 변함없었다.

“근데 솔직히 나, 재환이 너는 계속 밴드 할 줄 알았다.”

“맞네. 나도 나중에 이 새끼는 꼭 티브이에 나올 줄 알았는데. 기타도 젤 잘 치고, 와꾸도 우리 중 젤 괜찮고.”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재환은 이번에도 멋쩍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티브이에 나올 인물은 따로 있고, 마찬가지로 음악으로 성공할 사람도 따로 있다는 얘기를 구구절절 친구들에게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맛있는 건지 맛없는 건지 잘 모를 와인이나 몇 모금 더 들이켰다.

“아. 장태군은 아예 못 온대? 누구 연락해 본 사람?”

“아이, 걔 오늘 출근해서 못 온다고 아까 그랬잖냐.”

“그랬어? 난 못 들었는데?”

“걔 악기점서 일해서 주말에도….”

재환이 오랜만에 듣는 이름 석 자에 쫑긋 귀를 기울일 즈음, 하객들 사이를 차례로 돌며 인사하던 신랑 신부가 테이블 가까이 왔다. 오늘 여러 가지로 가장 고생했을 신랑, 그리고 그 곁을 지킨 신부를 향해 사내 여럿이 내지르는 굵직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주위 다른 테이블에서까지 다 놀래 쳐다볼 정도였다. 그 사이에 섞여 재환도 함께 박수 치고 웃었다.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식이 완전히 끝나고, 벌건 대낮부터 2차, 3차를 부르짖는 친구 녀석들과 어울리다 보니 재환이 집에 돌아온 건 어느덧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이었다. 작업실로 들어서자마자 기타 가방부터 벗어 제자리에 놓은 재환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등받이 위로 휙 뒤통수를 젖히고서 답답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출퇴근과 상관없는 삶을 산 지 너무 오래라, 하루 종일 이런 양복 차림을 유지하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느슨히 하다 못해 아예 끌러 버린 넥타이를 휙 책상으로 던졌다. 아슬아슬 책상 모서리에 걸쳐진 넥타이가 얼마 안 가 무게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후, 약간의 짜증 섞인 숨을 뱉은 재환은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구부려 넥타이를 주웠다.

집어 올린 넥타이를 이번에는 보다 얌전히 책상에 올렸다. 그대로 다시 의자에 푹 몸을 기대려다, 요 몇 주 책상 구석을 지키고 있던 작은 종이로 손을 뻗었다. 딱히 전시해 두려던 의도는 아니었고, 버릴 수도 없고 고이 넣어 두기도 뭐해 책상 적당한 곳에 놔두었던 것이었다.

도로 머리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댄 재환은 천장을 향해 들린 얼굴 위로 종이를 가져갔다. 처음 받았을 때보다 반질반질한 감이 조금 사라진 종이, 다시 말해 콘서트 티켓에는 정확히 오늘 날짜가 찍혀 있었다. 시간을 보니 이제 공연 시작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티켓이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뜻이었다. 그럼 진짜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버려야 하나. 어떡하지. 쓰잘머리 없는 고민이 하나둘 머릿속에 차올랐다.

이럴 시간에 빨리 방에서 나가 양복을 벗고, 씻고, 얌전히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음이 맞았다. 한나절을 밖에서 보냈으니 뒤늦게라도 밀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오늘 재환은 좀 많이 피곤하고 좀 많이 귀찮았다.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티켓을 대충 있던 자리에 던져두고 의자에 더욱이 늘어졌다. 그대로 정말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도 얼마 오래가지 못했다. 핸드폰 진동하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푼 재환은 재킷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 화면에는 오늘 결혼식에서 만났던 동창 한 명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 왜?”

- 야, 메일 주소 좀 불러 주라! 오늘 니네 축가 찍은 거, 용량이 커서 메일로 보내야 될 것 같아.

아아, 한 재환은 별생각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메일 주소를 불렀다. 그러다 이내 아니다, 하며 휙휙 고개를 저었다. 엉뚱한 주소를 읊고 있던 까닭이었다.

“미안. 옛날 쓰던 주소를 잘못 불러 주고 있었네.”

상태가 안 좋긴 한가 보다, 싶어 맥 빠진 웃음을 흘린 재환은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현재 쓰는 메일 주소를 친구에게 불러 주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뒤에 포털 사이트 주소가 다른 정도였다. 한데, 그마저도 제대로 끝맺지를 못했다.

“언더바, reverb, 골뱅이….”

말끝이 어물어물 흐려지자 스피커 너머에서 ‘서재환?’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재환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상황에서 들었던 전혀 다른 목소리가 웅웅 귓속을 울렸다.

예전에 쓰던 메일은 이제 안 쓰나 봐요.

“야, 미안! 전화 좀 끊을게!”

상대의 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끝낸 핸드폰을 냅다 책상으로 던졌다. 서둘러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 창을 켠 후, 최근에는 좀처럼 들어갈 일이 없던 포털 사이트 주소를 다급히 입력했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 주소를 자꾸 틀려 절로 아씨, 하는 탄식이 흘렀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도 오타는 계속 이어졌다. 그뿐이면 모르겠는데, 기껏 고쳐 써서 엔터를 눌렀더니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속 터지는 메시지가 떴다. 꽉 아랫입술을 짓씹은 재환은 한 번 더 탁탁 타자를 쳤다. 거의 자판을 때리듯 엔터 키를 눌렀다.

“씨, 진짜…!”

또 된소리가 터졌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야속한 인터넷 화면은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답답한 문구만 계속해서 보여 주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긴 재환은 이제라도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천천히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심호흡했다. 이러다 또 비밀번호를 틀려 이걸 인증하라느니 저걸 인증하라느니 상황이 복잡해지면 답도 없었다.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나 곰곰이 머릿속을 짚어 보았다.

재차 느리게 숨을 뱉으며 노트북 키보드 위로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마구잡이로 자판을 눌러 오타를 내지 않고, 그래서 짜증스럽게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지 않고 ‘더숨24314563’이라는 단어를 천천히 입력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톡, 엔터를 두드렸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쥔 재환은 순간적으로 의자에서 들썩 엉덩이를 띄워 올렸다. 수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제대로 된 비밀번호를 입력한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래간 로그인하지 않았던 계정의 휴면 상태를 풀어야 했다. 그래도 아주 조급한 마음이 어느 정도는 수그러든 터라 여기서부터는 비교적 차분히 할 수 있었다. 비교적.

이윽고 모든 절차가 끝났다. 조심조심 마우스를 움직인 재환은 그토록 접속하기 힘들었던 메일함으로 드디어 들어갔다. 예상대로 첫 페이지부터 목록을 거의 가득 채우다시피 한 광고 메일들이 재환을 맞이했다. 한참 동안 계정이 휴면 상태였던 탓에, 메일은 모두 몇 년 전 온 것이었다.

습관처럼 주먹 쥔 손으로 입가를 막은 재환은 하나씩 페이지를 뒤로 넘겨 가며 어지러운 광고 메일 사이에서 단 하나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2페이지로, 3페이지로 화면을 넘겨도 찾고 있는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맨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는 거 아닌가, 하는 힘 빠지는 생각을 하는 찰나 부지런히 화면을 훑던 눈동자가 한곳에 멈칫 고정되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수신인은 같되 제목만 조금씩 다른 메일들이 차례로 스쳤다. 재환아, 재환이에게, To 재환. 그리고 또다시 재환아, 재환이에게…. 다음 페이지로, 또 그다음 페이지로 넘겨도 메일은 계속 나왔다.

메일은 하루걸러 온 적도, 이틀에 한 번 온 적도, 그러다 일주일 만에 온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끊기지 않고 꾸준히 왔다. 대충 눈에 보이는 개수만 어림잡아 수십 통은 되지 싶었다. 이 모든 목록을 거슬러 올라가 드디어 재환은 맨 처음 도착했던 메일에 도달했다. 날짜를 보니 함께 Embryo의 공연을 보러 갔던, 그리하여 서로의 마지막이 되었던 날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시점이었다. 머뭇머뭇 움찔거리던 검지가 달칵, 마우스의 왼쪽 버튼을 눌렀다.

‘재환아’로 시작하는 메일의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나마 몇 개 되지 않은 문장도 서로 뜻하는 바가 비슷비슷했다. ‘왜 그래?’ 하는 물음이 반, ‘나한테 왜 그래….’ 하는 토로가 반이었다. 참 저다운 내용이라, 한영의 메일을 단숨에 읽어 내린 재환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복잡다단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저 아래서부터 차오르는 긴 한숨을 뱉으며 다음 메일을 눌렀다.

휙휙 눈을 굴리다 마우스를 누르고, 또 눈을 굴리다 마우스를 누르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중간중간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거나, 고개를 젖혀 답답한 숨을 토하면서도 재환은 꿋꿋이 한영이 보내 놓은 편지를 읽어 나갔다. 수시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나한테 이러지 마. 따위의 서러움 어린 타박으로 가득했던 메일은 열 번째가 넘어갈 즈음 서서히 후회와 반성으로 물들었다.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미안해. 이처럼 조건도 없고, 변명도 없는 사과가 몇 통씩이나 이어졌다. 그것도 서른 통이 넘어갈 무렵에는 또 내용이 바뀌었다.

보고 싶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재환아….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어도 이보다는 더 절절할 수 없을 듯한 말들이 메일마다 넘쳐흘렀다. 이때 재환은 잠시 눈앞이 흐려져 숨을 고르며 쉬어 가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래 봤자 채 몇 초를 넘기지 못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메일을 읽기를 한참. 한때는 원망을 토하고, 한때는 싹싹 빌다가, 끝내 보고 싶다는 고백으로 사람의 마음을 뭉크러뜨리던 편지가 조금 다른 내용이 되었다. 더 이상 상대를 탓하거나 막무가내로 붙잡지 않았다. 훨씬 차분해지고, 담담해졌다. 약 오십 개의 메일을 읽고 나서야 찾아온 변화였다. 그 변화가 도리어 재환의 가슴에 화르르 뜨거운 불을 지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파도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어느 쪽이 되었든, 쉽사리 헤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십 통에 달하는 메일을 모두 읽었을 때, 재환은 LED 시계로 고개를 돌려 현재 시각부터 확인했다. 동시에 눈가가 붉게 물든 얼굴이 난처함을 머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이러고 있을 여유조차 없다는 의미였다.

책상에 있던 티켓을 거의 구기듯 집어 양복 주머니에 쑤셔 넣은 재환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오랫동안 꼼짝을 않고 있었던 탓에 순간 어찔 현기증이 도졌으나, 지금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섰던 차림 그대로 재환은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하필이면 짝을 멀찌감치도 떨어트려 벗어 둔 구두에 서둘러 한쪽씩 발을 밀어 넣었다. 그대로 뒤돌아 현관문을 박차기 전, 퍼뜩 무언가가 생각난 재환은 다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다급히 침실로 들어갔다. 방구석에 놓인 옷걸이 꼭대기에서 검정 볼캡을 낚아채 푹 머리에 눌러썼다.

다소 부조화한 차림을 한 재환은 도로 현관으로 가 구두에 발을 넣고, 문밖으로 나서서, 엘리베이터 기다릴 시간도 모자라 우당탕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몇 번이나 계단에서 삐끗 구두 뒷굽이 미끄러질 뻔한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악착같이 핸드레일을 붙들었다. 덥석 손이 닿았다 떨어진 핸드레일의 철제 표면에 미세한 땀자국이 남았다.

밤중의 골목으로 나와서도 재환의 달음박질은 계속되었다. 위에는 모자, 밑에는 양복, 거기에 미친놈처럼 뛰는 모습이 딱 범죄자 비슷한 꼴로 비치기 십상이었으나, 지금은 설사 경찰이 쫓아온대도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이유가 불현듯 재환의 걸음을 느려지게 만들었다.

뛰는 것에서 걷는 것으로 다리의 속도를 늦춘 재환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부르르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에는 엄마 두 글자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 응, 재환아. 윤호 결혼식은 잘 다녀왔어?

재환은 그렇다, 하고 답하며 끝까지 여며 있던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날이 부쩍 따뜻해진 탓에 그거 뛰었다고 벌써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포근해진 날씨를 증명하듯 이미 머리 위로는 흐드러지게 분홍 꽃잎이 만개해 있었다. 물론 마음이 급해 찬찬히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 저녁은. 먹었고?

아니라고 답하자 어머니는 그럼 집에 와서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했다. 다만 무심한 아들은 알았다는 대답 대신 ‘왜?’ 하고 되물었다. 어머니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 왜긴. 너 오늘 음력 생일이잖아.

때마침 저 앞 골목 어귀에서 은색 택시 한 대가 등장했다. 일순 눈이 번쩍 뜨인 재환은 택시를 향해 들입다 팔을 흔들었다. 이미 두 다리는 그쪽을 향해 뛰고 있었다.

“나 지금 어디 가거든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재환아’ 하는 부름이 어렴풋이 들리는 핸드폰의 통화 종료 아이콘을 꾹 눌렀다. 바로 앞까지 와 멈춰 선 택시 문을 열고 거의 다이빙하듯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급히 목적지를 말한 후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라는 부탁을 덧붙이고 나서야 재환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죽 냄새 물씬 나는 시트에 푹 몸을 기댔다.

하나 마음을 놓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가지도 못해, 재환이 탄 택시는 어마어마한 차들의 행렬을 만나 도로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주말 저녁, 포근한 날씨, 활짝 핀 벚꽃. 이 삼박자가 한꺼번에 맞아 들어간 결과였다. 눈 한 번 뗐다 돌리면 훅훅 올라가 있는 미터기의 숫자보다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재환의 속을 더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저씨, 저기 세워 주세요.”

또다시 미친 듯한 달리기의 시작이었다.

컴컴한 무대에 번쩍 불이 들어올 때, 양복바지에 감싸인 다리가 우당탕 요란한 구두 소리를 내며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마이크에 붉은 입술이 닿을 때, 서서히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날렵한 몸이 뛰어들었다. 곡 하나가 끝나 관객들이 열광할 무렵에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시선이 이제 겨우 다다음 역이 표시된 전광판을 주시했다.

공연이 중반부로 접어들며 커다란 라이브 클럽이 한층 더 뜨거운 열기에 물들었다. 그즈음 재환은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찬 승객들 사이에 끼어 지하철에서 내릴 틈을 노렸다. 건반을 내리치던 하얀 손이 턱 끝에 매달린 땀을 닦아 낼 때는 재환도 역사 안을 내달리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그렇게 겨우 지하철을 갈아탄 후, 또 초조하게 전광판만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무대에서 몇 번 더 곡이 바뀌는 사이, 재환이 하염없이 올려 보던 전광판에 표시된 역 이름도 수차례 바뀌었다. 그때마다 재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섯 정거장만 더, 세 정거장만 더, 한 정거장만 더…. 마침내 익숙한 역 이름이 떠오르며, 드디어 재환은 숨 쉴 틈도 없이 사람들로 꽉꽉 찬 지하철에서 내려섰다. 그래 봤자 또 뜀박질의 시작이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직 멈출 수 없었다.

무대 조명이 꺼져 어두컴컴해진 클럽 안에 관객들의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가장 뒤쪽에 선 재환은 절취선이 잘린 티켓 귀퉁이를 양복 주머니에 넣으며 헐떡헐떡 숨을 골랐다. 이제 앙코르밖에 안 남았다고, 들어가셔도 소용없다는 매표소 직원과 실랑이하지만 않았어도 마지막 곡의 무대 정도는 볼 수 있었을 텐데, 적잖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앙코르라도 볼 수 있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임을 알았다. 계속 택시에 타고 있었어도, 아니면 지하철 하나만 놓쳤어도 여기까지 오는 길이 모두 헛걸음이 되었을 터다.

쿵, 클럽 벽에 등을 기댄 재환은 오매불망 뮤지션이 다시 무대에 올라와 주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좌석 없이 전부 다 스탠딩석으로 된 공연이라, 이곳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실제 공연장에 있는 사람의 수는 훨씬 많을 것 같았다. 절로 ‘유한영 성공했네’라는 싱거운 생각이 들게 되는 풍경이었다. 모자 그림자에 가려진 입가에 픽 옅은 웃음이 걸렸다.

탁, 소리와 함께 다시 무대 조명에 빛이 들어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번쩍 팔을 들어 올린 관객들이 ‘앵콜! 앵콜!’을 외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들 약속한 듯 우르르 앞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재환이 선 뒤쪽에는 보다 큰 공간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재환은 사람들의 열광 속에 섞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본인이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걸음했을지언정 저 틈에 섞여 ‘유한영’을 외칠 용기, 내지는 자신 따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저는 이 자리가 딱이라는 결론을 내릴 즈음, 함성이 더욱 커졌다. 무대에 쏟아지는 빛도 함께 밝아졌다. 이 모든 신호가 뜻하는 바를 직감한 재환의 심장 박동이 덩달아 쿵쿵 치솟았다. 입 안에 마른침이 고이고, 좀 가라앉는가 싶었던 호흡이 다시금 빨라졌다. 더불어 종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시답잖은 생각들이 빠르게 하나둘 걷혀 나갔다. 그 대신 당장 저 앞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과 지금이라도 여기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마음이 맹렬히 부닥치는 순간이었다.

와-!

더는 소리가 커질 수 없을 만치 폭발하는 환호 속에서 한 남자가 사뿐사뿐 무대 위로 등장했다.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칼을 흔들며, 녹을 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여유 있게 손짓하는 남자는 어깨에 기타를 메고 있었다. 분홍색 텔레캐스터였다. 그를 뒤따라 올라온 세션들이 드럼 뒤에, 베이스 앰프 앞에, 키보드 뒤에 각자 자리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가벼이 기타 줄을 튕겼다. 동시에 무대 구석에 있는 사람 키만 한 앰프에서 영롱한 기타 음이 짤막하게 울려 나왔다. 단, 리버브가 잔뜩 배어 있어 소리가 남긴 잔향이 길었다. 만족스럽다는 듯 기타를 연주해 본 이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뒤이어 무대 위에서 짧은 눈짓이 오가고, 붉은 입술이 마이크 가까이 다가갔다. 나지막한 숨소리가 흘렀다.

앙코르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꺼번에 터지는 악기의 소리와 함께 무대 앞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이 들썩들썩 뛰어올랐다. 지반의 흔들림이 맨 뒤에 외따로 서 있는 한 명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그 한 명이 모자 그림자에 더 깊이 얼굴을 숨기는 사이, 단번에 악기가 싹 빠져나간 자리에 속삭이는 듯 읊조리는 듯 차분한 노랫소리가 퍼졌다. 반주는 일정하게 밟히는 킥 베이스와 패드 음이 유일했다.

규칙적인 박자의 드럼과 몽롱하게 깔리는 저음,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벌스는 빠르게도 지나갔다. 찰나의 브레이크가 걸리고, 다시 온갖 악기들이 들어오며 널따란 클럽이 흥분에 휩싸였다.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기타와 건반의 멜로디가 사람들을 더 높이 뛰어오르게 하고, 박자를 맞춘 베이스와 드럼이 그들의 발아래를 보다 묵직하게 채웠다. 흐르는 음악과 환호 외에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 와중 모자챙에 가려진 까만 눈동자는 줄곧 기타 위를 오가는 새하얀 손가락에 고정되었다. 여유롭게 노래하는 모습, 밝은 표정, 힘 있는 움직임 등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저것만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신기하다거나 놀랍다는 말로 단순히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감상이 가슴께를 꽉 메웠다. 심장이 위태로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상대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는다면 괜찮을 터였다. 그렇게 믿으며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더 깊이 눌렀다.

쾅, 스네어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곡 하나가 끝났다. 성능 좋은 마이크를 통해 힘껏 노래한 이의 가쁜 숨소리가 그대로 무대 밖까지 전달되었다. 곧이어 들뜬 기색이 어린 말소리가 거대한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방금 들으신 곡은 제 지난 앨범에 실렸던 곡이에요. ‘Night Fall’. 기억하시죠?”

‘네-!’ 하는 함성이 터졌다. 아마도 답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오늘 들려 드린 건 조금 색다르게 편곡한 버전이에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요!’ 하고 목 놓아 외쳤다. 무대에서도 충분히 들릴 만큼 우렁찬 소리였던지라, 오늘의 주인공은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일부 여성 관객들이 꺅, 음조 높은 탄성을 내질렀다.

“다음으로 들려 드릴 곡도 조금 색다른 노래가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번 발매한 CD의 히든 트랙으로 실린 노래거든요. 제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꼭꼭 숨겨 둔 노래예요.”

여전히 저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재환은 속으로 ‘말을 왜 저렇게 잘해’라며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괜찮은 척, 멀쩡한 척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실 지금도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지 않고서는 조금 버티기가 힘들었다. 언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릴지 몰랐다. 뭐, 오늘 달린 거리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제가 되게 좋아하는 친구가 만들어 줬어요.”

썩 유창하게 흐르는 멘트를 애써 흘려들으며 발끝만 보고 있던 재환의 고개가 한순간 번쩍 위로 들렸다. 당황이 한가득 서린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아니겠지, 설마, 하는 말들이 삽시에 펑펑 샘솟아 마음속을 어지러이 떠다녔다. 여전히도 빨간 저 입술 사이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등골이 바짝 긴장됐다.

“그럼 바로 들려 드릴게요. ‘Reverb’.”

부드러운 발음을 타고 흐른 짧디짧은 단어가 단숨에 재환의 호흡을 틀어막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도망칠 때라는 경고음이 요란스레 귓가를 울렸다. 이 자리에서 저 노래를 듣는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예감, 혹은 직감이 우르르 몰려들어 심장을 두방망이질 치게 만들었다.

비슷한 예감을 느낀 것이 지금만이 아니었다. 인정하건대, 근래 계속 이런 일의 연속이었다. 대뜸 메일로 온 노래를 틀어 보았을 때도, 그 노래를 제 손으로 믹싱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도, 믹싱이 끝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을 때도 재환은 번번이 돌이키지 못할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절망감에 가까운 그 기분을 일상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늘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상대가 직접 정성스럽게 티켓을 놓고 갔다 한들, 재환은 쉽사리 여기까지 올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제 눈으로 한영의 공연을 보고 몇 날 며칠 밤잠 설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움, 부러움, 후회, 환멸 등 온갖 너절한 감정에 잠식되고 싶지 않았다. ‘너 없이도 나는 나름 잘 살고 있다’라는 명제가 흔들릴 것이 뻔한데, 어찌 그런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용기나 베짱이 재환에게는 없었다.

어찌 됐건 재환은 제 발로, 그것도 미친놈처럼 달려 끝내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절대 넘어서는 안 될 마지막 선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유명 뮤지션 유한영과 일개 믹싱 기사 서재환을 나누는 무형의 선이었다. 설사 여기서 도망치지 못할지라도, 저 선만 넘지 않으면 그래도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러기를 바랐다.

익숙할 수밖에 없는 기타 리프와 함께 속삭이는 듯한 노랫소리가 또 한 번 클럽에 퍼졌다. BPM 74로 흐르는 곡의 리듬을 따라 종전까지 방방 뛰던 사람들이 좌우로 팔을 흔들었다. 어디까지나 재환의 역할은 이를 관망하는 것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딱딱한 벽에 기댔던 허리가 곧게 서며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력에 이끌리듯 걸음을 내딛던 재환은 마음속으로 굳게 그어 놓았던 선을 어느새 너무도 간단히 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같은 박자로 몸을 흔드는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다.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허리까지 굽혀 가며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갔다. 8년 전 그날처럼 저를 이끌어 주는 손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아갔다.

음악에 취한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헤친 재환은 마침내 손을 뻗어 무대 앞 펜스를 붙잡았다. 답답한 틈새를 빠져나와 숨을 크게 들이켜는 순간 탁 트인 공기가 훅 폐부로 들이쳤다. 동시에 모자챙 아래로 파고드는 환한 조명이 일순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몇 번 눈꺼풀을 깜빡거리고 나서야 무대 가운데 서 있는 이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훑어 올라가야 하는 긴 다리와, 마치 지난날의 색 고운 머리칼처럼 달콤한 빛을 흩뿌리는 기타와, 그 위를 노니는 섬려한 손가락.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면….

재환은 황급히 동그란 챙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껏 여기까지 왔건만, 앞으로 감당해야 할 모든 번뇌와 고난을 각오하면서 이 자리에 섰건만, 마지막 하나 남은 가슴의 응어리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게끔 만들었다. 멀쩡하게 지내는 척, 한 사람 몫은 하며 살고 있는 척해도 끝내 풀어낼 수가 없던 감정이었다. 입술을 사리물며 재환은 챙을 쥔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한데, 조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시야를 어둠에 가두었더니 귓속으로 흘러드는 모든 소리가 훨씬 더 선명하고 생생한 색을 입었다. 기가 막히게 믹싱을 한 트랙처럼 드럼, 베이스, 건반, 기타가 저마다 다른 주파수로 손실 없이 완벽한 소리가 되어 다가왔다. 집중해서 작업할 때에도 이렇게 귀가 트인 적은 없었다.

그 중앙에 섬세하게 고음이 살아난 목소리가 있었다. 숨소리가 적절히 섞여 있어 사람의 심장을 살살 간질이다 끝내 꽉 움키고 마는 목소리였다. 고스란히 이를 고막으로 담아내는 재환의 고개가 더 푹 아래로 수그러졌다. 펜스를 짚고 있던 손이 지그시 가슴팍을 내리눌렀다. 그 부근의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그럴수록 귓전을 파고드는 노랫소리는 한층 또렷해졌다. 과거에는 ‘음음’ 하는 허밍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는 가사가 한 음절 한 음절 지나치게 똑똑히 들렸다.

흔들리는 꽃잎에 네가 있어

떨어지는 낙엽에 네가 있어

붉게 지는 노을에도

별이 뜬 밤하늘에도 오직 너뿐이야

그리고 담담히 울리는 노랫말은 오랫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결국 오늘에서야 확인했던 메일에 적힌 문장들을 하나둘 재환의 머릿속으로 불러들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어느 것이 지금 들리는 것이고, 어느 것이 제가 떠올린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마치 한 사람이 두 개의 목소리로 양쪽 귓가에 소곤소곤 밀어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기이한 착각이었다.

재환아. 오늘은 비가 내렸어. 엄청 많이 내렸어. 우리 같이 비 맞았던 거 기억나? 막 바람도 불고. 그때 너희 집 앞에서 키스했는데. 아직도 나 그때 꿈꿔. 그날 너무 행복했어. 한 번만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가서 너랑 만나고 싶어.

내리는 비에 네가 있어

불어오는 바람에 네가 있어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도

내려다본 발끝에도 오직 너뿐이야

재환아. 오늘은 회사에서 첫 녹음을 했어. 노래 못 부른다고 혼났어. 너무 내 마음대로 부른대. 네가 있었으면 그런 소리 안 들었을 텐데. 그래서 자꾸 네 얼굴이 아른거렸어. 근데 그거 알아? 나 너 보고 너무 잘생겨서 첫눈에 반했어. 몰랐지? 비밀인데 알려 주는 거야.

눈만 뜨면 네가 보여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져

네가 내게 남긴 게 너무나 많아서

재환아, 안녕.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얼마 전에 매니저 형이 새로 생겼는데 이름이 배정환이야. 근데 내가 자꾸 형을 재환이 형이라고 잘못 불러. 그랬더니 형이 재환이가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고 짜증 냈어. 기타 잘 치고 잘생긴 놈이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웃기지?

오늘도 난 네 이름 불러

너의 품만 그리고 있어

네가 내게서 가져간 게 참 많아서

재환이에게. 나 이제 곧 새 앨범이 나와. 인터뷰도 엄청 하고 며칠 전에는 바닷가에서 뮤직비디오도 찍었어. 날이 추웠는데 계속 달렸어. 근데 감독님한테 넌 연기는 안 되겠다고 혼났어. 난 맨날 혼나기만 해. 그래서 집 오니까 조금 눈물이 났어. 바보 같지? 사실 나 아직도 많이 울어.

나를 숨 쉬게 하고

또 울게 하고

달리게 하고

멈춰 서게 했어

재환아. 앨범이 나왔어. 반응이 좋대. 순위도 높은가 봐. 사람들이 자꾸 축하한다고 하는데 아직 나는 얼떨떨해. 그냥 난… 너만 들었으면 좋겠어. 너 가는 곳에서 막 내 노래가 나왔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가 내 생각했음 좋겠어. 미안해, 재환아. 보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래도 나는

영원토록

멈추지 않는 속삭임 속에 벌스가 지나가고, 후렴이 지나가고, 곡이 가장 고조되는 하이라이트까지 지나갔다. 이 곡을 믹싱했을 때를 되새긴다면, 이제 노래는 기타 솔로로 접어들 시점이었다. 머지않아 짐작대로, 넉넉한 잔향을 품은 기타 음이 커다랗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줄곧 무대의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재환의 고개가 천천히 위를 향했다. 빛이 쏟아지는 무대로 시선이 닿았다.

수없이 제게 닿았던 고운 손가락이 길게 뻗은 기타의 넥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물결치는 것처럼 뻗어 나온 소리가 널찍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도망칠 곳이 없었고, 숨을 곳이 없었다. 지난날 제 머릿속에서 비롯돼 손끝에 잠깐 머물렀던 소리가 저 길고 하얀 손가락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네가 나의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느덧 가슴팍에서 떨어진 손이 다시금 머리로 올라가 모자챙을 쥐었다. 검정 머리칼을 덮고 있던 모자가 스르르 위로 들리며, 벗겨진 모자 끄트머리를 쥔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그림자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무대 밖까지 퍼진 조명에 물들어 환히 빛났다. 그 빛이 재환이 마지막까지 가슴에 움키고 있던 괴로운 감정들을 서서히 녹였다.

죄책감이었다. 씻을 수가 없는 자책감이자 죄악감이었다. 너를 위해서, 너의 노래를 위해서, 너의 미래를 위해서. 이따위 오만 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도 결국 자신이 먼저 저 손을 놓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 포장해도 제가 먼저 그를 버린 것이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믹싱 기사가 되어 아무리 다른 목소리를 듣고 다른 연주를 들어도, 그 하나하나를 만지다 밤을 꼴딱 새워도, 그러다 속절없는 그리움에 잠겨 타인의 온기를 느껴도 재환의 머릿속은 온통 한영이었다. 벗어날 수가 없는 굴레였고, 아마도 평생을 짊어져야 할 업보였다. 젊은 날의 치기로 치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관계가 이토록 저를 아프게 쫓아다닐 줄 차마 몰랐다.

장장 8년을 그랬다. 내리는 비에, 불어오는 바람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 한 점에도 온통 한영이 있었다. 고국의 하늘이건 타국의 하늘이건 다르지 않았다. 그뿐일까. 술에 전 배를 문지르며 국 하나를 끓일 때도, 끙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뜨린 피크를 주울 때도, 어쩌다 한 번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재환의 마음에는 한 사람만 존재했다. 분홍 머리를 하늘하늘 흩날리며 꽃처럼 웃는 한 사람만 눈에 비쳤다.

그 한 사람이 지금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아니, 정말 닿을 것 같았다. 기타 줄을 짚으며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이라든가, 그 아래 팔목에서 흔들거리는 끈 팔찌라든가, 찰랑거리는 머리칼 주변으로 튀기는 자잘한 땀방울이라든가…. 이 모든 것이 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리고.

마치 눈앞에서 마주한 듯, 어느새 이쪽을 보는 그의 눈빛이 숨이 탁 멎을 만큼 강렬하고 뜨거웠다. 동시에 한없이 온화하며 포근한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 한 줌 남은 죄까지 어루만지고 사하여 주는 거룩한 눈빛이었다.

괜찮아, 재환아. 다 괜찮아. 지금 너랑 나랑 여기에 있잖아. 그럼 된 거야.

저를 향해 부드러이 미소 짓는 얼굴을 담는 검정색 눈동자가 참회와, 희열과, 애틋함에 젖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가득 찬 시야가 눈부셨다. 그 속에서 빨갛게 빛나는 입술이 마이크 가까이 붙었다. 마지막 남은 가사가 울려 퍼질 시간이었다.

I’m your reverb

I’m your reverb

You’re my reverb

You’re my reverb

괴로움과 서글픔이 사라진 자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 아래서 서로의 목을 부여잡고 입술을 부딪쳤던 순간에 느꼈던 것과 비슷했고, 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 하나처럼 엉겨 붙었던 순간에 느꼈던 마음과 닮아 있었다.

아니, 아예 더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나무 계단을 밟아 내려가면 나오는 비밀 기지 같은 합주실. 그곳에서 처음 붉은 입술이 마이크에 다가서고, 흩어지는 한숨 소리가 들리고, 길쭉한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며 솜털 같은 목소리가 퍼지던 그때, 그 찰나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로잡혔던 마음이 아직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떤 비바람, 폭풍우, 해일도 움직일 수가 없는 마음이었다. 세상 가장 무서우면서도 달콤한 저주였다.

그리하여 재환은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 너와 함께한 시간은 짧디짧았을지 모르나, 너의 목소리, 노래, 웃음, 입맞춤, 손길, 심지어 분홍빛 머리칼 끝에서 떨어지던 빗방울까지 내게 너무도 긴 잔향을 남겼음을. 그 잔향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임을.

유한영 너는

내 빛나던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Reverb〉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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